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꿈인가 싶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꿈에선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백설하의 상태도 그러했다. 그녀는 전광판에 뜬 소녀연맹이란 이름을 보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멤버들이 나서야 했다.
장하양이 백설하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신아름이 끌어주었다. 그제야 백설하의 다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설하는 무대 위에 서고도 한동안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마치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선 것만 같은 태도라, 다른 이들이 능숙하게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별세계의 일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소녀연맹의 소감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리더인 백설하가 대표로 마이크를 받았다.
트로피를 안은 이 순간에도 본상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지만, 그녀의 입은 정직하게도 소감을 말했다.
원래 넥스트 스타 상을 대비해서 준비해왔던 것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수상 소감인 건 차이가 없다.
“인민 여러…….”
시작하자마자 실수가 나왔다.
이전에 뮤직 스테이지 1위 소감 때, ‘인민 여러분’이라는 말 때문에 방통위에서 경고를 주었다고 한다.
백설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소감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감사를 전해야 할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인민이들 고마워요. 인민이들 덕분에 받게 된 상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정말. 사랑해요 인민이들!”
아아, 그리고 또 뭐더라.
백설하는 곤죽이 된 머리로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관객석의 앞에 앉아 있는 가로 엔터 인원들에게로 눈이 갔다.
그러자 마음속으로부터 소감이 나왔다.
“지음 오빠, 아니, 정지음 프로듀서님 좋은 곡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눈은 가장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천천히 향했다.
앉은 순서를 따라 감사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하는 건 아니었다.
소감을 위해 준비된 1분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 이름 한마디라도 불러주는 것은 감사 중의 감사였다.
“항상 저희를 케어해주시는 민경섭 팀장님 감사합니다.”
시청자들이 보기엔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이름과 직책의 이어짐은, 아이돌의 입장에서는 몇 초 안에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 표시다.
누군가는 회사의 눈치를 봐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늘어놓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친근하게 다가와 주시는 손혜빈 이사님 감사합니다.”
무대에 서서 발언권을 얻은 순간부터 나오는 말 중, 아이돌의 진심이 아닌 것이 없다.
백설하의 입에서 나오는 건 이름과 직책, 그리고 ‘감사합니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회사 임직원들과 헤쳐나갔던 수많은 고난의 나날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저희를 지지해주고 격려해주신 한구인 이사님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가 절반을 넘었을 무렵, 백설하는 문득 자신의 손에 들린 트로피의 무게를 느끼게 됐다.
“회사 들어올 때부터 믿음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 주신 홍규헌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윽고 백설하의 시선이 마지막에 이르렀다. 성필이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박성필 이사님…….”
소감이 막바지에 이르자 백설하도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목구멍으로부터 나오는 흐느낌을 막지도 못한 채 잔뜩 울상을 지었다.
“박 이사님, 박 이사님…….”
도저히 수상 소감 따위 떠올릴 수가 없었다. 3년 전, 성필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현재까지가 영화의 장면처럼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하나하나가 백설하에게는 보물과 같았다. 그리고 그 보물들이 현재와 겹쳐 눈물 없인 이 자리에 서는 게 불가능할 지경까지 왔다.
“박 이사니임, 감사…….”
망가진 테이프처럼 ‘박 이사님’만을 말하는 백설하를 보고 사람들은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신인상만 받고도 우는 아이돌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데 소녀연맹은 무려 본상을 받았다.
중소 기획사의 기적을 몸소 체험하고 있으니 감정이 격해져도 이해할 만했다.
백설하의 흐느낌은 장하양이 귓속말을 해주고서야 끝났다. 장하양도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백설하를 진정시킨 것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땅만 보고 있었으니, 그나마 장하양의 상태가 가장 나았다.
“아, 아, 그리고.”
백설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것을 깨닫곤 황급히 인사를 마무리했다.
이 자리에 서서 함께 빛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을 향해 짧고도 강렬한 감사를 전했다.
“우리 멤버들 감사합니다. 다들 고마워…….”
