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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2화 (52/760)

#052화

“아, 네……. 설하 씨 프로정신은 잘 알았어요.”

“죄송해요. 아이돌이니까, 아이돌이 될 거니까……. 그, 그리고 회사 내에서 했다가 밝혀지면 더 심각한 문제니까요. 아, 아시죠, 아니, 이해하시죠? 또 연애하면서 연습생 생활하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저는 정말 진지하게 도전하고 있어서, 그래서……. 나, 나중에…….”

“근데 사적으로 한 질문이 아니라요, 회사 입장에서 질문드린 거예요. 말씀하신 대로 설하 씨는 아이돌이니까요.”

“……회사 입장이요?”

그제야 백설하의 사고는 ‘연애 금지 조항’에 다다랐다.

얼굴을 가린 손바닥을 치우자 성필이 짓궂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옛날에 제가 보자고 했을 때도 데이트라고 착각하시더니. 연애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하긴, 설하 씨 나이대면 그렇겠죠. 연습생 생활도 오래 하셨고.”

예전에 백설하가 성필의 컴퓨터로 아이튜브를 봤던 적이 있었다.

그때 재생목록에도 ‘썸 타고 싶다’ 같은 제목의 영상이 있었는데, 한창 그쪽에 정신이 쏠려 있을 때이긴 하다.

모든 사고방식이 연애로 직결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성필도 겪었던 시기니까.

“나중에 활동 좀 하고 성적도 좋게 나오면 못 본 척 넘어가 드릴게요. 그때까지 조금만 참고 노력해요.”

연애 금지 조항이 있다 해도 아이돌의 연애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다.

얼마나 피 끓는 시기인가.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서 만나는 게 일상이다.

‘나도 옛날에는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긴 했는데, 불가능했지.’

전생에서의 오랜 경험으로, 성필은 그 분야에는 꽤나 유해졌다.

연애 금지는 연차가 쌓이고 성적이 나오면 비공식적으로나마 풀어주는 편이 낫다.

아예 연애 금지 조항에 데뷔 후 N년쯤 조항이 만료된단 내용을 넣어주기도 한다.

“설하 씨 지금 반응 보니까 검사 같은 것도 필요 없겠네요.”

“…….”

“남자친구는 없는 걸로 알게요.”

“…….”

성필은 그녀가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모습을 무시해주었다.

“다음으로 또 물어볼 게 있는데. 정말 진실하게 대답해주셔야 해요. 학폭에 관련되신 적 있어요? 학교 다닐 때 친구를 괴롭혔다. 돈을 뺏었다. 담배를 피웠다. 술을 마셨다. 안 좋게 보일 어떤 행동을 했다. 지금 바로 말해주세요.”

“없, 없어요.”

겨우 정신을 차린 백설하가 또렷이 말했다.

“학폭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아실 거라 믿어요. 숨기지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정말 없어요. 저는…….”

TMI로 학창시절 이야기까지 전부 들어버렸다.

“저는 연습생이랑 아이돌로 활동하느라 애들이랑 친해지지도 못했어요. 좀, 안 그래도 되는데, 애들이 저를 먼 사람처럼 대해서…….”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백설하가 울먹였다. 그녀는 학교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쟤 연습생이래’, ‘쟤가 걔야? 아이돌 하는 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친구들과 백설하 사이의 벽은 높아졌다.

백설하는 그게 한이라고 한다.

학창 시절의 추억다운 추억이 없는 것이 아직도 후회된다면서, 기어코 눈물까지 흘렸다.

‘이런 분위기가 되길 바랐던 건 아닌데.’

성필은 당황하면서도 백설하를 위로했다.

“아침부터 죄송해요.”

그렇게 상담은 백설하의 눈물로 끝을 맺었다.

성필은 백설하가 진정할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휴게실 문을 열려고 했다. 잠금에 막힌 문손잡이가 덜컹거렸다.

백설하가 티슈로 급히 눈물을 닦으면서 성필에게 괜찮단 사인을 주었다.

“왜 문 잠겨 있어요?”

문을 열자 나타난 건 장하양이었다.

