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29화 (229/760)

229화

평화로운 케이어스의 숙소.

[아…… 신아름이랑 생일 때 같이 놀면 뭐하고 싶냐고요……. 으음, 생일에 만날 애가 얘뿐이면 진짜 갈 데까지 다 갔다는 느낌?]

[리얼. 나도 얼마나 만날 사람이 없으면 너 같은 애를 만나겠냐?]

“아하하하핰!”

진소유는 신아름과 김민주가 출연했던 ‘너희 친구니’를 보면서 폭소를 터뜨렸다.

‘너희 친구니’의 우효민, 신아름, 김민주 편은 시청자들에게 레전드급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보통 아이돌은 이미지 관리를 하느라 친구 사이에서도 선을 지키기 마련인데, 신아름과 김민주는 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서로의 우정을 보여주기보다 누가 누구를 더 싫어하는지 자랑하는 대회를 펼친 듯했다.

그게 오히려 시청자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평가였다.

“민주야. 너 지인짜 아름이랑 친한가 보다. 매일 스케줄 소화하고 숙소에만 있으면서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김민주는 소파에 앉아 머리만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개미만 한 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1등 해야 해. 1등 해야 해. 1등 해야 해. 1등 해야 해. 1등 해야 해. 1등 해야 해. 1등 해야 해. 1등 해야 해. 1등 해야 해.”

김민주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 따위 없었다.

정말 패배가 목전에 오자 미친 듯이 널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기 암시를 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예뻐. 나는 노래 잘 불러. 나는 춤 잘 춰. 나는 섹시해. 나는 귀여워. 나는 모든 게 완벽해. 나는 예뻐. 나는 노래 잘 불러. 나는 춤 잘 춰. 나는 섹시해. 나는 귀여워. 나는 모든 게 완벽해…….”

진소유는 답 없는 김민주와 대화하는 대신 텔레비전을 보길 택했다.

웃음 사냥꾼이었던 ‘너희 친구니’ 시청을 마치곤, 요즘 화제가 된다는 ‘음악을 위한 동행’을 켰다.

“아, 박영모 선배님 나온다. 진저, 박영모 선배님 중국에서도 유명하시다며?”

빈자리에서 춤 동작을 연습하던 진저는 텔레비전 앞으로 왔다. 그녀는 박영모의 얼굴을 유심히 보곤 고개를 저었다.

“모름미다.”

“그래? 중국 가수들이 커버곡도 몇 개 했다고 들었는데.”

진저는 유명한 중국인 뮤지션도 잘 몰랐다. 그녀는 음악과 친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그녀가 음악에 다가갈 기회라곤, 집 안에 놓인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곡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라디오의 통제권은 아버지에게 있었고, 아버지는 대중가요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아, 설하 언니가 나옴미다.”

‘메트로폴리탄’ 잡지를 읽고 있던 에리카가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침 백설하가 에리카와의 합작곡인 ‘World on fire’의 하이라이트를 부르고 있었다.

스피커만으로도 사방으로 뿜어지는 아우라는 진저를 감탄시키기 충분했다.

“대단함미다. 다른 뮤지션분들보다 더 나은 거 같슴미다.”

“그거 선배님들 만나면 얘기해도 되지?”

“아, 안 됨미다! 저는 아이돌이니까 아이돌의 노래에 감정 이입이 더 쉬웠던 검미다!”

진소유는 좋은 건수를 잡았단 듯 한동안 진저를 놀리기 바빴다.

“…….”

에리카는 텔레비전에 비친 백설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악을 위한 동행’ 이후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하지만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메트로폴리탄’ 잡지에 집중했다. 그곳에는 특별 기획 파트인 케이어스의 인터뷰와 화보가 실려 있었다.

케이어스가 표지 모델마저 장식했던 뜻깊은 파트였지만, 왠지 읽기 거북하여 뒤로 넘겼다.

