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장하양의 걸음은 가벼웠다.
평소에는 집에 돌아갈 즈음에는 힘이 모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주었던 동네의 어두운 길도.
을씨년스러운 주홍색 가로등도.
감히 장하양의 기분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오늘은 편하게 잘 수 있겠다.’
허름한 갈색 벽면 집들이 가득한 주택 밀집 지역.
그 건물들 중 하나가 장하양의 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웃으면서 인사했다.
“이거 카드값 보라고! 이걸 당신이 안 썼어?”
“내가 쓴 거 하나도 없다고! 네가 살림 못 산 걸 나보고 어쩌라고?!”
장하양의 웃음이 꺼졌다.
그녀는 조용히 신발을 정리하곤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에이 씨 이놈의 집구석!”
장하양의 아버지가 거실문을 밀어버리듯 열고 나왔다.
“다녀왔습…….”
아버지는 대답도 없이 장하양을 흘끗 보곤 그냥 집을 나갔다.
거실에선 한탄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하양은 어머니에게도 다녀왔다고 인사했으나 답은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씻은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못 살아! 이걸 나보고 또 어쩌라고!”
거실에선 어머니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장하양은 억지로 그 말을 무시하며 이어폰을 찾았다.
빨리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또 불행해질 테니까.
‘여깄다.’
이어폰을 급하게 꼈다.
댄스곡을 선택하고 소리를 크게 키운 다음 침대에 누웠다.
장하양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음악만이 들렸다.
‘아, 맞다.’
가방에서 조심스레 튤립을 꺼냈다.
방에는 튤립을 꽂아둘 만한 게 없었다.
찾으려면 거실로 가야 하는데…….
어머니가 주무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장하양은 튤립을 쥐고 계속 보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게 이런 걸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행복한 애야.’
세상에 꿈을 꾸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하양은 꿈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니 분명 행복할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웃어야지.’
행복한데 힘든 티를 내거나 안 좋은 말은 할 수는 없다.
정말로 불행한 사람들에게 실례일 테니까.
자신은 행복하다.
비록 꿈에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이 3개월도 남지 않았고.
밥도 잘 못 먹고 다니는 데다가.
집에선 부모님이 항상 싸우시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이거 봐.’
자신에게는 이런 멋진 선물을 주는 사람까지 있지 않은가.
이런데도 슬퍼하며 삶을 원망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헤헤.”
평소에는 이렇게 자기암시를 할 때면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됐다.
심장으로부터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것 같다.
장하양은 잠들기 직전까지도 튤립을 바라보았다.
* * *
“저희 배우도 들여보는 거 어떨까요?”
“드디어 돌아버린 건가?”
홍규헌이 돌았냐는 뜻으로 검지를 관자놀이 옆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그렇겠죠. 그냥 해본 말이에요.”
“박 이사 혹시 그런 사람 아니지? 막 흥미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람. 아이돌에만 집중해야지, 다른 데 관심 두면 곤란해.”
“그냥 해본 말이라니까요.”
“연습생 안 찾고 연기 학원만 계속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언제 제 신뢰도가 이렇게 낮아졌는지 모르겠네요…….”
요 며칠 동안 성필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장하양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미래의 광경을 보기 전이라면 몰라도, 봐 놓고도 무시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일단 장하양이 배우 지망생을 그만두도록 해야 하는데…….
‘하양 씨는 배우 하면 실패한다니까요!’
장하양을 설득하려면 그런 말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설득의 강약만 있을 뿐, 결국은 배우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 나와야만 한다.
‘어떤 인간이 그딴 말을 곧이곧대로 듣겠냐. 심지어 만난 지 며칠도 안 된 인간의 말을.’
그렇다면 성필이 직접 케어해주는 건 어떨까?
그나마 이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지금 내 영업력이면 알음알음 장하양의 인지도를 높여가는 것도 가능해.’
문제는 성필이 가로 엔터 소속이란 것이다.
따로 시간을 내서 그녀의 매니저 역할을 수행한다?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은근슬쩍 홍규헌에게 배우를 들일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는데…….
‘미쳤지 내가. 그냥이라도 할 말이 아닌데.’
최근 연습생 탐색이 지지부진해서 자존감이 집을 나가버렸다.
홍규헌을 보면 괜히 미안해지고 그런다.
장하양에 대한 걱정, 홍규헌을 향한 미안함이 합쳐져 배우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왜. 이젠 연습생도 모자라서 배우 후보까지 발견한 거야?”