* * *
“야, 지음아, 일어나.”
뮤직 어워드가 끝났다. 하지만 정지음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잠에 들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잠이 든 게 아니라 기절한 것이었다. 그는 전광판에 ‘Long For’가 뜨자마자 전기 충격을 당한 물고기처럼 펄떡이더니 이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다.
본상을 받을 당시에는 다들 무대만 보느라 몰랐는데, 뮤직 어워드가 끝나니 정지음이 축 늘어져 있는 게 아닌가.
“지음아.”
성필이 어깨를 거칠게 흔들자 정지음도 서서히 눈을 떴다.
“형……? 어, 제가 왜…….”
“너 기절했었어.”
“왜요……?”
“‘롱 포’가 본상 받았…….”
“그거 환각이 아니었구나!”
정지음은 다시금 전기 충격을 당한 물고기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조금 추한 꼴이긴 했으나, 다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현재, 작곡가로서의 정지음은 커리어 하이를 찍어버렸다. 그가 만든 곡이 HPT 뮤직 어워드의 본상을 받은 것이다.
이제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곳곳에 알려졌다. 앞으로 그에게는 곡 의뢰가 쇄도하리라.
“이상한 짓 그만하고 빨리 일어나. 뮤직 어워드 끝났어. 우리도 가야지.”
주변에선 안전요원과 스태프들이 관객들을 향해 끝도 없이 외쳤다.
앞 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하라, 안내선을 잘 따라서 나와달라, 밀지 말아달라 등등.
16,000명에 이르는 사람의 퇴장을 유도하는 건 입장시키는 것보다도 힘든 일임이 틀림없다.
“설마 ‘롱 포’로 본상을 받을 줄은 몰랐어요. 저 이제 인기 작곡가 반열에 오른 걸까요? 아, 그런데 조금 아쉽기도 하네요. 밴드 사운드 쪽으로 의뢰가 들어오는 거면 남돌일 텐데, 저는 남돌 음악을 만든 경험은 적어서…….”
정지음은 나가는 도중에도 봄날의 새처럼 입을 쉬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만이 아닌 표정에서부터 행복이 보이다 못해 아예 흘러넘쳤다.
“지음이 이제 돈 좀 벌었잖아.”
홍규헌은 정지음의 텐션에 맞춰주면서 물었다.
“뭐 먼저 살 거야. 역시 차인가?”
“저 면허가 없어서요. 면허부터 따야 할 거 같아요. 아, 근데 산다면 역시 음향 장비라던가 그런 쪽으로 사고 싶네요.”
홍규헌은 잘못 걸려버렸다.
정지음은 작곡가로서 자신의 청사진을 쭉 그렸는데, 전문 용어가 잔뜩 있어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홍규헌은 지루한 티도 내지 않고 정지음의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 깊게 들었다.
오랜 세월 바닥만을 기다가 이제야 구름을 뚫고 비상하게 된 작곡가의 한풀이 아닌가. 사장으로서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애들 보면 뭐라고 해주지?’
성필의 신경은 소녀연맹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중 그녀들에게 할 칭찬을 가다듬느라 바빴다.
그때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매캐한 냄새가 전해졌다. 성필이 고개를 들자 2층의 FOH가 보였다. 홍연헌이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결국 뭐였던 걸까.’
성필은 아직도 왜 홍연헌이 자신을 갑자기 FOH로 끌고 갔는지 의문이었다.
정말 무대 해설을 부탁하기 위함이었을까? 물론 그것도 합당한 설명이긴 하다. 이왕 보는 거, 업계인의 시야에서 무대를 감상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으니까.
그 순간 홍연헌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향했다. 이윽고 성필과 홍연헌의 눈이 맞았다.
‘잘 가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멀어서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그녀의 입 모양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성필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홍연헌이 다시 말했다.
‘다시 만나요.’라고.
