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25화 (225/760)

225화

“형 케이어스 안 본다면서요?”

민경섭의 물음에 성필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다시 돌아가려 해도 소녀연맹 멤버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걍, 어쩌다 보니 오게 됐네.”

무대 주변은 부산스러웠다.

소녀연맹은 무려 무대를 두 개나 사전 녹화로 찍었다. 당연히 무대마다 예산을 들여 곡 분위기에 맞춰 꾸며두었다.

그것을 해체하는 데만 꽤 시간을 잡아먹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케이어스는 소녀연맹의 무대를 해체하고 자신들의 무대를 설치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가만히 보내야만 했다.

“……형, 어쩐지 미안하지 않아요?”

“뭐가?”

“지금 저기요.”

무대 주변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KS 엔터에서 고용한 무대 스태프들이 어떻게든 일정에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으니까.

뮤직 스테이지의 구상준 PD는 초조하게 손톱을 씹으면서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에 사녹을 세 개나 땄잖아요. 심지어 전부 전용 무대로 꾸며두고…….”

“PD님이 선택하신 건데 뭘 그래.”

“하긴, 할 수 있으시니까 허락한 거겠죠.”

다행히 시간에 맞춰 무대 설비는 끝을 맺었다. 케이어스 멤버들도 오랜 기다림 끝에 리허설을 준비할 수 있었다.

“에리쨩!”

리카가 에리카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에리카는 인이어 마이크를 조정하다 말고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 눈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살랑살랑 저어주었다.

리카는 헤헤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성필을 보았다.

“에리쨩 예쁘죠!”

“리카가 더 예뻐.”

“우소(거짓말)……!”

이번 케이어스의 컴백 무대 의상은 이브닝 미니드레스가 기본 형태였다.

저마다의 개성에 맞춰 색과 장식을 달리하였는데, 아름답기도 아름답거니와 멀리서 보아도 재질의 고급스러움이 여실히 느껴졌다.

무슨 뜻이냐면, 돈을 많이 썼단 뜻이다.

‘케이어스가 치마를 입는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였는데.’

무대에 선 케이어스는 성필의 전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성필의 우울함이 더욱 진해졌다.

그때 성필은 에리카와 눈이 맞았다. 그러자 에리카가 리카에게 해주었던 것보다 작은 움직임으로 손을 흔들었다.

성필도 팔짱을 풀고 인사에 화답해주었다. 그에 백설하가 살짝 놀라서 물었다.

“이사님 방금 에리카랑 인사하신 거예요……?”

“응?”

“와, 아저씨 케이어스랑 엄청 친하네. 진저랑도 그렇더니. 저희 몰래 KS 엔터도 막 드나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몰래 드나들진 않지…….”

조아라는 ‘그럼 대놓고는 가고요?’라고 성필을 놀리려다 그만두었다.

소녀연맹의 요청으로 사녹 무대를 보러 왔는데, 자꾸만 케이어스의 팬이란 이유로 성필을 몰아세우는 건 좋지 않았으니까.

“30초 전!”

구상준 PD의 외침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케이어스 멤버들도 진지한 눈빛으로 돌아와 시작 포지션을 잡았다.

몇 초 후, 곡의 시작을 알리는 강렬한 신스 베이스가 울려 퍼졌다.

[I’m in…….]

그때 갑자기 노래가 확 꺼졌다.

가사를 뱉던 진저는 당황한 채 엉거주춤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죄송합니다! 음향 문제입니다!”

사소한 사고였다.

케이어스 멤버들은 떨떠름하게 웃으면서 다시 포지션을 다듬었다. 사소한 일이지만, 소녀연맹과 성필은 특별한 점을 발견했다.

“여기 시작 부분 라이브로 하는 거였구나.”

립싱크가 아니었다.

진저는 음악이 꺼지자마자 노래를 멈추었고, 자연스럽게 보컬도 사라졌었다. AR을 썼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녹인데도 라이브로…….”

사전 녹화 무대란 최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대도 뮤비나 곡 컨셉에 맞춰서 화려하게 꾸며두고, 카메라 앵글도 생방송보다 훨씬 공을 들인다.

그런 사전 녹화 무대에서, 케이어스는 라이브를 택한 것이다. 라이브로도 음원에 필적하는 최상의 상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우리도 했잖아. 뭘 놀라고 그래.”

