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어제, 성필은 손혜빈과 노래방에만 4시간 동안 있었다.
그녀는 성필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반드시 번갈아 가며 불러야 했으니 성필의 목이 멀쩡할 리 없었다.
“저도 가라오케 좋아하는데!”
가라오케라고 하니 술집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물어볼 거 있지 않았어?”
“앗! 맞아요!”
리카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면서 눈을 수줍게 치켜떴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요오?”
“머리에 에센셜 오일 안 발랐네.”
“어떻게 알았어!”
“드라이할 때 앞머리도 왼쪽으로 했고.”
“흐억, 허억. 아타시(저) 심장이 마구마구 뛰어요.”
“두근거렸어?”
“뒤에서 살인마가 쫓아오는 거 같다구요! 대체 평소에 저를 얼마나 자세하게 보시는 거예요?!”
“…….”
리카는 확신했다.
성필이라면 그녀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본질적인 변화를 알아봐 줄 것이다.
“그런 세세한 거 말구요. 더 대국적으로 봐주세요.”
“대국적이란 말은 어디서 배웠어.”
“며칠 전에 봤던 영화에 나왔어요.”
“음, 달라진 거라……. 더 예뻐졌나?”
“이사님이면 알아주실 줄 알았어요!”
“그냥 해본 말인데.”
“…….”
“리카야 매일 매일이 외모 리즈 갱신이지.”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
최후의 보루였던 성필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난 달라진 건가? 혹시 키만 커졌을 뿐인가?’
리카가 뾰로통해져서 땅만 톡톡 찼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성필의 뒤.
유리문 밖에서 배꼽을 잡고 웃는 사람이 있었다.
리카가 갑자기 성필의 앞을 막았기에 미처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듯했다.
“앗! 새로운 멤버?”
문밖의 여자, 손혜빈은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쏙 뺐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눈가를 닦았다.
리카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마스크까지 쓰고 있던 터라 눈매밖에 볼 수 없었지만.
‘예쁘다.’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리카의 기세에 압도당했던 성필은 그제야 손혜빈이 아직 들어오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급히 문을 열어 손혜빈이 들어오도록 해주었다.
“이시카와 씨?”
“이시카와 리카입니다! 새로 오신 연습생님이신가요?”
“네. 새로 온 연습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손혜빈이 배꼽 인사를 했다.
리카가 허둥지둥 따라 했다.
“제가 아이돌 같은 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생초짜예요. 많이 부족할 테니까 선배님한테 기댈게요. 괜찮아요?”
“센빠이(선배)라뇨! 리카라고 불러주세요!”
손혜빈은 무엇이 그리 웃긴 지 자꾸만 실소를 터뜨렸다.
리카는 기분이 좋았다.
남이 웃는 것을 보면 그녀도 행복해졌다.
자주 웃는 손혜빈을 보니, 리카는 왠지 그녀와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단 참관…….”
“응. 먼저 사장님 뵈러 가야지. 맞지?”
“……어, 맞아.”
손혜빈은 가로 엔터에 견학 온 것이나 다름없다.
미리 홍규헌에게 말은 해두었으나, 인사라도 하는 것이 회사에 대한 예의였다.
그래서 성필도 ‘참관’이란 말을 꺼냈는데, 손혜빈이 귀신처럼 그의 말을 잘랐다.
리카가 오해하는 게 재밌었기 때문이다.
“파이팅하세요! 사장님이 처음 보면 무서운데 친해지면 잘해주세요! 물론 저는 아직도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조언 고마워요 선배님.”
“에헤헤.”
리카는 선배란 말이 굉장히 마음에 든 듯했다.
성필은 질렸단 듯이 둘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그만하고 가자.”
“급하다 급해. 그래, 가자. 내가 맞춰줘야지.”
손혜빈이 성필을 따라서 갔다.
둘의 대화를 들은 리카는 혼란스러웠다.
이 회사에서 성필을 저토록 막역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필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조아라조차도 선은 있었다. 그런데 손혜빈은 선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알던 사이신가?’
리카와 성필이 처음 만났던 게 2년도 더 전이다.
비록 공백기가 있긴 했지만, 회사에서 성필을 가장 오래 본 건 리카였다.
그게 그녀 나름의 자랑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손혜빈의 행동을 보니, 그 자랑거리도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왔다.
옅은 씁쓸함을 느끼는 가운데, 종이 다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어? 어?”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올라가는 성필과 손혜빈, 그리고 내려오는 백설하가 마주 보고 있었다.
백설하는 손에 들고 있던 트레이닝용 프린트물을 전부 떨어뜨렸다.
충격적인 것이라도 본 것처럼.
“소, 소소, 손…….”
“벌써 들켰네.”
