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흠.”
이유이는 홍규헌이 내는 작은 한숨이나 단순한 동작 하나에도 몸을 크게 떨며 반응했다.
그녀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반응이 너무 크다.
옆에 앉은 성필도 계속 신경 쓰이는데, 이유이의 맞은 편에 있는 홍규헌은 얼마나 신경이 쓰일까.
“흐음.”
하지만 홍규헌은 이유이의 겁먹은 움찔거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스케치북 페이지만 넘겼다.
홍규헌은 일러스트레이션을 볼 때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한쪽을 거의 몇 분이나 들여다보았다.
그게 1시간가량 이어지자 처음에는 곧았던 이유이의 허리도 점점 굽혀지고, 긴장으로 흥건했던 땀도 어느 정도 식어갔다.
이유이가 슬슬 긴장을 넘어 지겨움을 느끼고 있을 때 즈음.
“잘 봤습니다.”
홍규헌이 스케치북을 탁 덮으며 말했다.
“네, 네헥!”
반사적으로 답하던 이유이가 혀를 깨물었다.
그녀는 고통에 신음을 씹으면서도 홍규헌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제가 패션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이걸 그리시는 데 시간이 많이 드셨을 거 같긴 해요. 다 좋네요.”
이유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은데.”
다시 어두워졌다.
보통 ‘하지만’이나 ‘~인데’ 다음에는 안 좋은 말이 나오곤 하니까.
“굉장히 저희 그룹 애들한테 관심이 많으신 것도 알겠지만요. 이 안을 사용할 수는 없는 거 아시죠?”
“…….”
“저희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만들어진 거니까요.”
이유이는 홍규헌의 설명을 거절의 전조로 받아들였다.
이제 곧 홍규헌의 입에서는 ‘죄송합니다’란 말이 나올 것이다.
그리 생각한 이유이의 어깨가 점점 떨어졌다.
“이건 그러니까…… PR 자료인 거죠. 좀 과한 PR 자료요. 몇 장만 보여주셨어도 됐을 거예요.”
“……PR 자료요?”
“예. 저희와 같이 일해보자고 자기 광고하는 자료로,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그쪽에선 포트폴리오라고 하나요? 그래서 그 포트폴리오를 본 제 감상을 말하자면.”
홍규헌의 답은 성필과 같았다.
“제 생각으론, 제작 의상 디자인을 맡겨도 좋을 거 같네요.”
이유이의 표정이 전에 본 적 없던 수준으로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녀는 성필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자신과 함께 행복을 공유해달라고 요청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성필은 무시했다.
‘여기서 잘됐네요,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지.’
홍규헌의 말에 따른다면, 이 자리는 진지한 업무 협의 현장이었으니까.
이유이와 함께 기쁨을 표출할 수는 없다. 그랬기에 성필은 목석처럼 앉아 홍규헌만을 보았다.
“이사님 해냈어요!”
그런 마음을 전혀 모르는 듯, 이유이는 성필의 어깨 자락을 잡고 마음껏 기뻐했다.
“……네, 축하드려요.”
결국 성필도 이유이의 말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이유이는 뿌듯함이 잔뜩 담아서 다시 홍규헌을 쳐다보았다.
그에 맞춰 홍규헌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미 아시겠지만, 문제가 있어요.”
“……네?”
* * *
이유이가 돌아간 뒤, 성필과 홍규헌이 협의를 시작했다.
“김형선 실장네 팀이랑 마찰이 일어날 거잖아. 추측이 아니라 100% 서로 기분이 상할 거야.”
갑자기 김형선 실장에게 ‘이유이 어시가 준 일러스트레이션 봤는데 좋더라고요. 어시님한테 제작 의상 맡겨보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하는 순간, 문제가 터져 나올 게 자명했다.
“기분이 상하는 수준이 아니라 업계 관행이나 예의 같은 거 다 때려 처먹은 회사란 소문도 돌겠지.”
먼저, 이유이와 사석에서 만나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
그리고 그 대화의 내용을 김형선 실장의 팀에게 말하지 않은 것.
이유이의 상사인 김형선을 건너뛰고 곧바로 이유이와 업무를 논의한 것.
“나도 처음 이유이 얘기 들었을 때 뭐 하는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싶네.”
능력에 따라 일감과 돈을 받는 건 현대 사회의 당연한 법칙이다.
하지만 엄연히 절차와 법도가 있다.