신아름의 말에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케이어스의 컴백 타이틀곡인 ‘가이아’의 도입부는 진저가 맡았다. 그 보컬은 금속성의 빛을 띠며 매우 낮아, 도저히 진저의 목에서 나왔다곤 믿기 힘들었다.

그래서 멤버들끼리 100% 기계로 만졌을 거란 얘기를 하곤 했는데, 라이브로도 낼 수 있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진저의 보컬은.”

백설하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런 보컬을 쓰는 건 도입부가 전부지만 연습을 많이 했을 거야. 두성이랑 허스키한 보이스를 결합하고, 음정을 상하로 떠는 연습을 계속해야 하니까. 그냥 노래를 잘한다고 구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저토록 개성 강한 보컬은 디렉팅을 받는다고 바로 가능한 게 아니다.

진저는 이 곡의 최초 도입부, 고작 몇 초를 위해서 매일 목이 쉬도록 연습했을 것이다.

“음원으로 들었을 때는 설마 했는데…… 정말 라이브로도 할 수 있었구나.”

“진저는 보컬 역량이 가장 떨어졌었으니까. 아예 개성을 가지는 쪽으로 발전하려는 모양이야.”

성필의 설명에 백설하가 동의했다. 그리고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사님?”

성필의 목소리도 방금 진저의 것처럼 상하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뭔, 아저씨 벌써 울어요?”

“감동해서 그래.”

“진저한테요?”

“너희들한테. 우리 앨범 판매량 갑자기 떠올랐어.”

12만 장.

소녀연맹이 이룬 업적은 평범한 걸그룹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케이어스를 따라잡겠다는 공상에 가까운 목표를 갈고 닦아온 그녀들이다.

다들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소녀연맹 멤버들조차 스스로를 의심했었다.

“봐. 케이어스를 따라잡았잖아. 같은 선에 선 거야.”

“……그러게요.”

조아라는 아까부터 케이어스를 마주한단 이유로 신경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성필의 칭찬에 날카로운 기세가 온데간데없이 신나선 말했다.

“야 신아름, 우리 이번에는 음방 1위 따겠지?”

“당연하지. 앨범을 이만큼이나 팔았는데 못 받는 게 이상하지. 지금 워터 멜론에서는 보자…… 20위권에 안착했고. 다른 음원 사이트에서도 10위권 내로 들어왔잖아.”

‘아라베스크’만이 아니라 ‘보라색 튤립’도 동반 상승하고 있었다.

더블 타이틀을 출시하면 화력이 부족하여 애매한 순위에서 머무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소녀연맹의 두 타이틀곡은 비행기의 양 날개처럼 함께 나아가는 중이다.

“이건 음방 1위 꼭 하지.”

“오늘도?”

신아름이 픽 웃었다.

“오늘? 야, 당연히 하지! 우리가 케이어스보다 음원 순위는 낮긴 한데…… 케이어스는 아직 초동 판매량도 다 안 잡혔잖아.”

케이어스는 무슨 자신감인지 앨범 사전 예약도 받지 않았다.

음방 1위를 정하는 기준 중 하나인 앨범 지수에서만큼은 소녀연맹이 크게 앞서나가고 있다.

“다시 갈게요!”

구상준 PD가 외치고 곡이 흘러나왔다.

신아름이 조아라와 어깨동무했다. 평소에는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었건만, 오늘은 십년지기 친구와 같은 따스함이 둘 사이에서 흘렀다.

“편하게 보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리카만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리카는 조바심 나는 눈초리로 자꾸만 성필을 흘겼다. 그녀에게는 성필이 다르게 보였다.

방금 그의 목소리가 떨렸던 이유는 소녀연맹의 앨범 판매량이 떠올라서가 아닌 것만 같았다.

[I’m in…….]

진저가 도입부를 노래하고.

[……the Gaia.]

케이어스의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그것을 보는 성필의 심장은 폭풍 아래의 배처럼 출렁거리기를 반복했다.

음, 이번 케이어스의 컴백곡은 이렇구나.

퍼포먼스의 화려함보다는 바이브에 집중했네.

확실히 의상 자체가 격한 춤에 어울리지는 않아. 하지만 곡의 분위기에는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멤버마다 피어싱이나 초커로 개성적인 포인트를 준 것도 좋고.

네 명만 무대에 섰는데도 전혀 공백이 보이지 않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불러.

케이어스네. 케이어스가 맞아.

맞는데…….

“이사님.”

