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한동안의 침묵이 있고 난 후.
“아.”
홍규헌이 신음 비슷한 것을 뱉어냈다.
인상을 찌푸리고 말을 더듬는 등, 평소의 그녀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 마구 나온다.
그만큼 충격이 큰 것이었다.
“안, 안 한다고?”
조아라도 눈을 크게 뜨곤 손을 꼼지락거렸다.
“네, 네.”
원래 이러려고 하긴 했다.
그렇긴 하지만, 오늘 조아라는 아침에 눈을 뜨고 회사에 올 때까지 ‘거절’이란 말을 떠올린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안 한다.’는 말이 나온 건, 애초부터 가로 엔터의 단기 연습생이 된 이유가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다.
“왜…….”
이유를 물어보려던 홍규헌이 고개를 저었다.
‘농담은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장난치는 애가 있을 리가.’
그 증거로, 조아라는 굉장히 송구한 듯이 시선을 자꾸만 내리려고 했다.
미안해하는 게 분명하다.
한 달 동안 가로 엔터에서 트레이닝을 받고도 거절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조아라로서도 거북한 것이겠지.
“그래.”
홍규헌은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아라의 결단을 존중하는 뜻이기도 했고, 굳이 그녀가 묻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이 있으니까.
“왜?!”
봐라.
성필이 발작하듯이 대신 질문해주지 않았는가.
“왜, 왜!”
성필은 조아라의 양어깨를 잡고 멱살을 흔들 듯이 흔들었다.
그녀의 고개가 앞뒤로 까딱거렸다.
“이유가 뭐야!”
다그치는 것 같기도 했고, 비굴하게 답을 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홍규헌은 성필의 반응이 의외였다.
성필보다 한구인이 당장 튀어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필은 조아라에게 그다지 애착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었다.
“어, 어, 이유?”
조아라는 당황해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의 표정은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마주한 탐험가와 같이 경악에, 또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숨기고 싶었지만, 조아라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저 얼굴이야말로 조아라가 가로 엔터에 들어온 이유나 다름없다.
“그냥, 그냥 나랑 안 맞는 거 같아서…….”
그 대답에 성필은 허탈한 태도로 그녀의 어깨를 놓고 뒷걸음질 쳤다.
‘나랑 안 맞는 것 같다’라는 대답에 성필이 또 뭐라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한 달이나 아이돌로서 트레이닝을 받았는데도 안 맞는다면, 이제 정말 답이 없다.
“그렇, 군요.”
그때 한구인이 모든 것을 체념한 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멀쩡했으나 미약한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저는 조아라 씨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한구인은 조아라가 거절할 가능성도 고려했다.
절대 일어나지 않길 바랐으나, 일어났으니 미리 준비한 답을 내놓는 수밖에 없었다.
한구인의 결의가 서린 말에 조아라는 또다시 당황했다.
“아니, 뭐…….”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시든, 조아라 씨는 꼭 좋은 결과를 얻으실 겁니다.”
한구인은 코를 훌쩍이며 뒤로 돌았다.
“한 달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잡을 새도 없이 그가 사라졌다.
진짜 잡을 수 없었다.
성인 남자가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데 어떻게 잡는단 것인가.
“…….”
불편한 정적이 1층을 감쌌다.
“뭐어, 그렇게 됐네.”
홍규헌이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장실에서 조용히 통보하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나댔네. 당연히 네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고 말야.”
“아라야!”
리카가 조아라의 왼쪽 팔에 매달렸다.
“왜애? 왜 안 하는 거야? 재밌어했잖아!”
“맞아 너 열심히 했잖아!”
성필도 리카와 합세해서 조아라의 옆에 붙었다. 마치 사람을 납치하려는 모양새였다.
“조아라, 다시 한번 생각해주면 안 돼? 뭐 불편한 거라도 있었어?”
성필의 애절한 설득.
“못 보내! 안 보내!”
리카의 어리광.
양쪽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파도에 조아라는 당황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토록 필요로 해주는 일은 살면서 한 번도 없었다.