[스무스&인텐스. 남자의 외투와 구두는 품격을 높여주지만, 외관이 아니라 내면에도 신경 써야 하는 법. 남자친구의 속마음까지 신경 써주는 여자친구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그것을 위한 스무스&인텐스의 스페셜 아이템 3종 세트! 첫 번째, 비비드 패턴 드로즈 속옷!]

“…….”

다행히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켜줄 만한 흥미로운 코너가 있었다.

에리카는 잡지에 집중하며 애써 백설하에 대한 신경을 껐다.

“나는 예뻐. 나는 섹시해. 내가 최고야. 나는 승리해. 나는…….”

“민주야. 이제 자기 암시는 그만하고 나랑 이거나 보자. 너 계속 그러다가 병 걸리겠어.”

“신경 꺼.”

“여기 재밌는 거 있어.”

짜증스레 한숨을 내쉰 김민주는 ‘나한테 신경 끄고 네 할 일이나 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잡지에 실린 남자 모델의 사진을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날 선 대답 대신 에리카에게 다가와 함께 잡지를 읽었다.

“언니들, 저 좀 봐주시겠슴미까?”

진저는 아까부터 하던 연습에 차도가 있었는지 성과를 자랑하려 했다.

에리카는 따사로운 미소를 지으며 진저를 응시했다. 하지만 김민주는 잡지를 보기 바빴다.

진저가 한쪽 다리를 뒤로 빼고 양손을 우아하게 위로 치켜올렸다.

“‘아라베스크’임미다. 저도 발레리나 같지 않슴미까?”

“진저.”

“네.”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있거나 방에 들어가.”

“…….”

상처받은 진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텔레비전 시청을 마친 진소유와 동선이 겹쳤다.

“진저 너 씻게?”

“아님미다…….”

“그럼 언니 먼저 씻을게.”

“……저 20분 만에 씻겠습니다. 먼저 씻게 해주십시오.”

“음, 싫은데?”

“…….”

“나랑 같이 씻을까?”

“……알겠슴미다.”

그렇게 케이어스 숙소의 밤도 저물었다.

다음 날, ‘메트로폴리탄’으로 마음을 달랬던 게 거짓말처럼 에리카와 김민주의 신경은 날카로웠다.

음방 촬영으로 가는 길이 편하지 않았다.

리허설을 모두 마치고 대기실에 있던 에리카는 줄곧 바닥만 보았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났다.

“에리카 어디 가?”

“화장실요.”

매니저에게 간단히 답한 후 대기실을 나섰다.

대기실에서 화장실까지 약 30초. 그동안 만나는 사람만 수십 명이다.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허리를 거의 90도로 굽혀서 인사했다. 마침내 화장실에 도착했다 싶었는데 줄이 있었다.

장장 수십 분을 기다려서야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에리카는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뚜껑이 닫힌 변기 위에 앉았다. 그녀는 머리를 붙잡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저는요, 뭐랄까, 목표가 없는 길 위에서 항상 걸어왔거든요. 여유롭고 평화롭지만 아무런 성취감도 없었어요.’

‘음악을 위한 동행’ 촬영 마지막 날, 숙소의 옥상에서 성필에게 그리 말했었다.

그건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진실이었다.

‘뭐든 너무 쉽게 손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연예계로 온 거예요. 운칠기삼이라고 하잖아요. 도전하고픈 뭔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도전? 패배를 겪어보고 싶다?

이제 알겠다.

에리카 자신은 그런 거 따위 바라지 않는다.

도전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성공을 향한 레일에서 살아왔고 평생 그 레일 위에 있기를 바란다. 노력과 슬픔, 눈물 뒤에 있는 승리 같은 건 원치 않는다.

그저 평탄하고 평온한 성공만을 바란다.

‘나는…….’

평생을 낙원에서 살아왔다. 주변을 덮은 건 티 없이 맑고 활짝 핀 꽃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에리카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손에 들어왔다.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전부 움켜쥐어왔다.

