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00화 (200/760)

200화

포유는 1년 동안 강행군만 이어갔다.

성적이 나오지 않았던 데뷔. 그리고 첫 번째 컴백으로 이어지는 기간엔 다들 의욕이 없었다.

피와 살을 깎아 먹는 100일의 서바이벌 촬영을 마치고, 눈물을 머금으며 데뷔했더니 반겨주는 건 초동판매량 4,000장이란 수치였으니까.

물론 축하받을 일이다.

만약 포유가 평범한 기획사에서 데뷔했다면 모든 직원이 축포를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포유는 텔레비전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데뷔했으니, 4,000장은 축하받을 게 아닌 비난받을 일이었다.

1년 후에 해체해야 한단 것을 고려하면, 이음 엔터의 사람들이 죄다 절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니.”

과거를 곱씹으며, 연습으로 인해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던 우효민에게 그룹의 동생이 다가왔다.

우효민은 멍하니 그쪽을 보았다. 동생이 생수를 주었다.

“물 마시고 해요. 탈수 와.”

“……아.”

우효민은 밝은 미소를 돌려줌으로써 감사를 표했다. 물을 마시자니 다시 정신이 과거로 빨려 들어갔다.

‘힘들었지.’

신아름을 희생양으로 써야만 팀의 결속이 유지될 정도로, 힘겹기만 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포유는 광고를 여러 개 받으며 많은 행사에도 불려 다녔으니, 명백히 인기 그룹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리라.

비록 3개월마다 컴백을 하고, 지금은 단독 콘서트를 준비하느라 십수 개의 안무와 노래를 익히며, 12월 컴백 퍼포먼스까지 완성하느라 녹초가 되어 있어도.

결코 불평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쁘기만 하다.

“언니.”

“응?”

또 들려오는 부름에 우효민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동생은 물을 주고도 떠나가지 않고, 배시시 웃으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티를 냈다.

“이번에 아름이랑 같은 방송 나가잖아요.”

그녀의 말에 연습실의 이목이 쏠렸다.

한동안 신아름은 포유 내에서 금기시되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포유가 일정 궤도에 오르고 여유가 생기며, 신아름에 대한 증오도 옅어져 갔다.

그렇더라도 신아름을 몰아세웠던 리더, 우효민 앞에서 신아름의 이름을 꺼내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이번에, 그거, 으음.”

동생은 말을 꺼내고도 우물쭈물했다.

“같이 촬영 잘하고 와요.”

완곡한 어법이었다.

이제 신아름은 그만 미워하고, 옛날의 추억을 되살리며 친해지라는. 그런 의미였다.

이제 신아름에게 질투를 가진 건 우효민이 유일했고, 다른 멤버들은 그런 우효민을 안타깝게 여겼으니까.

굶주린 때와 포만감을 느낄 때, 이 두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은 놀랍도록 달라진다.

이젠 인기를 얻은 포유의 멤버들도 그러했다.

“……그래, 그럴게.”

우효민의 밝은 대답에 동생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같이 촬영 잘하고 와라, 라고…….’

그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여전히 우효민은 신아름을 질투했다.

신아름을 나쁜 년으로 몰아세워 팀의 결속을 유지하던 우효민은,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신아름을 미워하게 돼버렸다.

만들어낸 증오에 자신이 삼켜진 것이다.

‘바꿀 수 있을까?’

이번 기회로, 화해할 수 있을까.

‘아름이가 받아줄까…….’

만날 때마다 기분 나쁘게 대했는데, 과연 신아름이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까.

그리고.

자신이 신아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름아.’

‘우리좌’라고 불리며, 힘들 때마다 우효민을 일으켜주었던 신아름. 그녀는 지금 우효민이 볼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홀로 떠 있다.

아이돌을 목표로 했던 우효민은 신아름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판매량 따위가 아닌 아이돌로서의 기량.

