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74화 (174/760)

174화

‘음악을 위한 동행’을 연출하게 된 나석문 PD는 꿈에 가득 차 있었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방송을 만들게 됐어.’

흔히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방송사 입사 시험에서 통과한 순간부터, 나석문은 남에게 자신의 꿈을 떠들고 다녔다.

‘언젠가 탑 뮤지션들을 모아서 공연하는 콘텐츠를 짜고 싶어!’

하지만 캐스팅이나 예산이나, 여간 걸리는 부분이 많은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계획을 말하면 흔히 비아냥이 오곤 했지만, 결국은 이런 기회가 왔다.

“꼭 성공시키자!”

나석문이 스태프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쳤다.

이른 아침 공항에서 출연자들을 기다리는 그들의 눈에는 긴장과 기대가 서려 있었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출연자가 무려!’

대한민국 록의 역사, 신홍인!

발라드 음원 강자, 박영모!

독보적인 음색과 스타일, 서시연!

유명 프로듀서이자 음악인, 김상신!

그리고 한데 모인 그들은!

“어, 누나. 잘 지내셨어요?”

“난 뭐, 옛날이랑 다른 것도 없어. 너는?”

“저도요.”

어색어색.

다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도 시답잖은 이야기들만 나누고 있었다.

애초에 다들 선후배로서의 간단한 면식만 있을 뿐, 분야가 다른 터라 친하지 않았으니.

‘다들 친해지라고 따로 미팅도 잡아줬었는데.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게 해주고…….’

전혀 친해지지 않았어!

다들 아티스트적인 분위기만 풀풀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방송을 열심히 할 의지는 있는 듯했으나, 그 방법을 몰랐다.

“PD님, 역시 MC 역할 예능인도 섭외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이 광경을 보니 그 말이 맞았던 것 같다.

출연자 캐스팅 단계에서 CP(Chief Producer)가 MC도 뽑으라고 했으나, 나석문은 거절했었다.

‘톱 아티스트들은 모아두기만 해도 그림입니다 CP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내 경험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나 때는 말야…….’

그놈의 ‘나 때’는…….

나석문은 듣기가 지겨울 정도였다.

방송국 PD란 인간들은 엘리트인데다가, 위로 올라선 인간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특히 ‘나 때는’이란 말을 하는 빈도가 높았다.

‘CP님 죄송합니다. CP님 말이 맞았네요. 앞으론 절대 경험을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란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이 기획은 대차게 망한 듯했다.

“……아니. 아직 전부 온 게 아니잖아.”

아직 나석문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

CP는 나석문이 MC역 예능인 섭외를 거부하자, 차선책으로 아이돌을 섭외하라고 했었다.

‘아이돌이요?! 아티스트들 모인 자리에 무슨 아이돌을……!’

‘너 거절하라고 한 말 아니야. 아이돌은 본부장님이 섭외하라고 하셨어.’

‘왜요?’

‘화제성이 있기도 할 테고. 사람들 그런 거 좋아하잖냐. 남들 깎아내리는 거. 인터넷 보면 가수랑 비교해서 아이돌 욕하는 인간들 천지야.’

‘뭔…… 톱 뮤지션들이랑 아이돌을 대놓고 비교시키라고요……?’

‘아니. 뮤지션이랑 아이돌이 모인 것만 해도 화제가 될 거란 말이지.’

‘그래도 아이돌을…… 그건 제 프로그램 취지랑도 안 맞…….’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아이돌 캐스팅해.’

그때는 본부장과 CP에게 분노가 생겼지만, 이젠 그 아이돌들밖에 답이 없다.

PD가 엘리트고 CP가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면, 본부장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본부장님의 혜안을 믿습니다.’

제발 저 어색한 분위기를 깨주길…….

“어, 왔어요. 케이어스 에리카요.”

공항 앞, 밴에서 에리카가 내렸다.

재빨리 카메라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에리카는 카메라를 향해 인사한 후 매니저와 함께 짐을 꺼냈다.

캐리어 하나. 캐리어 둘. 캐리어 셋. 캐리어 넷…….

“에리카, 내가 카트 가져올게.”

“네, 매니저님!”

캐리어 다섯, 캐리어 여섯.

지켜보는 제작진이 뜨악할 정도로 짐이 많았다. 대체 저 캐리어들 안에 뭐가 든 거지?

다 들고 다닐 수는 있…….

“매니저가 세 명이네요?”

들고 다닐 수 있겠다.

