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아니. 네가 맹장염이란 게 아니라, 맹장염인 척 연기해달라고. 맹장염 걸려본 적 있어?”
사람이 갑작스레 아픈 병이라 하면, 성필은 맹장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어느 연습생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무슨 큰 병인 줄 알아서 병원으로 갔더니 맹장염이라고 했었다.
“없어요. 근데 갑자기 왜요?”
“너 이 방송 나가면 안 될 거 같아.”
“에? 그럼 회사는요! 아타시(제)가 회사를 일으켜야 하잖아요!”
“리카.”
성필은 리카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 한 번만 믿어줘. 부탁할게.”
설령 가족이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선뜻 답하기 힘든 법이다.
하지만 리카는.
“믿을게요!”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성필이 당황할 정도였다.
* * *
프로젝트 포유의 메인 PD, 송철호는 떨리는 마음으로 창밖을 보았다.
연습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잘 될까 모르겠네.”
처음 기획을 냈을 땐 모두가 반대했다.
하지만 송철호가 어떻게든 성공시키겠다며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그가 자신의 경력과 이름까지 건다며 호언장담을 이어간 끝에, 결국 허가가 떨어졌다.
‘어차피 다음 작품에 내 경력이 걸리긴 했지.’
송철호는 오랫동안 마땅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가다간 자신만의 작품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PD 생활을 접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독이 든 성배’를 마시기로 했다.
화제성이 보장된 연습생 서바이벌 플롯을 쓰기로 한 것이다.
‘위에서도 버리는 패란 생각으로 프로젝트 포유를 승인해준 거겠지.’
하지만 송철호는 반드시 성공시키리라 마음먹었다.
반드시,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연습생들 얼마나 모였나 연락해봐.”
“네.”
이현성 작가가 핸드폰을 들었을 때, 갑작스레 문이 쾅 열리며 성필이 등장했다.
제작진들이 화들짝 놀랐다.
단순히 문이 거칠게 열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울기라도 한 듯 성필의 눈시울이 붉어진 데다가, 마치 가족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처럼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박 이사님?”
이현성이 아는 체를 한 것과 동시에 성필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가로 엔터테인먼트 박성필 이사라고 합니다. 송철호 PD님,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아픕니다.”
“……아파요? 저희 애…… 자녀분이요?”
그걸 왜 자신에게 말하는 거지?
“리카요. 저희 회사 연습생이요. 아픕니다. 맹장염인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방송에 출연 못 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진통제 있으면 받을 수 있을까요?”
“방송에 못 나온다니 뭔…….”
“우리 애가 아프다고요!”
송철호가 성필의 기세에 밀려 몸을 움츠렸다.
연습생이 방송에 못 나온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물론 병으로 인해 신체에 문제가 있으면 못 나오는 게 당연하고, 그 부분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연습생이 이탈하면 제작진도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다.
“가서 봐요. 막내야, 넌 진통제 찾아서 따라와.”
성필은 빠른 걸음이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달려 나갔다. 송철호와 그를 따른 몇 명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가는 도중, 송철호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텄다.
‘촬영하러 오자마자 맹장염이라고? 맹장염인 건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단순 변심 아니야? 아님 별거 아닌 이유로 아픈데 과장하는 거거나.’
리카는 성필의 차 뒷좌석에 누워 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는 중이었다.
보는 사람이 괴로울 지경이다.
“으, 으우, 이, 이사니임…….”
“아파? 많이 아프지?”
“아파요오……. 아타시(저) 왜 이래요……? 죽는 거예요……?”
확실히 많이 아픈 것처럼 보이긴 했다.
송철호는 탄식이 섞인 한숨을 뱉었다.
리카는 아무리 봐도 꾀병을 부리거나 사소한 고통을 겪는 수준이 아니었다.
“병원 가서 진단받으시고…….”
성필이 돌발행동을 벌였다. 리카의 배꼽 오른쪽 아랫부분을 손으로 꾹 누른 것이다.
리카가 발작하듯 몸을 튕겼다.
“끄아, 아, 아!”
리카는 고통 때문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맹장염이죠? 맹장염 맞는 거 같죠?!”
성필의 물음에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그들 중에 의사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아, 알겠으니까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세요.”
송철호는 리카를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그도 맹장염에 걸려본 적이 있어서 얼마나 아픈지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리카가 무슨 병인지 모르긴 했으나, 아프단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PD님. 방송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나가게 돼서 죄송합니다. 혹시 큰 병이 아니라면 일이 주 뒤에 복귀해도 될까요? 늦더라도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촬영 계획이 있는데 복귀는 힘들죠.”
“……그렇겠죠.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
“알겠으니까 빨리 애 데리고 가세요!”
더 놔뒀다간 리카가 죽을 것만 같았다.
성필은 다급히 차를 몰고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하아. 재수가 없으려고 그러나. 시작부터 연습생 한 명이 빠졌네.”
