195화 정반합(正反合) (3)
195화 정반합(正反合) (3)
뭔지 모른다. 그건 힘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폭발이 났고, 난 지금 폭발에 휘말려있는 상태지만 정신상태는 명징했다.
대체 뭘까.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원래 안개로 흐릿해야 할 하늘이 맑았다. 태풍의 핵에 있는 것 같았다.
태을헌원신공과 태원지기는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지만 그건 여전히 섞이고 있지 않았다.
난 내 내공을 이렇게 육안으로 보는 게 처음이었다. 내 몸에서 내공을 다룰 뿐이었다. 소용돌이를 보자마자 나는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깨달았다.
“완전히 분리되어있군.”
태풍에는 태을헌원신공과 태원지기의 층이 완전히 나뉘어 있었다. 저건 상극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물과 기름처럼 각자의 독립이었다.
아니, 태풍의 위쪽에는 태을헌원신공이 태원지기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난 깨달았다. 난 합친 게 아니라, 태원지기로 태을헌원신공을 감싼 것에 불과했던 거다. 많은 물로 기름을 가두고 있다고 해도 물과 기름이 섞였다고 표현하는 건 어려울 거다.
그럼 왜 하필 지금 분리되어 나오는 건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건 간단했다. 태을헌원신공이 강해져서 분리된 거다. 극성의 벽을 깬 거다.
다시 태을헌원신공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멈춰서 조용했던 태을헌원신공이 기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원래 운동을 하던 것이 운동을 멈추면 묘(墓)에 들어가고, 죽으면 절(絶) 단계를 거쳐 다시 태(胎)로 형태는 없으나 존재를 갖춰간다. 그건 양(養) 속에서 존재의 확인을 받고 비로소 장생(長生)한다.
태을헌원신공의 극성은 역설적이게도 태을헌원신공의 죽음이었고, 그 죽음 속에서 잉태되고 태원지기라는 양수 속에서 길러져 태어난 거다.
‘신비해.’
물론 이 현상을 정확히 어떻게 설명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다.
내가 과거를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이도 저도 아니었다.
회귀를 하고 나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아는 대로 움직이는 걸 보면서 정밀한 장치처럼 느껴진 거다. 역으로 사람들은 날 무감정한 사람이라 바라봤을 거다. 내가 그들을 무생물로 대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쩌면 난 이 세계에서는 이방인이었다. 전생의 사람도 아니고, 이 현실의 사람도 아닌 셈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과거의 삶 기반 위에서 틔워진 건데, 과거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갈유월이 날 움직인 거다. 그녀는 내 과거의 편린을 보고도 내 현재를 걱정해줬다.
갈유월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했고, 그 진심은 내게 와닿았다. 마음과 마음이 와닿을 때 난 여기 현실에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마음은 전생이 아닌 여기에 있다는 게 증명이 된 거다.
그 소용돌이는 내게 그런 깨달음을 주고, 다시 내 몸안으로 빨려들어왔다. 내 마음에 전에 없던 충만함이 들이찼다.
*
갈유월은 금목환에게 다가갔다. 정말 찰나의 번쩍거림이었다. 그건 어떤 힘도 담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부는 것 같았지만 밀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빛이 걷어진 금목환은 잠깐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린 금목환은, 처음 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갈유월.”
“···아, 응?”
금목환은 갈유월에게 다가갔다. 너무 성큼성큼 다가와서 갈유월이 흠칫할 정도였다.
“내가 만약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또 그것을 방패 삼아 그 뒤에 숨는다면 말이야.”
“응.”
갈유월은 금목환이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원래 특이한 애였으니까 그냥 대답을 해준 것뿐이었다.
“정신차리라고 말해줘.”
“내가, 너한테?”
“응.”
갈유월이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 가장 금목환스럽지 않은 언행이었다. 무엇이든 혼자 해야 직성이 풀릴 그가 어떤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건 지금만큼은 평소와 달리, 금목환의 말에서 내용 이외에 느껴지는 게 있다는 점이었다.
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무튼 진심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니까, 갈유월은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약속할게.”
“좋아.”
금목환은 그리고 싸움이 일어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갈유월에게 다가갔던 것만큼 성큼거리는 걸음이었다. 갈유월은 멍하니 금목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상처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또 무슨 신기를 부린 건지. 건강해보이는 이상 막을 명분은 없었다.
또 지금은 아까처럼 개싸움을 하는 중도 아니었다. 번쩍거리는 빛에 싸움이 모두 멈춰진 거다.
금목환은 무리들이 뒤엉킨 곳으로 계속 나아갔다. 모두가 금목환을 바라봤다. 금목환은 무리 사이에서도 계속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금목환에게는 사람들이 건드릴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그렇게 금목환의 행보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금목환은 계속 걸었고, 어딘가에 우뚝 섰다.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금목환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뭐, 뭐야?”
“사술이라도 쓴 거요?”
금목환이 도착한 곳은 사자신검의 비급이 걸려있는 분지의 중앙이었다. 당연하지만 분지의 중앙 근처에는 시체도 거의 없었다. 들어가는 순간 모두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 때문에.
현재 애뇌산의 금지(禁地)로 취급되는 저 분지의 중앙을 금목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서 선 것이다. 놀랍게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사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금목환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지만, 달려들 수 없었다.
“무슨 짓을!”
누군가가 기함을 했다. 그건 사람들의 싸움을 말리던 종리운의 입에서 나왔다.
표지에 사자신검이라고 적힌 책은 갑자기 불이 붙었다. 어째서 불이 붙었는지는 모를 리가 없었다. 금목환이 삼매진화의 수를 사용한 것이었다.
낡은 책은 마른 나뭇가지만큼 잘 타는 재질이었다. 순식간에 불덩이가 된 책은 금목환의 손바닥 위에서 타올랐다.