그래서 삶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어쩌면 이리도 태평한 곳에서 태어났을까. 도전이라고 불릴 만한 건 내 인생에서 하나도 없겠지?

어찌 이렇게나 따분한 곳에…….

권태로워…….

‘자아도취.’

에리카는 20살의 겨울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삶을 지배해왔던 하나의 맥락을 짚어냈다.

그녀는 무엇 하나 새로울 게 없던 낙원 속에서 거짓된 감정을 꾸며냈다.

일상의 권태를 부수고 모험을 떠나고 싶단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그리 믿어왔다. 그리고 온실 속의 자신이 불쌍하다고 여겨왔다.

‘자아도취도 이런 자아도취가 없어…….’

언제까지고 자기 자신을 향한 황홀함이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만의 낙원 속으로, 그 낙원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걸어온다.

백설하다.

그녀를 마주하고서야, 지금 화장실 칸 안에 앉아 고뇌하고 있는 순간에서야, 에리카는 자신이 모험 따위 바라지 않는단 것을 깨달아버렸다.

‘빼앗기고 싶지 않아.’

월요일, 이번 주의 첫 번째 음악 방송이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케이어스의 당연한 1등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1등을 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똑똑.

노크 소리에 에리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칸을 나왔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1위 발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케이어스의 곁에는 소녀연맹이 있었고 둘 사이에 MC가 섰다. 곧 있으면 그의 입에서 누가 1위인지 밝혀지리라.

‘1위, 1위밖에 없어.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분명 이번에도 1위일 텐데.

그런 미래밖에 없을 거야.

케이어스가 1위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할까?

지표도 케이어스의 승리를 가리키고 있어.

확신해. 케이어스가 이길 거라고 확신해.

두려워하지 마.

불안해하지 마.

이 낙원은 영원토록 내 손 안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떨리는 심장아 멈춰줘 제발…….

“1위, 케이어스 축하드립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그 마지막, 환희의 송가.

환희여, 환희여, 수많은 별들이, 행성들이 창공을 가로지르듯.

환희여, 수많은 별들이 천국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따라 빛나는 창공을 가로지르듯.

아아, 투쟁 끝의 승리여!

고뇌 끝의 환희여!

“……아아.”

마이크를 넘겨받은 에리카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환희의 폭포가 그녀의 입속으로 들이 부어져서 그것을 받아마시는 데 바빴다.

하지만 동시에 이 환희를 표현하고 싶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리카는 마이크를 든 채 그리 말하곤, 옆에서 박수 치고 있던 백설하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환희의 키스를 퍼부었다. 물론 입술이 아니라 뺨에.

수십 번의 키스 끝에 백설하의 뺨이 립스틱과 침으로 번들거렸다.

“감사합니다! 우리 유스! 우리 멤버들! 저희 회사 임직원분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환희!

인간이 아닌 듯 천상으로 비상하는 정신!

그것은 분명히 고난이 있기에, 뛰어넘으리라 확신하는 고난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에리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승리를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승리의 쾌감에 도취되어 저 넓은 천상으로 나아갔다.

에리카의 인생에서 이토록 짙고 강렬한 쾌락은 처음이었다.

영원토록 느끼고픈 이 승리의 환희…….

* * *

무대를 내려온 리카는 성큼거리는 발걸음을 숨기고픈 마음도 없는 듯했다. 그녀는 대기실로 도착하자마자 성필을 찾았다.

리카는 성필을 포착하곤 거칠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그의 옷가슴께를 거침없이 붙잡았다.

“이사님 저희가 1위 할 거라면서요!”

“아, 아니, 1위 할 수도 있다고 했지 꼭 할 거라고는…….”

“우소츠키(거짓말쟁이)!”

리카는 100억 사기라도 당한 듯 잔뜩 억울해하면서 성필의 가슴께를 흔들었다.

성필은 저항할 수도 없이 그녀의 힘에 앞뒤로 왔다 갔다 하기만 했다. 마치 겨우내 자라난 나약한 풀처럼 바람에 몸을 맡기는 모양새였다.

