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97화 (97/760)

#097화

“다시 해보자.”

백민정은 장하양의 잘못을 지적한 후 침착하게 동작을 이어갔다.

그녀를 배려해서 아까보다 더 느리게.

백민정도 장하양의 학습 능력이 낮다는 것을 안다.

장하양이 백민정네 학원에서 수업을 받으니 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하양을 가르쳤던 건 백민정이 아니었다.

‘듣던 것보다 심한데.’

백민정의 후배 트레이너가 장하양을 담당했기에, 말로는 전해 들었어도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

직접 보니 알겠다.

후배가 장하양을 가르치며 했던 푸념이 과장이 아니었단 것을.

“하양아 여기. 아까 네가 했던 동작 그대로 해볼게.”

“네.”

“여기 이거. 이렇게 하면 섹시하지 않아. 허리를 더 빼.”

“네.”

장하양은 자신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저 배움이 더딘 것뿐이다.

백민정은 그 말들을 수십 번이고 되새겼으나, 자꾸만 실수가 반복되자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왔다.

아니, 한숨을 넘어 화가 나려고까지 했다.

장하양 때문에 자꾸만 안무가 끊기니,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오늘은 이쯤 할게. 나 가고 나서도 쭉 연습해.”

성필은 연습실에서 나가는 백민정에게 다가갔다.

“수고했다.”

“아냐. 재밌었어.”

“재밌긴. 소리 지르는 게 딱 봐도 화난 거 같던데.”

“……미안.”

가르치다가 화가 나고 소리 지르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은 안무를 가르친 지 겨우 첫날이었을 뿐이다.

화를 내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있었다면 장하양의 안무 습득이 너무 느렸단 것 정도였다.

“그러면 안 됐는데…… 하아. 사과하고 가야겠어.”

“아니야. 하양이도 자극받았을 거야. 그러면 더 열심히 하겠지.”

“…….”

백민정은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장하양을 대했던 오늘의 자신을 떠올리니, 성격이 좋긴 개뿔 더럽기만 했다.

그녀는 자아 성찰을 하며 회사를 나갔다.

성필은 배웅을 끝낸 뒤 연습실로 올라갔다.

저마다 쉬고 있는 가운데, 백설하가 장하양을 위로하는 모습이 보였다.

위로하는 건 백설하이지만, 어쩐지 관계가 역전된 것처럼 보였다.

“하양아 괜찮아. 조금씩 하면 되는 거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아녜요 언니. 연습하면 되죠.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백설하는 지레짐작 장하양이 우울하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얘들아.”

성필이 부르자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한곳에 모였다.

“오늘 처음인데 느낌 어때?”

서로 눈치를 보며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성필로서는 의외였다.

당장에 조아라가 뛰쳐나와서 ‘좋았어요!’ 같은 말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조아라의 시선을 쫓아가던 성필은 이유를 알아냈다.

‘하양이 때문이구나.’

장하양은 이번 안무 레슨에서 엄청나게 지적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도 못 한 부분이 없던 건 아니었으나, 장하양이 독보적이다시피 했다.

‘하양이가 그런 상황이니 아라 혼자서 좋았다 뭐다 말하면 이상하게 보이겠지.’

성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들을 격려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어렵지? 나도 완성본 보고 혀를 내둘렀거든. 멋지고 좋긴 한데, 감이 잘 안 잡힐 거야. 그래도 뮤비 찍기까지 2, 3개월은 남았으니까 천천히 익히면 돼. 조급해하지 말고.”

첫날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멤버들도 감을 잡을 테고, 그때가 돼서야 격려를 할 것인지 채찍질을 할 것인지 결정해도 늦지 않다.

즉, 성필이 격려를 던지는 건 오로지 장하양을 겨냥한 것이었다.

“자, 그럼 나는 이제 나가볼게. 열심히 해.”

연습실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리던 중, 성필은 장하양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만 알아볼 수 있도록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 성필은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잘할 거야.’

하양이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애니까.

* * *

한 달이 지났다.

매일이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드디어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는 때가 찾아왔다.

계절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성필이 그것을 알아챈 건 온도가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이의 복장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반소매만 입던 그녀가 긴 소매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거 어떠세요?”

이유이가 검은색 직물을 성필에게 내밀었다. 성필은 그 직물을 검지와 엄지로 비벼보았다.

“보기랑 다르게 부드럽네요.”

“그렇죠?”

이유이는 헤헤 밝게 웃었다.

아이를 동물원에 처음 데려간 어머니와 비슷한 미소였다.

신기하지? 재밌지? 그런 감정이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제일 좋아 보여요. 여기 보세요. 검은색 긴 털들이 촘촘히 붙어 있잖아요. 이걸로 상의를 만들면 품이 클 거예요. 상체가 부풀어 보이겠죠. 옛날 귀족들이 입었던 것처럼요.”