“저, 저런 미친···!”
“가주, 정파의 보물을 태우면 어떡하겠다는 건가!”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금목환은 뜨겁지도 않은지 손바닥에 계속 불덩이를 올려놓다가, 주먹을 쥐었다.
푸식.
김빠지는 소리가 나오고 금목환의 주먹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허망한 표정으로 금목환을 바라봤다.
“이건 정파의 보물이 아닙니다. 정파를 해하게 하는 이게 어찌 보물이라 하겠습니까. 이건 이제 사특한 물건입니다.”
금목환은 손바닥을 펼쳤다. 흰색 잿가루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 그걸 어떻게 납득하란 말이오. 우리가 이번 여정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았는지 아시오! 이대로 돌아가면 어차피 우리는 멸문이란 말이오!”
누군가가 외쳤다. 금목환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사람은 금목환이 보자마자 흠칫하며 눈을 깔았다. 금목환은 그의 몸에 흐르는 내공을 보고 어디 중소문파의 사람인 걸 단번에 알아챘다.
“얼마나 피해를 받았습니까?”
“말했지 않소. 거의 괴멸적인···”
“그거 말고. 수치 상으로 환산할 수 있으면 말입니다.”
금목환은 여전히 그를 바라봤다. 중소문파 장문인은 더듬거리면서도 눈을 굴렸다.
“원보 세 개 정도···”
“그건 황금세가에 청구하세요.”
금목환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 중소문파 장문인을 부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들이 보기엔 공짜로 원보 세 개를 받았다는 것으로 보인 거다.
그러나 금목환은 중소문파 장문인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문파나 세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해를 계산해서 황금세가에 청구하세요.”
그 말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황금세가가 그럴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여기 있는 문파는 최소 수백 개다. 그것들의 피해를 모두 보상하려면 대체 얼마나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걸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 아니··· 그게 대체 왜 그렇게 된단 말이오?”
사람들이 금목환의 말에 멈칫했다. 아까까지 치고받았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람에게는 이기심 앞에 굴복하여 눈이 잦게 먼다는 천성도 있지만, 적의를 받으면 적의로 돌려주고, 선의를 받으면 선의로 돌려주는 천성도 있었다.
금목환에게는 작은 것이 그들에게는 컸다. 어차피 이들의 속물근성 때문에 벌어진 싸움이다. 그 속물을 채워주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건 돈 몇 푼밖에 없지만, 인력 피해는 당신들이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건 갚아줄 수도 없고, 누구도 갚지 못할 겁니다. 당신들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당신들이 속죄하시오. 속죄하지 않고 죽는다면 여기서 구천에 빠진 넋에게 할 짓이 못 되니 난 속죄할 기회를 주는 것뿐이오.”
그 말에 지금까지 웅성이던 좌중들이 침묵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은 여기 살아있는 사람들의 친구, 가족, 동료들이었다. 금목환이 그걸 건드리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숙연해졌다.
그렇게 전 중원을 들썩였던 사자신검을 둘러싼 싸움은 끝났다. 다시 싸울 불이 붙기에는, 불 붙을 장작이 없었다. 사자신검 비급을 내가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애뇌산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도망치듯 해산했다. 그들도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낀 것 같았다.
*
어두운 방. 촛불 하나가 어둡게 방을 밝히고 있었다. 중앙에는 작은 협탁이 있고, 두 개의 잔과 하나의 호리병이 있었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자네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군.”
“임시 방편일 뿐입니다. 뭐든지 차있으면 비워지는 게 순리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욕심도 그러하겠지요.”
“임시라도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능력이지.”
종리운이 그렇게까지 얘기하자 난 더 반박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일처리를 한 건 맞으니 말이다. 그러나 종리운도 많은 고생을 했다.
그렇게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을 통제한다는 건 그나마 종리운이니까 가능했던 거였다.
“나는 그러지 못했어.”
“그만큼의 돈이 없으시니까요.”
“그렇긴 하지.”
종리운이 픽 웃었다. 그래도 좀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돈 얘기만 나와도 침울하게 있었을 텐데, 이제 황금세가에서 지원을 계속 받으니 돈에 좀 여유가 생긴 거다.
“물론 황금세가가 돈이 많겠지만, 그래도 좀 부담되는 결정 아니었나?”
“내원주가 알면 기절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자그마치 몇 백개 문파의 재건을 도와야한다. 아무리 돈이 썩어넘쳐나게 많다고 해도 부담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했다.
“근데 전 그냥 준 게 아닙니다. 사업을 하는 거죠.”
“사업?”
“정파를 한데 묶는 사업입니다. 물론 끝까지 이끌지는 못하겠죠. 단 한 번, 마교가 침공할 때 단 한 번이면 됩니다.”
“그게 되겠나?”
“어렵겠죠.”
종리운은 술잔을 들었다. 나도 술잔을 들어 마주쳐줬다. 내 얼굴이 비치는 작은 호수를 한 번에 들이킨다. 목구멍이 뜨겁게 타오르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약관이니까 술 마셔도 되지?”
“그럼요.”
나는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놓고 잔을 탁상에 내려놓았다.
마교는 얼마나 준비했으련지. 우리는 얼마나 준비해야하는지. 전생에서는 여기서 오 년은 지나야 침공했지만, 이미 사건이 많이 바뀐 이상 그대로 벌어지지는 않을 거였다.
나는 이미 많은 걸 바꿨고, 많은 게 바뀐 이상 그걸 바로 잡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는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 될 거였다.
신단회로서 거시적인 정파의 그림을 그리고, 중소문파들과의 대형문파들의 가교 역할을 해줘야 하고,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마교에게 날을 세워야 했다.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것 같군요.”
“응?”
“아닙니다.”
그렇게 오 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