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32화 (132/760)

132화

성필은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여니,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진 조아라가 보였다.

‘술 사와 달라더니…….’

성필은 손에 들린 캔맥주를 한참 바라보곤, 주저 없이 냉장고 안에 넣었다.

그리고 창가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불편했으나, 술기운 때문에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 * *

눈꺼풀을 때리는 햇볕에 성필이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햇빛은 아직 시간이 아침임을 알려주었다.

‘아라가 없네.’

먼저 일어나서 아카데미로 간 모양이다.

성필은 몸이 찌뿌둥하여 한동안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멍한 눈길로 방을 둘러보고 있자니,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캔이 보였다.

‘어제 냉장고에 넣어뒀었는데. 술김에 착각했나? 아닌데…….’

일어나 캔을 집었다.

절반 정도가 비워져 있었다.

조아라가 마신 듯했다.

그새를 못 참고 혼자서 마셨구나.

‘절반밖에 안 비운 거 보니까 맛은 없었나 보네.’

하긴, 인생 첫술인데 혼자 마시면 무슨 맛이 있으랴.

이 일을 계기로 조아라가 술을 싫어하게 되진 않을까?

‘나이스.’

술을 마신 조아라가 부렸던 패악질을 오랫동안 보아 왔던 성필로선, 그녀가 술에 관심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대표적으로 성필의 앞머리를 가스버너 불로 태웠던 게 있다.

그 일 때문에 조아라가 성필에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사과했었고, 그 뒤로는…….

‘떠올려서 뭐 해.’

성필은 기지개를 켜고 세면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성필의 얼굴은 간밤의 피로가 그대로 전해졌다.

양치하며 본인의 떡진 머리와 구겨진 옷을 보던 중, 목 부근에 뭔가 묻은 게 보였다.

손으로 조심스레 집으니, 머리카락이었다.

‘내 머리카락 아닌데. 길어. 검은색이고. 아라 건가? 어쩌다가 이게 내 목에 묻었지?’

성필은 별생각 없이 머리카락을 바닥에 버렸다.

* * *

“아, 머리야…….”

오늘따라 조아라가 이상하다.

진저는 자꾸만 관자놀이를 누르는 그녀를 이상하게 보았다.

레슨 한 타임이 끝나고 쉴 때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으으.’

진저는 조아라와의 거리를 한 걸음 더 벌렸다.

만리타향까지 와서 감기를 앓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레슨이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조아라와 붙어야만 했다.

듀오 댄스가 과제였으니까.

“굿 굿.”

마스터 칼이 박수를 치며 박자를 맞춰주었다.

두 사람의 숙련도는 날마다 올라가고 있다.

마스터 칼은 그런 둘의 성장은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대단합니다! 이렇게 빨리 완성에 가까워지다니요! 역시 프로 아티스트입니다!”

칭찬이 원래도 후한 그이지만, 이번 칭찬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프로’라는 칭찬에, 조아라는 쏟아지는 두통에도 밝게 웃었다.

반면 진저는 시큰둥했다.

‘넌 프로야. 대충할 순 없어. 잘하는 건 당연하고,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해.’

데뷔까지 신인개발부 직원들에게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마스터 칼의 ‘프로’라는 칭찬은 기쁘긴커녕 트라우마를 유발하기만 했다.

“오늘의 수업은 이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나가기 직전, 그는 둘에게 충고했다.

선생으로서가 아닌 어른으로서의 충고였다.

“두 사람 모두, 레슨에 진지한 건 매우 좋습니다. 칭찬이 아깝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왕 샌프란시스코에 왔으니 여행을 즐기십시오. 이곳엔 볼거리가 많습니다.”

그 조언을 받은 두 사람의 반응은 아까와 정반대였다.

조아라는 시큰둥했다.

‘여기가 제일 재밌는데 어딜 가?’

조아라에게는 춤이 클럽이고 남자고 유흥이고 이하 생략.

반면 진저는 그의 말에 기대감과 아쉬움이 몰려왔다.

‘샌프란시스코…… 관광하고 싶어.’

케이어스 멤버들은 진저가 미국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좋겠다며 설레발을 떨었다.

그러면 진저는.

‘흥. 전부 실력 향상을 위해서임미다. 놀러 가는 게 아님미다.’

