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발단은 이 말이었던 것 같다.
“박 이사님은 옛날에 어떠셨어요?”
백설하가 그리 물었을 뿐인데, 손혜빈은 자신의 가수 생활의 시작부터 이야기했다.
지금은 SMS 엔터 이전 소속사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말하는 중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내가 이걸 하고 싶다고! 이러는데도 다들 반대하는 거야.”
손혜빈의 이야기는 길었지만, 지겹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백설하의 우상이었으니까. 우상의 과거사를 듣는 게 재미없을 리 없다.
백설하는 영화라도 보듯이 입을 작게 벌린 채 주의를 집중했다.
“기획사 사장부터 직원들까지 전부 ‘야 손혜빈, 너 대가리가 왤캐 굵어졌어?’”
“심하다…….”
“‘좀 뜨니까 우리가 뭘로 보여? 네 성공 다 우리 덕분이야.’, ‘오냐오냐하니까 자기가 진짜 대단한 인간인 줄 알아?’. 이야, 뭔 듣는데 열불이 다 끓더라고. 말 개처럼 하는 것도 재능이야.”
당시에는 손혜빈도 많은 양보를 해왔었다.
웬만하면 회사의 방침에 거스르지 않고 잘 따라왔으나, 정말로 하고 싶은 컨셉이 있었다.
회사가 제시한 컨셉이 마음에 안 들기도 했었고 말이다.
이제까지 동고동락한 회사 동료들이었으니, 손혜빈이 부탁하면 어느 정도는 수용해주리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씨알도 안 먹히더라. 인격모독은 덤이고. 그래서 나왔어.”
“위약금은요?”
“SMS 엔터가 다 내줬지. 덕분에 빚 몇억 안고 시작했어. 그런데 내가 누구다?”
일본에서 1년 활동하고 매출 500억을 달성했던 손혜빈이다.
물론 SMS 엔터에 들어가고 몇 년 뒤의 이야기지만, 원래 기획사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내가 기획했던 앨범도 어찌어찌 잘 돼서, 체면치레는 했고. 아, 맞다. 그때 성필이도 나왔어.”
“박 이사님이 석세스 엔터에 계속 있으셨던 게 아니었어요? 한 번 나오셨던 거예요?”
“아니. 옛날 기획사에서 나왔다고.”
“네? 아, 그게, 박 이사님 계속 석세스 엔터에 계셨던 게…….”
그래서 손혜빈도 처음에는 석세스 엔터에 있었던 건 줄 알았는데.
“첫 매니저 생활은 거기서 안 했지. 거긴 이제 망해서 흔적도 못 찾아. 암튼, 내가 그만둘 때 걔도 나 따라서 나왔거든. 나 나올 때 걔가 뭐라고 했…….”
손혜빈은 급히 자신의 입을 막고 웃었다.
“이건 말하면 안 되는데. 못 들은 걸로 해. 성필이가 들으면 화내겠다.”
그렇게 말해봤자, 백설하도 이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백설하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옛날부터 궁금했었는데요.”
“어떤 거?”
“박 이사님이 혜빈 언니 옛날얘기 나오면 막 화내면서 말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어, 약속했으니까. 말 안 하기로.”
“두 분 혹시…….”
백설하가 침을 삼켰다.
“연인, 이었나요?”
“뭐?”
손혜빈이 회사가 떠나가라 웃었다.
둘의 옆을 지나가던 엘릭이 혀를 찼다. 손혜빈이 즉시 달려가서 엘릭의 등에 손바닥을 먹여주었다.
엘릭이 억울해져선 호소했다.
“이건 폭력이야! 남자도 맞으면 아파! 너 손 좀 그만 올려!”
“네가 옛날에 내가 쓴 곡에다 대고 폭언 퍼부은 거랑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든? 남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놓고 넌 등짝도 못 내줘? 나 아직 그거 빚 못 받았다?”
“…….”
그렇다.
오만했던 시기, 젊은 엘릭의 업보였다.
그는 반박 한 줄 못 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작업실로 들어갔다.