그곳에서, 우효민은 영원히 신아름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놔두고 나가서…… 소녀연맹으로…… 그렇게 즐겁단 듯이…….’

신아름은 빛나고 있다.

그래서 밉다.

* * *

오늘은 ‘너희 친구니’의 촬영일이다.

하필 휴일에 잡힌 스케줄이라 신아름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실은 데면데면했던 우효민을 만나러 간다는 게 불안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신아름의 마음은 그리 생각하길 거부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가 불안해?’

불안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불안해선 안 된다.

신아름은 샤워를 마친 후 거칠게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옷장을 뒤지던 신아름이 책상에 앉아 있는 리카에게 무심한 투로 물었다.

“리카. 조아라가 또 내 옷 입고 나갔어?”

“이에(아니)…… 푸흡.”

맥락도 없이 리카가 웃자, 신아름이 인상을 쓰며 그쪽을 보았다.

그 순간 신아름이 재빨리 침대로 손을 뻗어 이불을 집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라이브 중이면 말하라고 했잖아!”

리카가 시도 때도 없이 라이브 방송을 켜던 터라, 짜증이 나서 한마디 했던 게 겨우 한 달 전이다.

그런데 또 리카가 분별없이 방 안에서 방송을 켜고 있는 것이다.

“아타시(나) 휴일 아침마다 방송한다구 했잖아. 아름이가 멋대로 들어와 놓고 히도이(너무해).”

“으……!”

방송이 켜져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 쏘아붙였을 것이다.

신아름은 쌩얼을 이불로 가린 채 슬금슬금 카메라의 각도에서 벗어나려 했다.

“아름이는 오늘 스케줄이 있어요! 그래서 나갈 준비하는 거예요! 아름아, 인민이들이 얼굴 보여달래!”

“쌩얼이에요.”

“아름인 쌩얼도 예쁘잖아!”

예쁘지.

그런데 화장한 리카의 옆에서 비교되는 건 죽어도 피하고 싶다.

신아름은 카메라 각도에서 벗어나 짜증을 잔뜩 품은 채 입고 나갈 옷을 뒤졌다.

리카도 신아름이 반응하지 않자 팬들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에? 제 뒤에 뭐가 있어요? 앗, 안 걸려요! 뒤에 귀신 같은 거 없단 말이에요! 으음…… 점심은 그냥 밖에 나가서 햄버거 사드세요! 에, 이름 불러달란 건……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어요! 스페인어인가요? 아, 생일? 생일 축하드려요! 에, 입대? 무사히 다녀오세요! 엣, 결혼식? 결혼식에 왜 제 라이브를 보고 있나요?! 빨리 신부님한테 달려가세요!”

라이브에 열심인 리카를 뒤로하고, 신아름은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진이 다 빠져선 벽에 등을 기댔다.

‘미치겠네. 숙소에서도 내 맘대로 못 하고…….’

휴일 아침마다 리카가 라이브 방송을 켠단 건 알았지만, 스케줄 때문에 머리가 꽉 차 있어서 잊고 있었다.

자신의 쌩얼을 팬들이 다 봤겠지. 캡처해서 어딘가에 박제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하필 리카가 방송을 하고 있냐아…….’

조아라였으면 당당하게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텐데.

신아름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우뚝 멈췄다.

‘얼마 전에 하양 언니한테 흰 티랑 청바지만 입는다고 뭐라고 했는데. 나도 똑같이 입네.’

어차피 샵에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을 받고, 스타일리스트로부터 옷도 받겠지만.

“…….”

신아름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얇은 가디건을 하나 걸치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며 떠올리니, 예전에 장하양에게 빌려주었던 것이랑 똑같은 옷이었다.

신아름은 계단을 내려와 1층 국밥집의 뒷문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유리문에는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하양과 겹쳐 보여서 그런 걸까.

‘뭐래. 내가 뭐가 부족해서.’

신아름은 건물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성필에게 인사했다.

“팀장님 하이.”

“어. 잘 잤어?”

