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성필과 에리카가 스튜디오를 떠나자마자 공간의 분위기가 삭막하게 변했다.
당연한 일인 게, 리카는 정호환을 어색하게 여긴다. 아니, 아예 껄끄럽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월말 평가마다 뒤에서 무섭게 노려보던 분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둘만 남자 쫄지 말자고 다짐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호환은 평가마다 와서 딱히 하는 말은 없었지만, 연습생들 사이에서 신인개발팀 인원들보다 더욱 두려움 받는 존재였다.
데뷔는 오로지 정호환의 손에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빛이나 손짓 한 번에도 연습생들은 지레짐작 겁을 집어먹으니, 그의 이미지는 거의 괴물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것이다.
리카도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박 이사님이랑 친하게 지내나 보구나.”
정호환이 먼저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그제야 리카도 굳었던 표정을 풀고, 수없이 단련해온 미소를 그에게 보였다.
“네! 친구예요!”
“친구?”
“헤헤, 부럽나요?”
“어른이랑 맞먹으려고 하면 안 되지.”
“에엑?! 친구라구요!”
“쓰읍, 띠동갑 어른한테 자꾸 그러지 마. 자꾸 그러면 할아버지가 혼낸다?”
“정 이사님이 뭐라고 하셔도 저희의 우정은 흔들리지 않아요!”
리카는 묘한 감격에 젖었다.
항상 위로 올려다보기만 할 것 같던 정호환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대화할 순간이 오다니?
KS 엔터에서 나올 때만 해도 인생이 전부 끝났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 이렇게도 풀리는 것을 보면, 세상에는 길이 하나만 있지 않다는 진리가 더욱 선명히 다가왔다.
“슬슬 시작할까.”
“아, 하이(네)!”
자정의 인터뷰 시즌2, 시작!
인터뷰는 그저 질문만 준비해서 이어간다고 잘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인터뷰도 전문적인 기술이나 다름없다.
리카는 자정의 인터뷰를 총 5회까지 진행하긴 했으나 전문적인 솜씨랄 건 없었다.
그럼에도 이 인터뷰가 부드럽게 진행되는 건 정호환의 덕이 컸다. 그는 연륜에 걸맞은 노련함을 발휘함으로써 인터뷰를 부드럽게 이끌어갔다.
“담당하는 아이돌 가이드 녹음을 직접 하신다구요?”
“KS 엔터 초창기부터 그랬지.”
“에에, 저희 회사 지음 오빠 가이드 버전은 항상 설하 쌤이 재녹음해요. 알아듣기 어려워서요. KS 엔터도 그러나요?”
“아니, 내가 가이드로 녹음하면 그게 가이드 최종 버전이라고 봐야지.”
“노래 잘 부르시나 보네요!”
“잘 부르지. 들려줄까?”
그리고 펼쳐진 약 10초의 노래.
리카는 그 순간 동안 자신의 혼이 빼앗겼단 것을 고백해야만 했다.
바로 앞에서 듣는 정호환의 노랫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감성과 보컬리스트로서의 기교가 동시에 갖춰져 있었다.
60이 다 돼가는 남자에게서 이토록 야성적이면서 파워풀한 기세가 느껴지다니.
“어, 엄청 잘 부르시네요…….”
“나는 노래만 거진 40년을 불렀다. 못 부를 수가 없지. 솔직히…….”
정호환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회사에선 내가 열 손가락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엄청난 자신감!”
“젊음을 찾는 기술이 나오면 회사 자본을 다 투자해서 날 젊게 만든 다음 솔로 아이돌로 데뷔시킬 생각이야.”
“말도 안 되는 청사진! 이런 언뜻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비전이 KS 엔터를 대기업으로 올려둔 비결이군요!”
“하하, 비현실적이라고?”
“진심?!”
다음 질문, 노래를 배우게 된 계기는?
“제가 알기론 정 이사님은 철학과 출신이에요! 철학과가 노래를 잘 부르면 안 된단 법은 없지만, 이 노래 실력의 비결은 궁금하네요!”
“때는 80년대.”
“하이(네)?”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유혹할 무기로 노래 한두 개는 갈고닦는 게 일반적이었지. 좀 부르는 애들은 대학가요제를 노리기도 했었어.”
“낭만의 시대네요!”
“통기타를 안 가진 사람이 없었단다. 나도 그 때문에 노래를 배웠고. 지금도 그렇겠지만 노래 잘 부르는 남자들은 인기가 있으니까.”
“잘생긴 남자가 노래 잘 부르면 인기 있는 거예요!”
“그래도 노래가 플러스 요소란 건 부정할 수 없지 않나?”
리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당돌히 말했다.