“역시 KS 엔터…….”

“어, 짐 더 있나 본데요?”

기타 가방 하나.

기타 가방 둘.

기타 가방 셋……?

거기에 장방형의 커다란 천 가방도 있었다.

“서, 설마 신디사이저 건반을 가져온 거야?”

악기는 지원해준다고 말했는데, 왜?

어쨌거나 에리카는 짐을 다 꺼내고서야 선배들에게 인사할 준비를 마쳤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케이어스 에리카입니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뮤지션들은 기타만 세 개를 멘 에리카를 보고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에, 에리카, 어, 안녕. 그거 다 뭐야? 전부 다 기타야?”

“이거요? 어쿠스틱 기타, 베이스 기타, 일렉 기타예요. 앰프도 따로 가져왔고, 신디사이저도 있어요.”

“그걸 다 연주할 수 있다고?”

프로듀서 출신인 김상신이 경악했다.

그도 음악인으로서 다재다능하다고 자부했으나, 저만한 악기를 전부 다 다룰 수는 없었다.

“일렉 기타도 쳐요?”

록커인 신홍인도 관심을 보였다.

“네. 보여드릴까요?”

“여기서 연주를요?”

“아뇨. 기타요. 이거 힘들게 구한 거거든요.”

에리카가 일렉 기타를 보이자 신홍인의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헤비 쉐입…… 메탈 마스터 워록?”

“아시는구나!”

“당연히 알죠.”

신홍인이 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의 기타리스트가 이것을 썼었다.

“젊은 친구가 좋아할 스타일은 아닌데…….”

“예? 이거 멋지지 않나요? 지지징!”

에리카가 기타를 튕기는 제스처를 취했다.

“멋져……?”

그렇다.

멋지다.

역시 록은, 메탈은 헤비 쉐입이지!

신홍인은 벌써 에리카가 좋아졌다.

“PD님, 이거…….”

“그래.”

에리카가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어느새 뮤지션들이 에리카를 중심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에리카가 공항에 내리고 뮤지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만 해도 분량을 5분은 따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에리카란 새 출연자가 등장해서 생긴, 일시적인 토크의 범람일 수도 있어!”

나석문이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에리카도 음악계의 선배들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지금이야 잘 받아주고 있다만, 그들의 기세에 눌려서 말이 안 나올 수도 있…….

“신홍인 선배님! 요즘 외로움을 많이 타신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까마득한 가요계 후배의 당돌한 질문에, 대한민국 록의 역사 신홍인이 잔뜩 당황했다.

“내가요? 내가 뭘…….”

“영등포 OO 합주실에 자주 오신다고 들었어요. 후배 뮤지션들 보느라요.”

“아, 그거…….”

“집 지하에 연주실 시설도 있으시면서. 역시 혼자 연습하는 건 지루하죠?”

“아니, 그건…….”

항상 미디어에 강한 이미지로만 비쳤던 신홍인은 드물게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에리카 그런 건 어떻게 알아?”

“저도 거기 자주 가니까요! 스튜디오 스탭분들이랑 같이 합주도 해요! 저도 알아요. 밴드 악기는 혼자만 하면 지겹잖아요. 언제 같이 합주해요, 선배님!”

“어, 으음, 그, 어, 그래…….”

“이야, 우리 홍인이 외로웠어? 내가 언제 네 집 가서 같이 합주나 해줄까?”

“아니 형! 내가 뭘 그래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의 맥락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것을 본 나석문은 감탄하고 있었다.

‘케이어스 에리카…….’

예능 초신성의 탄생이다!

“PD님! 이거 촬영 대박 날 거 같아요! 에리카가 MC 역할 해주고 있어요! 공격수도요!”

“그래……!”

예능 출연자의 3대 요소.

진행자, 공격수, 탱커.

공격수는 장난스러운 질문과 발언으로 웃음을 유발시킨다.

탱커는 그러한 발언의 대상이 되어 억울해하며, 마찬가지로 웃음을 준다.

진행자는 이 두 역할을 적절히 중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에리카가 진행자와 공격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대로만 가면 그림이 완성…….”

“아니.”

“네?”

에리카가 진행자와 공격수의 역할을 하는 건 좋다.

문제는, 에리카가 탱커로 삼는 게 까마득한 선배들이란 것이다.

‘버릇없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어. 어린애한테 저런 취급을 당하는 게, 뮤지션분들도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고.’

계속 에리카의 재치에만 의존한다면, 어찌 됐건 방송은 하락세일 것이다.

