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신아름의 특별 무대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성필은 무거운 걸음과 함께 사장실로 향했다.
그의 뒤에선 신아름과 민경섭이 불안한 기색으로 따라오는 중이었다.
“팀장님, 제가 사장님한테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형. 꼭 형만 갈 이유가 없잖아요.”
음악세상의 PD와 척을 지게 됐다.
심지어 수십 명의 아이돌과 기획사 관계자, 방송국 스태프들의 앞에서 고함까지 질러버렸다.
경우에 따라선 성필이 자리를 내놔야 할 정도의 급발진이었다.
“그냥 우리 다 같이 가서 말씀드려 봐요.”
성필은 뒤로 돌아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가야지. 난 이사잖아.”
“하지만…….”
“어허, 어디서 팀장이 바로 사장님을 뵈려고 해? 버릇없이.”
성필이 장난스레 웃으면서 민경섭의 어깨를 짝 때렸다. 이어선 안심하란 듯 신아름의 머리칼을 거칠게 쓸었다.
“팀장님 내 머리 그만 만지면 안 돼요? 저 머리에 새집 지었잖아요.”
“싫어?”
“그냥 뒷머리만 부드럽게 쓸어줘요.”
“그래.”
신아름의 말에 따라 뒷머리를 조심조심 쓸면서, 성필은 신뢰를 가득 담아 말했다.
“걱정하지 마. 설마 사장님이 크게 화내시겠어?”
신아름은 미안함과 감사함이 섞인 눈빛으로 성필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대신 나서서 총알받이가 됨으로써 신아름은 홍규헌에게 직접적으로 혼날 필요가 없다, 같은 이유로 감사한 게 아니었다.
성필이 했던 행동 전부가 고마웠다.
회사와 소녀연맹의 이익을 일부 희생하면서까지 신아름의 부당한 처사에 화내주었으니까.
PD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해, 신아름을 위하여 화를 내준 것이다.
“아름이 넌 걱정하지 말고 쉬고 있어. 무대 하느라 지쳤잖아.”
신아름은 미안한 티를 내면서도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올게.”
사장실 앞. 노크. 부드럽게 열리는 문.
터벅터벅 규칙적인 성필의 발소리.
그리고.
“죄송합니다!”
성필은 땅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이어서 속사포처럼 방송국에서 있던 일을 홍규헌에게 고했다.
랩이 떠오를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홍규헌이 몇몇 개는 흘려듣길 바라서 일부러 말하는 속도를 올렸단 것을 고백해야 하리라.
그래봤자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성필의 또박또박한 발음 덕분에 놓치기도 쉽지 않았을 테지만.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사장님!”
“…….”
스륵, 홍규헌이 입은 옷이 부대끼는 소리.
드르륵, 홍규헌의 의자 바퀴가 구르는 소리.
이어서 하이힐 특유의 또각대는 발소리.
긴장감에 땅만 바라보던 성필의 어깨로 홍규헌의 작은 손이 올려졌다. 이어서 그녀의 힘에 따라 성필이 상체를 들었다.
바로 앞에 홍규헌이 있었다.
“의외로, 박 이사는 내가 했던 말을 잘 잊는구나.”
“네……?”
성필은 당황스러웠다.
혼날 줄 알았는데 돌아온 것이 부드러운 손길과 다정한 말투라니.
혼나야 마땅한 행동이었다.
매니지먼트 관리 이사인 성필에게는 영업 능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성필은 중요한 거래처 중 하나를 걷어차고 온 것이다.
“내가 옛날에 했던 말 기억 안 나? 박 이사는 고개 숙이거나 비굴한 모습보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고 했잖아.”
성필이 거래처를 걷어찬 이유는, 부하가 욕먹는 것을 참지 못했단 거다.
영업을 하다 보면 자존심이 깎이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것을 참고 관계를 이어나가는 게 영업이고 인간관계 관리다.
당시에 기분이 나쁘고 속이 상하더라도 후일을 기약하며 참았어야 했다.
