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어렴풋이 옛날이 떠오른다.
지금과 비슷한 날씨의 추운 겨울이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김민주는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보다 못한 게 당연하단 투로 이야기했었다.
케이어스의 데뷔 무대를 보고 울었던 성필의 모습이 겹쳐졌었다.
‘안 져.’
케이어스에게 뒤처지지 않겠다고, 소녀연맹 멤버들과 함께 맹세했다.
물론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목표인지는 안다.
중소나 중견 기획사의 걸그룹이 메이저 기획사의 그룹을 따라잡은 예는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최소한 개인적으로라도 지고 싶지 않았다.
‘정해진 춤을 춰선 지기만 할 거야.’
수십 일 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김민주의 앞에서, 고작 하루도 연습하지 못한 춤을 춰봤자 비교만 될 뿐이다.
1절이 지나고 2절에 들어서면서까지, 신아름은 불안에 떨었다.
‘이걸 보면 팀장님이 실망하실 거야.’
‘케이어스에게 이기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혹시 성필도 그리 생각하게 되진 않을까 두려웠다.
듀오 댄스는 합을 맞춘다곤 하여도 기본적으로 둘의 움직임이 다르다. 각자의 개성을 보여줘야 하는데, 아직 신아름은 제련이 덜 끝난 검과 같았다.
두 칼이 부딪치면 깨지는 건 신아름이다.
그러니까.
‘아예 완전히 베끼자.’
99.9%로 김민주에게 패배한다면 0.1%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
아니다. 정답은 패배가 정해진 틀을 깨고 나가는 것이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무의식 속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당연히 몸도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내 모든 힘을 짜내서.’
정신병에 동반한 재능이라고 생각했기에, 신아름은 자신의 능력에 감사한 적은 없었다.
차라리 능력이 없어지고 병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빌어왔다.
평범해져서, 더는 성필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그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보살핌받는 자와 보살피는 자, 그런 구도를 깨고 싶었다. 병만 없다면, 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늘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이런 능력을 내려준 신에게, 신아름은 고맙고 또 고마웠다.
‘최소한 김민주보다 떨어지지는 않게.’
그녀의 움직임을 거울처럼 복사해낼 것이다…… 분명 그런 마음가짐이었던 거 같은데.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정신이 멍하다. 몸도 어딘지 나른하다.
그럼에도 귓가로는 날카로운 고함이 뚫고 들어왔다.
무슨 일일까.
‘나는 춤추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긴 어디지?’
정신이 퍼뜩 든 순간.
“하꼬 그룹 잘 봐줘서 넣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어! 왜 벙어리처럼 입만 다물고 있어? 대답을 해보라니까!”
박재환 PD의 고함이 귓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 * *
생방송이 끝났다.
박재환은 평소였다면 출연자 대기실 복도로 가서 왕처럼 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PD님 고생 많…….”
인사하기 위해 일렬로 서 있던 아이돌과 매니저들을 제치고, 박재환은 신아름과 김민주의 대기실로 찾아갔다.
그는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와서 외쳤다.
“미쳤어 너?!”
박재환의 타깃은 신아름이었다. KS 엔터에 소속된 김민주에게는 무어라 하지 않았다.
어느새 대기실 밖으로는 방송 스탭과 출연진, 그리고 그 매니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춤을 일부도 아니고 브릿지부터 다 다르게 춰?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다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라우더’의 2/3 시점부터 시청자들은 김민주와 신아름의 옆모습만을 보았을 것이다.
사고도 이런 사고가 없다.
방송을 보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심지어 시청률이 높은 연말 특별 무대인데.
“너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박재환을 급히 따라온 방송 스태프들은 두려움에 차서 대기실의 상황을 관망했다.
애초에 특별 무대 자체가 말도 안 됐다.
오랫동안 같이 연습했던 김민주의 파트너가 못 나오게 됐다면, 차라리 무대를 없앴어야 한다.
‘윗선에서 뭐라고 할까 봐 억지로 대타 구해서 넣은 거면서.’
게다가 대타치고도 신아름은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지켜보는 스태프들 모두 놀랐었다.
두 사람은 정말 거울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똑같은 안무를 선보였었으니까.
