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87화 (187/760)

187화

“아저씨 말대로, 역시 생각은 말하고 봐야 하는 거 같아요. 가슴 안에 담고 있어도 아무도 안 알아줘.”

“뭘 아저씨처럼 말하고 있어.”

“내가 아저씨처럼 말한다고요?”

“어?”

“아저씨처럼?”

“뭐라는 거야.”

“아저씨?”

“아니, 날 보고 아저씨라고 말한 게 아니라, 네가 진짜 아저씨처럼 말한다고.”

“진짜 아저씨?”

“그냥 박 이사님이라고 불러!”

조아라가 낄낄 웃었다.

아침부터 대견한 말을 하나 싶었는데, 역시 놀리려고 했나 보다.

성필은 짐짓 기분이 상한 티를 냈지만, 일이 잘 해결된 것 같아 안심했다.

‘설하랑 아라가 진짜 싸우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설하가 마음이 넓어서 다행이야.’

소녀연맹의 리더가 백설하인 건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권위로 찍어누르기보다 모든 멤버의 의견을 포용하려 노력하니 말이다.

정신적으로도 힘들 텐데, 백설하는 대견하게도 아직까지 잘해주고 있다. 그야말로 리더의 교본과 같은 존재다.

‘마음 같아서는 따로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어.’

물론 소녀연맹 멤버 다섯 명 모두 잘해주고 있지만, 백설하는 리더로서의 임무를 더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눈길과 관심이 더 간다.

“그런데 설하랑 어떻게 말 텄어?”

“바로 찾아가서 말했어요.”

“……아라 네가 먼저?”

“네.”

이상하다.

분명 백설하가 먼저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로 했었지 않나.

‘아라가 정말 내 말만 듣고 용기를 냈나?’

여하튼, 잘 해결돼서 다행이다.

‘아라도 지금까지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전생의 조아라를 떠올리면, 그녀가 소녀연맹에 적응해서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 * *

조아라의 안무 시안이 KS 엔터에서 채택됐다.

석세스 엔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조아라가 부르기에 어쩔 수 없이 술자리를 갖게 됐다.

‘얘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석세스 엔터의 부대표인 성필을 동네 아저씨처럼 불러대다니.

처음 협업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성격이 호탕하다고 해야 할지 분위기를 못 읽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술집을 와도 이런 데를 오고.’

조아라가 축하해달라며 술을 산다기에, 거나하게 쏘나 싶었는데 평범한 고깃집이었다.

‘나한테는 돈 쓰기 싫다 이거지…….’

시안비도 두둑하게 받았을 텐데, 이왕이면 더 좋은 곳에 가주지.

‘몇 달 전에 내 앞머리도 태웠으면서.’

조아라가 무릎 꿇은 것을 보았으니, 그 대가는 받은 걸로 치자.

성필은 조아라의 여러 행동이 마음에 걸렸지만, 축하해주러 온 것이니 가만히 있기로 했다.

오늘 성필은 조아라의 자랑을 들어주는 기계니까.

“그래서 내가 KS 엔터에 가서 따졌거든요. 내 시안 수정할 거면 아예 가져가지를 마라. 쓸 거면 그대로 쓰고, 수정할 거면 나한테 맡겨라.”

“와, 너 겁도 없다.”

“이게 진짜 대박인 게, 내가 정호환 이사 면전에서 말했어요.”

“너 미쳤어?!”

“더 들어봐. 정호환 이사가 내 말 가만히 듣더니 미친 것처럼 웃는 거야. 아니 그랬더니 시안 그대로 쓰겠대. 대박이죠?”

대박이다.

정호환 이사를 직접 봤다는 게.

‘나도 정호환 이사님 보고 싶다…….’

60대가 되도록 엔터계의 최전선에서 활동 중인 전설적인 프로듀서이자, 성필의 우상이 바로 정호환이다.

작년에 KS 엔터 신년 파티에 갔을 때 몇 마디 섞은 게 전부일 뿐, 성필은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다.

‘아라한테 자리 좀 마련해달라고 할까.’

성공한 사업가랑 한 끼 식사로 수백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성필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미친놈인가 생각했지만, 정호환 이사라면 수백만 원을 지불할 수 있을 것 같다.

