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4화 (34/760)

#034화

소원.

굉장히 생소한 단어다.

술자리에서 ‘흑기사 했으니까 소원 들어줘라!’라고 할 때 외엔, 다른 사람이 쓰는 것도 들은 적 없던 말이다.

“소원이라니까 무섭잖아. 뭔데?”

“제가 가로 엔터 연습생 될까 말까도 몰라서 지금 말하긴 부끄러워요. 쫌 나대는 거 같아서요. 아! 거절해도 되는 거예요.”

“거절해도 되는 거? 별로 중요한 건 아니구나. 갑자기 나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명품 사달라는 거 아니지?”

“난이도는 비슷하려나.”

“지금 거절할게.”

“아 왜요!”

옥신각신한 끝에 수락해버렸다.

거절해도 된댔으니까 딱히 부담은 없었다.

학원으로 가는 길, 장하양은 쉬지도 않고 이야기를 했다.

리카도 성필과 차에 타면 말을 많이 하는데, 장하양은 리카와 느낌이 달랐다.

리카는 듣는 사람을 고려해서 주제를 선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혼자 말하고 혼자 떠드는 데 반해, 장하양은 성필과의 공통 관심사를 찾으려고 계속 노력했다.

덕분에 운전하는 길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슬슬 물어봐도 되겠는데.’

의지를 다지려고 핸들을 꽉 잡았다.

“배우에 미련은 없어?”

“고등학생 때부터 오디션장 뽈뽈 쫓아가고 그랬는데 왜 없겠어요.”

잠깐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

성필의 마음이 무거워지기 전, 장하양이 쾌활함을 가득 담아 말을 이었다.

“그래도 천천히 미련 접어보려고요. 상황이 상황이기도 했고, 계속할 여건이 안 됐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죄책감 일절 안 가지셔도 돼요.”

“나 배려해서 하는 말이지? 막 원망해도 돼. 들어줄게.”

“오히려 지금이 좋아요.”

장하양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정확한 속내는 모르겠으나, 성필도 한시름 던 기분이었다.

그녀를 미래의 고통 속에서 구해낸 것도 큰 성과인데, 본인이 괜찮다고 말해주니 더욱 다행이었다.

“그거 알아? 리카도 원래 배우 하려고 했어.”

“정말요? 그런데 왜 갑자기 아이돌로…… 아. 스카웃 됐구나? 원래 KS 엔터 연습생이었다면서요. 리카가 귀엽긴 하죠.”

“내가 해보라고 했어.”

“리카한테요? 왜요?”

“아이돌이 더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벌써 2년 됐나. 까마득하네.”

“……으음, 그렇구나. 저랑 비슷하네요.”

“둘이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대화가 끊겼다.

어느새 성필은 장하양이 대화를 이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성필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하양이 다시 질문을 던지자 안심되기까지 했다.

“언니한테도 이사님이 아이돌 다시 해보라고 했다면서요.”

“응.”

“그 영상 봤어요.”

“조아라 걔가 그거 아직도 안 지웠어? 진짜 나중에 핸드폰 뺏든가 해야지, 맨날 놀림 받아서 못 살겠다.”

“영상 보니까 이사님 완전 진심이던데요.”

“뭐, 그랬지. 설하 씨한테는 고마운 마음뿐이고. 직장까지 관두고 오셨…….”

“저 왜 배우 하려고 했는지 말했었어요?”

장하양이 성필의 말을 끊었다.

“어? 아니. 못 들었는데.”

“초등학생 때 선생님한테 연극 잘한다고 칭찬받았어요.”

“그런 이유로? 와, 선생님들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하긴 하구나.”

“그거 때문만은 아니고요. 저 중학생 때 집 근처 대여점이 망했었거든요? 만화책을 엄청 싸게 팔았어요. 눈에 띄는 거 한 권 집어왔는데요. 그 주인공 꿈이 배우였어요. 아니, 진짜 너무너무 재밌는 거예요!”

“제목이 뭔데?”

“유리구두요. 거짓말 하나도 안 치고 백 번도 넘게 돌려 본 거 같아요. 주인공이 연기 잘하려고 노력하는 게 너무너무 감동적이고 볼 때마다 눈물 나요. 걔가 성공하면 저도 성공한 거 같고. 주인공이 슬퍼하면 육성으로 응원하기까지 했다니깐요? 힘내! 막 이러면서.”

“우리도 꼭 성공하자.”

“이사님이 계신 데 당연하죠. 꼭 성공해요.”

“같이.” “함께.”

“힘내자” “노력해요.”

두 사람의 말이 겹쳤다.

둘은 깜짝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차가 떠나가도록 웃었다.

