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성필은.
“아…….”
같은 얼빠진 소리를 뱉어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
뭔가 말하려던 성필은, 핸드폰을 꼭 쥔 채 떨고 있는 이유이를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유이는 지금 상황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성필은 그녀의 부끄러움을 지워주고 싶었다.
재빨리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입력해주곤, 어색한 분위기로 흐르지 않도록 등을 돌려 연습실로 들어왔다.
“이거 봐. DM으로 이상한 거 온다니까.”
“미친. 경찰에 신고하자.”
“신고하면 경찰에서 잡아주…… 아저씨?”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세 사람.
리카, 조아라, 신아름이 성필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어? 뭐가?”
“뛰어왔어요?”
성필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방금 전의 이유이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성필은 조아라의 말을 듣곤 이마를 닦았다.
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예상. 강아지한테 쫓김.”
“에에, 박 이사님 강아지 무서워해?”
“응. 쪼꼬만 강아지도 무서워해.”
“카와이(귀여워)!”
그때 장하양과 백설하도 연습실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장하양은 도둑질이라도 하는 듯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닫았다.
마치 소리가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단 태도였다.
“이사님 그거 뭐였어요?”
“뭐가?”
“아까 그분이요. 스타일리스트분.”
“아…….”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저씨가 정상이 아닌 거 같긴 한데.”
그 질문에 백설하는 짐을 떠넘기는 듯 장하양을 보았다.
장하양은 방금 있던 일을 말해주었다.
리카가 꺄악 거리면서 조아라의 어깨를 팍팍 때렸다.
“날 왜 때리…….”
“들었어? 들었지?! 이사님이 번호 따였어! 진짜 이런 일이 있구나!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녔어!”
리카는 벌떡 일어나 성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김형선 실장님이라고 했죠? 어떤가요! 데이트하나요! 사귀나요! 결혼하나요?!”
“김형선 실장님이 아니라 어시님이야. 이유이 어시님.”
백설하의 설명에 비둘기처럼 펄럭거리던 리카가 우뚝 멈췄다.
“에? 어째서?”
불가해한 자연재해를 마주한 사람처럼, 리카의 눈동자에 소용돌이가 그려졌다.
그러곤 리카가 소리를 질렀다.
“10살 이상은 범죄예요!”
“10살 차이 안 나.”
“말도 안 돼…….”
“나도 동감이다.”
성필과 리카는 서로를 보며, 서로의 눈에 그려진 혼돈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모시카시테(어쩌면)…….”
“뭐 떠오르는 거라도 있어?”
“종교 권유…… 가 아닐까요?”
“아, 역시 그렇구나. 난 또. 휴우. 괜히 들떴다가 창피당할 뻔했네.”
“뭔 개소리예요. 누가 봐도 팀장님한테…….”
신아름은 장하양의 눈치를 보더니 단어를 바꾸었다.
“이사님한테 관심 있는 건데.”
“꺄아아아아악!”
소리 지른 것은 성필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리카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직접 본 언니들이 말해줘요. 어떤 분위기였어요?”
“어…….”
백설하는 또 짐을 떠넘기듯이 장하양을 보았다.
그 달콤하고 핑크빛의,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을 묘사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장하양이 단정 내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납득하지 않는 결론이었다.
“이유이 어시님은 업무적으로 이사님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야.”
“굳이 아저씨 번호 받아 갈 이유가 있어요?”
“이사님한테만 할 업무적인 이야기겠지.”
“그런가? 그렇겠지?”
“네. 그런 거예요.”
장하양이 흥분으로 흐트러진 성필의 티셔츠 어깨선을 정리해주었다.
“이사님은 기대하셨겠지만, 그런 거 전혀 아니에요.”
“그렇구나……. 하양이 말이니까 그런 거겠지.”
“…….”
백설하는 둘의 기묘한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치 장하양이 성필을 세뇌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분한테 연락 왔을 때 오해하면 곤란하잖아요. 이사님만 창피하실 거고.”
“어. 네 말이 맞아.”