성필에게는 정호환을 만나는 게 팬미팅이니까.

“아라 너는 겁 좀 먹어야 해. 너 배우 인생 이대로 쫑칠 거야? KS 엔터가 이쪽 업계에 얼마나 큰…….”

“배우가 내 본업인가? 댄서랑 안무가가 본업이지. 드라마 그깟 거 안 나와도 돼요.”

“너 석세스 엔터 버리게?! 배우로 계약한 지 얼마나 됐다고!”

“내 말은, 구질구질하게 살면서까지 계속할 필요 없다는 거죠.”

성필은 트랙터 엔진 소리 같은 헛웃음을 흘렸다. 조아라의 기개를 보니, 도저히 어이없는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그에 조아라는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너 케이어스한테 안무 줘보고 싶다고 말했었잖아. 그 목표 이번에 이뤘고.”

“뭐, 케이어스 자체에 주고 싶다기보다 진저한테 시켜보고 싶은 게 있는 거죠.”

“시켜보고 싶은 거……?”

“걔 진짜 재밌어요. 내가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안무 보여주면 어떻게든 따라 한다니까요.”

불쌍한 진저…….

고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 조아라한테 찍혀서 갖은 고초를 당하고 있다.

“걔 춤 잘 춰요. 진짜 잘 춰. 나보다 잘 추는 거 같아. 음, 곧 케이어스 해체하면 진저도 솔로로 활동하겠죠? 꼭 나한테 안무 받으라고 세뇌해야겠다.”

“케이어스는 해체 안 해!”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케이어스는 영원해야 한다.

천년만년 아이돌로 계속 활동해줘, 제발.

‘KS 엔터 주식도 많이 사뒀단 말야…….’

케이어스가 해체하면 주가가 꽤 내려갈 게 분명하다.

“이제 곧 마의 7년이잖아요. 케이어스 해체하는 김에 오빠도 탈덕하…….”

“진짜 그만해라.”

성필의 싸늘한 태도에 조아라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홀로 술잔을 비웠다.

‘아, 실수했다.’

축하해주겠다고 불러놓고 화나 내다니.

그런데 조아라가 심한 거 맞잖아.

케이어스 팬 앞에서 자꾸 해체하니 마니……. 안 그래도 진짜 해체할까 봐 마음 졸이는 나날만 보내고 있다.

“크흠, 어쨌거나.”

성필은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계속 KS 엔터한테 안무 주고 싶지 않아? 이번 일로 정호환 이사님 심기 거슬렀으면 어쩌려고?”

보통 입지가 넓어지고 지위가 상승하면 몸을 더 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아라는 그와 정반대였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익을수록 고개가 더 빳빳해진다.

“오빠, 내가 어렸을 땐 고개 숙이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일감 얻어냈고. 그런데 말이에요…….”

조아라가 원샷 하라는 듯 소주를 한입에 들이켠 뒤 성필을 보았다.

이미 성필의 위장은 취기로 요동쳤지만, 조아라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술을 더 부어 넣었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한 건, 고개 숙이려고 그런 게 아니거든요. 고개를 더 빳빳하게 들고 다니려고 그런 거지.”

비굴한 건 아래에 있을 때만으로 족하다.

즉, 조아라가 이토록 위로 올라온 건 남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남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살기. 이러려고 젊음을 다 바친 거지, 나이 들어서까지 그래야 해?”

“…….”

“뭐요. 뭐 꼬와요?”

“이 나이 먹고 너한테 불려 다니는 난 뭔가 싶어서 그래…….”

“아 싫으면 가! 나가요! 소고기도 사줬…….”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성필의 핸드폰이 떨렸다. 문자가 왔다는 표시와 함께, 액정에 ‘아름이♡’란 이름이 떴다.

조아라는 그것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그에 이어 바퀴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감마저 보였다.

“…….”

“…….”

“저거 하트 뭐예요.”

“아, 아름이가…… 아름이가 가끔 내 폰 훔쳐서 멋대로 저렇게 해놔.”

“신아름 걔가? 그걸 믿으라고요?”

“안 믿으면 어쩌게.”

“바로 ‘디스팩트’에 제보.”

