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28화 (228/760)

228화

“막내야 아직 멀었어?”

“하, 하고 있습니다. 그게, 이게…….”

나석문 PD가 막내를 독촉하는 것도 벌써 10번을 넘었다.

막내 PD는 영어로 적힌 설명서를 읽으면서 서라운드 스피커를 설치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의 뒤로는 의자에 앉은 선배들이 쭉 포진해 있었다.

“곧 방송 시작하는데…….”

나석문의 불평에 막내는 욕설을 꾹 삼켰다.

‘그럼 네가 해보던가!’

곧 ‘음악을 위한 동행’의 실시간 방영이 시작된다. 그리고 막내는 그때까지 서라운드 스피커의 설치를 마쳐야만 한다.

나석문이 총무과에 수개월 동안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모니터링 업무’라는 핑계를 대서 구해낸 수백만 원 상당의 물건이었다.

‘오늘 방송은 꼭 이 스피커로 듣고 싶어.’

나석문과 그 동료 PD들은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하지만 그런다고 설치가 더 빨리 될 일은 없었다.

결국 소소하게 잡담이나 나누기로 했다.

“이번에 시청률 3% 넘으면 좋겠다. 그렇죠 PD님?”

“그러게. 저번에 욕 뒤지라고 처먹었으니까…….”

‘음악을 위한 동행’ 4회는 엄청난 홍역에 시달렸다.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이 장장 며칠에 걸쳐 불탔으니, 그것을 지켜보는 나석문의 심장 또한 타들어 갔었다.

이유는 나석문의 편집 때문이었다.

“그건 PD님 잘못이죠. 버스킹 딱 시작되기 직전에 끊으시면 어떡해요.”

3회의 예고편에서 뮤지션들의 버스킹 라이브를 보여줄 것처럼 광고했으면서, 4회 마지막 부분에서 절묘하게 끊어버린 것이다.

시청자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시청률 뽑아먹으려고 개짓거리한다면서 말이다.

“아니, 어쩔 수 없잖아…….”

나석문은 억울했다. 절대 시청률을 뽑아먹으려고 개짓거리를 한 게 아니니 말이다.

그저, 백설하와 에리카가 나오는 부분을 너무 늘렸기 때문이었다.

“둘이 너무 귀여운데…….”

저 모습만은 꼭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어 올랐었다.

아름다운 소녀(23세) 백설하와 마찬가지로 고아한 소녀(20세) 에리카가 보여주는 케미는 나석문의 심장을 크게 울렸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서로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면서 음악을 만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가.

“편애 아니에요?”

“편애라고 하면 할 말은 없네.”

“가로 엔터한테 접대…….”

“안 받았어!”

단지, 생일에 성필에게서 기프티콘을 받은 게 전부였다. 덕분에 난생처음 아이스크림 케이크란 것도 먹어보았다.

“서, 설치 끝났어요!”

“오오, 막내 잘했다! 빨리 너도 와서 봐!”

막내는 기쁜 미소를 내걸면서 스탭들이 모여선 자리로 왔다.

말 그대로 자리로만 왔다. 그를 위해 준비된 의자는 없었다.

‘망할…….’

언제 막내 신세를 탈출할까?

그때, 나석문이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빼며 소파의 빈자리를 두드렸다.

“막내 여기 앉아. 고생했으니까 좋은 자리에서 봐야지.”

‘망할이라고 했던 거 사과드립니다 PD님.’

마침내 ‘음악을 위한 동행’의 5회가 방영되었다. 이전 회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소개되고, 뮤지션들이 버스킹을 위해 세션을 점검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석문은 죄책감을 가지고 그것을 보았다.

‘박 이사님한테도 못 할 짓이었네.’

백설하의 라이브가 선보여지는 건 4회였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녀연맹의 컴백이 딱 4회차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케이어스도 마찬가지다.

‘설하 라이브 방영됐으면 엄청 화제가 됐을 텐데. 그러면 소녀연맹 판매량도 더 올랐을 거고…….’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건 나석문의 실수였다. 다시금 생각하니, 백설하와 에리카의 케미를 조금 빼더라도 시점을 맞추는 게 낫지 않았나 싶다.

‘아냐,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까. 그나마 오늘 방송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싶네.’

백설하와 에리카의 버스킹은 가장 마지막 차례로 편성했다.

그 이전에는 선배 뮤지션들의 무대다.