“그래도, 그 PD 앞에선 머리 안 숙인 거지?”
“……예, 예. 제가 끼어들 상황은 아니어서, 경섭이가 대신 사과하고, 예, 그랬습니다.”
“박 이사는 그런 민 팀장을 위해서 화낸 거고. 지금은 그걸 사과하려고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인 거네. 그래도 말야,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거면 나를 설득해보려는 티라도 좀 내.”
홍규헌은 뻣뻣하게 아래로만 향하려는 성필의 허리를 곧추세운 뒤,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내가 화부터 낼 거라고 지레짐작하지 말고. 박 이사.”
“네!”
그녀의 부름은 한없이 자애로웠으나, 성필은 군기가 바짝 들어 답했다.
“그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어?”
“다시 떠올리면…….”
“다시 떠올리지 말고.”
“……당시에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럼 됐어. 관련 얘기는 민 팀장이랑 신아름한테도 들을 거야. 일단 자리에 앉아. 박 이사한테도 듣게.”
성필은 입술을 물어서 감동을 삼켰다.
방금 홍규헌은 말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성필을 믿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필의 상황 판단을 존중하고 이해한 것이다. 그 판단이란 게 다분히 감정적이었음에도 말이다.
홍규헌의 속내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필을 겉으로 대하는 태도만으로도 감동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예, 감사합니다…….”
성필은 홍규헌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정확히 방송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신아름이 최종 안무를 받지 못했고, 무대를 자율적으로 소화했고, 박재환 PD에게 욕을 먹고…….
“어떤 욕? 정확하게 말해봐.”
“저도 처음부터 본 건 아닌데, 대강 제가 들은 건…….”
홍규헌이 분노에 치를 떨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소리 질렀겠네. 아니, 소리 지르는 게 뭐야. 그 인간 한 대라도 때리고 오지.”
상황 설명이 끝나고 나선 어째선지 분위기가 조금 우울해져 있었다.
일단 성필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홍규헌이지만, 후폭풍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이제 ‘음악세상’에는 못 나가는 거지?”
“아마도요.”
“우리 그쪽 방송국에 예능 하나 잡혔었잖아. 그것도 엎어지나?”
“이번에 나가기로 예정돼 있던 건 괜찮을 거예요. 그냥 아무나 바로바로 넣을 순 없잖아요. 작가들이 출연자 자료 조사도 하고, 또 대본도 짜고 해야 하니…….”
“앞으로…… 거기 방송국 아예 못 나가겠지?”
“네.”
“…….”
성필이 며칠 굶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이려 하자, 그보다 빨리 홍규헌이 그를 격려했다.
“뭐어, 방송국 하나가 뭔 대수야. 나 거기 예능도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음악세상 원래 다른 기획사들이랑도 갈등 많았잖아.”
아이돌 팬들도 의아해하는 부분이었다.
유독 음악세상에만 나오지 않는 그룹이나 기획사가 몇 존재한다.
세간에서는 모종의 갈등이 있었지 않나 예측하지만, 정확한 사정은 당사자들이 아니고서야 모를 것이다.
“우리도 그중 하나가 되는 거지. 케이블이고, 뭐어…… 소녀연맹이 나갈 곳이야 별처럼 많잖아.”
성필은 홍규헌의 배려가 더욱 고마워졌다.
정신을 차리니 성필 자신이 얼마나 악수를 두었는지 감이 왔기 때문이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평생 따르겠습니다…….’
이제껏 ‘음악세상’과 그쪽 방송국에 만들어두었던 인맥 대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방송국 내부는 폐쇄적이고 그런 만큼 유기적이며 끈끈하다.
음악세상 PD 정도에 오른 박재환이면, 아예 소녀연맹의 방송국 모든 예능 출연을 틀어막는 것도 가능하다.
심지어 타 방송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믿을 건 내 능력뿐인가.’