손혜빈이 마스크와 모자까지 벗었다.
갈색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그녀의 시원한 이목구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손혜빈……!”
백설하가 숨을 헛 삼키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손혜빈은 숙련된 공연자처럼 백설하의 시선을 즐겼다. 그리고 보란 듯이 고개를 흔들어서 머릿결을 흩날렸다.
“네, 손혜빈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특히 강조했다. 그리고 계단 난간에 팔을 걸치며 리카를 보았다.
“…….”
“…….”
손혜빈은 리카에게서도 반응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리카는 평소처럼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이름이 손혜빈이신가 보네. 설하 언니도 아는 사람인가? 음, 아! 옛날에 같이 연습생 하시던 분이구나!’
리카는 손혜빈을 몰랐다.
기대했던 반응이 없자 손혜빈은 조금은 뻘쭘한 투로 미소 지었다.
손혜빈은 가만히 있는 리카 대신 백설하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백설하는 살아 움직이는 호랑이를 처음 본 사람처럼 꺅 소리를 냈다.
그녀는 프린트물을 줍는 것도 잊고 손혜빈을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어, 어어, 언니 팬이에요.”
“고마워요.”
악수.
그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백설하의 전신에 전류가 치달았다.
어렸을 때의 우상과 만난 것이다.
“저 매일, 어릴 때, 학교 가기 전에, 텔레비전! 아침에 뮤비 틀어주는 방송 봤어요! 언니 뮤비 나오는 거 봤어요!”
대충 어릴 때 많이 좋아했다는 뜻 같았다.
“집에, 집에 앨범도 있어요. 사인, 아! 여, 여기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백설하가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손에 들고 있던 프린트물을 내놨다.
손혜빈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
“저 나중에도 여기 올 거예요. 박 이사님한테 연락드릴 테니까, 그때 앨범 가져와 주시면 해드릴게요.”
“또 오신다구요?”
“네. 박 이사님 때문에요.”
백설하의 눈이 성필과 손혜빈을 오갔다.
대체 어떤 이유로 둘이 알고 있는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기색이었다.
성필이 매니저로 꽤 오래 일했단 건 알았지만, 설마 손혜빈과도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다.
“아, 제가 유세 떠는 걸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아니요! 절대 안 그래요!”
은퇴했어도 아티스트는 아티스트다.
본인만의 자존심을 챙긴다고 욕먹을 일은 아니다.
“종이에 사인해드릴 수 있죠. 몇 번이나 해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성함이?”
“백설하입니다!”
“설하 씨 안에서 제가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는진 모르지만요, 첫 번째 사인이잖아요. 기억에 계속 남으실 텐데 이면지보다 더 소중한 곳에 받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백설하가 기계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였다.
백번 천번 동의한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가서 앨범을 가져오고 싶을 정도였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을 졸라 샀던 손혜빈의 앨범은 아직도 고이 모셔져 있다.
그땐 정말 질리도록 들어서 앨범 자체가 손때를 많이 탔다.
‘새로 사야 하나? 근데 아직도 팔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 도중, 손혜빈이 계단에 떨어진 프린트물을 주웠다.
백설하는 황송하다는 듯 그녀가 건네준 종이들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봬요.”
성필과 손혜빈이 사장실로 올라갔다.
백설하는 두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쭉 바라보았다.
“저분 새로운 연습생 아니었어요?”
“손혜빈 몰라?”
“네.”
리카 나이대면 모를 수도 있을까.
‘아, 리카는 일본인이라서 모르는 거구나.’
백설하는 손혜빈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20대 이상이면 손혜빈의 히트곡 후렴구 정도는 몇 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에? 서른 살 넘으신 분이 연습생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진심으로 묻는 거야?”
“한 이사님이 선입견 갖는 건 안 좋다고 했어요. 음, 그러니까 손혜빈 언니는 옛날에 엄청나게 유명한 가수셨단 거네요.”
리카는 손혜빈이란 사람이 왔다는 게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모양이다.
백설하는 묘한 의무감을 느꼈다.
“다른 애들한테도 혜빈 언니 왔다는 거 알려주러 가자.”
“왜요?”
“못 보면 인생 손해 보는 거야!”
“그런 건가요?”
백설하는 장하양과 조아라를 불러 모아 손혜빈이 왔단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연히 다들 놀라리라고 생각했는데.
“손혜빈이 누군데요?”
장하양의 말이었다.
“손혜빈이면 그거 아닌가. 그거. 옛날에 예능에 자주 나왔던 사람.”
조아라의 말이었다.
백설하가 충격받았다.
어떻게 손혜빈을 저런 식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내가 나이가 너무 든 건가? 세대 차이인가?’
