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6화 (66/760)

#066화

자연스레 성필의 옆에 착석한 리카는 손을 번쩍 들었다.

“사장님 국밥 하나 주세요!”

“어떤 걸로 줄까요?”

“어…… 어어…… ‘섞어’가 뭐예요?”

“사장님, 얘 주시면 안 돼요.”

“에에, 저 돈 있어요!”

“안 줄 거예요. 아가씨 놀리려고 물어본 거예요.”

“에엑?!”

한마음 국밥의 사장님도 홍규헌과 아는 사이다.

서프레스 멤버들도 예전에 식단을 어기고 한마음 국밥에 온 적이 있는데, 사장님이 죽어도 국밥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리카 여기 처음이야?”

“네.”

대견하다 리카.

가장 가까운 유혹을 항상 물리쳐왔던 거구나.

“지음 씨. 얘는 이시카와 리카예요. 가로 엔터 연습생이요.”

성필은 리카가 처음 들어왔을 땐 당황했다.

국밥집이 정지음의 집으로 가는 중간에 있기도 하고, 숙소에 줄 게 있어서 이곳에 오긴 했다.

그런데 설마 밤 1시 가까운 시간에 멤버가 숙소 밖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지음은 아직까지 외부인이다.

멤버들의 숙소는 알려지면 안 된다.

‘내가 경솔했네.’

하지만 어색하게 행동하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

“안녕하세요! 이시카와 리카입니다! 꿈은 아이돌이에요!”

“으, 와, 와아. 살면서 제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예쁘세요.”

리카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가 간헐적으로 웃음을 뱉었다.

“우후, 후, 후후. 이사님 들으셨나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데요?”

“살면서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셨거든.”

“그거나 그거나! 이분의 삶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저라는 거잖아요! 이분의 우주에서는 제가 세계제일 미녀예요! 버클리의 유아론(唯我論)에 따르면 그런 거죠!”

“버클리? 뭐?”

“앗, 버클리도 모르시나요? 박 이사님보다 제가 더 똑똑하네요!”

대체 한구인은 뭘 가르치고 있는 거지?

“하하.”

아까부터 정지음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래, 리카가 귀엽고 예쁘고 활기차긴 하지.

마음껏 봐도 좋다.

성필이 허락한다.

오히려 더 봐줬으면 좋겠다.

“아가씨, 드세요.”

사장님이 공깃밥 그릇 정도 크기에 기름기를 뺀 소고깃국을 가져왔다.

리카는 당황하면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힘차게 감사를 표했다.

“기름기가 전혀 없네요. 신기해요!”

리카가 고깃국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성필은 정지음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거기서 빨리 나오세요.”

리카에게 정신이 팔렸던 정지음도 불현듯 현실로 돌아왔다.

“유령 작가 같은 거 아니에요.”

“지음 씨 거기서 몇 년을 버텨도 이름 한 줄 못 올려요.”

“……그걸 어떻게 아시는데요?”

“돈은 제대로 받고 일하세요?”

“…….”

“뭐 밥이라도 잘 챙겨줘요?”

“…….”

“인맥이라도 소개해준 적 있어요?”

“…….”

“왜 계속 있어요?”

정지음은 국밥 그릇을 붙잡고 손을 떨었다.

분노를 삭이는 것이다.

성필에 대한 분노가 아닌, 권순영에 대한 분노였다.

“이거 외엔 줄이 없으니까요.”

청년은 어리다.

사회에선 성인이라고 하지만,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나이다.

그런 어수룩함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정지음은 그런 자들의 손아귀에 걸려든 것이다. 빠져나갈 틈이 없는 그물에 갇혀,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을 위안 삼아 계속 갇혀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가도 뭐가 있는데요.”

특히 엔터 업계,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업계는 폐쇄성이 훨씬 강하다.

외부에 알려진 정보 자체가 적다.

알려고 노력해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피상적일 뿐, 직접 겪지 않으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알 수 없다.

