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읍!”
부드럽게, 진소유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신음 엇비슷한 소리가 자꾸만 손바닥 밖으로 새어 나오려고 했다. 다행히 그녀가 앨범 성적을 발설하는 것을 막아냈다.
진소유는 장하양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이내 포기한 것인지 힘을 뺐다.
장하양이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런데도 진소유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괜찮아.”
“네.”
장하양은 자신도 모르게 물리력을 행사해버렸다. 진소유의 ‘괜찮아’는 이 행위를 용서해준다는 뜻이겠지.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언니.”
진소유의 언행은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지만, 그녀의 정신력과 실력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컴백 스케줄 때문에 바쁠 텐데, 그녀는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매번 특별 무대 준비까지 했으니까.
게다가 평일에도 다른 이들의 진척도를 확인하고 피드백도 꼼꼼히 했다.
“끝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야. 내가 오해했네.”
진소유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근데 하양이 축하해주면서도 영혼 없는 거 너무 귀엽다아. 내가 싫어? 언니는 슬퍼, 난 하양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왜요?”
진소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냐니, 예쁘잖아.”
“그것만으로도 친해지고 싶어져요?”
“다들 그렇지 않아? 왜, 미남 미녀에게는 사람들이 몰리잖아. 아니면 강아지나 고양이? 귀여우면 막 몰려들어서 ‘귀여워어!’ 같이 말하고 그러잖아.”
그럼 장하양은 강아지나 고양이인가.
비유 자체가 사람을 깔보는 듯하다.
“이제 하실 말씀 하세요.”
“뭐가?”
“용건이요.”
“없는데?”
“……?”
진소유가 장하양의 턱선을 검지로 쓸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깨질 유리처럼 살살.
“아, 생각났다. 응원하려고. 컴백 때 잘해야 해.”
“…….”
“말 안 해도 잘할 거라고? 알겠어.”
진소유는 장하양에게서 손을 떼었다.
“이제 다음에 만나는 건 음방에서겠네. 음, 소녀연맹이랑 케이어스랑 어느 쪽이 선배였지?”
“저희요. 저희가 먼저 데뷔했어요.”
“칼처럼 기억하네. 그럼 내가 앨범 돌리러 가야겠다. 그때 보자.”
장하양은 부모님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된 아이처럼 후다닥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나가기 직전, 뒤로 돌아 허리를 숙였다.
“옛날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진소유는 답 없이 미소 지으면서 손만 흔들었다.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고, 장하양은 새삼 마음을 다잡았다.
‘최고의 아이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소유를 뛰어넘어야 한다.
* * *
“그냥 지금 보면 안 돼요?!”
“안 돼! 12시 될 때까지 버텨! 무조건 버티라고!”
소녀연맹 컴백 하루 전. 그 광기를 담기에 사무실은 너무도 좁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정규 앨범의 판매량을 알 수 있으나, 컴백일에 확인하기로 한 맹세 때문에 다들 불안함만 태우는 중이었다.
“저만 볼게요! 저만 볼 테니까 핸드폰 돌려줘요!”
성필은 민경섭에게서 빼앗은 핸드폰을 어떻게든 사수하는 중이었다.
홍규헌은 벽에 기댄 채 딱따구리처럼 뒤통수를 벽에다가 박고 있다.
한구인은 몇 번인지도 모를 바닥 청소를 하는 중이다. 대걸레도 아니고 손걸레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미끄러질 만큼 번쩍번쩍 광을 낸다.
손혜빈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ASMR 영상을 보는 중이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서는 키네틱 샌드를 만지는 의미 없는 영상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지음과 엘릭은 눈에 조바심과 초조함을 잔뜩 담아 ‘유리구두’ 만화책을 재독 중이었다.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어…….”
조아라는 연습실에서 1층으로 물을 가지러 왔다. 그리고 이 집단 광기의 현장을 보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심미까?]
“……아냐.”
[아, 설마, 아라 씨 저랑 통화하는 게 귀찮은…….]
“아니야. 이상한 거 봐서 그래. 그런데 진저 너 핸드폰 어떻게 쓰고 있어?”
[저도 내일 음방 감미다.]
“숙소 아니야? 폰 매니저한테 맡겨둔다면서.”
[낮잠 자다가 저녁에 일어났슴미다. 할 거도 없어서 회사에 왔슴미다.]
“너도 고생이다. 수면 패턴 바뀌었구나.”
[컴백은 1년만 아님미까. 긴장됨미다.]
그래, 너도 긴장을 하는구나.
조아라는 혼자 토라져선 발걸음이 느려졌다.
“긴장할 게 있어? 이미 대박은 확정이잖아.”
[부끄러운 무대를 보이면 안 되잖슴미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임미다.]
“아…….”
성적이 아니라 무대 퀄리티 쪽이 걱정된단 뜻이었구나.