* * *

성필은 퇴근하자마자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오늘은 장하양과 학원 돌아다니기만 했다.

상담하고, 테스트받고, 다시 상담하고.

‘진짜 노베이스예요. 시간 오래 걸리겠어요.’

‘그냥 완전 초심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트레이너들은 하나 같이 그리 말했다. 그리고 시험 삼아 잠시 트레이닝을 해보곤.

‘보통은 이렇지가 않은데…….’

‘감이 전혀 없으세요.’

‘꽤 오래 걸릴 겁니다. 데뷔가 언제라고요?’

‘살면서 이 정도인 애는 첨 보네.’

마지막 말은 조아라네 학원의 트레이너, 백민정이 했던 것이다.

친한 사람에게 격 없이 들은 평가라서 더 마음을 후벼팠다.

“으아아아악!”

성필은 침대를 굴러다니면서 고성을 내질렀다.

본인이 들은 말이 아닌데도 창피함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장하양이 타인에게 그런 평가를 받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연기에서 실패했던 이유가 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재능이 없던 거였나?’

배우로 성공하려면 그냥 연기만 잘해선 안 된다. 연기 잘하는 사람이야 대한민국 땅에 널리도록 있다.

괴물 중에서도 거르고 거른 사람들만이 빛을 본다. 1% 중에서도 1%인 것이다.

심지어 하늘의 도움까지 필요하니,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하양이는 재능조차 없어서…….’

성필도 댄스 학원에서 허우적거리는 장하양을 보았다.

보컬 학원에서 고음인지 괴성인지를 내뱉는 장하양도 보았다.

‘예체능 자체에 안 맞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깊어만 간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장하양이 긍정적이란 것이다.

장하양은 박한 평가를 받고도 헤실헤실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력하면 되죠.’

긍정적이라서 좋긴 한데…….

‘아니. 나까지 실망하면 어쩌자는 거야. 사장님 말씀 벌써 잊었어?’

성필의 설득에는 100억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100억이 있어서 아이돌은 취미로 하는 것처럼, 장하양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성필이 줄 수 있는 건 칭찬뿐이다.

마구 칭찬해줘서 의욕을 끌어 올려주자.

‘근데 백민정 걔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하양이 같은 애를 처음 봤다니. 내 앞이라서 일부러 객관적으로 말해준 건가……?’

장하양에 대한 박한 평가를 떠올리니 또 심장이 끓어버리는 듯했다.

성필은 몇 번 더 소리를 지르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장을 뒤졌다.

내일 장하양이 유리구두인가 뭔가 하는 만화책을 빌려주기로 했다.

‘이사님이 좋아하시는 책도 빌려주세요. 서로 책 교환하면서 읽어요.’

달갑지는 않았다.

성필은 요즘 취미생활에 투자할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장하양이 빌려준 책을 읽지 않으면 그녀의 기분이 상할 것이다.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야 할 텐데.

‘나는 어떤 걸로 하지.’

성필은 적당히 연애 소설 중 하나를 꺼냈다.

스무 살이니 막연히 이런 종류를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다.

* * *

“뭐가 이렇게 두꺼워?”

장하양이 가져온 책의 두께는 성필의 새끼손가락 길이 정도였다.

“애장판이라서 그래요. 이게 1권이고 15권까지 나와 있어요.”

숨이 턱 막힌다.

장하양은 만화책을 건네주곤 두 손을 펼쳤다. 무엇을 줄지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성필은 책을 넘겼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장하양의 만화책과 다르게 매우 얇았다.

“로맨스 소설이야.”

“브람스가 뭐예요?”

“19세기 독일의 음악가입니다.”

어느샌가 유령처럼 나타난 한구인이 설명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작가는 프랑스인입니다. 브람스는 프랑스에서 인기가 높지 않은 음악가입니다. 그러니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질문은 프랑스인에게는 조금 특별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데이트 신청할 때 쓰는 말로는 튀죠.”

“우와. 한 이사님 아는 게 많으시네요.”

“두 분이서 독서 모임이라도 만드신 겁니까? 저도…….”

“아뇨. 이것만 교환해서 보는 거예요.”

한구인이 시무룩해졌다.

장하양도 성필의 단호한 답에 실망한 티를 냈다.

계속 책을 가져다줄 생각이었나 본데, 미리 딱 잘라놓길 잘했다.

‘이런 두께의 책이 15권이나 있다고? 언제 다 읽냐.’

책을 의무감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빨리 읽고 감상 들려드릴게요.”

“아니야. 조금 읽다가 재미없으면 그냥 돌려줘도 돼.”

“이사님이 좋아하시는 책이잖아요. 꼭 다 읽을게요.”