개미가 말했나 싶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와 함께, 리카가 성필의 손을 살짝 쥐었다.

리카는 성필을 부른 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케이어스의 무대만 바라보았다.

손을 잡은 힘은 약했으나 온기는 그대로 전해지는 중이었다. 그 온기가 출렁거리던 성필의 심장을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리카는 마치 용기를 주려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성필의 감정을 아는 듯했다.

“…….”

성필은 마찬가지로 리카의 손을 살짝 쥐고, 용기를 내어 케이어스의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전생과는 전혀 다른 퍼포먼스를 들고나온 케이어스다.

케이어스의 첫 번째 컴백곡은 성필이 가장 좋아했던 것이었다.

회귀하기 전까지도 가장 자주 들었던 곡이며, 언제나 용기를 주었던 곡인데, 이제는 들을 수가 없다. 아마도 영원히.

게다가…….

‘팬들은 제가 얼마나 아파하든 관심도 없슴미다. 무대에서 멋진 모습만 보여주길 바랄 뿐이지.’

진저가 했던 말.

‘적어도 동등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무대에 오른 거면 몰라! 당신 매니저잖아!’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가 했던 말.

‘목표 없이 나아가는 삶을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저는 지금이 그래요. 아니, 평생을 그래왔어요. 저한텐 아이돌이란 것도 꿈이라기보다, 남들이 다니니까 다니는 직장 같은 거라서요.’

프랑스 촬영 마지막 날, 파리의 숙소 옥상에서 에리카에게 들었던 말.

‘소유 언니요? 소유 언니한테 관심 있으세요? ……이건 이사님한테만 드리는 말씀인데. 소유 언니가 저한테 집안에서 학대…….’

장하양에게 전해 들었던 진소유의 말.

그 모든 것들이 성필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성필이 전생에 보았던 케이어스에 대한 기억 주위로 이번 생의 기억들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현생의 기억이 전생의 기억과 결합됐다.

‘그렇구나.’

성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케이어스는 달랐구나. 달라졌구나.’

케이어스에 대한 팬심은 전생과 현생을 이어주는 고리와 같았다.

전생과 무엇 하나 같은 것 없는 환경에서, 성필에게 남겨진 정체성은 아이돌에 대한 사랑과 케이어스에 대한 팬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케이어스는 변해버렸다. 아니, 변한 건 케이어스를 바라보는 성필의 위치였다.

‘멤버들의 성격도 내가 보던 것과 달랐고, 무엇보다 곡이 달라. 그룹의 정체성 자체가 바뀐 거나 마찬가지야.’

케이어스는 전생과 같은 행보를 걷지 않을 것이다. 성필이 알던 미래와는 전혀 다른 그룹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케이어스를 향한 성필의 애정은 7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선 그 애정은 같아도 대상의 본질이 바뀌었다. 그렇기에 애정도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카.”

“하이(네)?”

이 순간 성필은 여실히 느꼈다.

케이어스에게 주고 있던 애정과 케이어스를 쫓겠다는 목표가 뙤약볕에 둔 아이스크림처럼 녹기 시작했단 것을.

그 애정은 소녀연맹에게로 옮겨졌고, 눈앞에 두었던 케이어스란 존재에게서도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성필의 앞에는 이제 소녀연맹뿐이다.

“역시, 너희 무대가 훨씬 멋져.”

성필은 리카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리카는 손이 아플 법도 하건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받아주었다.

곡이 끝날 때까지 둘은 손을 잡고 있었다.

* * *

소녀연맹의 컴백 무대가 끝난 뒤,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은 소소한 평가회를 개최했다.

사장인 홍규헌과 임원들, 그리고 임원이나 마찬가지인 매니지먼트 팀장 민경섭. 또한 A&R팀의 정지음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엘릭 씨는?”

“여자친구분 만나러 가셨대요.”

“그렇구만.”

홍규헌은 어쩐지 배신당했단 분위기의 정지음을 내버려 둔 채 손가락을 튕겼다.

튕겨진 손가락은 성필을 가리켰다.

“메인 프로듀서 박 이사.”

“하잇(넵)!”

“결과 발표.”

“와카리마시타(알겠습니다)!”

성필이 빳빳한 서류를 손에 쥐었다.

“지금 ‘아라베스크’ 뮤비가 공개된 지 거의 24시간이 다 됐습니다. 조회 수는 무려…….”

500만 이상!