“아타시(저)는 노래 못 부르는 사람도 좋아요!”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 질문에 리카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고, 그녀는 ‘아이돌에게 이런 질문은 실례예요!’라면서 대화의 머리를 돌렸다.
“항상 회사에서 예쁜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지내시는데요! 혹시 직업적 환경 때문에 부인분과 어떠한 트러블이 있지는 않나요?”
“그런 게 궁금한가……?”
“궁금해요! 기획사 직원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상상 이상이라구요! 언제나 동경하던 아이돌과 같은 공간에서 지낼 수 있잖아요! 오직 그 이유로 기획사 입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라구요!”
“KS 엔터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장 해고할 텐데.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군.”
정호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허물을 벗는 뱀처럼 천천히 리카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 눈에 리카 네가 어떻게 보일 것 같지?”
정호환이 똑바로 쳐다보자 리카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 압박감은 익숙하지 않은 이질감으로부터 왔다.
대다수의 사람이 리카에게 던지는 시선과 정호환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늘로부터 얻어낸 리카의 재능, 외모. 그로 인해 그녀는 ‘호감을 사고 싶다’는 태도에 익숙했다. 하지만 정호환에게선 그런 태도가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 애가 초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할 때 리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잖니. 내 말 이해가 가나?”
“아, 음, 하이(네).”
“리카 넌 내 딸보다도 어려. 회사의 다른 아이돌들도 그렇고. 직장 환경에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고 가정 내 문제가 생기진 않아. 내 아내가 의심할 리가 없잖니. 여보, 보고 있지? 영원히 사랑해!”
“영상 편지 시간 아니에요!”
“뭐, 그렇단다. 박 이사님이랑 비교해도 차이가 확연하지 않나? 박 이사님이 초등학교 5학년, 열심히 볼을 차던 때 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그렇게 차이가 많진 않아요! 겨우 띠동갑이니까요!”
“으하하핰! 겨우 띠동갑? 재밌는 말이구나.”
인터뷰는 마지막으로 다가갔다. 사실 리카가 정호환을 인터뷰하고 싶어 했던 본질적인 이유가 이 질문 때문이었다.
“작곡가로서의 정 이사님한테 질문드리고 싶어요! 혹시 작업을 하다가 막히면 어떻게 하시나요?”
이 질문만큼은 정호환도 빠르게 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작곡가로서 대답을 신중하게 깎아야만 했다.
“의지를 다시 새겨야지.”
“의지요?”
“작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단다. 모로 가든 도로 가든 듣기 좋은 음악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야.”
리카는 뜨끔했다. 방금 정호환의 지적은 리카의 정신 상태와 완벽히 일치했다.
음악이란 게 결국엔 듣기 좋으면 장땡 아닌가? 또한 듣기 좋아야만 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리카의 목표는 언제나 ‘듣기 좋은 곡’이었다.
그런데 정호환이 그 생각을 면전에서 부정했다.
“작곡가가 듣기에 좋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음만 쭉 늘어놓는다고 해서 곡이란 이름을 붙여도 되는 건 아니지. 그건 작곡가가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예술의 어느 방면에든 천재는 있다. 자연스레 작곡에도 천재라 불릴 사람이 있다.
천재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감각과 직감으로, 작곡 프로그램을 보자마자 눈 깜짝할 새 곡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민도 없이 천재의 손길 속에 탄생하는 곡. 오로지 직감으로만 만들어진 곡.
“그건 곡이라고 불릴 수가 없다고 생각해. 재료만 뒀더니 음식이 됐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영감은 결과물까지 보장하는 개념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필요한 건 의지란다.”
이걸 만들겠다.
저걸 만들겠다.
이런 것을 만들고야 말겠다.
“작곡가의 명확한 의지가 있고 나서야 작곡이란 작업이 시작될 수 있는 거지. ‘어딘가에 있을 거다’란 마음으로 어둠 속을 더듬어가는 게 아니라, ‘여기에 있다’란 마음가짐으로 나가야 해.”
반드시 이것이어야 한다.
이것밖에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이런 거다.
“그게 구현된 곡은 설령 서툴더라도 작품이라 불릴 가치가 있어. 리카, 넌 그렇게 곡을 쓰고 있니?”
정호환은 이미 리카의 고민을 꿰뚫고 있던 듯했다.
오랜 세월 작곡이란 분야에 종사해 온 정호환은, 후배의 눈빛만 보고도 심중을 읽을 수 있던 것이다. 혹은 수많은 아이돌을 지켜보면서 쌓아왔던 직감이거나.
“이렇든 저렇든 인정을 받고, 남들이 ‘좋다’라고 말해주는 곡을 만들고 싶을 뿐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면.”
차라리 작곡을 그만두는 편이 자신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타인의 ‘좋다’란 기준에 휘둘려서 나온 곡만 쓴단 건, 태어난 곡에게도 비극이니까.”