록커 신홍인이나 발라더 박영모 등,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본인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와, 이 스피커 미쳤다. 수백만 원짜리라 그런지 값을 하네요.”

“그러게요. 진짜 현장에서 듣는 거 같아요.”

“우리가 녹음을 잘한 것도 있지. 음향 고생했어.”

왠지 모르지만 막내는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뿌듯하게 웃었다.

스피커 설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더니, 자신과 스피커를 일심동체로 여기게 된 모양이다.

“순간 시청률 3% 돌파했어요! 3.5%!”

“내일 회식이다!”

“해냈어요! 우리가 해냈어!”

나석문도 동료들과 기쁨을 공유했다.

사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명성 있는 뮤지션을 죄다 끌어모았으니 시청률이 낮게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최근 시즌제 예능은 어지간한 유명 예능인을 쓰지 않는 이상, 시청률을 2%만 뚫어도 잘한 취급을 받는다.

점점 텔레비전 시청률은 낮아지는 추세다. 그런데도 ‘음악을 위한 동행’이 3%의 벽을 넘었단 것은 엄청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PD님이 이거 시즌2 무조건 만들라고 하겠어요! 국장님이 다음엔 제작비 많이 줄지도 몰라요!”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가 부르고 싶은 사람 다 부를 수 있겠어.”

흥분된 분위기 속 백설하와 에리카의 차례가 왔다.

“시청률 4% 넘었어요!”

“와, 이거 평균 시청률 3%도 넘어가는 거 아니야? 시작할 때가 2% 살짝 아래였으니…….”

“올해 연말은 배부르게 보내겠네요. 보너스 많이 받겠다!”

왁자지껄했던 공기는 점차 식어가다 진지한 분위기를 띠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무대는 백설하다. 다들 말은 안 했으나, 백설하의 무대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프랑스에서의 전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백설하의 라이브가 시작됐다.

“…….”

수백만 원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백설하의 보컬. 그것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듣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고난도의 기교다. 거기에 노래에 담긴 감정은 인간의 심장을 쓰라릴 정도로 찔러왔다.

아무런 맥락 없이 노래만 들어도 감동을 줄 수 있을 만한, 보컬리스트의 정점에 가까운 힘이다.

하지만.

“뭔가, 덜하네요.”

프랑스의 촬영 현장에서 들었던 것보다 못하다.

그 자리에 있던 나석문은 백설하의 노래를 듣곤 눈물마저 흘렸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속에서 나오는 백설하의 노래에는 그만한 힘이 없었다.

‘뭐, 이럴 수밖에 없지. 원래 이런 거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아우라’라는 게 있다. 아우라는 일상적이고 간접적인 매체에선 느낄 수 없다.

음향, 영상 기술이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아우라를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즉, 백설하의 라이브를 직접 듣지 않는 이상 나석문은 그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왠지 김새네요. 원래 이랬나?”

“그땐 설하한테 공감하고 있었어서 그런가.”

“그렇지. 어머니가 다쳤는데도 이 정도 라이브를 했으니까.”

물론 텔레비전 속 백설하의 무대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실망했다는 투였다.

그런 이들의 사이에서 나석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우리는 이미 설하의 아우라를 체험했으니, 스피커를 투과하는 보컬 따위 밋밋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하지만 시청자들에게는 텔레비전 속의 백설하가 전부이다. 그 이상이라는 기준이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시청자들은 느끼게 될 것이다.

백설하의 보컬은…….

“피, PD님.”

시청률을 확인하던 작가가 목소리를 떨었다.

백설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작가는 흔들리는 손길로 핸드폰 화면을 동료들에게 보여주었다.

“지, 지금 시청률…… 오, 5% 돌파했어요…….”

* * *

정호환은 에리카와 나란히 걷던 중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걸어가는 에리카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운동화에 트레이닝복이라는 실로 간편한 차림임에도, 에리카에게는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과 같은 아우라가 있었다.

그녀의 발끝마다 빛이 난반사되어 사방을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정 이사님?”

에리카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돌아보았다. 정호환은 푸근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에리카, 일부러 그러는 거냐?”

“뭐가요?”

“그냥 걸을 때도 모델 같아.”

에리카는 물음표를 띄우면서 몇 걸음 걸었다. 걷는 데 의식을 집중한 그녀는 아 소리와 함께 배시시 웃었다.

“옛날에 포징이랑 워킹 배웠잖아요. 그거 습관이 남아 있나 봐요.”