탱커, 적당한 탱커만 있다면…….

“백설하 도착했어요!”

백설하가 기타 가방과 캐리어를 들고 밴에서 내렸다.

그녀는 이미 전부 모인 출연자를 보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빠, 빨리, 으으…….”

백설하가 늦게 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30분 일찍 왔다.

도리어 다른 출연자들이 너무 일찍 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닷!”

백설하가 사죄의 허리 숙이기 퍼레이드를 벌였다.

“에, 에리카도 안녕.”

“네, 언니.”

에리카는 백설하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백설하가 당황해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왜, 왜 그래?”

“선배님들! 설하 언니가 자기소개도 안 하는데요! 후배한테 따끔한 일침 부탁드려요!”

“어?!”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었다.

백설하가 급히 소개하려던 찰나.

“이야, 설하. 미팅 때 그렇게 안 보였는데, 예의가 없네.”

그나마 백설하와 나이 차이가 적은, 발라더 박영모가 말했다.

“죄, 죄송…….”

“아유. 애한테 뭘 그래?”

서시연이 장난스럽게 박영모의 말을 받았다.

“예의 좀 없을 수도 있지. 이렇게 예쁜데 예의 없으면 어때? 설하야, 그치?”

“아, 아니이…….”

백설하는 지체하지 않고 허리를 팍 숙였다.

거의 90도가 될 듯했다.

“소녀연맹 백설하입니다!”

“그런데 설하 언니.”

에리카가 백설하를 일으키며 그녀가 멘 기타를 만졌다.

“기타 가져오셨네요?”

“으, 응. 통기타야.”

“딱 하나만?”

“어?”

“저는 이렇게나 많이 가져왔는데.”

“기타가 그렇게 많아?”

“준비성이 없으신 거 아니에요? 다들 본인이 쓸 악기는 다 가져오라고 한 거 들으셨을 텐데. 마이크는 가져오셨죠?”

“마이크?!”

안 가져왔다!

당연하지만, 마이크는 준비물이 아니었다.

뮤지션들도 에리카의 장난을 알아차렸다.

마치 병장이 신병에게 ‘총 안 사 왔냐?’라는 농담을 던지는 상황인 것이다.

“설하 진짜 마이크 없는 거야?”

“그게, 그게요…….”

백설하가 구원을 바라며 성필을 찾았다.

하지만 성필은 짐을 카트에 담느라 백설하 쪽은 보지도 않았다.

“와, 이거 이거. 가수로서의 마음가짐이 덜 돼 있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아뇨오, 그게요오…….”

선배들이 짐짓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던 때, 록커인 신홍인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영모야! 애 그만 좀 놀려! 진짜인 줄 알잖아!”

“……네?”

“언니.”

에리카가 백설하를 사랑스럽단 듯 안았다.

“마이크를 왜 가져와요.”

“어, 그, 그럼 에리카 네 기타는……?”

“그냥 제가 유별나서 여러 개 챙긴 거예요. 언니 진짜 줄 안 거예요?”

뮤지션들이 돌아가며 백설하의 귀여움과 순진함을 놀렸다.

백설하는 얼굴이 화끈해져서 눈가가 촉촉해질 지경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나석문도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PD님, 이건 정말로…….”

“그래.”

완성됐다, 예능의 황금비가!

진행자 에리카.

공격수 선배들.

그리고 탱커 백설하.

“이 촬영, 성공할 거 같아!”

또한 백설하는 거의 일주일간 에리카와 선배들의 놀림에 시달릴 것이다.

굳세어라, 백설하!

* * *

장하양은 거실에 가만히 앉아, 텔레비전 앞에 놓인 플레이스테이션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어떤 생각들이 스치는지는 본인만 알 수 있었다.

“하아.”

신아름이 거실로 들어오며 내는 한숨에, 장하양은 깊은 침전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름아 왜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팀장님이요. 또 갔잖아요.”

저번 조아라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백설하의 촬영을 서포트한답시고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이 정도면 방랑벽 있으신 거 아니에요?”

“자주 떠나시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프로듀서가 쉽게 자리를 뜨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 거야?”

“……그렇지 않을까요?”

신아름은 언짢다는 티를 팍팍 냈다.

만약 성필을 데려간 상대가 백설하가 아닌 조아라였다면, 잔뜩 불만을 토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하양은 신아름의 옆에 앉아 그녀를 어루만졌다.

