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9화 (59/760)

#059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성필은 갑작스레 석세스 엔터를 나갔다.

석세스 엔터 사람들이 아는 정보는 편파적이었다.

김태훈 대표와 윤상열 프로듀서의 입에서 나온 게 전부였으니까.

그들이 성필을 좋게 말할 리 없었다.

“잘 지냈냐?”

“어, 네. 저라고 뭐 별일 있었겠어요. 형도 잘 지냈죠?”

어색한 분위기는 성필이 악수를 청함으로써 조금 부드러워졌다.

“여기 얘는 지금 우리 회사 연습생.”

“이시카와 리카입니다! 꿈은 아이돌이에요!”

“어, 안녕. 나는 민경섭. 꿈은 모르겠다.”

“리카. 얘는 신아름이야. 너랑 같은 연습생 신분.”

“안녕하세요! 이시카와 리카입니다!”

“안녕하세요. 신아름입니다.”

신아름은 리카가 들고 있는 핫도그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곧장 민경섭을 보았다.

민경섭이 고개를 저었다.

신아름은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고 입 모양만으로 ‘오늘만, 하루만, 제발 오늘만’이라고 했다.

“리카. 아름이한테 밤빵 줘.”

“에, 으으, 여기. 드세요.”

신아름이 제발 먹게 해달란 표정으로 민경섭을 보았다.

그는 두 눈을 딱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준 거니까…….”

순식간에 밤빵 한 봉지가 자취를 감추었다.

리카의 얼굴에서도 행복이 자취를 감추었다.

“형 혹시 프로젝트 포유 그거예요?”

“어. 아름이도 거기 나가?”

“네. 형도 알다시피 아름이가 제일 실력이 좋잖아요. 스포트라이트 좀 빵빵 모으려는 거죠.”

“너네 쪽도 한 명이야?”

“사정이 있어서요.”

전생에서 석세스 엔터는 프로젝트 포유에 연습생을 투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성필의 부재 때문에 미래가 바뀌어버렸다.

“잘됐네. 연습생인데 방송도 타고. 인지도도 올릴 기회고. 근데 왜 욕하고 있었어?”

“차에서 연기 나요. 계속 몰았다가 사고 날 수도 있잖아요. 고치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겠고. 암튼 돌겠어요.”

“새끼. 차 좀 바꾸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 바꾸더니.”

“아직 쌩쌩해요. 연기만 나지.”

“내 차 같이 타고 가.”

“그래도 돼요?”

“되지 그럼. 가는 길이잖냐. 네 차는 사람 불러서 고치게 하고.”

민경섭은 괜히 빼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 붙잡고 태워달라고 부탁할 계획까지 짰던 그였으니까.

아까까지 세상 다 산 얼굴로 있던 신아름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넷은 촬영 장소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민경섭이 조수석에 타려고 하자 리카가 재빨리 가로막았다. 민경섭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 올랐다.

“네가 조수석 타게?”

“네, 네에.”

“어어…….”

“경섭이 네가 뒤에 타. 아름이랑 100일 동안 못 보잖아. 같이 앉아서 고별인사라도 해.”

“고별인사는 무슨 군대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촬영장까지의 동행이 시작됐다.

리카는 성필과 둘만 있을 때보다 확연히 말수가 줄었다.

그렇다고 아예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곧 성필과 헤어지게 되니, 최대한 많이 대화하고 싶었다.

“한국은 산이 많네요.”

“일본은 없어?”

“일본도 많아요.”

“아아, 너 서울 벗어난 적이 없구나. 나중에 다 같이 어디 놀러라도 갈까?”

“네네네네네! 어디 갈 건가요? 부산? 제주도?”

“용인.”

“서울이랑 똑같잖아요?!”

민경섭은 둘의 대화를 듣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만담 보는 것 같았다.

반면 신아름은 어이없단 듯 눈썹을 꿈틀댔다.

“팀장님 이런 성격이었어요? 우리 회사 있을 땐 안 이랬잖아요. 같이 놀러 가긴커녕 혼자 놀러 가는 것도 막았으면서.”

“야. 석세스 엔터는 애들이 워낙 많아야지. 내가 신경 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아니면 뭐 너 나랑 놀러 가고 싶었냐?”

“아하, 팀장님 중소 가셨구나?”

