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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246화 (246/760)

246화

홍연헌의 낮게 깔린 목소리. 그것을 듣자마자 성필은 조진만을 떠올렸다.

‘공연 관련해서 제안할 게 있다고? 뭘?’

공연 기획사 사장이 아이돌에게 공연 제안을 주는 거라면 콘서트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혹은 시지프가 기획하는 합동 콘서트 출연 제안이 있을 텐데, 그 정도 일로 시지프의 사장이 중소 기획사로 직접 발걸음을 할까?

‘아니. 단독 콘서트 기획이라도 시지프급 회사의 사장이 여기 온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홍연헌이라는 거물이 가로 엔터로 온 건 오로지 홍규헌이라는 혈연이 있기 때문이다.

“아…… 규헌이 일정을 알아볼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네. 아직 비서가 없겠구나.”

비서를 둘 급이 아니니까.

홍연헌은 이해한다는 듯 성필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확인해주시겠어요?”

“……예.”

성필은 당장 사장실로 뛰어가서 홍연헌의 방문 사실을 알렸다. 그에 홍규헌은 보고 있던 서류를 뭉텅이로 집어서 서랍 안에 넣었다.

“모셔.”

친언니에게 ‘데려와’도 아니고 ‘모셔’란 말을 썼다. 홍규헌도 언니가 쓴 ‘공연 기획 제안’이란 말을 비즈니스적으로 입수한 것이다.

성필은 그녀의 부하 직원으로서 곧바로 하명을 받아야겠으나.

“사장님…….”

“박 이사가 걱정하는 거 알아.”

가로 엔터와 조진만의 아틀라스는 계약 직전까지 왔다. 사업이란 게 계약서에 글자를 새겨 넣기 전까지는 무엇도 확정된 게 없다지만, 사람으로서의 의리가 있는 법이다.

“내가 판단할게.”

“예.”

이 시점에서 성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성필은 홍연헌을 사장실 앞까지 안내했다. 그녀는 성필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 회사의 이사를 향한 예의인 것일까.

털컥. 무거운 소리와 함께 사장실 문이 닫혔다.

동시에 성필은 사무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성필이 왜?”

손혜빈이 바로 반응했으나, 성필의 용무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성필은 경리 권아인을 쏘아보는 한구인에게로 가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홍연헌 사장님께서 오셨어요.”

한구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동요한 티를 내지 않고 성필과 마찬가지로 매우 작은 음성을 유지했다.

“용무는 무엇입니까?”

“공연 기획 관련해서 제안이 있다고 하셨어요.”

“…….”

한구인은 고민 상태에 진입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성필과 비슷한 생각이 떠돌아다닐 것이다.

‘시지프에게 공연 기획을 맡기게 될까?’

‘시지프’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대의 공연 기획사다. 비단 대한민국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 해외를 종횡무진 가로지르기도 한다.

H&P의 콘서트 기획부로부터 독립한 시지프의 인력풀은 국내에서 최고 수준이다. 그들이 소녀연맹의 공연을 기획해주기만 한다면…….

‘콘서트의 퀄리티는 보장받는 거나 다름없어.’

그렇다면 걱정되는 건 돈이다.

콘서트란 건 일단 기획사의 주머니로부터 돈이 나온다. 수익을 예상하여 협찬이나 투자를 받을 수야 있겠으나, 아직 가로 엔터는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아직 여유 자금이 있어 온전히 가로 엔터의 힘만으로 꾸릴 생각이다.

‘사장님의 판단만 있다면 은행 대출을 끌고 오는 것도 되겠지만.’

보수적인 홍규헌의 사업 방침을 보자면, 그녀가 빚까지 져가면서 콘서트의 규모를 키우진 않을 게 자명하다.

‘그런데 혈연 찬스란 것도 있잖아.’

홍연헌의 시지프가 퀄리티를 보장해주면서도 비용을 깎아주거나, 무형의 다른 대가로 받기로 해준다면…….

물론 전부 성필의 망상일 뿐이다. 게다가 그게 옳은 길도 아니다.

“곤란하군요.”

한구인의 말대로다.

