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이명철은 아라베스크 연습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그 뒤엔 유선화가 껌딱지처럼 따라왔다.
원룸의 문 앞에 선 이명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오늘은 피곤해.”
“조금만 마시자.”
“…….”
둘은 좁은 원룸 안에서 술판을 벌였다.
안주라곤 편의점에서 산 육포와 마른오징어가 전부이지만, 술은 매끄럽게 술술 들어갔다.
뒷담이라는 안주 덕분이었다.
“동작을 완전히 일치시켜?”
안주는 조아라였다.
이명철은 술로 불콰해진 얼굴로 끊임없이 불만을 쏟아냈다. 그런 그를 유선화는 싱글거리는 낯빛으로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걔는 자기가 뭘 말하는지도 모를걸.”
“돈도 많이 받아서 좋구만 왜 그래.”
“걍 받지 말 걸 그랬어.”
댄서가 돈을 버는 방법도 한 가지가 아니다.
안무가, 트레이너, 플레이어 등 춤으로 돈을 버는 법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어느 업계와 마찬가지로, 남들이 우러를 정도로 돈을 버는 사람은 20%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댄서의 처지는 더 안 좋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를 때까지 풍족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어린애한테 트집이나 잡힐 거였으면, 아예 안 받았어야 했는데.”
“3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뭔 어린애야. 게다가 거기 설하 씨는 너랑 동갑이잖아.”
“……아무튼.”
이명철의 꿈은 댄서이며 춤만으로 돈을 버는 게 목적이다.
그는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플레이어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이번에 백댄서 일을 맡은 건 돈에 혹하여 잠시 참가한 데 불과했다.
“걔가 바라는 수준은 과도하잖아. 아까 말한 대로 걔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몰라.”
이명철은 같은 크루의 사람들과 함께 글로벌 댄스 대회에도 나간 적이 있다.
그때 이명철은 조아라가 그토록 부르짖는 군무를 선보였었다.
관객과 심사위원들에게 감탄을 자아내려 모든 동작을 완벽히 일치시켰었다. 탁월한 테크닉과 함께 기계장치처럼 정교한 군무를 선보인 것이다.
‘비록 우승은 못 했지만 내 이름 석 자를 알릴 정도는 됐어.’
그렇기에 이명철은 조아라의 요구가 더욱 부당하게 느껴졌다.
조아라는 아이돌의 안무에 전문적인 댄서와 같은 정교함을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 시상식에 모인 인간들 눈이 거기까지 따라올 거 같아? 헛수고라고 헛수고. 조아라 그 어린애가 주변에서 아이돌이라면서 떠받들어 주니까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서…… 너 뭐 해?”
유선화는 아까 전부터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사람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핸드폰을 보다니,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이거.”
“뭔데?”
“아라 씨 영상.”
어느 스트릿 댄스 대회를 찍은 영상이었다.
이명철은 옆에 벗어두었던 안경을 끼고 유심히 핸드폰을 보았다.
“어?”
이건 이명철도 익히 아는 영상이었다. 한때 댄서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고작 17살의 댄서, 조아라는 꽤 당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총 3명의 심사위원이 있었는데, 조아라는 한 명 한 명의 앞에서 춤을 선보였다. 그 심사위원들의 전문 분야를 말이다.
락킹, 팝핀, 왁킹.
심사위원 모두 박수 치면서 뒤집혔었다. 그동안 이토록 파격적이면서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조아라 스트릿 하던 애였어?”
“응.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너 괜히 심통 나서 반발하는 거 아녔어?”
전혀 몰랐다.
이명철은 약간 심기가 상한 투로 육포를 뜯어 먹었다.
“옛날에 춤 배웠으면 뭐 어쩌라고. 춤만으로 먹고살 자신 없어서 아이돌로 도망간 거잖아.”
“에휴, 세상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마.”
“괘씸하다고. 우리들 지적하는 꼴 하며…….”
춤이 아니라 아이돌의 상품성을 보고 좋아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그토록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조아라가 괘씸하기 그지없다.
유선화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이명철에게 키스했다. 그렇게 둘은 밤을 보냈다.
“으…….”
잠에서 깬 이명철은 창문을 보았다. 아직 어두웠으나 시간은 7시였다. 곧 있으면 해가 뜰 것이다.
