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188화 (188/760)

188화

“더블 타이틀이면, 굳이 멤버들이랑 대립할 필요도 없잖아요.”

“……하양아. 그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엘릭은 유명 작곡가다.

소녀연맹 정규 앨범의 앨범 프로듀서다.

하지만, 그게 타이틀곡을 두 개 내자고 주장할 수 있을 급이란 뜻은 아니다.

“‘러브’도 좋았어요.”

“……어?”

“오빠가 가로 엔터로 오셨을 때 가져왔던 곡이요.”

엘릭이 백설하와 장하양의 듀엣곡으로 생각하고 만들어왔던 곡이다.

“그것도 저는 마음에 들었어요. 오빠는 좋은 곡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엘릭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렇게나 자신의 곡을 믿어주는 멤버가 있는데, 자꾸만 반대하는 게 옳은 일일까?

가로 엔터의 곡 제작은, 첫째로 멤버들의 의견을 받는 것부터 시작한다.

설령 엘릭 혼자 좋은 곡을 만들었더라도, 멤버들이 지지해주지 않으면 빛을 얻지 못한다.

소녀연맹의 앨범에 들어갈 곡이고, 소녀연맹의 곡이 될 테니까.

‘그럼, 나는 든든한 아군을 얻은 거 아닐까?’

장하양이 이토록 지지해준다면, 엘릭에게도 역전의 발판이 생긴 게 아닐까?

자꾸만 용기가 생긴다.

“오빠는 곡 잘 만들잖아요. ‘팅글’도 결국에는 일본 데뷔 앨범 타이틀로 선정됐어요. ‘아니’랑 ‘롱 포’도 다 누르고요.”

엘릭의 자존심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래, 결국 팅글은 먹혔어! 일본 데뷔 앨범 타이틀이야! 한국에서도 팅글이 타이틀이 됐으면……!’

……지금의 소녀연맹은 없었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래, 적어도 실패는 안 했을 것이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오빠의 곡이면 더블 타이틀로 충분할 거예요.”

“……맞아.”

엘릭은 홀린 듯 답했다.

“나는 할 수 있어.”

리카가 장난스레 놀리는, ‘팅글 써달라고 애걸복걸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뗄 절호의 기회다.

‘팅글’의 복수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네, 응원할게요.”

장하양은 싱긋 웃더니, 자신이 생각하는 곡의 컨셉을 전달해주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엘릭의 심장도 흥분으로 떨려왔다.

“와, 좋다. 나도 너희들이 그런 느낌 소화하는 거 꼭 보고 싶었는데……. 아, 이럴 때가 아냐. 지금 당장 가서 작업해야겠다.”

“잠시만요.”

장하양은 바람처럼 사라지려는 엘릭을 붙잡았다. 그리고 줄곧 쥐고 있던 책을 그에게 내밀었다.

“만화책?”

“레퍼런스로 써주세요.”

책의 두께를 본 엘릭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와는 반대로, 장하양은 화사하게 웃었다.

살인적인 외모다. 정말로 목 아래에 칼을 들이미는 것처럼, 저 미소를 보면 어떤 짓이든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게 틀림없다.

“주제는 꿈과 노력, 희망, 로맨스도 있으면 좋겠어요. 스타일은 맡길게요.”

엘릭은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이런 경우가 있구나.’

작곡가인 친구가 WTP란 보이그룹과 협업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회사로 찾아갔더니, 멤버들과 프로듀서가 레퍼런스라며 영화나 책 등을 내밀었다는 모양이다.

그것을 들었을 땐 뭔 소리냐고 쏘아붙였었는데, 정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 회사는 앨범마다 멤버들 의견을 받아서 곡의 짜임새가 좋았었지.’

앨범도 몇 부작인지 기획해두고 발매하며, 앨범을 이어가면서 세계관과 스토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다음 앨범마다 멤버들의 성장이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전 소녀연맹의 앨범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던 거구나. 애들의 의견을 받아 가면서…….’

정지음이 앨범 수록곡을 만들면서도 과도하게 멤버들의 의견을 신경 썼던 건 당연했다.

‘앨범에 들어가는 멤버들의 생각이야.’

즉, 멤버들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기에 소녀연맹의 앨범일 수 있는 것이다.

엘릭은 정지음이 멤버들의 의견을 받아주는 게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앨범 자체가 소녀연맹의 색을 나타내야 하니 자연스러운 것이다.