장하양과는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진짜 몰라?! ‘내 흔적은 없앨 수 없으니. 오, 오, 오, 아. 네가 날 떨쳐도, 네가 날 지워도 계속 너만 따라갈 거야’ 이거!”
“아!”
“아라는 알지? 그치? 알지?”
“어…… 기억날 거 같기도 하고요. 아니, 모르겠는데요.”
“어릴 때 텔레비전 안 봤어?”
“저는 집에는 거의 안 있었는데. 애들이랑 경도나 축구하고 놀았어요.”
“경도가 뭐야?”
“경찰과 도둑이요.”
“하양이는 왜 몰라?”
“저는 드라마만 봤어요.”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텔레비전에서 못 봤더라도, 학교 수련회나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 시간이 있었을 텐데.
백설하는 진지하게 세대 차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지금 봐야 해.”
멤버들이 백설하 주위로 몰렸다.
백설하는 아이튜브를 켜서 손혜빈의 히트곡을 찾았다.
“최대 화질이 480p? 더 못 올려요?”
요즘 나오는 뮤비들은 4k인 것마저도 있으며, 기본적으로 1080p 이상을 지원한다.
그런 것만 보고 자란 조아라와 리카에게 480p 화질은 너무도 생소했다.
사실 백설하도 아이튜브로 손혜빈의 영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옛날에 올라오긴 했다…….
“너희들 왜 여깄냐. 연습실에 없어서 계속 찾았잖아.”
성필과 손혜빈이 멤버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리카는 손혜빈을 몰랐다.
하지만 방금 가요계 선배란 사실을 배웠기에, 철저히 연습한 90도 인사를 시전했다.
그것을 본 장하양과 조아라도 얼떨결에 리카를 따라 했다.
“선배님은 무슨. 저 은퇴한 지 오래 지났…….”
백설하의 핸드폰에서 통통 튀는 멜로디가 흘러왔다.
손혜빈의 히트곡 ‘퍼퓸’의 전주 부분이었다. 백설하는 급히 재생을 중지했다.
성필은 왜 멤버들이 모여 있는지 눈치챘다.
‘애들은 혜빈 누나를 모르는구나.’
손혜빈이 나타났을 때의 태도를 곱씹으니 알 수 있었다.
조아라, 장하양, 리카는 손혜빈이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인식을 못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설하가 손혜빈의 음악을 알려주려 했던 거겠지.
성필과 거의 같은 타이밍에 손혜빈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뭐 된다고 제 노래까지 들으려고 그래요? 부끄럽게.”
“다들 혜빈 누나 몰라? 손혜빈.”
성필의 물음에 백설하가 은근히 서러운 투로 답했다.
“애들이 전부 어릴 때 텔레비전이랑 안 친했대요…….”
“음. 그러면 곤란하죠. 사실, 오늘 혜빈 누나가 온 게 설하 씨 포함해서 너희들 한 번 보려는 거거든. 쉽게 말해서 평가하러 오신 거야.”
평가란 말에 멤버들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누나는 옛날에 댄스 가수로 활동했고 대형 기획사 디자인 쪽에서 경력도 꽤 쌓았어. 디자인이라도 프로듀싱 과정이랑 관련이 없는 게 아니야. 아무튼, 너희들이 받는 평가인데 평가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건 좀 그렇지? 뮤비 하나 보자.”
“야, 뭘 그렇게까지 해.”
손혜빈은 부끄러운지 성필의 손목을 흔들면서 만류했다.
성필은 개의치 않고 아이튜브에서 손혜빈의 무대 영상 중 하나를 찾았다.
“뭐 볼 거예요? 퍼퓸? 오늘 밤?”
백설하는 모두에게 손혜빈을 알릴 수 있단 생각이 신이 났다.
그래서 성필의 곁에 붙었는데.
“……크라운?”
“야아! 왜 찾아도 그걸 찾는데에!”
손혜빈이 성필의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다. 성필은 장난기 넘치게 웃으면서 소파에 앉았다.
“다들 모여! 보자!”
“하잇(넵)!”
리카가 성필의 팔 안쪽으로 쏙 들어왔다.
“나가.”
“하이(네)…….”
장하양과 조아라가 성필의 양옆에 앉고, 백설하가 그의 뒤에 섰다.
다들 모이자 영상을 재생시켰다.
손혜빈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다른 것도 많은데 왜 하필…….”
‘크라운’은 손혜빈의 데뷔곡이다.
그 곡으로 음방에도 나왔고 그런대로 반향도 있었지만, 히트하지는 못했다.
딱 손혜빈이란 가수의 이름을 알린 정도다.
데뷔곡으로는 좋았으나, 아직 손혜빈이 아티스트로서 무르익지 않았을 때의 것이다.