“조건이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아가씨…… 홍연헌 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이 훨씬 나을 겁니다.”

하지만 의리라는 게 있다.

아틀라스의 조진만 사장은 소녀연맹의 정규 1집 제작에 도움을 주었다.

애초에 정규 1집은 콘서트의 세트리스트를 고려했다. 그 고려는 조진만의 머리로부터 나왔다. 이후에도 그에게 콘서트 기획을 맡길 생각으로 초반부터 협업을 한 것이다.

“자문료를 제공한 건 맞습니다만.”

법적으로 조진만에게 켕기는 부분은 없다.

“그래도 조 사장님께 맡기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렇죠. 소녀연맹이란 그룹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있단 점에선, 다른 기획사와 비교할 수 없는 이점이 있으니까요.”

아이돌 콘서트의 질을 좌우하는 건 기획자가 지닌 아티스트에 대한 이해도라고들 하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다면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홍연헌 사장님이 억지로 저희 콘서트 기획을 맡기게 한다거나…….”

홍지헌의 사례를 참고하면, 홍연헌이 어떤 짓을 벌인다하더라도 전부 이해할 수 있을 수준이다. 작년 말에는 소녀연맹을 HPT 뮤직 어워드의 1부 피날레로 세워서 KS 엔터 팬들에게 욕을 얻어먹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남정네들끼리 뭐 그리 비밀스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어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손혜빈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딱히 그녀에게 숨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게…….”

그때 한구인의 자리에 놓인 내선 전화에 불이 들어왔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수화기를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한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을 걸쳤다.

“사장님이에요?”

“예. 차를 가져다 달라고 하시더군요. 살짝 지친 음성이셨습니다.”

그 말에 반응한 건 의외로 경리인 권아인이었다. 그녀는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친구들도 대부분 경리직이나 총무직으로 있었다.

그래서 가끔 술자리에서 만나 업무의 고충을 토로하곤 하는데, 몇몇이 차나 청소 심부름 때문에 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들었다.

권아인은 ‘우리 회사가 참 좋은 거구나’하고 우월감을 느끼곤 했었는데…….

“다녀오겠습니다. 아인 씨, 제가 자리를 비우는 게 길어질 수도 있으니 업무 관련 연락이 오면 메모 부탁드립니다.”

“네, 네에…….”

가로 엔터는 이사가 차 심부름을 합니다.

권아인은 멀어지는 한구인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잠시 후, 손혜빈에게 사정을 설명한 성필은 1층의 휴게실로 내려가 한구인과 만났다. 그는 여러 생각이 얽힌 눈빛으로 커피머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이사님.”

“아, 박 이사님.”

“뭔가 다른 사인이라도 받으셨어요?”

“사장님의 어투나 목소리의 고저로 추측하건대, 아마 대화를 멈추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쉴 시간이 필요하신 거죠.”

“그럼 스트레스를 받는 대화를 하고 계신다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습니다.”

이미 가로 엔터는 홍지헌이라는 커다란 적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성필이 본 미래에서, 그는 가로 엔터의 지분을 집어삼켜 회사를 이끌어갔었다. 홍지헌이 그러했었으니, 홍연헌도 비슷한 일을 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런데 왜?’

가로 엔터는 앞으로 성장할 일만 남았다.

굿즈, 일본 데뷔, 콘서트, 이후에도 여러 활동으로 이제까지의 적자를 전부 만회할 것이다.

“중요한 일이라면…….”

커피를 다 받은 한구인이 웨이터처럼 쟁반에 컵을 올렸다.

“대화가 끝난 후, 사장님이 저희를 부르실 게 틀림없습니다. 걱정은 그때 가서 해도 될 겁니다.”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성필은 한구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기어코 사장실 앞까지 와버렸다.

한구인은 문 옆에 숨은 성필을 흘끗 보곤, 적당한 리듬으로 노크했다.

“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어, 한 이사. 고마워.”

홍연헌의 작은 목소리가 방 안쪽에서 퍼져 나왔다. 한구인의 말마따나 그녀는 꽤 피곤한 대화를 나눈 듯했다.

성필은 벽에 착 붙어서 자그마한 단서라도…….