적어도 미래가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신아름과 민경섭을 위해서 나선 것이니 지금도 후회는 없다.
‘괜찮아. 미디어 광고는 중요해도 점점 그 영향력이 줄어들잖아.’
성필은 레거시 미디어의 몰락과 뉴미디어의 대흥기를 직접 목격하고 과거로 돌아왔다.
그 때문에 소녀연맹의 프로모션 전략도 뉴미디어에 집중했었다. 물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가면 좋긴 하지만…….
“박 이사, 오늘 일은 신경 쓰지 마. 나는 오히려 박 이사가 우리 애들 대신 화내줘서 고마우니까.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이 했을 거야.”
만약 홍규헌이 그 자리에서 H&P 일가의 인물이란 것을 알렸다면 박재환이 알아서 기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홍규헌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도 진짜 속이 쓰린 모양이다. 이런 싸구려 힘숨찐(힘을 숨긴 찐따) 망상이나 하고…….’
성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홍규헌은 그런 성필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다시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성필이 나간 뒤, 홍규헌은 한동안 의자에 앉아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핸드폰에 떠오른 이름은 ‘문헌 오빠’였다.
“……으.”
홍규헌은 핸드폰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쥐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압박감은 이 상황이 진실임을 여과 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 순간, 비 맞아 꼬리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와 같은 몰골의 성필이 떠올랐다.
평소에 당당하기 그지없는 성필은 자신이 잘못했단 사실은 귀신처럼 안다. 그래서 잘못했을 때는 주저 없이 허리를 숙이고 벌벌 떤다.
정말 강아지처럼…… 불쌍하고…….
“……하자.”
홍규헌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발신음이 세 번도 가기 전에 상대와 연결됐다.
“오, 오빠야. 오랜…….”
[뭐지?]
싸늘한 말투.
홍규헌은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기획사를 만들고 싶다던 자신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그.
[드디어 실패한 건가?]
첫째 오빠, 홍문헌.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마음이 꺾일 듯하다. 하지만 홍규헌은 버텨내곤 목소리의 기세를 키웠다.
어릴 적 홍문헌이 알려준 ‘얕보이지 않는 법’ 중 하나였다.
“아니. 부탁할 게 있어. 오빠야가 듣고 합당하지 않으면 안 들어줘도 돼.”
[내가 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있어. 오빠가 가진 회사 중 하나의 일이니까.”
* * *
박재환 PD는 남홍범 이사를 만나고 와서도 가로 엔터로는 가지 않았다.
‘내가 직접 신아름이랑 그 매니저한테 사과하러 가라고?’
아무리 KS 엔터의 힘이 강하다고 한들, 그런 굴욕적인 제안마저 수락할 수는 없다.
이건 박재환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HPT라는 방송국 전체의 일이나 다름없다.
‘남 이사. 네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어도 가로 엔터 같은 하꼬한테는 안 되지. 내가 자존심을 팔더라도 정도가 있어.’
박재환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퇴근길에 다시 생각해 보니, 이왕 남홍범에게도 사과한 김에 가로 엔터에도 갔던 게 좋았을 듯하다.
‘안 그래도 KS 엔터의 몇몇 뮤지션들은 우리 음방에는 안 나오잖아. 이걸 계기로 아예 KS 엔터와 연이 끊기면 어떡하지? 하아, 지금이라도 가로 엔터로 갈까?’
박재환은 고민에 가득 찬 상태로 다음 날을 맞았다.
“박 PD 잠시 나 좀 보지.”
갑자기 본부장이 박재환을 찾았다.
박재환은 얼떨떨하여 본부장을 따라갔다. 놀랍게도 그가 도착한 곳은 국장실이었다.
‘혹시 다른 방송으로 배치되는 건가?’
하긴, 음방이란 게 마땅히 성장할 여지가 없는 방송이긴 하다.
PD가 창의성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좀 있으니, 이번 기회에 박재환의 둥지를 더 좋은 곳으로 옮겨줄 속셈인지도 모른다.