안무를 제대로 하지 않은 신아름을 혼내기보다, 그녀가 에드리브로나마 무대를 잘 이끌어준 것을 칭찬해야 마땅했다.
“안무를 못 외웠으면 정면이라도 보고 추던가! 대체 뭐 하자는 짓거리냐? 내 방송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어?!”
그 후로 박재환의 입에서 나온 것들은 비판이 아니라 인신 모독에 가까웠다.
지켜보던 스태프와 대기실 밖에 모여든 사람들조차도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허나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재환을 두려워해서였다.
“하꼬 그룹 잘 봐줘서 넣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어! 왜 벙어리처럼 입만 다물고 있어? 대답을 해보라니까!”
신아름은 땅만 바라보던 고개를 천천히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나타난 감정은 슬픔이나 죄송스러움이 아니었다.
“허?”
분노.
신아름의 표정을 뒤덮은 분노를 본 박재환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
신아름이 멍한 정신에서 되돌아와 처음 들은 이야기는 가로 엔터에 대한 욕이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화가 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신아름은 욕을 들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찾으려 노력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상대를 공격하는 인간이다.
“당신……!”
그때, 민경섭이 신아름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거의 90도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PD님.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멀어서 불가능할 걸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많았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신아름은 민경섭이 비굴하게 사과하는 것을 보자 뇌가 헤집어지는 듯했다.
이딴 모습 보고 싶지 않다.
당장이라도 민경섭을 일으켜 세운 뒤, 박재환이라는 인간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이고 싶다.
하지만, 자신의 손목을 잡은 민경섭의 간절함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참아.’
그리 말하는 듯했다.
손목을 타고 민경섭의 감정이 전해졌다. 그는 땅에 박을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굴욕도 느끼고 있지 않다.
회사와 소녀연맹을 위해서라면 자존감 따위 개의 먹이로라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결국, 신아름은 입술을 씹으면서 기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사과를 입에 담았다.
“죄송합니다…….”
“죄송? 용서? 무대를 망쳐놓고 용서를 빌어? 내 말은, 어떻게 책임을 질 거냔 거야. 말을 좀 해보라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다그침이었다.
이미 생방송이 나갔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저 허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입에 꿀을 처발랐……!”
“PD님.”
그때, FD가 입구 가득 몰린 인파를 헤치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FD는 창백한 안색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온전히 그의 탓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가 가로 엔터로 잘못된 파일을 전송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야, 낄 데 안 낄 데 보고 들어와. 내가 하는 거 안 보이냐?”
박재환의 싸늘한 말투에 FD는 절로 어깨가 떨려왔다.
생방송 전, 그는 성필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신의 잘못으로 무대를 망치게 될지도 모른단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생방송 무대를 보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름 씨는 무대를 잘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격을 높여놨어.’
FD는 박재환의 폭언에 불합리함을 느꼈다.
연습 시간을 고작 사흘 받고 이 정도 무대를 보여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인격모독이라니. 게다가 곡과 안무도 아예 잘못 주지 않았던가.
이 오해를 풀어야만 한다.
하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실수를 이곳에 모인 수십 명 앞에서 털어놓아야 하니까 말이다.
두렵다. 그래도 지금 이곳에서 말해야만 한다.
“제, 제가 안무랑 곡을 잘못 전달했습니다. 최종본이 아니라 이전 수정본을 드렸습니다.”
“뭐?”
“아름 씨가 최종본 안무를 알게 된 건 어제입니다.”
박재환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방금 FD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도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려면 상식을 바꿔야만 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럼 무대에서 췄던 건 뭔데.”
“하루 만에…… 바꾼 겁니다. 안무를…….”
스태프들이 깜짝 놀랐다.
그 무대가 고작 하루의 연습으로 나온 거라고?
다들 놀랐으나,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사태를 관망하던 아이돌들은 특히 더 놀랐다.
그들은 신아름과 김민주의 스테이지를 보곤 매번 감탄만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겨우 하루의 결과물이라니…….
“그러니까, 저기, 그, 무대가 계획대로 연출되지 못한 탓은 제게 있습니다.”