성필을 보고 밝게 인사하던 신아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 때문이었다. 옷 안쪽에 숨겨두고 있지만, 신아름에게는 보였다.

그의 성격상 절대 하고 다니지 않을 법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그가 장하양에게 선물로 받은 것일 터다.

신아름이 선물로 주었던 수첩보다 훨씬 몸에 가까이 붙어 있고, 훨씬 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인다.

“아름아 왜 그래?”

성필이 그녀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겨 묻자.

“아니에요. 잘 차려입으셨네요.”

신아름은 은근한 말투로 성필의 스타일을 칭찬했다.

실제로 성필은 목걸이와 매치하기 위해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패션을 소화하고 있었다.

성필에게 이런 생각을 갖는 건 실례인 듯했지만, 신아름에겐 ‘젊은 사람이 입을 법한’ 옷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 팀장님은 동안이니까.’

한 달 전에 성필의 군대 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얼굴은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때 성필을 보고 키아누 리브스 같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신아름은 ‘안 늙는다’란 뜻으로 한 말이지만, 성필은 ‘키아누 리브스 닮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한동안 그의 어깨가 으쓱거렸었다.

신아름은 그 오해를 풀지 않았다. 성필이 회사 사람을 붙잡고 ‘저 살짝 키아누 리브스 닮지 않았어요?’라고 물으며 다니는 게 재밌었기 때문이다.

“휴일인데 어디 가세요? 잘 입은 거 보니까 데이트라도 가시나.”

“아름이 네 첫 방송 촬영이잖아.”

“네, 정답은 저와의 데이트였습니다!”

신아름은 헤헤 웃으면서 조수석에 탑승했다.

뒷좌석에는 스타일리스트에게서 받은 옷이 옷걸이에 걸려 잘 보관되어 있었다.

“오늘 옷 좀 괜찮네요.”

“네 첫 미디어 출연이잖아. 내가 김 실장님한테 잘 좀 부탁드린다고 했지.”

“이거 제가 가지면 안 돼요?”

“안 돼.”

“칫.”

“사줄까?”

“어, 그럼 나중에 같이 쇼핑 가요.”

“그러자.”

샵에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을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으니, 신아름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물론 신아름의 감상만 그러했지, 성필에게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팀장님, 저 어때요.”

“아까랑 똑같은데?”

“메이크업 받았는데 어떻게 똑같아요.”

“넌 화장 안 해도 예뻐.”

성필은 신아름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다.

자존감을 충전한 뒤, 신아름은 기세가 등등해져선 방송국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스튜디오에 가까워질수록 신아름도 점점 힘이 빠지는 듯했다. 기어코 문 앞에 서자, 신아름은 아예 멈춰버렸다.

‘이 안에 효민이가 있겠지.’

그리고 우효민과 몇 시간 동안 하하호호 웃으면서 촬영할 것이다.

“아름아 어디 아파?”

“아니요.”

신아름은 금세 밝은 웃음을 만들어냈다.

불안한 신아름과, 일하는 신아름은 다르다. 힘들더라도 힘들지 않은 척을 해야만 한다.

그게 프로고, 아이돌이니까.

신아름이 문을 열려던 때.

“신아름.”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실은 작가 미팅 전에 한 번 만나서, 친구로 위장하기 위해 말을 맞추긴 했었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다.

듣기만 해도 승부욕이 솟아오르는 목소리…….

“김민주.”

김민주가 신아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과장이 아닌, 문자 그래도 코앞까지 왔다. 마치 신아름을 향해 ‘네가 물러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신아름은 물러나지 않았다.

둘의 코끝이 맞닿을 거리였다. 자칫하면 입술도 닿을 듯했다.

“너 나 좋아하냐? 붙고 싶어? 아님 너무 반가워서 그래? 며칠 만에 집에 찾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

김민주는 한 걸음 물러났다.

“오랜만이네.”

“어.”