“아니요…….”
사실 효율성을 따지자면 아이돌 메이킹보다 배우 매니지먼트에 힘을 쏟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성필은 히트할 드라마나 영화, 연극을 전부 꿰뚫고 있다.
미래의 지식을 활용하면 영업도 어려운 건 아니었다.
아니, 굳이 회귀했단 이득을 보지 않더라도 현재의 인맥만으로도 파고들 구석은 많았다.
‘……아니. 지치지 말자, 박성필. 어떻게 연습생이 딱딱 발견되고 그러겠어? 원래 보석은 숨겨져 있는 법이야.’
아이돌 프로듀싱은 성필의 꿈이다.
고작 몇 개월 과정이 더디다고 벌써 한눈팔면 되겠는가.
장하양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는 꾸준히 고민하면 언젠가 답이 나올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자.
“우리 박 이사 열정이 아주 넘친다. 배우에 관심 둘 시간도 있고 말이야. 응? 너무 보기 좋아.”
“요즘 들어 사장님 까칠해지신 거 같아요. 옛날에는 저한테 더 친절하셨는데.”
“그만큼 더 친밀해졌단 거지.”
친밀하지 않았을 때가 더 좋았을지도…….
“저번에 그 애지? 나랑 닮았다는 애.”
“한 이사님한테 들으셨어요?”
“나한테 숨기기라도 하려고 했어?”
“죄송합니다. 보고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아냐. 긍정적인 반응도 안 나왔다면서. 그런데 백설하 정도로 느낌이 확 오진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분이 배우를 목표로 하고 있거든요. 아이돌에는 관심도 없으시대요.”
“그래서 배우로 데려오고 싶으시다? 그냥 네가 아는 배우 기획사나 소개해줘.”
“…….”
“왜 울상이야.”
홍규헌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성필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데려오고 싶어? 거절당해서 상심했어?”
“데려오고 싶다기보다는…….”
“보다는?”
“하아, 네. 한번 사장님께 보여드리고 싶긴 해요. 당연히 배우가 아니라 아이돌로서요. 그런데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성필은 타인의 지혜를 빌리기로 했다.
혼자 끙끙 앓아서 답이 나올 주제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애는 배우가 꿈이라고 했지?”
“네.”
“절박해?”
“글쎄요. 절박한지는 모르겠네요. 필사적인 것 같기는 한데요.”
미래의 장하양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5년을 버텼다고 했다.
그리고 미래의 성필은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성필의 지원이 없었다면 장하양은 1, 2년 만에 도전을 그만뒀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꿈이다 뭐다, 쉽게 그런 말을 입에 담곤 하지. 실상은 그렇게까지 갈망하진 않아. 죽어도 이것밖엔 없다, 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죽을 만큼 힘들면 꿈이건 뭐건 포기하는 게 당연하죠.”
“진짜 꿈이면 목숨이라도 걸 수 있어야지. 아니, 이걸 안 하면 진짜 죽겠다 싶은 게 꿈이지.”
“가난한데도 꿋꿋하게 도전하는 정도면 절실한 거 아닌가요?”
“그 길 외엔 모르는 인간이 대다수야.”
공무원 시험에 몇 년을 쏟았다.
유명 배우가 되기 위해 10년 넘게 노력했다.
승진하려고 온갖 고난을 참아왔다.
그런 식으로 단지 고통을 참으며 추구해 나간다고 꿈은 아니다.
“다른 길을 가는 게 두려우니까 포기하지 않는 거지. ‘이거 외엔 없다’가 아니라 ‘이거 안 하면 죽을 거야’가 돼야 해. 타인의 정체성이나 가치 기준을 빌린 주제에 자기 꿈인 줄 아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막말로 지금 박 이사한테 100억 주고 장사해보라고 하면 할 거잖아?”
“제 꿈은 아이돌 프로듀싱인데요.”
“……이럴 때는 맞장구 쳐줘야지.”
“프로듀싱 안 하면 죽을 거예요.”
“거짓말. 방금 배우 들이자고 했잖아.”
“아.”
그렇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제안에 응할걸?”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요. 그럼 그분을 어떻게 설득할까요?”
“100억을 줘야지.”
“네?”
성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주식 샀다는 걸 알고 계시나?’
성필은 회귀하자마자 몇 개월 뒤에 15배 가까이 폭등하는 주식에 1억을 넣어뒀다.
설마 홍규헌은 성필의 자산조사까지 마친 건가?