“‘롱 포’보다 확연히 상승 추이가 높아요! 이 정도면 일주일 만에 2,000만을 넘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일주일 만에 2,000만이란 수치는 중소 걸그룹에게는 꿈과 같은 것이다.

어지간히 화제가 되지 않고서야 도달할 수 없는 문턱이니 말이다.

“그런데 소녀연맹은 어지간히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꿈이 아닐 거 같단 생각이 드네요. ‘보라색 튤립’도 ‘아라베스크’와 비슷한 상승세를 공유하고 있어요.”

이건 가로 엔터에서도 예측하지 못했다. 더블 타이틀이란 이름이 붙었어도, 일단 가로 엔터가 밀어주었던 건 ‘아라베스크’였다.

컨셉 포토도 ‘아라베스크’를 먼저 공개한 데다가, 컴백 무대의 첫 번째 곡도 ‘아라베스크’였었다.

‘아라베스크’의 성적이 더 좋은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예, ‘아라베스크’가 반응이 더 오긴 하는데 ‘보라색 튤립’도 비슷해요. 현재 뮤비 조회 수는 300만 정도예요. ‘롱 포’랑 비견될 수치죠.”

심지어 음원 성적은 ‘보라색 튤립’이 앞서나간 경우도 심심치 않다.

“아라베스크는 팬덤 내에서 더 큰 호응을 얻는다는 거지?”

“네. 아무래도 소녀연맹 서사의 마지막이니 팬들은 감회가 남다르겠죠. 하지만 대중들이 듣기에는…….”

“보라색 튤립이 더 괜찮다는 거고.”

특유의 감미롭고 듣기 편한 사운드가 강점이 되어 어필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보라색 튤립을 인민이들이 반기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손혜빈은 본인이 직접 수집한 댓글들을 쭉 읽어 내려갔다.

주로 소녀연맹의 새로운 면을 보아서 좋았단 내용들이었다.

‘보라색 튤립’의 뮤비와 무대 의상은 하이틴의 느낌을 내려고 했다. 지금껏 소녀연맹이 보여준 적 없던 여성적인 느낌을 한껏 살려서 말이다.

“아무래도 ‘아라베스크’랑 대비가 돼서 더 좋아하는 거 같아요.”

“그러게. 아라베스크는 여기저기 많이 가렸었으니까.”

아라베스크의 컴백 무대 복장은 어바이비에서 협찬받은 옷들을 수선한 것이었다.

주로 락시크나 힙합 쪽 느낌이 나도록 했다. 락과 힙합이야말로 현대에서 저항의 상징 아니던가.

그런 고로, 아라베스크에서 소녀연맹은 상의에 박시한 옷을 주로 코디했다.

“근데 저는 좀 아쉬워요.”

민경섭이 작게 불만을 표했다.

“그거 있잖아요, 원래 아라베스크 컴백 때 입으려고 했던 옷이요.”

이유이 스타일리스트는 튜튜(발레복의 종류)를 모티프로 하여 아라베스크의 의상을 만들려 했다.

다리는 새하얗거나 검은 스타킹으로 감싸고 허리에 치마의 느낌을 주도록 천이나 재킷을 감는다.

그리고 상의에는 이번 컴백 무대와 같은 박시한 옷을 입히는 것이다.

아라베스크라는 이름에도 걸맞게 발레복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지만…….

“그걸로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민 매니저. 그 옷은 애들이 싫어했잖아. 특히 조아라가.”

원래 기획했던 의상은 다리에 걸친 게 발레타이즈뿐이라, 멤버들은 그것을 입자마자 학을 떼면서 못 입겠단 말을 해왔었다.

특히 조아라가 싫어했었다.

발레리나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이런 바람 숭숭 들어오는 것만 걸치고 춤을 추냐면서 말이다.

“근데 좀 이상하네요. 춤출 때 레깅스는 자주 입으면서 타이즈는 싫다니. 손 이사님, 둘이 달라요?”

“나중에 발레타이즈 입어보면 말해줄게.”

민경섭은 여전히 발레타이즈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듯했다.

“아무튼 곡 반응은 그렇고요.”

성필은 설명을 이어갔다.

“공식 스타그래프 계정 팔로워 수도 하루 만에 1만 명이 늘었어요. 컴백 프로모션 기간에도 하루에 2,000명 정도씩 늘긴 했는데, 확 뜬 수치죠.”