“보통 모델도 일상생활에서 워킹을 그렇게 하지는 않아. 힘드니까.”

“그런가요?”

아마도, 에리카는 천성부터가 타인에게 자신을 보여주려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가장 아름답게 보일지 안다. 비록 누구도 보고 있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최선의 자신을 드러낸다.

“딱히 힘들진 않은데요.”

‘그런 네 모습 때문에 너를 리더로 꼽은 거란다.’

케이어스의 데뷔조를 뽑을 때, 에리카는 김민주보다 순위가 낮았었다.

신인개발팀 대부분은 김민주를 리더로 꼽았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김민주는 한국인이면서 실력도 가장 뛰어났다.

리더는 김민주가 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정호환은 모든 반대를 쳐내면서 기어코 에리카를 리더로 올려놓았다. 에리카의 리더십을 높게 치기도 했었지만, 주요한 이유는 달랐다.

‘민주는 의식적으로 승리를 추구해.’

하지만 에리카는 무의식적으로 승리한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다.

‘에리카에게는 피로가 없어.’

승리를 향한 압박감.

노력에 대한 탈력감.

언젠가 연차가 쌓여 찾아올 거대한 압박을, 에리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릴 것이다. 아니, 그녀는 압박 따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돌 생활을 계속하는 한 무의식 속에서 성장을 거듭해내겠지. 그리고 결국엔 실력마저도 김민주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시작하자.”

4층의 아티스트 작업실 중 하나.

에리카는 정호환에게 직접 작곡을 배웠다.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히트 메이커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다.

한국의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할 사치였다.

“오늘은 편곡을 더 파고들자. 내가 곡을 준비해왔다. 먼저 악기의 종류와 배열을 파악하고…….”

그때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도 덜컥 들어왔다.

에리카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그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구유한 이사님.”

“어, 에리카. 연습 중이었나 보구나.”

“네.”

“정 이사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업무 중이잖습니까.”

정호환은 구유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앉으라는 듯 에리카에게 눈짓했다.

하지만 에리카는 이도 저도 할 수가 없었다. 구유한과 정호환의 사이에 껴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에리카의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방해하지 말아주시지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말하겠습니다.”

구유한이 서류철을 정호환의 앞에 두었다.

‘두었다’는 말은 너무 온건할지도 모른다. 마스터 건반 위에 올려지는 서류철은 무례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으니, ‘던졌다’는 말이 더 올바를 것이다.

“이렇게 된 겁니다.”

정호환은 어린애라도 되는 것처럼 적나라하게 불쾌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구유한이 던진 서류철은 무시하지 않았다.

[……케이어스를 이끌어 온 원동력과 파워는 퍼포먼스에 있었다. 하지만 ‘가이아’에서의 케이어스는 특유의 고난도 퍼포먼스를 포기하고 ‘같이 땅을 딛고 선 우리들’이라는 메시지에 힘을 집중했다. 케이어스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가이아’는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임이 틀림없다.

……진저의 날카로운 보컬은 도전이라 불릴 만했다. 거기에 소유의 뻗어나가는 팔세토는 유려하게 코러스로 이어지는 가교와 같았다. 케이어스는 댄서 라인마저도 놀라울 만큼 높은 수준의 보컬 소화력이 있단 것을 알려주었다.

……약 1년의 기다림 끝에 나온 앨범으로써는 아쉬움이 있다. 메시지에 집중하고 좀 더 보컬적 기교에 다가간 도전은 높게 평가하고 싶으나, 케이어스의 잠재력과 장점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다.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단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그야말로 흠 없는 완성도. 하지만 기대했던 바는 아니다. 이는 케이어스의 개성을 드러내려 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정체성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이제 데뷔 1년 차 그룹이 쌓아 올린 한 층으로선 부족하다. 마치 탑의 비쭉 튀어나온 모서리처럼 불쾌한…….]

무미건조하고 사람 허파를 뒤집는 듯한 문체. 정호환은 이 글을 보자마자 누구의 것인지, 어디에 올라온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빌보드 글로벌 뮤직 섹션…….”

“저도 대중음악 평론가 같은 인간들은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의 평론가들도 다 비슷한 반응이더군요.”

“경영 이사가 이런 쪽도 신경 쓰나 보지요.”

“써야지요. 써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장을 보세요.”

정호환은 서류를 몇 장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는 평론 따위가 아니었다. 음원 사이트의 순위 목록이었다.