“책을 참고용으로 받은 건 처음이네.”

그래도, 이 정도면 2시간 만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엘릭도 새로운 도전에 호승심이 피어났다.

“빨리 읽을게.”

“네. 다 읽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응.”

“다음 권도 있으니까요.”

“……뭐?”

장하양은 다시 미소를 만들었다.

“애장판으로 10권이 넘거든요. 파이팅!”

* * *

“구성이 형.”

정지음의 부름에도 엘릭은 조용히 만화책의 페이지만 넘겼다.

살랑, 살랑, 종이가 부드럽게 넘어가는 기분 좋은 소리가 퍼졌다.

“형.”

“……왜.”

두 번이나 부르고서야 엘릭이 반응했다.

“해 떴어요.”

“뭐?”

엘릭이 깜짝 놀라 시계를 확인했다.

“미친…….”

장하양이 준 ‘유리구두’를 읽다가 날이 샜다.

정지음도 엘릭이 만화책에 빠져 있던 것을 보고 호기심에 읽기 시작해서, 결국은 엘릭과 같은 꼴을 맞이해버렸다.

두 사람 다 만화책을 읽다가 아침을 맞이해버린 것이다.

탁자 위에는 냉장고에서 빼 온 건강즙과 에너지 드링크의 병들이 가득했다.

“저희 아침 회의 어쩌죠?”

“……뭘 어째.”

엘릭은 다시 소파에 드러누워 책장을 넘겼다.

“이것만 읽고 씻어야겠다.”

그 대답에 정지음이 소리죽여 웃었다.

만화책을 읽다가 밤을 새우다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할 법한 일 아닌가.

그리고 그들은 결국 A&R팀 회의까지 씻지도 못했다.

* * *

엘릭이 던진, 정확히는 장하양이 던진 ‘더블 타이틀’이란 의견은 A&R팀에 커다란 파장을 주었다.

지금껏 누구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더블 타이틀로 가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더블 타이틀을 민다는 건 곧 돈을 더 쓰겠다는 거니까. 또, 멤버들의 노력도 2배로 들어가. 하나에만 집중해도 완벽한 무대를 소화하기 힘든데, 두 개는 더 힘들지.’

아이돌이 더블 타이틀을 내걸고 활동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스타일이 다른 두 개의 노래를 내놓아 여러 팬층을 잡기 위해서다.

‘이건 웬만해선 시도하지 않는 방법이야.’

팀 회의를 거치다 보면, 결국에는 가장 좋은 하나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굳이 홍보력을 분할 할 필요는 없다. 하나에만 집중해도 성공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시도한다 해도 굳이 더블 타이틀이란 말을 달지 않는 경우도 많고. 그냥 수록곡을 보여주는 정도지.’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애들 너무 예뻐요! 우리 애들 이런 노래도 불러요! 우리 애들 최고다아아아아!’

라고 기획사가 폭주해버린 경우다.

타이틀곡으로 삼을 만한 곡이 두 개나 튀어나왔고, 반드시 그 두 개를 쓰고 싶을 때 더블 타이틀이란 이름을 내건다.

자금과 홍보력, 멤버들의 집중력마저 찢어지기에 쉬이 시도하게 어려운 게 더블 타이틀이다.

그리고 그런 단점마저 무시하도록 만드는 게 기획사의 욕망과 그룹 멤버의 의지다.

“뭐, 대충 더블 타이틀이란 게 그런 겁니다.”

이재호와 정지음을 위한 설명을 마친 뒤, 성필은 장하양에게서 얻어온 ‘더블 타이틀을 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지음아. 하양이도 지금 진행되는 타이틀곡 들어본 거지?”

편의상 ‘타이틀곡1’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네, 멤버들이 주기적으로 들러서 확인하고 있어요.”

정지음은 다크서클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의 피곤을 호소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고, 성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안쓰럽네…….’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저토록 피곤한 몰골일까. 심지어 정지음의 옆에 있는 엘릭은 정신이 거의 가출한 모습이다.

두 사람의 예술적 열정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틀곡1 관련으로 애들한테 닦달을 많이 당하나 보다.’

오늘 밖에 나가서 홍삼즙이라도 사 와야겠다.

“타이틀곡1을 듣고 하양이가 생각한 건데, ‘아니’보다 더 거친 스타일이 나올 거 같다더라고. 내가 듣기에도 그렇거든.”

정규 앨범 타이틀은 강렬한 EDM을 지향하며 만들어지고 있다.