“언니 작곡도 하셨어요?”
“어. 근데 그만뒀어.”
“왜요?”
“엘릭, 유구성 쟤가 내 가슴을 갈가리 찢어놨거든. 쟤 진짜 옛날엔 미친놈이었어.”
엘릭이?
좀 오만한 성격인 거 같긴 하지만, 바탕은 좋은 사람이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멤버들을 살갑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말이다.
“젊을 때 입증된 천재성은 사람을 망치거든. 내가 보기엔 그래. 지음이도 걱정이네. 뭐, 어쨌든 구성이한테 폭언 들은 뒤론 작곡은 그만뒀지.”
등 맞을 만했다.
어린 새싹을 시작부터 밟아놓다니.
그런데 사람의 말만으로 배우던 작곡도 그만두다니, 둘의 사이가 굉장히 가까웠나 보다.
‘아, 언니는 엘릭 님이랑 사귀셨던 건가?’
그 정도의 관계가 아니고서야, 말만으로 본인의 생각을 접을 손혜빈이 아닐 테니까.
물론 과거의 손혜빈은 더 여렸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성필이랑 나랑 사귀었냐는 거였지. 안 사귀었어.”
“아…….”
“왜. 안심했어? 성필이가 때 덜 탄 거 같아서? 어쩜…….”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의도로 물어본 거 절대 아니에요!”
“알아.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고 그래.”
자기가 먼저 놀렸으면서…….
백설하가 노려보자 손혜빈은 깔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구나.’
성필은 손혜빈이랑 사귄 게 아니…….
‘그거 말고!’
백설하가 가장 좋아하는 손혜빈의 곡인 ‘퍼퓸’이 그렇게 탄생했었구나.
손혜빈은 원래 있던 기획사와의 불화로 회사를 뛰쳐나와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낭만이 가득한 이야기였다.
백설하의 지금과 비교하면…….
‘……비교할 게 뭐 있어.’
백설하를 둘러싼 환경은, 손혜빈의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데 말이다.
손혜빈이 솔로 가수여서 본인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었던 점만 제외하면, 백설하의 환경이 훨씬 개방적이다.
* * *
백설하는 장하양이 베이스를 연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하양의 가는 손가락이 지판을 짚고 줄을 튕길 때마다 묵직한 음이 심장을 찌르르 울렸다.
손가락을 푼 장하양은 간단한 베이스 리프(짧은 악구를 반복하는 연주법, 혹은 멜로디)를 연주했다.
그 소리를 받아주는 악기가 없어, 베이스 리프는 듣기에 심심했다.
“하양아 많이 늘었다.”
“아녜요 언니. 같은 멜로디 반복하는 거잖아요. 간단해요.”
장하양은 싱긋 웃으며 베이스에서 손을 뗐다.
리카가 장난스레 주장했던 브레멘 음악대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가지게 됐다.
다들 악기 연주가 익숙하진 않더라도, ‘롱 포’ 자체가 반복적인 구성을 띠고 있어 계속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연주가 가능하게 됐다.
“일렉에 비하면 더 쉽죠.”
“……하양아, 그런 말 하면 안 된대.”
“뭐가요?”
백설하는 작사 강의에 이어 일렉 기타 강습도 받고 있었다.
‘음악을 위한 동행’ 촬영 중, 일렉 기타를 연주하는 에리카가 너무 멋지게 보였기에 배우고 싶어졌었다.
“기타 강사님이 베이스가 일렉보다 뭐뭐하다,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
“왜요?”
“그게, 베이스는 밴드 사운드 중에서도 귀에 잘 안 들리잖아. 그래서 약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신경 안 쓰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대. 그래서 좀 민감하다고 그러셨어.”
“아, 그렇구나. 조심할게요.”
장하양은 자신의 왼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정도이지만, 백설하는 곧장 알 만한 수준으로 장하양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양아 왜 그래?”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백설하는 장하양의 왼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았던 부분을 눈에 담았다.
“굳은살 때문에 그래?”
“……네.”
기타의 줄은 금속이다.