“드디어 친구가 생겼는데!”
그 발언에 백설하가 동태눈이 되어 리카를 노려보았다.
리카가 곧장 수정했다.
“드디어 또래 친구가 생겼는데!”
“전부 그만해. 아라가 곤란해하잖아. 리카 떨어져. 박 이사도 애 잡고 뭐 하는 짓이야.”
조아라는 성필을 보았다.
기쁘다.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고 험한 말을 퍼부은 데다, 단기 연습생으로 들어오는 것마저 반대한 인간이다.
그런 성필이 슬픔을 덕지덕지 얼굴에 바르고 자신에게 매달린다.
통쾌하지 않을 리 없다.
분명 그럴 텐데…….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 아, 아니. 필요하겠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갈까? 응? 그럴까?”
성필이 저러는 모습을 보니,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아라야아아앙! 같이 회사에 있자앙! 제발! 제바알! 내가 잘할게에!”
“아라야 너 진짜 재능 있거든? 너 아이돌 되면 진짜 진짜 인기 많을 거야. 물론 댄서나 안무가도 잘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주라.”
이제 성필은 그 짜디짰던 칭찬까지 마구잡이로 뱉어냈다.
절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단 마음이 느껴졌다.
조아라는 성필이 백설하를 어떻게 데려왔는지 알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온갖 부끄러운 말을 외쳐대며 설득했다던가.
만약 설득에도 급이 있다면, 성필이 비굴하게 어리광을 피우는 게 더 급이 높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조아라의 입꼬리가 자꾸만 움찔거렸다.
“한 달 만에 이렇게 실력 올라가는 거 아무나 못 해! 빈말이 아니라 진짜야!”
성필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에 조아라의 귀가 붉어졌다.
“설하 씨도 뭐라고 좀 해주세요!”
“음, 음……, 네. 아라 연습 열심히 해요.”
죽어도 잘한다는 말은 안 나왔다.
성필은 백설하의 전문가 정신에 눈치를 주고, 다시금 조아라에게 매달렸다.
“이유! 구체적인 이유라도 들려줘! 정확히 뭐가 안 맞아? 응?”
“둘 다 그만하라…….”
홍규헌이 물리력을 동원해서 성필과 리카를 제지하려던 때.
“아, 알았어요……. 할게요…….”
“……?”
갑자기 조아라가 승낙해버렸다.
홍규헌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멈칫했다.
반면, 성필과 리카의 반응은 빨랐다.
“진짜? 얏타(해냈다)!”
“아라야 정말 정말 고맙다. 절대 후회 안 하게 해줄게.”
쿵쾅쿵쾅!
한구인이 2층에서 날 듯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계단이 부서질 것만 같은 발소리다.
“정말이십니까?!”
“어, 네. 할게요. 해볼게요.”
“잘 결정하셨습니다!”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다.
홍규헌은 기뻐서 날뛰는 셋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등신들인가?’
조아라가 설득됐다고 좋아라 하는 꼴이라니.
인간의 진로(進路)를 고작 팔에 매달리는 정도로 바꿀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조아라는 처음부터 받아들일 작정이었을 것이다. 아마 가로 엔터 사람들을 놀려먹으려고 ‘안 한다.’는 답을 했겠지.
‘괘씸하네.’
어른을 놀려?
하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한구인과 성필을 보니 조아라를 추궁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 * *
“하아.”
조아라가 떠나간 뒤, 성필이 지쳤다는 듯 의자에 축 늘어졌다.
“비위 맞춰주기 힘드네.”
성필은 조아라와 한 달을 지냈다.
전생에서는 몇 년을 알고 살았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가로 엔터에 들어왔는지도 말이다.
‘내가 매달려주는 꼴이 좋아 죽겠단 얼굴이었지. 연습생 테스트 때 일이 그렇게 마음에 담아둘 거였나?’
자신이 당황하는 꼴을 보겠다고 최종 평가 때 그토록 노력한 것인가.
쉽지 않았을 텐데, 독종도 그런 독종이 없다.
