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주변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분위기가 달라졌으며, 또한 정말 바람의 방향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바람은 조아라를 향해 있다. 동시에 조아라를 중심으로 이상 현상이 펼쳐졌다.
‘이상해.’
백댄서 이명철은 그것을 여실히 느꼈다.
다른 댄서들의 반응도 살피고 싶었으나, 조아라를 중심으로 퍼진 퍼포먼스의 기세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다른 댄서들도 이 변화를 느끼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모를 리가 없어.’
댄서라는 명함을 달고 있다면 모를 수가 없으며 몰라서도 안 된다.
시각과 청각에는 시차가 있다. 같은 현상에서 전달되는 시각, 청각 정보는 인간에게 다른 타이밍으로 받아들여진다.
청각이 더 빠르다.
30프레임. 1초를 30개로 나눈 것. 예를 들어 영상이 30프레임이라면, 1초에 30개의 정지 장면이 재생된다는 뜻이다.
이를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건 음악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영화의 음악 감독이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가끔 이러한 현상을 겪는다. 그리하여 1/30초에 현상과 소리를 정확히 일치시키게 하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하지만 곧 깨닫고 만다.
청각이 더 빨라서, 1/30초라는 짧은 순간에 소리와 장면을 일치시켜도 완벽하게 두 감각이 통합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조아라의 춤은 곡의 미세한 타이밍에마저 일치하고 있단 느낌이 든다.
이명철이 박자에 민감한 댄서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그러나 착각일지도 모른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다들 조아라를 타이밍의 표준이라 느끼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정합(整合)이다.
조아라는 시계와 같았다.
‘사람들이 시계를 보고 일정을 조정하고 행동 패턴을 짜는 것처럼…….’
댄서들의 감각이 조아라에게 집중되어 있다. 다들 무의식적으로 조아라를 표준으로 삼고 있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아라베스크’의 곡보다 조아라의 움직임을 더 정확히 여기는 것이다.
그 순간 조아라에게는 힘이 생긴다.
시계로서, 인간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다.
‘빨라……!’
이명철은 마음속으로 신음하면서도 조아라의 춤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아라가 이 무대의 표준이 되었기에, 댄서들은 그녀가 만들어내는 흐름을 억지로 따르게 됐다.
조아라가 팔을 뻗는 속도와 동선을 바꾸는 걸음은 명백하게 빠르다. 이대로라면 박자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어?’
어긋나지 않는다.
‘박자가 맞아.’
깨달음이 이명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아라는 박자를 수십 개로 쪼개어, 그 끝의 박자에 움직임을 맞추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식별하기도 어려운 아주 짧은 순간의 한 박. 그 찰나의 순간을 조아라는 끝의 끝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춤이 더욱 힘차고 무게감 있게 느껴진다. 이와 같은 속도감을 구현하기 위해선 남성과 같은 근력과 민첩함이 필요하다.
조아라에겐 힘들 텐데도, 그녀는 너무나 여유롭게 박자를 사용했다. 마치 박자가, 시간이 무제한으로 주어진 것만 같다.
‘무대가 저 어린애한테 끌려가고 있어.’
끌려가고 있다.
올바른 방향으로.
아라베스크가 갖추어야 할 본래의 모습으로.
투쟁과 저항, 연대와 생존 의지. 그러한 ‘아라베스크’의 거친 주제를 드러낼 수 있는 격렬하고 화려한 안무로 끌려간다.
아니, 나아간다.
올바른 방향으로……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까부터 이명철은 시선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들, 왜 우릴 보는 거지?’
수천 명의 시선이 아이돌인 소녀연맹이 아니라 백댄서에게로 향할 때가 있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사람이 무대에서 한눈에 담고 신경을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은 3명에서 5명 정도다.
그래서 아이돌은 중앙에 설 인원을 파트에 따라 세심하게 짜며, 소수가 소외되지 않도록 포메이션을 순환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건 아이돌을 위한 것이다.
백댄서는, 백댄서 따위에 신경을 기울이는 아이돌 팬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명철은 명확하게 느꼈다. 관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할 때가 있다고.
예를 들어 지금.
‘백댄서의 2/3가 외곽에서 포지션을 좁혀온다. 그리고 소녀연맹은 가장 중앙에서 결속을 확인하듯 가까이 모여 소극적인 춤을 춘다. 그리고 나머지 백댄서 1/3은 소녀연맹 주변을 벽처럼 두른다. 그녀들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이 파트가 뮤직비디오에서는…….’