FD가 허리를 팍 숙였다.
“죄송합니다, PD님!”
“…….”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만약 FD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아름의 죄는 옅어지게 된다.
방송국으로부터 올바른 안무를 받은 지 고작 하루 만에 무대를 찬란히 빛낸 것이니까.
“야.”
하지만 박재환은 화를 냈다.
내야만 한다.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하, 씨, 이 도움 안 되는 새끼가…….’
FD의 말대로라면 박재환은 무엇이 되는가?
칭찬받아야 마땅한 애를 붙잡고 쌍욕을 입에 올렸던 개새끼가 되지 않겠는가.
말하려면 둘이 있을 때 할 것이지.
“내가 지금 그딴 걸 말하고 있어? 이럴 거면 큐시트는 왜 있는데? 무대 준비는 왜 해? 왜 미리 기획하고 점검하고 그러는데? 바꿀 거였으면 미리 말을 해야지! 난 지금 그걸 짚고 있는 거야 멍청한 놈아!”
화살이 다시 신아름에게로 날아가려 한다.
FD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감행했다.
PD의 말에 반박할 것이다. 그가 물고 늘어지지 못할 만한 사람을 입에 올림으로써 말이다.
“그, 그리고, 잘못은 아름 씨한테만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뭐? 그럼 누가……!”
“안무를 바꾼 건 민주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태프와 박재환 등, 무대를 보았던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신아름의 춤과 보컬은 즉흥으로 한 것이라기엔 완성도가 너무나 높았다. 김민주가 신아름에게 맞춰준 퍼포먼스도 그러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짜고 퍼포먼스를 바꾸었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다.
연습 시간이 짧은 신아름을 위해 김민주가 안무를 바꿔줬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신아름의 연습량을 배려했다기엔 안무가 너무도 화려하고 어렵긴 했으나……. 신아름의 능력을 모르는 이들로서는 그게 최선의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일차적이며 전적인 책임은 저에게 있고. 굳이 무대의 책임을 돌리시겠다면 아름 씨만이 아니라…….”
FD의 목적은 박재환의 입을 닫게 하는 것이다.
박재환은 KS 엔터와 관련된 인물에게는 쉽게 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박재환은 그 수법에 걸려들진 않았다.
“뭔 민주를 걸고넘어져! 이거 다 아름이 쟤가 안무 못 외워서 생긴 일인데!”
불합리도 이런 불합리가 없다. 박재환도 말하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어제 제대로 된 안무를 받은 애에게 ‘안무를 못 외워서 생긴 일’이라고 하다니.
본인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FD의 말마따나 이는 온전히 그의 실수였으니 말이다.
“너 뭐 소녀연맹한테 돈이라도 받았냐? 말을 해도 되는 소리를 처해야지!”
하지만 모든 책임은 신아름에게로 향한다. 힘이 약한 기획사의 소속이니까.
음방 PD를 신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약소 기획사가 갑질에 뭐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으로써 순간의 면피가 가능하다. 자신이 신아름과 민경섭, 가로 엔터를 향해 막말을 쏟았단 사실로 인한 창피함을 가릴 수 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지랄하지 말고 옆으로 빠져 있어!”
박재환이 FD를 옆으로 밀었다.
“야.”
박재환은 여전히 허리를 숙인 민경섭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밀쳤다.
“네 잘못이야? 네 아이돌, 네 회사 잘못? 그럼 어쩔 건데.”
“죄송합니다.”
“그만해요.”
김민주의 단호한 선언에 대기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방금까지 인격모독을 당하던 민경섭마저도 놀라서 고개를 들었을 정도였다.
“잘못한 걸로 치면 저도 잘못했어요. 안무 틀린 걸 알고도 아름이한테 맞췄어요. 애초에 말도 안 되잖아요. 하루 만에 원곡도 아니라 리믹스 안무를 외우라뇨.”
당연하게도 박재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설마 김민주가 신아름을 도와주러 나설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아, 아니, 그거는…….”
“말도 안 되는데, 아름이는 그걸 해냈어요. 안무 영상도 잘못 보냈다면서요?”