이로써 소녀연맹의 스타그래프 팔로워 수는 70만 명을 돌파하게 됐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소녀연맹이 SNS에 어떤 글을 올리면 수십만 명이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자, 이 정도가 앨범, 음원, SNS 관련 성적입니다. 종합하자면 저희 회사 규모로는 꿈도 못 꿀 정도의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돈을 넣은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요.”

이미 오늘 새벽, 음방에 가기 전에 미친 것처럼 박수와 환호성을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임직원들은 같은 일을 반복했다.

“대성공입니다!”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함성을 내지르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한구인은 재빨리 자신의 앞에 놓인 재무 관련 자료를 품에 안고 몇 걸음 물러났다.

그것을 손혜빈이 발견했다. 그녀는 한구인의 손목을 억지로 잡고 중앙으로 불러와 춤을 추게 만들었다.

약 40초 정도 광란의 시간이 지나간 뒤, 다들 숨을 헐떡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리에 앉았다.

“그럼 제 차례입니다.”

재무 자료를 지켜낸 한구인은 목청을 가다듬고 준비한 서류에 눈길을 주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구인에게 박혔다.

“이번 소녀연맹 분들의 컴백, Girls’ Union으로 얻어낸 수익. 그 수익으로.”

한구인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모두와 눈을 맞추었다.

“제작비를 만회하지 못합니다.”

“…….”

“그렇게 됐습니다. 제 예상이지만, 앞으로도 앨범이 큰 폭으로는 팔리지는 않을 겁니다. 사전 예약 기간이 무려 한 달이 넘었으니까 말입니다. 12만 장이란 수치도 앨범 버전이 다섯 개인데다가, 온갖 사전 예약 이벤트 덕분일 겁니다. 활동 기간이 4주쯤 접어들었을 때야 2, 3만 장 정도 더 팔 수 있을까요. 이것도 희망적인 관측입니다. 아무튼, 앨범만으로 제작비 회수는 불가능합니다.”

“……30억을 벌었는데요?”

“그 절반이 앨범 패키지를 만드는 데 들인 돈입니다. 유통사, 소녀연맹 멤버분들, 가로 엔터, 엘릭 씨, 여타 음반 제작 프로세스에 관여된 분들, 뮤직비디오, 30명에 이르는 백댄서분들의 인건비와 의상비 등등. 저희는 정말 돈을 물처럼 썼습니다. 대형기획사처럼 제작 프로세스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야 30억이란 돈은 매우 크지만 제작비를 회수할 정도는 아닙니다.”

홍규헌이 말라비틀어진 버섯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래, 그렇지, 예상하긴 했어…….”

정규 앨범이란 이름값에 걸맞은 결과물을 내려고 했다. 그런 만큼 돈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앨범은 한 장인데 그 내용물 안에는 15곡이 들어있다. 만약 그 15곡을 따로따로 출시했더라면 수익적으로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요즘 아이돌은 디지털 싱글만 발매하여 인지도를 얻은 후, 그 인지도를 바탕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앨범 볼륨을 늘려도 수익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아, 싱글 위주의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듣는 건 타이틀곡이니까.

“매출은 기대를 한참 상회하는 거였지만, 결국은 이런 거지. 뭐어, 아이돌이란 게 원래 이렇잖아. 수익을 낼 부분은 아직도 많지…….”

그래, 수익을 낼 부분은 아직도 많다.

아직 소녀연맹의 컴백 1일 차일 뿐이다.

홍규헌은 아까의 움츠러든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매출 30억이란 건 엄청난 성과야. 아니, 4월의 미니 앨범과 합치면 우리의 매출은 40억을 넘어. 그리고 연간 매출이 40억을 넘는 걸그룹을 보유했단 뜻은…….”

회사의 가치는 100억을 넘는단 뜻이다. 아니, 100억이 무엇인가. 그 이상으로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도 있다.

과거 대형기획사에서 연 매출 50억의 걸그룹이 속한 회사를 200억으로 인수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가로 엔터에도 그와 비슷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이번 정규 앨범의 성과는 소녀연맹의 가능성을 보여줬단 거야. 우리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야. 이걸 바탕으로 더 나아갈 수 있어. 한 이사, 그렇지?”

“예. 가로 엔터의 기업 가치는 무궁무진하게 커질 수 있습니다. 매출 40억 이상, 심지어 그건…….”

오로지 음반 매출이다.