“정 이사님도 그런 적이 있으신가요?”
“있지. 웬만한 작곡가들이 거쳐 가는 과정이고, 결국에는 그 기준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그럼 진짜 마지막 질문이에요!”
이 질문은 리카가 준비해 온 대본에 적혀 있지 않았다.
“막연히 사람들에게 ‘좋다’란 평가를 들으려고 작곡하는 게 잘못이라면. 누군가를 위해서 작곡한단 마음은 틀리지 않나요?”
“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마아(뭐어), 하이(네).”
“재밌는 걸 가르쳐줄까?”
이 뒤에 나올 건 선배 작곡가의 금쪽같은 노하우임이 틀림없다. 리카는 눈을 빛내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 첫째는 말을 하다 마는 거고. 둘째는.”
“……?”
“…….”
“……???”
“…….”
“당했다! 끌지 말고 어서 말해주세요!”
“하하, 리카. 그 질문의 답을 듣기엔…….”
넌 너무 어리고 가능성이 창창히 트여 있단다.
* * *
리카는 며칠 동안 수집했던 작곡가들의 노하우를 마음 깊이 정리해두고, 경건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는 홍규헌이 마련해 준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화면 안엔 근래 그녀를 지겹게도 괴롭혀 왔던 텅 빈 작곡 프로그램이 나타났다.
“……요시(좋아).”
떠올리자, 심성의 토양 안에 깔아둔 씨앗들을.
‘전자음악에는 존재하지 않는 연주라는 개념을 떠올리면서.’
정지음의 가르침.
‘상대에게 전하고픈 마음을 담아서.’
엘릭의 가르침.
‘곡으로 구현하고픈 심상의 의지를 담아서.’
정호환의 가르침.
이것들을 비단옷처럼 두르고 리카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약 리카가 작곡하는 광경을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면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항상 장난스럽고 가볍기만 했던 리카에게선 광채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녀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음들은 시시각각 현란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마치 물결에 휩쓸려 풍경을 바꾸는 바닷속 같았다.
흩날리는 잎새, 곧게 자라난 산호, 피어나고 지길 반복하는 무궁화, 부유하는 물고기, DNA처럼 나선형으로 교차하여 하늘로 다가가길 반복하는 쌍향수, 그리고 벚꽃.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다채로운 감성이 리카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음악이란 인간이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졌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리카의 곡에는 인간 본질의 생기가 만연하였다.
‘그렇구나. 곡을 쓰려면 먼저 의지가 필요하구나.’
이 멜로디가 더 듣기 좋을까? 이게 더 괜찮은가? 오로지 멜로디의 감미로움과 음색의 아름다움만 고려해선 찾아올 수 없는 고양 상태.
리카는 해바라기처럼 태양만을 바라고 피어났다. 해바라기가 본능적으로 빛으로 고개를 향하는 것처럼, 리카 또한 헤매지 않고 명명백백한 길로 나아갔다.
‘내 마음이 닿을 수 있게. 이 마음을 곡으로 표현하도록.’
해가 뜨고 달이 떨어지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몰입하는 리카는 무의식적으로 황홀해졌다.
자신의 가슴 속에만 담아두던 심상의 풍경이 현실로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이란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 이걸 위해 작곡을 배워왔구나’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을 작곡을 배워야만 한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람들은 복잡한 언어로 감정을 왜곡하는 대신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 텐데.
‘음악을 이어폰으로 전해지는 극좌표가 아니게. 마치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인더스트리얼한 사운드의 합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이 묻어나도록…….’
이 순간 리카는 자유를 정복한 혁명의 기수였으며, 또한 자유의 환희가 뿜어져 나오는 원천이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느꼈다.
‘다신 이런 순간이 오지 않겠지. 이렇게나 무아인 상태에서 곡을 쓰는 일은 다시 없겠지.’
리카에게 필요했던 건 압박감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녀는 클라이언트가 마음에 들어할까 고민하며 썼던 작품을 지우는 게 아니라, 그저 올곧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환경이 필요했다.
그 환경은 리카 자신만이 만들 수 있었다.
‘무겁게 생각하지 말자.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돼. 나에게 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면, 곡에서 내 마음을 보아줬기 때문일 거야.’
마침내 마우스와 키보드에서 리카의 손이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콘센트가 뽑힌 것과 같아서, 리카의 자아를 밀어내고 솟아올랐던 열정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아쉽다.
아쉽지만, 곡은 완성되었다.
리카는 어두운 방 안에서 몇 번이고 곡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의지가 있어. 마음이 담겼어. 마음.’
사랑이 있다.
* * *
“웨벡스에서 곡 잘 받았대. 괜찮다던데?”
“그게 끝인가요?!”
