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일단 정지음의 그 곡. 편의상 일번곡이라고 부를게. 일번곡을 가져오는 건 더 생각해보자.”
홍규헌의 판단은 성필을 실망하게 하기 충분했다.
“다른 곡들도 잘 모르겠어.”
성필은 그녀의 결정을 뒤엎기 위해 반박하려 했다.
“대신 후원해보자.”
하지만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홍규헌이 곧바로 당근을 던졌다.
“후원요?”
“걔가 곡에 가이드 입힐 수 있게 해주는 거야. 지금 상황에선 그게 좋은지도 아닌지도 모르잖아. 형태가 나오면 그때 선택할 순 있겠지.”
성필의 얼굴이 밝아지자 홍규헌은 피식 웃었다.
정말 감정을 읽기 쉬운 사람이다, 그리 생각하면서.
“그리고 아까 말하려다 말았는데. 정지음 그분 직업은 있어? 얼마 전까지도 유령 작가로 활동했다고 하셨지?”
“아르바이트 찾으신대요.”
“리카한테 작곡 가르치자. 지음 씨가 맡는 걸로. 리카는 다른 애들보다 자율 시간이 많으니까 거기에 넣으면 될 거야. 다들 어떻게 생각해?”
홍규헌도 정지음과 가로 엔터의 인연을 이어가는 게 이득이 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리카의 작곡 레슨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곡 선택은 엄청 중요한 사안이야. 한 곳에 매몰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곡 수급은 지금처럼 여러 통로로 알아보기로 하자. 손 PD, 박 이사, 한 이사. 모두 수고해줘. 그럼 회의 끝. 아, 박 이사는 지음 씨한테 작곡 레슨 문의해보고.”
“알겠습니다.”
성필은 회의실을 나왔다.
같은 실내이지만 복도의 공기가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비록 성필의 의견은 관철되지 못했으나, 정지음과의 관계를 두텁게 할 수 있단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었다.
“박 이사님.”
1층으로 내려가려던 때, 한구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제가 투자유치를 위해 제작사 프로필을 작성하고 있는데, 박 이사님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저요? 회사 프로필에 제 정보도 필요한가요?”
“예. 석세스 엔터에 있었을 적에 아이돌 프로듀싱에도 손을 대셨지 않습니까.”
“아, 그건 프로듀싱이라기보단 뭐. 인원이 워낙 적으니까 제 의견도 반영되고 그랬던 거죠.”
“그래도 한 줄이라도 더 들어가면 좋으니까요. 당시 제작하셨던 그룹과 앨범, 혹은 마케팅이나 매니지먼트 사례 같은 걸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필은 부담스러웠다.
만약 가로 엔터에 제대로 된 프로듀서가 있었다면 그의 이름만 올려놓아도 효과가 있을 터였다.
모내기 철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고, 어떻게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성필의 이름까지 빌리는 것인가…….
“네.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죠. 그런데 지금까지 투자는 좀 받았나요?”
“하하, 아티스트 제작 단계에 들어서지도 않았으니 힘들죠. 지금까지는 주로…….”
한구인은 흠칫하고 정신을 차렸다. 성필에게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음, 원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지금 바로 말씀드리면 되나요?”
“네. 지금 괜찮으시다면요.”
한구인은 사무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취조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 앨범에선 어떤 역할을 담당하셨습니까?”
“디자인부터 재질, 수록 포토북이랑 가사집까지 전부요.”
“거의 박 이사님 손에서 나온 거군요.”
빠르게 타자를 두드리는 한구인의 눈에선 더 없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성필은 옛날이 떠올랐다. 그도 전생에선 투자를 받기 위해 여러 투자사를 찾아다니곤 했다.
그때마다 담당자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 이사님은 미국 벤처캐피털에서 일하셨다고 했지.’
아마도 한구인은 창업자나 기업가를 상대하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미래 가치를 보고 냉정히 투자를 결정하거나 거절했겠지.
하지만 이제 그 역할은 반대가 되었다.
한구인은 어떻게든 투자사나 투자자의 마음을 울려 돈을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성필이 하는 일보다 쉬울 리가 없다.
항상 긍정적인 한구인도 마음속에선 답답함과 괴로움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한 이사님이 더 고생하시죠.”
“저야 키보드만 두드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오랜만에 밖에서 저녁이나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그럴까요. 그럼 사양 않겠습니다.”
* * *
정지음은 노가다를 끝내고 집으로 왔다.
샤워를 마치자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아직도 어깨와 등이 뻐근했다.
‘작곡…… 해야지…….’
낡은 고시원이 그의 보금자리였다.
방 안의 유일한 가구 중 하나인 책상으로 정지음이 어기적어기적 기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몸이 울부짖는다.