부자는 무서워…….
“박 이사의 설득이 100억의 값어치가 있으면 돼. 100억을 가진 정도로 안심이 돼야지. 꼬셔. 꾀어내. 넌 반드시 성공한다. 내가 성공시킬 거다. 못하면 내가 책임지겠다.”
“고작 말만으로 어떻게요.”
“당연히 말만으로는 힘들지. 그러니까 행동도 필요해. 박 이사 그런 거 잘하잖아. 간이랑 쓸개 다 빼줄 것처럼 말하는 거.”
되게 쉽게 말하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사기꾼 같잖아요.”
“다른 길도 있다는 걸 보여줘. 그리고 그 길에서 떨어져도 괜찮다고 계속 안심시켜주고. 요컨대 칭찬이랑 위로를 자꾸 해주란 거야.”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조언이지만, 성필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감이 오네요.”
“도움이 됐어?”
“큰 도움은 안 됐어요.”
“…….”
“근데 고민해봐야 쓸모없단 건 알겠어요. 가서 말이라도 한 번 더 해볼게요.”
사장실을 나오려던 성필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도 꿈이 있으세요?”
“꿈은 없고. 적당히 행복하게 살고 싶어.”
참으로 담백한 인생관이다.
* * *
장하양은 숨을 헐떡이며 땀을 닦았다.
이제 가을이라는데 햇볕은 도저히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손부채를 부쳐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버스 탈까…….’
1200원이면 삼각김밥이 하나다.
장하양은 땀에 젖은 자신의 옷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땀 좀 흘리면 어때.’
집에 도착할 시점에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매일 걸어 다녀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장하양은 걷는 게 운동이란 말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밥을 제대로 안 챙겨 먹는단 사실은 꿈에도 잊은 채로.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매칭됐다.’
아르바이트 대타를 구하는 어플이다.
그녀는 단역이든 뭐든 상관 않고 여러 오디션을 보았다.
정기적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혹시나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 거절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장하양은 짧게 대타 일만 해서 돈을 벌었다.
‘새벽. 6시간. 5만 원 정도네.’
장하양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누구지?’
어떤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장하양의 집을 찍고 있었다.
장하양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지나치지 않고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남자가 장하양을 보았다. 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외엔 반응이 없었다.
장하양은 얼떨떨해져선 집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웬일로 밤에 일하시는 아버지가 깨어 있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머리를 싸맸다.
“엄마. 밖에 누가 사진 찍고 있어요.”
두 분 다 대답이 없었다.
장하양은 불길함을 느꼈다.
공기가 무거웠다.
계절을 착각한 매미 한 마리가 밖에서 울고 있었다.
장하양의 턱선을 따라 땀이 흘러 떨어질 때, 어머니가 짜증 난 투로 말했다.
“집 내놨어.”
“……네?”
집을 내놨다.
무슨 말일까.
“경매에 내놔서 사진 찍으러 온 거야.”
20년 동안 산 집이다.
허름하긴 해도 애착이 있었다.
집을 내놓은 이유는 대충 안다.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돈, 빚, 카드값, 대출, 그런 것으로 싸웠다.
하지만 그런 건 장하양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 가는데요……? 저희는……?”
집을 팔면 빚을 전부 갚을 수 있긴 한가?
만약 안 된다면, 가족들은 어디로 가서 살지?
살 곳을 잃는다는 원초적인 공포가 장하양의 심장을 옥죄었다.
“하양아.”
장하양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웬일인지 부드럽기까지 했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았다.
“너 돈 모아둔 거 있지? 엄마가 급해서 그런데, 그거 좀 쓰자.”
아까까지만 해도 장하양의 몸은 뜨거웠다.
그런데 이제는 싸늘하게 식어서 추울 지경이다. 식은땀이 그녀의 등허리를 적셨다.
“어, 엄마. 그거, 그거는…….”
“돈 생기면 줄게. 이자도 쳐서.”
장하양은 고등학생 시절을 아르바이트로 보냈다.
미성년자이기에 돈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때로는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돈을 모았다.
성인이 돼서 연기 학원에 다니기 위함이었다.
그마저도 1년 겨우 다닐 정도의 돈밖에 못 모았다.
1년 동안 꿈에만 온전히 투자할 자금이다.
그 돈도 거의 다 떨어져서, 이제는 4개월간 쓸 돈 정도만이 남았다.
그것마저 뺏기면…….
“우리 딸. 엄마가 부탁 좀 할게. 응?”