송철호는 미신에 민감했다.
그가 짜증에 머리를 벅벅 긁으니 다른 스태프들이 위로해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석세스 엔터의 매니저 민경섭이다.
‘……갑자기 저렇게 아프다고?’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이상하기도 이상한 상황이지만, 민경섭에게는 신경 써야 할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난 어떻게 돌아가라고?’
결국, 그는 다른 매니저의 차를 얻어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 * *
“사장님.”
[어. 리카 잘 데려다줬어?]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저 한 번만 믿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뭔 소리야 갑자기. 이유를 모르는데 어떻게 믿어? 뭘 믿으란 건데?]
“죄송합니다. 저 운전 중이라서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뭐?]
성필은 통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리카를 프로젝트 포유에서 빼 오긴 했지만, 그 뒤처리가 문제였다.
홍규헌에게는 뭐라고 말할까?
또 송철호 PD한테는?
아프단 이유는 써먹기 좋은 핑계였으나 증명하는 게 어려운 법이다.
“리카.”
“네!”
리카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성필을 보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신뢰가 뚝뚝 떨어지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나온 지 시간이 꽤 됐는데도, 성필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온전히 성필을 믿기로 한 것이다.
“연기 잘하더라. 연기 배워서 그런가.”
“에헤헤. 경험이 있으니까요!”
“맹장염 안 걸려봤다면서.”
“아파본 적은 있잖아요.”
“아, 그렇네.”
“근데 맹장염이 뭐예요?”
“몰랐어? 나도 정확히 뭔지는 모르는데, 배가 아파. 내가 아까 눌렀던 곳 있지? 거기가 아프대.”
“어? 저 도키도키(가끔) 여기 아픈데.”
“뭐?”
그러고 보니 미래에서도 리카가 갑자기 통증을 호소해서 방송에 못 나왔다고 했었다.
“시간 좀 지나면 괜찮아지고 그랬어요. 한 2년 전부터인가 계속 그랬는데. 근데 진통제 먹고 쉬면 안 아파져요!”
“…….”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맹장염입니다. 조기에 발견돼서 다행이네요. 수술받으셔야겠습니다.”
“손나(그런)!”
* * *
홍규헌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얼마나 급히 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리카는?”
“방금 들어갔어요.”
“수술만 하면 낫는대?”
“네.”
“흉터는?”
“안 그래도 제가 제발 흉터 안 남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했어요.”
“그래……. 리카는 많이 아팠대?”
병원에 오기까지 아픈 기색도 안 보였다.
“차 타고 가는 도중에 아픈 기색을 보이더라고요. 그러다가 촬영장에서 터졌고요.”
“어떡하냐. 하아. 많이 아팠겠다.”
홍규헌은 성필과 함께 리카가 수술을 다 받기까지 기다렸다.
얼굴에선 걱정이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성필로서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홍규헌이 리카를, 가로 엔터의 멤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프로젝트 포유에는 못 나가겠지?”
홍규헌은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미안한 듯했다.
“아니다. 당연히 못 나가겠지.”
“아쉽네요. 거기 나갔으면 인지도 쌓는 데 도움도 많이 됐을 텐데. 타이밍이 안 좋았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하필이면 이때 이러냐. 리카가 잘못했단 건 아니고. 아쉽네.”
물론 리카가 건강한 게 제일이다.
수술이 끝나고 리카는 병실로 옮겨졌다.
홍규헌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성필은 리카를 간호하러 갔다.
아직 마취가 덜 풀린 듯했다.
“……아.”
리카가 갑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반쯤 뜬 눈으로 성필을 보았다.
“이사님.”
“응. 나 여기 있어.”
“밥 드셨어요?”
“어? 응. 먹었지.”
“밥 잘 챙겨 드세요. 건강하세요.”
“고마워.”
마취에서 깰 때쯤엔 헛소리를 많이 한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말이 나오기도 해서 흑역사가 생기는 경우도 더러 있다.
성필은 웃으면서 핸드폰 녹음 어플을 켰다.
나중에 잔뜩 놀려줘야겠다.
“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왜?”
“연습해야 해요.”
“아픈데 무슨 연습이야. 쉬어.”
“안 돼요. 데뷔해야 해. 제가 회사를 살릴 거예요.”
“사장님이 들으시면 좋아하겠다.”
“저, 성공할 수 있나요?”
“그럼. 당연히 할 수 있지.”
“못하면요?”
“그럴 일 없어.”
리카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무언가 필요하냐 물었더니 ‘손’이라고 답했다.
성필은 손을 잡아주었다.
“이사님.”
“응.”
“성공 못 해도 사장님이랑 이사님들 탓 안 할게요.”
“……어?”
“실패해도. 안 유명해져도. 나중엔 그룹이 흐지부지돼도요, 이해해요. 아이돌은 그런 거잖아요.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실패하더라도 원망 안 할게요.”
“…….”