소리를 내기 위해선 손가락으로 꽉 눌러야 하는데, 손끝이 아플뿐더러 계속하다 보면 굳은살도 생긴다.
“흉하게 보이진 않을까 해서요.”
“이게 뭐가 흉해. 손톱 아래 살을 누가 본다구.”
“그럴까요.”
“열심히 연습한 사람 손인데 누가 흉하다고 생각하겠어. 난 예쁘게만 보이는데 뭘. 신경 쓰지 마.”
“고마워요, 언니.”
동생이 위로받은 것처럼 보여서, 백설하는 헤실헤실 웃었다.
“아, 나 이제 가봐야 한다.”
“잘 다녀오세요.”
백설하는 매니저와 함께 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홍대의 어느 밴드 합주실.
어두운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원목 색의 벽면과 바닥이 보였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밴드 악기가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곳에 기타를 조율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언니, 저 왔어요.”
“응.”
왼쪽 귀에는 체인과 피어싱이 가득하고, 오른쪽 귀와 연결된 목 주위에는 감각적인 문신이 뱀처럼 이어져 있다.
백설하의 기타 강사, 인디 밴드 멤버인 유선영이 고개를 들었다.
“시작할까?”
“네.”
백설하는 소녀연맹 내에서 유일하게 전문적으로 밴드 악기를 배우는 사람이 됐다.
유선영은 좋은 스승이어서, 다그치는 법도 없이 천천히 백설하를 가르쳤다.
칭찬도 인색하지 않았다.
“잘하네.”
“헤헤…….”
백설하가 소심하게 웃자.
“웃을 땐 시원하게 웃어.”
“네……?”
“왜 남 눈치를 봐.”
유선영은 다시 해보라는 듯 손뼉을 쳤다. 백설하가 깜짝 놀라면서도 착실하게 웃었다.
“하하…….”
“다시.”
“아하하!”
“잘했어. 혹시 너 장녀야?”
“아…… 네.”
“어쩐지.”
실은 집에서는 장녀의 역할을 크게 하지 않았었다.
다만, 소녀연맹에서 맏언니로서 지낸 기간이 길어 그 특징이 드러난 것이다.
백설하는 동생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동생으로서 언니나 오빠에게 칭찬받는 경험은 적었다.
그랬기에 칭찬에 기뻐하는 것도 무심코 눈치를 보고 말았다.
“앞으로는 마음껏 기뻐하는 법도 가르쳐야 하나.”
유선영은 정말 친언니라도 된 듯 백설하를 따스하게 대했다.
백설하는 옛날에 성필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회사 내에서는 언니라도, 밖으로 조금만 나가도 어린애나 다름없다’고 했었다.
그 말대로였다.
어색하면서도, 왠지 편안하다.
이제야 자리를 찾은 것처럼, 성필에게 격려받으며 어리광을 부릴 때랑 비슷한 기분이다.
“뭐야, 있었네.”
그때 합주실로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팔과 목에 유선영과 비슷한 타투를 새겼다. 차림새 또한 록 스피릿이 잔뜩 느껴졌다.
그가 백설하 쪽으로 흘끗 눈길을 주며 말했다.
“미안해요. 뭐 좀 가지고 나갈게요.”
“아, 네.”
남자는 무심히 합주실 안쪽으로 오다가 백설하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됐다.
그러더니 처음 말할 때와는 달리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걔구나, 아이돌.”
비웃음마저 섞여 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취급을 당하자 백설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유선영이 ‘참으라’고 하는 듯 살포시 백설하의 손을 쥐었다.
“아이돌이 무슨 악기를…….”
남자는 불쾌감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했다.
연주용 도구를 챙기고 나가는 와중에도 혀까지 찼으니 말이다.
적막에 잠긴 연주실 안에서, 잔뜩 굳은 백설하를 향해 유선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 내가 대신 사과할게. 쟤가 원래 그런 애야. 아이돌 싫어해.”
“……왜요?”
유선영이 쓰게 웃었다.
“이유가 있긴 하지. 아이돌이 뮤지션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네……?”