FD가 면목 없단 듯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아름이는 소화해내지도 못할 춤을 출 바에야, 아예 제 춤을 따라 하길 선택한 거예요. 아름이는 오히려 칭찬받아야 해요. PD님 화 풀려고 그만 좀 뭐라 해요.”
“……뭐라고? 화, 화를 풀어?”
정곡을 찔린 박재환이 얼굴을 붉혔다. 허나 KS 소속인 김민주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분노와 말을 가다듬던 박재환은 결국 한 걸음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야.”
박재환은 민경섭과 신아름을 번갈아 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너희, 이대로 끝난 거 아니다. 책임져야 할 거야. 알겠어?”
“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민경섭은 박재환의 용서에 매달려 비굴한 사죄를 바쳤다. 그가 면목을 살려주자 박재환은 혀를 차면서도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기다려요.”
그때 신아름이 그를 불렀다.
박재환이 다시 돌아보니, 분노에 몸을 파들파들 떠는 신아름이 보였다. 그녀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사람을 죽일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사과해요.”
“……나? 나한테 하는 말이냐?”
“우리 매니저님한테 욕한 거.”
민경섭은 신아름의 손목을 쥐고 제발 그만하라며 사정사정을 해보았으나, 신아름을 알아듣지를 않았다.
“사과하라고요.”
김민주의 지원 사격에 갑자기 머리의 나사가 풀려버렸다, 같은 건 아니었다.
신아름은 더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가족처럼 여겼던 민경섭이 받는 모독에.
박재환이 깎아내리는 가로 엔터에.
말끝마다 ‘하꼬’를 붙여가며 욕해대는 소녀연맹에.
더는 그딴 처사를 참고 싶지 않았다.
“이게 미쳤……!”
“제가 이상한 요구를 해요? 사람 하나 죽으라고 욕을 한 게 정상적이에요?”
대기실 밖에 모인 군중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중소 기획사의 아이돌이 음방 PD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꼴이라니.
앞으로 십수 년 동안 다시는 나오지 않을 진귀한 광경임이 분명하다.
“잘못한 거를 욕하지 왜 관계없는 거를 끌어당겨서 욕하는데요? 사과해 달라는 게 이상해요?”
신아름은 더는 가면을 쓰고 싶지 않다.
호의를 얻기 위해 미소를 만들어내고, 힘을 보아 다른 사람에게 굽실거리며, 자기가 아닌 무언가를 연기하는 삶.
그에 신아름은 지쳐버렸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멤버들과 회사, 그리고 민경섭이 욕을 먹는 걸 보고도 조용히 참는 인간으로 살 바에야. 누군가와 척을 지더라도 가족을 지켜주는 인간이 되길 바란다.
“저한테 욕한 거 사과해달라는 거 아니에요. 우리 매니저님 모욕했던 거, 딱 그것만 사과해줘요.”
박재환은 벙 쪘다. 그러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신아름과 김민주를 향해 삿대질했다.
“이것들 완전히 돌았네? 여기가 어디야? 내가 누군지 알아? 여기 방송국이고 나는 PD야. 너희는 내가 연출하는 무대를 망쳤고! 뭐 이딴 애들이 다 있어! 회사가, 매니저란 것들이 아이돌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부모 얼굴을 보고 싶다 진짜.”
그 발언에 신아름과 김민주가 동시에 발끈했다. 하지만 이미 열불이 오를 대로 오른 박재환의 고함을 끊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너네 평생 우리 방송 안 나오고 싶어? 여기 발도 못 들이밀고 싶어? 무대 하나 줬으면 고맙다고 하진 못할망정……!”
“그래, 안 나와요.”
익숙한 목소리에 신아름과 민경섭이 동시에 문 쪽을 보았다.
성필이 인파를 뚫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평생 안 나옵니다 여기에.”
“……박 이사? 너,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제대로 들으셨네요.”
성필이 민경섭과 신아름의 손목을 잡곤 보란 듯이 박재환의 앞을 지나쳤다.
“너, 너, 이번 주에 예능 잡힌 거 안 나와도 괜찮아? 컴백 무대 두 개는? 너 나한테 이러면 득 되는 거 하나도 없어! 이게 진짜 다 미쳐서…….”