“이사님 개인적으로 그분한테 관심 있으신 거면 따로 연락해보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안 뻗어가서 좀 흥분했어.”
“흥분?”
“Excitement.”
“아, 그거요.”
성필은 갑자기 실 끊긴 인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잖아? 맞지?! 나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지?!”
“소오데스요(그래요)! 이사님 생각이 맞아요!”
“누가 봐도 그거지.”
“팀장님 인생에도 봄이 오네요.”
성필이 19살들의 축복을 받는 가운데, 장하양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라니까요…….”
백설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본인도 알 수 없었기에.
* * *
주말, 이유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번호를 물어봐서 죄송하다, 그런 말부터 시작해서 약속까지 잡았다.
장소는 카페, 시간은 내일이었다.
성필은 옷장 앞에 서서 옷들을 눈으로 훑었다.
‘잠깐만.’
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지?
‘만약 유이 씨가 내게 호감이 있으면, 나는 받아들일 건가?’
대답은 금방 나왔다.
안 된다.
사랑과 일을 고르라면, 현재의 성필을 일을 고를 것이다.
순간의 욕정에 못 이겨 사랑을 골라봤자 결말이 좋지 않을 것은 안다.
일 년 365일 내내 일에만 투자하고픈 성필이다. 그런 성필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시간을 낸다 해도, 성필은 즐거움보다 피곤함을 더 느낄 것이다.
그건 이미 전생에서 증명됐다.
“…….”
거절하자.
특히 지금은 가로 엔터에게도 중요한 시기다.
애인에게 시간과 정신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한 순간 손혜빈의 말이 머리를 떠돌았다.
‘너는 평생 혼자 살겠다.’
그건 싫은데…….
‘그래. 혹시 모르잖아. 나랑 맞는 사람일지도.’
사회초년생이나 다름없는 20대 초반의 이유이가…….
‘말도 안 되지. 나를 이해해줄 리가 없잖아…….’
성필과 비슷한 나이에 나름 사회적인 입지를 쌓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새파랗게 어린 이유이가 성필과 맞을 리가 없었다.
대화 주제부터 사소한 생각 하나까지, 세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금세 침몰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성필은 아껴둔 옷을 오랜만에 옷장에서 꺼냈다.
침대에 눕는 순간까지, 성필은 심장이 쿵쾅거려서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 * *
결론부터 말해볼까.
장하양이 옳았다.
성필이 틀렸다.
이유이는 정말 업무적인 이야기로 성필을 만나고자 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왁스를 바르고 향수까지 뿌린 성필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두, 두세 번 정도 데이트하고 서로를 어느 정도 알아간 후에 고민을 열흘 정도 해본 뒤 명확한 거절의 의사를 전달할 생각이었지만……!’
어쨌거나, 장하양이 옳았다.
장하양은 인간관계에서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곤 했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패션 스쿨을 나왔거든요.”
이유이는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바로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디자이너가 될 필요가 없지만, 디자이너는 스타일링을 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스타일리스트 일을 시작했는데…….”
한국의 스타일리스트 업계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는 건 기본이고, 월급이라고 나오는 것도 40만 원이 전부였다.
‘유이 씨가 열심히 하셔서 이번 달은 5만 원 더 넣었어요^^’란 문자를 받고, 이유이는 정말 피를 토할 것 같았었다.
최저시급도 안 주고 일 시키는 주제에, 무슨 자랑이라고 5만 원 더 준 걸 생색낸단 말인가.
“정말, 정말로 열정밖에 없어요…….”
스타일링이란 것도 이유이의 바로 위 직급, 실장급이 전부 알아서 한다.
이유이가 의견을 낼 수 있는 건 정말 사소한 부분밖에 없었다.
팀에서 그녀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피팅이었다. 연예인이 입을 옷을 미리 그녀가 입어보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비주얼과 체형 때문에, 여성 고객 샘플 피팅은 이유이의 몫이 됐다.
“이럴 거면 피팅 모델을 했겠죠…….”
