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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214화 (215/225)

214화 극의일로(極意一路) (5)

214화 극의일로(極意一路) (5)

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난 작은 돌 하나 차지 못했다. 그 돌 하나가 무슨 영향을 끼쳐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딱히 과거로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난 적어도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전까지의 내 인생을 확신한다. 기적적인 확률이지만, 난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해왔다. 더 잘할 자신이 없다.

자연이 억지를 부려 날 과거로 되돌린다고 해도, 난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하아.”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게 두어서는 안 됐다.

내가 천유현을 해치우고 돈황에 들어갔을 때였다. 난 옷만 갈아입고 조용히 돈황에서 나와 신강으로 갔다. 그러니까, 그게 내 첫 번째 시도였다.

시간을 다룰 줄 아는데 굳이 시간을 끄는 것도 이상해보였다. 나도 피로감이 안 쌓였다면 거짓말이고. 그냥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천마는 정말 강했다. 내가 전력을 다해 부딪쳐도, 선천지기를 써서 동귀어진을 해보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싸워도, 천마는 이길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안다고 해도, 개미가 사자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내가 안가에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가족들을 돈황의 안가에 잡아두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돈황의 안가에 날 찾아왔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난 가족들이 돈황의 안가로 향했다는 걸 102번째 회귀에서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들이 날 찾아온 게 아니라, 내가 가족들을 찾아온 것이라고 해야겠다.

왜 돈황의 안가에 잡아두려 하냐면, 마교의 침투로는 생각 외로 감숙이 아니라 절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대륙을 삥 돌아 반대편에서 타격했다. 그건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족들이 돈황에 온 김에, 돈황의 안가에 잡아놔야 했다.

한유림이 오면 같이 바로 나가려고 했다. 한유림도 가족들과 거의 차이를 두지 않고 왔으니 말이다.

근데 어째서인가. 왠지 이번 회차는 좀 더 생각해보고 싶었다. 지금 난 너무 초조한 상태였으니까. 사백 번을 부딪쳐서 안 됐으면 초조할 법도 하지 않은가.

난 다시 점검해봤다. 해야 할 것은 전부 했나.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전부 하지 않았나. 마쳐야할 것들은 모두 마쳤나.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난 뒤를 돌아봤다. 난 살짝 당황했다. 문이 열린 곳에는 안가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갈유월?”

바로 입가에 피를 묻히고 옷소매도 뜯어져 있는, 다시 말해 상태가 엉망인 갈유월이었다.

*

묘하다. 아까까지는 빠르게 보였던 한유림의 속도가 너무나도 느리게 보였다. 그 강함도 전혀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자마자, 눈을 찌푸린 건 한유림이었다. 한유림은 한유림대로 놀라고 있었다. 갑자기 선천지기라도 터뜨린 것이 아니면 이렇게 사람이 바뀐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갈유월은 한유림의 품으로 바로 들어와 팔을 잡고 반대로 메쳤다. 쿵, 소리와 함께 땅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컥!”

한유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갈유월은 바로 뒷목의 수혈을 짚었다. 한유림의 몸이 통나무처럼 꼿꼿이 굳더니 곧 풀어져 잠이 들었다.

갈유월은 잠에 든 한유림을 바라봤다. 금목환은 참 죄많은 남자였다. 이런 미인도 홀리고 말이다. 솔직히 경쟁자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금목환은 본인이 봐도 완벽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생각만 하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른 법. 직접 보니 묘한 긴장감과 조급함이 생겼다.

갈유월은 건물까지 걸어갔다. 건물 앞에는 금수린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마 한유림을 기다린 것일 테다. 금수린은 갈유월을 보자마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유월이?”

갈유월은 금수린을 보자마자 바로 그녀의 수혈을 짚었다. 딱히 설득시킬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너.”

금수린은 당황한 표정 그대로 스르륵 잠에 들었다. 갈유월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기감을 살폈다. 갈유월은 신기한 감각을 여전히 경험하고 있었다.

대기 중에 흐르는 기가 보인다고 할까. 어느 곳의 기가 뭉쳐있고, 어느 곳의 기가 약한지도 보였다. 그건 사람 몸에 흐르는 기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갈유월은 금목환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냈다. 그는 한 번 본 무공을 따라할 수 있었다. 왜 그게 말이 안 되냐면, 외형을 보는 것만으로는 신체 내부의 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무공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금목환이 느끼고 있는 감각이 본인에게도 들어왔다는 말이 됐다.

갈유월은 그 감각으로 금목환이 있는 비동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금목환의 내공은 지금까지의 사람들과 다르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녀는 지하로 내려가 긴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열었다. 벽 너머의 금목환이 운기조식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히 금목환이 뒤를 돌아봤다. 금목환은 재밌게도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바로 표정을 숨기기는 했지만 당황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아마 저래놓고 본인은 살짝 놀랐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좀 나왔다.

“갈유월?”

금목환이 일어났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야?”

“···안 되는 곳이긴 하지. 여긴 황금세가의 안가잖아.”

금목환의 말에 갈유월은 할 말이 없어졌다. 정말 오면 안 되는 곳이었나. 괜히 미움 받는 짓을 해버린 건 아닐까, 생각하던 와중 금목환이 말을 덧붙였다.

“근데 진법을 통과하고 온 거야? 상태가 엉망이네.”

“숙녀한테 상태가 안 좋다니.”

“숙녀?”