“앞으로 여기 스튜디오에 발 들이미는 일을 영원히 없을 겁니다.”
성필은 멈춰 서서 박재환을 보았다.
“PD님이 무릎 꿇고 우리 애들한테 사과하기 전까지는요.”
“……허. 진짜 돌았구나.”
그 뒤로도 박재환은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성필은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의 벽만 뚫을 뿐이었다.
“너 거기서 나가기만 해!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앞으로 평생 안 보는 거야!”
성필이 멈추지 않자 박재환은 당황하면서도 분노를 놓지 못했다. 어떻게든 체면을 살리기 위해 위협을 가했다.
“영원히 이 업계에서 활동할 일은……!”
그제야 성필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 외쳤다.
“이딴 방송 평생 안 나와도 아무런 지장도 없어 이 씹……!”
민경섭이 황급히 성필의 입을 막았다. 그로써 겨우 진정한 성필은 다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저 멀리 사라졌다.
가로 엔터의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스탭도 분위기를 읽곤 황급히 인파를 뚫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대기실 밖의 사람들은 성필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금 박재환 PD를 보았다.
“…….”
박재환은 창피함과 분노로 얼굴이 붉어져 폭발할 지경이었다.
* * *
밖으로 나오자 민경섭이 성필의 손을 뿌리치고 외치듯이 말했다.
“형 미쳤어요?! 음방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아요! 여기 방송국 전체 PD랑 척 질 생각이에요?!”
“너도 안 말렸잖아.”
“그거야 형이 너무 강경하게 나오니까 그랬죠! 내 손 보여요?”
성필이 잡았던 민경섭의 손은 넝마처럼 너덜너덜했다. 너무 꽉 잡은 탓에 피도 통하지 않아 시퍼렇게 변했다.
“이런데 내가 형한테 뭐라고 해요! 진짜 척질 생각 아니면 조금 있다가 다시 들어가서…….”
“진짜 척질 거야.”
“……어?”
“너희들 부모 욕에 조상 욕까지 먹는 거 보고 참을 바에야, 방송 안 나오는 게 낫지.”
성필은 민경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경섭아, 그딴 대우 받고 가만히 있지 마. 네가 그런 욕을 먹고 참으면 아름이가 뭐가 돼.”
이런 비합리적인 판단이 다 있나.
욕먹으면서도 고개 숙이는 게 매니저의 업무 중 하나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니.
물론 박재환이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래를 보자면 참았어야 했다.
분명 그럴 텐데.
“……네.”
민경섭은 힘없이 알겠다고 해버렸다.
“그리고 아름아.”
성필에게 혼날까 초조하게 기다리던 신아름의 머리 위로, 그의 손이 따스하게 올라왔다.
“잘했어. 내가 다 속이 시원하더라.”
“그, 근데 팀장님이 예능에서 두루두루 친하라고……. 듣기 싫은 말도 흘리라고 했…….”
“누가 욕도 참으래. 이번엔 잘했어.”
“정말…… 요……?”
성필은 무릎을 굽혀 신아름과 시선을 맞추었다.
“아름이 네가 욕먹는 거 참을 바에야, 그냥 죽는 게 나아.”
성필의 달콤한 한마디에 신아름은 깜짝 놀랐다. 그와 만난 지도 벌써 5년이 훌쩍 넘었건만, 이토록 직설적이고도 귀가 단 말은 처음이었다.
“나 방금 가만히 있었으면 너희 어머니 볼 면목도 없지. 앞으로 명절 때 너희 집 가지도 못할걸?”
입꼬리만 씰룩이던 신아름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성필의 평온한 태도는 마치 아까 아무 일도 없었단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어쩜 저리도 태평할까. 혹시 PD에게 욕하면서 나온 건 전부 환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서 밥이나 먹자.”
성필이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신아름과 민경섭은 그가 일부러 신경 쓰이게 만들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눈치챘다. 없던 일로 치자는 것이다.
셋은 해가 져 어두운 주차장을 함께 걸었다.
도중에 신아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그, 팀장님, 경섭 오빠. 무대에서 안무 맘대로 바꿔서 죄송해요…….”