잠시 성필과 조아라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어떻게든 조아라의 연락을 막으려는 성필과, 어떻게든 성필을 골탕 먹이려는 조아라의 한판 승부.

결과는 성필의 승리였다.

그는 조아라의 핸드폰을 빼앗아 자신의 옆에 턱 두었다.

“장난으로 말한 건데 진짜 힘쓰네…….”

“술 먹고 내 머리도 태웠는데 뭘 못하겠어!”

“쓰읍, 늙었는데 아직 힘 좀 쓰시네? 내가 가볍게 이길 줄 알았는데.”

“나 아직 30대거든?!”

성필이 화를 삭이며 핸드폰을 집으려던 차.

“폰 꺼요. 술 마시는데 계속 폰 보게?”

“아니, 연락 왔잖아.”

“휴가라면서요. 밑에 오빠 대신 일할 사람도 넘치고.”

“휴가라도…….”

조아라가 성필의 핸드폰을 반대로 뒤집었다. 그리고 성필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옆에 두었다.

“오빤 그게 문제야. 일 더 많이 하려고 위에 앉아 있어요? 오빠가 할 필요 없는 일을 맡기려고 위에 올라 있는 거잖아요. 김 대표님도 그거 원할 거 아냐. 이제 매니저 노릇 좀 그만해요.”

조아라가 성필의 잔에 소주를 또 채웠다.

투명한 잔을 따라 천천히 수위를 높여가는 술을 보니, 성필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높아져 가는 술의 위치처럼, 성필은 더 높은 곳에 배를 띄우기 위해 노력해왔다.

석세스 엔터라는 배를 세워두고,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구덩이에 물을 들어부었다.

그래야 더 멀리 나아가고, 더 높이서 볼 수 있으니까.

‘아라 말이 맞네…….’

옛 향수에 사로잡혀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성필은 더 이상 매니저도, 매니저팀 팀장도 아니다. 석세스 엔터의 부대표, 매니지먼트 총괄의 위치에 앉아 있다.

‘아름이도 급한 일이면 전화 걸겠지. 대부분은 고양이 사진이나 음식 사진만 보내니까.’

성필은 푸근하게 미소 지으면서 잔을 비웠다.

‘얘한테도 배울 게 있네.’

피부 관리법 말고도 배울 게 또 생기다니, 세상이 놀랄 노릇이다.

조아라의 의견은 타당하다.

사람이 권위와 권력을 얻으려는 건,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기 위함이다.

조아라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기 위해 젊은 시절을 피 토하는 노력으로 보냈단 건, 허풍이 아닐 것이다.

“너 그 성정 가지고 어떻게 참고 지냈냐?”

“뭐, 다 참은 건 아니고. 알잖아요. 나 어렸을 때 고생 많이 한 거.”

성격을 숨기기 힘들어해서 온갖 곳을 굴러다니다가, 안무가와 댄서로 자리를 잡은 건 고작 몇 년밖에 안 됐다.

진작 성질 죽이는 법 좀 배울 것이지.

“덕분에 20대 초반 굶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죠. 근데 살다 보니 다 도움이 돼.”

“진짜 아줌마 같네.”

아줌마라는 단어에 조아라의 눈빛에 살기가 나타났다. 성필은 재빨리 그녀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너 영광인 줄 알아. 석세스 엔터 부대표한테 잔 받는 거 쉬운 일 아니거든.”

“배우가 술 먹어주는데 오빠나 고마워해요.”

“그래그래. 댄서 겸 안무가 겸 배우 조아라 만세다. 아이돌도 해보지 그랬냐.”

“우웩. 난 치렁치렁한 옷 입고 춤 못 춰요. 생각만 해도 소름 돋네.”

“어울릴 거 같은데.”

조아라가 턱을 괴고 실실 웃었다. 그러면서 십수 초 동안 성필을 바라보기만 했다.

등줄기가 싸해진 성필이 왜 그러냐고 묻자.

“오빠가 아이돌 옷 입고 춤춰주면 나도 해볼게요.”

“개소리하지 마!”

“……걍 장난으로 한 말인데 왜 소리 질러요.”

“아, 미안. 나 많이 취했나 보다.”

왠지 모르게 위압감을 느껴서 그랬다.

