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다들 너무 빛나는데. 저는 아니니까. 저는 노력조차 안 하면 보잘것없잖아요.”
성필은 장하양에게 이런 말도 들었냐고 묻는 것처럼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도 어지간히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 자리의 누구도 장하양이 가진 마음 같은 건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팀에 묻혀가지 않을 방법을 제 나름대로 생각해봤는데요.”
“그게 랩이었어?”
“네, 아하하……. 멤버들 중에 랩을 배운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월평 때도 해보니까 조금 자신감도 생겨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물론 그냥 제 생각이었어요! 제가 잘한다는 게 아니에요!”
“말을 하지. 그런 고민 들어주려고 나랑 한 이사님이 있는데.”
“그게, 아하하. 좀 튀려고 나대는 것처럼 보일까 봐요. 나중에 실력 늘면 이사님한테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아예 숨기려고 한 건 아니구…….”
장하양의 부끄러움이 가득 담긴 웃음만이 연습실을 울렸다.
다운된 분위기를 바꾸려 일부러 크게 웃어보았으나 반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장하양도 웃음을 그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불안한 듯 성필을 올려다보았다.
“주제 넘었…… 겠죠? 춤이랑 노래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데…….”
“리카.”
“하이(네).”
“하양이 포옹해줘.”
리카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장하양을 안았다.
“하양아.”
“네, 네.”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말로는 잘 안 되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국문학과를 가는 거였는데. 음, 그러니까, 난 네가 엄청 기특…… 대견…… 만족…… 막……. 리카. 더 세게 안아줘.”
리카가 장하양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무도. 이 건물 안에 있는 누구도 너 나댄다고 생각 안 해. 사람이 뭘 잘해보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어? 뭐 배워보겠다고 말만 꺼내도 기쁘기만 하지. 그리고 넌 보잘것없는 사람 아니야. 사장님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회사에 들인 거야?”
“……아니요.”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을 데려온 거야?”
“아니요!”
장하양이 거세게 부정했다.
“알면 됐어. 부끄러우니까 이제 그만 말할게.”
“아저씨가 무슨 말까지 할까 궁금한데 더 해봐요. 설하 쌤 때처럼 기백 함 보여줘요.”
“조용하고 건강즙이나 먹으러 가.”
안 그래도 한구인이 반쯤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리카는 마지막으로 장하양을 더 꼭 안아주었다. 멤버들이 차례로 연습실을 떠났다.
장하양은 할 말이 있는 듯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이사님.”
“왜. 감동했어? 막 연습할 의욕이 생겨나고 그래? 나 좀 멋졌지?”
“아하하, 진짜 부끄러우신가 봐요.”
“그러니까 빨리 할 말 하고 가. 혼자 이불킥 좀 하게.”
“음.”
장하양이 팔을 활짝 펼쳤다.
“그냥 이사님이 포옹해주셨어도 됐는데. 리카한테 포옹하라고 하시길래 놀랐어요.”
“내 포옹은 음방 1위까지 아껴둬. 아니, 그땐 너 목말 태우고 회사 한 바퀴 돈다.”
“기대된다.”
“랩 관련해선 내가 사장님께 말씀드릴게.”
“감사합니다.”
“내가 고맙지.”
장하양도 연습실을 나갔다.
그 즉시 성필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하양이가 랩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성필은 홍규헌을 설득할 논리를 만들어갔다.
* * *
성필은 노크한 뒤 사장실로 들어갔다.
때마침 한구인도 있었다.
“하양이 관련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성필은 장하양이 랩을 배우는 게 좋겠단 이야기를 했다.
“이대로 데뷔하면 하양이가 센터를 차지할 파트가 없다시피 할 거예요. 댄스 브레이크가 있으면 아라나 리카가. 코러스는 설하랑 리카가 독점할 거예요.”