“저 오늘 1위 소감문 쓰느라 생방송 전까지 고생했다구요! 다 쓰고 나서도 계속 외웠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내가 주는 것도 아니잖아…….”

소녀연맹 멤버들은 리카의 투정을 말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특히 백설하가 그러했다.

그녀는 에리카의 립스틱과 침이 진하게 묻은 뺨을 닦지도 않았다.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빛이 사라진 눈으로 성필을 바라보기만 했다.

10년 동안 금실 좋게 지낸 남편에게 내연녀가 있단 것을 깨달은 듯한 부인과 같이, 그녀는 배신감 가득한 눈길만 성필에게 주었다.

“이번에야말로 박 이사님이 저를 안고 360도 12회전 한 뒤에 목말을 탈 수 있겠다고 생각했……!”

아쉬움을 잔뜩 토로하던 리카가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이사님?”

성필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에, 이, 이사님 우시는 건가요?”

성필은 말없이 굵은 방울을 뺨으로 흘려보냈다. 그는 파들거리는 눈꺼풀을 진정시키려는 듯 꾹 눈을 감았으나, 그 대신 입으로 절망 가득한 한숨만 나왔다.

“미안, 얘들아, 나 때문이야…….”

리카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인생 업적을 하나 달성해버렸다.

바로 30대의 남자를 면전에서 울린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여자도, 사랑과 폭력이란 무기를 제외하곤 달성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이사, 이사님 울면 안, 울면 어떡하나요!”

리카가 황망하여 성필의 눈가를 쓸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미안 다 나 때문이야……. 내, 내가아, 내가 너희들 컴백을 12월로 잡아서어……. 다른, 다른 때였으며언, 너희 음방 3관왕도, 3관왕도 할 수 있었을 건데에…… 나 때문에에…….”

“야 리카 꺼져!”

신아름이 리카를 밀어내고 성필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를 달래주기 위해 계속 어깨를 쓸었다.

“팀장님 아녜요. 팀장님 때문에 진 거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뚝 그쳐요 뚝.”

“아름아 나 너희 어머니 볼 면목이 없어어…….”

“야 리카 너 죽을래?! 안 그래도 심란할 팀장님을 왜 울려!”

“에, 에에…….”

그렇다.

멤버들은 1위를 하지 못한 자신들의 슬픔만 신경 썼지, 정작 프로듀서인 성필이 얼마나 슬퍼할지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항상 격려하고 칭찬하는 성필만 머릿속에 있었기에, 그의 심정은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오늘도 자신들을 달래주리라고 여겼는데, 성필 또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멤버들에 대한 실망이 아니었다. 프로듀서로서의 자책이 그에게 눈물을 뽑아내었다.

“팀장님이 케이어스랑 일부러 컴백 시기 맞춘 것도 아닌데 왜 자책하세요? 케이어스 그년들이 눈치 안 보고 연말에 컴백한 거지.”

“아름아…….”

“울지 마세요. 저는 팀장님한테 고마운걸요? 1위 후보도 계속 오르잖아요. 그것만 해도 충분해요. 팀장님 고마워요.”

기어코 성필은 신아름의 품에서 울었다.

멤버들에게 ‘1위 할 수 있을 거다’라며 잔뜩 바람을 넣었다. 그건 괜히 멤버들을 들뜨게 하려고 헛소리한 게 아니었다.

성필도 정말 1위를 하리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히려 멤버들보다 성필이 더욱 슬펐다.

“얘들아 진짜 미안해, 내가 미안해…….”

백설하는 우는 성필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동시에 그가 우는 것을 멈추고 싶었다.

수십 명에 이르는 백댄서와 스타일링 스탭이 성필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32살의 남자가 20살 어린애한테 안겨서 눈물을 질질 짜는 광경…….

“…….”

그 광경을 만든 장본인, 리카는 충격에 넋을 잃어버렸다. 1위를 하지 못한 것보다 지금이 더 충격적이다.

