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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216화 (217/225)

216화 신기(神器) (1)

216화 신기(神器) (1)

이번에는 다르다. 다르게 살아야 할 거다. 아무도 모르는 사백 번의 인생은 고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걸 버텼나. 그때는 무던한 감정이 도움이 됐지만, 지금으로서는 버티지 못할 것만 같다.

왜냐하면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갈유월과의 추억. 그건 하나뿐이기에 소중하다. 두 개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두 개를 만들면 유일성이라는 가치가 손상되어버린다.

또한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날 구성한다면, 아무하고도 공감하지 못할 잔여물 같은 기억들은 버려야 한다. 애초에 만들지를 말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니까, 마교가 감숙이 아닌 절강으로 오니까 이곳에 있으라?”

“네. 맞습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

금수린과 금월상은 헛웃음을 지었고, 금화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가문들의 식솔들을 우리가 챙겨야지, 절강으로 들어오니까 다 버리고 돈황에 숨어있으라는 거잖냐.”

“아.”

난 내 실책을 깨달았다. 물론 그건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건 협객도 아니었다. 아무리 내 가족들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러면 안 되겠네요.”

“차라리 빨리 보낼 생각을 해야지.”

신기한 일이다. 지난 사백 번 동안 가족들은 똑같은 논리로 내게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걸 무시하고 진법을 밖에서부터 흩어놓아 안에서 나올 수 없게 해놓았다.

그때 그들은 역시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난 그게 틀리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난 그때 내 기준에 따라 행동했으며, 기준의 충족만이 중요했다. 가족들을 위해 행동하는 건 똑같은데, 난 이제 그들의 감정에 더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얼마나 그들의 진심을 지나쳐왔던가. 왜 저들에게 주려고만 생각하고 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 주는 기쁨이란 받는 기쁨보다 큰 것을 말이다.

“그럼 일단 최대한 가문을 방어해주세요. 제가 전쟁을 빨리 끝내볼 테니까요.”

“전쟁을 끝낸다고? 네가?”

“아무리 너라도 그건 좀··· 평화회담이라도 할 참이냐?”

금월상과 금화청은 당연히 불신했다. 한 사람이 전투를 끝내는 건 있을 수 있어도, 전쟁을 끝내는 건 허무맹랑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갔다 왔다. 그들이 모를 뿐이다.

“아무튼, 전 유월이랑 움직일 게요.”

“유월이?”

금수린이 물었다. 심지어 내 옆에서 눈만 또르르 굴리고 있는 갈유월도 날 바라봤다.

“유월이는 우리 세가에 있는 게 낫지 않아? 수석장로님도 계시고.”

금월상이 말을 덧붙였다.

황금세가는 스승님이 있는데다가 진법으로 떡칠이 된 천혜의 요새다. 당장 중원에서 제일 함락시키기 어려운 곳을 고르라면 황금세가일 것이 틀림없다.

“왜 우리 세가에 와? 무림맹으로 가야지.”

금수린이 되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금화청이 짧게 정리해줬다.

“어차피 안사람 될 건데, 우리가 데리고 있는 게 낫지.”

그 말에 나도 살짝 움찔했고, 갈유월은 거의 진동 수준으로 몸이 떨렸다. 금수린은 그 말에 어이없어했다.

“언제 얘기가 거기까지 진행됐대?”

“우리도 우리지만, 가주가 안사람이 없으면 이상하게 보이지. 그리고 내정을 위해 안주인이 필요하기도 하고. 목환이가 워낙 돌아다니니까 말을 안 했을 뿐, 결혼은 시키려고 생각해놨어. 이미 명단도 뽑아놨는데, 뭐, 갈 소저 정도면 나쁘지 않은 혼처지.”

금화청의 대답에 금수린은 할 말을 잃었다. 할 말을 잃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모르는 내 결혼 상대의 명단을 만들어놨다니. 물론 중원에서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의사 정도는 물어봐야 됐었던 거 아닐까.

아무튼 나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둘째형님의 말대로, 가주가 안사람이 없는 건 이상했다. 무인이라 결혼적령기를 벗어나도 누가 흉을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세가의 적통은 가문을 이을 책임이 있는 법이다.

난 무심코 갈유월을 바라봤고, 갈유월도 날 바라봤다. 갈유월은 확 얼굴이 달아올라 반대로 돌렸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거였다.

“아니에요. 제 옆에 있는 게 나을 거예요.”

“···네, 저도 그러고 싶어요.”

나도 나지만, 갈유월도 본인의 의견을 밝혔다. 무림맹에는 알아서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걱정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헤어졌다. 할 수 있는 건 건투를 빌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쟁이 아예 안 벌어지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마치 정해져있는 미래인 듯, 내가 어떻게 발악해도 바꿀 수 없었다. 초인도 결국은 사람이다.

지엽적인 부분을 바꿀 수는 있어도, 절대 수정하지 못하는 게 있는 법이다. 불을 차갑게 만들거나, 바위를 물렁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일들.

난 수레를 타고 가는 형제들을 전송했다. 그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난 가만히 있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

“소림사 가야지.”

“소림사? 소림사는 왜 가는데?”

“내가 말 안 했나?”

감정이 다양해지면서, 나는 요 근래 놓치는 게 좀 많아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갈유월은 날 빤히 바라봤다.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진짜 모름을 알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면도 있구나.”

“응.”

“근데 소림사는 왜 가? 진권 대사를 만나러 가는 거야?”

“아니. 뭐 물건을 가져올 게 있어서.”

“그럼 미리 준비해놓게 서한을 안가에서 보내놓지. 그것도 까먹은 거야?”

나는 갈유월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까먹는 부분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일상적인 부분이다. 그런 일에 관련된 거라면 내가 놓쳤을 리가 없었다.

