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성필은 ‘음악을 위한 동행’의 대략적인 촬영 방향을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해주었다.
백설하는 자신이 텔레비전에 나간다는 것과 그곳에 에리카도 나온다는 생각에 머리가 잘 정리되지 않았다.
대답 없이 자꾸 ‘아……’란 말만 반복되자, 성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바로 결정 내리라고 연락한 거 아니야. 너도 나름 고민해볼 시간이 필요하잖아. 내일 회사 오면 관련 자료 넘겨줄 테니까, 그 뒤로도 찬찬히 생각해 봐.]
“네, 넵.”
전화를 끊은 백설하는, 자신을 둘러싼 시선의 벽을 보아야만 했다.
“쌤 텔레비전 나가는 건가요!”
리카가 연예인이라도 본 듯, 실제로 연예인이지만, 호들갑을 떨면서 백설하의 팔을 흔들었다.
“프로그램 이름은 뭐예요? 누구 나와요? 경연 프로그램이에요?”
신아름도 리카 못지않게 흥분하여 폭포수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백설하가 동생들의 질문 세례에 시달리던 중,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아라가 비수와 같은 말을 던졌다.
“케이어스랑 같은 프로 나가는 거죠?”
그 말에 리카와 신아름도 호들갑을 멈추었다.
“으, 응. 그렇대. 이사님이 캐스팅 확정 난 건 에리카밖에 없다고 했……. 아, 리카. 일본인 분은 안 친한 사람한테 이름으로 부르는 거 실례랬지? 에리카 님은 성이 뭐야?”
“사쿠라바 에리…….”
“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경연? 거기서 에리카랑 붙는 거예요?”
신아름은 케이어스와의 승부에 굉장히 집착하는 듯했다.
“아냐. 경연 아니야. 그, 가수들끼리 여행하면서 작곡하고, 그런 거래.”
“……뭐예요 그게?”
백설하도 몰랐다.
가수들을 모아서 작곡 여행을 보낸다니.
송캠프도 아니고, 대체 무슨 컨셉인 것일까.
“아이돌만 모아서 하나?”
“에에! 왜 아타시(나)는 섭외 요청이 안 온 거야! 나도 작곡 잘하는데!”
다들 모르는 사실이었으나, ‘음악을 위한 동행’의 작가진들은 리카도 섭외망에 올려뒀었다.
하지만 소녀연맹의 미니 앨범 1집, 그곳에 실린 리카의 자작곡 ‘플레이리스트’를 듣곤 곧장 섭외 대상에서 제외했었다.
카와이 퓨처 베이스…… 아직 공중파 방송에서 받아들이기엔 이른 문화였다.
“리카 넌 지음 오빠 편곡 없으면 그닥이잖아. 오빠 없음 팥 없는 찐빵이지.”
“반박하고 싶은데 맞는 말이야!”
리카는 ‘너무해!’란 말을 반복하며 신아름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토닥였다.
“그래서 쌤 거기 나가요?”
백설하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사쿠라바 에리카.
케이어스의 리더.
보컬, 댄스, 랩, 작곡, 퍼포먼스, 예능감, 비주얼,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아이돌의 아이돌이다.
그녀의 다재다능은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에리카랑 같은 방송에 나가? 내가?’
에리카가 재능이 넘친다는 건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았다.
백설하는 성필이 떠올랐기에 불안했다.
성필은 케이어스의 무대를 보고 눈물까지 흘렸고, 따로 에리카의 사인까지 받아둘 정도이니 확실히 그녀의 팬일 것이다.
‘……생각하니까 화나네.’
아무리 팬이라도, 소녀연맹이 버젓이 존재하는 방송국에서 에리카한테 사인을 받으러 가?
아내가 있는 집안에서, 놀러 온 아내의 친구에게 태연히 추파를 던지는 남편도 아니고.
대체 성필은 무슨 생각이었던 거지?
‘그, 그냥 팬이신 거지. 나도 참, 비유를 떠올려도 무슨 이런 걸 떠올리고 그러지…….’
아무튼, 에리카와 같은 방송에 나간다면. 심지어 그게 음악적인 능력을 겨루는 방송이라면, 비교당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에리카의 보컬적인 기량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돌 중에서도 상위권인 건 분명했다.
유일한 장기인 보컬에서마저 에리카에게 패배한다면.
‘나는…….’
성필의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것이다.