만약 십수 명의 백댄서와 스탭들이 문을 막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도망쳤을 것이다.

‘아타시(나)는…… 32살 남자를 울린 여자가…… 돼버렸어…….’

그딴 타이틀 갖고 싶지 않다…….

* * *

“박 이사. 대기실에서 펑펑 울었다면서.”

“……어떻게 아세요?”

“민 팀장한테 들었어.”

“아, 그래요? 어쩌죠, 저 그때 기억이 없는데. 경섭이가 거짓말한 거 아닐까요?”

홍규헌이 핸드폰에서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신아름에게 안겨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성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심지어 거하게 취해서 헛소리하는 듯한 성필의 고해도 전부 들렸다. 50% 이상이 ‘내가 미안해’였었다.

“이건 왜 찍었대요.”

“해명 영상이라더라. 뭐에 대한 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쓸 수도 있겠다면서 찍었대.”

“…….”

둘뿐인 사장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박 이사, 그렇게 슬퍼?”

“아…… 슬프달까. 음, 네. 슬펐어요. 애들한테 헛바람 넣은 게 미안하기도 하고. 근데 저는 정말 1위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고작 1년 만에 케이어스를 이기는 건 힘들지.”

힘들다기보다 불가능할 것이다.

케이어스를 뒷받침하는 건 케이어스 팬덤만이 아니다. KS 엔터라는 회사 자체의 팬들도 있으니, 화력 자체가 소녀연맹이 따라갈 수준이 아니다.

음원 성적이 비슷하더라도, 시청자 투표와 방송 점수에서 밀리는 건 필연이지 않을까.

“다음을 노리자.”

“다음이면…… 또 내년 말이나 될 거 같은데요. 일본 데뷔랑 해외 투어 진행하면요…….”

“지금까지 급하게 달려왔잖아. 내년 말이면 어때? 아니면 3년, 4년 뒤는 또 어때서?”

성필은 힘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보는 사람도 절로 힘이 빠질 듯한 웃음이었다.

홍규헌은 그런 성필이 안쓰러웠다. 그녀의 손길은 자꾸만 탁자의 서랍으로 향했다가 말았다를 반복했다.

“하아.”

홍규헌은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서랍에서 술 한 병과 잔 두 개를 꺼냈다.

“박 이사. 몇 잔 마시고 눈물 좀 덜어내.”

“아뇨, 괜찮아요…….”

“됐고 받아. 좋은 거야.”

성필은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술병을 받았다. 뚜껑을 따고 홍규헌의 잔을 채우려는 순간, 그의 시야가 술병에 쓰인 글자를 잡아냈다.

“사, 사장님. 여기 왜 대통령님 이름이 쓰여 있어요……?”

“대통령 하사주야.”

“대통, 대통령, 하, 하사주요? 뭐, 뭔데요 그게?”

“몰라? 그냥…… 이런저런 사람들한테 명절이나 연말에 주는 거야.”

이런저런 사람 누구?

재벌?

“이건 내 아버지한테 온 거고. 하사(下賜)라는 건 세간에서 붙인 이름이고 원래는 그냥 선물이지. 딱히 특별한 건 아니야.”

이런 게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원래는 내 오빠야들…… 아니, 오빠나 언니쯤에서 내려오는 게 끊겼거든. 그런데 작년에 정권 바뀌었잖아. 좀 윗 오빠 언니들이 싫어하는 당이라, 이번에는 나한테까지 내려왔네.”

술병을 쥔 성필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대통령이 주는 술……?’

이런 걸 자신이 먹어도 되는 걸까?

“사, 사장님, 괜찮아요. 저 이런 거 안 먹어도…….”

홍규헌은 성필의 손에 들린 병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말도 없이 성필의 잔에 부었다.

“사장님!”

“마셔.”

“하지만…….”

“이건 위로하려고 주는 술 아니야.”

“네?”