“공평하게 분배한답시고 억지로 장하양을 중앙에 세우면 퍼포먼스가 무너지긴 하겠네. 근데 벌써 걱정할 내용인가 그게? 이제 막 시작한 애잖아.”
“하양이가 연습할 때 다른 애들도 노는 게 아니니까요.”
안 그래도 장하양과 멤버들의 격차는 크다.
장하양의 학습 능력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더 차이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미래엔 비주얼 병풍이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장하양 때문에 퍼포먼스의 난이도와 질을 떨어뜨릴 수도 없다.
“그러니까, 장하양을 메인 래퍼로 키우자?”
“네.”
“랩이라. 걸그룹은 랩이 들어가더라도 짧거나 간단하지 않나? 아예 안 넣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그건 랩을 소화할 멤버가 없거나 팀컬러에 맞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랩은 넣을 수 있으면 좋죠.”
랩이 있으면 곡이 똑같은 구조로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소화할 수 있는 멤버만 있다면 랩을 넣는 편이 곡 완성도 측면에서도 좋다.
“랩이 있어도 곡에서 메인이 되진 않을 텐데. 활동 기간에만 바짝 연습하는 쪽이 낫지 않으려나. 그러고 보니 장하양 걔, 월평에서도 랩 파트를 맡았었지. 랩에 관심이 있나?”
“본인이 배우고 싶댔어요.”
“걔가? 의외네.”
홍규헌은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면서 짧게 고민했다.
길지는 않았다.
“마침 애들 중에 랩을 배운 애가 없기도 하고 박 이사 말이 타당하기도 해. 좋은 곡을 받았는데 랩을 소화할 애가 없으면 속이 쓰리지. 요즘은 레슨비가 얼마 정도 해?”
가격을 들은 홍규헌은 살짝 놀랐다.
“의외로 싸네. 전업 래퍼한테 강의받는 건데도 이 가격이야?”
래퍼들은 랩 레슨을 부업으로 하곤 한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의 부흥으로 랩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났기에 예전보다 시장 규모도 커졌다.
“박 이사가 적당히 알아보고 나한테 전해줘. 근데 진짜 장하양이 배우고 싶어 하는 거 맞지? 박 이사가 겁박하고 협박하고 핍박하고 강박한 거 아니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장하양 걔, 네가 가볍게 권유만 해도 좋다고 할 거 같아서 그래. 왜, 있잖아. 직원이 하는 얘기는 잘 거부 못 하는 그런 거.”
“하양이가 혼자 랩 연습하고 있었대요.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사장님께 랩 배우고 싶단 말씀 드릴 계획이었대요.”
“기특하네. 할 말은 이제 끝?”
“예.”
“박 이사님.”
슬슬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는 찰나, 한구인이 끼어들었다.
“방금까지 사장님께도 말씀드렸던 겁니다만, 멤버분들께 음악사를 공부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악사(音樂史)?
연습생에겐 생소한 것이다.
무슨 음대 학생도 아니고…….
“며칠 전에 박 이사님이 쓰신 기획서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이사님의 최종적 목적은 단순한 아이돌보다는 아티스트던데, 그러려면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필은 홍규헌의 안색을 살폈다.
“나도 박 이사가 쓴 기획서에 공감해. 한 이사 의견도 괜찮고. 자고로 음악하는 사람이면 음악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지.”
한구인의 제안에 합당하지 않은 부분은 없다.
아티스트라면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WTP도…….’
보이그룹 WTP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꽤 유명한 정도다.
하지만 미래에는 빌보드 차트에 심심찮게 이름을 올리고 월드투어를 하는 등,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세계에 톡톡히 알린다.
WTP란 이름은 전 세계적 신드롬이 되기까지 했다.
‘연습생 시절에 프로듀서한테 음악을 배웠다고 했었지. 음악 영화 보고 소감문도 쓰고, 직접 그 작품의 주인공이 돼서 개사하거나 작곡도 해보고.’
