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러시아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당국이 보내주는 초청장이 필요하다.
단순 관광이야 초청장이 요구되지 않지만, 손혜빈은 대학에 가는 것이다.
[미치겠다. 학교랑 집은 어쩌냐고.]
“어떡해 그러면? 초청장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휴학 신청 같은 건 못 해?”
[몰라. 생각도 못 했어. 초청장 또 나오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될지…….]
“다른 방법은?”
[러시아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아.”
성필은 자기 일도 아닌데 발을 동동 굴렀다.
“누나 어떡해…….”
* * *
손혜빈은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러시아로 간다.
이날을 이제껏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배움에 대한 열망만을 지니고 선택한 유학의 길이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다니는 비행기들만 보아도 가슴이.
‘답답해.’
집 나올 때 가스 불을 껐나 안 껐나 헷갈리는 듯한 기분이다.
불안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을 피하기 힘들 정도로 복작거리는 공항의 가운데서, 손혜빈은 멈춰 섰다.
사람들은 그녀를 흘끗거리면서 지나쳤다.
‘무용…….’
왜 배우고 싶어했지?
재밌어 보이니까.
손혜빈은 댄스 가수였다. 또한 댄서였다.
춤은 질리도록 췄다. 그래도 쉽사리 질리지 않는 게 춤이었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강렬한 방법 중 하나가 춤 아닌가.
남의 관심을 계속해서 갈구하는 손혜빈의 성격상 가장 알맞은 취미이자 업무였다.
‘춤, 재밌지.’
미국에 댄싱 스타라는 경연 프로그램이 있다.
그곳에선 세계 각지에서 모인 댄서들이 모여서 경쟁을 펼친다.
손혜빈은 그 무대들을 볼 때마다 감탄했다.
언젠가 그들과 같은 경지에 오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래서 학문적, 체계적으로 무용을 배우기 위해 러시아로 가려던 것이다.
‘내가 정말 그러길 바라는 건가?’
더 바라는 게 있지 않나?
손혜빈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다음 활동 곡은 무엇으로 할까.
안무는 어떤 스타일로 할까.
이 예능에 나가?
가수 그만둘까?
그만두곤 뭐 하지?
콘서트 기획? A&R? 앨범 디자인? 주식?
손혜빈은 항상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택했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끄고 심장이 원하는 장소로 나아갔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어, 누나 공항이야?]
“응.”
손혜빈은 우울한 말투를 지어냈다.
예상대로 성필은 잔뜩 당황해서 이것저것 물어왔다.
그게 웃겨서 입을 꾹 막아야만 했다.
자칫하면 웃음이 새어나갈 것 같았다.
‘주인이 죽은 척하니까 끙끙거리는 강아지 같아.’
사람을 개에 비유하는 건 몹쓸 일이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손혜빈은 작게 목청을 가다듬고 목소리에 짜증을 담았다.
성필의 말투에서 걱정과 근심이 깊어졌다.
[어쩔 거야? 기다릴 거야?]
“몰라.”
[…….]
“…….”
[…….]
“……오늘 시간 있어?”
위로해달라, 한탄을 들어달라, 같이 세상을 욕해달라.
그런 뜻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성필은 손혜빈이 술을 먹자고 하면 ‘또?’, ‘작작 마셔’ 같은 말이나 했지만.
[언제 만날래?]
성필은 당장 달려오기라도 할 듯이 즉답했다.
“저녁.”
[알겠어. 지금 공항이지? 데리러 갈까?]
“됐어. 내 알아서 갈게. 너 기다리는 게 더 오래 걸려. 일도 있는 애가.”
전화를 끊은 손혜빈은 기지개를 켰다.
확실히 아까보다 기분이 훨씬 나았다.
유리창에 낀 안개를 지운 것 같다.
손혜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가방 안에는 명확하게 ‘Республика Корея(대한민국)’라고 적힌 초청장이 들어 있었다.
‘아이돌이라.’
아이돌을 만드는 것도 재밌어 보인다.
아니, 러시아에서 무용을 배우는 것보다도 훨씬 재밌을 것이다.