“잘했다고 주는 거야. 정말 잘했어, 박 이사. 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뿐이라서 미안해.”

성필을 위로하려고 주는 게 아닌, 성필을 치하하려고 주는 술.

“박 이사는 잘했어. 내 기대 이상이야. 물론 박 이사의 이상이 높은 건 알아. 하지만, 조금은 기쁜 티를 내줘. 박 이사가 자꾸 울상이면 나 혼자 기뻐하기도 뭐하잖아.”

“…….”

성필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의 끝에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홍규헌에게서 술병을 받아 그녀의 잔도 채워주었다.

둘은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박 이사.”

“네.”

“잘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감사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밤이 깊어질 때까지, 사장실 안에서는 잔이 몇 번이고 돌았다.

* * *

소녀연맹 숙소.

멤버들은 동그랗게 모여 앉아 침울한 분위기를 공유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케이어스에게 밀려 음방 1위를 하지 못했단 것 때문에 침울하기도 했지만, 주요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리카, 박 이사님도 힘드셨을 거야.”

장하양의 목소리에는 소중한 동생을 대하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리카는 감히 장하양과 눈을 마주칠 용기도 내지 못했다.

“박 이사님을 탓하는 건…….”

“하양아 그 얘기는 그만하자. 리카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그냥 리카는 박 이사님한테 평소처럼 대한 거야.”

고양이 앞의 쥐처럼 쪼그라든 리카를 백설하가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우리도 박 이사님이 그러실 줄은 몰랐구…….”

항상 멤버들 앞에선 강인하고 희망찬 모습만 보여주는 게 성필이다. 그런데 설마 울다니.

그것도 음방 대기실에서 수십 명을 앞에 두고 울 줄이야.

세상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때문에 아저씨가 더 그런 거 같아요.”

조아라가 말했다.

“사실, 이게 딱히 우리를 낮게 보는 건 아니지만요. 한국 역사상 중소 기획사 걸그룹이 대형 기획사 그룹을 이긴 적이 없잖아요.”

“……그렇지.”

“근데 우린 이걸…… 김칫국이라고 하면 좀 그런데. 계속 케이어스 애들 이길 거라고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자꾸 그런 모습만 보여주니까 아저씨도 심적 부담감이 있지 않았을까요.”

“조아라 너 뭔데. 그런 생각도 해?”

“……그래, 한다. 뭐 어쩌라고.”

“아냐. 기특하다고.”

다들 조아라의 설명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성필도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이긴다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목표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업계에서 10년가량 몸을 담아온 성필이라면 멤버들보다 더욱 뼈저리게 알고 있겠지.

그러니 멤버들에게 케이어스를 이기자고 말은 해도 실제로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우리가 자꾸 타도 케이어스니 뭐니 하고, 케이어스한테 져서 우울해하니까 아저씨도 영향을 받은 거겠죠…….”

성필도 소녀연맹의 기대에 부응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케이어스를 이기겠단 구체적인 희망을 품었을 것이고.

그런 기대와 희망이 좌절되자 오늘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내일 이사님한테 말씀이라도 드릴까? 우린 지금 엄청 기쁘고 이사님한테 고마워하고 있다고…….”

“아뇨.”

신아름이 백설하의 의견을 단칼에 잘랐다.

“너무 직설적이잖아요. 팀장님도 알죠. ‘아, 애들이 나를 달래주려는 거구나’ 하고요.”

“그으, 그럼 어떡하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케이어스 애들한테 거하게 축하나 해줘요. 내일 음방에서도 어차피 걔들이 1위 할 텐데, 막 환호성도 질러주고 박수도 치고…….”

그러면 성필도 소녀연맹이 그다지 케이어스와의 일전에 신경 쓰지 않게 됐다고 알아주지 않을까 싶다.

이왕 지는 거 ‘경쟁자에게 순수한 찬사를 보낼 수 있는 그룹’이란 이미지 메이킹도 하고 말이다.