“조아라 넌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냐?”
“뭐가.”
“쌤은 당연히 나가지.”
백설하가 당황해서 신아름을 보았다.
“우리 목표가 케이어스 이기는 거잖아. 방송 나가서 에리카 그년…….”
“에리쨩 욕하지 마!”
“……에리카 눌러주고 와야지. 거기서 노래 대결 같은 것도 시키겠지? 벌써 쌤이 에리카 이기는 거 기대되네.”
백설하의 머리가 번뜩였다.
그렇다. 소녀연맹의 목표는 케이어스를 이기는 것이다.
작년 연말에도 시상식을 돌며 그 목표를 가슴에 새기지 않았던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는 케이어스를 꺾어야만 한다.
그런데 팀에서 떨어져 혼자 케이어스 멤버를 보는 게 무섭다고, 비교당하는 게 두렵다고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뭐…… 그렇겠네.”
조아라는 심심하게 신아름에게 동의해주었다.
백설하는 노래를 배운지 10년을 넘었다.
게다가 전공 지식까지 독학으로 습득하여 유명 학원의 트레이너까지 되지 않았던가.
조아라도 춤을 배운 건 10년이 가깝지만, 탄탄한 이론적 지식이나 가르치는 능력은 부족했다.
만약 각자의 능력에 숙련도를 표시할 수 있다면, 백설하의 보컬 숙련도가 조아라의 댄스 숙련도를 넘어설 게 틀림없다.
“뭔데. 조아라 반응이 왤캐 떨떠름해. 너 쌤이 에리카한테 지기라도 할까 봐?”
“……신아름. 너 쌤 설명 듣기나 했냐? 경연 프로그램 아니라잖아.”
“아, 맞네. 그래도 그 비슷한 상황은 있지 않을까?”
조아라는 자연스럽게 대답을 회피했다.
물론, 백설하의 실력은 인정하고 또한 존경한다.
하지만 조아라는 진저가 떠올라서, 무조건 백설하가 에리카보다 나을 거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진저는 진정한 천재였다.
만약 케이어스 멤버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모두 그러하다면, 어쩌면 에리카도…….
“나, 해볼게.”
백설하가 선언했다.
“이거 해볼 거야.”
케이어스를, 에리카를 이기겠다. 그런 호승심 넘치는 이유는 아니었다.
“텔레비전 방송이니까, 나가야지. 소녀연맹 홍보도 될 거야.”
“그러네요! 쌤이 테레비에 나오면 남자 팬이 100만 명은 늘어날 거예요!”
조아라와 신아름은, 리카에게 왜 굳이 남자 팬만 말한 거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아는 것을 넘어, 이미 그들의 앞에 그 이유가 위풍당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가셔서 팬들을 100만 명 만들어오시는 거예요! 꼭!”
“으, 응.”
백설하는 리카와 손가락을 걸었다.
그래, 방송에 나가는 건 홍보를 위해서.
그리고.
‘자극이 필요해.’
얼마 전부터 찾아온 노래 슬럼프.
‘음악을 위한 동행’에 나가면, 분명 쟁쟁한 뮤지션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곳에서 영감과 열정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싶었다.
* * *
성필이 멤버들을 회의실에 불렀다.
그의 설명을 듣고, 멤버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 데뷔요……?”
일본.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이 아니다.
외국인 것이다.
일본에 소녀연맹이 데뷔한다고 한다.
“데뷔래도 거창한 의미가 아니야. 앨범만 발매하는 정도니까. 홍보 행사는 몇 개 돌지도 모르겠다. 일본 측의 매니지먼트사랑 논의할 거야.”
멤버들의 시선이 리카에게 쏠렸다.
리카는 흥분과 기대에 차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일본…… 에 데뷔하는…… 거군요……!”
아주 흥분한 모양이다.
말까지 더듬고 있다.
조아라는 리카의 등을 쓰다듬어 진정시키면서 성필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일본에서 먹혀요? 앨범 발매한다고 사람들이 사요?”
“유통사에서 준 자료인데, 확실하진 않아도 천 장 정도는 팔린 거 같아.”
“아, 앨범이 천 장 정도 팔릴 거라고요?”
“아니. 이미 천 장 정도가 팔렸대.”
“……네?”
그냥 한국에서 활동했을 뿐인데 일본에서 앨범이 팔렸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지?