조아라와 리카의 요구사항을 적절히 섞다 보니 나온 결과였다.

리카는 밴드 사운드를 포기하고 EDM에만 몰입하기로 했고, 아예 그쪽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래서 하양이 생각이, 타이틀곡2는 가벼운 분위기로 가고 싶대.”

타이틀곡1은 강렬한 댄스, 보컬 퍼포먼스를 상정하고 제작되는 중이다.

그러니 타이틀곡2마저 빡빡하게 갈 수는 없다. 장하양도 그것을 고려하고 이런 의견을 냈으리라.

“가벼우면…… 어떤 거요?”

“하양이한테 기본적인 컨셉은 받지 않았어?”

정지음이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열 권에 이르는 만화책이 아파트처럼 쌓여 있었다.

“지음아 왜. 거기에 뭐 있어?”

“저거 말한 거 아니에요?”

“뭐가? 희망, 로맨스, 노력, 이 키워드 말고 다른 것도 있어?”

정지음이 엘릭을 쳐다보았다.

엘릭은 피곤한 얼굴로 테이블 위의 만화책을 집었다.

“아, 박 이사님한테는 이걸 말 안 해줬구나. 뭐냐면요…….”

성필도 익히 아는 ‘유리구두’라는 만화책이다.

옛날에, 장하양이 그 만화의 주인공처럼 되길 원했었다고 들었다.

성필은 그 말을 듣곤 만화책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었다.

‘만화책 속 주인공은 천재니까.’

장하양이 주인공처럼 되길 바란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나는 천재가 아니다’란 뜻이 된다.

안타깝다.

재능 없이 배우를 꿈꿔왔던 장하양은, 만화책 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비교하며 얼마나 절망해왔을까.

“제가 정말 마음에 드는 건 하양이가 말해준 코디인데요.”

엘릭은 노트북을 가져와 모두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하이틴 느낌의 의상 사진이 가득했다.

하이틴이란 성년에 가까운 10대의 나이를 뜻한다. 패션, 음악, 영화, 드라마 등 광범한 곳에서 쓰이는 단어다.

성년과 청소년 사이, 그 미묘한 청춘을 그려내는 게 하이틴의 묘미다.

그리고, 소녀연맹이 한 번도 소화해본 적 없는 비주얼과 컨셉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레트로 디스코 댄스팝 장르가 어떨까 싶어요. 하이틴 영화에 자주 나오는 졸업 파티 느낌이요.”

“오, 졸업 파티.”

하이틴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가,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던 여주인공이 멋들어진 옷과 화장으로 졸업 파티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악녀에게 복수한다. 어떻게 하냐고?

미식축구부 주장 같은 사람이 여주인공에게 대시한다. 왠지 모르지만, 거의 항상 미식축구부 사람이 대시하곤 한다.

그러면 복수가 완료된다.

“그 감성 좋지.”

“그죠?”

성필이 동감해주자 엘릭도 기가 살았다.

물론 성필도 졸업 파티라는 느낌 자체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단지 ‘졸업’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어찌 보면, 소녀연맹의 정규 1집은 신인으로부터의 졸업이란 의미도 있으니까.

게다가, 어제 성필이 따로 장하양에게서 들은 뮤비 컨셉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잠깐만요.”

그때 정지음이 성필과 엘릭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그의 얼굴에서는 위기감이 보였다.

“형, 이거 좋다고 생각하세요?”

“지음이 너는 싫어?”

“정규 앨범은 소녀연맹 서사의 완결점이잖아요. 이전이랑 유기적으로 맞아들어가야 해요. 그런데…….”

레트로 디스코 댄스팝?

하이틴?

졸업 파티?

“수록곡으로는 괜찮아요. 그런데 타이틀이란 이름을 달 정도는 아니잖아요. 소녀연맹 세계관은 어디 갔어요?”

저항과 자유는?

소중한 가치에 대한 사랑은?

그리고, 이번 정규 앨범의 주제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런 건 일본에서 활동할 때만으로도 괜찮잖아요.”

“야.”

엘릭이 허 웃으면서 정지음을 흘겼다.

“막 나온 의견인데 뭔 기를 쓰고 반대해. 그렇게 싫냐?”

“싫은 게 아니라…… 앨범에 연결성이 없어지잖아요.”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당황했다.

당장이라도 정지음과 엘릭이 싸울 분위기로 돌변한 것이다.