‘그냥 누워서 쉬어!’
그럴 수는 없다.
일해서 힘들다고 꿈에 게으르면, 영원히 꿈에 다다르지 못한다.
‘……그냥 조금만 쉴까.’
정지음은 성필이 알려준 가로 엔터 멤버들의 SNS를 탐방하기로 했다.
일단 리카였다.
“뭐여.”
리카는 매일 세 장의 게시물을 올렸다.
출근샷, 일상, 퇴근샷.
아침, 낮, 밤이 반복된다.
표정에선 항상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네. 밤에 찍은 게 조금 더 피곤해 보여.’
팔로워 숫자도 별로 없다. 아직 데뷔도 안 했으니 당연한 것일까.
정지음은 자연스레 나머지 멤버들의 계정도 보았다.
가로 엔터로 갔을 때는 그녀들과 눈도 못 마주쳤었다.
뭔가 태양 같았다.
눈길을 주면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진은 괜찮았다.
“와…….”
장하양이 연습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짧게 눈에만 담았는데도 사람 같지 않은 비율이 정신을 사로잡는다. 거기에 시선이 얼굴로 올라가니,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내가 이런 분이랑 5m도 안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고? 아, 얼굴 좀 봐둘걸.’
정지음은 장하양과 백설하의 사진을 번갈아 보며, 두 사람 중 누가 센터일까 알아맞혀 보려 했다.
못 고르겠다.
조아라의 게시물은 특이했다.
매일 15초 정도의 댄스 영상을 올렸는데, 대부분 스킬풀한 것들이었다.
정지음은 팔 동작만 따라 해보려고 했지만, 조아라의 유연성이 말도 안 되게 좋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이다.
“아이튜브 채널도 있다고 했지.”
영상이 많긴 했으나 영상마다 제목이나 썸네일의 통일성이 없었다.
‘조금만 다듬는 게 좋을 텐데.’
정지음은 몇 개 보다가 그만두었다.
“…….”
이제 정말 작곡을 해야 한다.
아무리 몸이 나른하고 힘이 없더라도 꿈을 향해 달려 나가야……!
‘아, 무슨 홈페이지도 있다고 했었지.’
게으름에 져버렸다.
정지음은 성필이 알려준 가로 엔터의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사이트 디자인은 심플했다.
게시물이 날짜별로 올라와 있었다.
[20XX년 X월 XX일]
오늘이었다.
멤버들의 스케줄이 어땠는지, 어떤 연습을 했는지,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그런 간단한 정보가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사이트인가 싶은 호기심에 휠을 쭉쭉 내렸다.
“커버곡?”
[20XX년 X월 XX일, 백설하의 ‘네게로 가’ 커버]
아이튜브로 연결된 링크가 있었다. 타고 들어가서 커버곡을 들었다.
백설하의 얼굴을 측면으로 담고, 그녀는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불렀다.
‘잘 부른다.’
조회 수는 100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실력, 외모를 생각하면 후일 백설하는 유명 보컬 아이튜버가 될 수도 있을 듯했다.
정지음은 다시 홈페이지를 탐방했다.
게시물의 날짜가 점점 과거로 돌아갔다.
봄에서 겨울.
그리고 가을.
[20XX년 X월 XX일, 장하양 입사(入社)!]
여름.
[20XX년 X월 XX일, 조아라 입사!]
봄.
[백설하 입사!]
겨울.
[이시카와 리카 입사!]
“으엥?”
정지음은 깜짝 놀라서 입사 당시 리카의 사진을 확대해서 보았다.
“뭐, 뭐야.”
성형이라도 한 건가?
지금은 여신 같이 청초한 미(美)를 지닌 리카가, 과거 사진에선 옆집 여동생처럼 생겼다.
나쁘단 소리가 아니라, 옛날의 리카는 귀염상이었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성형…… 할 수도 있지. 아이돌이잖아.’
정지음은 그녀가 시간이 지나며 성장했단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글은 이게 끝인가.’
이 홈페이지에는 멤버들이 가로 엔터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 담겨 있었다.
정지음은 리카가 입사한 날부터 다시금 게시물을 전부 읽었다.
사진, 동영상, 멤버들이 직접 쓴 글 등등.
어느새 정지음은 그들의 여정에 몰입하고 있었다.
‘노력하고 있구나.’
이렇게 오랫동안 매일, 매일.
다시 가장 윗 페이지로 올라온 정지음은 묘한 충만감을 느꼈다.
마치 그녀들과 1년을 보낸 기분이었다.
그런 그에게 ‘후원하기’란 탭이 눈에 들어왔다.