맹수를 마주친 원시인처럼, 당장 도망가지 않으면 갈가리 찢길 것만 같은 위기감이었다.

“흠, 오빠 오늘 뭐…….”

조아라는 성필의 잔에 소주를 채우며, 왠지 모르게 살짝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찍 들어가야 돼요?”

“휴가니까 괜찮아. 나 정신 잃으면 대리나 제대로 불러줘.”

“……맡겨만 둬요!”

“왜 대답이 느려. 너도 취해서 멍하냐?”

“아, 맥주도 시키자. 소맥 먹어요.”

“야, 나 소맥 먹으면 진짜 정신 잃…….”

“여기요! 맥주 한 병 주세요!”

* * *

“…….”

“아저씨 왜 그래요?”

“……아니, 아냐.”

너무 과거를 봐버렸다.

이젠 잊고 살기로 했는데 말이다.

하필 조아라의 앞에서 떠올려버리네.

‘그래, 아라는 대견하지.’

그 성질을 죽이고 소녀연맹에 소속해 있으니 말이다. 멤버들과 맞춰주려니 화를 깨나 삭이며 지내고 있을 것이다.

무조건 조아라가 멤버들에게 맞춰준단 뜻이 아니다.

‘다 착한 애들만 모여 있으니까.’

소녀연맹 다섯 명은 놀랍도록 죽이 잘 맞다.

서로 다른 부분도, 안 맞는 부분도 확실히 존재하지만,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빈 부분을 잘 채워주고 있다.

덕분에 여태껏 큰 문제 없이 잘 버텨오고 있지 않은가.

‘계약 기간 동안 불화를 숨기고 있다가, 기간 끝나면 연락도 없이 사라지는 애들이 부지기수인데 말야.’

다들 대단하다.

“아라야, 잘했어. 앞으로도 할 말 있으면 삭이지 말고 멤버들한테 맘껏 말해. 물론 조금씩 배려하면서. 너도 멤버들 얘기 잘 들어주고.”

“당연하죠.”

“……그리고.”

“또 뭐 있어요?”

이건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전생이 떠오른 김에 말해야겠다.

“아라야, 자기 속마음을 말하는 건 좋거든. 진짜 좋은 일이야. 근데 너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고백은 진짜 확신 있을 때 말고 하지 마.”

“뭔 소린데요 갑자기. 맥락이 전혀 없잖아요.”

“고백은 네 마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거야.”

“참나, 이젠 연애 강의까지 해요? 아저씨가 신경 안 써도 혼자서 잘할 거거든요?”

“그냥 알고 있으라구…….”

조아라를 떠나보내고, 성필은 희미한 노스텔지아에 잠겨 창밖으로 날아다니는 참새를 구경했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먹이를 찾는 참새들의 운명은 얼마나 기구한가.

이 돌멩이의 정글에서, 저 새들에게 자유란 이름이 합당키나 할 것인가.

인류의 역사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불렸던 저 새들은, 결국은 인간이 만든 감옥 속에서 본인이 알지 못하는 한계만을 희구하는구나…….

“이사님!”

갑자기 나타난 리카 덕분에, 성필은 노스텔지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뭔가요, 이사님 표정.”

“내가 왜?”

“아내의 의무방어전 요구를 받고, 씁쓸하게 샤워를 마친 남편 같은 표정이에요.”

“너 뭐라는 거야?!”

어떻게 비유를 떠올리는 거지.

심야 프로그램이 애를 다 망쳐버렸다.

“앗,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빅뉴스예요!”

“방금 네가 한 말이 더 빅뉴스야.”

가로 엔터의 전서구인 리카가 또 흥미로운 정보를 접한 모양이다.

성필에게 말하러 온 것을 보니, 아마 멤버들 사이에서 있던 일이겠지.

“어제 아라쨩이 설하 쌤한테 엄청난 짓을 했어요!”

“어? 뭔데? 신체적 위협을 가했어 아라가?!”

조아라 키사마(네놈)……!

“정신적 위협을 가했어요!”

대략, 조아라가 백설하를 벽에 몰아넣고 압박을 가했단 내용이다.