현재 음원 차트로서 유추하자면, 앞으로 한두 달 뒤에는 음원 매출도 억 단위까지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음반과 음원이 아이돌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해야 25% 정도다.

“아직 저희는 삼신기를 다 안 썼어요.”

제작비를 만회하지 못했단 말에 충격을 받았던 성필도 희망적 관측에 참여했다.

“기획사는 음반으로만 돈을 버는 게 아니잖아요. 삼신기 중 나머지인 공연과 굿즈가 남았어요. 저희는 공연과 굿즈 없이도 이만한 성적을 낸 거예요. 심지어…….”

앨범 팔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걸그룹에서 12만 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즉, 저희는 올해 가로 엔터의 역량을 증명함과 동시에 자금줄을 획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볼륨보다 퀄리티에 집중하고 회사의 내실을 다질 때죠.”

“박 이사 갑자기 들떴네.”

“아니, 방금은 30억 벌고도 제작비 회수 못 했단 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나도 그랬어.”

올해 소녀연맹의 1년은 부상을 신경 쓰지 않고 전력으로 들이박은 것이었다.

세상에게 자기 자신을 광고하던 때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당장 계획되어 있는 일본 데뷔와 해외 투어, 그리고 이후의 활동에선 수익을 기대해도 될 거예요. 흔히 아이돌은 데뷔 3년 차에 수익으로 전환된다고들 하니까요.”

회의실이 다시 열기로 가득 찼다.

성필은 그 열기를 받아서 말로써 표현했다.

“이번엔 정규 앨범 볼륨 채우고 뮤비를 두 개나 공들이느라 제작비가 훨씬 많이 나왔어요. 하지만 앞으로의 방향은 달라질 겁니다. 이 자리에서 처음 말씀드리는 건데…… 메인 프로듀서로서의 제 계획은 이래요.”

성필은 좌중을 둘러본 뒤 무겁게 말했다.

“연속으로 싱글을 다섯 개 발매합니다.”

“싱글만?”

“네. 아직 정확한 구상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앞으로도 계속 논의해봐야 할 거 같아요.”

앞으로 성필은 다섯 개의 싱글을 순차적으로, 컴백의 공백을 줄여가면서 지속적으로 소녀연맹을 노출할 생각이었다.

미니 앨범 1집 때는 포함된 곡이 다섯 개였다. 그것과 성필이 방금 한 말을 비교하면, 소녀연맹의 전략은 커다란 변혁을 맞는 것이다.

“프로젝트명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으로 생각해두고 있어요.”

“잠깐만요 형. 아니, 박 이사님.”

정지음이 놀라서 성필에게 물었다.

“애들한테 프로듀싱을 맡기려는 거예요?”

“역시 프로젝트 이름만으로도 감이 오지?”

“진심이에요?”

“진심이지.”

“지금도 충분한데 어떡하시려고…….”

성필의 기행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번 제안에는 다들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자기 앞가림도 잘하지 못하는 애들에게 온전히 프로듀싱 권한을 주기라도 하려는 속셈인가?

“아마 프로젝트가 완료될 때까지는 2년 정도가 걸릴 거야. 이번 프로젝트로, 나는 애들한테 ‘거절 받는 경험’을 가르쳐주고 싶어.”

“거절 받는 경험이요?”

“아티스트로서의 안목을 기르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일단 내년 일본 데뷔랑 콘서트 투어가 완료되어야겠지만.”

일단 그건 이 자리에서 상세히 말할 주제는 아니다.

단지, 프로듀서로서 모두와 함께 소녀연맹의 다음 지향점을 대강이라도 공유하고 싶었다.

괜히 내년을 보내면서 예상외의 거대한 성공으로 멈칫하지 않고, 꾸준하게 미래를 그려 나가길 바랐다.

“뭐어…….”

홍규헌은 성과 발표회를 마무리하려는 듯 주변의 이목을 모았다.

벌써 달이 꽤 많이 기울었다.

다들 어젯밤부터 자지도 못하고 계속 회사에 있었으니, 최소한의 휴식이라도 보장해주어야 한다.

“결론은, 이번 컴백은 이미 충분히 승리라고 불러도 된단 거네. 탄탄대로가 깔린 정도는 아니지만, 순항할 수 있는 정도란 거고. ……아니다.”

홍규헌은 억지로 붙들고 있던 목줄을 놓듯이 시원하게 웃었다.