이명철은 더 잘까 하다가, 어제 보았던 조아라의 대회 영상이 떠올랐다.
그가 이불을 걷어내자 유선화가 흐리멍덩하니 물어왔다.
“어디 가……?”
“깼어? 씻고 연습하러 가게.”
“크루?”
“아니. 아라베스크.”
“그래애…….”
이명철은 단장을 마치고 집을 나섰다.
연습 장소로 가는 내내, 그의 머릿속에선 조아라의 영상이 떠나가지 않았다.
‘하루 이틀 배운 동작은 아니었어. 지금은 그때에서 거의 3, 4년이 지났고.’
춤을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배워 온 아이돌. 그런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주변을 보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까?
댄서가 춤이 주목받지 못하는 세상에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춤 대신 화장하고, 미소를 지으며, 팬들을 향해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삶은…….
“하아.”
이명철은 기분이 안 좋아졌다.
조아라가 완벽을 요구했던 이유가 이해가 가서, 자신이 그녀를 이해하려 했단 게 마음에 안 든다.
‘그래봤자 예술병 걸렸단 건 안 변해. 여기서 더 나아져봤자 아무도 안 알아줄 거 이미 알고 있으면서.’
이명철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연습실 문 앞에 섰다.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녀연맹이 오기 전까지 동작이나 점검해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어?’
사람이 있다. 다만, 모두 자고 있다.
성필, 신아름, 조아라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숙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이어서 이명철의 눈은 바닥으로 향했다.
여러 색의 테이프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마치 꽃가루를 여기저기 어질러 놓은 모양새였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장난이라도 쳐서 바닥을 더럽힌 것으로 생각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명철은 아니었다.
‘포지션?’
댄서인 이명철은 바닥에 붙은 테이프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가방을 내려두고 ‘아라베스크’에서 자신의 위치에 섰다.
‘여기에 서면 시야 끝에는 환풍구가 보여. 그리고 고개를 왼쪽으로 15도 기울이면 벽면 거울의 모서리가…….’
보인다.
이명철이 셀 수 없는 연습으로 만들어낸 감각.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 그것으로 잡은 자리가, 바닥에 붙은 붉은색 테이프와 일치하고 있었다.
이명철은 머릿속으로 아라베스크를 재생하면서 걸음을 움직였다. 자신의 군무 포지션에 따라 동선을 옮겼다.
그럴 때마다 그의 발밑에는 붉은 테이프가 있었다.
3분이 넘는 동선 이동의 끝에, 이명철은 인정해야만 했다.
‘모든 댄서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했어.’
테이프는 이곳을 절대 벗어나지 말라는 압박과 같았다. 백댄서가 조금만 실수해도 그 실수가 더 도드라지게 보일 것이다.
이명철은 잠들어 있는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예술병 걸린…… 어린애…….’
아니, 그게 아니었다.
조아라는 프로로서 팬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그 노력을 알아채는 사람이 만 명 중 단 한 명에 불과하더라도, 그리고 그 한 명이 자기 자신뿐일지라도.
조아라는 최고를 목표로 한다.
“……하.”
이명철은 웃었다.
그래, 조아라는 프로다.
그리고 이명철 자신도 프로다.
프로라면 고용주의 요구를 완수해야 옳다.
* * *
천장 너머로 미친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콘크리트와 철판을 넘어 소녀연맹 멤버들의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쌤! 벽에 손대고 있으면 진동이 와요!”
백설하는 리카의 말에 답할 여력이 없었다.
아까부터 함성만 듣고 있자니 심장이 병이라도 난 것처럼 뛰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병원에 실려 갈 것만 같았다.
리카는 백설하의 반응이 없자 신아름의 곁으로 갔다.
“아름이 뭐 봐?”
신아름은 대답 없이 꾸깃꾸깃한 종이만 보았다. 그곳에는 ‘아라베스크’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잠꼬대로도 부를 수 있는 아라베스크의 가사만 벌써 수백 번 읽었다.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꼴을 보니 맨정신은 아닌 듯했다.
리카는 실망한 듯 축 늘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 타깃인 장하양을 찾아갔다.
“언…….”