* * *
성필은 회사에서 할 일이 없을 때 꼭 하는 일이 있다.
음원 차트를 모두 확인하고 아이돌 곡의 뮤비나 무대 영상을 보는 것이다.
전생에서도 일과나 다름없었으나, 회귀하고 난 뒤에는 더 집착하게 됐다.
‘얼추 맞네.’
성필은 자신의 기억과 현재의 차트를 비교했다. 혹시나 미래가 엇나가진 않았을까 매일 가슴을 졸이며 차트를 확인했다.
‘영상 하나만 더 보고 애들 연습하는 거 확인하러 가야지.’
조회 수가 높은 영상 중 하나를 골라 재생했다. 남들은 노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성필은 이것도 일이라고 여겼다.
여느 기획사의 A&R 직원들도 트렌드와 민심 파악을 위해 아이튜브 영상을 수십에서 수백 개씩 점검한다.
어떤 게 먹히는가, 대중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그건 한 명의 판단으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끊임없는 대중들의 피드백으로 알아내야만 한다.
‘댓글이 좀 심한데.’
꽤 유명한 걸그룹의 무대 영상이었다.
카메라 앵글이 움직이지 않고 안무 전체를 담았는데, 한 멤버의 역량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이게 구멍이지. ㄹㅇ 댄스 블랙홀이다 ㅋㅋㅋ]
[자꾸 성장 중이라는데 언제까지 성장만 할 거임? 실드 칠 걸 쳐라.]
[이 그룹은 쟤 때문에 절대 완성형은 못 될 듯.]
성필은 답답한 마음으로 댓글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팬과 타 팬, 일반인이 섞여 혼란의 도가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역량 차이가 크네.’
비교당하는 멤버는 연습생 기간이 짧았다.
비주얼 하나로 데뷔 조가 될 만큼 아우라가 뛰어나지만, 오랜 연습생 기간을 지낸 멤버들과 한 무대에 세우니 구멍처럼 보였다.
‘애가 보면 어쩌려고 이런 말까지 적어두는지 모르겠네.’
성필은 자신에게 이런 댓글이 달리면 당장 주저앉아서 울 자신도 있었다.
그만큼 심했다.
이 멤버도 심적으로 고민이 많을 텐데.
‘……하양이.’
당연한 수순으로 장하양이 떠올랐다.
장하양은 나머지 멤버에 비해 역량이 확실히 떨어진다.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미래엔 장하양이 퍼포먼스의 구멍이 되어서 악플을 잔뜩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심장이 철렁인다.
“왁!”
조아라가 성필의 등을 살짝 밀면서 소리쳤다.
성필은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조아라가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듣고 있던 터라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누가 뒤에서 다가와 등을 미는 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
하지만 놀란 티는 내지 않았다.
놀란 모습을 보여주면 조아라가 좋아할 테니까. 그런 꼴은 절대 못 본다.
“어, 왜.”
“이 아저씨 또 일 안 하고 아이돌 영상 보고 있네. 매일 보면 안 질려요?”
“너는 왜 연습 안 하고 여기 있는데.”
“쉬는 시간.”
조아라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성필은 재빨리 댓글 창을 올려 영상이 나오게 했다.
다른 아이돌의 악플 같은 건 봐도 멤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저씨 얘들 좋아해요?”
“애정하는 건 아니고. 좋은 그룹이라고 생각하긴 해.”
“흐응…….”
“이 그룹 노래 들어본 적 있어?”
“아뇨.”
조아라와 대화하면서도 아까 봤던 댓글 창이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녀도 나중에 보컬 실력이 문제라면서 욕먹거나 하진 않을까…….
절대 안 된다.
“아라야. 보컬 연습 잘하고 있지?”
“네. 아니 나 진짜 잘하는 거 같거든요? 노래방 가도 어깨 좀 펼 듯.”
“앞으로도 열심히 해.”
“어? 안 믿는 거 같은데? 한번 불러봐요?”
성필은 조아라의 노래에 집중하지 못했다.
‘하양이한테 특기가 필요해.’
백설하는 메인 보컬이 될 것이다.
조아라는 메인 댄서가 될 것이다.