“…….”

“이미 보셨겠지만, 이게 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입니다.”

[2위 가이아 - 케이어스]

“정 이사님, 그렇게나 주변의 만류를 무시하더니 이런 결과를 내기 위해서였습니까?”

“…….”

에리카는 정호환의 손에 들린 음원 차트 순위를 보곤, 정말 드물게도 감정의 동요가 일었다.

1등이 아니다.

케이어스가 1등이 아니야.

당연하게 손을 뻗어 승리를 탐하던 에리카의 손에서 승리가 거두어졌다.

“구 이사님…….”

정호환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케이어스는 KS 엔터의 어느 그룹도 해내지 못한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데뷔 때보다 초동판매량이 2배나 올랐어요. 거의 20만 장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고작 데뷔 1년 차 아이돌이요.”

“그건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KS 엔터란 이름을 달고 나왔으면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연?”

“당연한 건 더 있습니다. 일부러 경쟁 그룹이 없도록 컴백 타이밍을 잡았습니다. 그러니 음원 차트 1위 석권도 당연하고, 출연 음방 1위 석권도 당연한 겁니다. 음원 차트에서 2위라는 건 그 당연함에 적신호가 켜졌단 뜻입니다.”

“…….”

“물론 지금은 다시 1위 자리 따위 얼마든지 내려갈 수 있겠죠. 문제는 케이어스를 제친 게 중소 기획사의…….”

“더는 안 듣겠습니다. 나가시지요.”

“…….”

구유한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작업실을 나섰다.

“자, 에리카. 다시 설명 시작한다. 편곡은…….”

에리카는 수업에 집중하는 게 힘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계속 아까의 순위가 떠돌아다녔으니 집중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당연히 1등이라 생각해서 차트 따위는 보지도 않았는데, 설마…….

‘케이어스가 뒤처졌어?’

단 한 순간이지만, 1위를 빼앗겼다.

* * *

“이 처자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30대의 성필이 40대의 흉내를 내며 멤버들에게 설명했다.

“아까 말했지만, ‘음악을 위한 동행’은 40대와 50대 시청률이 은근히 높아. 옛날부터 활동했던 뮤지션 선배님들이 나와서 그런 거 같거든. 특히 록커인 신홍인 선배님.”

대한민국 록의 전성기, 90년대.

홍대의 록씬만으로도 음악 평론이 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미디어의 영향력 없이도 전국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신홍인은 그때에도 스타였다.

현재의 30대 후반과 40대는 당시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었고, 신홍인이란 이름에 끌릴 수밖에 없다.

다른 쟁쟁한 뮤지션들도 마찬가지다. 소녀연맹으로선 아무리 발악해도 끌어당길 수 없는 장년층의 시선을, ‘음악을 위한 동행’으로 획득해냈다.

“그래서 ‘롱 포’가 현재 50위권까지 끌려져 올라오는 기현상이 벌어졌어. 워터 멜론 히트 24 차트에선 그보다 더 높아. 밴드 사운드라서 그런가 봐.”

즉, 소녀연맹은 주류 타깃층인 10대와 20대뿐 아니라 30대 이상에게도 어필하고 있다.

전부 ‘음악을 위한 동행’ 덕분이다.

“음원 차트 1위, 대단한 업적이야.”

멤버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다들 성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기대감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물론, 이번 주는 너희 컴백 첫날에 집계된 사전 예약 판매량이란 무기를 쓸 수 없어. 리셋되니까. 케이어스와의 차이가 크냐고 한다면, 그저 서로가 선 무대가 뒤바뀐 정도야. 첫 주차에 케이어스가 안고 있던 불리함을 이번에는 너희가 안았다고 생각하면 돼. 큰 리스크는 아니지. 무엇보다 너희는 음원 차트 점수에서 케이어스와 엇비슷해. 엎치락뒤치락 1위를 점령하고 근소한 우위를 띨 정도로. 하지만 그게 곧 패배를 의미하진 않아.”

소녀연맹은 줄곧 음원 차트에서 2위를 차지해왔다. 하지만 계속 2위였다고 해서, 케이어스와의 차이가 그리 큰 것일까?

어쩌면 소소한 차이 정도이지 않을까?

그래서 방송 점수, 시청자 투표 점수에서 앞서는 게 가능하진 않을까?