“설하 씨랑 잠깐 얘기 좀 했어.”

“언니 울었어요?”

“어? 아니. 안 울었어.”

“음, 그렇구나. 이사님이랑 무슨 이야기 나누셨는데요?”

“별거 아니야. 아, 트레이닝 시간 지났네. 미안. 빨리 가자.”

백설하는 장하양을 끌고 휴게실을 나섰다.

백설하는 성필을 흘끗 보며, 남들에게 상담에 관해선 말하지 않겠단 사인을 보냈다.

점심시간, 성필은 소파에 누워 영어 가사를 외우고 있던 조아라를 불렀다.

“너 연애해?”

“아니요.”

“…….”

“뭔데. 왜 못 믿는 눈빛인데.”

조아라는 질렸단 기색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쓸었다.

“뭐, 이해는 해요. 내가 워낙 매력적이어야지.”

“잘 아네.”

“이렇게 쉽게 인정한다고?”

“인정하지. 그러니까 바른대로 말해줘. 남자친구 있지?”

“‘있어?’도 아니고 ‘있지?’. 아주 내가 그냥 신뢰도가 바닥이네. 뭐, 혹시나 해서 묻는데요. 있으면 어떻게 돼요?”

“…….”

“아 없다고! 없다고요!”

못 믿겠다.

조아라의 교복을 보면 더더욱 못 믿겠다.

아무리 봐도 학교에서 좀 날리는 애 같은데.

당연히 노는 남자애들과도 친할 것 같다.

처음엔 조금 기뻐하던 조아라는 계속해서 의심을 받자 억울해했다.

“나한텐 춤이 클럽이고 유흥이고 남자야! 애초에 말야 엉?! 매일 점심 먹기 전에 조퇴하고 춤만 췄는데 남자가 있겠어요?”

“…….”

“그만 의심하라고요!”

“혹시 핸드폰 보여줄 수 있어?”

“폰은 프라이버시잖아요.”

“흐응…… 아라는 남친이 있구나. 근데 잘 생각해. 지금은 서로 죽고 못 살더라도 나중에 헤어질 수도 있잖아. 그러다가 네가 아이돌이 됐다 쳐. 설마 설마 하지만, 걔가 너에 대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퍼뜨릴 수도 있…….”

“아악! 봐요! 봐요 그냥!”

“아냐. 프라이버시잖아. 다만 나는…….”

“보라고!”

조아라의 통화 목록은 씁쓸했다.

‘엄마’, ‘아빠’와 ‘아저씨’, ‘한의사님’이 반복될 뿐이었다.

가끔 댄스 학원 친구의 이름이 있긴 했다.

“너 진짜 연습 열심히 하는구나.”

“이제 만족했어요? 엉? 만족했냐고요. 속 시원해서 기분 좋으시겠어요.”

“의심해서 미안. 근데 너 학폭에 관련된 적 있어?”

“뭐예요 자연스럽게 화제 전환하는 거?!”

조아라는 투덜대면서 단호히 답했다.

“없어요.”

“…….”

“파하! 참나 진짜 돌아버리겠다. 또 의심? 방금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했으면서? 내가 뭐 그리 나쁜 년으로 보이는데요!”

“교복…….”

“교복 그까짓 거 좀 줄여 입을 수도 있지! 기본 교복 쌉구리잖아요! 나만 아니라 설하 쌤이랑 하양 언니 다 옛날에 교복 리폼했을걸요?”

“…….”

“뭔데. 아니, 진짜, 뭐냐고오…….”

조아라는 울 것만 같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까지 날 그렇게 봤어……? 내, 내가 뭐 애들 괴롭히고 그럴 거 같아요? 진짜, 진짜아 나쁘아…….”

“아냐 아냐 아냐! 난 우리 아라 믿었어! 그냥 좀 강하게 물어본 거야! 그래, 교복 그까짓 거 좀 줄여 입을 수도 있지! 근데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제라서 좀 강하게 계속 물어본 거야! 나는 말 안 해도 아라 믿고 있지 그럼!”