라며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멤버들이 잠자리에 들면 숙소 거실에 놓인 컴퓨터로 몰래 다가갔다. 그리고 인터넷에 샌프란시스코를 검색하며 관광 명소를 찾아보았다.

‘케이블카, 금문교, 자연공원…… 가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진저의 자리는 그곳이 아니었다.

좁디좁은 레슨룸이었다.

이 커다란 도시에서, 진저에게 주어진 공간은 고작 이것뿐이다.

‘진저 씨가 행복하길 바라요.’

진저의 머릿속에서 성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녀도 모르게 떠오른 것이라, 진저는 몸을 흠칫 떨었다.

‘진저 씨가 아프길 바라는 사람 따위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그만두려 하지만, 이미 진저의 머릿속은 성필의 목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진저 씨가 행복하면 같이 행복하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요.’

성필은 그리 말했다. 그리 생각한다고 했다.

그게 팬의 마음이라고.

그렇다면, 지금의 진저는 행복한가?

진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밥 먹으러 갈게요.”

조아라가 연습실을 떠났다.

진저는 대답도 않고 창밖만 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신태웅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

“진저. 끝나면 홀에 있으라고 했잖아. 밥 먹으러 가자.”

“……네.”

둘은 식단에 맞춰 식사를 한 후,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진저가 멈춰 섰다.

“오늘 저녁 연습은 안 하고 싶슴미다.”

“어디 아파?”

신태웅의 사고는 당연히 그쪽으로 흘러갔다.

진저의 ‘안 하고 싶다.’는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당연히, 진저가 타당한 이유도 없이 연습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

진저는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오, 오늘은 쉬고 싶슴미다. 지금까지 매일 열심히 했으니까…….”

“……뭐? 쉬고 싶어?”

신태웅은 당황했다.

그렇다, 당황했다.

설마 진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하지만 이에 대한 매뉴얼은 존재했다.

신태웅이 진저와 함께 온 건, 트레이너로서 조언을 주거나 보호자 역할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진저의 나태를 방지하기 위함도 있었다.

“진저. 여기 하루 머무는 데만 해도 돈이 나가. 학원 강습비는 훨씬 많고. 네가 먹고 입는 것도 전부 돈이야. 여기 하루 있는 것만으로도, 내 일급(日給)보다 훨씬 많은 돈이야. 그 돈을 회사에서 왜 내주겠어?”

“…….”

“너 쉬라고, 놀라고 내주는 건 아니겠지? 너도 알잖아. 갑자기 왜 이래.”

진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신태웅의 말을 알아먹은 태도가 아니었다.

“아라 봐. 얼마나 진득하게 연습해? 물론 네가 더 열심히 하지만. 하루라도 안 하면 아라한테 뒤처질걸? 아라보다 더 좋은 걸 먹고, 더 좋은 숙소에서 지내는데도, 아라보다 낮은 결과를 낼 거야?”

진저는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널 믿어주신 정 이사님한테, 팬들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줄 거야?”

하지만 팬이라는 말에 진저의 기세가 다시금 살아났다.

“알겠지? 정 그러면 오늘은 조금 일찍 끝내도 되…….”

“아, 안 할 검미다!”

진저가 소리쳤다.

그 외침은 마치 총알과 같아서 신태웅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지금껏, 진저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말에 반항한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이 최초의 저항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힘듬미다! 아픔미다! 여기에 와서 매일 아침부터 새벽까지 연습했슴미다! 칼 선생님도 잘한다고 했슴미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검미까!”

“어, 어?”

“오늘은 쉬, 쉴 검미다! 그렇게 정했슴미다!”

진저는 신태웅의 답도 듣지 않고 숙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흘끔흘끔 뒤로 돌아보는 것이, 혼날 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신태웅은 멍하니, 사라지는 진저를 바라보았다.

* * *

“내가 맞춰볼게. 리카 또 바쁘지?”

[네.]

성필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백설하에게 전화했다. 웬만하면 백설하는 항상 멤버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녀와 통화하면 모든 멤버들과 통화하는 게 된다.

물론 그것 외에도, 멤버들이 따로 성필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그런데 리카는 백설하에게 전화했을 때도 받지 않고, 성필이 전화를 걸어도 급한 일이 있다며 끊고, 성필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모두 바쁘다는 핑계였다.