이미 일주일 넘게 케이어스의 박수 기계 역할을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이번엔 조금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이다.

“우린 지금에 만족한다는 걸 표현하는 거죠.”

“아름이는 만족해?”

“그럼 하양 언니는 만족해요? 그럴 리 없잖아요. 당장이라도 걔네들 무대에서 끌어 내리고 싶은데.”

“……응.”

태연한 척을 하려 해도,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에게 졌단 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음악 방송인 뮤직 스테이지의 1위 발표 순서.

케이어스와 소녀연맹을 사이에 두고 MC가 멘트를 던지고 있다. 오늘의 무대들을 간단하게 칭찬하고 불꽃 튀는 승부인지 뭐가 있을 거라면서 분위기를 억지로 띄웠다.

‘어차피 케이어스가 이길 텐데.’

신아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MC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김민주의 기색을 살폈다.

김민주는 생방송 중이라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흘끗거리면서 신아름을 신경 쓰는 게 보였다.

이내 둘이 눈을 마주쳤다.

김민주가 씨익 웃었다.

‘저년이…….’

에휴, 화내서 뭣하겠는가.

2, 3년 뒤에 소녀연맹이 꾸준히 우상향으로 성장하면 그때야 승부를 벌여 볼 수 있을까.

그 단계에 도달할 때까진 화내면 손해다.

‘맘껏 좋아해라. 오늘은 우리도 너희 축하해줄 거니까. 어제 에리카가 설하 쌤한테 달라붙어서 뽀뽀를 했었지. 난 뭘 해볼까.’

김민주한테 코알라처럼 달라붙어서 뽀뽀라도 퍼부어줘 볼까. 김민주가 당황하는 꼴은 확실히 볼 만할 것이다.

“1위는……!”

마침내 MC가 1위를 말하려는 모양이다.

무대 뒤의 스크린에서는 몇몇 개의 점수가 차례로 뜨고, 마지막으로 음원 점수가 뜨기 직전이었다.

1위 발표를 위해 무대에 선 모든 아이돌들 전부 가식적으로 호기심을 나타냈다. 가식인 이유는 어차피 케이어스가 1위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박수 칠 준비하자.’

신아름은 벌써부터 양손을 모아 갈채를 보낼 준비를 마쳤다.

멍한 정신으로 어떻게 김민주를 축하해주는 듯 보이면서 엿을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도중.

“……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느새 1위가 발표됐다.

신아름은 해맑은 미소를 만들곤 케이어스를 향해 박수갈채를 퍼부었다. 사방으로 소리가 퍼질 정도로 큰 박수 소리였다.

그런데 기색이 이상했다.

케이어스 멤버들은 전부 표정이 싹 굳어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야. 쟤네들 왜 저래. 계속 자기들만 상 받으니까 미안하기라도 한…….’

MC가 백설하에게 다가와서 트로피와 마이크를 내밀었다.

왼팔에는 트로피를 끼고, 오른손에 마이크를 쥔 백설하는 얼음처럼 굳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기계처럼, 그리고 진심을 다해 박수를 치던 소녀연맹 멤버들의 행동도 잦아 들어갔다.

“……어?!”

신아름의 시야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고, 혈관이 꽉 조여든 듯 호흡도 원활하지 않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미 무의식은 현재 상태를 파악해버렸다.

그리하여.

“우와아아아아앜!”

신아름은 김민주를 향해 대포와 같이 쏘아지듯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개구리처럼 뛰어 코알라처럼 달라붙었다.

김민주는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서서 버텼다.

신아름은 김민주의 허리를 다리로, 목을 팔로 감싼 채 매달려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게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전부였다.

다른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멤버들은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상황에 MC가 하하 웃으면서 백설하에게 말했다.

“설하 씨, 소감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백설하를 감싼 시간의 장막이 깨졌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 안겨진 트로피를 보곤.

“어흐윽…….”

보석같이 반짝이는 눈물을 소나기의 전조와 같이 굵게, 연달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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