장하양은 말 걸지 말란 기운을 풀풀 내뿜으며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위로는 비닐 쓰레기가 십수 개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몇 개인지도 모를 젤리 프로틴만 먹고 있었다. 그 말랑한 것을 한 번에 수십 번씩 씹으면서 꼭꼭 삼켰다.
“…….”
리카는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긴장을 풀고 싶은데, 누구도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쓸쓸했다.
심지어 대기실에 30명이 넘게 있는데!
소녀연맹과 백댄서를 합쳐서 30명 이상의 인원이 복닥거리면서 모여 있다. 그러나 다들 상이라도 치른 것처럼 우중충하기만 했다.
“케이어스 나온다.”
텔레비전 앞에 있던 조아라가 말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HPT 뮤직 어워드가 실시간으로 방영되는 중이었다. 베스트 OST상을 받은 배우가 소감을 마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MC가 멘트를 띄우고 다음 차례를 예고했다.
“케이어스가…… 나온다…….”
조아라의 말과 동시에 방 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고척스카이돔.
총 16,000명 이상의 관객이 내뿜는 열기와 고성이 모든 장벽을 뚫고 대기실에 울려 퍼진다. 그 진동을 받은 멤버들과 댄서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리고 곧, 하나둘씩 텔레비전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진저.’
화면에 잡히는 건 케이어스 전체지만, 조아라의 눈은 진저만을 따라갔다. 그녀의 춤과 표정만이 조아라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진저, 너는 그룹 댄스 속에서도 돋보이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진저는 재능을 타고났으니까.
춤에 대한 이해력이나 재현력뿐 아닌, 신체 또한 댄서의 이상향이나 마찬가지다.
무용은 태어난 순간부터 탈락자가 갈린다. 춤은 신체로 행하는 예술이기에 태생부터 서열이 세워지고 재능으로 계급의 탑을 쌓는다.
진저는 그 탑에서도 최상층에 위치해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아이돌로 들어가는 좁은 관문. 그곳을 통과한 소수의 인간 중에서도 진저는 단연 돋보인다.
‘아이돌은 자기 자신을 지울수록 완벽해져. 아이돌이란 거 자체가 인간이 우상을 바라서 만들어낸 거니까. 그 안에서 인간 개인이 설 자리는 없어.’
케이어스의 퍼포먼스는 그 소망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4명이 하나가 되어 케이어스라는 전체를 구성하고, 그 촘촘한 그물에는 틈이 없다.
저들은 개성을 없앨수록 우상으로서 하늘에 더 가까워진다.
‘그런데 진저 넌 자기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하늘 높이 갈 수 있구나.’
부럽다.
부러워서 죽을 거 같다.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그걸 알 사람은 없겠지만…….’
이곳에 모인 수백 명의 아이돌은 물론이고 관객석을 가득 메운 16,000명의 관객. 그리고 지금 방송을 보는 수십수백 만의 시청자들.
그중 몇 명이나 조아라와 같은 감상을 느낄까. 진저라는 천재에 대한 질투와 찬사를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질투하는 건 아이돌이 아니라 댄서의 영역이야. 그렇더라도,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네.’
그리고 이제 확신했다.
“아라쨩?”
조아라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리카가 이상하단 듯 바라보았다.
“쌤, 이제 가죠. 우리가 쟤들 다음이잖아요.”
“아, 응.”
스태프의 인도를 따라 소녀연맹과 백댄서들이 대기실을 나섰다.
나아가는 길에서, 조아라의 확신은 짙어지고 더욱 견고해졌다.
‘진저, 네 개성이 드러난다는 건…….’
오늘만큼은 조아라가 더 아이돌에 가깝다는 뜻이다. 오늘의 소녀연맹은 개인을 지우고 완벽한 군무를 만들어냈으니까.
하지만, 아이돌에 더욱 가깝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진저를 이기리란 확신이 생기지는 않았다.
* * *
“흐아…….”
대회의실에서 빠져나온 홍규헌은 즉시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대면서 축 늘어졌다.
성필이 빌려주겠단 듯 어깨를 가까이하자, 홍규헌은 지친 눈빛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세웠다.
“고생하셨어요.”
“박 이사도 고생했어.”
