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음악을 위한 동행’의 촬영이 모두 끝났다.
한국으로의 비행기가 뜰 때까지 시간이 남은 터라, 출연진과 제작진은 짧게나마 파리를 관광하기 위해 줄줄이 흩어졌다.
“이사님.”
매니저 김수희가 죄송하단 기색으로 말꼬리를 늘였다. 그에 성필은 김수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대답을 내놓았다.
“가셔도 돼요.”
그녀의 눈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놀고 오세요.”
김수희와 KS 엔터의 매니저 문채식.
성필은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고작 일주일이라지만, 업무로 교류를 쌓은 젊은 남녀가 서로에 호감을 갖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금도 문채식이 아닌 척하면서 이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김수희가 문채식이 있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설하 너는 어떡할래. 선배님들이랑 뭐 같이 다녀보기로 약속했어?”
“아뇨. 다들 매니저분들이랑 다니신대요.”
하긴, 그들은 가요계 활동 경력만 십수 년이다. 다들 매니저와 깊은 관계를 쌓았으니, 절친한 친구라 보아도 무방했다.
촬영 중 출연자들과 친해졌더라도, 촬영이 끝난 다음은 진짜 친한 사람과 다니고 싶겠지.
“에리카는?”
성필이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다. 백설하가 에리카와 파리를 둘러보고 우정을 쌓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에리카도 따로 다닌대요.”
“아…….”
“……이사님은 다른 분이랑 같이 다니기로 하셨어요?”
“내가 가긴 어딜 가. 매니저도 없이 너 혼자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저랑…….”
“네가 에리카랑 다녔으면 나도 좀 여유롭게 파리 돌아다녔을 텐데.”
백설하가 울상이 됐다.
성필은 미소를 지어 방금 말이 농담이었음을 밝히고, 그녀를 향해 다정히 물었다.
“보고 싶은 거 있어?”
“아뇨.”
“파리에 오면서 보고 싶은 것도 안 생각해뒀다고?!”
“으, 어, 죄송합니다…….”
괜찮다. 성필이 대신 조사했으니까.
둘은 바스티유 시장으로 향했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여러 가지를 둘러보고 파리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방법, 바로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것이다.
“와.”
백설하는 시장의 입구를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여행사 광고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햇볕을 받아 더 눈에 띄는 형형색색의 간판과 앤틱한 가판대들.
그 위에 올려진 음식들과 골동품, 의류와 액세서리, 그림과 조각들.
백설하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프랑스 왔으면 바게트는 먹어봐야지.”
성필은 갓 구운 듯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바게트를 하나 샀다.
백설하가 그 크기를 보고는 놀랐다.
“이걸 어떻게 먹어요?”
“손으로 조금씩 떼서 먹어야지.”
바게트가 컸기에, 성필은 그것을 왼팔로 안고 다녀야 했다.
둘은 바게트의 꼭지부터 조금씩 뜯어먹으며 시장을 둘러보았다.
“이사님 이거.”
갑자기 백설하가 흥분하며 한 곳을 가리켰다.
예술 작품의 레플리카를 파는 노점이었다. 백설하가 주목한 것은 바스티유 습격을 다룬 그림이었다.
“바스티유 습격이에요! 여기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도 있어요!”
본인이 ‘아니’에서 맡았던 컨셉 때문일까, 백설하는 프랑스 혁명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진짜 같다.”
“그러게요. 직접 사람이 그리는 걸까요?”
“모조품만 그리는 그림 공장이 있다던데.”
“프랑스에요?”
“중국에.”
“아…….”
이국의 시장은 그 나라의 향취가 깊이 배어 있다. 외국인이라면 단순히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생경한 경험을 보따리로 얻을 수 있다.
백설하의 눈은 시장을 둘러보는 동안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빛났다. 그녀가 재밌어하는 것을 보니, 이곳에 오자고 한 성필도 기뻤다.
“이사님.”
한 시간 정도 둘러보고 광장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중, 백설하가 말했다.
“김수희 매니저님은 어디 가신 거예요?”
“너 몰라?”
“네? 어어, 이사님이 그냥 가서 놀라고 하셨었잖아요. 혼자 놀고 싶으시대요?”
“KS 엔터 매니저 중 한 명이랑 좀 그런 게 있어 보이더라고.”