‘나도 연차가 꽤 쌓이긴 했으니까.’
잠깐만, 이거 엄청 좋은 타이밍 아닌가?
‘안 그래도 KS 엔터와의 관계 때문에 껄끄러운 상황이었는데…….’
이게 전화위복이란 것일까?
출근길에 쭉 품고 왔던 불안감이 단박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안녕하십니까, 국장님.”
박재환은 웃는 낯으로 사장에게 인사했다.
“자네 대체 뭘 한 건가!”
그에 비해 국장의 낯빛은 회색이었다.
“예……?”
“‘예?’라고? 자네가 뭘 했는지도 몰라?’
“아, 그게, 죄송합니다…….”
“어휴!”
국장은 여느 때의 여유로운 태도와는 달리 초조하게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곤 박재환도 사색이 되었다.
“HPT 미디어에서…….”
그러니까, HPT 방송국의 모회사에서.
“지, 직접 저한테, 시, 시정을, 그러니까, 수, 수습을 명령……?”
* * *
사장실.
성필과 홍규헌은 소녀연맹의 컴백 일정에 관한 논의를 나누고 있었다.
“사장님!”
민경섭이 다급한 투로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홍규헌의 허락과 함께 민경섭이 안으로 들어와 비상사태가 발생했음을 알렸다.
“음악세상 박재환 PD님이 오셨어요!”
성필과 홍규헌이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박재환이 왜 가로 엔터로 왔지? 무슨 이유로?
설마 추후 어떻게 복수할지 직접 세세하게 알려주기 위해 온 건가?
“박 이사, 너랑 나랑만 보자.”
“예.”
잠시 후, 박재환은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왔다.
과연 음방 PD가 중소 기획사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성필은 신경을 날카롭게 유지하며 박재환을 관찰했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이상했다.
마치 선생님의 훈계를 듣고 친구와 화해하려 하는 초등학생 같았다.
“저, 가로 엔터의 사장님 되시죠?”
“예, 제가 홍규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PD님.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그게…….”
박재환은 정말 내키지 않으나, 어쩔 수 없단 듯 말을 혀 위에 올렸다.
“아름, 이랑…… 그 매니저랑 또…….”
그가 성필을 곁눈질했다.
“박 이사한테 사과하러 왔습니다…….”
“…….”
성필이 옆에 선 홍규헌을 흘끔거렸다.
현재 그의 머릿속에서는 가설 하나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는데, 꽤 신빙성이 있었다.
‘사장님이 가문의 청소부 같은 사람들을 풀어서 박재환 PD를 협박했나?’
H&P 정도 되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리라.
“아, 사과요. 안 그래도 어제 이야기를 들은 참입니다. 그럼 일단 신아름이랑 민경섭 매니저를 불러드릴까요?”
보아라.
지금도 홍규헌은 아무런 동요도 없잖은가.
‘……뭐라는 건지.’
아무튼, 기적과 같은 일이다.
몇 달 동안 가로 엔터 모든 직원과 홍규헌, 소녀연맹에게 죄책감을 안고 끙끙댈 필요는 없을 테니까.
최소한 박재환과의 관계 회복은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그가 어째서 굳이 사과하러 왔는가 밝혀진다면 말이다.
* * *
정호환과 남홍범은 오랜만에 함께 옥상으로 올라왔다.
둘 다 바쁘신 몸이라, 평소에는 함께 어딘가로 움직이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에잉, 쯧.”
흡연 구역에 놓인 쓰레기통 주위로 담배꽁초가 한 개 떨어져 있었다.
정호환은 허리를 굽혀 꽁초를 주운 뒤, 더럽단 듯 재빨리 쓰레기통 안으로 던졌다.
“호환아 몸조심해라. 너 그러다가 허리 나가.”
“……그냥 허리 굽힌 게 전부인데 뭔 허리가 나가. 사람 늙었다고 놀리는 것 좀 그만해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너무하지 않냐.”