“한국 아이돌은 일본에서도 유명해! 잡지에서도 자주 소개 코너가 나온다구!”
“잡지에 나온다고 유명한 거야?”
“도젠다로(당연하잖아)?!”
일본의 도서 시장은 한국보다 훨씬 거대하다.
잡지를 소비하는 인구도 매우 많다.
그런 만큼 잡지의 영향력도 큰데, 다수의 청소년, 여성 잡지에서는 케이팝 아이돌 특집 코너를 만들어 두고 있기도 하다.
케이팝 스타들의 메이크업, 스타일링 등을 소개하는 것이다.
리카도 어렸을 적 그런 것들을 자주 보았다.
“요즘은 더 유명해! ……유명하다고 친구들이 그랬어!”
성필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되돌렸다.
“어쨌거나, 일본 스페셜판으로 앨범을 발매할 계획이거든. 미니 앨범의 수록곡은 그대로 가져가지만, 데뷔와 미니 앨범의 타이틀곡인 ‘아니’와 ‘롱 포’는 일본어로 재녹음할 거야.”
거기서 소녀연맹 멤버들이 2차 충격을 받았다.
특히 백설하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다른 멤버들보다 더 크게 느꼈다.
“저, 저는 일본어 못하는데요?”
그냥 노래 부르는 것도 힘든 일인데 외국어로 하라니.
난이도가 높아도 너무 높다.
보컬의 5대 요소 중 하나가 발음이다.
올바르지 못한 발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노래를 잘할 리가 없다.
특히 외국어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건 걱정 마. 한 이사님한테 배울 거니까.”
안 그래도 요즘 대폭 일거리가 줄어서 우울해하고 있던 한구인이다.
그나마 멤버들에게 알아두면 쓸모없지만 재미있는 잡학지식 강의를 하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어 강의를 맡긴단 소식을 듣자마자.
‘맡겨주십시오! 3개월 이내에 멤버분들을 도쿄 토박이로 만들어놓겠습니다!’
그렇게 한구인은 의지를 불태웠었다.
“쵸로이몬다제(겁나 쉽지).”
갑자기 조아라가 일본어를 쓰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다.
“아하하하핰!”
리카가 폭소를 터뜨렸다.
어찌나 신났는지 배를 잡고 책상에 이마를 박기까지 했다.
“아라가 뭐라고 한 거야?”
“크흐흨킄, 아, 아라가요오. 후우, 후우, 언니. 아라가 뭐라고 했냐면요, ‘쉬운 일이죠’라고 했어요.”
“아라 대단하다.”
“아녜요. 리카한테 틈틈이 배운 덕이죠 뭐.”
장하양의 칭찬에, 조아라가 쑥스러워하면서도 자신만만히 가슴을 폈다.
“근데 리카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얘들아 주목. 그래, 아라도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아니까 배우는 게 훨씬 빠를 거야. 리카랑 아라가 돌아가면서 너희들 가르쳐줄 거니까. 아름이 넌 왜 또 복어처럼 볼 부풀리고 있어.”
“귀여운 척해서 팀장님 관심 끌려고요.”
조아라에게 무언가를 배운단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귀엽네.
“정규 1집 발매 전까지 일본에 앨범을 발매하는 게 목표야. 일본어의 발음, 어감, 느낌을 습득하는 게 가장 중요해. 디렉팅을 따라가야 하니까. 보컬과 춤 연습도 게을리하지 말고.”
소녀연맹이 의지를 다졌다.
마지막으로, 성필은 분위기를 깔았다.
“얘들아. 너희들이 보여준 성공은 여태껏 등장했던 아이돌들 중에서도 이례적이야. 메이저 대형 기획사 아이돌과 비교하는 건 힘들지만, 그건 당연해. 우리, 가로 엔터의 지원이 대형 기획사보다 못하니까. 그럼에도 너희들은 엄청난 성공을 이뤄냈어.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 나는 너희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멤버들의 얼굴이 동시에 화악 달아올랐다.
항상 케이어스와 비교하며 본인들의 성공을 깎아내리고 있던 소녀연맹이다.
그런데 성필이 ‘자랑스럽다’고 말해주니, 말 그대로 부끄러워서 눈을 들기도 힘들었다.
“너희는 가로 엔터가, 프로듀서인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업적을 이뤘어. 고맙다. 그리고 미안해. 쉴 시간도 안 주고 너무 몰아붙이는 것 같아서. 프로듀서로서 미안한 마음뿐이야.”