“그런 거요?”
성필이 손 하트를 만들었다.
백설하가 아 소리를 내곤 다시 아이스크림에 집중했다.
그때 성필의 전화기가 울렸다. 백설하는 회사나 제작진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전화를 받은 성필의 태도를 보니 전혀 아닌 듯했다.
“뭐? 진짜? 이야, 축하한다 임마!”
성필은 10분 동안 전화를 붙잡고 있으면서 계속 들뜬 목소리였다.
‘축하한다’를 거의 20번쯤 말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누구예요?”
“친구. 한 달 뒤에 결혼한대.”
“와아, 축하드려요.”
“왜 날 축하해줘.”
“아, 으, 그렇네요……. 축하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이제 백설하의 아이스크림은 콘만이 남았다. 그녀는 남은 것을 씹어먹으려다가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사님 친구분들은 이제 결혼할 시기인가요?”
“그렇지. 곧 서른 중반이니까. 이미 중반인 애들도 있고. 하나둘씩 결혼 소식이 들려오지.”
“……이사님은요?”
“나? 내 결혼?”
백설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있으시다거나…….”
“없어.”
백설하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왜 불쌍하단 듯이 봐. 그래, 이 나이에 짝없으면 불쌍한 거긴 하지.”
“아니에요 불쌍하게 안 봤어요! 그, 극, 그냥요……. 그으, 그럼 이사님은 결혼 언제 하세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사람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하고 싶긴 하지.”
그 말을 한 성필은 잠시 멍해졌다.
백설하는 자신이 말실수한 것인가 싶어 살짝 움츠러들었다.
“아니다.”
“네?”
“나는 일하는 게 더 재밌어. 그리고 너희들 크는 것도 봐야지. 너네들 다 시집 보내야 나도 나대로 살지.”
“대체 언제 결혼하시게요?!”
“농담이고.”
성필은 콘을 한입에 삼키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지 싶다. 쉬는 날도 없이 회사에 미쳐서 사는 사람을 누가 데려가려고 하겠어.”
백설하도 성필을 따라 일어났다.
“그럼, 어어, 같은 업계 사람이랑…… 사귀면 안 되나요……?”
“같은 업계?”
성필은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미간을 좁혔다.
고민 끝에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모르겠다. 다 먹었으면 더 둘러보자. 파리 온 김에 뽕 뽑아야지.”
“……네.”
둘은 시장을 더 둘러보다가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 앞에서 멈추었다.
백설하가 아니라 성필이 멈춘 것이었다.
“설하야 이거 어때?”
눈꽃 모양의 헤어핀이었다.
“예뻐요.”
“사줄까?”
“네?”
“왜 이렇게 놀라.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그래.”
“죄송해서…….”
“뭐가 죄송해.”
성필은 눈꽃 헤어핀과 다른 네 가지 헤어핀을 함께 집고 계산했다.
“나머지는 애들 거예요?”
“응. 이거 봐. 모양이 다 애들이랑 맞는다?”
강처럼 물결치는 곡선 형태의 헤어핀.
“이건 리카. 리카 이름에 내 천(川)이 들어가잖아.”
프랑스어 알파벳 J' 모양의 헤어핀.
“이건 아라. 아라 성씨의 J이기도 하고, ‘좋다’란 의미의 젬므 두문자기도 하잖아.”
태양처럼 동그란 모양에 정교한 문양이 음각된 헤어핀.
“이건 하양이. 이름이랑 이미지가 맞아.”
유럽연합 화폐인 유로(€) 모양의 헤어핀.
“이건 아름이.”
“유로가 아름이 이름이랑 상관이 있어요?”
“음, 걔는 자기 이름 한자 싫어하긴 하는데. 그래도 상징을 맞춰서 선물해주고 싶네.”
그렇게 성필은 총 다섯 개의 헤어핀을 샀다. 그리고 산 자리에서 눈꽃 헤어핀을 백설하에게 내밀었다.
“자, 선물.”
“감사합니다.”
백설하는 헤어핀이 든 봉투를 주머니 안에 넣었다.
“마음에 안 드는구나…….”
“할게요 지금 할게요!”
백설하는 머리칼을 모아 헤어핀으로 고정했다.
“어, 어때요?”