리카는 리드 보컬, 댄서로서 둘 사이를 이어주는 허리가 되어야 한다.
리카 덕분에 두 사람이 소화할 퍼포먼스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 게 틀림없다.
‘하양이는…… 래퍼.’
앞으로 가로 엔터가 받을 곡에 랩 파트를 포함할지는 모르겠으나, 장하양이 빛을 발하려면 랩밖에 없다.
다른 멤버들의 역량이 워낙 뛰어나기에 장하양이 단순히 그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론 안 된다.
성필이 생각을 끝내자, 노래를 마친 조아라가 잔뜩 기세등등해져선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갈 길이 멀다. 더 노력하자.”
조아라가 기대한 건 칭찬인 듯했다.
성필이 노력하자고 말하자마자 표정이 안 좋아졌다.
‘아라는 격려와 칭찬보다는 직설이 먹히는 타입이니까.’
백설하의 트레이닝 덕에 조아라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아직 모자란 건 사실이었으나 조금은 칭찬해줄 정도는 됐다.
아라 정도의 수준을 달성한 게 장하양이었다면 성필은 박수갈채까지 보내며 텀블링까지 했을 것이다.
“노력하고 있는데…….”
“야, 10분 지났다. 나도 갈 데 있으니까 너도 연습실로 돌아가.”
“나 오니까 나가는 거죠? 너무 벽 치는 거 아녜요?”
“내가 우리 아라 얼마나 아끼는데 그래. 항상 응원하고 있어.”
“원래 계속 아이튜브 보려고 했잖아요. 어디 가는데? 그냥 담배 피우러 가는 거죠?”
조아라는 성필을 쫄래쫄래 따라왔다.
장하양을 찾으러 연습실에 왔는데, 보이는 건 리카와 백설하뿐이었다.
“하양이 어디 있어?”
“2번 연습실에요.”
“하양이만 따로?”
“언니한테 일 있어요?”
“응.”
조아라는 성필이 그냥 자신을 피하는 게 아니란 것을 확인하곤 1번 연습실로 들어갔다.
성필은 장하양이 있는 2번 연습실로 향했다.
장하양은 벽에 앉아 폰을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필을 발견하곤 벌떡 일어났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장하양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해왔다.
“왜 혼자 있어?”
성필의 목소리엔 은근한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
1번 연습실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멤버들이 모여 연습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장하양만 이곳에 있을까.
혹시 왕따라도 당하는 건…….
“제가 멤버들보다 실력이 떨어지잖아요. 그래서…….”
“왕따당하고 있는 거야?!”
“아하하. 그랬으면 이사님한테 먼저 말씀드렸겠죠. 설하 언니랑 애들이랑은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저는 혼자 연습하고 있어요.”
듣자 하니 멤버들은 따로 단체곡을 연습한다는 모양이다.
“애들이 자발적으로?”
“네. 월평 이후로 일주일에 하나씩 군무 카피하기로 했어요. 근데 저는 방해만 되는 거 같아서요.”
“……애들이 너보고 나가래?”
“아니요. 제가 나간다고 했어요. 함께 하려면 기본부터 갖춰야죠. 짐이 될 순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장하양은 좌우로 웨이브를 탔다.
“이거 보세요. 이게 1번 동작이에요. 잘하죠?”
“응, 괜찮네. 근데 무슨 1번?”
“아라가 알려준 거예요. 기본동작 40개. 이것만 마스터하면 웬만한 아이돌 춤은 반은 먹고 들어간대요.”
대형 기획사는 전속 트레이너를 둔다.
회사에 소속된 트레이너들은 기획사의 음악적 성향을 고려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성향에 맞는 댄스 동작들을 압축하여, 연습생들이 꼭 외워야 할 동작 목록을 만들어두기도 한다.
아라가 가르쳐준 건 그녀 나름의 기본동작 목록인 듯했다.
‘미래에도 안무가가 되더니, 진짜 이런 쪽으로는 소질 있잖아?’
그러고 보니 조아라는 이미 음방 무대에 선 경력이 있었다.
비록 땜빵 백업 댄서였으나 실력이 있으니 올라간 것이리라.