남홍범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두 사람이 뱉어내는 연기로 흡연 구역 주위가 물들기 시작했다.
“홍범아, 너 음악세상 PD 회사로 불러다가 갈궜다며?”
“갈구긴. 그냥 상식적인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대화를 나눈 거지.”
“갑질한단 말 나오면 어쩌려고.”
“갑질은 그쪽이 했지. 그리고 하면 또 어때. 우리 어렸을 땐 기억 안 나? 나 진짜 성공하면 방송국 인간들 불러다가 일렬로 세워서 줄빠따 시키는 게 꿈이었다.”
정호환이 끅끅대며 웃었다.
그래, 젊을 때는 그랬지.
KS 엔터가 동네 구멍가게에 불과했을 시절의 일이다.
당시에는 텔레비전 미디어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서, PD에게 주먹으로 맞아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야 이 씨, 그 PD가 욕해도 그렇지. 어? 불러다가 자꾸 그렇게 하면…….”
“민주가 욕을 먹었다고.”
남홍범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언어가 검이라면, 그의 말에는 박재환을 수십 갈래로 찢어놓겠단 살의가 다분했다.
정호환이 혀를 쯧 찼다.
“매니지먼트 이사라는 인간이 이렇게 감정적이어서야…….”
“야, 기계들만 잔뜩 만지는 작곡가들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원래 매니저란 게 뜨거운 심장이 없으면 못 하는 거거든? 거기, 박성필인가, 그 사람이 했단 것도 들어봐. 박재환 면전에서 소리 지르고 아예 방송 자체에 안 나오겠다면서 바락바락 대들었대.”
남홍범은 마치 자신의 무용담을 말하기라도 하듯 들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정호환은 새삼스레 시대가 많이 변한 것이 느껴졌다.
‘지금도 미디어 권력은 강하다곤 하지만, 점점 저물고 있긴 하군.’
완전히 대체하는 건 무리겠지만, 인터넷 플랫폼이 레거시 미디어를 몰락시키는 날이 가시화되고 있다.
드라마 시청률이 20%를 넘으면 초대박이라던가? 옛날에는 40%는 넘어야 했고 50%가 넘는 작품도 간간이 등장했었다.
‘이젠 PD건 본부장이건, 낡은 체제 아래에 붙어서 기생할 뿐이겠지.’
KS 엔터도 미디어 쪽의 기득권을 강화해 두고 있긴 하다. 하지만 정호환은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몰락에 씁쓸해하고 있지 않았다.
과거를 상징하는 두 미디어의 몰락은 곧 스타가 중심이 되는 업계의 단면을 보여주니까.
이 세상은 이제 미디어가 아닌 스타를 중심으로 움직일 것이다. 스타만 있다면, 콘텐츠를 뽑아낼 플랫폼이야 널리고 널렸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건 미디어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스타를 프로듀싱하고 매니지먼트하는 역량이다.’
스타를 만들어내는 스타 시스템이 권력의 중추가 될 것이다.
“뭐, 그래서.”
정호환이 담배를 비벼 껐다.
“그 PD를 가로 엔터까지 보낸 거야?”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가 부탁했어. 어쩔 수 없지.”
“제정신이 아니군.”
“남 말하네.”
이로써 두 이사의 합의가 끝났다.
방송국 PD를 불러 회사 내에서 훈계했다는 건 아무리 KS 엔터라도 가벼이 여길 사안이 아니었다.
대기업의 필수적인 조건은 인간의 불확정성을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소수의 인간이 시스템을 엿가락처럼 휘게 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선 안 된다. 할 수 있더라도 시스템이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다.
하지만 남홍범의 행동은 시스템의 통제 자체를 벗어났다.
“내가 막아줄게.”
“고맙다, 호환아.”
“뭐가?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의 부탁이었다면서.”
그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정호환은 남홍범의 마음을 이해한다.
90년대부터 수많은 연예인을 관리하며 갑질이란 갑질은 수도 없이 당해왔다.