다만 리카의 설명으로 들으니,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 같이 그려졌다. 마치 조아라가 백설하에게 고백이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아타시(저) 도키도키(두근두근)했어요! 저도 당해보고 싶은데 아라쨩이 안 해줘요!”

“그렇구나.”

“그래서 이사님한테 왔어요!”

“절대 안 해.”

“에엑?!”

아라야, 너는 커서나 어려서나 똑같구나.

아무리 본심을 참기 힘들어도 앞뒤는 가릴 수 있는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랐는데…….

성필은 벽꿍을 해달라며 옷소매를 흔드는 리카를 무시한 채, 조용히 눈물을 머금었다.

* * *

“한 이사님 말씀은…… 마지막으로 정리할게요.”

장하양이 지친 기색으로 논쟁을 마무리하려 했다. 한구인도 마찬가지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정리하며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역사를 정의하는 건 시대가 아니라 사료(史料)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현재 남은 사료로 과거를 그리는 것이기에, 객관적인 진리인 과거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사료로 이루어진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히 진실된 역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료를 인간이 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설령 사료로 역사를 연구하더라도, 그건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이다. 즉, 소설책을 분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실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장하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결론.”

“말씀하십시오.”

“진리로 판정할 수 없는 과거가, 역사가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 못하겠어요. 진실은 존재하잖아요.”

“단,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고생하셨습니다.”

“하양 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브루타(유대인의 전통적 학습법. 짝을 지어 논쟁으로 지식을 도출)가 끝났다.

요즘 소녀연맹 멤버들의 트레이닝 스케줄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아, 한구인이 한 명씩 하브루타로 교육을 하고 있었다.

장하양은 건강즙을 마시며 뜨거워진 머리를 식혔다.

“하양 씨, 그런데 제 의견은 사학계의 주…….”

“시간 끝났어요.”

“……예.”

한구인은 아쉬움을 삼키며 학습 자료를 정리했다.

‘하양 씨는 습득이 빠르셔.’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다.

영어를 습득하는 속도도 가장 느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가속이 붙었다.

들어보니, 장하양은 숙소에서도 책을 즐겨 읽는 모양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녀에게 최대한 다양한 지식을 알려주고 싶다.

‘나중에 사이버대학이나 독학사를 추천해드려야겠군.’

한구인은 대학은 가면 좋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게 있으니 말이다.

성필에게 이런 말을 하면 본인의 처지를 떠올리며 우울해하겠지만…….

장하양에게는 나중에라도 대학 교육을 받는 것을 추천해주고 싶었다.

그만큼 장하양은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았으며, 또한 배움으로써 상당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게 틀림없다.

“한 이사님,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장하양은 강의실을 나와 1층 소파로 향했다. 아무도 없었기에 편히 등을 기대고 앉았다.

“…….”

머리가 지끈거린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거나 책을 오래 읽으면 항상 이러했다.

장하양은 건강즙을 연거푸 들이켰다. 이 쓴맛이라도 입가에 맴돌지 않으면, 계속해서 두통을 느껴야만 했기에.

조금 더 쉬고, 장하양은 다시 책을 꺼냈다. 이번에는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어려워.’

고등학교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았던 장하양에게는 대중을 겨냥한 교양서도 어려웠다.

하지만 끈기 있게 읽어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지혜가 트이는 부분이 있단 걸 알아서였다.

“아…….”

하지만 아까 너무 열중해서 논쟁했던 까닭일까, 두통이 줄어들지를 알았다.

‘그래도 읽어야 해.’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성필과 대화하던 중, 갑자기 이야기가 끊어졌던 것이다.

장하양 때문이었다.

‘어, 하양아 영조 몰라?’

‘아하하, 그, 어떤 건가요?’

‘조선시대 왕이야. 언어유희 개그였는데.’

‘……아하하.’

그때 성필은 ‘모를 수 있지!’라며 장난스레 넘겼으나, 장하양은 볼 수밖에 없었다.

성필의 당황한 표정을 말이다.

그날부터 장하양은 자신의 지식수준이 일반인보다 훨씬 낮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읽어야 해.’

읽어야 하는데, 아직도 머리가 너무 아프다.

결국 장하양은 책 대신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머리를 식힐 겸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한 게시물에 이르렀다.