“과거의 영광이랑 향수에 취해 있는 놈이라고 생각해. 신경도 쓰지 말고. 앞으로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까. 다시 시작하자.”
유선영은 다시 백설하의 품에 기타를 안겨주었다.
연습을 시작할 분위기지만, 백설하는 이것을 물어야만 했다.
“언니도, 그러세요?”
“뭘?”
“아이돌이 뮤지션이 아니라고…….”
“존중해.”
아이돌이 차트를 도배하는 것을 아니꼽게 보는 대중들도 많다.
스스로를 진정한 뮤지션이라 자부하는, 록커인 그 남자는 더할 것이다.
하지만 유선영은 오래전에 그 남자와 같은 생각에서 탈피했다.
“문화에도 대세가 있는 거지. 아까 걔처럼 아니꼽게 보지는 않아.”
“……네.”
백설하는 찝찝한 기분으로 연습을 이어갔다.
* * *
“최근에 발견한 건데요.”
신아름의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어이없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 특유의 진지한 어조였다.
성필은 미리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들어보기로 했다.
“설하 쌤요, 대단하지 않아요?”
아, 칭찬이었구나.
“기타 들면 가슴이 기타 위에 폭 올라가는…….”
“안 들려 안 들려 안 들려 안 봤어 말 안 해 안 들려어!”
“오바 좀 하지 마요. 보이는 걸 얘기하는 거잖아요. 제가 쌤을 놀림거리로 삼는 것도 아니고.”
“…….”
대단하긴 하다.
가로 엔터 임직원들도 멤버들의 합주를 처음 구경했을 때,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알 수 없었을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남자 임직원들이 그러했다.
저런 게 가능하다니…….
“저 깜짝 놀랐어요.”
“어, 그래.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알겠으니까.”
“그 정도면 누워서 폰 거치대로도 쓸 수 있겠…….”
“그만하자고 제발! 이런 얘기하기 싫어!”
신아름이 실실 웃으면서 성필의 옆구리를 찔렀다.
“팀장님 남고생 같아요. 어른이면 보통 초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른이니까 이러지…….”
성필은 남자끼리 모이면 여자 이야기부터 나오는 시절에서 졸업한 지 오래다.
이제 친구들과 모이면 나오는 주제라곤 주식이나 부동산, 자동차, 전자제품 정도가 전부다.
가끔 아이돌 기획사에 다니는 성필이 ‘운수도 좋은 놈’이라며 까이는 게 그나마 색다른 대화 주제다.
“그런 의미에서 아라는…….”
“그건 진짜 말하지 마. 나 화낼 거야.”
조아라의 이야기까지 나오면, 정말로 모욕이 돼버린다.
성필은 뒷담은 하고 싶지 않다.
아니, 뒷담은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하고 싶지 않다.
“어, 쌤이다.”
신아름은 유리 벽 너머로 백설하가 도착한 것을 보았다.
방금 기타 연습을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
“쌤!”
백설하가 들어오자마자 신아름이 힘차게 인사했다. 성필은 신아름이 또 그 얘기를 꺼낼까 봐 긴장했다.
“다녀오셨어요. 힘들었죠?”
“으응, 아니야.”
“휴게실에서 좀 쉬세요. 지금 비었어요.”
“고마워.”
신아름은 정상적으로 마중을 마치고, 또 웃으면서 성필을 보았다.
“팀장님 긴장했어요? 안 한다고 했잖아요. 여튼 겁만 많아서…… 팀장님?”
성필은 계단을 올라가는 백설하만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설하 기분 안 좋아 보여.”
“……어디가요?”
“몰라. 그냥 안 좋아 보여.”
성필은 빠른 걸음으로 백설하에게 향했다.
사라지는 성필을 보며, 신아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보기만 해서 기분을 알지?’
물론 성필의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보는 건 아니었다.
석세스 엔터에서도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건 연습생들을 오래 봐서 가능한 거였…….
‘아, 팀장님 가로 엔터에 오신 지 거의 3년 다 돼가는구나.’
오래됐네.