분노한 민중들이 마린스키 극장의 무대를 향해 무기와 횃불을 들고 다가온다.
그리고 극장 스태프와 어른 무용수들이 무대의 바깥을 벽처럼 막는다. 그 벽의 안에는 어린 발레리나들, 소녀연맹이 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분노에 찬 민중들을 비춘다. 지금 이 안무도 그와 같다.
2/3의 댄서들이 점점 안쪽으로 좁혀온다. 이명철도 그중의 한 명…….
‘설마.’
이명철은 소름이 돋았다. 사람들이 왜 자신을 보는지 알아냈기 때문이다.
애초에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의 주역은 분노한 민중들이니까. 그들의 분노에 찬 표정에 험악한 몸짓이 주요한 주제니까.
그러니, 이명철과 2/3의 댄서들을 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이해한 거야? 관객들이?’
‘아라베스크’의 스토리를 이해했다고?
‘16,000명의 관객들이 전부?’
그들이 모두 소녀연맹의 뮤비와 세계관을 알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이해시킨 거다.’
퍼포먼스만으로, 소녀연맹을 모르는 이들에게 ‘아라베스크’의 스토리를 알린 것이다.
이명철은 이해했다. 어째서 조아라가 소녀연맹의 메인 댄서인지.
‘춤을 가장 잘 춰서가 아니야.’
조아라가 춤으로서 소녀연맹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소녀연맹의 안무 퍼포먼스는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녀를 필두로 ‘아라베스크’는 종막을 향해 달려간다.
* * *
보기만 해도 내용이 이해되는 무용들이 있다.
라벨의 볼레로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등.
물론 그 무용들은 무용수의 표현력을 전제로 한다. 무용수의 실력을 담보로, 관객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극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춤만으로 내용을 이해시키는 것도 가능한데, 가사가 붙은 아이돌의 퍼포먼스라면 무엇이든 못 하겠는가.
‘하지만 가사가 붙은 노래로도 한계가 있어.’
조아라는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노래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타인에게 설득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춤이 필요해.’
만약 관객에게 ‘세계관을 이해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춤이 필수적일 것이다.
퍼포먼스의 감동은 이해로부터 온다. 퍼포먼스의 내막에 깔린 비하인드 스토리나 세계관을 이해하면 사람의 가슴을 더욱 진하게 울릴 수 있다.
‘그건 관객의, 팬의 노력을 요구해.’
곡의 세계관을 미리 알지 않고서야, 퍼포먼스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아라베스크는 가능하다.
백민정이 만들어낸 걸작 군무. 마치 단막극과 같은 형식의 아라베스크 안무라면, 처음 이 곡을 듣는 사람조차 이야기를 이해시키는 게 가능하다.
단, 아라베스크를 재현하는 이들의 실력이 뒷받침될 때만.
이 단막극을 연기할 충분한 자질이 있을 때만, 안무가 백민정의 걸작은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소녀연맹과 백댄서들은 그 자질과 실력에, 이 무대에 올라서야 마침내 도달했다.
‘다들 보고 있어?’
마음속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조아라는 희열을 느꼈다.
관객석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함성이 조금 더 늘어났으나 본질적으로는 아까와 비슷했다. 여전히 조용했다.
그렇다, 조용하다.
마치 연극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처럼.
‘느끼고 있는 거지?’
고요하고 진지한 분위기는 여타 예술 작품의 관객들을 연상하게 했다.
그들은 형광봉과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무대를 올려다보는 게 다를 뿐, 발레나 연극을 보는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한 거지?’
2절 벌스가 끝났다.
이제 브리지와 하이라이트 직전의 프리코러스를 거쳐서, ‘아라베스크’의 마무리인 최종 하이라이트로 진입한다.
장하양의 이마와 턱에는, 떡칠한 헤어 스프레이가 보람도 없이 땀으로 인해 몇 가닥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장하양은 그것을 정돈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대에 퍼포먼스에 집중해선 랩을 했다.
그녀의 랩에 관객들의 귀가 쫑긋한다.
관객들은 장하양이 내뱉는 가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과연 소녀연맹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하단 투였다.
이어서 리드 보컬인 신아름과 리카가 브리지 이후의 프리코러스를 이어받는다.
장하양과 조아라로선 재현하기도 힘든 고음의 프리코러스. 그것은 종막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전조로서 손색이 없었다.
두 사람의 보컬로 이루어지는 하모니와 화음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고, 가련했다.
소녀연맹은 분노한 민중을 향해 최후를 준비한다.