딱히 좋아하는 책은 아닌데.

“음, 회사에 책장이라도 비치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들 좋아하는 책을 한두 권씩 두면 관심사 공유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겠네요. 사장님이랑 상의해보는 게 어떨까요.”

“알겠습니다.”

한구인은 신나서 2층으로 올라갔다.

진짜 홍규헌에게 건의하러 간 것이다.

‘불쌍한 한 이사님. 취미가 맞는 사람이 회사에 한 명도 없으셔서…….’

성필은 그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롭길 기도해주었다.

* * *

“아라쨩. 안 갈 거야?”

“벌써 시간 됐어? 아, 딱 느낌 좋았는데.”

조아라는 입맛을 다시며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샤워 안 해?”

“늦었잖아. 집에 가서 하면 되지.”

“아하.”

“……냄새나?”

그녀는 자신의 팔을 코에 가져다 댔다.

저녁 동안 쉬지 않고 춤만 추었으니 땀이 많이 난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미 코가 익숙해졌기에 조아라는 자신의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리카, 나 냄새나냐니까.”

“그으, 그런 섬세한 질문은 나한테 조금 힘들지두……?”

“오늘 태워주는 사람 누구였지.”

“누가 태워주던 씻어야지…….”

“한의사님은 좋아하지 않을까?”

“한 이사님을 뭘로 보는 거얏!”

“10분 만에 씻고 올게. 머리 말리는 거 도와줘.”

“속옷 들고 왔어?”

“매일 챙기지.”

조아라는 항상 춤추는 데 정신이 팔려서 샤워하는 것을 잊어먹곤 했다.

남들은 돌아갈 때가 되면 슬슬 기력이 떨어져서 연습을 대충하곤 하는데, 조아라는 아니었다.

조아라에겐 춤이 곧 클럽이고 유흥이었다…….

“아라는?”

“씻어요.”

“또? 또 늦게 씻는 거야?! 대체 왜 나를 늦게 퇴근시키려고 안달이야 대체애애애!”

“죄, 죄죄, 죄송합니닷!”

리카가 대신 성필에게 사과했다.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 보기 좋다. 내가 직접 칭찬해주긴 싫으니까 리카가 대신 전해줘.”

“네. 머리 말려주면서 전해줄게요. 박 이사님이 아라쨩 때문에 야마 돌았다구요.”

“뭐?”

“……?”

“리카. 야마 돌았단 말 쓰면 안 돼.”

“안 좋은 의미였나요? 그냥 화났단 뜻인 줄 알았는데.”

리카는 조아라의 머리를 말려주기 위해 쌩하고 사라졌다.

성필은 소파에서 쉬려고 했다.

그런데 뒤로 도니 장하양이 한껏 어색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할 말 있어?”

“네, 네? 아니, 아니요.”

“뭔데. 말해.”

“으어, 저어, 그으.”

성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여기선 못 할 말이야?”

혹시 아이들에게 무언의 따돌림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일까?

조아라에게?

조아라 그 녀석이……!

“아,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저 연습 좀 더 하고 싶은데요오…….”

장하양은 퇴근하지 않고 연습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 용건으로 성필에게 접근하던 중, 갑자기 그가 ‘왜 나를 늦게 퇴근시키려고 안달이야!’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저 안 태워주셔도 돼요! 걸어가거나 택시…… 걸어갈게요!”

“…….”

“혼자 회사에 남아 있으면 안 되나요? 그, 그렇겠네요.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써도 돼.”

“아니에요. 다시 생각하니까 민폐인 거 같고…….”

“연습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냐. 도리어 난 네가 노력해줘서 기뻐.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장하양의 입에서 연습하고 싶단 말이 나온 건 고무적인 성과였다.

평가에 대한 불안감에서 나온 결심일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연습생 생활에 진지하게 임한단 증거였으니 기쁘기만 했다.

성필은 회사 앞에 차를 대고 조아라와 리카가 나오길 기다렸다.

“아임 쏘리.”

“스미마셍!”

리카와 조아라가 차에 탔다.

조아라가 조수석에 앉자마자 한약 냄새가 확 풍겨왔다.

“너 한방 샴푸 써?”

“이번에 샤워실에 새로 들어온 샴푸가 한방이던데요.”

“아, 글쿠나. 사장님이 너희 모발 걱정해서 사뒀나 보네.”

“아저씨도 써야 할 거 같은데.”

“나 탈모 없거든?”

“리얼로요? 남자는 30대 되면 머리 빠지는 거 아니었나?”

“없다니까.”

“엇, 목소리 낮아졌다. 맞구만.”