정신을 차리니, 신아름도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는지 감이 왔다.
자칫하면 무대를 아예 망칠 수도 있었다.
무대 위에서 김민주의 춤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카피하겠다니. 해본 적도 없는 일인데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괜히 저 때문에…….”
“맞다, 그거.”
민경섭은 그녀의 어두운 태도와 상반되게 쾌활한 투로 말했다.
“어떻게 한 거야?”
“네? 아…… 그, 그냥 보고 췄죠 뭐.”
“보고 춰? 와, 그런 것도 되는구나.”
민경섭이 대단하단 듯 신아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에 이어 성필이 신아름의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우리 아름이 대단해. 즉흥으로 췄는데도 그 정도야? 원본 리믹스 안무보다 훨씬 낫던데? 어떻게 점점 더 애가 성장하냐.”
“그러게요 형. 이 정도면 아름이는 데뷔 전날까지 안무 연습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의 밝은 대화에 신아름의 표정도 다시 환히 밝아졌다.
“헤헤, 그죠? 저 대단하죠?”
“근데 이럴 거면 앞으로 말은 좀 해줘.”
“……모처럼 훈훈한 분위기 됐는데, 꼭 초를 쳐야 해요?”
성필은 신아름의 머리 위에 올려두고 있던 손을 재차 부드럽게 움직였다.
“고마워.”
“……뭐가요?”
“나 걱정 안 시키려고 일부러 말 안 한 거 아니야? 어차피 올라야 할 무대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형 진짜 복 받은 거예요. 아름이 같은 아이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담당 프로듀서 걱정 안 시키겠다고 혼자 짐을 다 지다뇨.”
“그러게나 말이다. 이러다가 나 기쁘게 해주겠다면서 혼자 스케줄까지 잡아오겠다.”
신아름은 성필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어서 기뻤다.
혹여나 마음대로 안무를 바꿨다며 혼내지는 않을까 끙끙댔었는데, 바로 이렇게 의도를 파악해주다니.
“헤헤, 근데 저 오늘 좋았어요?”
신아름은 성필과 민경섭의 사이에서 계속 칭찬을 갈구했다.
오늘 무대 어땠냐.
아예 박재환한테 쌍욕을 박을 걸 그랬나.
앞으로도 욕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불러라…… 등등.
성필과 민경섭은 웃는 얼굴로 신아름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근데 저희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아.”
“이열, 확신 넘치네. 팀장님 운세라도 보고 온 건 아니죠?”
“비슷한 건 봐.”
“음, 관상?”
“어, 그 종류.”
“형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도와줄 거면 제가 조상 욕 먹는 부분에서 좀 도와주지.”
“음, 그 FD님이랑 얘기 좀 하느라고. FD님은 생방 끝나자마자 박 PD한테 상황 설명하러 갔고, 나는 남아서 증거 자료들 정리했지.”
“증거 자료요?”
“방송국에서 안무랑 곡 잘못 보냈단 자료들 말야. 나중에 또 딴말 나올 수도 있으니까 미리 모아둬야지. 그리고 아름이 무대 그거, 안무를 좀 다르게 했잖아. 그거 불안해서 스튜디오 구석에 쪼그려 앉아 인터넷 반응 찾아봤지.”
“불안했어요?!”
성필이 핸드폰을 꺼내자 두 사람은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근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음방 실시간 채팅에서도 난리 났어.”
“왜요? 그거 이상했지 않아요?”
“대박이야. 진짜 거울 보는 거 같았다고 그러더라. 특별 무대 엄청 잘 짰다고. 케이어스 팬들이랑 소녀연맹 팬들이 클립 따서 SNS에 퍼다 나르고 있어.”
“와, 트잇 숫자가 벌써…….”
자신의 무대를 돌려본 신아름은 할 말을 잃었다. 무의식중에 춤을 춰서 대충 ‘망했구나’ 생각했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다.
사람들이 ‘거울 같다’고 하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진짜…….”
인생사 새옹지마다.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늦게 보여줘요?! 이 반응 박재환 그 새끼한테 들이밀었으면 입 꾹 닫았을 텐데!”