방금 둘은 HPT 뮤직 어워드를 주최하는 대한가요제작자협회, HPT 미디어, 그리고 온갖 방송계의 높으신 분들과 인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무슨 쓸데없는 말을 그리도 많이 하는지, 듣던 홍규헌은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네. 고마워, 박 이사.”
“뭐가요?”
“덕분에 이런 데도 불려와 보네.”
그들이 가로 엔터의 홍규헌을 부른 이유는 ‘인사’였다. 정말 인사만 하고 가란 것이었다.
뭐 이런 처사가 다 있나 싶지만, 현재 대회의실에 모인 이들에게 눈도장 한 번 찍으려고 혈안인 이들이 대한민국에 넘치고 넘쳤다.
홍규헌으로서는 인사 정도야 몇 번이고 하러 와 줄 수 있었다.
“그만큼 소녀연맹이 성공했단 거죠.”
“그렇지.”
둘은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관객들의 함성으로 가득 메워져, 사람이 없음에도 묘하게 들뜬 공기가 떠다녔다.
‘나도 긴장되는데 이 소리를 듣는 우리 애들은 얼마나 긴장할까.’
곁에 매니저가 있어서 걱정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녀연맹 멤버들을 믿고 있다.
커다란 압박감이 있겠으나 그녀들만의 방식으로 헤쳐 나갈 것이다.
“박 이사는 이제 뭐 할 거야?”
“관객석 쪽으로 가게요.”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은 뮤직 어워드의 티켓을 공짜로 구했다.
홍연헌이 초대권을 보내준 것이다. 달갑진 않아도 버리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사장님은요?”
“나도 가게. 좋은 자리잖아.”
“보고 싶은 아이돌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있지. 우리 애들.”
“오…….”
“빨리 가자. 박 이사는 케이어스 보고 싶잖아. 곧 무대 시작할 거야.”
“전 언제까지 케이어스로 고통받아야 할까요.”
둘은 돔의 1층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눈이 아프도록 쏘아지는 무대의 조명과 절로 시야가 어질거리는 사람의 파도였다.
어둠으로 뒤덮인 돔 안을 태양과 같은 조명, 관객들이 꺼낸 핸드폰의 불빛, 관객이 다치지 않도록 켜둔 형광등이 교차하여 찬란함을 만들어냈다.
홍규헌과 성필은 외곽을 빙 돌아 겨우겨우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자리 근처로는 가로 엔터의 임직원들이 자리했다.
“사장님, 어떠셨습니까?”
“어떻긴. 진짜 인사만 하고 왔어. 근데 대기석에 우리 애들이 없네?”
후보에 오른 아이돌이나 가수들은 별도로 자리를 받는다.
무대를 벗어나 우측에 설치된 살짝 높은 장소에는 유리 의자에 앉은 아티스트와 아이돌들이 백 명 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소녀연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곧 차례라 무대 아래 대기실 쪽으로 가셨습니다. 간 지는 꽤 됐습니다.”
“벌써? 박 이사, 우리 꽤 오래 잡혀 있었나 봐.”
“그러게요. 한 이사님 거기 진짜 시간과 정신의 방이었어요. 와아, 높으신 분들은 말하는 것도 어찌나 느린지.”
“시간과 정신의 방이 뭡니까?”
“드래곤볼 안 보셨어요?”
“이름만 들어봤습니다.”
그렇구만.
[다음 차례는 케이어스입니다!]
소란스러운 배경 때문에 거의 소리 지르듯 ‘시간과 정신의 방’을 설명하던 성필은, MC의 무대 소개를 듣곤 정신을 번쩍 차렸다.
‘케이어스 다음에 시상이 하나 있고, 그다음이 우리 애들이야.’
뱃속에 납덩이라도 삼킨 기분이다. 시간을 스킵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스킵했을 것이다.
머리도 어지러워서 토라도 할 듯하다.
케이어스의 차례이기 때문이 아니라, 소녀연맹의 차례가 가까워져서다.
“박 이사님!”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성필의 등을 짚었다.
“끼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돌아보니 놀란 홍연헌이 보였다. 그의 비명 때문에 주변의 이목도 홍연헌에게로 자연스레 쏠렸다.