조아라가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성필의 앞머리를 깠다.

“응? 멀쩡한…….”

성필이 조아라의 손을 쳐냈다. 그녀는 성필의 즉각적인 반응에 움츠러들었다.

뒤에 앉아 있던 리카와 백설하도 마찬가지로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조아라에게 성필마저도 놀라서 말했다.

“아, 미안. 아팠지?”

“화…… 났어요?”

“아니, 누구라도 머리에 손대려고 하면 이러지. 보통은. 근데 진짜 미안. 손 괜찮아?”

“괜찮아요.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한다고 말하시지.”

“그걸 꼭 말을 해야 하냐. 다른 사람 머리카락 함부로 만지는 거 아니야.”

“…….”

“소다(그래)! 머리카락 하니까 생각났는데…….”

리카가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캐치하고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평소의 귀갓길처럼 차 안에서 수다가 오갔다.

하지만 조아라는 성필이 쳐냈던 손목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리카나 백설하가 질문해도 대강 대답하곤 끝냈다.

조아라의 집은 가장 마지막이었다.

성필은 그녀의 집 앞에 함께 내려 다시금 아까의 일을 사과하려 했다.

그런데 조아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저씨.”

“응?”

“그, 아까 미안해요.”

조아라는 아까 성필이 쳐냈던 손목을 꾹꾹 누르며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있었다.

‘나 기분 안 좋다’라고 티 내는 것 같으면서도, 성필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두려워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조아라 딴에는 친근함의 의미로 한 행동일 텐데, 어른이라는 성필이 매몰차게 쳐버렸으니 겁먹을 만도 하다.

“아니야. 기분 많이 나빴지? 내가 미안.”

조아라는 성필이 사과를 입에 담자 그제야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뇨. 머리카락 만지면 기분 나쁠 수도 있죠. 나도 안 친한 사람이 만졌음 똑같이 했을 거고요.”

“너 싫어해서 그런 거 아닌 건 알지?”

“알아요.”

“우리 아라 많이 아낀다.”

“알아요 알아요. 빨리 퇴근이나 하세요.”

“그래. 잘자. 내 꿈 꿔.”

농담이라고 던진 건데, 조아라는 픽 웃는 것 외엔 반응하지 않았다.

성필은 회사로 돌아오는 길 몇 번이고 한숨을 쉬었다.

‘거기서 손이 나가냐.’

어깨가 축 늘어져서 손목을 매만지던 조아라가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성필은 회사에 도착하곤 문 앞에 잠시 멈췄다.

‘변명이 그게 뭐였냐……. 머리카락 만지는 걸 싫어해?’

아까 그 상황만 보자면, 성필이 스킨십에 민감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까지 돌려 보면 거짓이란 걸 쉽사리 파악할 수 있었다.

성필은 격려의 의미로 아이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곤 했다.

리카가 쓸데없는 말을 하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고.

그런데 하필 자신의 머리카락에만 민감하게 반응한다니?

‘다른 변명거리가 없나?’

그렇게 반응했던 이유를 말할 수도 없다.

전생의 성필과 조아라에 관련된 문제였으니까.

결국 성필은 소득도 없이 회사로 들어갔다.

위층에선 장하양이 연습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양이 혼자 집에 돌려보낼 수는 없지. 연습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성필이 모습을 드러내면 장하양이 미안해할 것이다.

연습도 대충 마치고 내려올 게 틀림없다.

그래서 성필은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1층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할 것도 있으니까.’

장하양이 준 만화책을 펼쳤다.

펴자마자 헛웃음이 나온다.

80, 90년대 순정만화 그림체였기 때문이다.

남자 캐릭터의 비율이 10등신 11등신은 되는 것 같다.

‘어디 보자. 연기를 좋아하는 주인공이…….’

2시간 뒤.

‘미친, 벌써 끝이라고?’

숨도 쉬지 않고 다 읽었다.

내심 애들 보는 만화 같다면서 무시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몰입감이 있었다.

지금 당장 다음 권을 보고 싶었다.

‘근데 지금 몇 시야?’

12시가 넘어 1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얘는 언제까지 연습하려고 아직도 안 내려와.’

이제는 더 연습하고 싶다 해도 그만둬야 했다.

아침 9시부터 회사에 나와서 계속 연습했는데, 여기서 더하면 몸이 망가질 것이다.

성필은 2층 연습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노래가 틀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반응이 없다.

성필이 문을 열었다.

“…….”

장하양이 쓰러져 있다.

‘자는 건가?’

그럴 리 없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저토록 자연스럽게 쓰러진 자세로 잔단 말인가?

실신한 것이다.

“하양아!”

성필은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도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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