처음 그 인터뷰를 봤을 땐 ‘연습생한테 뭘 그렇게까지 해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WTP의 성공을 보곤 프로듀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돌을 단순히 회사가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아티스트로 대했던 거였지.’
미래의 WTP는 프로듀서의 마음에 보답해주었다.
대한민국에서 유례가 없는 대기록을 세우는 아티스트가 된 것이다.
“좋은 생각 같네요. 음악사를 배우는 거면 음대 강사님이라도 초청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교육 내용은 절반 정도 짜 뒀습니다. 이겁니다.”
[제1강 헨델과 바흐.
―헨델, 수상음악
―바흐, 첼로 무반주 모음곡
―시대를 뛰어넘은 두 아티스트의 만남, 카잘스와 바흐
……(생략)]
“어떻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르네상스 음악부터 하고 싶었지만, 역시 다른 분들께도 익숙한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부터 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성필은 정신이 멍해졌다.
“클래식부터 가르치자고요?”
“예. 물론 내용 전달과 주입만을 목적으로 하진 않습니다. 내용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쓸 생각입니다.”
성필은 계획서의 내용을 짧게 훑어보았다.
‘난 또 온종일 클래식만 듣게 하나 했네.’
한구인의 강의는 음악을 들은 뒤 감상을 교환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다음 한구인이 음악에 담긴 스토리나 의미를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계획서에는 간단한 내용만 있었지만 계속 읽다 보니 은근히 재밌었다.
“박 이사님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음악을 다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그쪽으로는 잘 모르니까요.”
“2차 세계대전 다음이요?”
그럼 뭐, 록부터 시작해야 하나?
아니면 재즈?
재즈는 그 이전부터 있긴 했지만.
“네, 뭐. 내용은 나중에 같이 얘기해봐요.”
2차 세계대전 이후라면 역시 비틀즈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한구인도 영어 수업 자료로 비틀즈의 노래를 자주 썼다고 하니까.
* * *
성필이 나가고, 한구인이 홍규헌에게 물었다.
“방금 박 이사님에게 말씀드렸어야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랬어야지.”
가로 엔터의 재정 사정이 좋지 않다.
당장 망할 정도는 아니다. 홍규헌이 소유한 사업체들로부터 자금이 자꾸 흘러들어오고 있으니까.
하지만 홍규헌이 돈을 쓸 곳은 가로 엔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데뷔를 앞당겨야 해.”
“박 이사님은 최소 2년 이상을 예상하고 계십니다.”
“걔는 애들이 완벽하길 바라니까.”
현재 멤버들에게 쓰이는 돈도 부담이지만, 후일에는 육성 비용이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 상태를 2년 동안 유지하는 건 무리다.
때문에 한구인이 투자 유치를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준비를 하고 있지만, 투자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하다.
이미 가로 엔터는 아이돌 그룹을 한번 말아먹은 전적이 있었으니까.
“하아. 그냥 한 이사 네가 말해줘.”
“저한테 들으시더라도 바로 사장님께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문 팍 열면서 ‘사장님 말이 되는 소릴 지껄이십쇼!’라고 소리칠 거 같지 않아?”
“하하.”
농담을 해도 분위기는 좋아지지 않았다.
홍규헌은 성필의 꿈을 알았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진심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안다.
그러니 이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화내시긴 할 거 같습니다.”
“너 박 이사가 화내는 거 본 적 있어?”
“없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보겠네.”
홍규헌이 마음을 다잡고 결의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말할게.”
* * *
일주일의 시작, 월요일.
세상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날이다.
하지만 성필은 월요일이 좋았다.
멤버들이 연습하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성필이다.
주말은 쉴 수 있어서 좋긴 해도, 충실감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듯해 가슴이 공허하다.
그렇기에 성필에게 월요일이란 기다려지는 날인 것이다.
“박 이사. 현재 시점으로 가장 빠르게 데뷔한다면 얼마나 걸릴까?”