성필은 마찬가지로 가볍게 인사하곤 다른 이들의 뒤를 따라갔다. 돔 내부로 들어와서는 소녀연맹 멤버들을 찾았다.
그녀들은 지정된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서 무언가 들뜬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가로 엔터 임직원들을 발견하곤 반색하며 다가왔다.
가장 빠른 건 리카였다. 그녀는 팔을 활짝 펼치고 거의 전속력 달리기에 맞먹는 속도로 다가왔다.
그 목표는 의외로 성필이 아니라 홍규헌이었다.
“사장님!”
홍규헌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보다 키가 거의 10cm는 큰 아이를 품에 안았다.
“저희 상 탔어요!”
“어, 그래. 축하해. 고생 많았어.”
“목덜미 만져도 돼요?”
성필은 포함한 임직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리카는 곧장 홍규헌에게 ‘목덜미 만져도 돼요?’라고 묻곤 했다.
나름의 친근감 표현인지 진짜로 목덜미를 만지는 게 목적인지는 몰라도, 홍규헌은 항상 안 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래, 마음껏 만져.”
“얏타(해냈다)!”
리카가 홍규헌의 목덜미를 조몰락거렸다.
“허읏…….”
갑자기 터져 나온 신음에 임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그건 리카도 마찬가지였고, 홍규헌도 다를 게 없었다.
홍규헌이 거칠게 리카를 밀었다.
“이제 가.”
“2초밖에 안 지났는데요!”
“대상 받으면 마음껏 만지게 해줄게.”
“에에, 비싸게 굴지 마세요.”
신아름이 리카의 발목에 로우킥을 먹였다. 리카는 ‘끼에에에엑!’ 소리를 내면서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리카 너 상 받았다고 벌써부터 막 나가는 거야? 사장님이 사장님으로도 안 보여?”
“친밀감 표현이었는데에!”
리카는 조아라의 품에 달려가서 안겼다.
한바탕 소동이 있고, 임직원들은 늦게나마 소녀연맹 멤버들과 온전히 마주 볼 수 있었다.
백설하는 가장 앞에 서서 기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말로는 마음을 전달하기 힘들다고 여겼는지 본상 트로피를 내밀었다.
홍규헌이 그것을 받곤 형광등 아래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당연하지만, 금이 아니네.”
“헤헤, 저도 그것부터 확인했어요.”
“백설하. 자랑스럽다.”
백설하는 코끝이 찡하여 대답은 돌려주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홍규헌은 그런 백설하를 향해 미소와 함께 트로피를 돌려주었다. 그녀의 시선은 백설하의 뒤에 선 멤버들에게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리카, 조아라, 장하양, 신아름, 너희 전부 다…… 아니.”
홍규헌이 말을 고쳤다.
“아라, 하양이, 아름이.”
그녀는 한 명씩 눈을 맞춰가면서 이름을 불렀다. 항상 성을 붙여 불렀던 홍규헌이 이름만 불러주자 감흥이 남달랐다.
멤버들은 데뷔 당시, 성필이 백설하를 향해 ‘설하 씨’가 아닌 ‘설하’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맛보았다.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해지는 기분.
그 묘한 따스함과 흥분을 느끼면서 멤버들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마지막 차례는 리카였다.
리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드디어 자신이 받기에 온당한 대접을 받는단 듯이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시카와 리카.”
“에에에에엑?!”
“다들 정말 자랑스러워. 고마워, 진심으로.”
“왜 아타시(저)만 풀네임인가요!”
“너희들은 우리의 꿈 그 자체야.”
“무시?!”
홍규헌은 보기 드물게도 긴장이 완전히 제거된 태도였다. 그녀는 피시시 웃으면서 리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런데 신장 차이가 10cm 정도가 되어서 어깨동무가 굉장히 불편했다. 곧 홍규헌은 자신이 얼마나 웃기게 보일지 깨닫고는 급히 어깨동무를 풀었다.
“사장님 카와이(귀여워).”
방금 말은 성필이 했다.
“혼또니 카와이(진짜로 귀여워).”