“잘 어울리네.”
“직접 사주시고도 반응이 덤덤하시네요…….”
“아, 맞다. 설하야 너 혼혈이라며.”
“네?! 그, 무슨, 저 한국인인데…….”
“한국이랑 천국.”
“…….”
성필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백설하보다 앞서나갔다. 그는 가는 도중 선물로 산 헤어핀을 자꾸만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성필을 보며, 백설하는 생각했다.
소녀연맹을 전부 시집보내고 자기도 자기 인생을 찾겠다는 건, 어쩌면 농담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설하야.”
짧은 관광을 마치고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어 슬슬 돌아가려던 차, 성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촬영 어땠어? 재밌었어?”
“촬영이요…….”
여러 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사고 소식으로 멘탈이 나가서 촬영을 망치고. 그것 때문에 성필에게 혼나고. 또 갑자기 열이 나서 침대에 드러눕고.
그리고 성필에게 간호받고…….
“네, 재밌었어요.”
“또 하고 싶어?”
백설하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즐거움과 설렘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거센 떨림을 내보냈다.
“네. 또 하고 싶어요. 또…….”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리고.
“프랑스도 다시 와보고 싶어요.”
“나중에 일 좀 뜸해지면 오자.”
“……흐.”
갑자기 백설하가 작은 웃음을 뱉었다. 성필이 뭔가 싶어서 바라보자, 그녀가 능청스레 미소 지었다.
“이사님 독일에서 촬영할 때도 그렇고, 외국만 나오면 꼭 다시 오자고 하시네요. 이러다가 이사님이랑 세계 일주 하겠어요. 그거 다 공수표죠? 그냥 하는 말.”
“어, 맞아.”
“네? 아, 으, 그렇, 그런가요…….”
“네가 떠봐놓고 당황하면 어떡해.”
“…….”
진짜 ‘그냥 하는 말이었다’라고 답할 줄은 몰랐다. 빈말이라도 ‘진짜야’라곤 해줄 줄 알았는데.
“공수표였는데, 설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 들으니까 못 참겠네.”
“네?”
“진짜로, 우리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는 여행 가자.”
백설하는 놀라서 입을 뻐끔거렸다.
“두, 둘이요?”
“이야, 이걸 어쩌면 좋지?”
“네, 네……?”
“너 사람 말에 의미를 너무 많이 두는 거 아니야? 좀 의미심장하게 물어보면 오해를 바가지로 먹잖아.”
“…….”
“숙소 들어가기 전에 남친 있냐고 물었을 때랑, 롱 포 티저 찍으려고 아침에 찾아갔을 때랑…….”
“아, 알겠으니까 그만해주세요…….”
성필은 공항으로 가는 내내 백설하를 놀렸다.
* * *
“촬영 어땠슴미까. 재밌었슴미까?”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진저가 반겨주었다. 에리카는 힘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에리카는 세면대에 손을 짚었다.
떨어뜨린 고개를 천천히 들어 거울을 보았다.
“…….”
이 기분은 뭘까.
20년. 7,300일. 175,200시간.
웬만한 건 전부 느끼고, 웬만한 건 전부 알 만한 나이이며 시간이다.
그런데 에리카의 가슴 한편을 채운 느낌은, 그녀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스으, 후우.”
에리카는 심호흡을 하곤 세수했다.
아니, 물을 얼굴에 끼얹는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불가사의한 감정을 씻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맹물로 얼굴을 계속 문질러 화장이 뭉근해질 때까지, 에리카는 그 야릇한 감정을 덜어낼 수 없었다.
이제 인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부러워.’
촬영 마지막 날의 버스킹.
그때 백설하가 들려준 보컬은 에리카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보컬리스트의 정점은 결국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테크닉으로 노래 위에 군림하는 자. 다른 하나는 감동을 목소리로 변환하여 노래를 뛰어넘는 자다.
백설하는 전자인 것 같으면서도 후자였다.
그 말인즉슨.
‘대단해, 23살이란 나이에, 나랑 3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대단해.’
에리카는 지금까지 부러움이란 감정을 모르고 살아왔다.
부러움은 결핍에서 오는 것인데, 에리카에게는 결핍이 없었다. 자신에게서 부족함을 느낀 적도 없었다.