“규헌아, 지랄하지 마.”

턱. 한구인의 구두 굽이 예상치 못하게 땅을 차는 소리다. 성필은 보지 못했으나, 아마 그는 갑작스레 들려온 욕설에 발이 꼬였을 것이다.

성필도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해야 했건만, 직접 그 광경을 본 한구인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언니, 방금, 뭐…….”

“지랄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어.”

“…….”

3초 정도의 침묵 이후, 한구인의 발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컵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두는 소리.

다시금 한구인이 반대로 걸어오는 소리. 그리고 그가 문 근처로 오자마자.

“못 들었어? 지랄하지 마, 규헌아.”

한구인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사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이제 사장실은 다시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한 이사님……?”

성필이 걱정스럽게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성필은 한구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한구인은 분노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왁스로 멋스럽게 고정한 머리를 손으로 휘저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였을까, 한구인은 머리에 새집을 짓자마자 표정을 원상태로 돌렸다.

“제가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네?”

“홍연헌 사장님의 말씀 말입니다.”

‘지랄하지 마’.

홍연헌은 굳이 한구인이 올 때를 기다려서 홍규헌에게 욕설을 한 것이다.

어째서?

“사장님을 모욕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이 홍연헌 사장님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한구인과 성필은 쟁반을 가져다 두기 위해 1층의 휴게실로 향했다.

가는 와중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한구인의 어조는 평소와 다름이 없는 듯했으나, 성필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분노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홍규헌이 욕을 먹었단 게 그토록 분하고 화나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 욕을 먹었더라도 이렇게나 화내진 않는 사람인데.

“한 이사님은 사장님을…… 잘 아시네요. 홍연헌 사장님 쪽이요.”

성필은 어느 의도를 가지고 이 말을 했다. 과연, 한구인도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가 듣고 싶은 대답을 했다.

“사장님의 집안에는 여러 가훈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친구를 잘 사귀어라’는 겁니다. 저는…… 굳이 말하자면, 그 ‘잘 사귄 친구’의 범주에 들어가는 인간입니다.”

“범주에 들어가다뇨?”

“사장님의 아버님은 자제분들의 인간관계에도 관심이 지대하십니다.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저는 선발된 겁니다.”

성필은 한구인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야 재벌들이 딸의 사위로 배경이 없지만 능력은 있는 번듯한 남자를 간택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대상은 주로 법조계 인사나 의료인, 혹은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그런데 친구를 선발하다니?

“아.”

성필은 깨달아버렸다.

“아, 아아, 그래요…….”

“박 이사님?”

“한 이사님이 사장님이랑 미래를 약속한…….”

“무슨 소리십니까?!”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러니까, 친구란 건 파트너입니다.”

“파트너…….”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자식의 비즈니스를 보좌할 파트너 말입니다!”

“아.”

한구인 정도쯤 되면 부족하지야 않을 것이다.

“크흠,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습니다만, 인성도…….”

“사장님 아버님이 사람 보는 눈이 정말 탁월하시네요.”

“……반어법입니까?”

“아뇨. 진담이에요. 그럼 홍연헌 사장님도 그런 파트너가, 음, 친구가 있으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1년에 한 번씩 함께 모이는 자리가 있어서 만나곤 합니다.”

가정사를 전부 다 꿰뚫고 있기에, 자식과 사업을 함께 진행하면서 배신할 여지조차 없는 투명한 친구. 그 친구는 H&P가 두려워서라도 파트너에게 불리한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편집증적인 행위다.

‘사장님의 아버님이 옛날에 친구한테 사기라도 당하셨나.’

부모가 자식의 교우관계에 신경 쓰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재벌쯤 되니 스케일이 대단하다.

“어, 그러고 보니 한 이사님 미국에서 승승장구하시다가 한국으로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H&P 그룹의 청소부 같은 사람들한테 협박당해서 억지로 오신 거예요?”

“……환상이 과하십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온전히 제 꿈 때문입니다. 억지로 만들어진 관계에 우정이 있겠습니까.”

‘우정, 이구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2층으로 올라가던 도중 사장실의 문이 열렸다.