방금 회의하러 작업실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둘은 사이좋게 만화책을 읽고 있었는데 말이다.

“언제까지 비슷한 주제로만 갈 건데?”

“그게 소녀연맹의 정체성인데 어떡하라고요. 거기에 더해서 정규 앨범은 그 정체성에 완결을 찍는 거잖아요. 갑자기 하이틴은 뭔…….”

“아니, 허허, 얘 어이없네. 내가 뭐 지금 만드는 타이틀 없애고 새로 내자고 했어? 타이틀 두 개로 두자는 거잖아. 그리고 나만 하자고 해? 하양이가 먼저 부탁했어.”

앨범을 함께 만드는 동료로서 같이 협력해왔던 둘이, 지금은 극명하게 의견이 갈리고 있다.

“야, 구성아 그만해. 지음이 너도 그만하고.”

손혜빈이 제지하자 둘의 사이에서 피어오르던 열기가 조금은 식었다.

성필과 손혜빈은 눈짓으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성필아, 어떡할까. 쉬고 다음에 해? 얘네들 둘이 화난 거 같은데.’

‘아니야, 계속하자.’

아직 성필에게는 할 말이 남았다.

그도 처음 더블 타이틀이란 제안을 받았을 때는 정지음과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제 장하양의 의견을 듣고는 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어제 하양이한테 톡으로 아이디어를 또 받았거든. 뮤비 비주얼이야.”

“너 하양이랑 갠톡도 해?”

“가끔, 업무적으로.”

손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 갸웃하기에, 이상한 말을 하지 못하게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놀이공원’이라고 하더라고. 정규 앨범까지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뮤비에선 멤버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더라. ‘꿈을 위한 노력의 보상’ 같은 느낌.”

“……보상이요?”

바늘로 찔러도 화난 티만 낼 것 같던 정지음이 반응했다.

“응. 너도 ‘유리구두’ 읽어봤지?”

“네, 반 정도는…….”

그새 반이나 읽었다고?

활자를 엄청 빨리 읽는 모양이다.

“거기 주인공이 눈물 나게 노력 많이 하잖아.”

주인공이 굉장히 자주 우는데, 울 만하다.

오직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재능만을 믿고 험난한 업계를 헤쳐 나가니까.

“하양이가 말하길, 주인공이 행복한 순간이 별로 없대.”

이야기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갈등이 필요하고, 주인공은 항상 그 갈등의 희생양이 된다.

“하양이는 주인공이 계속 행복하길 바랐다고 하더라.”

그리고 장하양은 만화책의 주인공을 소녀연맹에 대입했다.

소녀연맹은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휴식기에도 매일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며, 활동 기간에도 쉴 때가 그다지 없었다.

그 노력 덕분에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으나, 기쁨은 고작 며칠에 불과할 뿐. 그녀들은 앨범 활동을 마쳐도 다시 고난의 나날로 향해야 한다.

“소녀연맹의 세계관도 마찬가지야.”

‘소녀연맹’은 자유라는 가치를 위해 저항을 이어나간다.

소녀들은 ‘아니’에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거대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투쟁하고, ‘롱 포’에서처럼 성공에 삼켜져 오만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결국엔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다.

‘롱 포’ 뮤비의 마지막 장면은, 순수했던 자신을 되찾기 위해 새롭게 저항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하양이가 타이틀곡2를 내자고 한 건 의미를 가질 수 있어.”

장하양이 주장했던 ‘놀이공원’이란 키워드.

엘릭이 지나가듯 말했던 ‘졸업 파티’란 키워드.

그것이 소녀연맹의 서사와 합쳐지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열심히 했으니까, 이제는 쉬자.”

정규 1집의 마무리와 함께, 데뷔 때부터 이어져 온 소녀연맹의 서사도 완결에 도달한다.

“하양이 말마따나, ‘꿈을 위한 노력의 보상’이야. 다 같이 놀이공원에서 노는 거지.”

“…….”

정지음은 자기가 놀이공원에라도 온 듯 꿈에 잠긴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소녀연맹과 함께 작업해왔단 나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되짚어보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충실하고, 아름답고, 또 멋진 하루하루였다.

아까까지 반대하기만 했던 타이틀곡2의 컨셉이, 지금은 더없이 훌륭한 것으로 느껴진다.

‘아, 나 왜 이러지.’

정지음은 요즘 따라 자신이 너무 감성적으로 변한 것 같다고 느꼈다.