“아름아. 소녀연맹 전체는 아니더라도, 소녀연맹 멤버의 첫 방송 촬영이야. 신경 쓰이시겠지.”

“알아요…….”

“역으로, 우리의 개인 촬영이 있었어도 이사님이 따라오시지 않았을까?”

신아름이 흥미가 있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설하 언니처럼 우리도 개인 스케줄이 생기면 말이야. 예를 들어 내가 드라마에 배우로 첫 촬영을 나가거나.”

“제가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거나?”

“응.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닌데요, 그냥…… 아녜요.”

장하양은 이해해줘서 장하다는 듯, 신아름을 더욱 따스하게 쓸어주었다.

“언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예, 도움이야 되겠죠. 팀장님이 계신데.”

장하양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

백설하가 본가에 다녀왔다던가. 그 이후, 그녀는 확실히 이상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설하가 더 밝아졌네?’ 정도로 넘겼으나, 장하양은 곧바로 백설하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백설하는 밝아진 게 아니라, 강한 척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본가에 다녀온 후가 아니야.’

정규 앨범 작업이 시작된 직후부터 백설하는 점점 시들어갔다.

장하양은 감히 이유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 그녀가 나아지길 바라는 수밖에.

‘프랑스에서 관광이라도 하시면서 마음을 달랬으면 좋겠어.’

성필도 함께 있으니 반드시 도움이 될 터였다.

그 때문에 장하양은 성필이 자리를 비운단 소식에도 아무런 불만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만약 백설하에게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장하양도 신아름처럼 불만에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불만 정도가 아니라…….

“민나(모두)!”

방금 밖에 나갔다 들어온 듯, 외출복을 입은 리카가 힘차게 들어왔다.

“아타시(제)가 게임을 사 왔어요!”

“게임?”

장하양이 살펴보니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CD였다.

“언니 언니 언니! 게임 해도 돼요? 되나요? 하고 싶어요!”

“응. 해도 돼.”

“얏타(해냈다)!”

리카가 사 온 건 2인용 대전 격투 게임이었다.

두근두근, 눈에 빛을 담으며 게임 인트로를 지켜보던 리카는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이, 이거 어째서 조작기가 하나밖에 없나요!”

“조작기?”

“컨트롤러요!”

“박 이사님 혼자 쓰셨을 테니까 당연히 하나밖에 안 주시지 않았을까?”

“손나(그런)……. 다 같이 하려고 이걸 사 온 거였는데…….”

용돈도 꼬박꼬박 모아서 거금을 들였건만, 멤버들이랑 함께 게임을 할 수 없다니.

하지만 리카는 급히 기운을 되찾았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하면 돼요!”

리카는 온라인 대전에 들어갔다.

[멤버십 서비스 가입이 필요합니다.]

“난다(뭐야), 코레(이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손나 바카나(그런 바보 같은)!”

온라인 대전을 하려면 또 1만 원 넘게 내야 한다고?!

“더러운 회사! 더러운 상술!”

“리카.”

장하양이 리카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리카가 울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돈 반씩 내서 같이 하자.”

“에, 정말인가요!”

“응.”

장하양은 본인의 방으로 가서 베갯속을 연 뒤, 솜 안에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만 원짜리를 하나 가져왔다.

“자, 만 원.”

“하양 언니 텐시(천사)!”

리카가 장하양을 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즉시 결제를 시도했다.

“……카드가 필요하대요. 저, 언니 혹시 카드 있으신가요?”

“응, 있어.”

“하양 언니 사랑해요!”

둘은 돌아가면서 즐겁게 온라인 대전을 즐겼다.

“리카, 나도 해보자.”

“아름이는 안 돼! 돈 안 냈어!”

“아깐 다 같이 하려고 샀다면서.”

“맞아, 아름이는 돈 안 냈잖아.”

“언니까지?!”

신아름은 5천 원을 장하양에게 건넸다.

이미 리카와 장하양이 등급을 잔뜩 올려뒀기에, 신아름이 싸우는 상대들은 초보를 어느 정도 벗어난 수준이었다.

지는 게 당연했다.

“재미없어…….”

결국 격투 게임은 리카와 장하양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언니, 나 이제 이거 안 할 거니까 돈 돌려주세요.”

“싫어.”

“…….”

신아름은 아이튜브에서 공략 영상을 찾아보았다. 게임 화면만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손이 버튼을 누르는 것이 포함된 영상이었다.

신아름은 수십 분간 그것을 보더니.

“대충 알겠다.”