“그땐 나도 머리에 열이 올라서 생각을 못 했어…….”
“형 그 인간이 무릎 꿇고 사과할 때까지 안 오겠단 건 진심이에요?”
“어, 진심.”
“우리가 그럴 급인가.”
성필과 신아름이 쏘아 보자 민경섭은 시선을 회피했다.
“그럴 급이 될 거야.”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PD가 아니라, 본부장이 직접 와서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옛날처럼 함께 걸었다.
석세스 엔터에서처럼 서로에 대한 유대를 확인하며 웃음을 나누었다.
차에 타기 전, 신아름이 물었다.
“팀장님. 오늘 제가 김민주보다 나았어요?”
“그럼. 민주 씨 천 명보다 우리 아름이가 훨씬 낫지.”
“다시 말해줘요.”
“아름인 세상 누구보다 빛나.”
“헤헤.”
신아름은 해맑게 웃으면서 차 안에 탔다. 이어서 성필도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신아름은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칭찬을 요구했다.
“또 해줘요.”
귀찮지 않다.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다.
“아름이 네가 최고야.”
진심으로, 김민주보다 훨씬 소중하다.
아무리 성필이 케이어스의 팬이라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은 어느 일도 있었으니까.
‘이제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는 없어…….’
어째, 점점 케이어스 멤버들을 향해 쓴 색안경이 벗겨지는 느낌이다.
* * *
KS 엔터 매니지먼트 계열 이사 남홍범.
그는 요즘 따라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재고하게 됐다.
‘소유도 그렇고 내가 편한가? 뭔 일만 있으면 다 나를 찾아오냐.’
오늘은 김민주가 왔다.
용무는 부탁이 있단 것이었다.
김민주는 여태껏 남홍범에게 부탁이란 걸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할 급도 아니었다.
“혹시 독립하고 싶어?”
“제가 왜요?”
“그럼 됐…….”
“아, 하고 싶어요. 아니면 샤워실 세 개는 있는 곳으로 이사 보내주세요.”
“…….”
긴장을 푸는 시간이 지나고, 진정한 부탁을 들은 남홍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사님 제발요. 마지막 부탁이에요.”
“…….”
“제가 욕을 먹었다니까요! 케이어스의 민주가 욕을 먹었어요! 이사님이 시킨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도 다 하고 다녔잖아요! 제 부탁도 한 번은 들어주세요!”
김민주는 연습생 시절 남홍범이 알려준 필살 애교 10선을 펼쳤다.
하지만 남홍범은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이 정도면 로봇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결국 김민주는 분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씨잉…….”
그때, 남홍범은 표정 변화 없이 내선 전화를 들었다.
“1팀장. 민주가 그 뭔 음방 PD 나부랭이한테 욕먹었단 거 진짜야?”
짧은 통화 후, 남홍범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들었다.
“어, 문 본부장.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어. 별 건 아니고, 문 본부장 부하 관련된 건데.”
1시간 정도 후.
“죄송합니다…….”
박재환 PD는 김민주 앞에서 사죄의 말을 읊어야만 했다.
“민주, 이제 됐어?”
“넵!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아, 또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요.”
“하나라면서…….”
“이거 연장선이에요.”
박재환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김민주의 또 다른 부탁을 들었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귀가 막힌 것도 아니고, 바로 앞에서 김민주와 남홍범이 대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민주의 부탁이 이어질수록 박재환의 안색은 파리해졌다.
“걔한테도?”
“넵!”
“음, 그건…….”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의 찐마지막 부탁이에요!”
“…….”
그래.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의 부탁이면 어쩔 수 없지.
“박 PD님.”
“예, 예, 나, 남 이사님…….”
“PD가 왕은 아니잖아요. 다 비즈니스 관계죠. 비즈니스에선 예의가 중요해요.”
“그렇, 으, 그렇습니다.”
“아이돌한테 욕은 하면 안 되죠.”
“예, 예에.”
“반성했어요?”
“예!”
“결자해지(結者解之).”
“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풀어야겠죠.”
설마, 진짜로……?
“가로 엔터에도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떨까 싶어요. 강요하는 건 아니고, 그러는 쪽이 모양새가 살지 않을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