그래도 스타일리스트 업계에서 가로 엔터의 평판이 떨어지는 거야 그다지 문제는 아니다.
‘외부인이 크게 관심 가질 일은 아니니까. 스타일리스트들이 단체로 가로 엔터에 보이콧할 리도 없고.’
진짜 보이콧이 있더라도, 그 틈을 파고들어 가로 엔터와 일하고픈 스타일리스트 팀이 훨씬 많을 것이다.
어쨌거나 기획사는 사용자의 입장이니까.
“손혜빈이 직접 섭외한 사람이란 게 또 문제지.”
손혜빈은 그녀가 가진 줄을 총동원하여 능력 있는 팀과 협업할 기회를 가져왔다.
옛날부터 친분을 쌓아왔다고 한다.
만약 이유이에게 제작 의상 디자인을 맡긴다고 하면, 김형선 실장이 불쾌할 테고 당연히 손혜빈도 불쾌해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걸리는 점은 이유이의 능력이야. 프랑스 패션 스쿨을 졸업했니 뭐니 해도, 실전 경험은 없잖아. 일러스트레이션만 보고서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도 이상하지. 김형선 실장네 팀은 업계의 베테랑이고. 그 팀이 머리를 짜내 만든 제작 의상이, 이유이의 안보다 더 나쁠까?”
그렇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유이의 능력이다.
그녀가 능력 검증이 끝난 디자이너라면, 홍규헌도 일말의 고민 없이 그녀를 택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걱정하는 부분인데. 박 이사 네 생각은 어때? 방법이 있어?”
“네, 어쩌면요. 유이 씨가 김형선 실장네 팀 속에서 일하면서도 디자인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뭐 얼마나 대단한 건데 뜸을 들여.”
“아뇨. 사장님이 실망하실까 봐.”
“뭔데?”
“그냥 실장님한테 여쭤보면 되잖아요. 유이 씨도 디자인에 참여할 수 있냐고요. 물론 우연히 그쪽 얘기가 나온 것처럼 짜야겠죠.”
“진짜 실망스럽긴 하네.”
* * *
이번 스타일링 회의에는 홍규헌, 성필이 함께 참여했다.
홍규헌은 사장이라는 직함으로 불리지만, 엄연히 총괄 프로듀서였다.
그녀의 의견과 의도가 프로듀싱의 제1원칙이니, 본격적인 대화가 오가는 두 번째 회의에는 참가한 것이다.
두 사람이 김형선 실장에게 받은 참고 자료를 다 보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성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김형선에게 물었다.
“스타일링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나요?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요.”
“요즘엔 있죠. 저 때는 그런 것도 없었는데 말예요. 근데 저는 학교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왜요? 그런 데서 배우고 오면 더 좋지 않나요?”
“어…… 일단 스타일리스트가 되는 데 정석적인 길이랄 게 존재하지 않아요. 물론 학교를 나온 애들이 스타일리스트가 될 확률이 높긴 한데, 그렇다고 전체에서 다수를 차지하진 않거든요.”
김형선 실장은 패션 잡지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현장을 구르다 보니 옷을 보는 눈이 생겼고, 우연히 스타일리스트 업계로 뛰어들었다는 모양이다.
“지금도 전문학교 안 나온 애들이 훨씬 많아요.”
김형선 실장에게서는 은근히 그런 학교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풍겨왔다.
학교와 현장은 다르다.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더욱 도움이 된다.
비록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그리 생각하는 게 말투에서부터 드러난다.
본인부터가 학교 출신이 아닌 데다가, 현 업계 사람들 대다수도 전문적으로 스타일링을 배우고 업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니까.
“와, 그러면 정말 스타일링을 모르고 스타일리스트가 되는 사람이 더 많단 거예요?”
“그렇죠. 저희는 업계 자체에 사람이 적고 하니까, 조금 도제(徒弟) 시스템으로 운영되거든요. 실장급 밑에서 몇 년은 배워야 사람 구실을 하죠.”
그러면서 김형선은 옆에 앉은 이유이를 흘끗 보았다.
이유이는 팀에 속해 있으면서도, 프랑스에서 패션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외국물 먹어서 좋겠네.’ 같은 조롱을 들었다고 한다.
“저희 매니저 쪽도 똑같거든요. 매니지먼트 학과? 그런 게 생기긴 했는데, 역시 몇 년 동안은 업계에서 배워야죠. 애초에 매니저 업무를 책으로 배운단 게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그렇죠? 정말이지…….”