잠을 안 자서 눈이 건조한 것뿐이었지만.

“……괜찮겠네요, 진짜.”

성필은 눈물을 글썽이는 정지음을 보며, 다시금 장하양이 낸 아이디어가 썩 괜찮다고 느꼈다.

‘그렇지. 우리 애들을 봐온 사람들이면 이 컨셉에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기지.’

성필도 장하양이 ‘놀이공원’이라고 했을 때는 울컥했었다.

아마 그녀에게 가장 행복했던 기억 중 하나가 놀이공원이 아닐까. 그래서 그 행복을 멤버들과, 팬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뮤비 비주얼이 그러면 분위기는 타이틀곡1이랑 확연히 다르겠네요. 몽환적인…….”

엘릭은 핸드폰에 ‘몽환’이라는 단어를 연달아 적었다.

“그러고 보니 엘릭 씨 처음 여기 오셨을 때, 우리 애들 컨셉을 몽환 청순으로 하자고 하셨죠?”

“하하, 네, 그랬죠. 그때 생각나서 슬프기도 하고, 뭔가 짠하네요.”

엘릭도 가로 엔터 홈페이지에 있는 소녀연맹의 타임라인을 정독했었다.

그곳에는 멤버들끼리의 첫 여행이라 할 수 있는 놀이공원 방문 사진도 있었다.

행복하게 웃는 멤버들의 사진을 떠올리면, 장하양의 아이디어가 더욱 짙게 다가온다.

“열심히 했지, 우리 애들. 지금까지 정말 고생 많았어…….”

성필마저도 훈훈함에 잠겼다.

장하양이 냈던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모두가 설득됐다.

“……너희들 뭐 하냐?”

손혜빈은 울먹이는 세 남자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성필과 정지음은 이해라도 되는데, 엘릭은 왜 울먹이는지 모르겠다.

‘벌써 애들한테 정들었나?’

엘릭도 잠을 못 자서 눈이 건조한 것뿐이었다.

피곤해서 눈물이 나오는 정지음과 엘릭을 제외하면, 결국 진짜 눈물을 글썽이는 건 성필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혜빈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다들 감성적이야. 이 회사 특수 효과인가?’

손혜빈은 옆에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는 이재호를 보았다. 그는 손혜빈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재호 씨도 감정 복받치고 그래요?”

이재호는 손혜빈이 어떤 대답을 바랄까 필사적으로 추리했다.

“아니, 요…….”

“역시, A&R팀의 냉철한 분석가 이재호!”

“헤, 헤헤.”

어쨌거나, A&R팀은 묘한 향수 속에서 회의를 끝마쳤다.

정말 마법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으니까.

어느새 정지음과 엘릭도 악수하며 화해하고, 다시금 우정을 회복했다.

“우리, 애들한테 선물을 줘요. 애들 지금까지 고생 많았으니까.”

“그래, 열심히 곡 쓰자.”

“너희들 영화 찍냐? 밤새 저거 만화 보더니 감성도 소녀처럼 변해버렸네…….”

여전히 손혜빈은 이 둥실거리는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 맞다.”

회의가 끝나고 다들 흩어지려고 하자, 엘릭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성필을 붙잡았다.

“혹시 하양이가 타이틀곡2에 가제(假題) 같은 건 안 붙였어요? 곡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나.”

“아…… 그게 어제 톡하면서 하양이가 말하긴 했거든요? 근데 별로라면서 바로 넘겼어요.”

“그래도 말씀해주세요.”

“음.”

가제가 있긴 하다.

엘릭은 기대하며 성필의 말을 기다렸다. 원래 곡이란 제목을 보고 영감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과연 장하양이 생각한 곡명은 무엇일까?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에요.”

“……보라, 뭐, 튤립, 뭐요?”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

“……네?”

그게 제목이야?

‘보라색 튤립이면 그거지?’

‘유리구두’에서 항상 주인공을 응원하며 꽃다발을 보내주는 조력자가 있다.

그 꽃의 색이 보라색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엘릭이 다시 울컥했다.

‘하양이 넌 계획이 다 있구나.’

알겠다.

‘유리구두’를 레퍼런스로 준 이유!

‘이 곡은 소녀연맹을 응원해준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곡이야. 가로 엔터는 당연하고, 가장 신경 쓰는 대상은…….’

팬이다.

즉, 장하양이 바라는 건 팬에게 바치는 세레나데(연인에게 바치는 노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