성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니에요 이사니임…….”
리카는 그래미에서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성필에게서 받는 공식적인 인정의 말은 그만한 가치와 감동이 있었다.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쁨과 감동을 드러내기 바빴다.
성필도 눈가에 물기가 맺히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밝은 티를 냈다.
“내가 말할 건 이상이야. 질문 있는 사람.”
조아라가 손을 들었다.
성필이 감동적인 말을 한 뒤의 질문이다. 조아라가 평범한 질문이나 말을 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쩌면 소녀연맹의 향방에 대한 진지한 물음일 수도 있겠지.
아티스트로서, 그녀들은 자신의 미래와 행보에 의견을 낼 권리가 있었다.
성필은 아까보다 더 진지해진 투로 답했다.
“응, 아라. 말해.”
“아저씨. 옛날부터 궁금했는데, 프로듀서가 뭐 하는 사람이에요?”
“넌 날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데?!”
“음, 연습실 훔쳐보는 사람?”
성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고요. 아저씨가 할 일이 많단 건 알죠. 근데 프로듀서란 거 자체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서요. 말 나온 김에 물어봤어요.”
“하하, 그렇지. 좀 추상적인 직책이긴 해. 설하야, 네가 설명해줘.”
“네?!”
백설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음악을 만들, 아니……, 사람을…… 모으……, 어어, 돈을……?”
“…….”
성필은 절망감에 마른세수를 했다.
“아는 사람 없어? 프로듀서가 뭐 하는 사람인지?”
멤버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추었다.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너, 너희들 진짜 나를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다들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성필은 한숨을 쉬고는,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었다.
[감독형, 인재발굴형, 컨설턴트형, 서포터형]
“프로듀서는 기능별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어. 먼저 감독형. 말 그대로 감독이야. 권위적인 지휘자,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
“갑자기 강의 시작하는 거예요……?”
“아티스트의 음악적 성향에 관여할 수 있는 만큼, 감독형 프로듀서는 작곡가인 경우가 많아. 홀로 사운드 엔지니어링, 작곡, 작사, 연주, 보컬 등. 모든 방면에 능력이 있기에, 아티스트의 모든 것을 감독하는 게 가능하지.”
* * *
석세스 엔터에는 오랜 시간 겨울과 같은 폭풍이 몰아쳤다.
윤상열 때문이었다.
‘허. 엘릭 이 새끼. 소녀연맹한테 팅글을 판다더니, 겨우 미니 앨범 수록곡에 실려?’
가로 엔터가 돈을 바가지로 퍼다 주기라도 했나? 아무리 그래도 팅글을 수록곡에 싣는 데 동의했다고?
‘작곡가다운 지조도 없는 새끼. 자기 자식을 똥통에 처박고 있네.’
엘릭은 팅글을 석세스 엔터로 넘기지 않았었다. 소녀연맹에게 준다는 이유였다.
그날부터 윤상열의 짜증은 극도에 달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분노를 참지 못했다.
“너 저번 회의 때 내 말 안 들었냐?”
윤상열의 앞에 선 직원이 바들바들 떨었다.
사소한 실수 한 번으로 인간성의 바닥까지 공격당해야만 했다. 그는 윤상열의 폭언을 듣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작업실을 나갔다.
‘하나같이 쓰레기밖에 없어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한 뒤, 윤상열은 본인의 업무로 들어갔다.
그는 석세스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였다.
작곡가 출신이지만, 작곡에만 신경 쓰는 건 아니었다. 그는 프로듀싱의 모든 방면에 관여했다.
컨셉, 곡, 가사, 뮤비, 스타일링, 메이크업, 프로모션, 마케팅, 매니지먼트, 스케줄, 아티스트의 식단 등등.
그의 작업실에는 업무 관련 서류가 매일 수십 페이지 분량으로 쌓인다.
‘내가 신경 안 쓰면 전부 망해. 다 등신들밖에 없어서, 불안해서 맡기질 못하겠어.’
윤상열은 짙은 다크서클을 달고, 매일 서류를 읽고 점검하고 수정하고 허가하고 반려하고를 반복했다.
모든 게 자신의 눈과 손을 거쳐야만 안심하는 스타일인 것이다.