전혀 반가운 티가 없는 답에, 김민주는 신아름의 신경을 긁는 대신 성필에게 인사하길 택했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입니다! 저희 막내 챙겨주셔서 너어무 감사해요! 미국에서 도움 많이 받았다고 들었어요!”

“아, 아녜요. 그냥 진저 씨가…….”

“팀장님 지금 말 더듬은 거예요? 목소리 떨고?”

그래, 떨었다. 좀 떨 수도 있지 왜 그러는가.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조절도 못 하는데…….

“안 떨었어.”

신아름의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자, 김민주는 좋은 건수를 잡았단 표정으로 성필의 곁에 붙었다.

“팀장님 저희 팬이라고 하셨죠? 진저가 최애고, 차애는 정하셨어요?”

“그게…….”

“사진 찍어요.”

김민주가 손을 내밀자, 옆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던 매니저가 핸드폰을 주었다.

얼떨결에 성필은 김민주와 사진을 찍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신아름이 헛웃음을 뱉었다.

“민주, 민주, 우리 민주야. 너 평소랑 완전 다르네?”

신아름은 ‘평소’라고 할 만큼 김민주를 오래 보지 않았다.

“내가 뭘? 똑같은데?”

김민주는 ‘똑같다’고 할 만큼 신아름을 오래 보지 않았다.

“이사님 연락처 알려주시면 제가 따로 사진 보내드릴…….”

“나한테 보내.”

신아름이 성필의 앞을 막아섰는데, 그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내고 있던 도중이었다.

김민주는 픽 웃은 뒤, 신아름을 제치고 스튜디오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사님, 오늘부터 차애는 저예요. 아시겠죠?”

“네.”

“‘네’라고요?!”

김민주는 성필을 쪼는 신아름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여유롭게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텔레비전에서 보던 ‘너희 친구니’의 세트장이 보인다.

모던한 느낌의 카페와 같은 인테리어에, 카메라를 바라보는 8개의 원목 책상. 그 밖으로는 어두운 배경과 수십 개의 촬영 장비, 그리고 수십 명의 스태프가 보였다.

김민주가 힘차게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케이어스 김민주입니다!”

그녀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직접 앞으로 가서 인사했다.

스태프들도 그녀의 입지에 걸맞지 않은 공손한 태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걸었다.

PD마저도 상대적으로 불손한 출연자가 나왔을 때보다 더욱 들뜬 모습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김민주는 출연자가 앉을 자리로 향했다.

아직 고정 패널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촬영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벌써 한 자리는 채워져 있었다.

포유의 우효민이었다. 그녀는 김민주를 보자 진소유가 생각나 흠칫 몸을 떨었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김민주의 사근사근한 말투와 미소를 보곤 바로 무장해제당했다.

진소유란 희대의 쌍년(우효민의 생각)을 본 뒤,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치가 너무도 낮아진 까닭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포유 우효민입니다.”

“노래 자주 듣고 있어요. 와, 실물로 보니까 더 예쁘시다.”

우효민은 쏟아지는 김민주의 칭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들어온 신아름이 김민주를 쳐다보며 혀를 내두를 정도의 친화력이었다.

“오늘 계속 같이 있을 텐데, 좋은 장면 뽑아봐요. 저는 아름이 친구로 나온 거긴 한데, 촬영 끝나고 저희도 친구 되면…… 헤헤. 너무 나갔나?”

“아, 아뇨. 친구해요.”

“그럼 연락처 교환할까요?”

김민주는 그녀의 번호를 받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사람은 숫자로 봐야 제대로 보인다.

옛날에 멀리뛰기를 했던 시절, 사람을 ‘몇 미터짜리’로 봤을 때처럼.

김민주는 우효민의 핸드폰 번호를 보자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나며, 동시에 투지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초동판매량 10만 아래 짜리.’

그 이름은 우효민.

그녀가 오늘의…….

‘쓰러뜨려야 할 상대다.’