“갑자기 떠나가서 삐친 건가?”

[하하…… 모르겠네요.]

“옆에 리카 있어?”

[……음, 아니요.]

대답이 늦은 거 보니까 곁에 있는 듯했다.

“아쉽다. 리카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리카 목소리 못 들은 지 벌써 2주도 넘은 거 같아.”

이번에는 백설하의 침묵이 길다.

핸드폰의 마이크를 손으로 막은 듯한데, 작은 대화 소리는 들려온다.

그중에는 리카의 것도 섞여 있었다.

[리카가 정말 바빠서요. 죄송해요.]

“얼마나 바쁘면 내 전화도 못 받을까. 섭섭하네, 섭섭해.”

[……음, 네.]

아니, 이런 말까지 했는데도 전화를 안 받아?

이제 섭섭함을 넘어서 괘씸하다.

단순히 삐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니 답답하기도 하다.

“알겠어. 회사 사람들 말 잘 듣고 열심히 해.”

백설하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그녀가 숙소로 들어왔을 시간 즈음, 성필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리카가 왜 그러는 거지? 내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나?’

리카가 자신의 전화를 안 받는 이유를 꼭 밝혀내야만 한다!

백설하에게 간곡히 이유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니, 그녀는 곤란한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리카가…….”

* * *

약 4주 전, 리카는 어느 텔레비전 방송을 보았다. 밤에 케이블 채널에서 해주는 것이었다.

소녀연맹의 앨범 1만 장 판매 이후, 리카가 홍규헌에게 소원을 빌어서 숙소의 유선 채널을 다시 연결했었다.

덕분에 리카는 과거 장하양의 요청으로 끊겼던, 심야의 프로그램들을 볼 수 있게 됐는데…….

[남편이랑은 오피스 커플이었어요. 그러다가 결혼까지 했죠. 정말 서로를 사랑했고 그만큼 뜨거웠는데, 결혼 후에는 반대로 더 빠르게 식었어요. 저도, 남편도요. 어쩌면 좋을까요?]

부부 관계 상담 방송이었다.

리카는 빨려갈 듯 그것에 집중했다.

전문가(무슨 전문가인지는 모름)가 고민에 답해주었다.

[커플과 부부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물론 사랑하니까 계속 붙어 있고 싶겠지만, 때론 서로를 보지 않는 시간이 필요해요. 질문자분은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남편을 보니, 사랑이 빨리 식는 게 당연하죠!]

“소난다(그렇구나).”

[젊은 분들이 듣기에는 공감이 안 가실 수도 있는데, 사랑은 무한하지가 않거든요. 서로 보지 않으면서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잠시라도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어떨까요?]

“음, 사랑은 무한하지 않아. 커플과 부부도 똑같다면…….”

“리, 리카. 성인 방송을 보면 어떡해!”

백설하는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기겁해서 채널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당돌하게도, 리카는 리모컨을 든 백설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쌤.”

“으, 응?”

“아타시(저)는 이제 성인이에요.”

“어, 어? 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잖아. 며칠 더 기다려야 성인이지.”

“봐주세요오오! 지금이 재밌는 때라구요오!”

“…….”

백설하는 어쩔 수 없이 리모컨을 돌려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리카와 함께 앉아 그 방송을 보았다.

[부부도 밀당을 해야 한답니다! 사랑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에요!]

“소난다(그렇구나).”

“그렇구나.”

“……진짜 쓸데없는 거 본다.”

신아름이 핀잔을 주었다.

며칠 뒤, 성필이 미국에 머무르기로 했단 소식이 알려졌다.

우울해졌던 리카는, 멤버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활기를 되찾았다.

“좋은 기회야! 매너리즘에 빠진 나와 박 이사님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다질 기회!”

“뭔 매너리즘.”

“어…… 사랑이 무한하지 않은 것처럼 우정도 무한하진 않아! 아름이도 이해했지?”

“네가 멍청하단 건 알겠다.”

“머, 멍청이는 심하잖아!”

“알겠어, 바카(바보).”

“……마음껏 비웃어! 그리움과 애틋함은 거리와 시간에 비례한댔어!”

“어디서?”

심야 방송에 나오는 출처도 알지 못하는 전문가가 그랬다.

어쨌거나 리카는 밀당 계획을 실행했다.