어머니가 이제껏 보여주지도 않던 미소를 보인다. 장하양은 고개를 떨구곤 더듬더듬 말했다.
“학원…… 다니고…… 나 쓸 돈인데……. 1년만 하기로 했잖아요……. 이제 몇 개월 안 남았는데…….”
“그깟 거 뭐라고 그래!”
갑자기 아버지가 소리치며 맥주캔을 던졌다.
장하양은 너무나도 놀라서 다리 힘이 풀렸다.
공포에 떠는 딸에게, 아버지는 잔뜩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거 배우인지 뭔지 돈도 안 벌리는 거 뭣 하러 계속하려고 그러냐고!”
아버지가 틀어둔 채널에서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거실을 울렸다.
“집안이 중요하지 네 그게 중요해? 돈 그딴 거 또 벌어서 다니면 되지! 네 어미가 자식한테 부탁하는데, 쯧쯧. 내가 잘못 키웠다, 잘못 키웠어!”
“…….”
초등학생 시절, 장하양은 국어 시간에 처음 연극을 해보았다.
다른 아이들이 대충대충 배역에 임했는데 반해, 장하양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다.
선생님이 칭찬해주셨다.
공부도 못했던 그녀였고, 가정에선 칭찬의 조각도 받아보지 못했기에, 너무나도 기뻤다.
그때부터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일하게 칭찬받은 장기였으니까.
“고등학교 나왔으면 취업이나 할 것이지 뭔 배우 나부랭이를 처한다고 지랄이야. 연기도 그거 인성이 돼야 하는 건데, 부모 부탁 단칼에 거절하는 꼴에 잘도 배우를 하겠다. 아니, 뭐든지 잘하긴 하겠냐? 내가 너 키우느라 들인 돈이 얼만데 고작 몇백만 원이 아까워? 자식이면 부모한테 빚 갚을 생각을 해야지, 쯧.”
빚.
장하양의 부모에게 양육이란 노동이었다.
그러니 자식인 장하양은 빚을 갚아야만 한다.
그 속뜻을 파악한 장하양은 새삼 충격받지 않았다. 그녀의 일생이 이러했으니까.
장하양은 핸드폰을 꺼내 은행 어플을 켰다.
손이 떨려서 만지는 게 힘들었다.
“보냈어요…….”
부모님은 고맙단 말을 하지 않았다.
장하양은 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프링 나간 침대에 누워 심호흡했다.
‘괜찮아.’
돈이야 다시 모으면 된다.
오히려 잘 됐다.
힘들더라도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하자.
빡세게 모아서 학원에 다니자.
온전히 연기에 집중하자.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는 것만 해도 어디야? 부모님이 일하라고 하지 않는 것도 행운이잖아. 세상엔 안 그런 애들도 많아.’
자신은 불행하지 않다.
힘들지 않다.
슬프지 않다.
“흑…….”
이를 꽉 물고 흐느꼈다.
울음소리를 내면 또 아버지가 화낼지도 모른다.
‘나는 힘들어. 슬퍼. 불행해.’
이제껏 강제로 무시하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막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장하양은 몹시 급박하기라도 한 태도로 창가에 다가갔다.
창가에 놓인 작은 밥그릇 속, 줄기가 잘린 튤립이 담겨 있었다.
그릇 안에 세워지지 않아서 조금 잘라냈었다.
햇빛도 잘 안 드는 방 안에 둬서 그런가, 아니면 수돗물이라서 그런가, 튤립은 벌써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보라색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디어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니, 꼭 그러길 바랄게요.’
성필이 그렇게 응원해주었다.
장하양은 튤립을 보며 간신히 흐느낌을 잠재웠다.
여느 사람들처럼 가족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싶다.
힘들다고 말하고 싶다.
고민을 말하고 싶다.
의지하고 싶다.
위로받고 싶다.
그게 너무 큰 바람일까?
‘죽을 거 같아…….’
부정적인 감정이 머릿속에 쌓여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출구 없이 모이는 음식물 쓰레기처럼, 그녀의 마음은 썩어 곪아갔다.
‘죽을 거 같…….’
작은 감옥에 갇혀 세상 전체가 자신을 욕하는데, 자신은 세상을 향해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기분.
홀로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버림받은 것만 같다.
‘죽을…….’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장하양 씨?]
성필이었다.
[학원 언제 마치세요? 기획사 일로 한 번 뵐 수 있을까 싶어서 연락드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