“아름아. 우리 회사도 엄밀히 말해서 중소야.”

“……아무튼요. 근데 팀장님 왜 나갔어요? 윤상열 프로듀서 그 인간 진짜 상또라이 같아요.”

민경섭이 흠칫했다.

“얌마. 외부 사람한테 그딴 얘길…….”

“팀장님이 왜 외부 사람이에요? 윤상열 그 인간 됨됨이 알아보고 제일 먼저 나간 선구자지. 팀장님 제 말이 맞죠?”

“신아름.”

“네?”

“그런 말 하지 마.”

“뭔, 아니히, 자기 편들어줘도 정색하고 그래요. 옛날이랑 똑같네. ‘그른 믈흐즈 므아’.”

민경섭이 조심스레 성필의 태도를 살폈다.

“아름아. 이 말 들은 게 경섭이 아니었으면 어쩌게? 너 바로 윤상열이랑 김태훈한테 찍히는 거야.”

“봐 봐! 이젠 대표님한테도 그냥 김태훈이라고 하네. 그 인간들이 못살게 굴었어요?”

“그런 말 꺼내지 말라고. 그거 습관 돼서 아무 데서나 나오면 어떡하게? 너 데뷔하기 싫어?”

“하고 싶죠. 하아, 데뷔 죽도록 하고 싶죠. 근데 꼬리 흔드는 것도 한두 번이지. 윤상열 그거 악질이야.”

이젠 프로듀서도 안 붙이고 ‘그거’라고 한다.

“팀장님 있었을 때가 훨씬 낫지. 팀장님은 걍 혼내고 끝내잖아요. 들을 때야 화가 솟구쳐서 욕하고 싶지만, 끝나면 정말 끝난 건데. 그 인간은 한번 잘못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만해.”

“그믄흐애.”

성필은 훈계를 것을 그만두었다.

이미 석세스 엔터를 나왔으니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신아름도 성필의 편을 들어주고 싶던 거였는데, 성필이 원하는 반응을 안 해주니 조금 삐친 거였으니까.

‘내가 석세스 엔터에 있었으면 건물 뒤로 끌고 가서 울 때까지 한 소리 했을 텐데.’

안 그래도 민경섭이 신아름한테 뭐라고 하는 중이다.

성필 앞이라서 강하게는 못 하지만, 나름 이 자리에서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게 보인다.

효과는 그다지 없었지만 말이다.

신아름은 대충 호응해준 뒤 다시 성필에게 말을 걸었다.

“걍 팀장님 우리 회사로 돌아오면 안 돼요?”

“에.”

리카가 불안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 그녀는 성필의 기색을 살피려는 듯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것을 본 신아름이 장난감을 찾은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신아름은 조수석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위험…….”

“몇 살이에요?”

“열여덟이요…….”

“동갑이네. 말 놓자.”

“으, 응.”

“진짜 예쁘다. 혼혈?”

“일본인이요, 아니. 일본인이야.”

“으음, 그렇구나. 너네 이사님 우리 회사에서 데려가도 돼?”

“에.”

리카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자 신아름이 폭소를 토해냈다.

“개재밌어. 아니 팀장님. 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 거예요? 그냥 나라 잃은 얼굴이네. 아, 너 나라 잃었단 의미 알아? 나는 아는데. 너는 일본인이라서 알지 모르겠네.”

“야 신아름 조용하고 앉아!”

성필의 고함에도 신아름은 피식 웃을 뿐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석세스 엔터에서 나오니 성필이 화를 내도 약빨이 없었다.

오히려 약빨이 먹힌 건 리카였다.

리카는 처음 들어보는 성필의 고함에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그녀의 눈시울이 천천히 붉어졌다.

“에, 에?”

“아, 미안. 많이 놀랐어?”

“푸흐흐흨. 꿀 떨어지네.”

기어코 민경섭마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신아름의 손목을 붙잡고 억지로 자리에 앉힌 뒤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성필도 주눅이 들 정도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원래 민경섭은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성필이 나간 뒤로 많은 일이 있던 모양이다.

‘경섭이 이놈. 나 나가고 나서 많이 힘들었구나.’

연습생들을 휘어잡는 딜러이자, 직원들을 대신해서 욕을 먹던 탱커인 성필이 나가버렸으니 누군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으리라.