“호, 홍연헌 사장님?”
“언니야?”
홍연헌은 깜짝 놀랐던 티를 지우고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규헌아, 박 이사님 좀 빌려줘.”
“어?”
대답은 듣지 않았다.
홍연헌은 성필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쥐곤 저항감 없이 의자에서 일으켰다.
“사장님 도와주세요!”
“어, 어…….”
옛날에 홍연헌이 가로 엔터로 왔을 때, 그녀에게 붙잡혔던 리카가 왜 자꾸 구해달라고 했는지 알겠다.
잡힌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하지만 성필은 끝내 구원받지 못했다. 그는 홍연헌의 손길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했다.
“홍연헌 사장님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 케이어스 무대, 아니, 곧 소녀연맹 무대인데…….”
“걱정 붙들어 매요. 시간 안에 꼭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계단을 올라 성필을 2층으로 데려갔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곳은 2층의 중앙. 무대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장소.
“FOH(Front Of House)?”
공연을 주도하는 모든 파트의 감독들이 무대를 컨트롤하는 장소였다.
음향, 조명, 비주얼, LED, 카메라, 레이저, 연출, 무대, 전기장식 등등. 온갖 감독들이 거대한 컨트롤러 앞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바쁘게 해내고 있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홍연헌을 알아본 어느 감독이 인사했다. 하지만 인사 한 번이 끝이었다.
그들은 이 장소의 누구보다도, 적어도 무대에 올라가는 이들과는 동등할 정도의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해야 했다.
이중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연출 감독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닦지 않고 무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 홍연헌 사장님 회사에 있는 분들이구나. 공연기획사 시지프…….’
“여기 경치 좋죠? 가장 무대가 잘 보이는 장소를 FOH로 정해야 하거든요. 정면. 아, 근데 FOH를 너무 크게 만들었나 싶기도 해요. 조금만 더 줄였으면 관객석 20개는 더 확보할 수 있었으려나.”
홍연헌이 손으로 사진이라도 찍으려는 듯 양손의 검지와 엄지로 사각형을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앵글에 만족해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당황스러운 요구를 해왔다.
“해설 좀 해줘요.”
“네? 해설…… 요?”
“프로듀서란 사람은 어떤 안목을 가지고 무대를 보는지 궁금해요.”
홍연헌이 성필과 어깨동무했다.
너무나 이질적인 감각이다.
성필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여성이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경험 따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위압감이 든다.
“해주실 수 있죠?”
“…….”
어차피 지금 자리로 돌아가서 소녀연맹의 공연을 볼 수는 없다.
시간이 안 맞기 때문이다.
온 김에 경치 좋은 장소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네.”
“와, 감사해요. 기쁘다.”
“소녀연맹을 1부 피날레로 둔 건 사장님인가요?”
“네. 곤란했나요?”
곤란했냐고? 곤란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까지 케이어스와 소녀연맹 팬덤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HPT 뮤직 어워드의 라인업과 세트리스트가 공개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케이어스의 팬덤인 유스는 소녀연맹의 팬덤인 인민에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성필도 회사와 외부를 향해 아무것도 아닌 척했지만,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분노를 토하고 싶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홍연헌은 홍규헌, 즉 사장님의 언니가 아닌가.
성필은 분노를 속마음 깊이 밀어 넣고 짐짓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왜냐고 물으면 이유가 궁색한데…….”
홍연헌은 실실 웃었다. 답을 회피하려는 것일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저 웃겨서 웃는 듯했다.
이 상황이 너무나 웃겨서, 웃지 않고는 못 배길 상태인 것이다.
“재밌을 거 같잖아요. 소녀연맹이 케이어스 대신 피날레에 서면요.”
“그런가요.”
“어, 화났어요? 어쩌지.”
전혀 사람의 눈치를 보는 태도가 아니었다.
마치 성필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장난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사람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싶어?’
성필은 반대로 행세했다.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는 이 정도의 일로 흔들리지 않는단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소녀연맹의 목표는 이 무대에서 케이어스를 이기는 겁니다.”
“이겨요? 케이어스보다 더 높은 상을 받아서요? 그건…….”
“예, 가능성이 없죠. 무대에서 이긴다는 건, 말 그대로 무대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더 뛰어나단 뜻입니다.”