당연하게 접대를 요구하는 인간들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무슨무슨 협회장. 어디어디 정치인. 어느어느 기업가.
젊었을 시절의 남홍범은 악과 분노만 남아, 언젠가 그들을 찢어 죽일 날만 바라보던 인간이었다.
그나마 늙어서 유해졌으나, 소속 연예인이 욕을 먹었단 사안을 넘길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도와줘야지.”
정호환은 남홍범의 행위를 이해한다.
지지하진 않더라도 말이다.
“야, 저기 봐라.”
남홍범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정호환이 시선을 주었다. 난간 아래쪽, KS 엔터 사옥 후문에 두 사람이 보였다.
김민주와 신아름이었다.
“아, 온다고 했었지. 근데 만날 거면 안에서 만나지. 굳이 저렇게 뒷문에서 만나야 하나.”
“아름이 왔으면 거기 매니저도 왔겠네.”
“뭐 감사 인사한다 그랬나?”
“어. 난 간다.”
“네가 직접?”
“과즙미 뿜…….”
“그거 좀 그만해 새끼야. 괜히 민주한테 이상한 거 가르쳐놓고선, 쯧.”
남홍범이 먼저 내려갔다.
그에 비해, 정호환은 난간에 기대어 수십 미터 아래를 응시했다.
‘민주.’
그리고 신아름.
두 개의 별이다.
‘신아름, 신아름, 신아름…….’
이번 특별 무대는 정말 예술적이었다.
‘내가 깎을 수만 있다면.’
저 보석을 직접 다듬고 싶다.
그 열망을 담아, 정호환은 오래도록 신아름을 내려다보았다.
* * *
신아름과 김민주는 서로를 대면한 순간부터, 황야를 배경으로 대치하는 무법자 같은 분위기를 흘렸다.
마주 본 채 아무런 말도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간간이 후문으로 출입하는 직원이나 연습생이 이상한 눈길을 주었으나, 두 사람 다 반응하지는 않았다.
“……야.”
드디어 신아름이 입을 열었다.
“네가 부탁한 거야? 그 PD 우리 회사에 사과하러 오라고?”
“그래.”
“왜?”
“나대는 거 꼴 보기 싫어서.”
“나 대기실에서 욕먹는 거 도와준 거는?”
“나대는 거 꼴 보기 싫어서.”
“그게 다야?”
“다인데?”
“너 나 싫어해?”
그 질문에는 김민주도 즉답할 수 없었다. 그 시점에서, 김민주는 자신을 감싼 갑옷을 벗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솔직해지지는 못했다.
“그럼 너는? 아육금에서 나한테 소리 지른 건 뭔데? 케이어스를 그렇게 이기고 싶어?”
“어.”
“……그래서 싫어하는 거야?”
신아름도 김민주와 마찬가지로 즉답하지 않았다. 곁에서 누군가 보았다면 ‘뭐 이런 애들이 다 있지’ 싶을 정도로, 둘은 솔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과정이었다.
썸을 타는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툭툭 던져대는 것과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또 상대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두렵고, 그래서 짓궂게 구는 것이다.
다시 침묵만이 둘 사이를 이어준 실이 되었다.
“스읍.”
그 실을 끊으려는 듯 신아름이 심호흡했다.
“고마워.”
“…….”
“아육금 때 나 부축하고 이미지 관리해준 거. 그리고 ‘죽고 못사는 친구’ 촬영해준 거. 또, ‘너희 친구니’에도 나와준 거.”
무엇보다, 이번에 박재환 PD가 욕을 할 때 도와준 거.
덕분에 민경섭과 성필은 사과를 받았고, 가로 엔터도 방송국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거 같아서.”
신아름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김민주에게 쏘아붙이듯 외쳤다.
“고맙다고.”
“…….”
“야, 못 들었어? 고맙다니까.”
“…….”
“사람이 말하면 대답 좀 해라…….”
“어쩌라고.”
“……?!”