김민주는 스포트라이트를 쟁취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 * *

성필은 스태프들에게 신아름을 잘 봐달라고 인사를 다닌 뒤, 김민주의 매니저와 담소를 나누며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아름이의 첫 예능 데뷔야.’

웬만하면 소녀연맹 전체가 같은 예능에서 데뷔하길 바랐다.

하지만 백설하의 ‘음악을 위한 동행’ 때 그 바람이 깨졌으니, 차라리 따로따로 예능에 나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고정 패널들은 예능계 짬밥이 높아. 아이돌 선배님도 있고.’

신아름이 편히 촬영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패널들이 뿜어내는 선배로서의 기세와 여러 대의 카메라, 또 수십 명의 스태프가 사방을 채우고 있다.

세트장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출연자는 거대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말이 꼬이고 열이 오르며 행동조차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총체적 난국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아름이는 잘하겠지.’

전생에서도, 신아름은 예능에선 항상 불패신화를 보여주었으니까.

신아름은 웬만해서는 주눅 들지 않는다. 설령 아이돌 선배나 예능계 대부들 앞에서도 말이다.

‘의외로 효민이랑 트러블도 없고.’

신아름은 자리에 앉고 나서 우효민과 짧게 대화를 나눈 후, 곧바로 프로젝트 포유 때처럼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게 촬영까지 이어지면 좋을 텐데…….

“시작합니다.”

PD가 큐사인을 주었다.

메인 MC가 ‘너희 친구니’의 오프닝 멘트를 날렸다. 지금부터, 몇 시간에 걸친 악명 높은 예능 러닝 타임이 시작된다.

성필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신아름이 잘하길 기도했다.

“효민 씨와 아름 씨의 우정은 유명하죠. 프로젝트 포유 때부터 같이 다니는 장면이 많이 찍혔었잖아요.”

“네, 아름이가 많이 도와준 덕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죠.”

우효민의 예능 스타일은 정공법이었다.

아이돌의 정공법. 착한 모습, 예쁜 모습, 그리고 조금 눈치가 없다.

사실 정공법이라기보다는, 예능이 익숙지 않은 아이돌들 모두가 인형처럼 굳게 되어 자연스레 나오는 태도였다.

지금 우효민이 보여주는 모습처럼 말이다.

“어우, 그래? 그럼 아름이가 나갔을 때 많이 섭섭했겠다 야.”

짓궂은 패널 역할인 예능인 권기철이 민감한 주제를 건드렸다.

그것을 들은 우효민의 표정도 자연스러운 웃음에서 어색한 웃음으로 변해갔다.

‘원래 예능이란 게 이런 거지.’

아무 말 백 마디를 던져서 한 마디 겨우 건지는 것이다. 그게 민감하고 논란이 될 발언이라도 말이다.

애초에 PD가 선편집 때 그런 장면을 모두 덜어내기에, 방송에선 정제된 토크만이 나가게 된다.

“섭섭했죠…….”

우효민이 권기철의 말을 받기로 결정했다.

모두 긴장한 기색이 느껴진다.

다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게스트들의 신상은 알아봤을 터다. 방금의 질문이 얼마나 민감한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도 그땐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였어요.”

“‘우리좌’라고 불렸었잖아요, 아름이가. 나간 건 의외지 않나.”

“왜냐면 저희 대표님이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도 된다고 했거든요.”

권기철도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지금부터 우효민이 하는 말은 감동적인 장면으로 편집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특유의 막말을 삼가고, 조금 더 사려 깊은 패널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다.

우효민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 포유에 있는 멤버들은요, 원래 있던 기획사로 돌아가도 데뷔가 불투명했었어요.”

우효민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린다.

아마 방송으로 나갈 때는 슬픈 BGM과 함께, 포유가 겪었던 홍역이 짤막하게 나올 것이다.

PD가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았어’라고 작게 말했다. 권기철이 좋은 토크를 뽑아준 데에 대한 칭찬이었다.