그렇게 이유이의 열정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하는 일이라곤 스타일링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들뿐이다.
협찬사로 옷을 받으러 가며, 연예인 옆에 붙어 있고, 옷을 받아서 다시 반납하는 일 정도.
무더운 여름에도 쉴 시간도 없이, 실장이 찾는 옷이 어느 협찬사에 있는지 확인하러 몇 시간이나 밖을 떠돌아다닌다.
“이건 스타일리스트가 아니잖아요……. 아무한테나 시켜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럴 거면 왜 패션 스쿨을 나왔을까.
가끔 이유이가 본인의 지식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선배들은 외국물 먹어서 좋겠다며 비꼬기 일쑤였다.
성필은 이유이의 신세 한탄을 들으며 생각했다.
‘심각하네.’
일단 데이트인 줄 알고 한껏 멋을 낸 본인의 꼴이 가장 심각했지만.
이유이는 정말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청춘과 열정이란 이름하에 젊음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이 씨가 한 일은 나중에 도움이 되기야 할 텐데…….’
2, 3년 차가 되면 이유이도 업계에 눈이 익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버티며 업무를 수행하면 독립할 수준의 인맥과 능력도 겸비하게 된다.
모든 신입 스타일리스트들이 그날만 바라보며 부조리를 감내한다.
‘그래도 월 40만 원은 너무하지.’
소중한 주말에 몇 번 만나지도 못한 사람의 신세 한탄이나 들어주고 있었지만, 성필은 이유이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해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이사님 말씀을 듣고요. 저 정말 감동받았어요.”
“……네? 저요?”
듣기에만 집중하던 성필은 갑자기 본인의 이름이 나오자 놀랐다.
“제가 무슨…….”
“그거요. 멤버분들께 입힐 건 코스튬이 아니라 패션이길 바란다고 했던 거요. 저 정말로 감동해서…… 이사님 같이 말하시는 분은 처음 봤거든요. 멋져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 정말 실례된단 건 알고 있지만요. 가, 같이 일해보고 싶어요! 가로 엔터랑요!”
“…….”
그런 것을 왜 자신에게 말하는 걸까.
왜 굳이 저한테? 그리 묻자 이유이가 송구스럽단 듯 대답했다.
“치, 친절하신 분인 거 같아서요…….”
“네. 제가 호구 같아 보이긴 하죠. 애들도 저 놀리고 그래요.”
“그런 뜻이 아니라요……!”
이유이는 허둥대면서, ‘여가 시간’ 촬영을 끝낸 뒤 성필과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때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저 그때, 진짜 울고 싶었어요.”
진짜 울었지 않나?
그것 때문에 화장도 번졌었다.
그래도 성필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힘들어도 버티란 말만 듣고 지냈는데……. 모르는 사람이라도 위로해주고, 제 편에 서주니까 너무 감사해서요……. 그래서요……. 아, 아,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걸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 아니, 감사합니다!”
“아까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유이는 성필의 생각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멤버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에서도 여러 영감이 솟았단 모양이다.
확실히 반응이 미지근했던 김형선 실장보다는 나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유이 씨.”
“네.”
이유이의 눈동자가 불안과 기대로 일렁였다.
마치 면접장에 들어선 사람 같았다.
“아까 실례되는 말인 줄 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맞아요. 이거 굉장한 실례예요.”
이유이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상사를 건너뛰고 바로 거래처로 달려온 거잖아요. 심지어 그 부탁이 소속된 팀을 빼고 자신과 일하자는 거고요. 이거 알려지면 업계에서 낙인찍히고 다신 스타일리스트 일 못 하실 거예요.”
일거리를 도둑질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 어떤 사람이 이유이의 행동을 곱게 볼까?
그녀의 사정을 들은 성필마저도 옅은 불쾌감이 올라오려는 마당이다.
물론 이유이의 사정은 딱하지만, 업계의 절차를 무시한 것도 좋게 봐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만약 비전이 있으시면 저에게 바로 달려올 게 아니라 실장님께 순서대로…….”