성필과 김형선은 공감대를 발견하곤 몇 분이나 비슷한 주제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이 이야기가 시작된 때와 마찬가지로 성필이 갑작스레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그럼 이유이 어시님도?”
“아, 쟤는…….”
김형선이 대답하길 살짝 꺼려했다.
“쟤는 학교에서…….”
“오, 정말요? 어디 나오셨어요?”
“그, 이 어시 어디 나왔댔지?”
“파리 의상 조합 학교(Ecole de la 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 Parisienne)요.”
“파리? 파리면 프랑스 파리요?”
“네에…….”
이유이는 최대한 튀어 보이지 않으려고 기가 죽은 채 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는 실패한 듯했다.
김형선은 이유이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기 힘들어했다.
어쩌면 김형선은 학벌 같은 것에 열등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학파시네요.”
“하하, 아니에요. 그냥 별거 아니니까…….”
“파리 의상 조합 학교?”
대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홍규헌이 눈을 번쩍 떴다.
“거기 다녔다고요?”
“네, 네.”
“그럼 이브 생로랑이랑 동문이시네.”
“그으, 그게, 맞긴 한데 동문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그냥 그분이 대단하신 디자이너인 거고…….”
“이브 생로랑이라고요? 브랜드 생로랑(Saint Laurent)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사람 이름이었어요?”
“박 이사는 몰랐어? 자기 이름을 브랜드 이름으로 박은 거잖아. 코코 샤넬처럼.”
“전혀 몰랐어요. 그냥 티 하나 몇백만 원에 파는 덴 줄만 알았죠.”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이유이가 다녔던 학교로 전환되었다.
“이 어시님 부자셨네. 거기 1년 학비 7,000만 원 정도 되는데.”
“7,000만?!”
성필이 별세계의 것을 보는 듯 이유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유이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만 숙였다.
“근데 거기 패션 디자이너 키우는 학교잖아요.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쪽으로. 왜 디자인 일 안 하시고 스타일리스트 되셨어요?”
이유이에게 대화의 주제가 집중될수록 김형선의 저항감이 커져갔다.
김형선은 이유이가 유학만 한 줄 알았지, 그렇게 대단한 학교에 다녔단 건 몰랐다.
애초에 관심도 안 가졌었고,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성필의 의도가 없었다면 절대 대화의 중심으로 튀어나올 수 없는 주제였다.
“이야, 그럼 저희 이브 생로랑 동문한테 제작 의상 받는 거예요? 신기하네.”
“아니에요! 저는 제작에는 참여 안 하고…….”
“네? 왜요?”
성필이 정말 의문이라는 듯 김형선을 보았다.
이유이라는 인재를 뽑았다면, 제작 의상 쪽에 쓰리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성필의 순진무구한 질문을 받은 김형선은 불쾌해하지 못하고 당황해야만 했다.
“아…… 아직 이 어시는 제작을 맡을 역량이 안 되거든요. 이제 겨우 1년 차예요.”
“그런가요. 그럼 이 어시님은 회의 때 의견만 조금 내는 정도겠네요.”
아니었다.
1년 차면 겨우 의상 협찬사들이 눈에 들어올 정도에 불과했다.
샘플이나 의상 종류 익히는 것도 힘든 시기인데, 그런 햇병아리의 의견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말해야 했지만, 방금 들은 ‘파리 의상 조합 학교’란 이름이 김형선의 말문을 막았다.
입생로랑이랑 동문이라고?
그렇게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한국인의 고질병인 학벌주의가 김형선이 진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이유이 같은 인재를 데려와 놓고 의상 배달이나 시키고 있다니, 부끄러워서 말 못 한다.
“네, 그렇죠. 아직은요.”
결국 스타일링, 디자인 과정에서 이유이의 의견을 받는단 거짓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김형선은 동조하란 뜻으로 이유이에게 눈짓했다. 당연하게도 이유이는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시네요. 김 실장님이 비전이 있으시니까 유이 씨도 팀으로 들어온 거잖아요.”
“하하…….”
김형선이 성필의 말에 부정하지 않는 게 이어질수록, 이유이의 가치는 높아지고 있었다.
침묵으로 쌓인 거짓은 끝끝내 이유이의 입지를 강화할 것이다.
“잡담이 너무 길었네요. 애들한테 갈까요.”
오늘은 회의를 끝내고 간단히 아이들의 옷 치수를 재기로 했다.