케이어스는 성적 같은 건 신경 쓸 클래스가 아니란 거지. 이미 케이어스란 이름값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성공이 보장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조아라는 광기와 친구가 된 성필을 눈에 담았다. 그는 좁은 공간을 빙글빙글 돌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성필에게서 핸드폰을 얻어내지 못한 민경섭은 바닥에 축 늘어져서, 정신을 놓고 천장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번 앨범에 우리 명운이 달렸다지.’
듣자 하니 들인 돈만 수십억이라는데. 그리 생각하면 저들의 광란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내일, 수십억이 박살 날지 아닐지 결정되니까.
‘……나도 위험한 거 아냐?’
정규 앨범 제작비가 수십억이라고 한다. 제작비는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가 절반씩 부담하는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수십억을 절반으로 나눈 뒤 오 등분 하면, 이번 컴백으로 조아라에게 지워진 빚을 계산할 수 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 돼서는 죽어도 못 갚겠네.’
조아라가 진저를 위로할 게 아니라 진저가 조아라를 위로해줘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조아라는 착실하게도 위로를 입에 담았다.
“넌 잘할 거야.”
[그렇슴미까?]
“어.”
진저는 헤헤 웃더니 다시금 다운된 목소리로 질문했다.
[팬들이 좋아해 줄지 모르겠슴미다. 아라 씨는…… 저희가 컴백하는 게…… 기대됨미까?]
기대한 적 따위 한 번도 없다.
케이어스의 컴백이란 단어를 들으면 심장이 조여오며 불안감만 커질 뿐이다.
‘또 그녀들에게 지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아니, 지는 건 확정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차이로 뒤처지느냐다.
조아라는 성필처럼 케이어스의 팬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케이어스는, 진저는 항상 경쟁자로 존재해왔다.
사실 이렇게 통화를 하는 것도 기분이 이상하기만 하다.
“……어, 기대되지.”
조아라는 경계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정도로 사회성이 없진 않다.
그렇다, 자신은 신아름 같은 인간이 아니다. 조아라는 그것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너희 노래 자주 들어.”
듣고 싶지 않더라도, 음원 차트 TOP100 자동 재생을 눌러두면 항상 케이어스의 데뷔곡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1년 내내.
뭐 이런 그룹이 다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감사함미다!]
“그래.”
[아라 씨 바쁨미까?]
“그건 왜?”
[조금, 귀찮으신 거 같아서……. 아, 그렇겠슴미다. 곧 샵으로 가야 하지 않슴미까.]
“아냐. 다들 뭐…….”
조아라는 2층으로 올라와 멤버들이 모여 있는 연습실 문의 창을 바라보았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함께 모여 있어도 딱히 연습하진 않았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한껏 달아오른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게 전부였다.
“딱히 일은 없거든.”
[저, 그럼, 아라 씨. 거기…… 혹시 박 이사님도 계심미까?]
“아저씨는 왜?”
[그게,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음, 그게…….]
“빨리 말해. 뭔데.”
[그…… 박 이사님이 케이어스 팬이라고 하셔서…… 커, 컴백했으니까 감상을 듣고 싶어서…….]
감상…… 같은 건 아이튜브에 뮤비 댓글만 보아도 될 텐데.
이미 찬양 일색으로 도배되어 있다.
조아라는 난간 아래로 성필을 보았다. 그는 덤블링을 하겠다면서 이목을 모으려 하지만,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대체 저 정신 사나운 행동을 언제까지 이어갈지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면 안 되나?
[박 이사님 없으심미까……?]
조아라는 눈을 반쯤 감았다. 그러자 1층에서 덤블링을 하는 성필의 모습이 지워졌다.
그 상태에서, 조아라가 간결히 답했다.
“지금은 없어.”
[아…….]
“내일 음방에서 봐.”
[알겠슴미다. 방해해서 죄송함미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라 씨. 파이팅임미다!]
……파이팅, 이라.
조아라는 통화를 끊고 연습실 문을 열었다.
멤버들의 이목이 쏠렸다.
* * *
에리카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케이어스 멤버들의 이목이 모였다.
“얘들아, 샵에 가자.”
에리카는 긴장한 기색이 하나도 없이 밴에 타고, 메이크업을 받고, 헤어스타일링을 받고, 무대 의상을 입은 뒤 다시 밴에 탔다.
그 일을 모두 마치니 새벽이었다. 아침에 꽤 가까운 시간이건만, 겨울이라 해는 뜨지 않았다.
밴 안은 조용했다.
멤버들 모두 신인 때와는 달리 익숙해졌다. 데뷔는 1년이나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들은 1년 만에 프로가 되었다. 일을 대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
자신들을 믿고, KS 엔터를 믿기 때문이다.
“……아.”