민경섭에게 한 소리를 들은 신아름이 조금 조용해졌다.

‘아름이 얘 그냥 오랜만에 나 만나서 신난 거 같은데…….’

성필은 풀 죽은 신아름을 보자 마음이 불편했다.

10시간 같던 1시간의 동행이 끝났다.

“형 고마웠어요. 가볼게요.”

신아름은 뚱해져서 성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민경섭은 신아름의 머리를 억지로 숙이게 했다.

“감사.”

“……태워줘서 감사했습니다아.”

“그래, 잘 가라.”

둘이 건물 안으로 향했다.

리카는 출발했을 때보다 훨씬 더 기분이 내려가 있었다.

성필은 그녀의 손에 캐리어 손잡이를 쥐여주었다.

“리카. 잘 다녀와.”

“네…….”

리카는 헤어질 순간이 오니 훨씬 더 울적해졌다.

성필은 자신의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 눈물 묻은 거니까 빨아서 써.”

“안 빨 거예요. 이사님도 제 눈물 묻은 셔츠 빨지 마세요.”

“그래. 그러던가. 마지막으로 할 말 있는데.”

마지막 말이라는 소리에 리카는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신아름이랑 가까워지지 마. 쟤 또라이야.”

“또라이라뇨. 사람한테 또라이라고 하는 건…….”

“선입견 가지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 그렇죠?”

“편견 가지라고 하는 말이야.”

“에에?!”

신아름에게는 재능이 있다.

춤이나 보컬 따위의 재능이 아니었다.

물론 그 재능도 있지만, 신아름은 사람의 강약을 판단하는 선천적인 직감이 있다.

그리고 그 직감을 이용해서,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꼬리를 흔든다.

반면 약하다고 판단되면 반동이 오지 않을 선까지 이용한다.

신아름 나름의 처세술이었다.

“리카 넌 마음이 여려서 잘 못 하겠지만,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상처받지도 말고. 사람은 개가 짖을 때 같이 짖지 않아.”

“아름이가 개인가요…….”

“아니. 아름이가 개란 게 아니라.”

성필은 리카와 눈을 맞추려고 구부렸던 무릎을 폈다. 그리고 리카와 만난 뒤 처음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를 비난하고 욕하는 세상 모든 사람이 개야.”

미디어에 노출되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성필은 그리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는 없다.

신경 쓰면 본인이 망가진다.

멘탈이 건전하고 강건하게 발달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리카는 아직 여리디여리다.

그러니.

“너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고개 숙이고 아양 떨 필요 없어. 대답해봐. 너를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은 전부?”

“개, 개예요.”

“잘했어.”

리카는 오묘한 얼굴이었지만, 성필이 칭찬해주니 마냥 좋아하며 미소를 보였다.

“이제 가봐. 열심히 해. 건강하고.”

“네! 이사님도 저 없다고 우시면 안 돼요!”

“너 가자마자 울 건데.”

“저도요!”

밝게 웃은 리카는 등을 돌렸다. 그러나 곧장 다시 돌아서 성필의 앞으로 왔다.

언제 웃었냐는 듯 또 울상이었다.

“마지막으로 안아주시면 안 돼요?”

“안 돼. 가. 그리고 돌아보지 마.”

누가 보면 어떡하는가.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차들이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편지 보내주셔야 해요.”

“응. 너도 매일 보내. 힘들다고 안 보내면 나도 안 보낸다.”

리카는 크게 심호흡한 뒤, 정말로 떠나갔다.

성필은 입을 막았다.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울겠다고 장난으로 말하긴 했는데, 떠나는 모습을 보니 진짜 울 것 같았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무언가 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성필 자신이 군대에 들어갈 때 부모님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과몰입 그만해라 박성필. 훈련소에서도 안 울었잖아. 여기서 울면 안 돼. 나중에 애들 해외투어 보낼 땐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며 성필도 등을 돌렸다.

그때 시야가 어두워졌다.

미래가 보인다.

* * *

“우리가 알아서 한다고요.”

프로젝트 포유의 메인 PD는 짜증이 극도로 달해 오히려 말투가 차가워졌다.

성필도 그에 뒤지지 않게 저기압인 말투로 받아쳤다.

“됐고요, 그쪽이서 알아서 하든 말든 난 관심도 없으니까 리카나 내놔요.”