연습실로 가는 중, 앞서가던 홍규헌이 던지듯이 말했다.
“이 어시님.”
“네?”
“저희 애들 사진 보셨잖아요. 혹시 뭐 떠오르시는 패션 같은 거 있으셨나요?”
“음, 조금…… 약간?”
“그럼 간단하게라도 떠오르신 거 크로키로 볼 수 있나요? 시간 너무 오래 걸리는 거면 안 봐도 되고요.”
이유이가 김형선에게 허락을 구했다.
떨떠름한 허락이 떨어졌다.
원래 남자인 성필은 치수를 재는 동안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으나, 이유이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는 동안만 입장이 허가됐다.
“나요!”
시험 삼아 의상을 그려준단 말에 조아라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이유이는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와.”
그녀가 선을 그리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졌다.
고작 선 하나지만, 그게 순식간에 두 개가 됐다. 몇 개의 선이 모여 단숨에 면이 됐다.
사람과 의상을 그리는 이유이의 손에는 거침이 없었다.
같은 일을 수천, 수만, 수백만 번은 해본 사람 같았다.
그렇게 사람과 옷의 형태가 완성되어가던 중, 갑자기 이유이가 화들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다시 그릴게요! 아, 이렇게 기초적인 실수를…… 너, 너무 긴장했나 봐요.”
이유이는 헤헤 웃으면서 스케치북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왜 그러세요? 잘 그리셨는데. 전문가 눈에만 보이는 실수 같은 거예요?”
“실수로 9등신으로 그렸어요. 모델 체형으로 그리는 게 습관이 돼서요. 죄송합니다. 관찰이 기본인데…….”
조아라는 9등신이 아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진실이지만.
그 말을 들은 조아라의 표정으로 당황이 퍼져나갔다.
‘내가 9등신이 아니긴 한데 왠지 기분이 안 좋네…….’
다시 나타난 이유이의 일러스트레이션 속 인체는, 확실히 아까보다 팔다리가 짧고 머리가 컸다.
조아라는 위축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유이의 눈을 보면 더욱 그랬다. 그녀의 투명한 눈망울은 조아라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기에.
마치 옷을 투과해서 맨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조아라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몸을 조금 꼬았다.
“다 됐어요.”
몇 분 만에 의상 크로키가 나왔다.
그것을 본 홍규헌은 짧은 감탄을 흘렸다. 그 감탄에 이유이가 부끄러워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갑자기 요청받은 거라서 제 오리지널은 아니구요. 요지 야마모토 스타일을 빌렸어요. ‘아니’ 곡이랑 컨셉 듣고 그분 디자인이 가장 먼저 떠올랐거든요.”
몸을 빈틈없이 덮은, 여유 있는 드레이프가 상징적인 패션이었다.
채색도 그림자도 선도 간소하게 나타난, 짧은 시간에 맞춰 빠르게 그린 크로키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유이의 능력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그분은 세상에 맞설 수 있게 여자들한테 갑옷 같은 옷을 입히고 싶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곡 컨셉이 자유와 저항이라고 하셨잖아요. 저항에는 몸을 보호할 갑옷이 필요하니까…….”
기쁨 때문인지 홍규헌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했다.
“100점이네.”
멤버들의 치수를 전부 잰 후.
“김 실장님. 잠시만.”
홍규헌이 김형선 실장과 독대했다. 성필은 회의실 안으로 사라지는 둘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빌드업은 다 쌓았다. 이제 남은 건 사장님이 김 실장님을 설득하는 거야.’
짧은 시간 후, 두 사람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둘을 배웅하자마자 성필은 홍규헌에게 대화의 결과를 물었다.
“제작 의상에서 이유이 어시 의견도 반영될 거야. 적어도 의견이 묵살되진 않아. 내가 그렇게 부탁했어.”
“감사합니다.”
“뭐가. 충분히 능력 있는 사람이더만. 오히려 이유이 어시 같은 사람을 끌어당긴 너한테 고마워해야겠지.”
홍규헌은 오랜만에 일을 했단 듯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앞으론 최종본 올 때만 나한테 보고하고, 나머지는 박 이사랑 손 PD한테 맡길게. 수고해.”
홍규헌이 성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사장실로 들어갔다.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성필은 뒤늦게나마 허리를 숙였다.
일을 하면 할수록 홍규헌에 대한 존경만 생겨난다.