방금은 리카가 했다.
“됐고……. 시간이 오래되긴 했는데, 너희들이 원하면 뭐든지 먹여줄게. 먹고 싶은 거 있어?”
“저희끼리 회식하면 다른 분들한테 미안해요! 다음에 직원분들 전부 다랑 같이 먹어요!”
“이시카와 리카는 마음씨도 곱네.”
“언제까지 풀네임으로 부르실 건가요?!”
“진짜 다들 괜찮아?”
백설하가 대표로 답했다.
“저희 할 일 있어서요.”
“할 일?”
“네. 숙소에서 라이브 켜야죠. 인민이들한테 감사 인사 전할 거예요.”
“아…….”
홍규헌은 뿌듯함을 느꼈다.
어디에 또 소녀연맹 같은 그룹이 있겠는가. 시상식이 끝났으니 피곤할 만도 하건만, 또한 보상받고 싶을 마음도 클 텐데 숙소로 가서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겠다니.
이렇게 효도 잘하는 아이돌 또 없다.
홍규헌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어려진다면, 덕질할 아이돌은 소녀연맹밖에 없으리라고.
가로 엔터의 인원들은 담소를 나누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만나는 사람마다 기획사의 관계자들이었건만, 인사의 열기는 방송국과는 달랐다.
인사를 하더라도 고개만 까딱하는 수준이고, 다들 회사 사람들이나 그룹 멤버와 이야기하기 바빴다.
“내년에는 더 좋은 결과가 있겠지.”
“너희 무대에서 진짜 빛나더라.”
“이번에 시에이스 선배님들 미쳤지 않냐?”
그런 대화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회사마다 한 해의 농사 성적을 되새김질하는 자리라고 볼 수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다들 들뜬 분위기였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작년의 소녀연맹처럼 박수 기계 역할만 했던 그룹들이 그러했다.
성필은 그런 그룹들을 보면서 자기 일도 아닌데 씁쓸함을 씹는 것만 같았다.
민경섭은 어딘가 먼 곳을 쳐다보는 듯 시점이 흐려졌다가 성필에게 물었다.
“형, 엡실론 애들이 본상을 몇 년 차에 받았죠?”
성필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깐의 회상이 필요했다. 석세스 엔터에서 엡실론을 맡던 건 꽤 오래전이었으니 말이다.
“3년 차였지 아마.”
“그러네요. 와, 그때도 3년 차가 진짜 빠른 거라고 그랬었잖아요.”
“그치. 그땐 진짜 파티 분위기였었…….”
“팀장님, 매니저님.”
신아름이 성필과 민경섭의 사이로 치고 들어와 어깨동무를 시도했다. 신장 차이가 너무 나서 신아름이 매달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옛날 회사 얘기하기 있기 없기?”
“쏘리.”
민경섭은 사죄의 뜻으로 신아름의 팔을 목에 꽉 두르고 위로 올렸다. 성필도 그에 맞춰서 신아름을 들었다.
신아름은 그네라도 탄 것처럼 두 남자의 사이에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타시(저)도 해주세요!”
“리카는 저리 가. 내 차례 끝나고 해줄게.”
“언제 끝내?”
“밴 앞에서.”
“안 비켜주겠단 거잖아!”
신아름은 주위를 강아지처럼 멤도를 리카를 보면서 우월감을 잔뜩 맛보았다.
성필은 시상식 후에도 건강하기만 한 리카를 보곤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그것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리카는 또 뿔이 났다.
“리카 너 진짜 애냐? 저깟 거 못 타면 어때서 그래.”
“아라쨩은 내 마음 몰라!”
리카는 엄마에게 달려가듯 백설하와 장하양의 사이로 갔다. 잠시 후, 리카는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서나마 그네를 탔다.
물론, 세 사람의 신장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터라 리카가 다리를 접어야만 했다.
“…….”