성필의 전화가 걸려와도 받지 않은 것이다.

“한 이사님. 리카 좀 봐요.”

“왜 저러시는 겁니까? 리카 씨, 어디 아프신 겁니까?”

“아뇨. 팀장님이랑 전화하고 싶어서 저러고 있어요.”

“하면 되잖습니까. 왜 구석에서 굶주린 곰마냥 떨고 계신 겁니까? 지금도 설하 씨가 전화 중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리카 좀 보라구요.”

“네?”

“신기하니까 보라구요.”

“아.”

한구인은 신기하게 리카를 바라보았다.

동물원의 곰 취급을 당하면서도 리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 * *

“…….”

[…….]

“어이가 없네.”

진짜 어이가 없다.

[리카한테 말할까요? 이사님한테 이유 말씀드렸다고요?]

“아니.”

리카 요 녀석이 사람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려고 연락까지 전부 씹어?

대인관계 관리법을 텔레비전에서 배우다니. 심지어 그것을 자신에게 써먹다니!

“나도 똑같이 해줘야 속이 풀리겠어.”

핸드폰 너머의 백설하는 생각했다.

어쩌면 성필이 리카와 친하게 지내는 건, 생각하는 수준이 비슷해서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말해줘서 고마워. 그럼 리카한테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미안. 손님 왔어. 나중에 또 통화하자. 다음에 보자.”

[네. 이사님도 잘 지내세요.]

전화를 끊은 후 문을 여니 신태웅이 보였다.

그는 캔맥주가 든 봉지를 가지고 있었다.

술 마시자고 온 건가?

“들어오세요.”

“제가 방해한 거 아니죠?”

“아니에요.”

두 사람은 작은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성필은 그가 사 온 캔맥주 중 하나를 땄다.

반면 그는 손에 쥐고 있을 뿐, 마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사님. 아이돌들 많이 맡아보셨죠?”

“그럭저럭요.”

“그…… 혹시 아이돌이 엇나가거나 연습하기 싫어하면 어떡하나요? 보통은? 갑자기 도망간다거나. 아니, 도망간 건 아닌데…….”

“진저 씨 얘기예요?”

신태웅이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건의 내막을 말해주었다.

성필은 허허 웃었다.

“당연히 그러지 않을까요? 쉬는 시간도 없이 매일 연습했잖아요. 이 미국 땅까지 와서요.”

“그렇긴 하죠. 그렇긴 한데요. 지금까지 진저가 이런 적이 없었거든요. 항상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 애였는데, 갑자기 이러니까……. 혹시 제가 만만하게 보이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항상 성실하던 애였는데…….”

다른 케이어스 멤버들처럼, 성실하기만 했는데.

성필은 그가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신태웅은 진저가 얼마나 성실했으며 뛰어난 아이인지, 거의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신인개발부 직원들 모두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로, 진저는 끈덕지고 집념 있는 아이였단 것이다.

아이돌이 되고 나서도 나태해지지 않고 항상 앞만 보고 달려나갔는데, 갑자기 이런…….

“트레이너님. 아이돌도 저희랑 같은 사람이에요.”

“네? 어, 그렇겠죠.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니까요.”

“…….”

신태웅은 진저라는 사람이 아닌, 아이돌 진저라는 후광을 보고 있었다.

그도 이 업계에서 종사하는 사람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아이돌이란 후광에 집어삼켜졌다.

아이돌은 자신들과, 평범한 사람들과 달라도 뭐가 다르겠지.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깔고 있다.

그렇기에 진저의 상상을 초월한 노력마저도 당연하게 여겨버렸다.

“진저 씨는 아직 19살이잖아요. 어린애예요. 놀고 싶죠 당연히.”

“하지만 아라는…….”

“아라는 춤을 좋아해요. 여기 보낸 것도 걔가 춤을 좋아해서고요. 진저 씨가 춤을 좋아하시나요?”

간단히 답하려고 입을 열었던 신태웅은, 끝끝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진저가 춤을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도 없어.’

진저는 춤을 잘 춘다.

하지만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매일 아침부터 12시가 넘어갈 밤까지 하는 인간이 행복할까?

그건 학대잖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신태웅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진저 씨도 놀고 싶을 거예요.”

성필은 그의 손에 들린 캔맥주를 부드럽게 빼앗았다.