그런데, 백설하에게서만큼은 달랐다.
‘나도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싶어.’
모든 사람이 감탄했던 백설하의 것처럼, 아니.
다른 사람들이 백설하를 떠받들건 감탄하건, 그딴 건 에리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문제는 에리카가, 자신이 감탄했단 것이다.
“나도…….”
에리카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안에는 아직 10개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것을 모두 꺼내 분지르고 변기에 버렸다.
변기로 떨어진 황갈색의 담뱃잎들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나도 그렇게 될 거야.”
그러기 위해선 규칙적으로 목구멍에 들어가는 연기부터 끊어야 했다.
“나도 그렇게 돼서.”
또다시,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짙은 결의가 에리카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에, 에?”
그런데 그 결의의 중간에, 에리카의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난데(어째서)?”
물을 내렸음에도 담배의 필터가 변기 안에서 둥둥 떠다닌다. 다시 물을 내려도, 필터는 풍선처럼 절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에리카가 패닉에 빠졌다.
“에리카, 화장실 다 썼어?”
문밖에서 소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 좃또(자, 잠깐), 이에(아니), 잠시만.”
에리카는 다시 물을 내렸다. 하지만 필터는 도무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애들한테 들킬 거야. 얼마나 오랫동안 비밀을 지켜왔는데……! 대체 저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길래 물에도 안 가라앉는 거야……!’
그녀답지 않은 동요 후, 에리카는 목청을 가다듬고 밖을 향해 말했다.
“소유야.”
“다 썼어?”
“일회용 그릇이랑 젓가락 좀 가져다줄래?”
“응?”
“나, 그러니까아…….”
변기에 뭘 떨어뜨렸다고 해야 하지? 핸드폰은 안 가지고 있는데.
변기에 안 내려가고, 건져서 버려야 할 거라면, 대체 그런 게 뭐가 있지?
‘아.’
에리카는 부끄러운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나, 변기에 속옷 빠뜨렸어.”
“…….”
소유는 침묵했다. 그러나 잠시 후,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그 발소리는 다시금 가까워졌고, 문이 열리며 소유가 그릇과 젓가락을 빼꼼 내밀었다.
그뿐 아니라 얼굴까지 살짝 내비쳤다.
소유가 윙크했다.
“걱정 마. 이상하게 생각 안 해. 나도 화장실에선 가끔…….”
에리카가 문을 쾅 닫았다.
대체 뭐라고 오해한 걸까.
딱히 뭐라고 오해하든 상관은 없다.
다만, 에리카는 변기에서 필터들을 건져 올리는 데 열심히였다.
그녀의 흡연 사실은 영원히 비밀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성필만을 제외하고.
그것을 떠올리자 에리카의 마음속으로 생경한 감정이 나타났다.
평생 에리카와는 연관도 없던 감정, 불안이었다.
“스읍…….”
에리카는 요 며칠 동안 모르던 것을 너무도 많이 알게 됐다.
한 번도 한 적 없는 일까지 하게 됐다.
“하아.”
여느 사람들처럼, 에리카는 불안과 부러움을 한숨에 섞어 날려 보냈다.
그럼에도 또한 여느 사람들처럼, 가슴을 채운 부정적인 감상을 완벽히 없애버리지 못했다.
머릿속에선 계속 백설하와 성필의 얼굴이 떠다녔다.
* * *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였다.
“설하야 진짜 숙소에서 안 쉬어도 괜찮아?”
“네. 비행기에서 많이 잤잖아요. 그럼 이사님은 괜찮으세요?”
“나야 회사가 집이지.”
불쌍한 사람…….
‘다른 즐거움을 찾으시면 좋을 텐데. 혹시 외로움을 많이 타셔서 계속 회사에 계신 걸까. 리카처럼…….’
백설하는 2층 연습실로 올라갔다.
익숙하디익숙한 연습실의 문 앞. 고작 일주일 못 봤다고 전혀 새로운 곳에 온 듯했다.
왠지 새 학기의 교실 앞에 선 기분이다.
‘바로 온 거 보면 애들이 놀라겠지?’
백설하는 멤버들의 환영을 받으리라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원, 투.”
키보드 건반을 짚은 리카가 사인을 주었다. 그 사인을 받은 조아라가 드럼을 쳤다.