세상에 어떤 사장이 이토록 부하 직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이번 이유이 사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안건에서 그러했다.
성필도 꼭 배우고 싶은 홍규헌의 일면이었다.
[이사님 감사합니다!]
그날 밤, 이유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돌아가선 김형선에게 갈굼당하긴 했어도, 제작 의상 디자인에 참여하는 게 결정됐다고 한다.
[전부 이사님 덕분이에요. 저, 정말로…… 용기 내서 이사님한테 말씀드려서 다행이에요…….]
약간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성필은 모른 척하며 이유이를 띄워주기만 했다.
“다 유이 씨가 능력이 있으셔서 그런 거죠.”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로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네요…….]
무슨 은혜라고 할 것까지야.
다 각자가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이해했으나, 성필은 이유이의 감사가 싫지 않았다.
성필은 꿈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유이는 오늘 꿈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런 사람의 감사를 들으니, 마냥 사무적으로만 대할 수는 없었다.
[저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빈말 아니라 진짜요!]
‘월 40만 원 받고 일하는 사람한테 대접받으면 내가 너무 미안한데.’
그래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일 테니, 거절하면 이유이가 창피해할 것이다.
“네. 나중에 밥 꼭 같이 먹어요.”
[네!]
* * *
영상 제작 회사 JJH의 사장이자 감독인 조정훈. 그는 얼마 전 가로 엔터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JJH는 광고는 물론 교육용 영상이나 기업 영상도 제작한다.
뮤직비디오도 수비 범위 이내, 아니. 오히려 조정훈이 누구보다 하고 싶어 하는 분야였다.
하지만 근래엔 그쪽 일이 끊겨 있었다.
“드디어 뮤비 일이 들어왔구나!”
조정훈은 기뻐하며 ‘가로 엔터’를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실망했다.
“영세 기획사네……. 이러면 예산도 적게 나올 테고…….”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프로덕션 과정 내내 돈에 쪼들리면서 촬영을 해야만 하겠지.
하지만 일단 미팅은 해야 한다.
바로 돈 이야기를 꺼내긴 뭐하니, 일단 그룹의 곡을 들어보고 컨셉을 파악하기로 했다.
“곡 좋네요.”
‘아니’를 들은 뒤의 순수한 감상이었다.
이어서 곡의 주제가 되는 키워드를 들었다.
“저항이랑 자유요?”
뮤비를 제작할 때마다 추상적인 키워드를 듣는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저항이나 자유 같은 건 너무 스케일이 큰 데다가 극도로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조정훈이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볼펜만 놀리고 있자, 다행히 성필이 추가 정보를 주었다.
“멤버들이랑 대화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멤버들이 곡에 대해 느끼는 걸 들어보면 분명 뭔가 더 나오실 거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추가 정보 자체가 아니라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조정훈은 의아해하면서도 흔쾌히 수락했다.
다섯 명의 멤버들을 본 조정훈은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저항과 자유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뭐예요?”
별생각 없이 대화의 물꼬를 틀려고 했던 질문에, 리카가 가장 먼저 답했다.
“에에, 명예혁명?”
리카가 백설하를 보았다.
마치 바통을 넘기는 것 같았다.
백설하는 갑자기 자신의 차례가 오자 당황하며 무심코 말했다.
“프랑스 혁명……?”
백설하가 이어서 조아라를 보았다.
조아라도 백설하처럼 반사적으로 답했다.
“러시아 혁명?”
당연한 수순으로 장하양의 차례가 됐다.
그녀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68혁명…… 68혁명?”
마지막, 신아름.
그녀는 당황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뭔 전부 혁명 이름만 나온단 말인가.
게다가 신아름은 프랑스 혁명 외에 다른 건 알지도 못했다.
여하튼 이 인간들, 줏대가 없긴.
리카가 혁명을 말하니까 전부 혁명 이름 아무거나 대는 꼴 하곤…….
“사, 사아, 음, 뭐더라…… 아! 4.19혁명?”
신아름은 자기가 아는 거의 유일한 혁명의 이름을 말했다. 그것도 얼마 전 수업 시간에 배워서 답할 수 있던 것이다.
그녀도 어쩔 수 없이 흐름에 순종해버리는 인간이었다.
모두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서 한 답이었지만, 가장 당황한 건 멤버들이 아니었다.
“……뭐라고요?”
조정훈 감독은 멤버들의 답에 당혹을 감출 수 없었다.
‘뭔 대답이 다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