“리카 상의요?”

“네.”

이유이는 조정훈에게서 뮤비 콘티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의상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녀는 각 멤버가 맡을 혁명을 고려해서 의상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리카는 뮤비에서 명예혁명 파트를 맡기로 했다. 그녀의 복장은 과거 영국 귀족과 같이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감성이 섞인 것이어야만 했다.

“가죽 바지는 귀족한테 어울릴까요?”

“승마 바지는 어때요?”

“승마 바지…… 아! 맞네요! 승마 바지!”

이유이는 던지듯이 직물을 내려두고 핸드폰에 메모했다. 성필은 다급히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직물을 받아냈다.

“와, 승마 바지…… 좋다…….”

이제 보니 메모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핸드폰 화면에 인체와 의상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성필은 레고 쌓기에 몰두한 어린아이 같은 이유이에게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거니는 중이었다.

‘이런 데가 있었구나.’

동대문 원단 시장.

이유이는 직접 직물을 고르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보통 스타일리스트들은 샘플을 가지고 양재사나 재봉사에게 의상 제작을 의뢰한다.

직접 옷을 만드는 건 그들의 일이 아닐뿐더러, 재봉사들도 저마다의 감각과 심미안이 있다.

혹은 의류 편집샵이나 회사에 의뢰하는 방법도 있다. 성필도 유명한 곳은 몇 개 알고 있었다.

‘재밌네.’

전생에서는 의상에 대해서도 의견만 내봤지, 의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진 못했다.

성필은 프로듀싱에 관해서라면 어떤 경험이든 쌓고 싶었다.

‘처음 유이 씨한테 연락 왔을 땐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와서 다행이야.’

이렇게 또 경험이 늘어났으니, 후일 이것도 성필의 자산이 될 것이다.

“지겨우세요?”

성필이 직물을 들고 잠시 넋을 놓고 있자니, 이유이가 조금 움츠러들어 물어온다.

“아니요.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요. 저는 막연히 공장에서 만들어지겠구나 생각했거든요. 신기하네요.”

이유이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녀는 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직물을 둘러보고 직접 손으로 만져보았다.

만질 때는 항상 눈을 감았다.

“보이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옷이란 건 입는 거니까, 입는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도 중요하잖아요. 눈이랑 손을 따로 두고 생각하고 싶어서요.”

이유이는 활기가 넘쳤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절로 겁먹은 생쥐가 생각날 만큼 잔뜩 위축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유이의 가방 안에 직물 샘플이 잔뜩 담기고서야 쇼핑이 끝났다.

“뒤에 일 있으세요?”

“아뇨. 요즘 전 일이 별로 없어요.”

할 일은 전부 끝마쳐 두었다.

굳이 일이라면 기다리는 것이겠지.

멤버들이 퍼포먼스를 완성시키길, 뮤비가 무사히 나오길, 의상이 잘 제작되길.

사실상 성필의 일이라곤 기도가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그으, 그럼 밥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사드릴게요. 저번에 사드린다고 했으니까요.”

월급 40만 원에게 밥을 얻어먹는 건가.

‘어린 조카한테 밥 얻어먹는 기분이네.’

“오늘 쇼핑도 도와주셨고…… 또…….”

“네. 그래요. 어디 맛있는 곳 아세요?”

성필의 승낙에 이유이는 산뜻한 걸음으로 그를 이끌었다.

메뉴는 놀랍게도 정식이었다.

둘의 사이에서 붉은빛의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었다.

이런 곳은 냄새 배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가격을 보니 납득이 됐다.

‘싸고 양도 많구나.’

김치찌개를 한 숟갈 먹고 ‘맛있다’는 평가도 추가됐다.

“유이 씨. 보통 자체 제작 의상 만들 때 회사 쪽 사람이랑 직물이나 샘플도 보러 다니나요?”

“아니요.”

이유이의 입술이 붉어져 있었다.

김치찌개가 매운 모양이다.

그녀는 매움에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보통은 직물 정하고 디자인도 정하고, 의상 제작할 곳에 보낼 의상 지시서라는 걸 쓰거든요. 그게 피니시(의상의 모든 부분이 표시된 최종안)인 셈 쳐서 기획사로도 보내요. 그걸 보고 기획사가…….”

말을 이어가던 이유이가 불현듯 입술을 꾹 물었다.

마치 말실수라도 했다는 것처럼.

“그리고요?”

“아…… 그러니까요. 그걸 보고 기획사가 컨펌하면 공장으로…… 의상 지시서를 보내고…… 그렇죠.”

“그렇구나. 그런데 오늘은 왜 저랑 같이 오셨어요?”

성필도 직물을 고르는 데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의상에 관한 대화도 많이 주고받았고.

하지만 굳이 성필이 필요했는가 묻는다면, 아니었다.