“굳이 안 보내도 돼.”

“그래? 왜?”

난 갈유월을 보면서 웃어줬다.

“훔치러 가는 거거든.”

내 딴에는 안심하라는 웃음이었지만, 갈유월의 표정은 이상해졌다.

*

지금 남아있는 중원칠종신기는 네 개다. 소림에 있는 멸마선장, 명경. 무당에 있는 수호의. 개방에 있는 풍화륜.

감숙에서 가장 지역적으로 가까운 부분은 소림사가 있는 하남이다. 절강으로 마교도가 들어올 테니까, 하남에서 바로 북경의 개방으로 간 다음, 마지막 종착지로 무당이 있는 호북으로 가면 될 터였다.

“근데 그 칠종신기라는 것에는 무슨 효능이 있는 거야?”

“나도 정확히는 몰라.”

과연 내 감정이 돌아온 것과 청라보패가 관련이 있을까 싶다. 정확한 건 청라보패는 내가 사백 번을 회귀하는 동안 정신을 지켜줬다. 나도 분명 무너지는 순간이 있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정신은 언제나 앞을 바라봤다. 그게 청라보패의 효능이라면, 이건 정말 신기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근데 훔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사정이 있어.”

사정이 있지. 난 몇 백번 동안 남아있는 칠종신기를 순탄하게 가져가본 적이 없다. 종남파가 이상하게 잘 됐던 거지, 소림사와 무당파, 개방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물론 이해한다. 자신들의 보물이니까 주기 싫겠지. 그걸 이해하니까 훔치는 거다.

“애초에 훔친다고 해도, 소림사가 그걸 훔쳐가게 놔둘까? 잡히면 서로 민망해지는데.”

“괜찮아.”

갈유월은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난 이미 칠종신기 절도를 백 번 이상 해온 사람이다. 어디가 방비가 허술한지, 어떤 진법이 걸려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난 질문만 하는 것 같네.”

“내가 안 알려준 게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이왕 한 김에 하나 더 물어봐도 돼?”

“응.”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갈유월은 살짝 머뭇했다. 난 그냥 기다려줬다.

갈유월은 곧 질문을 뱉을 수 있었다.

“왜 날 데려온 거야?”

“응?”

“넌 합리적인 선택만 하잖아. 분명 내 역할이 있다는 건데, 그걸 모르니까 좀 불안해.”

난 갈유월에게 살짝 놀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긴 내가 그녀를 잘 아는 만큼, 그녀도 날 잘 안다는 것이다. 그게 민망하면서도 기뻤다.

난 잠깐 고민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될까. 사실 내가 말하는 건 형이상학적이라 이해시키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딱히 숨길 건 없었다.

지금 그녀는 양질의 태원지기가 충만하고, 내가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선 그게 필요했다.

난 최대한 쉬운 단어들을 고르며 그녀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갈유월은 다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응.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여기서 더 잘 설명할 수는 없는데 말이다. 근데 그때 갈유월이 내 멱살을 잡고 당겼다. 당긴 쪽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있는 쪽이었다. 다시 그녀의 호흡으로 태원지기가 들어왔다.

그러나 설왕설래(舌往舌來)할 시간은 없었다. 여기는 넓은 관도였기 때문이다. 그녀도 바로 얼굴을 뗐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았기에 부끄러운 건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해한 건, 이 정도밖에 안 돼.”

갈유월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난 웃었다.

“정확하게 이해했네.”

나는 그렇게 정확히 본인의 할 일을 인지한 갈유월과 하북까지 걸었다.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아무리 번화한 곳이라도 사람들이 뜸했다.

당장 사람도 직감이라는 게 있는 동물이다.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도 전쟁이 다가왔다는 걸 눈치 챘다는 듯, 다들 조심스럽게 다니는 모양새였다.

그래서인지, 포목점을 찾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다. 나는 녹색 옷을 새로 샀다. 숭산도 산이니까, 그나마 산과 비슷한 색을 골라야 들킬 확률이 적지 않겠는가.

난 그렇게 갈유월을 객잔에 두고 나왔다. 숭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무인들이 아니었다. 그저 부처님께 은공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인피면구와 녹색 무복을 입고 그들 틈에 섞여 가는 중이었다. 경공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그들 틈에 섞여 새치기를 하지 않고 걸어가야 했다.

“정말 전쟁이 벌어지는 건가?”

“그래도 지금 정파 전력이 역대급으로 크다던데. 괜찮지 않을까?”

“그렇겠지. 매일 싸우다가 안 싸우니까.”

천천히 걷다보니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들으며 갈 수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정리된 보고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보고대로 중원 강호에 대한 신뢰를 많이 회복한 것 같았다. 지난 오 년간의 수고가 헛되지는 않았던 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난 이십 년간의 감정을 몰아 받으면서 피로감도 같이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들도 무던해서 넘어갔던 거지, 보통 사람이라면 버티기 힘든 것이었던 거다.

난 초인이나 신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었다.

당장 정마대전만 끝난다면 손을 털고 황금세가에 칩거할 거다. 숭산까지 올라가는 시간도 많겠다. 나는 금분세수 계획을 짜며 올라갔다.

“이제 소림사군.”

“참 높이도 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정문만 통과하면 소림사였다. 난 다시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최대한 일반인처럼 소림사의 정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바로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내게 엄청난 기운이 몰려든 것이다.

‘···이건.’

진법이었다. 어디 나뭇가지로 만든 진이 아닌, 사람으로 만든 진법.

그리고 이렇게 나조차도 압박할 정도의 진법이라면, 소림의 칠십이나한진이 틀림없었다.

미래가 바뀌었다. 누군가, 내가 칠종신기를 훔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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