김민주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피했다.
“뭐…… 나한테는 별것도 아니고? 케이어스니까? 사람들이 기는 게 당연하겠지?”
“잘났다 그래…….”
“……사과할게.”
“뭘?”
“작년 겨울에, 소녀연맹이 케이어스한테 지는 게 당연하다고 했던 거. 미안해.”
“갑자기?”
얘 왜 이러는 거지.
밤바람에 취해서 감성적으로 변했나?
신아름이 헛웃음을 내뱉었음에도 김민주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번에 축…….”
김민주가 말하려고 하는 건 ‘축하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는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자꾸 헛숨만 뱉어냈다.
이윽고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축하해’란 말을 생략했다.
“봤어, 이번에 너희 사전 예약 판매량.”
이어서 나온 김민주의 말에 신아름의 두 눈이 하늘에 뜬 보름달보다 더욱 커졌다.
소녀연맹 정규 앨범의 사전 예약 기간은 한 달을 훌쩍 넘는다.
초동판매량이 집계되는 것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사전 예약 구매량만 보아도 초동판매량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가로 엔터는 그것을 확인하고 있지 않았다. 모든 프로모션이 끝나는 날, 그 수치를 확인할 셈이었다.
그래서 신아름도 정규 앨범이 얼마나 팔렸는진 모르고 있었는데, 이건, 이 숫자는…….
“아직도 여기 있어?”
민경섭의 목소리에 신아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남홍범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안녕하세요 민 팀장님.”
“아, 민주 씨. 안녕하세요.”
“일은 다 끝내셨어요?”
“네, 민주 씨 덕분이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욕먹었잖아요. 겸사겸사…… 라고 하면 기분이 나쁘실까요?”
김민주가 청순한 웃음을 흘렸다.
민경섭이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신아름이 그의 등을 팍 때렸다.
“오빠 가요! 뭘 저런 비즈니스 미소에 홀리고 있어!”
“아, 아니, 그, 민주 씨! 고마웠어요! 아름아 너도 고맙다고 했어?”
“했어요! 걍 가요!”
김민주는 골목을 따라 사라지는 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부끄럽다고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지다니. 하여튼 성질 더러운 티를 꼭 내야 하나…….
“야!”
그 순간 신아름이 갑자기 뒤로 돌아 김민주를 불렀다. 그것을 넘어 성큼성큼 김민주의 앞까지 다가왔다.
김민주는 짐짓 평온한 투로 되물었다.
“뭐.”
“나 오늘 특별 무대 다시 보기로 봤는데, 너 춤 잘 추더라.”
“당연하지, 나니까. 그리고 어차피 간간이 AR 들어가 있는데 못 하는 게 이상…….”
“너 케이어스에서 몇 등이야?”
“……뭐?”
“아니, 데뷔조로 뽑힐 때 순위 매긴다며?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적의 전투력이라도 파악할 셈인가?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예의 없는 질문이다.
굳이 그룹 내에서 순위를 매길 건 뭔가.
물론, 김민주는 그런 것을 아주 좋아한다.
“후후.”
김민주는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뺨이 붉어져선,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펴…….
“3등?”
“지랄하고 있네 내가 그딴 등수나 받겠냐?!”
“왜 화내. 진짜야?”
“아니라고!”
“알겠다 야. 그렇게 화내면 진짜 찔리는 인간 같잖아.”
신아름도 농담으로 한 말이다.
김민주 정도의 실력이라면 3등으로는 서럽겠지. 그럼 에리카가 리더니까, 김민주는 2등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다.
김민주의 상대적 능력을 알아야 후일 그녀를 이겼을 때 성취감이 더할 테니까.
“나는.”
김민주는 어금니를 빠득빠득 갈면서 손가락을 들었다.
검지 하나.
“1등이었어.”
“……어?”
그것도 이견의 여지도 없이, 모든 이들을 압도적으로 누른 1등.
KS 엔터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불렸던 게 김민주다.