[걸그룹 초동판매량 탑30]

3년간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었다.

장하양은 천천히 읽어내리다가 소녀연맹이란 이름을 보았다. 20위권에 간신히 걸쳐 있었다.

‘3년간 탑30 안에 소녀연맹이…….’

대단한 기록이다.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 그리고 메인 프로듀서인 성필이 만든 기록이다.

‘대단해…….’

장하양은 자기 일인 듯(자기 일 맞음) 뿌듯하게 미소 짓고,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와 다시금 차트를 읽어갔다.

그녀는 그저 그룹의 이름과 초동판매량 숫자만 읽지 않았다. 그 내면을 읽었다.

‘5위, 남자 팬이 대다수인 그룹. 4위, 남녀 비율이 반반인 그룹. 3위, 여자 팬이 대다수. 2위, 남자 팬이 70% 이상. 1위, 남녀 비율 거의 반반…….’

이제야 정규 앨범 작업에 들어가고 나서 계속 고민해왔던 생각에 마침표가 찍혔다.

‘걸그룹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남녀 팬이 다 필요해.’

어느 한쪽의 호응만 얻어서는 안 된다.

확실히 걸그룹은 보이그룹에 비해 한계가 있다.

‘일본에서는 걸그룹 초동 100만 장도 나온다던데, 한국은 안 될까.’

대한민국에서 걸그룹 초동 100만 장이란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의 아이돌, 돼야 하는데.’

현재 멤버들이 타이틀곡의 방향으로 잡은 건, 보컬과 댄스 퍼포먼스의 극대화다.

그에 따라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장르는 EDM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됐다.

사람들은 흔히 EDM이라고 하면 특징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클럽 음악 같은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전자 악기를 사용하는 곡 자체를 EDM이라고 구분한다.

즉, 일반적으로 전자 악기를 사용하는 케이팝도 크게는 EDM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타이틀곡으로 나올 건…….’

진짜 EDM이라고 부를 만한 것 같다.

댄스 퍼포먼스를 위해 무거운 베이스와 빠른 박자의 드럼을 사용하고.

보컬 퍼포먼스를 위해 곡 전반에 무게감을 주어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주목받도록 한다.

거기다 하이라이트 말미에 따라오는 드랍 파트(EDM의 하이라이트, 모든 사운드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까지…….

‘이 곡에 붙여지는 비주얼과 뮤비가 모든 팬의 지지를 받을까?’

걸그룹에는 두 가지 조류가 있다.

무협으로 따진다면 정파와 사파인, 청순과 걸크러시다. 소수의 컨셉을 제외하면, 모든 걸그룹은 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소녀연맹은 걸크러시를 지향해왔다. 그 덕분일까, 여자 팬 비율이 남자를 상당히 앞질렀다.

아이돌판의 소비자는 다수가 여성이니, 소녀연맹의 컨셉 설정은 영리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정상을 향한 컨셉은 아니었어.’

성필은 소녀연맹의 메시지가 남자 팬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길 바랐고, 그게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앨범 구매자의 성비를 보면 결국에는 한쪽이 우세를 점하게 됐다.

아마 성필도 이것을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항상 그가 말해왔던 대로, 성필의 목표는 소녀연맹이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것이니까.

‘아니, 컨셉 자체는 잘못이 없어. 문제는 우리가 그 컨셉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느냐야.’

실제로 현재 판매량으로 1위를 찍은 그룹은, 짙은 걸크러시를 지향해서 정상에 앉아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팬덤의 성비가 5:5에 가깝다.

‘그룹 자체에서 나오는 아우라와 힘이 대단한 거지. 우리랑 다르게…….’

정확히는, 부족한 장하양이 소녀연맹에 속해 있는 것과는 달리.

현재 걸그룹의 정점은.

‘모든 멤버들이 완벽하니까.’

그렇다면, 소녀연맹 멤버들이 바라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장하양이 소화할 수 있을까.

그 퍼포먼스에 따라오는 컨셉과 비주얼이, 장하양에게 맞춤옷처럼 쏙 들어올까?

장하양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곤 책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유리구두’라는 만화책을 꺼냈다.

옛날에 성필에게 추천해주었던 것이다.