“다들 불안했죠. 그런데 돌아가도 막막하니까, 다 함께 버티기로 한 거예요. 방송에서처럼, 서로 의지하고, 믿어주고…….”

우효민은 말꼬리를 흐리며 슬픈 기운을 자아냈다. 패널들도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답하기 힘든 질문이라 우효민이 어영부영 넘길 줄 알았으나, 그녀는 진심을 다한 답으로 분량을 끌어냈다.

성필은 그녀의 대처에 감탄했다.

“그럼 아름 씨는요?”

“아름이는 돌아가도 데뷔가 확정되어 있었어요. 저희 모두 축하해줬죠.”

눈도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태연히 한다.

실은 신아름이 나간 이후, 그녀를 제물로 바쳐 팀의 결속을 유지했으면서 말이다.

성필은 우효민이 순진하다는 평가를 바꾸었다.

‘하긴, 포유로 예능만 몇 군데를 다녔는데. 이 정도 질문이야 몇 번이고 준비해뒀겠지.’

우효민은 영리하다. 그녀는 거짓말로 예능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안다.

예능에 참여하는 아이돌로서는 상당한 경지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예능 세트장에 들어서면 거짓말을 준비하고 와도 하기 어려운 법인데 말이다.

“아아, 아름 씨는 데뷔가 확정. 소녀연맹이죠?”

왠지 모르게 패널들 사이에선 배신자 포지션이 된 신아름은 하하 웃었다.

“근데 저 그때 기획사 나왔어요. 네, 데뷔가 확정돼 있다던 그 기획사요.”

“네?”

“나와서 데뷔한 곳이 소녀연맹이에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신아름은 웃으면서 슬픈 이야기를 시작했다.

“데뷔조로 확정이 된 줄 알았는데, 막상 포유에서 나오니까 아닌 거예요.”

“왜요?”

“회사 내부에 여러 사정이 있었겠죠. 저는 모르는 어떤 거요.”

방금 말은 방송에 나가진 못할 것이다.

신아름이 이전에 있던 기획사인 석세스 엔터를 대놓고 물 먹이려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나가래서 나가고 다시 돌아왔더니 데뷔를 못 하게 됐어요. 와아, 진짜 그때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서…….”

“벌 받은 거 아냐?”

권기철이 한 번 터뜨렸다.

게스트와 패널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지나치게 신아름을 먹이는 발언이라, 방송에 나갈 수는 없을 듯했다.

그 발언이 방송을 타는 순간 소녀연맹 팬덤이 방송 게시판을 테러할 테니까…….

“아니, 형, 벌이라뇨! 아름 씨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벌이예요!”

“효민이 놔두고 갔잖아.”

“하하, 아니에요, 아름이가 놔두고 간 게 아니죠. 그때는 정말로 어땠냐면…….”

우효민은 자연스럽게 김명운과 이음 엔터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절망적인 ‘나갈 사람은 나가도 된다’ 선언부터, 포유가 풍전등화에 처했던 상황까지.

‘효민이는 분량 제대로 뽑았네.’

다음 컴백 때 포유를 홍보하겠단 의도를 완벽히 실행했다.

포유의 절망적인 과거사와 합쳐져, 이번 포유의 컴백은 더 탄력을 받을 테니까.

‘명운이 형이 시킨 걸까.’

아니면 우효민의 전략인 것일까.

어느 쪽이든 영리하다.

촬영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쉬는 시간도 몇 번 가지고 나서, 드디어 대화의 중심이 우효민을 벗어나 신아름에게로 이동했다.

정확하게는, 신아름과 김민주로.

“둘이 어떻게 친구가 됐어요?”

“그건…….”

“그건요.”

김민주가 신아름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신아름이 쳐다보아도, 김민주는 그녀가 없단 듯 능숙하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소녀연맹 리카가 원래 KS 엔터 출신이었거든요.”