“하, 돌겠네 진짜. 촬영 중인데 어떻게 내놓으란 건데요. 알아서 한…….”

“지금까지 알아서 했어요? 알아서 해서 이 꼴로 만들어 놨어요? 해결하려고 하긴 한 겁니까?”

리카가 합숙하는 동안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괴롭힘은 표면적이거나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그랬기에 리카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제작진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상태면 괴롭힘의 주동자들을 처벌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리카가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가해자에게 말 몇 마디 하고 끝낸 것이다.

“이봐요. 이렇게 밝혀졌으니 저희가 어련히 알아서 고치지 않을까요? 네? 그러겠죠? 저희도 뭐 연습생 애들 지내는데 그딴 일이 있길 바랐겠어요? 걔들도 마음 고쳐먹고 성실히 하겠죠. 그리고 애들끼리 생활하는 데 기 싸움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뭐요?”

“리카 말만 듣고 유별나게 행동한다고요, 그쪽이.”

성필은 PD의 생각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리카를 괴롭힌 주모자는 둘이다.

두 명 모두 방송 초기부터 인기를 끌어 항상 10위권 전후에 랭크되는 연습생이다.

프로젝트 포유의 인기를 담당하는 한 축이란 뜻이다.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시청률과 화제성을 최고로 치는 PD가 주모자를 쫓아낼 리 없다.

외부에 드러날 증거가 없다면 더더욱.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이딴 행동을 합니까? 리카가 외부에 못 알리도록 핸드폰도 못 쓰게 하고 편지도 못 보내게 하고?”

“그건 보안 문제라고요.”

“예예. 알겠습니다. 잘 알겠으니까 가해자들 내버려 두고 리카만 달라고요. 걔네 데리고 하든 말든 신경 좆도 안 쓰니까 리카나 내놔요.”

“야 이 시발 너 몇 살이야! 아까부터 참고 있는데 말 똑바로 안 해?”

성필은 조용했다.

PD의 욕에 겁먹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너무나 화가 나서 말도 안 나올 지경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참고 있던 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뭐 이딴…….’

리카도 자신이 괴롭힘당한다고 제작진에게 말했다고 한다.

표면적인 괴롭힘은 줄었으나, 뒤에서는 심리적이고 일상적인 압박이 계속되었다.

제작진 쪽에서 해결하지 못하니 리카는 외부에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작진은 리카에게 외부와 소통할 방법을 주지 않았다.

핸드폰도 주지 않고, 편지도 못 보내게 하고, 방송 끝날 때까지 참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어차피 너한테는 데뷔가 전부잖아.’

‘데뷔하고 싶잖아.’

‘참으면 돼.’

그게 피해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리카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필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

‘이 씹새들이 진짜…….’

성필이 리카의 소식을 알 수 있던 것도 제작진이 알려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여 방송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카가 아픈데도 소속사인 가로 엔터에 연락 하나 오지 않으니 성필이 직접 찾아와서 리카를 만나게 됐다.

더 화나는 건, 제작진 측에서 리카에게 ‘소속사에는 괴롭힘과 관련해서 말하지 마라’고 지시했단 것이다.

그런 주제에 PD란 인간이 하는 말이라곤.

“참아주고 있으니까 내가 등신으로 보이냐? 방송 도중에 나가면 감당은 가능해? 너희 회사 우리 방송국이랑 영원히 일 안 하려고?”

PD는 무언가 더 심한 말을 뱉으려다가, 작가들이 말림으로써 간신히 진정했다.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고요. 알아서 할 테니까 돌아가세요. 리카 잘되고 있잖아요? 이대로면 데뷔권 안은 무조건 확정이에요. 많이 흥분하신 건 알겠는데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시라고요. 저희가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제작진이 정말 해결해줄까?

아니, 해결될 수 있는 일인가?

설령 앞으로 괴롭힘이 없어진다 해도, 리카가 멀쩡히 방송에 임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가해자들과 수십 일을 함께 있는 게 리카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리카 데리고 가겠습니다.”

“안 된다니까요. 지금 리카 나가면 우린 어쩌라고요. 하, 몇 번이나 말하는지 모르겠네. 애초에 계약서에도 적혀 있잖아요. 못 데려간다고요!”

주먹을 꽉 쥔 성필의 눈에 핏발이 섰다.