“으음, 애들 실력 완성될 거 고려하면 1년은 넘어야겠죠. 트레이닝에만 최소 2년?”
“너무 많아.”
홍규헌은 원하는 대답이 있는 듯했다.
성필은 긴장으로 등허리가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최대한 빨랐으면 좋겠어. 최대한.”
어찌 이런 시련이.
다시 일요일로 돌아가고 싶다.
“왠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홍규헌은 성필에게 돈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데뷔 준비 단계에 들어가면 안 할 수가 없겠지만, 아직은 트레이닝 단계다.
그녀가 직원을 대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이랬다.
‘네 날개를 펼쳐보렴.’
홍규헌은 성필의 자율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할 수 있는 만큼 존중해주었다.
단순히 생각하는 게 귀찮거나 계획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홍규헌이 가진 용인술(用人術)이었다.
직원을 부하보다 존중할 동료로 여기고 자발성과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런 홍규헌이 이토록 강경하게 의지를 강요하는 거라면, 필시 이유가 있다.
“회사 사정이 좀 그렇네.”
홍규헌은 이전에 프로듀싱했던 그룹, ‘서프레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무리 자금원이 있더라도 아이돌 프로듀싱은 돈 먹는 하마다.
데뷔나 활동 기간에는 많은 돈이 필요해진다.
퀄리티를 끌어올리려면 더욱더.
‘서프레스 걔네들 뮤비랑 무대는 대단했지.’
중소에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그런 반응이 나올 정도로 돈을 바른 느낌이 났다.
안타깝게도 트렌드를 벗어난 컨셉과 기묘하면서도 소극적인 마케팅 전략 때문에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다.
“투자도 받고 그랬지. 그게 지금은 다 빚이야. 내가 처음 멤버들 모을 때도 이미 어느 정도 역량이 있는 애를 모으자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지. 데뷔를 빨리하려고 그런 조건을 건 거야. 이해했어?”
“네. 근데. 그런데도 이렇게…….”
멤버들에게 아낌없이 지원해주고 있는 건가?
심지어 이후 트레이닝과 관리 스케줄을 보면, 지금보다 돈이 훨씬 많이 들 텐데?
이러다 준비만으로 돈 다 쓰는 거 아니야?
“알다시피 애들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돈이 꽤 나가잖아. 그 기간을 최대한 단축해보자는 거지. 옛 투자자들도 독촉해오고 있어. 뭔가 보여줘야 하거든.”
“어른의 사정이네요.”
“너도 어른이잖아. 그래서, 어른 박 이사님 생각은 어때? 네가 생각하는 최대한은?”
성필은 홍규헌의 앞인 것도 잊은 채 한숨을 쉬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먼 곳을 보았다.
홍규헌은 그가 고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과연 성필이 어떤 대답을 해올까. 그녀는 초조함에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깍지를 꼈다.
마침내 성필은 답을 내고 홍규헌을 직시했다.
“1년.”
“1년?!”
처음으로, 홍규헌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겁에 질리기라도 한 듯 드문드문 말했다.
“아니, 너, 박 이사. 괜찮아? 1년이라니? 너무 짧지 않아?”
“제가 판단했을 때. 회사가 정말 위험하다면 그 기간 안에 데뷔하도록 할 수 있어요.”
“정말?”
“물론 부족하기야 하겠죠.”
“그, 그래. 부족할 거야. 난 분명 박 이사가 불처럼 화내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같은 말 할 줄 알았는데. 뭐어, ‘애들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어떻게 데뷔시키냐’고…….”
성필은 멤버들을 끔찍이도 위한다.
누구든 며칠 지켜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홍규헌은 성필과 대립하거나 싸울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애들도 중요하죠. 1년을 기한으로 잡으면 연습도 지금보다 더 빡세게 해야 할 거예요. 다들 많이 힘들겠죠.”
“그렇지.”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사장님을 위해 일하고 있어요.”
“……어?”
“사장님이 시키시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