* * *
“두 번째로 인재발굴형. 사실 이게 프로듀서란 직업이 생겼을 때의 최초 형태야. 녹음본을 자르고 붙일 수 있게 된, 테이프 기술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지. 프로듀서, 전문적인 음악 제작자가 나타나게 된 거야. 그중에서도 인재발굴형 프로듀서는 아티스트가 될 법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에게 모든 환경을 제공해
“그게 프로듀서예요? 그냥 캐스팅 매니저 아닌가.”
“중요한 건 ‘환경을 제공’한다는 거야. 아티스트가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길을 잃지 않도록.”
* * *
이음 엔터의 김명운 대표는 ‘포유’의 성공으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SMS 엔터에서 매니지먼트 관리자급으로 올라갔었던 그의 영업력으로, 포유는 여러 예능 방송과 라디오에 얼굴을 비출 수 있었다.
덕분에 인지도도 올라가서 차후 활동이 원활해질 듯하다.
‘애들이나 보러 갈까.’
김명운은 연습실로 가면서도 짬짬이 연예 뉴스란을 살폈다.
그러다가 익숙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소녀연맹. 앨범을 거의 6만 장이나 팔았네.’
부러운 성공이다.
워터 멜론 히트24 차트에도, 짧은 기간이지만 10위권 내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미디어 노출은 적어. 가로 엔터의 전략은 아닌 것 같은데.’
만약 포유가 소녀연맹만큼 성공했으면, 지금쯤 지상파 방송을 휩쓸고 있었을 것이다.
‘중소기업에 마이너 그룹의 한계, 인 건가.’
안타깝다.
하지만 김명운의 마음은 딱 그곳에서 멈추었다. 안타깝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김명운은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리더인 효민을 시작으로 포유의 멤버들이 공손히 인사했다.
김명운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어?”
“네!”
“많이 힘들지?”
“아닙니다!”
“무슨 군대 내무반 들어온 거 같네. 편하게 해도 되는데. 그래, 뭐 불편한 건 없지?”
김명운은 포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사려 깊은 태도를 취했다.
이렇듯 포유에게 관심이 지대한 그는, 바쁜 업무 중에서도 꼭 멤버들과 정기 면담을 진행했다.
“힘든 점 없어?”
“그렇구나. 충분히 걱정될 만하지.”
“그건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많이 힘들었겠구나.”
포유도, 그런 김명운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 *
“다음으론 컨설턴트형. 아티스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 전체적인 방향을 잡고, 전문적인 조언이나 도움을 주는 타입이야. 프로듀서의 기능별 형태 중에선, 이 형의 사람이 이게 가장 적어.”
“왜요?”
“전체적인 방향을 잡는다는 건, 말이 쉽지 본인만의 뚜렷한 철학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전문적인 조언을 주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잖아.”
* * *
KS 엔터의 정호환 이사.
그는 작업실에 오면 하는 일이 있었다.
소녀연맹의 ‘아니’를 듣는 것이었다.
‘들어도 들어도 사운드가 새로워.’
처음 들었을 때도 생각했으나, 이렇게 실험적인 곡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제 그만 들어야 하는데.’
계속 ‘아니’만 듣다간 귀가 이상해질 것이다.
게다가 ‘아니’를 카피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삼는다 해도, 결국에는 아류작이 나올 듯하다.
‘정지음 작곡가…….’
KS 엔터로 데려왔어야 했는데, 결국 그는 가로 엔터를 택했다.
그게 이상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박성필 이사의 꿈과 이상에는 힘이 있으니까. 정지음, 그 젊은이의 심장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던 거지.’
그때 작업실 문이 열리며 A&R 1팀장이 들어왔다.
“1팀장, 어쩐 일이에요.”
“저번에 지시 주신 사항에 대해 여쭤볼 게 있어서…….”
정호환은 30분 동안 1팀장과 내밀한 상담을 진행했다.
상담이 끝났을 때, 1팀장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작업실을 나섰다.
또 잠시 후.
“비주얼 팀장입니다.”
그도 정호환과 업무 상담을 마친 뒤, 개운해져선 작업실을 나갔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여러 부서의 팀장들이 정호환을 찾았다.
모두 케이어스와 관련된 것이었다.
팀장들이 정호환을 찾는 건, 그가 총괄 프로듀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정호환이 지닌 프로듀서로서의 경험과 식견을 믿고, 또 깊이 의지하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50줄 후반에 접어든 사람이라곤 믿기 어려운 트렌디한 통찰력이, 정호환에게는 있었다.