금목환은 머리를 갸웃했다. 무표정인 게 아주 열 받는 지점이었다. 그럼 스물다섯의 여자가 숙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중원에서는 지학 때 결혼하는 일도 빈번하다. 물론 그건 무림인이 아닌 일반인 기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왜 왔어?”

금목환이 물었다. 갈유월이 냉큼 대답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뭔데?”

막상 멍석이 깔리니 갈유월은 다시 목이 막히는 게 느껴졌다. 이 생선 가시 같은 느낌. 전에 뱉어보지 않았다면, 아마 여기서도 뱉지 못했을 거다.

당연히 고백 대상의 누나한테 뱉는 건 고백받는 당사자에게 뱉는 것보다 쉬우니 말이다. 갈유월이 금수린 앞에서 용기를 낸 건 예행연습을 한 셈이었다.

갈유월은 잠깐 고민했다. 사실 지금 본인의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이왕이면 좀 더 예쁘고 꾸며진, 최소 깔끔하기라도 한 상황에서 고백하면 좋았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왠지, 지금 말해야 될 것 같았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있었다.

갈유월은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금목환을 가리켰다. 금목환은 손가락과 갈유월을 번갈아 보았다.

“널 좋아해.”

“음, 그래. 고마워. 그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생각도 안 한 것 같은 금목환의 대답에 갈유월은 순간 수많은 생각을 떠올려야 했다. 지금 차인 건가. 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생각해줘도 되지 않나. 너무 단호한 건 아닌가 등등.

갑자기 갈유월은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십몇 년간 품어왔던 연정이 저 한 마디에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니 서러웠다. 금목환은 갈유월이 우니까 그제야 당황했다.

“···왜, 왜 우는 거야?”

금목환은 갈유월에게 다가왔다. 갈유월은 뭔가 비참해져서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었지만, 이미 금목환의 손은 자신의 얼굴로 들어와 눈물을 닦고 있었다. 눈물을 닦는 김에 입가까지 내려와 입술까지 닦아줬다.

“나도 널 좋아해. 그러니까 너를 포함한 모두를 지키려고 고생하고 있잖아.”

금목환이 침착하게 말했다. 허나 침착하기만 했지, 갈유월이 듣기에 내용이 영 이상했다.

갈유월은 숙인 고개를 치켜들었다. 금목환의 여실히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본인이 본 금목환 중 가장 표현이 짙은 표정이었다.

“···너 혹시, 바보야?”

“바보?”

금목환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는 표정을 했다. 당연하다. 그가 그런 말을 들어봤을 리가 없었다. 천재라는 소리만 들어봤던 금목환이다.

갈유월은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렸다. 금목환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고백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 아닐까. 솔직히 갈유월도 그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

본인이 금목환에 비해서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어디 폐관수련을 다니고, 장문인과 장로들을 만나고, 무공을 수련하는데 여자가 꼬일 시간이 없었던 것도 맞다. 근데 그런 사람이 존재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 마치 신화 속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 좋아한다는 걸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걸로 받아들이는 건 좀 아니지!”

“···그래? 그럼···”

금목환의 대답에 갈유월은 실실 웃었다. 울다가 갑자기 웃는 갈유월을 보며 금목환의 표정은 더욱 이상해져갔다.

갈유월은 도리어 그게 좋았다. 금목환도 아예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그가 부족한 부분은 감정이었다. 그걸 본인이 메워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했다.

금목환은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제야 갈유월이 아는 금목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상황 파악을 다 했다는 표정이다.

“그렇구나.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거였네.”

“그래. 맞아.”

이제 갈유월도 거리낄 게 없었다. 금목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천천히 열었다. 갈유월은 지금 이 순간보다 집중해본 적은 없었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온 말은 꽤 침착했다.

“안 될 것 같은데.”

“응?”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

난 갈유월의 눈물을 다 닦아줬다. 갈유월은 넋이 나간 듯이 날 바라보고 있다. 내 말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던 걸까.

하지만 나는 갈유월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었다. 이건 몇백 번의 회귀에서도 처음 겪는 경험이라 잠깐 당황했을 뿐, 내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난 천마를 잡는 게 목적이지, 지금 갈유월과 무언가를 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게 난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내 삶은 이성을 제외하고서라도 충만해왔으니 말이다.

금원대의 몇몇 사람들이 사귀는 것도 알고 있고, 심지어 결혼까지 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안다. 근데 난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갈유월이 여전히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때 뭔가, 가슴에서 찌릿했지만 곧 사라졌다.

“응.”

“···그렇구나.”

갈유월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오히려 지금은 울지 않았다. 납득을 했나 싶었다.

그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갈유월이 고개를 팍 치켜들더니 내게 입술을 부딪쳐오는 것이다.

물론 입술을 부딪쳐오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그것보다 있을 수 없는 일은 내가 그녀의 행동에 반응을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난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공기가 흘러서 문에 찾아온 것처럼, 갈유월은 그렇게 내게 온 것이다.

그리고 난 이내 왜 그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갈유월의 입에서 내 입으로, 태원지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처음 느껴본, 그야말로 순수하고 강력한 태원지기였다. 언제 갈유월이 이걸 가지게 됐는지는 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태원지기가 들어오는 느낌은 굉장히 중독적이었다. 부드러운 물결이 내 경맥을 휩쓰는 기분. 난 더 참지 못하고 갈유월의 뒷머리를 잡고 내게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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