심지어 소녀연맹은 미디어를 통해서 인지도를 확연히 올린 시점이니, 음원 차트 1위에 투사되는 힘은 이전 주의 케이어스보다 높을지도 모른다.

“얘들아, 이번엔 기대해도 좋을 거 같아.”

멤버들은 동시에 찡한 기분을 느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5연패라는 성적에 슬픔만을 씹으면서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1등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이사님…….”

리카는 벌써 1등이라도 한 듯 비척비척 성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포옹하려는 것처럼 팔을 활짝 펼쳤다.

“감사합니다아…….”

성필은 그런 리카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붙잡아 더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면서 설명을 이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그건 오늘이야. 조금 이른 거 같지만 수상 소감도 생각해 둬. 너희들 격려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정말 가능할지도 몰라.”

“이사니이이이임…….”

“리카 넌 좀 떨어져.”

“1등하며연, 1등 하면 티셔츠 사드릴게요…….”

“티셔츠는 왜?”

“사드릴게요오…….”

“……어, 그래, 고맙다.”

음방 1위!

어찌나 달콤한 울림인가?

심지어 공중파에서 1위를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가로 엔터의 매출은 올해의 2배 이상을 기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사료는 몇 배로 뛰고 CF 섭외도 열 개 넘게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가로 엔터는 돈방석에 앉게 된다.

‘그럼 늦어도 내년 말에는 애들한테 정산을 해줄 수 있을까?’

성필은 눈물범벅이 된 리카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빨리 빚 까야 해요!’란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사는 리카…….

‘그건 힘들겠네.’

현재 멤버들에게 달린 빚은 억이란 단위가 우습다. 정산받을 날은 멀고 멀다.

“리카.”

“하이(네)!”

“메이크업 스탭분한테 가서 화장 수정받아. 포옹은 1등 하고 하자. 아직 기뻐하긴 일러.”

정산에 대해 생각하기도 이르고 말이다.

“얘들아.”

열띠게 청사진을 펼치던 성필이 진지한 투로 멤버들을 불렀다.

그의 눈에는 다섯 명의 소녀, 부족한 발판을 딛고서도 하늘을 향해 내달리는 아이돌이 보였다.

그녀들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품고, 성필이 가슴 속의 모든 희망을 끄집어내어 말했다.

“보여주고 와. 다른 아이돌 팬덤들도 너희들에게 투표할 정도로 멋진 무대를 펼치는 거야.”

“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찬 대답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멤버들은 둥실거리는 기대감을 안고 생방송 무대에 섰다.

조명 아래에 있어도 전혀 덥지 않다. 땀이 나오긴 하지만 하나도 불쾌하지 않다.

그녀들은 행복 속에서 무대를 소화했다.

‘1등 할 수 있어.’

백설하는 무대를 내려오는 길에도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등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평생 이 둥실거리는 기분을 안고 살고 싶다.

멤버들이 뭐라고 질문해도 대강 대답했으며,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예 누군가 시간을 지우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번 주의 1위는……!”

두근 두근 두근.

어느새 백설하는 몽롱한 정신으로 1위 발표 무대에 섰다.

수많은 아이돌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1위가 누구일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대결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케이어스가 이길 게 거의 확실시 되었다.

케이어스는 최소 3주 연속 모든 음방에서 1위를 따낼 게 틀림없다. 그러니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아이돌들은 기대 자체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야! 1위 할 수 있어! 오늘은 가능해!’

백설하는 두 손을 꼭 모으고 MC의 입만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입술이 천상의 팡파르가 흘러나오는 나팔이라도 되는 듯했다.

‘1위 하면 뭐하지? 우, 울면서 멤버들 껴안고. 또 무대 내려가서도 울고…… 아! 앙코르 무대 해야지! 앙코르라고 대충하면 안 돼. 무대에 내려가면 민 매니저님이랑 박 이사님이 축하해주시겠지. 아, 나는 계속 울고 있겠지? 울면서, 아…… 박 이사님한테 고맙다고 하자. 그, 그냥 고맙다고 하는 건 감흥이 없으니까 포옹이라도 해, 해야 할까? 그래, 그러는 편이 낫겠지. 마음을 전하는 거야. 1등으로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아아, 정말 힘들었어. 벌써 3년이나 지났구나. 연습생부터 시작해서 3년. 3년 만에 1위에 올랐어. 박 이사님 감사합니다. 저 앞으로도 정말 열심히 할…….’

“1위, 케이어스 축하드립니다!”

‘X미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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