그러면 멤버들 기분도 한눈에 아는 게 당연하겠지.
‘당연한, 거잖아…….’
갑자기, 신아름은 이유 모를 우울함에 사로잡혔다.
* * *
백설하는 홀로 일렉 기타를 든 채 연습실에 있었다. 신아름의 말대로, 정말 가슴이 기타 위에 얹어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성필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어나서 인사하려는 백설하를 ‘괜찮다’며 앉힌 뒤, 그녀의 옆에 자리 잡았다.
“오늘 연습 어땠어?”
“좋았어요. 저번에 연습했던 곡도 많이 나아졌구요. 재밌어요.”
“다행이네. 음, 혹시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백설하가 놀라서 반사적으로 ‘아니요’라고 답하려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던 게 맞다.
‘박 이사님이 전에 말씀하셨었지.’
‘롱 포’ 가이드 버전을 녹음하다가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을 때, 그는 백설하를 위로해주었다.
언니로서의 압박감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백설하에게, 어른인 자신에게는 얼마든지 어리광 부려도 된다고 말이다.
‘또 나도 모르게…….’
성필의 앞인데도 강한 척을 하려고 했다.
‘……근데 일 있는 건 어떻게 아셨지?’
백설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왜곡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도 성필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 남자에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성필은 이해한다는 기색이었다.
“아이돌을 아티스트나 뮤지션으로 분류하지 않는 사람이 많단 건 알아요. 아는데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서…….”
솔직히, 백설하는 잔뜩 겁먹었었다.
인터넷으로만 보던 비판을 현실에서 직면해서, 욕을 먹기라도 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고개만 숙이고 있었었다.
“설하는 어떻게 생각해?”
“저는…….”
말하기 정말 부끄럽지만.
“저를, 뮤지션이라고, 생각하고 있, 아니, 생각하고 싶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이돌을 뮤지션이라고 보지 않는다.
아이돌이란 어디까지나 기획되고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다.
해외 음악 평론가나 관련 업계의 인물들도, 케이팝이 성공한 조류라는 데는 동의한다.
오랜 담금질로 완전완비제품인 아이돌을 만들어내어, 우월한 퀄리티로 세계 음악 시장을 강타한 전략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기한 무언가에 지나지 않아.’
케이팝 아이돌을 평가하는 칼럼이나 논문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말이 ‘팩토리 아이돌’이나 ‘시스템 플랜트’다.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
시스템이 심고 기른 기획물.
케이팝의 성공은 신기하고 대단할지언정, 존중받을 무언가는 아니라고 여긴다.
미국의 팝이 뿌린 씨로부터 자라난 신기한 아류작 정도. 그게 케이팝에 대한 인식이다.
“그런데 제가 저를 뮤지션으로 여긴다는 건, 저 혼자만 생각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어느 정도 사실이구요…….”
백설하도 한국의 스타 시스템 속에서 살았다.
어린 나이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여 온갖 기술을 익혀왔다.
언젠가 회사의 뜻대로 창조될 것을 기다리며 말이다.
지역씬부터 유명세를 얻어 메이저에 진출하는 아메리카의 스타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독립적인 뮤지션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긴 하지.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는……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해.”
“……네?”
예상외로, 성필은 그 남자의 의견에 반론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아이돌을 아티스트로 보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건 곧 인정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평소 성필이 해왔던 말과 너무 다르다.
“그런데 그건 당연해. 세계 음악시장의 담론이 그러니까.”
“세, 세계 담론……?”
“한국도 마찬가지고. 한국에서 대중음악이 꽃피운 건 군부가 물러나고 나서야.”
오랜만에 음악사 시간에 배웠던 것을 체크해 볼까.
성필이 짓궂은 미소와 함께 물었다.
“당시 세계 대중음악 시장에서 메이저로 튀어나온 장르는?”
“아…….”
음악사 강의는 너무 오래전의 일이다.
많이 잊어버렸다.
백설하는 끙끙대며 답을 생각하다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퀴즈 프로그램에라도 나간 것처럼 황급히 답했다.