“그리고 이게 2번이에, 아!”
다리를 엇갈리게 움직이는 동작에서 장하양이 뒤로 넘어졌다.
다리가 꼬인 것이다.
“아까는 잘 됐는데, 아하하…….”
“예전에 나 보면 긴장된다고 했었잖아. 이번에도 긴장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가 봐요.”
장하양이 손을 내밀었다.
성필은 손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힘세시다. 뭐에 끌려가는 줄 알았어요.”
“네가 가벼워서 그러지.”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고 남은 세 멤버가 들어왔다.
“언니, 한 이사님이 건강즙 먹으라구, 아! 이사님이다!”
리카가 깃털처럼 달려와 성필의 앞에 섰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폈다.
“이사님 요즘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없는데.”
“만들어두시는 게 좋아요! 곧 좋은 일이 있으실 거예요! 떨어질수록 날아오를 때 더 행복한 법이라고 한 이사님이…….”
“너희 단체곡 연습한다면서. 그거 보여주려고?”
“어떻게 알아?!”
장하양이 머쓱하게 웃자 리카가 배신당한 듯 몸을 떨었다.
“그, 그거 나중에 다 같이 말씀드리기로 했잖아요오!”
“한 이사님이 아시길래 말해도 되는 건 줄 알았어. 미안.”
“손나(그런)……. 아, 이사님 가슴에 뭐 묻었어요.”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멀쩡하진 리카가 성필의 가슴을 슥 훑었다.
“카미(머리카락)? 박 이사님 머리가 이렇게 짧진 않은데?”
“…….”
“…….”
“…….”
“다들 왜 조용해요?”
“에이 씨. 또 리카한테 성추행당했어.”
“제가요? 이게?!”
“이제 보니까 상습범이네. 저번에 한 이사님한테도 그러고.”
“죄, 죄송해요. 저는…….”
“됐어. 하양아 잠깐, 아니다. 여기서 말할게. 너 랩 배우는 거 어떻게 생각해?”
“랩이요?”
장하양이 당황해선 멤버들을 보았다.
멤버들도 그녀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리카는 변명하듯 장하양을 향해 고개를 세차게 젓기도 했다.
“랩, 랩이요? 제가. 아하하, 제가…….”
“하양이가 혼자 랩 연습하고 있어요.”
어색하게 굳어졌던 공기를 깬 건 백설하였다.
“언니……!”
“이사님이 먼저 말씀해주셨잖아. 말해도 괜찮아.”
“그래도…….”
“하양이가 혼자 랩을 연습하고 있었다고요? 설하 씨는 알고 계셨어요?”
“네.”
백설하는 부끄러워서 손을 휘휘 젓고 있는 장하양을 대신해서 설명했다.
“처음엔 하양이도 저희한테 숨겼어요. 근데 혼자 연습실에서 계속 중얼거리고 있으니까 모를 수가 없…….”
“언니 언니! 제, 제가 말씀드릴게요!”
장하양은 무엇이 그리도 말하기 어려운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창피함이 담긴 웃음을 몇 번 흘린 그녀가 입술을 꾹 물었다.
“제가 다른 멤버들보다 실력이 좀, 많이 없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짐이 될 거 같아서.”
장하양은 멤버들과 함께 연습할 때마다 창피해지곤 했다.
별다른 특기도 없이 연습생으로 들어와 자리만 축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미래엔 나아지겠지,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거울 속에 비친 멤버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한없이 작아지는 듯했다.
“특출난 부분도 없고.”
장하양의 목소리가 계속 계속 작아졌다.
“언니는 예쁘잖아요!”
장하양을 격려하기 위해 리카가 힘차게 칭찬했다.
“그리고…….”
“예쁜 건 다 똑같잖아.”
하지만 리카에게 돌아온 건 냉랭한 대답뿐이었다.
장하양을 처음 보는 사람조차 방금 목소리를 들었다면 얼어버릴 정도로, 장하양의 답은 차갑고 건조하게 들렸다.
“아, 어, 네, 아리가토(고마워)……?”
조아라가 입 다물라는 듯 리카의 옆구리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