성필은 30분에 걸쳐서 조아라를 달랬다.

의심 두 번 받은 것으로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조아라는 성필이 자신을 불량하다고 생각해왔단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평소의 당찬 모습만 생각하고 백설하보다 강한 어조로 나간 거였는데…….

“미안. 정말 내 진심은 아니었어.”

“…….”

“내가 우리 아라 못 믿으면 누구 믿겠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지.”

울음이 그친 조아라는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한의사님이나 사장님도 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두 분은 물론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 안 한다니까 그러네.”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내가 바보였지. 너한텐 물어볼 필요도 없었는데 말야. 그렇지?”

삐친 조아라를 마저 달래주는 데는 20분이 더 걸렸다.

성필의 자존심까지 다 버린 화법과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들에 겨우 조아라가 웃음을 되찾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학폭했다고 하면 어떻게 돼요?”

‘퇴출’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성필은 아직도 의심을 끈을 놓지 않았다.

네 사람 중에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학폭과 관련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학폭의 대가가 ‘퇴출’이란 말을 듣는다면 자진해서 고백할 리 없다.

성필도 멤버들이 절대 그러지 않았으리라 믿었으며, 믿고 싶었다.

그래도 인생사 모르는 거니까…….

전생에서도 몇 번 데인 적이 있어서 절로 경계하게 됐다.

“학폭 했으면 뭘 어째. 죽을 때까지 피해자한테 사죄해야지.”

백설하보다 백배는 힘들었던 조아라의 상담이 끝났다.

다음은 장하양이었다.

저녁 트레이닝이 시작되기 전, 성필은 그녀를 따로 불러내었다.

“연애하고 있어?”

“아니요.”

장하양은 연기 학원에 오래 다녔다.

남자를 만날 통로는 충분했다.

아니, 굳이 통로가 없더라도 걱정할 만하다.

가끔 먹을 거 사러 편의점만 가도 남자 연락처가 10개씩은 추가될 것이다.

“음, 그래…….”

성필이 못 믿겠단 듯 어미를 살짝 끌었다.

그러자 장하양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핸드폰을 공개했다.

조아라보다 더 처참한 통화 목록이었다.

‘박성필 이사님’과 ‘한구인 이사님’만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됐다.

“안 보여줘도 되는…….”

문자함과 메신저까지 공개됐다.

더해서 인터넷 검색목록과 방문기록도 밝혔다.

“이제 그만…….”

성필은 가슴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듯했다.

장하양은 대체 무슨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걸까.

이미 성필은 기선 제압에서 패배했다.

“학폭 같은 데는 관련된 적 없지?”

“네.”

왠지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납득됐다.

장하양은 백설하처럼 자신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해주었다.

“학교에선 대부분 잠만 잤구요. 나머지는 아르바이트했어요. 학원비 벌려구요.”

“하양아…….”

성필이 장하양을 위로했다. 하지만 장하양은 학생 때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제가 선택한 건데 슬퍼하면 안 되죠. 전 행복했어요.”

“어, 어어. 그렇구나.”

“더 물어보실 거 있으신가요?”

“아니…….”

장하양은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역대 최단 시간 상담이었다.

밤, 멤버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이사님!”

리카가 기세등등한 태도로 성필의 앞에 섰다.

“저한테도 뭐든 물어보셔도 돼요! 연애라거나 그런 거요!”

보아하니 누군가에게 성필이 연애와 학폭에 대해 묻고 다닌단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요즘 연습은 할 만해?”

“에?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장하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줘.”

“하이(네)! ……더 물어볼 거 있으시잖아요! 마음껏 물어보세요!”

“빨리 돌아갈 준비해. 한 이사님 기다리시겠다.”

“아타시(저) 남자친구 없어요!”

“알아.”

“뭘까.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이고 혼자 이별 여행 가서 바다에 발 담근 이 기분은. 아, 저 이지메도 안 했어요!”

“알아.”

“어이어이! 아타시(저)를 믿고 있던 거냐구!”

선입견이겠지만, 부모님이 교사고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한국에 왔으니 불량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다.