홍연헌이 날카로운 힐 소리를 내면서 계단으로 다가오자, 두 남자는 비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녀는 씨익 미소만 짓고는 거리낄 것 없단 태도로 계단을 내려왔다. 뒤늦게 두 남자가 계단 양편으로 붙었다.

“아.”

홍연헌이 성필의 옆에 멈춰서 그를 빤히 보았다.

“음, 으음.”

그리 이상한 신음만 내곤, 홍연헌은 다시 고개를 홱 돌려선 아래로 내려갔다.

곧, 홍연헌이 왔던 게 환상처럼 회사 안이 고요해졌다.

성필과 한구인은 동시에 서로를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 * *

“아쉽네.”

홍연헌은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전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자매 DC 해준대도 거절하고 있어.”

“난 언니한테 빚지고 싶지 않아. 언니가 손해 보는 내용밖에 없잖아.”

“아주 성격이 큰오빠를 빼다 박았어.”

“……내가?”

“큰오빠야가 어릴 적부터 너를 애지중지하긴 했지.”

“어딜 봐서.”

“막내라서 그런가. 덕분에 지헌이가 너 이만저만 질투한 게 아니었잖아.”

“안 그랬어.”

“그랬는데? 그래, 어린애한테 뭐가 보이겠니. 오빠야의 하해와 같은 사랑이 느껴지지 않든? 너 유리에 머리 박고 머리 깨졌을 때도 맨발로 너 안고 병원까지 달려갔…….”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특별한 일 아니잖아.”

“봐봐. 아주 빼다 박았다니까.”

홍규헌이 피곤한 티를 내자, 홍연헌은 놀리기를 그만두었다.

“거기 회사 이름이 어디랬지?”

“왜. 언니가 가서 깽판 치게?”

“못할 것도 없지. 농담이구, 그냥 우리 규헌이가 일 맡길 기획사면 알아두는 것도 좋겠지 싶어서.”

“아틀라스.”

홍연헌은 ‘아틀라스’란 이름을 몇 번 되뇌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내일 바로 폐업시켜야지.”

“…….”

“농담이라니까. 뭐어, 이제 잡담이나 나눌까?”

“나 바빠.”

“바빠도 시간은 낼 수 있잖아. 요즘 사업할 맛 나서 죽겠지? 이제 돈 벌 일만 남았잖아.”

가족과의 대면이란 홍규헌에게 절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몇 년에 걸친 경멸과 비웃음을 잊지 않는 한, 계속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칭찬은 다른 이야기였다.

홍규헌은 가족들이 껄끄러운 만큼 칭찬에 굶주린 삶을 살아왔다.

“뭐어, 대강은…….”

“마음 같아선 내가 인수하고 싶네. 200억 주면 넘길래?”

“아니.”

“밖으로 나온 지분도 30%밖에 없지? 아니다. 개인 투자자가 10% 가지고 있고, 구인이가 또 5% 가지고 있던가? 그러면…… 10% 정도만 더 밖으로 나오면 내가 먹을 수 있겠네?”

홍연헌은 방이 떠나가라 웃고는 손을 저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렇지?”

대답이 없었다.

그에 미소가 가득했던 홍연헌의 표정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그녀는 동생을 향해 상체를 기울여 눈을 더욱 가까이 맞췄다.

“이 이상 지분 투자받을 생각은 없지?”

“……투자 아니야.”

홍연헌은 이제 경멸까지 곁들였다.

“규헌이 너, 설마 설마 하는데, 직원들한테 지분이라도 쏘려는 거야? 초창기 직원들한테?”

“언니랑 할 말은 아니…….”

“맞구나?”

방금까지 사장실을 메우고 있던 화기애애한 공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건 막 걸음마를 뗀 아기를 보는 듯한 걱정과 염려, 그리고 본인보다 낮은 존재를 돌보는 이의 미묘한 우월감뿐이었다.

홍연헌이 그 모든 모멸적인 감정을 담아 말했다.

“상대는 박성필 이사님?”

“…….”

“그래, 너 사업 대차게 말아먹고 구인이랑 박 이사님이랑 으쌰으쌰 열심히 일했다면서? 개국공신이네.”