[멤버들을 응원해주세요!]
후원비용은 1,000원이었다.
그 이상의 옵션은 없었다.
1,000원을 후원하면 멤버들에게 직접 응원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벌써 돈이 꽤 모여 있었다.
정지음은 홀린 듯 후원하기 버튼을 누르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응원합니다. 꼭 데뷔해주세요.]
‘엥? 한 번에 한 명한테만 할 수 있어?’
……밥 한 끼 안 먹지 뭐.
정지음은 4,000원을 후원해서 멤버별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인터넷 창을 끄고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악상이 떠올랐다.
* * *
오랜 시간 댄스 가수로 활동했던 손혜빈은 당연하게도 작곡가를 꽤 많이 알았다.
친한 이들도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엘릭이란 유명 작곡가다.
손혜빈의 데뷔곡을 썼던 게 바로 엘릭이었다.
둘 다 바닥이었던 시절이라, 당시 더 끈끈한 인연을 쌓을 수 있었다.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혜빈아. 쌩신인, 그것도 중소 쌩신인한테 내 곡을 어떻게 주라고!”
“못 줘? 안 줘?!”
“아, 아니. 나도 커리어란 게 있고, 걔네들 만나보지도 못했고…….”
“그럼 만나러 와!”
“나 바쁘다니깐…….”
“그럼 내가 걔들 스타그래프 계정이랑 아이튜브 채널 알려줄 테니까 봐! 보라고!”
“하아, 제발 내가 부탁하자. 걔네는 안 돼애……. 중소면 마케팅도 제대로 못 할 텐데 뜨겠니? 내 커리어에 망작 하나 박히는 거 못 본다고오…….”
“네가 망할지 뜰지 어떻게 알아?! 네가 신이니? 넌 뜬다고 생각해서 내 데뷔곡 줬어?”
“그땐 내가 어렸고…….”
“초심 찾아!”
손혜빈은 친구라는 이점을 이용해서 막무가내로 나갔다.
때로는 채찍을, 때로는 당근을 줘서 엘릭의 마음이 움직이도록 했다.
오랜 친구가 이토록 부탁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그 친구가 손혜빈이다.
평소에는 밥 한 끼 얻어먹는 것도 질색하며 기어코 더치페이를 하고 마는 손혜빈이다!
그냥 번갈아서 밥값 내면 되지, 진짜 귀찮기 짝이 없는 성격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혜빈이가 나한테 이렇게 세게 뭘 부탁한 적도 처음이잖아. 진짜 회사 애들이 마음에 드나?’
결국, 엘릭은 한 번 가로 엔터와 미팅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럼 그쪽 멤버 분들이 내 작업실에 오는 걸로…….”
“아하, 너 이제 귀하신 분 다 됐다 이거구나? 네다섯 명이 여기 오면 둘 공간은 있니?”
“아씨. 그래. 내가 갈게. 됐냐?”
“잘 생각했다 야. 너 항상 아이돌 만들어보고 싶다 뭐다 했었잖아. 혹시 아냐? 가로 엔터 와 보고 느낌 팍 올지.”
“투자해도 중소에는 안 하…….”
“이게 아까부터 중소 중소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네.”
“……미안.”
엘릭이 가로 엔터로 온다는 소식에 홍규헌은 물론 성필도 깜짝 놀랍다.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실에 한 번 들르기도 어려운 일인데, 직접 가로 엔터로 온다고?
“안녕하세요. 엘릭입니다…….”
손혜빈은 엘릭이 도망갈 기색도 없는데 팔을 붙잡고 있었다.
엘릭은 구속당하는 남자친구처럼 얼굴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간 채였다.
“어서 오세요.”
홍규헌은 1층 홀까지 내려와 엘릭을 맞아주었다.
사장실에서 나오는 게 드문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환대였다.
가로 엔터의 모든 임직원이 그를 보필하려는 듯 곁에 붙었다.
엘릭은 부담스러웠다.
‘혜빈이 부탁받고 오긴 했는데.’
귀찮고 피곤해서 죽겠다.
애초에 밖에 자주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익숙하지 않은 곳에 있단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쌓였다.
오랜 친구의 부탁이니 멤버들의 가능성을 최대한 찾아보려곤 할 테지만, 탑급 아이돌에 익숙해진 엘릭의 눈에 중소기업의 연습생이 들어오기나 할까?
‘나한테 어떠냐고 물어볼 때, 상처받지 않을 대답이나 생각해둬야겠다.’
다 함께 연습실로 들어갔다.
멤버들은 미리 준비한 대로 인사했다.
그녀들을 본 엘릭의 표정에서 피로가 싹 사라졌다.
‘비주얼이 상당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