방금 말은 얼마나 오만하게 들렸을까. 또한 얼마나 웃기기 그지없을까.
과연 홍연헌은 성필의 말을 듣곤 낮은 웃음을 자꾸만 흘렸다.
그녀는 공연기획사 대표로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아티스트의 공연을 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돌의 무대로 퍼포먼스의 상하를 가르겠단 말 자체가 너무도 우스웠다.
“아이돌의 퍼포먼스란 건 곡 기획 초반에 정해지는 거예요. 태생부터 우열이 갈리는 거죠. 무대 위로 올라가서 위아래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구요. 이게 무슨 스포츠 경기인 줄 아세요?”
“있어요.”
“박 이사님, 저 밑에 있는 16,000명이요. 박 이사님처럼 춤을 보고 노래를 듣는 눈과 귀가 없어요. 그냥 아이돌이 멋지고 귀엽고 예뻐서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아이돌을 예술이라고 올려 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까 말한 대로 이건 우열이 확실히 갈라지는 스포츠가 아니다.
“무대의 퀄리티는 보는 사람에게 의존하기도 해요. 무대를 많이, 오래, 전문적으로 보아온 사람은 작은 차이도 감별할 수 있지만. 으음, 글쎄요. 저 어린 관객들이 얼마나 심미안이 있을진…….”
“설득하면 됩니다.”
“설득이요?”
“관객을 설득하는 게 관건입니다.”
홍연헌은 이해가 안 된단 표정이었다.
“아까 프로듀서는 어떤 안목을 가지고 무대를 보냐고 물으셨죠.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
홍연헌은 성필과의 어깨동무를 더욱 강하게 했다. 둘이 거의 밀착한 상태에서, 홍연헌이 정면으로 검지를 뻗었다.
“이제 나오네요, 소녀연맹. 자, 이제 설명해주세요. 관객에게 뭘 설득하면 소녀연맹이 이기죠?”
성필은 자신의 가슴과 어깨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을 억지로 무시하며 답했다.
“설득이라기보다는 알린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네요.”
“대상은 관객이고, 무엇을요?”
“이야기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관객들은 소녀연맹의 세계관을 모를 게 틀림없다.
아마 이 중에서 소녀연맹의 팬은 1,000명 이하. 아니, 그보다 훨씬 적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대다수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아라베스크를 보는 게 된다.
의미를 알고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것과 모르고 감상하는 건 천지 차이다.
아라베스크는 뮤직비디오에서도 알 수 있듯 서사성이 짙다. 가사도, 안무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도 서사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 서사를 전달할 비주얼적 도구, 뮤직비디오가 현재의 소녀연맹에게는 없다.
“그런데 만약, 소녀연맹이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에게도 서사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건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물’이란 단어를 가르치는 작업과 같을 것이다.
사물에 이름이 있단 것도 모르는 헬렌 켈러를 붙잡고 깨달음을 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번 소녀연맹에게 주어진 과제도 그러하다.
보통 사람들은 춤이란 음악에 붙는 움직임의 덩어리로만 생각한다.
강세가 있는 파트에 눈에 띄는 포인트 안무를 넣고, 박자가 빨라지는 곳에서 걸음이 빨라지는 식으로.
그렇게, 사람들은 춤이란 음악에 붙여지는 것으로만 여긴다. 그렇기에 춤만의 서사가 있단 사실을 무대만 보고 깨닫는 건 힘들다.
설령 서사가 있단 것을 알아도 그 서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힘들다. 힘들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소녀연맹은 케이어스를 이기는 게 됩니다.”
그 정도의 호소력을 퍼포먼스로 발휘할 수 있을 경우, 판매량과 인기를 기준으로 태클을 걸 수는 없으리라.
그만한 실력의 아티스트라면 피날레에 서는 게 당연할 테니까.
“그럼 이길 자신은요?”
홍연헌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띠었다.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선언한 이 남자는 어떻게 대답할까.
어렵지만 기대해 볼 만하다?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소녀연맹을 믿는다.
그녀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
과연 어떤 변명이 그의 입에서…….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예상을 깨고, 성필은 단언했다.
“우리 애들이고, 제가 프로듀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