맞다.
에리카는 옛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프랑스에 ‘음악을 위한 동행’ 촬영을 가서, 마지막 날 성필에게 흡연자란 사실을 들켰었다.
그때 성필과 약속을 했었다.
‘그랬었네, 깜빡하고 있었어.’
잊을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음?’
혹시.
‘나, 긴장하고 있는 거야?’
정말, 올해는 놀라운 해다.
평생 느껴보지도 못한 감정을 여러 개 배웠으니 말이다.
에리카는 흥미롭단 듯 미소를 띠며 매니저에게 핸드폰을 받았다. 그리고 연락처에서 백설하를 찾아 문자를 썼다.
[언니 오늘 음방에서 만나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스타일링도 다 끝나셨죠? 날이 추운데 음방 출근길 사진 때문에 괜히 멋져 보이겠다면서 홀딱 벗으시면 안 돼요 ㅋㅋㅋㅋㅋㅋㅋ]
“에리카.”
김민주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 ‘홀딱 벗으시면 안 돼요’는 수정해.”
“왜?”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
“그럼 뭐라고 해야 해?”
“‘외투 안 걸치시면 안 돼요’로 바꿔.”
“아, 고마워. 그런데 남의 문자 쳐다보는 건 에티켓 위반이잖아.”
“도와줘도 뭐라고 하네.”
에리카는 김민주의 머리를 팔로 감싸고 이마에 입술을 쪽 맞췄다.
그리고 문자를 이어서 썼다.
[저희 다 앨범 활동 기간 끝나면 같이 놀러라도 가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에리카는 문자를 전송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패딩을 몸에 돌돌 말고 히터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몸이 노곤해져 온다.
그렇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음.”
이래서 게임을 하는 걸까.
에리카는 갑작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과를 예측하기 힘드니까.’
에리카의 가슴 속에서 간질거리는 감각이 퍼져나갔다. 그녀는 마치 처음 컴퓨터 게임을 마주한 초등학생과 같은 마음이었다.
설렌다.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어서, 이기는 게 더 기대돼.’
* * *
백설하는 멤버들을 이끌고 회사의 문 앞에 섰다. 데뷔 때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때와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데뷔한 지 1년이 흘렀다. 긴장되는 건 매한가지지만, 당시처럼 두려움에 떨진 않았다.
자신이 있다.
“얘들아.”
백설하가 문에 발을 걸쳤다. 그리고 뒤로 돌아 소녀연맹 멤버들을 보았다.
항상 자신을 믿고 따라준 고마운 동생들.
그리고 함께 나아가는 친구들.
동시에, 같은 꿈을 공유하는 동료들이다.
“준비됐어?”
멤버들이 무겁고도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에 찬 그녀들의 뒤로 가로 엔터의 사람들이 보인다.
홍규헌이 백설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하고 와, 믿는다.”
손혜빈이 권투 선수처럼 주먹을 날렸다.
“다 죽이고 와! 너희가 올해 최고의 아이돌이야!”
한구인은 아직도 기절해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격려는 듣지 못했다.
“얘들아 고마워! ‘아라베스크’로 꼭 성공해줘서! 내 몸값을 올려줘! 나를 최고의 작곡가로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어어어!”
정지음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양팔을 흔들었다. 아까 앨범 판매량을 듣곤 줄곧 저런 상태다.
“야, 아직 너 최고의 작곡가는 아니거든? 크흠, 얘들아 ‘아라베스크’만큼이나 ‘보라색 튤립’ 무대도 잘해야 한다!”
엘릭은 이런 적이 처음이라 쑥스러운 듯 멤버들과 눈도 못 마주치고 말했다.
모든 이들의 격려가 끝나자, 멤버들의 옆으로 두 사람이 지나쳐갔다.
“가자.”
굳은 표정의 민경섭.
“빨리 와.”
아까부터 미소가 끊이지 않는 성필.
그들이 양쪽 문을 열고.
“네.”
백설하가 마침내 문을 넘어섰다.
오전 12시 8분.
소녀연맹, 데뷔한 지 1년하고도 십수일.
정규 1집 발매.
그 성적은.
“얘들아.”
밴의 조수석 앞에 선 성필은 어딘가 애처로운 손길로 창문을 짚었다. 절벽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 나뭇가지 하나에 의지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필은 창문 안쪽에 무언가 있는 것마냥 시선을 고정한 채, 멤버들이 보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돼. 빈말이 아니야. 이만한 성적을 낸 걸그룹은 전무(全無)해. 중소 기획사의, 데뷔한 지 고작 1년이 조금 지난 걸그룹으로선 최초. 아니, 역대 판매량만 따져도 너희들의 위에 있는 걸그룹은 열 손가락 안에 꼽아. 정말, 이건, 고생 많았다, 정말로…….”