“후우.”
저녁이 돼서야 팀장들도 모두 퇴근하고, 정호환도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는 작업실을 가득 채운 뮤직 프로듀싱 장비를 눈에 담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함께 해 온 낡은 장비도, 최근에 구매한 신형도 있었다.
‘요즘은 노트북과 프로그램 하나로 해결하는 사람도 있다지. 홈 스튜디오, 라고 말하던가.’
세상 정말 좋아졌다.
옛날에는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다양하게 구현한답시고, 수백 수천만 원짜리 콘솔을 하나하나 따로 구매했어야 했는데.
정호환은 의자를 뒤로 젖힌 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정지음, 박성필…….’
그 두 이름이 도저히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쉽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나도 늙은 건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정호환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늙어? 내가?’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정호환의 눈에 비치는 광경은 현실을 비춰주고 있었다.
작업실 내에 있는 녹음 부스.
그곳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는 세월의 주름이 완고하게 박혀 있었다.
정호환은 깊이 고인 자신의 경험을, 지혜를, 고집을, 아집을, 주름을 쓸었다.
“안 돼.”
아직 해보지 못한 게 얼마나 많은데.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목표가 얼마나 많은데.
이대로 늙어서 뒷방 늙은이가 될 수는 없다.
정지음이나 박성필 같은.
‘젊은이들한테 밀려날 수는 없어.’
자신은 죽을 때까지, 아이돌 산업이 몰락할 때까지, 영원히 젊음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늙어갈 수밖에 없다.
신체뿐 아니라 정신마저도.
‘깨어나야 해.’
뱀처럼.
낡은 가죽을 벗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
* * *
“마지막으로 서포터형.”
길고 긴 강의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성필은 멤버들이 지루해하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녀들은 의외로 눈을 빛내며 설명을 잘 듣고 있었다.
“서포터형은 아티스트를 중심에 두고 아티스트를 최우선하며 아티스트를 서포팅하는 형태야. 아티스트의, 아티스트에 의한, 아티스트를 위한 프로듀서라고 할 수 있지.”
프로듀싱에는 수많은 분야가 있다.
작곡, 작사, 사운드 엔지니어링, 녹음, 디렉팅, 뮤비, 스타일링, 비주얼, 메이크업 등.
“서포터형 프로듀서는 그 모든 분야에 전문가를 두고, 그들을 지원해서 최상의 결과를 내도록 하는 타입이야. 각 분야에는 모자란 조각이 있는데, 프로듀서가 그 부분을 채우는 거지. 각 분야의 갈등을 중재하고, 관계를 원활히 하며, 또한 아티스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중요해.”
자, 이 정도가.
“프로듀서의 기능별 형태야.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고, 이 모든 형태가 하는 일은 결국엔 똑같아.”
곡을 완성해서 세상에 내놓는 것.
“이제 프로듀서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가 가?”
또 조아라가 손을 들었다.
“어, 그래. 아라가 또 이해 못 했구나.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줄까?”
“했거든요?!”
“알겠어. 뭐가 궁금해?”
“아저씨는 무슨 형이에요?”
“나?”
성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감독형 아닐까? 카리스마로 아티스트와 스태프들을 지휘하는…….”
“뭐래. 딱 봐도 서포터형인데.”
“아름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인데, 나 진짜 카리스마 있게 프로덕션 지휘하거든. 그래, 어차피 너희들에게 프로듀서는 백스테이지의 존재니까.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모를 법도 하지. 실제로 프로듀서가 뭔지도 몰랐었잖아…….”
성필의 어투는 살짝 우울했다.
“아니, 팀장님은…….”
장하양이 테이블 아래에서 신아름의 손을 잡았다. 신아름이 흠칫 놀라서 장하양을 바라보니,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그냥 인정해드리자.”
성필은 왠지 모르겠으나 ‘감독’과 ‘카리스마’란 단어를 좋아하는 듯했으니까.
신아름은 어이가 없단 듯 피식 웃고는.
“네. 팀장님 말이 맞아요. 딱 감독형이네.”
“그치?”
성필은 신나서, 자신이 가로 엔터에 들어오고 나서 어떤 일을 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한 남자의 허세 섞인 자기 자랑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래서 내가…….”
성필은 멤버들의 우쭈쭈에 신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