이어서 리카의 키보드에서 반주가 흘러나왔다.
“쓰리, 포!”
장하양이 멋지게 베이스 기타를 튕겼다. 그 소리를 받아 신아름이 일렉 기타를 연주했다.
롱 포의 초반부가 시작되었다.
딱 3초 동안만.
이후로는 동물들이 연주하는 것보다 못한 소리만이, 음악의 탈을 뒤집어쓰고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아 씨, 거 더럽게 어렵네!”
조아라가 드럼 스틱을 내팽개쳤다.
“얘들아?”
백설하는 이해 불가한 자연재해를 보기라도 한 듯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앗, 쌤!”
리카가 백설하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다른 멤버들도 뒤늦게 백설하에게 다가왔다.
“촬영은 즐거우셨나요! 남자 팬 100만 명 만들어 오셨나요!”
“아, 응.”
“혼또(진짜)?!”
“너희 뭐 하고 있는 거야?”
리카는 백설하에게서 떨어져서 ‘엣헴!’ 짐짓 폼을 잡았다.
“밴드를 만들었어요! 밴드네임은 브레멘 음악대예요! 저희는 오아시스가 브릿팝을 유행시켰던 것처럼 코리안팝을 유행시킬 거예요!”
“케이팝.”
“아, 케이팝!”
백설하는 생각했다.
또 귀찮은 일에 말려들겠다고.
‘그냥 바로 숙소에 가서 쉴걸…….’
* * *
성필은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반가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형 형! 빨리 와요 빨리!”
정지음이 말하고 싶어 죽을 뻔했다는 기색으로 손을 파닥거렸다.
작업실로 들어오자마자 정지음이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하양이가 이번에는 진짜 랩을 썼어요!”
“드디어!”
1년 넘게 랩을 배워온 성과가 나오는 건가!
성필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러다가 문득 한기가 등골을 스쳤다.
“지음아, 혹시 가사가 저번이랑…….”
“아뇨, 이번에는 진짜 일반적인 사랑을 표현했어요. 싱잉랩으로요.”
“싱잉랩!”
그냥 랩은 아니구나.
“싱잉랩이 유행이긴 하지. 일반 대중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뭘 분석하고 있어요! 빨리 가사나 보세요! 진짜 잘 썼다니까요!”
대체 얼마나 좋기에 정지음이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성필은 기대감을 안고 가사를 보았다.
[제목: 도미노
네 웃음에 나는 그냥 쓰러져
네가 노리지 않았대도 고의야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날 봐
그래 난 네가 쓰러뜨리는 도미노
수많은 블록 중 하나일 뿐이야]
“상대한테 빠지는 걸 도미노에 비유했구나.”
“발상이 신기하지 않아요?”
“그러게.”
[네가 내게 웃어주는 것도
공장처럼 찍어내는 거잖아
나는 네 몇 번째 블록이야
네가 톡 건드리면
난 그냥 쓰러지는 게
처음이라고 티 내는 거 같아
자존심도 같이 쓰러져
근데도 버틸 수가 없어]
“첫사랑 얘기구나.”
“네. 살짝 풋풋한 느낌도 나는 거 같고요.”
[내가 너한테 설레는 거
내가 너랑 하고 싶은 거
너는 이미 전부 다 알겠지
전부 다 해봤겠지
다른 사람에게 속삭이고
다른 사람 품에 안기고
네가 내 첫 번째가 아니란 게
그냥 X나 싫어 죽…….]
성필은 황급히 가사를 덮었다. 그리고 해명을 바라는 듯 정지음을 보았다.
“힙합, 스웩.”
“…….”
성필은 손을 벌벌 떨면서 다시 가사지를 펼쳤다.
[……난 다 해줄 수 있다고
네가 원하는 건 다 한다고
그러니까 첫 번째는 아니어도
도미노의 끝에 둬주…….]
더는 읽기가 힘들어서 가사지를 덮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하양아…… 너 바람둥이한테 데이기라도 했니?’
랩을 배우랬더니 대체 뭘 배워온 거야.
무엇보다 이 가사.
“남자가 쓴 거 같잖아…….”
연애 처음 하는 남자가 자꾸 여친한테 전남친은 어땠냐고 물어보는, 그런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