성필과 민경섭 사이에 매달려 들뜬 티를 한껏 내던 신아름의 기세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성필은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몇 미터 앞, 수많은 인파를 사이에 두고 석세스 엔터의 사람들이 보였다.
글로브와 엡실론, 그리고 소속 아티스트 몇 명과 함께 매니저 팀이 주차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경섭이도 석세스 엔터 사람들 보고 엡실론 얘기 꺼낸 건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엡실론의 멤버들은 옛날과 다른 점이 없었다. 여전히 고등학생들처럼 활기차고 장난도 많이 친다.
글로브는 그런 선배들의 틈에서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는 리더인 라희와 양소민의 모습도 보였다.
‘인사…… 하고 싶은데.’
주차장으로 가면 말을 걸 시간도 나지 않을 것이다.
소녀연맹이 본상을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건을 앞에 두고 석세스 엔터로 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사장인 홍규헌도 보고 있으니.
‘아마 기회는 오지 않겠지.’
글로브의 팬사인회에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던 성필이지만, 오늘에도 그럴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팬사인회에 찾아갔던 때도 눈치가 썩 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진짜 아니다.
‘우리 애들만 보고 있기에도 바빠. 다른 그룹 애들이랑 얘기를 나눌 수는 없지.’
글로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후일로 미뤄야 할 것이다.
주차장도 돔 내부처럼 붐볐다. 하지만 이미 빠져나간 이들이 꽤 되어 돔의 복도처럼 가만히 있는 것에도 기가 빨릴 정도는 아니었다.
민경섭은 밴에 멤버들이 다 탄 것을 확인하곤 운전석으로 향했다. 다른 임직원들도 멤버들에게 인사한 뒤, 나누어 타고 온 차로 향할 것이다.
성필은 차창을 두드렸다.
차창 유리가 내려가자마자 리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리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정말 바로 숙소로 가도 돼?”
“인민이들 보는 게 더 중요해요! 박 이사님도 빨리 집에 가셔서 저희 라이브로 외로움을 달래세요!”
“그래.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 근데 얼굴 좀 비켜주면 안 돼? 다른 애들 얼굴도 보고 싶은데.”
“제 미모로 참으세……!”
신아름이 리카의 얼굴을 시트 쪽으로 밀어버리고 얼굴을 내밀었다.
“팀장님 오늘 우리 무대 좋았죠?”
“어, 진짜 역대급이야.”
그 후로도 멤버들과 한 명씩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자긍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본상의 무게란 그 정도였다. 게다가 케이어스와 같은 상을 받았기에, 본상이란 이름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소녀연맹은 이제 진정으로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으리라.
“설하야, 애들 빨리 재워.”
“네, 걱정 마세요.”
“리카 심야 방송 못 보게 하고.”
“아타시(저)는 이제 어른이에요! 누구도 뭐라고 할 권리는 없어요!”
“지금 리더의 권위를 거스르는 거야?”
“……쌤이 부탁하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 내일도 스케줄 있으니까 빨리 자야…….”
톡톡.
누군가 성필의 등을 두드렸다. 성필은 홍규헌이나 손혜빈이라고 생각했지만, 뒤로 돌아보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얼굴이 있었다.
“토모다치(친구).”
에리카였다.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주먹을 내밀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성필은 홀린 듯이 그녀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성필은 과거 파리의 숙소 옥상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에리카는 성필의 화답에 아까보다 진한 웃음을 지어주곤, 주변에 있는 가로 엔터 임직원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이랑 잠깐 얘기하려구 왔어요. 아, 혹시 제가 방해했나요?”
“……아니, 뭐어.”
홍규헌은 당황하면서도 괜찮단 뜻으로 성필에게 끄덕여주었다. 성필만 괜찮다면 가보라는 의미였다.
사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리카는 다시 성필에게로 눈을 돌렸다.
“박 이사님, 잠깐 괜찮으세요?”
“어, 음, 나는 괜찮…….”
성필이 무의식적으로 차 안에 탄 멤버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우라기리모노오(배신자아)……!”
울상 짓는 리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