“오오, 정말요? 같이 한솥밥 먹던 사이였네.”

“그죠. 그래서 제가 리카랑도 친했거든요?”

신아름은 ‘거짓말하네’라고 생각했다.

리카가 김민주에 대해 말했던 적이 있다.

그때 마음씨가 넓고 착하며 예쁜 리카는 겨우겨우 ‘미, 민주, 착, 착해’라며 고장 난 로봇처럼 말했었다.

사실상 리카 공인 ‘성질 더러운 년’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아름이랑도 만나게 되고, 서로 연습생 신분이라 의지도 많이 했어요.”

“그럼 처음 만난 건 리카 씨 덕분이다?”

“그렇…….”

“그건 아니에요.”

이번엔 신아름이 김민주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김민주가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신아름은 책상 아래로 김민주의 허벅지를 꽉 쥐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끅……!”

“지난겨울에 저랑 저희 회사 박성필 이사님이랑 서점에 갔거든요.”

“아아, 박성필 이사님.”

패널들이 큐카드를 살폈다. 그곳에는 성필에 관한 정보도 일부 적혀 있었다.

신아름이 작가 미팅 때 성필에 대한 이야기를 꽤 많이 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쿠시 챌린지’에서 KS 엔터의 정호환이 성필을 언급하기도 했어서, 그에 관한 대화로 분량을 뽑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때 민주랑 처음 만났어요. 그땐 그렇게 친해질 줄 몰랐지만요.”

“서점에서? 씁.”

“형 또 왜 그러세요.”

“아름이 책 많이 안 읽게 생겼는데…….”

패널들은 웃었다.

특히 김민주는 폐 속에 있는 공기를 전부 뽑으려는 듯 세트장이 떠나가라 웃었다.

확실히 신아름은 책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상이긴 했다.

모두의 반응이 이해가 가긴 했지만, 신아름의 이마에는 분노로 인한 혈관이 돋았다.

‘아름이가 진짜 싫어하는 말인데!’

성필은 초조하게 신아름의 기색을 살폈다.

신아름은 누군가 자신의 지식을 조금이라도 얕보는 발언을 하면, ‘나 한 이사님 수업도 제일 열심히 들어요! 책도 다 읽어요!’라며 열을 올린다.

그 성격이 방송에서도 이어지면……!

“아하하핰!”

신아름은 폭소했다.

딱 3초.

PD가 패널의 발언에 대해 리액션으로 쓸 정도의 장면만 연출한 뒤.

“예.”

신아름은 표정을 싹 굳히고 한 옥타브는 내려간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 없이 자신이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역시나…….’

그녀의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책 안 읽게 생겼다’고 한 권기철도, 신아름의 싸늘한 태도에는 드물게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민주랑 KS 엔터에 정호환 이사님을 같이 만났어요. 그게 첫 만남이었죠.”

신아름은 기세를 이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김민주는 호시탐탐 그녀에게서 멘트를 뺏어올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민주 얘 처음 봤을 때 지인짜 맘에 안 들었어요. 이런 애가? 케이어스? 그 유명한?”

“왜요?”

“아니이, 들어보세요. 얘가 시상식에서 소녀연맹이 상…….”

“야야야! 내가 뭐! 내가 언제! 내가 뭘 했는데! 뭐라고 말했는데!”

김민주가 촬영이란 것도 잊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아름의 입을 막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신아름의 뒤로 가서 그녀의 몸을 팔로 조였다.

말을 못 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얘가 뭐라고 했냐면…….”

“안 그랬어요! 얘 말 듣지 마세요!”

“너도 네가 싸가지, 아니 안 좋은 말 했던 건 아는구나?”

“아, 아니라고!”

김민주가 필사적으로 입을 막으면, 신아름은 그것을 벗어나 말을 계속하려고 했다.

한동안 두 사람의 장난스런, 그러나 본인들은 진지한 멘트 쟁탈전이 이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패널들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얘네들 진짜 친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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