정지음은 권순영에게 착취당하는 것도 경험의 일부라고 세뇌당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예나 다름없는 유령 작가 일을 계속해 올 수가 없다.

“남아 있어도 뭐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성필의 말이 정지음의 뼈를 후벼팠다.

정지음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 그물 안에 갇혀있는 건, 밖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 대단하시네요. 스쳐 가듯이 보고서 제가 처한 상황도 아시고. 근데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뭐라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저도 알아요. 아는데 이러고 있는 거예요. 물론 이사님이 친절을 베풀어주시긴 했는데, 책임 없는 친절이잖아요.”

“그래서 계속 남아 계시겠다?”

“제 일이에요.”

이러다가 얼마 안 있어 고향으로 떠난단 말이지. 참으로 안타까운 삶이다.

나중에 성공하리란 건 안다.

하지만 지금의 고난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닐 터다.

미래에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정지음도 과거를 떠올리면 계속 울었으니까.

적지 않은 상처를 품고 있을 것이다.

“오빠 무슨 일 하시는데요?”

고깃국을 다 해치운 리카가 물었다.

정지음은 답하지 못했다.

‘작곡가’라고 답했어야 했다. 하지만 본인이 그 단어에 떳떳하지 못했다.

자신이 정말 작곡가인가?

그 생각 때문에, 정지음은 리카의 말을 고스란히 씹어버린 상황이 돼버렸다.

성필이 옅은 분노를 담아서 물었다.

“자기 직업도 못 말씀하실 정도로 자존감이 깎였는데도 계속 이렇게 사실 거라고요?”

“왜요. 이분이 뭐 하시는데요?”

“작곡가셔.”

정지음이 당황해서 성필의 말을 고치려 했다.

“저, 저는…….”

“작곡가님이구나! 유명하신가요?”

“아…….”

“잠시만요!”

리카는 사장님에게 종이와 펜을 얻어왔다.

그리고 삐뚤거리는 글씨로 ‘계약서’라고 적은 뒤 터무니없는 내용을 추가했다.

“나중에 유명해지시면 저한테 곡 주세요!”

“유명해지면요?”

“네! 모찌론(당연히) 돈은 드려요! 계약서 써주세요!”

“……?”

정지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전개였다.

“나중에 유명해지시면 곡 받기 힘들 거잖아요. 미리 약속받으려구요!”

“리카 너 엄청 이기적으로 보이는 거 알지?”

“선금은 제 미모로 지불할게요! 자, 마음껏 보세요!”

리카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여러 각도에서 자신의 미모를 보여주려는 듯했다.

정지음은 멍하니 리카를 보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계약서로 눈을 돌렸다.

시선이 아래쪽에 이르자, 정지음의 눈동자는 얼이 빠진 듯 거세게 흔들렸다.

[작곡가 ( )]

정지음은 자문했다.

지금의 자신이 이곳에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는가?

못 한다.

지금의 자신은 작곡가가 아니니까.

그럼에도 손은 펜을 잡았다.

펜 끝이 움직였다.

[작곡가 ( 鄭知音 )]

“어, 한자다! 시리토? 치논? 토모네? 다 여자 이름이네요!”

“창씨개명하지 마.”

“창씨개명이 뭐예요?”

“……아니다. 헛소리였어. 아무튼 지음 씨. 생각 잘해보세요. 지음 씨 말도 맞아요. 하지만 만약 나오신다고 하시면 저도 진심으로…….”

계약서 위로 눈물 자국이 나타났다.

음(音)이 번졌다.

성필은 입을 다물었다.

정지음이 웃으며 말했다.

“저, 작곡가네요. 작곡가였네요.”

* * *

정지음이 돌아간 뒤, 성필은 리카를 칭찬하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착하다, 리카.”

“맞아요. 저는 착하다구요! 그런데 뭐가 착해요?”

“그냥 착해.”

“에헤헤.”

리카는 정지음이 주눅 들어 있단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그녀도 연습생이 되기 전에는 배우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했었다.