“……또 그 얘기야? 내가 실패했다고? 아니, 내가 언니야들이나 오빠야들이랑 다른 게 뭔데?”

스타벅스의 CEO였던 사업가는 성공하는 법을 알려달란 질문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실패 없이는 성공하는 법도 알려 줄 수가 없노라고.

사업이란 성공보다 실패에서 배우는 게 많고, 실패함으로써 성장할 동력을 찾는다.

다국적 기업 아마존 또한 모험적 사업을 하는 부서를 따로 만들어 직원들의 실패에 면책권을 부여한다. 설령 수십 조 단위로 돈을 까먹고 사업에서 철수하더라도, 오히려 그 직원들을 중용하는 것이다.

H&P의 회장도 자식들에게 그러한 기회를 주었다. 본 사업을 맡기기 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회사를 꾸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 경험은 학교 교육이나 간접적인 경험으로만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자산이 된다.

그러니 홍규헌의 형제자매들은 저마다 크고 작게 실패의 경험이 있다. 다만, 홍규헌이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

“다른 거? 있지. 아버지가 시킨 분야로 사업 안 한 거.”

“그걸로 몇 년이나 계속…….”

“지금 그 얘기 하는 거 아니야. 변명은 가족들 다 모인 자리에서 해.”

홍연헌의 단호한 태도에 홍규헌은 분노만 삭였다. 홍연헌은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아까 대화에서 이어지던 지분이란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

“규헌아. 직원들한테 줄 돈이 없어? 아니잖아. 왜 굳이 지분을 주려는 거야? 그딴 거, 아주 먼 미래라도 상장해서 먼지만큼 떼주면 되는 거잖아. 굳이 지금 줘야 해?”

“…….”

“네 밑에서 일하는 인간들 전부, 네가 주는 돈만큼의 충성만 바칠 뿐이야. 그렇다고 지분을 주면 더 나아질까? 절대 아니거든. 지금은 너한테 설설 기니까 강아지처럼 귀여워 보이겠지. 근데 너, 네가 안 가진 지분이 45%지? 이렇게 자그마한 회사, 누가 마음먹고 흔들려고 하면 단숨에 정신 못 차리도록 흔들 수 있어.”

막말로, 성필이 지분을 받고 다른 악의를 가진 이에게 팔아넘기면 어떡하는가?

그 악의를 가진 인간이 외부로 돌려진 지분을 전부 얻어내어 홍규헌의 경영자 자리를 박탈하면? 충분한 돈만 있다면 아예 불가능하지 않다.

“BG 인베스트먼트에서 투자받는 대가로 준 지분, 그것도 내가 당장 다 사들일 수 있어.”

당장은 아니더라도, 개국공신이란 이유로 지분을 하나둘씩 돌리다 보면 언젠가는 파국으로 향할 것이다.

그 파국이란 홍규헌이 절대적인 위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중요할 때 홀로 결단하지 못하고 주주들과의 합의가 필요하게 된 상황, 그것이 홍연헌에게는 파국이나 마찬가지다.

“잘 들어, 규헌아. 대학에서도 이미 배웠겠지만,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도구로 쓰길 권장해. 그래야 경제가 성장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일자리도 많아지고 저마다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거야. 넌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어. 인의(仁義)로 공동체가 돌아가던 시대는 지났다고. 저 직원들 저거 다 부품이야. 괜히 부품에 마음 주지 마. 나중에 갈아낄 때 더 힘들잖아. 규헌아…….”

홍연헌이 동생의 손을 따스하게 잡았다.

“우리가 선 곳은 링이야. 상대가 달려와서 내 온몸을 박살 내고 난타해도 구해주러 오는 사람은 없어. 직원들은 링 밖에서 적당하게 응원이나 하는 관객인 거지. 사장은 그렇게 쓸쓸한 자리야. 그러니 링 위에 설 최후의 힘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 언니가 부탁할게, 그러지 마.”

“……언니.”

“그래, 규헌아.”

“언니 시카고 대학 나왔었지.”

“응?”

뜬금없는 이야기다. 갑자기 출신 대학이 왜 나온단 말인가?