“상관없어요.”
“……뭐라고요?”
“상관없어요, 이사님. 저는 이사님 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이랑 꼭 같이 일하고 싶구요.”
여태껏 보아 온 이유이의 성격은 우유부단하고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가로 엔터의 멤버분들에게 패션을 입히고 싶어요. 거절당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김형선 실장님 밑에서 협찬받은 옷이나 나르고 싶진 않아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꼭 가로 엔터와 일하고 싶어요. 반드시.”
처음이자 마지막.
그 말이 성필의 마음을 울렸다.
웬만한 각오로는 이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으리라.
물론 이유이는 경험 삼아 스타일리스트 일을 한다고 했지만, 대충 그만둘 생각이었다면 험난한 스타일리스트 팀에서 1년을 버티진 못했으리라.
“유이 씨.”
“네.”
“만약이지만요. 제가 유이 씨의 감각이 마음에 들어서 같이 일하겠다고 정한다고 쳐봐요.”
“네.”
“그럼 당연히 김형선 실장님네 팀에게 맡긴 일도 없던 게 되겠죠?”
“……네.”
“그런데 김형선 실장님을 밀어내고 유이 씨를 들인 게 밝혀지면, 그쪽에서 저희 회사를 뭐라고 생각할까요? 그다지 좋은 쪽으로 보진 않겠죠?”
“…….”
“그쪽 업계 사람들한테 저희도 밉보이고 싶진 않거든요.”
이유이가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곧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다리로 향했다.
아예 고개를 푹 숙여버린 것이다.
얼마나 실망했으면 사람을 앞에 두고서도 저런 행동을 취할까.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이자 마지막,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 처음이자 마지막인 진심이 거절당한 것이다. 상심이 클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가로 엔터가 유이 씨와 일하는 건 상당한 손실을 감내하는 거예요.”
이유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저랑…….”
“같이 일하자는 게 아니에요. 유이 씨의 실력도 모르잖아요.”
“여, 여기 일러스트레이션 가져왔어요. 며칠 동안 멤버분들 생각하면서 그린 거예요.”
이유이가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것도 다섯 개나 말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수십 개도 넘게 그린 것이다. 웬만한 열정이 없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일에서 손을 놨던 것도 아니고, 김형선 실장 밑에서 밤늦게까지 일했을 텐데 말이다.
“봐, 봐주세요.”
성필은 스케치북들을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하나 감상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공을 꽤 들였네.’
크로키뿐 아니라 블로업(옷의 디테일을 볼 수 있도록 한 부분을 확대하여 그린 것), 플랫(옷을 납작한 형태로 그린 것)도 포함이었다.
한 장 안에 스타일링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었다.
그런 게 수십 장이 있다.
‘액세서리는 없고.’
액세서리를 한단 건, 옷 자체로 완벽하지 않단 뜻이었다.
이유이는 본인의 스타일링에 엄청난 자신감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 이건 스타일링이 아니야.’
디자인이다.
이유이는 이 모든 옷을 디자인했다.
존재하는 옷이 아니라, 곡과 안무 그리고 멤버들의 의견을 수합하여 패션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성필은 첫 번째 스케치북을 덮고, 다음 스케치북을 열지 않았다.
이유이가 입술을 짓씹으며 또 고개를 숙였다. 성필이 좋게 보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이 씨.”
“……예.”
이유이는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목소리를 깊이 눌러 담았다.
“내일 사장님 보러 가요.”
“……네?”
이유이의 일러스트레이션은 각 멤버의 특징을 전부 담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션에서는 옷을 입은 사람마다 체격과 얼굴형이 모두 달랐는데, 전부 멤버들의 실제 모습을 딴 것이 틀림없다.
이유이의 뛰어난 관찰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정도로 멤버들의 특징을 세밀하게 볼 수 있고 고려하는 스타일리스트, 아니.
디자이너라면 성필이 무릎을 꿇고서라도 데려오고 싶었다.
“제 기준에서는 합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