진짜 물어볼 생각이 없던 건 아니고, 나중에 따로 부르려고 했었다.

복도 같이 뻥 뚫린 데서 물어볼 만한 주제가 아니었으니까.

“아타시(저)를 믿고 계시는 거네요!”

“믿고 있지.”

“리카야 빨리 내려와. 한 이사님이 기다리고 계셔.”

“아, 갈게요! 박 이사님 오늘도 오츠카레사마데시타(수고하셨습니다)!”

리카는 자신을 데리러 온 장하양에게 찰떡처럼 붙었다.

장하양은 그런 리카가 귀엽단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성필을 슬쩍 보았다.

성필이 오늘도 고생했단 뜻으로 고개를 까딱여주자, 장하양도 미소로 답해주었다.

‘방금 대화 들었나?’

다른 멤버들은 전부 따로 불러서 물어봤으면서 리카에게만 ‘믿고 있었다’란 말로만 퉁쳤다.

원래 그럴 계획이 아니었지만, 리카가 갑자기 물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멤버들이 알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장하양이 돌아본 것도 리카와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일 리카 다시 따로 불러야겠다. 그래야 애들이 오해하지 않겠지.’

그리도 또 내일에는.

‘애들 보고 숙소에 들어가라고 해야지.’

* * *

백설하는 기묘한 느낌에 휩싸였다.

오늘 아침부터 묘하게 조아라가 주변을 맴도는 듯했다.

그 이유는 단체곡 연습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조아라는 춤추느라 더울 텐데도 스웨터를 벗지 않았다.

“아라야.”

“왜요 쌤?”

“그 스웨터 예쁘다. 어디서 샀어?”

조아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백설하의 예상대로 스웨터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냥 먼저 말을 꺼냈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이거요? 그쵸? 예쁘죠?”

“응. 어디서 샀어?”

“이거 엄마가 만든 거예요.”

“에에 우소(거짓말)! 이거 가게에서 파는 거라고 해도 믿겠어!”

리카가 신기하단 듯이 조아라의 스웨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럴수록 조아라는 자신이 칭찬이라도 받은 듯 콧대가 높아졌다.

“엄마가 아빠랑 연애했을 때 아빠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만들어준 거예요.”

“그럼 이거 얼마나 된 거야?”

“20년은 넘었을걸요.”

“우와…….”

백설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20년 지난 스웨터가 아직도 멀쩡한 게 놀랍기도 했고, 스웨터 자체가 보통 솜씨로 뜬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라쨩이 바느질 잘하는 게 어머님 유전이었구나.”

“바느질은 내가 연습해서 잘하는 거고. 노력을 재능으로 돌리는 버릇은 안 좋아. 고쳐.”

“고멘(미안)…….”

어쨌거나, 아까 리카의 말마따나 스웨터는 가게에서 비싸게 팔아도 될 퀄리티였다.

“이제 아라쨩 거야?”

“응. 아빠가 나 줬어.”

“어쩐지 박시(Boxy)하더라.”

“우리 집안 가보로 물려줄까 봐.”

“에에, 아라쨩 결혼할 거야? 나랑?”

“아니. 이 스웨터는 나중에 남친한테 줄 거야. 그러다가 헤어지면 다시 받고.”

“그럴 거면 결혼할 사람한테 주는 게 낫지. 헤어질 때마다 돌려받는 건 뭐야.”

“나는 매 순간 진심일 거거든.”

리카는 오그라든 손가락을 보여주며 크게 웃었다.

조아라의 위협이 있고서야 겨우 리카의 웃음이 멈추었다.

“근데 정말로 가보 같네. 나중에 아라쨩 손주한테도 가겠다.”

그때까지 옷이 멀쩡할지는 모르지만.

스웨터 이야기로 한창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성필이 장하양과 함께 연습실로 들어왔다.

“앗, 이사님이랑 언니다. 이사님한테도 말해주자.”

“뭔 얘길 그리 재밌게 하고 있…….”

“이사님 아라쨩 스웨터 봐봐요!”

조아라를 본 성필이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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