항상 보수적으로만 상황을 파악하던 홍규헌도 이번 성과만큼은 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면 탄탄대로지. 감이 안 올 수도 있지만 우린 활주로에 오른 거야. 이제 날 일만 남았어. 다들, 정말 고생 많았다.”

회의실의 모두가 홍규헌의 치하에 감동했지만, 성필은 감회가 남달랐다.

항상 불안한 미래만 그렸던 홍규헌이 이토록 시원하게 성공을 인정하다니. 컴백 전날 벽에 머리를 딱따구리처럼 박던 게 다 꿈만 같다.

“그럼 이제 더 논의할 거 없지?”

그 질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연맹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강한 각성제이지만, 수십 시간이나 제대로 된 수면을 못 취하고 있으니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럼 이만…….”

그때 홍규헌이 무언가 생각난 듯 성필에게 물었다.

“우리 일주일 뒤에 HPT 뮤직 어워드 나가는 거지? 그건 논의되고 있어? 내가 놓친 건가, 아직 보고가 안 올라온 거 같아서.”

“아, 그거요.”

성필이 훈훈한 분위기에 맞지 않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일단 무대는 ‘롱 포’로 가는 걸로 가닥이 잡히긴 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요.”

“갑자기 ‘롱 포’가 왜 나와?”

“그게…….”

* * *

유용태는 소녀연맹의 음방 생방송을 챙겨본 후, 뮤비와 직캠을 수십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포근한 침대에 몸을 맡기니, 종일 보았던 소녀연맹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내일도 열심히 일하자. 앨범은 언제 도착하려나. 물량이 없다면서 배송이 밀린다던데. 내일은 왔으면 좋겠…….’

그때 유용태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친구인가? 아니면 직장 동료인가? 어느 쪽이든 야밤에는 반갑지 않다.

“여보세요.”

[오빠!]

“……채현이?”

소녀연맹의 여러 행사에서 만나 친목을 다졌던 고등학생, 김채현이었다.

[오빠 투표했어요?]

“어? 무슨 투표?”

[HPT 뮤직 어워드요! 톡으로 투표 참여 방법 올려놨잖아요!]

“아…… 나 회사 톡 아니면 웬만해선 다 무음으로 해두…….”

[이럴 줄 알았어. 빨리해요. 최대한 빨리 많이 해야 해요.]

유용태는 짜증이 치밀었다.

밤에 전화를 받은 것도 기분이 안 좋은데, 한참이나 어린 김채현의 채근을 듣고 있자니 참기가 힘들었다.

“채현아. 이런 밤에 전화해놓고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

[우리 소련이들 시상식에 못 나갈 수도 있다구요!]

“뭐?!”

유용태가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켰다.

“왜, 왜 갑자기?”

[소련이들이 앨범을 연말에 냈잖아요. 그래서 Girls’ Union 앨범으로 상 주고 시상식 무대에 세우려면 오늘부터 투표해야 해요. 일정 득표수 못 넘으면 후보에 못 오르고 무대에도 못 서요.]

“그으, 그럼 표 못 모으면 소련이들 아라베스크나 보라색 튤립이 아니라 ‘롱 포’로 무대에 서는 거야?”

[네.]

그건 큰일이다.

소녀연맹의 정규 1집은 역대급 성적을 냈다. 음원 차트와 뮤비 조회 수에서도 순항 중이고, 그 화룡점정은 연말의 시상식들이 될 예정이다.

그런데 정작 시상식에 올려지는 곡이 정규 앨범의 것이 아니라, 4월에 발매했던 ‘롱 포’라고?

사태의 심각성이 확 와닿는다.

“표라는 게 얼마나 필요한데?”

[어…… 몇십만 표는 필요할걸요?]

“그걸 며칠 만에 어떻게 모아?!”

[괜찮아요, 계정 여러 개 만들어서 중복 투표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여러 사이트 이벤트 참여하면 표도 줘요. 저도 오늘 학교에서 계속 폰 만지면서 표 모았거든요? 오빠도 오늘부터 해주세요! 알겠죠?]

“…….”

[우리 소련이들 이번에는 시상식 무대도 주고 상도 줘야죠!]

며칠 만에 수십만 표를 투표해야 한다고?

그래야 최애인 신아름이, 소녀연맹이 정규 앨범 타이틀로 무대에 설 수 있어?

“돌겠네 씨……!”

유용태는 이불을 털고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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