신아름은 다시 도전했고.

“아름이 뭐야! 스고이(대단해)!”

온라인 대전의 초보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렸다.

* * *

프랑스, 낭만과 예술의 나라!

라고 하지만, 성필은 한구인이 옛날에 가르쳐준 역사 지식 때문에 마냥 프랑스를 좋게 보기 힘들었다.

‘프랑스는 현대까지도 제국주의 국가에 가까운 생양아치입니다. 왜냐고요? 궁금하십니까? 알려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구인은 프랑스를 정말 안 좋아하는 듯했다.

‘독일인이셔서 그런가?’

독일과 프랑스는 라이벌이라는 선입견이 있기도 하다.

아무튼, 한구인이 열변을 토했던 프랑스의 추악한 면 때문에, 프랑스가 마냥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 모든 번영이 제국주의 위에 세워진 건가…….’

한구인의 말을 떠올리며 답지 않게 무거운 생각에 빠져버린 성필이었다.

그에 반해 백설하는 별다른 생각 없이 프랑스를 좋아했다. 그녀는 선배들과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뮤비 촬영 때의 이야기를 했다.

“저 여기서 뮤비도 찍었어요. ‘아니’ 뮤비 때요.”

“아, 그거 나도 봤는데 뮤비 잘 나왔더라.”

“헤헤, 감사합니다.”

백설하의 데뷔 비주얼 컨셉이 프랑스 혁명이기도 했고,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끌린다는 모양이다.

촬영 중에도 평소보다 텐션이 2배는 높아진 상태였다.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

밤 9시.

나석문 PD가 공식적인 촬영 종료를 선언했다.

“으아, 드디어 쉬겠네. 다들 고생했어요.”

“어, 너도 수고했다.”

뮤지션들이 저마다 인사하며 정해진 객실로 향했다.

백설하도 피곤 때문인지 한숨을 내쉬며 성필 쪽으로 다가왔다.

“설하야 수고했…….”

촬영을 마친 백설하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아까까지 짓던 미소는 전부 카메라 앞이라서 그렇단 듯, 놀랄 만큼 빠르게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설하야 많이 피곤해?”

“어, 아, 재밌었어요.”

피곤하냐고 물었는데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바로 객실 갈래? 아니면 밖에서 관광 좀 할까?”

“프랑스어 하실 줄 아세요?”

“나 무시하는 거야?”

“지, 진짜 하실 줄 아시는 거예요?”

“몰라.”

“뭐에요오…….”

백설하는 헤헤 웃었다.

“그냥 쉬게요.”

“그래. 수희 씨가 설하 안내 좀 해주세요. 필요한 것도 챙겨주고요.”

“네, 이사님.”

백설하는 김수희를 따라 호텔의 위로 올라갔다.

‘같은 건물에 머물면 가장 좋겠지만, 이 호텔은 비싸니까.’

성필과 김수희의 숙소는 도시의 외곽에 가까운 저가형 호텔이다.

이동 거리는 차로 30분이 살짝 안 된다.

상당한 거리이기에, 백설하 케어를 위해선 아침에 최대한 빨리 일어나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별로 자지도 못하겠네.’

성필은 김수희가 다시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함께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수희 씨.”

“네?”

“매니저 일 어때요.”

“조, 좋아요.”

그래, 상사가 물어보면 이 정도 대답을 하는 게 정상이겠지.

속내에 다른 뜻을 감추고 있더라도 이사인 성필에게 꺼낼 리가 없다.

성필도 더는 김수희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내일 6시까지 설하가 우리한테 맡긴 짐 들고 숙소 앞으로 나오세요.”

“네.”

김수희는 지친 듯 계단을 올라 객실로 갔다.

성필도 그녀와 비슷했다.

씻고 누우니 곧바로 눈이 감긴다.

하지만 머리는 눈과 전혀 달랐다. 피곤해서 어지러움에도 생각이 솟아올랐다.

‘설하 많이 힘들겠지.’

예능 촬영이란 게 보통 체력을 소모하는 게 아니다.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춰 움직이는 것도 힘들지만. 무엇보다도 분량을 뽑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가장 심하다.

거기에 더해 ‘이런 말을 했다가, 이런 행동을 했다가 이상하게 보이면 어떡하지?’란 생각 때문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진이 다 빠진다.

‘사람들은 연예인들이 여행 예능이나 놀이 예능 촬영하는 거 보고 즐겁게 돈 번다곤 하지만, 일이니까 즐겁게 하는 건 힘들지.’