나중에 최종안을 보고 피드백을 전달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같이 직물을 고르면 상호작용이 매우 빠르다는 것 외엔 딱히 장점도 없다.

게다가 주말이고 하니까.

“아…… 아, 아.”

“매우면 물 드시고 얘기하세요.”

“네, 네.”

이유이는 물을 마시며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녀는 컵을 테이블에 두고, 드디어 매움이 좀 가셨는지 입을 열었다.

“이사님이…… 아!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멤버들한테 코스튬이 아니라 패션을 입히고 싶다고요. 그래서 뭔가, 이사님도 이쪽 일을 아시는 분이 아닌가 해서 같이…….”

“저 패션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하네요.”

오늘의 쇼핑은 성필에게도 공부가 됐다.

“그런 의도시면 손혜빈 PD나 멤버들을 데려오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미리 말씀 주시지.”

“아, 네. 그러게요. 그럴게요 앞으론…….”

조아라도 옛날엔 동대문에 자주 왔다고 한다.

댄스 대회 같은 곳에 가거나 공연을 할 때면 직접 의상을 제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인데, 조아라의 바느질과 재봉 실력은 상당하다.

천과 도구만 있다면 가게에서 파는 것 같은 옷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카페 가실래요? 후식은 제가 살게요.”

“네!”

둘은 카페에서도 의상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어느새 긴 해도 떨어져 어둠이 깔렸다.

“이런 건 어떠세요?”

이유이가 즉석해서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여주었다.

리카의 의상이었다.

귀족적인 풍모를 살리기 위해서인지 상의의 어깨 부분이 부풀어 있었다.

옛 귀족들이 위압감을 주기 위해 옷을 세워 입었던 것처럼.

“음, 좋네요. 그런데요.”

“뭐 마음에 안 드시는 곳이라도…….”

“컨셉을 살리려는 옷도 좋아요. 그런데 일차적으로 옷은 입기 위한 거잖아요. 우리 애들이 보기에도 좋아야 한단 건 당연하지만, 입었을 때 불편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유이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옷의 겉면만을 보여주었지만, 성필은 옷의 안쪽을 파악했다.

옷을 부풀리기 위해 안쪽에는 무언가 장치가 들어갈 것이다.

불편한 게 당연할 어떤 것이 분명 있다.

“옷은 보이기 위한 것보단 일단 입기 좋아야 하는 거니까요. 아무리 보기 좋아도 애들이 춤추면서 힘들진 않길 바라요.”

“…….”

“아니, 유이 씨 디자인이 안 좋단 건 아니고요! 그런 뜻은 없었어요.”

이유이는 우회적으로나마 비판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불쾌감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성필의 말 하나하나에 감명을 받는 중이었다.

성필의 말은 옛날, 그녀가 파리에 있었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다들 하는 착각이 있다. 너희들이 흔히 패션을 말할 때, 너희들의 패션은 그저 모델만 고려할 뿐이란 거지. 런웨이를 걷는 이들이 너희의 고객인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델처럼 9등신이 아니야. 평균적으로 7.5등신이라고(서양인 기준). 패션은 공상과 꿈에 걸쳐 있는 게 아니야. 패션은 어쨌거나 사람이 입는 것이다.’

학교의 강사는 그리 말하며 학생들의 디자인을 전부 찢어발겼었다.

저 무슨 미친 짓인가.

자신의 디자인이 조각나는 것을 보고 우는 이들마저 있었다.

‘너희들이 그토록 무시하는 패션이 뭔지 모르는 우매한 대중들, 그들이 바로 너희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들이 없으면 너희는 전부 굶어 죽는 거야. 이딴 디자인이나 가져올 거면 이 학교를 나가라.’

지금 생각하면 그건 꿈에 부풀어 현실을 못 보는 학생들을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현재의 이유이도 그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고 이 업계에 뛰어든 이유이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써먹을 곳이 없었다.

스타일리스트라는 이름만 지니고 단순 노동에 지나지 않는 일들을 해왔다.

“제 말이 너무 직접적이었나요……?”

“아니요. 이사님 말씀이 맞아요. 옷은 일차적으로 입는 거죠.”

이유이가 스케치북 페이지를 넘겼다.

“다시 해볼게요.”

가치 없이 지나 보냈던 1년이 지나고, 성필이 찾아왔다.

용기 내어 그에게 말해보길 잘했다.

근래의 한 달은, 그녀가 스타일리스트로서 살았던 1년보다 훨씬 가치 있었다.

아니, 오늘의 하루조차 지난 1년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

* * *

이유이와 보냈던 주말이 지나고 평일이 돌아왔다. 성필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기대하고 회사로 왔으나, 반겨준 건 평범한 일상이 아니었다.

회사로 오자마자.

“하양 언니 안무 파트 좀 빼주세요.”

신아름이 말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