“거기, 누스바움 교수 알아?”

“……어, 알지 그럼. 그 사람이 왜?”

“그 교수가 사람을 물화(物化)하는 경우를 종류별로 구분한 게 있어. 거기에 언니가 말한 게 다 있네. 사람을 도구로 여기고, 대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여기고.”

홍규헌은 홍연헌의 손을 부드럽게 떨쳐냈다.

“나는 언니처럼 직원을 도구나 부품으로 여길 순 없어. 인간이잖아. 인간으로 대해야 해.”

“…….”

기분 나쁜 적막 속에서, 홍규헌은 틈을 만들기 위해 한구인을 호출했다. 차를 가지고 오라는 부탁과 함께.

잠시 후, 노크 소리에 이어 한구인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그때까지 홍연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동생을 노려보기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규헌아, 지랄하지 마.”

오랜 침묵 끝에 홍연헌이 욕설을 입에 담았다. 부하 직원의 앞에서 사장을 욕했다.

욕을 얻어먹은 사장은 어쩔 줄도 모르고 놀라서 얼굴만 붉히는 중이다.

“언니, 방금, 뭐…….”

“지랄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어.”

효과는 확실했다.

홍규헌은 가눌 데 없는 치욕에 몸을 떨면서 언니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동시에 불안한 눈초리로 한구인을 흘끔거렸다.

위에 선 자의 권위를 죽이는 것 중, 위에 선 자가 대적할 수 없는 누군가가 등장하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

홍연헌은 홍규헌이 건드릴 수 없는 누군가였다. 그 누군가에게, 사장이 말로 얻어맞는다.

“못 들었어? 지랄하지 마, 규헌아.”

인생 최대의 치욕.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홍규헌은 주먹을 쥐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 * *

“별일 아니었어.”

홍규헌은 자신의 앞에 앉은 두 명의 이사, 성필과 한구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곤 여느 때처럼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둘 다 얼굴 펴. 언니가 ‘시지프’한테 우리 애들 콘서트 맡겨달라고 하더라.”

“……어떻게 답하셨어요?”

“안 된다고 했지.”

그래서 홍연헌은 욕을 했던 것일까. 인성 파탄도 이렇게 심각한 수준일 수가 없다.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대뜸 혈연에게 욕을 들이박다니.

“다들 알겠지만, 우리가 시지프한테 일을 맡길 이유는 딱히 없어. 돈이 훨씬 많이 깨질 거잖아. 5,000석 이상 공연장으로만 투어 도는 것도 아니고, 시지프만 한 능력은 필요가 없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은 필요가 없다.

“HPT 뮤직 어워드 때 언니가 꽤 감명 깊었나 보더라. 뭐어, 그렇게 됐어. 박 이사.”

“예.”

“아틀라스랑 계약 진행하자.”

“알겠습니다.”

성필과 한구인은 면담을 마치고 사장실을 나왔다.

“의외로 사장님 괜찮으신 것처럼 보이네요.”

“예, ‘보이기’만 한 걸 겁니다.”

“……하아.”

하긴, 부하의 앞에서 다른 이에게 욕을 얻어먹었는데 어떤 사장이 평정을 유지할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더라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데, 아는 사람 앞이라면 더할 것이다.

“한 이사님.”

“예.”

“얼굴 좀 펴세요. 그 상태로 사무실에 들어가면 아인 씨가 무서워할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한구인 나름대로 화난 것을 숨기려 얼굴을 굳혔지만,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워 보인다. 그는 무표정보다는 어딘가 멍하니 있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저희, 이번 투어 성공하면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광고해요. 홍연헌 사장님이 배 아프도록요.”

“……예, 꼭 그럽시다.”

* * *

조진만의 아틀라스사와 계약을 체결한 지 하루. 겨우 하루가 지났다.

“갑자기 왜…… 왜 안 맡으시겠다는……?”

[죄송합니다. 다른 일이 잡혔습니다.]

“다, 다른 일이요?”

더 좋은 거래처가 나타났다고 소녀연맹을 내팽개친 건가?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충분했으나, 성필은 다른 가능성부터 떠올렸다.

‘홍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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