‘물론, 내가 빌어서 들어온 것만은 아니겠지.’
조아라는 누군가 자신을 잡아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회사 생활이 재미없었다면 최종 평가를 저토록 열심히 준비했겠는가.
학원 스케줄도 모두 소화해낼 수 있겠는가.
절대 아니다.
조아라는 흥미를 느낀 것이다.
‘이제 회사에 들어왔으니까 맞춰주는 것도 끝이야.’
냉혹하고 무도한 매니저, 박성필로 돌아갈 때다.
그래도…….
‘기쁜 날, 끝까지 기쁘게 해줘야지.’
성필은 조아라에게 문자를 보냈다.
함께 하게 되어 기쁘다. 너는 재능이 있다. 앞으로도 활약 부탁한다. 같이 높이 올라가도록 노력하자.
그런 내용의 것이었다.
* * *
“나 왔어!”
거실까지 들리도록 크게 인사했다.
“밥은?”
거실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목소리로 어머니가 물어왔다.
“안 먹어!”
조아라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숨만 쉬었다.
“푸흐흐흨.”
발을 동동 구르며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 침대에서 데굴데굴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웃었다.
“이유가 뭐야!”
큭큭 웃으며, 조아라는 성필이 했던 말들을 되새김질했다.
웃기다.
처음 봤을 때는 그토록 고자세였던 성필이 안달이 나서 설득하려는 꼴이라니.
“하아…….”
웃음이 그치고도 오랫동안 기쁨이 가슴 안에 남아 있었다.
조아라는 오랜만에 자존심이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춤에서만큼은, 그녀의 자존심은 이미 세워진 성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과제라도 반드시 통과할 수 있단 믿음이 있었기에, 칭찬이든 비난이든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진짜 돼버렸네, 연습생.”
그러나 가로 엔터에서는 달랐다.
조아라는 처음 겪어보는 도전에 스트레스를 무지막지하게 받았다.
실패하면 어쩌지.
비웃음당하면 어쩌지.
위장이 쓰릴 만한 불안에도 조아라는 묵묵히 달렸다.
오직 성필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성공했다.
아, 성공의 기쁨이여.
그녀가 ‘안 한다.’고 했을 때 일그러진 성필의 얼굴은 걸작이었다.
말로 표현 못 할 희열이 전신을 휘감았었다.
띠링.
문자가 왔다.
성필이었다.
조아라는 그것을 꼼꼼히 읽었다.
“뭐야아.”
성필이 칭찬을 잔뜩 써서 보냈다.
조아라는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질리지 않는다.
성필이 당황했을 때만큼 기뻤다.
‘이런 거 안 보내도 이미 연습생 될 건 확정이잖아.’
조아라는 싫증도 내지 않고 다시금 그녀가 연습생을 거절했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비굴하기까지 한 성필의 매달림.
재밌다. 재밌긴 했지만, 조아라는 왠지 가슴이 아려오는 느낌도 받았다.
어쩌면 그 기묘한 감정 때문에 연습생이 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
“재밌었어.”
한 달 동안.
떠올려보면 본인의 능력에 좌절하고 괴로웠을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충실감 있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리카랑 백설하.
처음엔 라이벌처럼 생각했지만 마지막 일주일을 함께 보내고 생각이 바뀌었다.
리카는 조금 귀찮을 정도로 붙어와도 같이 있으면 즐겁다.
백설하는 어색한 언니 같다.
……사실 아직도 어색하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사장님은 잘 모르겠어. 또 한 이사님은…….’
한구인은 항상 따스하게 조아라를 대해주었다. 그녀의 엄마도 그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챙겨주지는 않았다.
배는 안 고픈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
컨디션은 괜찮은지.
조아라는 유치원생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그다지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구인이 엄마 같았다면.
‘아저씨는…….’
때때론 침묵으로 엄히 대하고, 그러면서도 믿음과 기대를 아끼지 않고, 잘했을 때는 칭찬도 해주는.
조금 우스운 비유지만 성필은 아빠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