고함을 뱉어내려던 때, 미래가 보였다.

또다시.

* * *

성필은 이현성 작가와 함께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웠다.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긴 한데요. 박 이사님 자업자득이죠. 프로젝트 포유 때 그렇게 깽판을 치셨으니까요.”

“근데 그거랑 이건 별개 아닌가요.”

“아시잖아요.”

“알긴 알죠. 그냥 답답해서 물어봤어요. 방송국 안에서 제 얘기 많이 하나요?”

“포유 끝나고 PD가 동네방네 다 떠들어댔죠. 박 이사님을 좋게 볼 수가 없어요. 방송국을 뭘로 보면 그딴 짓을 할 수 있냐……. 그런 식이죠. 아무튼 그래서…… 이쪽 음방 출연할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직설적인 화법의 이현성 작가의 배려였다.

희망고문 당하지 말고 빨리 마음을 접으란 것이다.

한동안 대화 없이 담배만 타들어 갔다.

그나마 옛날부터 친하게 지냈던 이현성이라 이렇게 성필과 말이라도 섞어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현성은 성필의 편이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방송국 내부에서는 분위기에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 찾아오셔도 안 바뀌어요.”

“…….”

“다른 쪽도 비슷하죠?”

“네, 그렇죠. 그나마 옛날 연줄로 음방 3개는 잡았는데……. 활동 기간 풀로 돌리는 것도 힘들 거 같대요.”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죠.”

이건 성필의 탓이 크다.

방송가에는 정보가 퍼지는 게 빠르다.

성필이 프로젝트 포유에서 억지로 리카를 빼 온 뒤, 그의 이야기가 사방팔방 퍼졌다.

어떤 PD가, 작가가 그를 좋게 볼까?

설령 성필이 그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함을 지르지 않았더라도 방송국에 찍히는 건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큰 회사도 아닌 중소 기획사가 촬영 도중에 연습생을 멋대로 빼갔으니 말이다.

수백 번 앨범을 돌리며 인사를 다니고, 무릎 꿇고 울고 불며 빌어도 음방에 내보내 줄 리가 없다.

이현성 작가가 안타까움을 담아 물었다.

“후회하세요?”

* * *

성필은 잠시 눈을 감고 미래를 되새겼다.

길지 않았다.

결정은 더 빨랐다.

“이딴 방송 안 나와도 되니까 리카 내놓으라고 시……!”

회의실에 분노와 고함이 족히 수십 분을 휘몰아쳤다.

잠시 후, 성필은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연습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리카가 있는 연습실 문을 열었다.

제작진들이 빠진 채, 연습생들은 다음 미션을 위해 삼삼오오 모여 토의를 하고 있었다.

“리카.”

연습생들의 시선이 성필에게 모인다. 그를 본 연습생들이 흠칫 놀랐다.

성필은 사람이라도 죽일 듯이 화난 표정이었다.

“박 이사님?”

연습생들 틈에서 리카가 벌떡 일어났다.

성필이 오라는 듯 손을 뻗었다.

“가자.”

리카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어, 어딜요?”

“회사로.”

“가는 건가요? 지금……?”

“응.”

“그럼 방송은…… 데뷔는요? 사장님한테는 뭐라고 말…….”

리카는 자신이 가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성필은 한마디로 리카의 변명을 막았다.

“이리 와.”

“…….”

성필은 리카의 손을 잡고 건물을, 촬영장 부지를 빠져나왔다.

곤경에 빠지는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리카를 데리고 나오는 이 순간, 성필은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없어야만 한다.

* * *

미래를 보았다.

그리고 미래에서 또 미래를 보았다.

‘리카의 데뷔가 확정적이라고?’

프로젝트 포유에서 상위권에 오른 모양이다.

‘그리고 괴롭힘을 당해?’

마치 성필에게 선택하라는 듯하다.

리카의 불행을 막겠느냐, 아니면 그녀에게 인내를 강요하고 인지도를 얻겠느냐.

선택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리카!”

성필이 부르자마자, 리카는 숙소 입구에서 등을 돌려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이사님!”

리카가 팔을 활짝 펼치고 성필에게 달려들었다. 성필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에, 작별 포옹해주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넌 지금부터 아픈 거다.”

“네?”

“맹장염이야.”

“저 맹장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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