하지만 성공에 대한 기약 없는 기다림은 그녀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리카는 한눈에 정지음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격려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평소보다 밝게, 그리고 나사가 빠진 것처럼 행동했다.

괴상한 계약서까지 내밀면서 말이다.

리카는 그가 꿈에 확신을 가지길 바랐다.

“더 칭찬해주세요!”

“근데 밤엔 왜 나온 거야? 이 시간에 나오면 위험하잖아.”

“편의점 가려구요.”

“먹을 거 사게? 언니들이 시키든?”

“아, 아니에요! 이사님 안녕히 가세요!”

“왜 날 보내려고 하지? 뭐지? 의심스러운데?”

“아무것도 아녜요! 전 편의점에 가보겠습니다! 따, 따라오지 마세요!”

“뭔데. 살 거 있으면 내가 사 줄게.”

“괜찮아요! 퇴근하세요!”

리카가 산 건 생리대였다.

편의점을 나오며 성필이 사과했다.

“미안.”

“바카(바보)…….”

숙소에 가기까지 말이 없었다.

리카가 평소보다 훨씬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으, 응. 저기, 이거. 사장님이 가져다주래. 곶감이야. 하루에 하나씩만 먹어.”

“감사합니다.”

리카가 올라간 뒤, 성필은 머쓱해져서 빨리 자리를 떴다.

‘사장님한테 생리대도 지원해달라고 말해야겠다.’

* * *

며칠 뒤, 정지음이 권순영의 작업실에서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권순영은 성필과 정지음의 관계를 연관 짓지 못한 듯했다.

“앞으로 어떡하시게요?”

[돈 벌어야죠. 고시원부터 나가야 작업이든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알바나 막노동이나,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려고요. 제가 가진 게 건강한 몸밖에 없잖아요.]

“잘되길 바랄게요.”

[넵. 감사합니다. 나오고 나니까 제가 왜 잡혀 있었나 싶네요. 서울은 이렇게 넓은데. 느리더라도 조금씩 해볼게요.]

그와의 통화를 마치고, 성필은 홍규헌을 찾았다.

“에헤헤, 사장니임.”

“뭐야. 나 소름 돋게 만들기 대회라도 열렸어? 상품은 뭔데?”

“에헤헤.”

“뭐냐고.”

“우리 멤버들 작곡 배우는 거 어떨까요?”

“드디어 나사가 하나 빠졌구나. 데뷔가 코앞인데 작곡? 작고옥? 춤이랑 노래부터 신경 써. 일만 벌여봤자 되는 거 하나 없어.”

“리카요 리카. 매주 조금씩만 배우는 거 어떨까 해서요.”

“리카가 배우고 싶대?”

“리카 피아노 좀 치는 거 아세요?”

“연습실에 키보드 그거?”

“네. 한 이사님이 ‘반짝반짝 작은 별’도 가르쳐 주셨어요. 이야, 잘 치더라고요.”

“그거 너도 배우면 바로 쳐.”

“…….”

“리카가 배우고 싶어 해?”

“물어보고 올까요?”

“하아. 뭔…….”

홍규헌은 성필의 계획을 안다.

추후 멤버들은 악기와 작곡도 배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네가…… 그 계획 있잖아. 아직 1단계 아니야? 2단계에서 수록곡에 직접 작사한 곡 넣고, 3단계에서 자작곡 넣기로 한 거 아니었어?”

“조금씩이라도 배우면…….”

“리카가?”

“네. 리카가요. 사장님도 리카한테 더 가르칠 거 없나 고민하셨잖아요. 작곡이 딱인데.”

리카가 작곡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성필은 정지음을 꼭 데려오고 싶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래에 수도 없는 히트곡을 만든 사람이 된다.

편곡의 천재라는 타이틀까지 달고 업계를 종횡무진 누비며 다니는 것이다.

성필이 회귀하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게 바로 리카와 정지음일 정도였다.

‘어떻게든 지음 씨가 작곡과 관련된 일을 하셨으면 좋겠어. 좋은 곡이 있으면 받아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와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했다.