“오늘은 저랑 술 마시지 마시고, 진저 씨랑 같이 관광이라도 다니는 게 어떨까요?”

* * *

진저는 침대에 엎드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몸은 편했다.

하지만 가슴이 바늘로 찔리는 듯했다.

가시방석이란 이런 마음을 뜻하는구나.

‘말해버렸어. 안 하겠다고. 그러면 안 됐는데.’

자본주의. 능력주의. 경쟁주의.

이 눈부시게 번영했으면서도 척박한 세상에서 노력을 포기한다는 건, 곧 승리를 포기한단 것이었다.

세상은 패자에게 가혹하다.

끝없이 승자들과 비교당하며 자신의 못난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패배의 대가로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하는 건 덤이다.

‘연습해야 하는데. 이렇게 쉬면 안 되는데…….’

동시에 승자에게도 처절하다.

승자는 손에 원하는 것을 쥐고, 패자들을 바라보며 우월감을 느낄 권리를 얻는다.

그리고 승리한 즉시 또 다른 경쟁으로 뛰어든다.

승자는 다시금 승자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착취해야만 한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 쓰며, 나태한 자신을 채찍질하며, 쉴 때조차 죄책감에 휩싸여 있어야만 한다.

승자가 쓴 왕관의 무게는 결국 그 주인을 피폐하게 만들어버린다.

행복하기 위해 왕관을 쓴 것인데도…….

‘연습실로 가야…….’

똑똑.

노크 소리.

진저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이불을 덮어쓰고 없는 척을 하려다가, 곧 그게 어린애 같은 눈 가리기란 사실을 깨달았다.

진저는 바들바들 떨며 문을 열었다.

신태웅이 있었다.

“진저.”

“네, 네에…….”

신태웅이 렌트카 차 키를 보여주었다.

“금문교 보러 갈래? 밤에 보면 그렇게 예쁘대.”

“……!”

꿈인가?

진저는 몽롱해졌다.

“가자.”

금문교,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

꼭,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꼭 보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었다.

신태웅이, KS 엔터가 진저에게 휴식을 허락할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고작 말 한마디 했다고, 자신의 의견을 냈다고, 용기를 냈다고.

그래, 그저 용기를 냈을 뿐인데…….

“뭐해? 가기 싫어?”

“지, 지금 가는 검미다!”

세상이 바뀌었다.

* * *

“지, 진짜 괜찮은 거지?”

성필이 침을 꼴깍 삼켰다.

“네.”

조아라가 간단히 답했다.

“그래, 그럼…….”

성필은 창가에 널어둔 옷을 전부 봉지에 넣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 내일 한국으로 돌아갈게?”

“아 몇 번을 말해요. 가도 된다니까요.”

“조금 아쉽네. 또 비 맞은 고양이처럼 올려다 봐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성필의 심장이 폭행당했다.

“너 나 없다고 술 막 마시면 안 된다. 술 칼로리 엄청 높아.”

“안 마셔요. 저번에 마셔보니까 맛도 없더만.”

“절반이면 많이 마셨네. 근데 언제 마셨어? 아침에?”

“……음.”

“뭐야. 왜 고민해?”

“어, 아니, 기억이 잘 안 나서요. 밤에 자다가 깼던가. 언제 마셨지.”

“너 술 약한가 보다. 절대 술 마시면 안 되겠어. 앞으로도 그냥 마시지 마라.”

“그러니까 오기 생겨서 더 마시고 싶네.”

성필의 치밀한 계획이 실패해버렸다.

이대로 평생 조아라의 입에 술이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건만.

“그럼 오늘이 아저씨랑 마지막 밤이네요.”

“너 일부러 단어 선택 그렇게 하지?”

“왜요. 반응이 막 와요?”

성필이 헛웃음을 지었다.

문득 그녀가 처음 ‘미학 입문’을 읽었을 때가 떠올랐다.

갑자기 성필의 앞에 와서 ‘성욕이 생기냐’고 물어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전생의 조아라가 생각나기도 해서, ‘얘는 어른이 돼서나 어릴 때나 다른 게 없구나’라며 혀를 내둘렀었다.

그때에 비하면 ‘반응이 막 와요?’라는 물음 따위 아무런 감흥도 없…….

“당장 내 방에서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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