“저한테 부담감 안 가지셔도 돼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장님이랑 이사님들도 노력하고 계신 거 알아요.”
“아니, 넌 뭐 데뷔도 안 했는데 실패했을 때 얘기를 하고 있어. 부정 타니까 그만해. 너 미래라도 봤어? 우리 망하는 거야?”
“그러니까, 망하면요, 저도 이사님 안 싫어할 테니까요. 이사님도 저 싫어하지 마세요.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이해해주셔야 해요. 알겠죠?”
“…….”
성필은 젖어오는 눈가를 꾹 누른 뒤 웃었다.
“야, 너 한국어 이렇게 잘하면서 평소에는 왜 이상하게 말하고 그러냐.”
“리카 깨어났어?”
홍규헌이 병실로 들어왔다.
“아니요. 아직 마취 덜 풀렸어요.”
“흐응. 수술한 곳 보자. 으, 이거 너무 심하잖아. 흉터 남는 거 아냐?”
“시간 지나면 아문다잖아요.”
“와…… 진짜 아프겠다.”
“의사 선생님이 뭐래요?”
“가스 나오면 물부터 먹이래. 그전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면 안 되고. 근데 너 왜 리카 손잡고 있냐.”
“리카가 잡아달랬어요.”
“음…… 리카.”
리카는 홍규헌의 부름에 감겨가던 눈을 떴다.
“사장님?”
“어, 나야. 너 박 이사 좋아해?”
“네…….”
“사랑하는 거야?”
“……아니요.”
“한 이사는?”
“좋아요…….”
“사랑해?”
“아니요…….”
“아라는? 너 아라 사랑해?”
“아이시떼루(사랑해)…….”
“크흐흐흨. 재밌네.”
“애 놀리지 마세요.”
“하나만 더 하자. 리카. 너 나는 좋아해?”
“…….”
잠들었다.
“얘 자는 척하는 거 아니야? 야, 리카. 왜 나만 대답 안 해줘.”
“애 괴롭히지 말라니까요.”
* * *
리카는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수는 없었다.
누웠다가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땀을 뻘뻘 흘렸으니 말 다 했다.
“배에 구멍이 났는데 멀쩡할 수가 없지. 한동안은 숙소에서 쉬어.”
“아타시(저) 숙소에서 뭐 하나요?”
“알아서 놀아야지. 너도 쉬니까 좋지?”
“심심해요! 회사에 올래요!”
“안 돼.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쉬어. 쉬는 것도 일이야. 알겠어?”
“……하이(네).”
홍규헌은 리카에게 휴가를 주었지만, 리카에겐 휴가가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 건 리카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가끔 성필이나 한구인이 그녀의 상태를 보러 가긴 했지만, 리카의 외로움을 달래주긴 부족했다.
그래서 리카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이사님! 방금 TV에서 봤는데요, 사자가 고양이과란 거 알고 계셨나요!]
“알고 있었어.”
[에엑?! 아무리 봐도 사자는 개랑 더 비슷하잖아요!]
“그런가.”
성필은 시도 때도 없이 리카와 전화하며 수다를 떨어야만 했다.
리카가 요양을 취하는 동안 가로 엔터에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주간, 월말 평가제의 도입이었다.
이제부터 멤버들은 끝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도록 강요받는다.
물론, 쉽고 즐거운 과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처와 어려움이 즐비한 가시밭길이었다.
* * *
백설하의 댄스 버스킹이 끝났다.
몇 안 되는 관객이 소소한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저마다 갈 길을 갔다.
그런 관객에게도 백설하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잊지 않았다.
“가죠.”
“네.”
장비를 챙기고 차에 탔다.
백설하는 아직도 버스킹의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관객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숫자에 반응이 전무한 공연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무명의 버스킹이다.
도심도 아니라 쓸쓸함은 더했다.
그럼에도 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사실 자체가 흥분되고 엔돌핀이 솟는 일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성필은 회사에 오자마자 백설하의 버스킹 영상을 홍규헌, 한구인과 공유했다.
“뭐어, 박 이사가 알아서 말해줘.”
다음은 한구인이 찍어온 조아라의 노래 버스킹 영상을 확인했다.
“조아라도 박 이사가 말해줘.”
“네.”
두 사람은 저마다 보완할 분야인 보컬과 댄스 버스킹을 했다.
방에 박혀서 홀로 연습하는 것보다 버스킹을 하는 쪽이 실력 향상 면에서 좋다.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 서서 공연하는 경험을 쌓으면 후일 무대에 섰을 때 도움이 된다.
겸사겸사 아이튜브 채널에 올릴 영상도 찍고.
“용무 없으면 나가도 돼.”
사장실에서 나가자마자, 한구인은 걱정하면서 두 사람에게 너무 심하게 말하진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성필은 알겠단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가장 먼저 백설하를 불렀다. 둘은 영상을 함께 보았다.
“설하 씨.”
“네.”
“저 창피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