“또 지랄하고 있네.”
“……걍 꺼져라, 넌.”
* * *
“언니, 고생 많으셨어요.”
장하양이 진소유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연말 특별 무대 연습은 후반기에 가서야 제자리를 찾았다. 진소유가 남은 세 사람에게 져주어서, 넷이 함께 모여 연습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하양이 벌써 가게? 언니랑 얘기 좀 하자.”
장하양은 뒤를 흘끗 보았다.
라희가 윤상열과 비교 가능한 썅년(라희의 생각)에게 가지 말라며 도리질을 치는 중이었다.
우효민은 장하양을 걱정하여 그녀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그런 동생들을 향해 장하양은 싱긋 미소 지었다.
“너희들은 먼저 가봐. 무대 때 보자.”
연습실에는 진소유와 장하양만이 남았다.
둘은 바닥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하양아. 이제 너희 컴백이네.”
“네. 이틀 뒤예요.”
“긴장되겠다.”
긴장?
그렇지, 긴장된다.
정규 앨범에는 가로 엔터의 명운이 걸려 있다.
소녀연맹이 1년 동안 이룩한 모든 성과를 보여주는 앨범이기에, 추후 소녀연맹의 성패를 점쳐볼 수도 있으리라.
‘최고의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장하양은 그 일로 매일 매시 매분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은데, 며칠 전에 컴백한 진소유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어 보인다.
“아, 언니 축하드려요.”
“으응? 어떤 거?”
케이어스는 아직 음방에는 나오지 않았으나 뮤비와 앨범은 공개했다.
초동판매량은 집계되지 않았지만 그 성공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 성공은 소녀연맹이 언젠가 넘어서야만 하는 허들이었다.
그 허들을, 장하양이 담담히 말했다.
“이번 컴백 뮤비 공개 24시간 만에 3,000만 가까이 찍으셨잖아요.”
“와아, 하양이한테 축하도 받네. 고마워.”
진소유는 여전히 평온하게 말했다.
“그런데 축하를 너무 많이 받아서 딱히 감흥이 없네. 대단한 건가? 싶기도 하고. 보통…… 이란 느낌?”
소녀연맹이 꿈처럼 그리는 목표 지점, 그 아득한 지향점을, 진소유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 흘려 넘겼다.
“하양이가 안아주면 ‘아, 나 잘한 거구나’ 싶은 마음이 들 거 같은데.”
진소유가 장난기 가득 담긴 웃음을 지으며 팔을 활짝 펼쳤다.
그것을 보며, 장하양은 생각했다.
‘평생 이 언니를 좋아하는 건 힘들겠구나.’
장하양이 꿈에서도 보며 현실에서도 항상 가지길 소망하는 보물은 현재 진소유의 손에 있다.
하지만, 보물을 지닌 진소유는 그것을 손에 들고 있지도 않다. 발아래에 두고 ‘이게 대단한 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진소유를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케이어스를 이기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
‘최고의 아이돌, 돼야 하는데.’
장하양은 성필을 볼 면목이 있을까…….
이틀 뒤, 정규 앨범의 성패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정확히는.
‘30시간 뒤.’
30시간 후, 소녀연맹의 컴백에 축배를 들 것인지 고배를 마실 것인지가 결정되는…….
“왜 자꾸 울상만 짓고 있어.”
“네?”
“마음 좀 편하게 가져도 되지 않아? 그도 그럴 게…….”
장하양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한계까지 억눌러진 용수철처럼 강렬한 힘을 머금었다.
막아야 한다.
진소유의 입에서 나올 말을 막아야 한다고, 본능이 소리치고 있다.
“너희…….”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의 모든 프로모션이 종료되기 전까지 앨범 성적을 확인하지 않기로 했었다.
다들 보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데, 여기서 진소유에게 들어버리면 장하양이 가로 엔터를 배신한 게 되어버린다.
장하양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성적은…….”
이내, 진소유의 목소리가 장하양의 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