메인 댄서 조아라가 중앙에 섰다.
중앙에 서니 더욱 잘 느껴진다. 무대와 관객석은 이미 하나의 공간과 같았다.
아티스트와 관객이 포함된 특수한 공간. 그 안에서 두 종류의 인간들은 함께 호흡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인류학자와 민속학자, 문화학자들이 오래전에 이론화한 ‘축제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인간의 정신을 하늘 높이 올려보내는 흥분 상태가 창조되는 공간이다.
모든 아티스트, 아이돌, 공연자가 목표로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 안에서 소녀연맹이 하이라이트에 진입했다. 일렬로 서서 서로의 팔짱을 굳게 끼고, 행진한다.
그녀들의 뒤로 30명에 이르는 백댄서들도 행진에 동참한다.
총 35명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군무(群舞).
조금의 엇나감도 허용하지 않는 군대의 퍼레이드와 같은 절도.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으로서의 예술.
‘들어라.’
조아라는 마치 자신이 노래하기라도 하듯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녀 대신, 백설하가 직접 외쳤다.
3옥타브 파 진성 고음.
동시에 무대 외곽 아래에 설치된 화약이 폭발하여 드높은 불기둥을 연속해서 만들어냈다.
전쟁과도 같은 폭발음, 백설하의 입에서 터지는 공명, 35명이 만들어내는 발걸음.
그리고, 지금껏 끈질기게도 입을 다물고 있던 수천 관객의 환호성.
이 모든 게 합쳐져 퍼포먼스가 되었다.
3분 30초에 이르는 짧은 시간 동안, 소녀연맹은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들에게 ‘아라베스크’를 이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보아라.’
이건 ‘아니’ 때부터 시작된, 투쟁과 저항의 이야기.
‘들어라.’
‘롱 포’에서 이어져 온, 모든 사람이 함께 꾸어온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
‘우리가.’
기립하시오, 당신도.
‘소녀연맹이다.’
소녀연맹의 서사는 ‘아라베스크’로써 막을 내린다.
조아라는 태양처럼 밝던 조명이 조도를 줄여가자마자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그녀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마와 턱선을 타고 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짙게 바른 메이크업이 녹을 정도로 많은 땀을 흘렸다.
또한 공연자의 기본적인 매너인 여유마저도 잊어버린 듯, 엔딩 포즈를 취하면서도 볼품없이 거친 호흡을 자랑했다.
아이돌로서는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보여줘서도 안 될 모습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야유나 비웃음, 침묵이 아닌.
──────!
케이어스의 무대가 끝나고 들었던, 이 무대의 옆에 서 있을 때 들었던, 귀청이 떨어질 듯한 환호와 박수였다.
누가 지금 무대에 선 소녀연맹을 보고 야유하거나 침묵할 수 있을까.
복제품이 존재할 수 없는 고고함.
오로지 하나뿐인 현존성.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에너지.
소녀연맹이 구현했던 ‘아라베스크’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아우라의 조건에 합치했다.
무대에서 아우라가 흘러넘친다.
* * *
“정말이었네.”
‘아라베스크’ 무대가 끝난 뒤, 홍연헌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면서 미묘한 인정을 보냈다.
성필이 ‘케이어스를 무대에서 이긴다’고 했던 건 일말의 과장도 없었다. 그런 말을 할 자신감이 있을 만했다.
“이 정도면…….’
이 정도의 아이돌이라면, 자신이 직접 콘서트를 짜보고 싶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아티스트란 아티스트의 공연을 죄다 보아왔던 홍연헌으로서도 가슴 뛰는 무대가 아닐 수 없었다.
“박 이사님은…….”
홍연헌은 성필에게 이야기를 꺼내 보려다가, 미소를 지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성필에게 일 이야기를 꺼내면 실례일 듯했다.
성필은 울고 있었다. 질질 짜거나 오열하는 게 아니라, 무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한두 방울씩 흘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빛이 흘러넘쳤다.
빛, 소녀연맹. 그녀들이 내뿜는 아우라가 성필의 눈동자에 그대로 반사되어 찬란한 밤하늘을 만들어냈다.
“박 이사님, 어떤 기분이세요? 저런 아이돌을 직접 만들어낸 소감은.”
성필은 목구멍에 들어찬 눈물을 삼키고 미소를 지었다. 입을 열자 그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목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지금, 죽어도, 좋아요.”
홍연헌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담백하게 답했다.
“흐음, 그렇구나.”
이해한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