웃긴 장면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건 다음 웃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가려 금방 사라진다.

끝없는 긴장의 연속인 것이다.

‘설하가 이 프로그램으로 안 좋은 마음을 조금 걷어내길 바랐는데. 선배 뮤지션들도 만나고, 에리카 같은 친구도 사귀고, 그래서…….’

성필은 고민만 이어가다가 잠에 빠졌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백설하가 나왔다.

우울하게 앉아 있는 백설하의 뒷모습.

성필을 그녀를 위로하려고 다가가지만, 가까워지지 않는다.

“허, 읍.”

성필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을 번쩍 떴다.

“미친…….”

악몽 때문에 눈을 떴네.

회귀한 직후 정도나 이랬었지, 리카와 백설하를 만날 때쯤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성필은 몸을 일으켰다.

등이 흠뻑 젖어 있다.

“샤워하고…….”

그 순간, 성필은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깨달았다. 악몽 때문에 깬 게 아니라 벨이 울렸기에 깬 것이었나?

액정을 확인하니 백설하의 이름이 떠 있다.

시각은 새벽 1시 21분.

“어, 설하야.”

성필은 피곤에 절어 짜증 난 목소리 하나 없이, 정말 반갑단 듯한 투로 말했다.

[이사님, 이사니임…….]

성필은 백설하의 울먹임을 듣곤 절로 목소리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어디야? 호텔이야? 무슨 일이야?”

[이사님…….]

백설하는 울면서 ‘이사님’만 말할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성필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었다. 그는 운동화를 구겨 신고 급히 객실 방을 나섰다.

“설하야 일단 진정해. 무슨 일이야?”

[엄마아, 엄마…….]

“어머니가 왜?”

단순히 슬퍼서 ‘엄마’라고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엄마가아, 엄마가요오…… 사고, 당했다고오, 엄마아아…….]

“가서 얘기하자. 가만히 있어.”

호텔로 가야 한다.

그래야 백설하와 직접 대화를 한 뒤, 제작진과 어떤 형태로든 조율이 가능할 것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향했다.

도착한 즉시 날 듯이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올라가려 하니, 호텔 측 경비원인 듯한 사람이 막았다.

성필은 급한 대로 영어로 사정을 설명했다.

“……?”

경비원이 의문을 표했다. 게다가 영어로 말했단 게 불쾌한 듯한 기색까지 보인다.

성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순간, 옆에서 능숙한 프랑스어가 들려왔다.

나석문 PD였다.

“PD님?”

“잠 안 와서 산책 좀 하다 왔어요. 설하 때문인가요?”

“네.”

“이 시간에…….”

“확실친 않은데, 설하 부모님한테 어떤 일이 생긴 거 같습니다.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나석문이 프랑스어로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경비원이 길을 비켜주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결과 나오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

“네, PD님!”

성필은 올라가서 설하의 객실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설하야! 설하야!”

문이 열렸다.

얼굴에 눈물을 바른 듯한 백설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하야, 일단 나 들어가도 돼? 들어가서 얘기하자.”

백설하는 흐느끼면서 문에서 비켜났다.

성필이 문지방 너머로 발을 내민 순간, 전화가 울렸다.

한구인이다.

성필은 당황하면서도, 그가 전화가 올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여기고 즉시 받았다.

한구인이라면 주요 국가의 시차 계산 정도는 쉽게 할 테니까.

“여보세요?”

[늦은 밤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박 이사님. 지금 상황이…….]

한구인의 이야기를 모두 듣자 성필은 머리가 터져버릴 듯했다.

눈앞에는 무너져가는 백설하가 있다.

전화가 너머에는 가로 엔터의 미래를 정할 안건이 있다.

‘이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한 이사님한테 내 의견을 전해야…….’

한구인의 설명을 듣느라 흐려졌던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

또렷해진 시야에는 백설하가 보였다.

“안 돼요.”

성필은 한구인에게 즉답했다.

[그렇습니까.]

한구인이 ‘이유는?’이라고 다시 물어보려는 듯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전해진 순간.

“제가 지금 바빠서 자세한 이유는 못 말씀드리겠어요. 제 의견만 전해주세요.”

[예, 예?]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때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끊을게요.”

[자, 잠시만! 지금 2시간……!]

한구인을 믿고 전화를 끊었다.

성필은 백설하의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성필 자신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약한 소리로도 깨질 듯한 유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물었다.

“설하야,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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