아직 그의 명성은 없다시피 하다.

커리어의 시작부터 친해지면 끈끈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미래를 생각하면 작곡 레슨이든 뭐든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작곡은 진짜 오버야.”

“…….”

“마음 약해지게 비 맞은 고양이 표정 짓지 마.”

“…….”

“비 맞은 강아지도 안 돼.”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저는 사장님을 이해합니다.”

“극존칭도 하지 마.”

“그럼 있잖아요.”

“또 뭐?”

“제가 기가 막히는 작곡가를 한 명 찾았거든요. 그 사람 불러서 같이 곡들 들어봐도 될까요?”

“기가 막힌 작곡가?”

정지음은 권순영에게 혹사당하면서도 곡을 꽤 만들었다고 한다.

설령 그의 곡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성필은 그에게 소정의 수고비와 자신감을 안겨 줄 생각이었다.

이런 기회를 가지는 것 자체가 정지음의 경험이 될 것이다.

“곡만 들으면 되지 굳이 불러와야 해?”

“인간 대 인간으로 보셨으면 좋겠어요.”

“이름이 뭔데?”

“정지음이요.”

홍규헌은 내일 바로 봐주기로 했다. 성필은 정지음에 연락해 소식을 전했고.

[저, 정말요? 제 곡을 사장님한테요?]

언제는 가로 엔터를 중소라고 부르며 은근히 깔봤으면서, 자신의 곡을 봐준다고 하니 대통령에게라도 불린 듯한 기색을 보였다.

[아, 예. 당연히 시간 있죠. 그럼 내일 바로 가면 될까요?]

그렇게 정지음과 친해지기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 * *

“박 이사님.”

“네.”

“여자도 사춘기면 성(性)에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겠죠?”

“사람이면요.”

“그렇군요.”

“그렇죠.”

한구인은 심란해져서 커피를 홀짝였다.

“아라 때문에 그러세요?”

“서, 설마 박 이사님한테도 해괴망측한 일을 저지른 겁니까?”

“해괴망측하긴 했죠. 한 이사님한테도 한 거죠?”

“예…… 성욕이 생기냐면서…….”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학구적인 목적이라고 하셔서 궁금해하시는 걸 가르쳐드렸습니다.”

“……?”

한구인은 멤버들의 지적 역량에 관심이 많다.

그는 멤버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지적 호기심을 돋워준다.

자연스레 그녀들에게 여러 지식을 가르쳐주는데…….

“뭐, 뭘 가르쳐줬는데요?”

“예술(藝術)과 외설(猥褻)의 차이에 대해서입니다.”

휴우.

“그런데 정말 그게 궁금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라 씨가 저희를 성적인 눈빛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몰라도 한 이사님은 충분히 대상이 될 수 있죠.”

“예?”

“그러게 누가 잘생기랬나.”

“박 이사님도…….”

“엎드려 절 받기 싫어요.”

“…….”

왜 조용해지는데.

성필은 내심 ‘빈말 아닙니다.’ 같은 말을 기대했다.

한구인 이 정직한 인간…… 밉다…….

“걱정입니다. 성형이라도 해야 할까요?”

“제 얼굴이 그 정도로 문제예요?! 평생 거울만 보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제 얼굴도 잘생겼거든요?!”

“아, 아니요. 저 말입니다.”

이런 사치스러운 고민은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본다.

여자들이 성적으로 볼까 봐 성형을 생각하다니.

심지어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는데, 그게 성필을 더 아니꼽게 만들었다.

“같잖은 고민 그만하시고 이제 일어나세요.”

“하하.”

한구인이 장난으로 성필의 팔을 살짝 쳤다.

성필이 놀라서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구인이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비속어를 쓰시기에 저희 관계가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서…….”

“…….”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성필이 웃으면서 한구인의 팔을 살짝 쳤다.

한구인도 웃었다.

“가죠.”

둘은 유리창 너머로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보고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지음 씨, 어서 오세요.”

천재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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