“힙합이랑 얼터너티브 록이요!”
“오, 기억하고 있었네? 가르친 보람이 있어. 대단하다.”
백설하는 쑥스러워선 희미한 미소만 보였다.
“두 장르의 주요 주제는?”
“음, ‘네가 누구인가’, 맞나요……?”
“맞아.”
힙합과 얼터너티브 록은 ‘진정한 너는 무엇인가?’라는 대주제를 잡고 발전해왔다.
그들에게는 진실성과 진정성이 지상의 가치였다.
그 가치는 현재도 짙게 남아, 자신의 정체성과 커리어를 속이는 힙합 뮤지션이나 록커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아무리 그 장르를 잘해도, ‘진짜 힙합에 걸맞은 삶을 살지 않았다’ ‘놈의 이야기는 다 가짜다’라는 게 밝혀지면 몰락해버려.”
두 장르의 영향력은 매우 거대해서, 현대에도 강한 힘을 행사한다.
그래서 대중음악평론가나 대중이 판단하는 아티스트의 기준은 ‘진정성’이 됐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직 세계의 대중음악계는 90년대의 평가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양의 보이밴드나 걸그룹, 그리고 일본의 아이돌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것도, 힙합과 얼터너티브 록이 힘을 얻은 시기와 일치한다.
“‘작가주의’나 ‘로키즘’이라고 해.”
스스로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만이 진정한 뮤지션이다. 스스로 연주하는 록커만이 뮤지션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크게 성공하더라도, 시스템의 지지를 얻고 올라선 자는 대중과 평단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해야만 한다.
아이돌처럼.
“아마 그 록커분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실 거야. 회사로부터 곡을 받고, 안무를 받고, 옷까지 회사가 맞춰주는 걸로 입는 아이돌은 가수라 불릴 가치도 없다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백설하는 기가 죽었다.
그럼, 아이돌로서는 평생 세계시장의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결국 모든 이들이 비판을 가할 테니까.
아무리 많이 팔리더라도, 아티스트로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
잠깐.
그럼 성필이 항상 멤버들에게 말했던 ‘아티스트가 되어라’라는 말은.
“세계에 통하는…… 저희를 세계에 내보내려고 미리 준비하는 거였어요……?!”
이럴 수가.
항상 최고의 아이돌을 목표로 한다는 성필의 말이 과장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니.
해외에 진출할 것을 대비해서 미리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쌓아두려는 거였구나!
“아닌데.”
“……?!”
“아이돌이 밴드도 아닌데 악기 연주랑 작곡이랑 댄스 창작이랑 작사도 다 할 순 없잖아.”
그렇게 하기엔, 아이돌 산업은 너무나 기술집약적이고 고도화됐다.
서로 존중해야 할 전문분야가 확실하다.
“진정성을 주요 가치로 치는 미국도, 한 명의 뮤지션에게 모든 분야의 재능을 요구하지는 않아. 결국은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
문제는 아이돌이나 시스템에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있지.”
90년대에서 멈춰버린 평가 기준이다.
한국의 음악 평론이나 대중의 시선도 그쯤에서 멈춰버렸다.
이제는 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중예술계가 ‘가요계’라고 불리는 것만 해도 그렇다.
한국 사람들에게 대중예술이란 곧 가요다.
싱어송라이터가 득세했을 시절의 유산이다.
“중요한 건 너희들의 의견이야. 작사, 작곡, 악기 연주는 너희의 의견을 더 확실하게 전달받는 방법이고. 그러니까…….”
어떤 의견이든 마음껏 내도 괜찮다.
날것의 재료를 먹음직스러운 요리로 만드는 일류 쉐프처럼, 가로 엔터도 멤버들의 의견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가공해낼 것이다.
그게 기획사의 역할이다.
“물론 물건을 수제작하는 장인의 몸값은 비싸. 대단한 분들이지. 하지만 세상 대다수의 물건은 공장에서 만들어져. 품질도 좋아. 누구도 그거에 뭐라고 하지 않잖아?”