그 대가라고 할까, 그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빌렸었다. 엔딩이 마음에 안 들어 지금까지도 안 읽고 있지만 말이다.

장하양은 선 자리에서 ‘유리구두’의 몇 페이지를 읽었다.

‘이거 때문에 계속 배우 지망생 생활을 버텼었지. 주인공처럼 되고 싶어서…….’

장하양은 이 책의 주인공과 닮은 부분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주인공처럼 되고 싶어 했었다.

어린아이들이 동화를 반복해서 읽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장하양은 책을 덮고 목표로 향했다.

엘릭에게로.

* * *

“아라야, 이건 박자가 너무 빠르다. 차라리 베이스를 길게 까는 건 어떨까?”

라고 했는데, 조아라는 시무룩한 티를 잔뜩 냈다.

엘릭은 허겁지겁 자신이 이런 의견을 낸 경위를 설명해야만 했다.

“설하야, 네 말대로 하려면 이 부분은 팔세토(매우 높은 음역대를 가성으로 부르는 것)로 때워야 하는데. 다른 애들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거든. 음계는 조금만 더 낮추자.”

라고 했는데, 백설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실망한 듯 어깨만 늘어뜨렸다.

엘릭은 허둥지둥 자신이 이런 의견을 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야만 했다.

“리카야.”

“하이(네)!”

“아무래도 프리코러스를 짧게라도 넣는 게 나을 거 같다.”

“손나(그런)! 마아(뭐), 어쩔 수 없네요!”

“……이유는 안 물어봐?”

“아앗! 아타시(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아니…….”

“오빠의 자기과시적인 욕망을 무시하고 바로 대화를 끝내면 안 됐는데.”

“너 말본새 좀 안 고칠래?!”

“다시 갈게요. 흠, 흠, 에엑?! 프리코러스를 넣는다니요! 제 의견을 무시하는 건가요!”

“같잖은 연기 그만해!”

엘릭은 세 사람에게 매일 같이 시달리느라 나날이 초췌해지고 있었다.

‘시어머니 하나만 있어도 수척해진다더니, 나는 세 명이나 상대하고 있잖아…….’

항상 작곡은 홀로 해왔었는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심지어 멤버들에게 곡 수정의 의도를 설명하는 건 거의 엘릭의 역할이었다.

‘형이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잖아요.’

정지음의 말대로, 엘릭은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웠기에 사용하는 어휘와 설명이 정교했다.

정지음처럼 느낌적인 느낌으로만 말하지 않아, 멤버들도 엘릭의 설명을 더욱 선호했다.

덕분에 멤버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는 피드백은 전부 엘릭이 독차지하게 됐다.

“하아…….”

오늘도 힘겨운 나날이 되겠다며 한숨을 내뱉고 있던 도중이었다.

엘릭이 건강즙을 가지고 작업실로 내려가려던 순간.

“엘릭 오빠.”

어딘가에서 장하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휴게실 입구의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장하양이 보였다.

그녀는 잠시만 와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뭐지?’

혹시 장하양도 타이틀곡에 넣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는 걸까.

엘릭은 방금 가져온 건강즙을 홀짝이면서 의지를 다졌다.

“왜 불러?”

“오빠, 이번 타이틀곡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엘릭은 짧은 고민 후 반사적으로 답했다.

“처음 애들 의견 들으면서 곡을 썼잖아. 그때는 이게 뭐가 될지 감이 안 잡혔거든. 그런데 하다 보니까 점점 뼈대가 잡혀. 장르적으로는 뭄바톤에 가깝거든. 아예 그쪽으로 트는 것도 좋을 거 같고. 거기에 스타디움 하우스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괜찮겠던데. 아, 하양이 너 뭄바톤 알…….”

“마음에 드세요?”

장하양이 엘릭의 장황한 설명을 단칼에 잘랐다.

엘릭은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면서도, 착실히 그녀의 질문에 응해주었다.

“마음에 드냐니?”

“저희 타이틀곡 때 ‘팅글’이랑 ‘아니’랑 경합했던 건 알고 계시죠.”

엘릭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잊고 싶던 일인데, 장하양의 말 때문에 단숨에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수치심과 분노가 적절히 섞여 엘릭의 머리를 휘저었다.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저희의 컨셉은 몽환이랑 청순이라구요. 맞나요?”