성필은 냉정하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결국은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뜨렸다. 그가 밟고 선 땅으로 기쁨의 자국이 한두 방울씩 번져갔다.
“고마워, 얘들아, 열심히 했구나…….”
* * *
음방 출근길.
리카는 줄지어 선 소녀연맹 팬들에게 팬서비스를 마치곤 즐거운 표정으로 멤버들과 합류했다.
성필은 발걸음을 늦춰 리카의 옆으로 다가갔다.
“리카, 기분 어때?”
“좋아요! 아, 그거 아시나요! 데뷔 때보다 함성이 더 커졌어요!”
음방 출근길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 또한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댄 수십 명의 기자.
데뷔 때와 비교하면 환호와 관심의 크기가 다르다.
성장한 소녀연맹의 위상을 증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다 리카 네가 잘해줘서 그렇지.”
“에헤헤, 당연하죠! 아타시(저)는 입구 멤버니까요! 다들 저 때문에 입덕하는 거예요!”
“귀엽네.”
“안 귀엽다니까요?! 저는 예뻐요!”
“그래, 예쁘고.”
“선심 쓰듯이 말한다고 제가 기뻐하진 않아요!”
사실, 기쁘다.
리카는 몸이 홀가분해져서 종종걸음으로 뛰었다. 멤버들을 앞서갈 정도로 빨라지자, 백설하가 걸음을 맞추라며 리카의 뒷목을 잡았다.
리카가 시무룩해져선 다시 성필의 옆으로 돌아왔다.
“리카, 그거 기억나?”
“뭔가요. 저에게 뭘 알아내려는 건가요.”
“뭐가?”
“테레비에서 봤어요! 그런 유도심문에는 안 걸려요! 불투명한 질문으로 아타시(제)가 죄를 실토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에요!”
“너랑 나 만났을 때 기억나?”
“에? 기억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잊을 수가 없다.
리카는 그날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바닥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왜 걸으면서 눈을 감고 그래.”
“드라마에선 회상할 때 눈 감는단 말이에요…….”
리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과거를 회상했다.
“음, 그날도 오늘이랑 비슷한 날씨였어요! 춥고, 배고프고…….”
“배고파? 들어가면 샌드위치라도 사다 줄게.”
“하이(네)! 그런데 그건 왜 그러시나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그래. 너랑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 못 했거든.”
정말이다.
회귀한 당시만 해도, 성필은 담당 아이돌과 이토록 친해질 수 있으리라곤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석세스 엔터와 비슷할 줄 알았건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어찌 보면 리카가 성필의 인생을 바꿨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녀 덕분에, 성필은 처음으로 담당인 아이돌과 진실하게 교감하는 법을 배웠다. 프로듀서로서 아이돌과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말이다.
“그러네요. 벌써 3년이나 지났어요!”
그리 말한 리카는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불안함만이 그녀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불안을 담아 리카가 질문했다.
“이사님.”
“응.”
“아타시(저)는, 이사님이 저를 처음 봤을 때 기대했던 것 같은 아이돌이 됐나요?”
성필은 싱긋 웃었다.
“아니.”
“손나(그런)……!”
“그 이상이야.”
“에?”
“넌 항상 내 기대 이상이었어. 고마워, 리카. 널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 중 하나였어.”
“뭐, 뭔가요! 그런 감언이설을 들어도 조금 기쁠 뿐이라구요! 오늘 컴백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건가요!”
리카는 ‘아무리 제 긴장을 풀어주려는 목적이 있더라도 허언은 하면 안 돼요!’라며 한동안 툴툴댔다.
하지만 이내 기분을 풀곤 성필의 옷소매를 잡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저항감에, 성필은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리카가 활짝 웃었다.
“저도요!”
“응?”
“저도, 이사님을 만난 게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 중 하나였어요!”
별의 아름다움은 누군가 봐줘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별은 하늘에서 빛을 낸다. 하늘을 수놓은 빛 중, 누군가 자신을 보고 이름을 붙여주길 바라서.
자기 자신을 태우며 빛을 내는 별. 그 고통 속에서 누군가가, 성필이 자신을 찾아주었단 건 세상에 다시 없을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과 같은…… 아니, 별이 무엇인가.
태양과 비견될 만한 미소다.
그 미소를 본 성필은.
“에엑?! 이사님 또 우시나요!”
“아냐, 내가 뭘 울어. 회사에서도 운 게 아니라…….”
“남자도 울어도 된다구요! 마음껏 우세요! 제 품에 눈물을 닦으세요!”
“안 운다니까……. 난 인간 개조의 용광로, 해병대 출신이니까…….”
“해병은 울지도 않나요?!”
둘은 뒤늦게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도란도란한 대화가 문 안으로 잦아 들어갔다.
아침.
겨울을 뚫고 빛이 내리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