지금 보면 곡의 감성이나 뮤비의 센스가 너무 구식인 느낌마저도 든다.
“으아…….”
조아라는 뮤비에 싸구려 느낌이 나는 3D CG가 나오자 낮은 신음을 뱉었다.
옛날 CG 기술력으로 만든 성안에 손혜빈이 서 있는 장면이었다.
“에.”
리카는 옛날 패션 스타일을 보고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거기에다가 지금 관점으로는 기괴한 CG 이펙트까지 추가되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장하양은 의외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뮤비를 감상했다.
“…….”
백설하조차 ‘크라운’ 뮤직비디오는 실드 칠 수 없었다.
어릴 적 봤을 때는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 보니 왜 이럴까…….
백설하도 이럴진대 손혜빈은 얼마나 부끄러울 것인가.
길었던 3분 20초가 끝났다.
손혜빈이 손부채를 부치면서 비꼬듯 말했다.
“박 이사니임. 저 꼽 주니까 기분 좋으셨어요?”
“아, 아니에요! 노래가 굉장히…… 청량하네요!”
리카가 실드치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느껴졌어요. 가사가 당당해서 좋았어요.”
조아라는 오디션 프로 패널이라도 된 듯이 진중하게 평가했다.
장하양은 분위기를 읽은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지 말이 없었다.
멤버들의 반응이 이어질수록 손혜빈의 얼굴은 더 달아올랐다.
“이제 됐어요. 말씀들 안 하셔도 돼요. 좋게 말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저도 알아요. 이상하죠? 제 의견이 좀 많이 들어가서……. 근데 다른 곡들은 좀 나아요. 박 이사가 저 놀리려고 일부러…….”
“나는 누나 곡들 중에서 이게 제일 좋은데?”
멤버들이 의문을 표했다.
혹시 손혜빈을 놀리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크라운’이 가장 좋다고 말할 리가 없으니까.
“됐어. 놀리지 마.”
“아냐. 난 진짜 이게 제일 좋다니까 그러네.”
성필은 어린애처럼 실실 웃었다.
백설하는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까 고민했다. 성필이 손혜빈을 놀리는 게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를 상대로 그의 작품을 가지고 뭐라 뭐라 하는 건 위험하다.
남에게 보여주기 창피하다 해도 자기 자식이나 다름없으니까.
“알았다고. 그만…….”
“10년도 더 전이었지. 이 노래가 나온 거. 난 그때가 케이팝의 태동기라고 생각해. 그땐 정말 많은 기획사들이 난립했었어. 그런 만큼 고난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건 단순히 경쟁할 회사가 많아서가 아니었어. 기획사들은 케이팝이 뭔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으니까. 케이팝이란 어떤 장르가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새로움을 보여줄 건가, 어떻게 케이팝만의 고유함을 살릴 수 있는가. 미국의 팝과 제이팝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야만 하는 임무가 있었던 거야. 사람들은 뭘 좋아할까. 우리는 어떻게 알려져야 할까. 그런 고민의 끝에서 수많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어.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장르, 새로운 패션, 새로운 기술……. 그렇지, 당연히 결점들도 많았지. 문법에 맞지도 않는 이상한 영어 가사 하며, 시대를 앞서갔는지 초월했는지 괴상한 복장들도 있었고, 퍼포먼스도 비슷한 꼴이었어. 가사도 비슷했고. 하지만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케이팝이 있다고 생각해. 누나의 ‘크라운’이란 곡도 지금 와서 들으면 그저 옛날의 이상한 노래가 가운데 하나지만. 난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거의 넋이 나갔어. 과장하는 거 아냐. 티비에서 뮤비가 나오는데, 정말 멍하니 그것만 봤어. 대단하더라고. 나중에 들었지만 누나가 미국 쪽 팝에 꽂혀서 사운드랑 뮤비 신경 썼다면서? 물론 지금 관점으론 이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때 한국 아티스트들의 고민과 노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곡이야. 누나의 ‘크라운’은 태동기에 맺혔던 꽃봉오리의 하나였어. 누나 덕에 현재 꽃이 만개할 수 있던 거나 다름없지. 그래서 이걸 들으면…… 그립네. 처음 누나 로드 매니저 됐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몰라. 그 후로는 환상이 다 깨졌지만…….”
성필은 옛날의 동료를 떠올리는 늙은 군인과 같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정갈하면서도 순수한 감상에 주변이 정적에 잠겼다.
한 인간이 가진 추억과 그리움을 이토록 직접적이고 정렬된 언어로 만나보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성필의 말과 어조, 분위기에는 힘이 있었다.
“뭐, 그래서 나는 이 곡이 제일 좋아.”
손혜빈은 자신의 데뷔곡을 이토록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그녀의 얼굴이 아까와 다른 의미로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