그때는 그랬다.

소녀연맹 멤버들의 비주얼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데뷔 때는 꿈과 희망, 청춘을 노래하며, 갈수록 고혹적인 사랑이나 현실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었다.

틴팝(Teen pop) 컨셉으로 미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다 옛날 일이다.

“그때는…… 그랬지.”

이미 소녀연맹의 컨셉은 결정됐다.

저항과 자유, 그리고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사랑.

소녀연맹은 곡과 비주얼, 뮤비로 그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해왔다.

걸크러시.

이 단어 하나로 소녀연맹을 설명 가능하다. 이제 와서 방향을 틀기엔, 소녀연맹은 괜찮은 지지기반을 마련해버렸다.

‘여기서 방향을 틀면 팬덤 이탈이 일어날 수도 있어. 정규 앨범 1집 타이틀은 소녀연맹의 정체성을 완전히 결정해버릴 거야.’

그러니, 팬들의 기대를 배반할 수는 없다.

“그럼 지금 컨셉에도 만족하시나요?”

그 말로 엘릭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뭔가, 장하양의 기색이 이상하다.

“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저요. ‘팅글’ 들었을 때 좋다고 생각했어요.”

“어, 진짜? 정말?! 이야, 역시 알아보는 멤버가 있었구나!”

장하양은 ‘아니’에 투표했었지만, 굳이 말해주지는 않았다.

“이번 정규 앨범은 ‘팅글’이랑 비슷한 컨셉으로 가도 괜찮을 거 같거든요.”

장하양의 칭찬에 희희낙락하고 있던 엘릭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뭐?”

이미 타이틀곡은 리카, 백설하, 조아라가 달라붙어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곡의 느낌은 강렬함을 베이스로 깐다.

지금은 방향타를 돌리래도, 도저히 ‘팅글’과 비슷한 느낌을 낼 수는 없다.

즉, 장하양의 말은.

“타이틀을 노리고 곡을 하나 쓰자는…… 거야……?”

“네.”

엘릭의 목덜미로 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타이틀을 새로 만들어?’

당장 떠올려도 문제점이 상당하다.

일단 리카, 백설하, 조아라의 의지를 꺾어야만 한다. 그리고 함께 곡을 작업해오던 정지음마저도 설득해야 하리라.

무엇보다, 메인 프로듀서 성필을 넘어서야 타이틀곡을 바꿀 수 있다.

첩첩산중이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

엘릭도 소녀연맹에게 시도하고픈 컨셉이 있다.

아직 그녀들은 ‘청춘’이라는 주제를 채택한 적이 없다. 여태껏 무거운 비주얼과 컨셉만 소화했던 그녀들에게는 도전이 될 터였다.

또한 성공적인 변신이 될 게 틀림없다.

엘릭이 보증한다.

일단 하이틴 스타 같이 생기발랄한 패션을 소화한 장하양만 떠올려도, 모든 반대를 밀어버릴 수 있을 법한 힘이 있다.

“……안 돼.”

하지만 엘릭은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하양아, 네 말은 정말 고맙거든. 근데…… 새 타이틀을 만들자는 건 말야. ‘팅글’이랑 비슷한 분위기로 만들자는 건…….”

“다른 멤버들을 실망시키는 거잖아요. 때에 따라선 싸울 수도 있을 거고요.”

“……그, 그렇지?”

설마, 갈등 따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으니까 새로 만들어보자는 건가?

이 얼마나 호전적인 성격인가!

멤버들과 대립한다는 거 자체가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다.

“아니, 그, 그래도 안 돼. 정규 타이틀은 소녀연맹 서사의 완결점이잖아. 이전 앨범이랑도 연결성이 있어야 하고. 또…….”

엘릭은 자신의 욕망과 가로 엔터의 평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변명하고, 설득하고, 아무튼 온갖 말을 장하양에게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왜냐하면.

“더블 타이틀은 어떨까요?”

장하양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전에 나온 모든 주장을 백지화할 만큼 힘이 있었기에.

“……더블, 타이틀?”

“네. 현재 타이틀곡을 지지한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타이틀곡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에요.”

엘릭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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