중요한 건 공장에서 만들어졌단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물품에 담긴 아이디어와 생각, 그리고 그 쓸모다.
또한, 중요한 건 시스템의 힘을 빌렸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아이돌이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낸 작품 그 자체다.
“설하야.”
성필이 백설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백설하는 뒤로 물러날 생각도 못 하고 굳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 록커분이 너 무시해서 기분 나빴어?”
“어, 네, 네…….”
“기분 나빠하지 마. 네가 그 사람이랑 똑같은 생각을 가진 게 아니라면.”
백설하의 심장이 불현듯 빨라져 왔다.
실은 성필이 가까이 왔을 때부터 빠르게 뛰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열기는 달랐다.
“너도 90년대의 기준에서 멈출래?”
“……아니요.”
“사람들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거야?”
“아녜요.”
“그럼 어떡할래?”
백설하의 마음 안에서는 답이 있었다.
음악사 시간에 배웠던 온갖 혁명적인 음악가와 장르들의 이야기처럼.
“마, 만들 거예요.”
새로운 평가 기준을 창조할 것이다.
재즈. 록. 세계화한 브리티시 팝. 힙합. EDM.
전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비난과 비판, 모욕에 직면했었다.
케이팝 아이돌도 그 과정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난의 끝은, 언제나 세계를 휩쓰는 스타의 탄생으로 마무리 지어졌었다.
“인정받게 할게요.”
그제야 백설하는 성필이 말했던 ‘최고의 아이돌’이란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게 됐다.
최고의 아이돌이란, 아이돌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꿀 스타 플레이어를 뜻하는 것이다.
즉……!
‘……속 아파.’
그렇게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니.
백설하는 부담감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설하야, 할 수 있지?”
“네, 어, 어…….”
“할 수 있지?”
“네, 네네, 네…….”
백설하는 ‘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성필의 얼굴이 지근거리에 있어서 눈도 핑글핑글 돌아가는 듯했다.
게다가 백설하는 어떤 것이든, 웬만하면 성필에게 맞춰주고 싶었다.
이렇게 심지가 약하면 안 된단 것을 알아도, 개구리가 뱀 앞에 서면 몸이 굳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 어쩔 수가 없다…….
“좋아. 그 록커분 말은 신경 쓰지 마! 함께 정상을 노리자!”
……정상?
아, 그렇지.
정상을 노려야지.
‘한국 정상도 아니고.’
세계의 정상.
‘아직 케이어스도 못 이겼는데…….’
하지만 그 불만은 모두 접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꿈에 가득 찬 어린아이 같은 성필의 표정을 보면, 백설하도 같이 웃음이 나오며 그와 함께 걸어가고 싶어진다.
항상 리카가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에 속지 않을까 걱정하는 백설하도, 실은 리카와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이미 백설하는 성필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 * *
성필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 백설하는 큰마음 먹고 A&R팀 회의에서 말했다.
“저, 이번 타이틀곡은 보컬에 힘을 주고 싶어요. 정규 앨범이니까, 이번에는 소녀연맹의 기량을 다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이미 전에 논의한 내용 아니야?”
그렇긴 하다.
백설하가 ‘음악을 위한 동행’을 촬영하기도 전의 회의에서, 그녀는 ‘보컬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건 불완전한 주장이었어.’
기가 죽은 조아라를 배려하여, 결국 논의는 어영부영 끝났으니까.
백설하는 그런 밋밋한 결론을 원하는 게 아니다.
“전에도 얘기하긴 했죠. 그런데 모두한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은 거 같아서요.
“음…….”
“보컬에 힘을 주자는 건, 정말로 보컬에 집중하는 곡을 말하는 거예요. 저만을 위한 게 아니라, 멤버들 모두 보컬이 많이 좋아졌으니까 능력에 한계를 두지 않고 최대한의 기량을 보여주고 싶어요. 힘들더라도, 그래도요…….”
백설하는 심호흡을 하고, 하던 말을 이어갔다.
“아티스트로서의, 진지한 요청이에요. 저는 보컬이 강조된 곡을 하고 싶어요.”
백설하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조아라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