리카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다리를 오들오들 떨었다. 다크서클이 눈 밑으로 커튼처럼 쳐질 지경까지 혹사해서 만든 곡인데, 돌아온 피드백이 고작 ‘괜찮다’인가?
“이사니임…… 아타시(저) 노력이 전부 부질없이 느껴져요오……. 이런 대우를 받으려고 개처럼 구른 게 아닌데에…….”
“이제 쉬어.”
“뭔가요, 그 귀찮단 대답은.”
리카가 날카롭게 눈매를 세우자 성필은 정말 걱정된단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정말 쉬었으면 좋겠어서 그래.”
비단 작곡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 때문만은 아니다. 리카는 휴가란 말이 무색하게도 회사에 자주 나왔고, 또한 트레이닝도 거르지 않았다.
그건 성필이 보증한다.
‘회사에서 나랑 항상 만났으니까.’
리카가 스케줄이 없었기에, 예전보다 성필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기까지 했다.
성필은 그녀와 수다를 떨 때면 즐겁기도 했으나, 반대로 그녀가 무리하는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너 휴가 받는단 말 들었을 때 울었잖아. 그렇게 좋아해 놓고선 왜 계속 회사에 나오는 거야.”
“쉬고 있는 거예요!”
“응?”
“멤버들이랑 일 이외의 이야기로 얘기하는 시간도 늘었구, 또 박 이사님이랑도 옛날처럼 지낼 수 있게 됐잖아요!”
“옛날?”
“아타시(제)가 가로 엔터에 처음 들어왔을 때요!”
방글방글 웃는 리카를 보면서 성필은 묘한 쓴맛을 씹었다.
리카가 가로 엔터에 들어왔을 초창기만 해도, 성필과 그녀는 거의 항상 붙어 다녔었다.
성필은 타국에서 지내는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했기에 귀찮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또한 리카도 성필을 거리감 없이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둘은 정말 친구와 같이 매일을 즐겁게 보냈다. 하지만 소녀연맹의 데뷔가 다가오고선 그런 관계도 이어질 수는 없었다.
성필은 입안의 쓴맛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리카를 놀리듯이 말했다.
“리카, 슬슬 어린애는 졸업해줘. 언제까지 나랑 붙어 다니려고?”
“마음 같아선 하루 6시간이요!”
“이상하게 구체적이네.”
“나머지 8시간은 소녀연맹 거예요! 그리고 또 나머지는 회사 거구요!”
“애들이랑 여행이라도 가자고 해봐. 너 쉬는 방법을 모르는 거 아니야?”
“이사님의 기준으로 제 행복을 재단하지 마세요! 휴가 이콜(=)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랬어요! 저는 정말 행복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구요!”
그래, 매일 같이 성필에게 한라봉 에이드를 얻어먹고 있으니 행복하기야 하겠지.
지금도 혼잡한 저녁 시간의 카페에서 한라봉 에이드를 흡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리카는 빨대로 한라봉 에이드의 바닥까지 빨아낸 다음, 눈동자에 기대감이란 이름을 별을 박아 넣고 질문했다.
“제 곡은 어땠나요! 작곡가로서 저의 인텐시티와 코코로(마음)가 전해졌나요!”
“아아, 전해졌다…….”
“그럼 말씀해주세요!”
아직 가사 없이 보컬 라인만 붙은 곡에서 성필은 무엇을 느꼈을까.
리카는 성필이 그녀의 자작곡에 들어간 마음을 읽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성필은 항상 멤버들의 마음을 귀신처럼 읽어왔으니까.
“‘위로’지? 삭막한 현대에서 잠깐이나마 팬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던 거잖아.”
“젠젠 지가우(전혀 아니에요)! 사랑이라구요 사랑!”
“너무 화내는 거 아니야? 곡만 듣고 어떻게 주제를 알아.”
“알 수 있다구요! 적어도 박 이사님은 아실 줄 알았어요! 아이돌 노래만 반평생을 들으셨으니까요!”
“아아, 네 마음, 타시카니 우케톳타(확실히 받았다)…….”
“전해진 게 아니라 제가 말해줬으니까 아는 거잖아요! 여기 보세요!”
리카는 성필의 맞은편으로부터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을 테이블에 두고 그녀의 곡을 재생했다.
“이 부분 가사는 이렇게 생각했다구요!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네 덕에 알 수 있을 거 같아. 이 마음은 네 거야. 너만의 거야. 일본어로 해석하면서 들으세요. 다음은 그러…… 이사님?”
아까부터 성필이 너무 조용하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단 뜻이 아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박 이사님 숨 참고 계시는 건가요?”
“크흠, 아니.”
“에, 오늘은 아침에 머리 감았는데! 냄새나나요?!”
“안 나.”
“거짓말하지 마세요! 괜히 상처만 받는다구요!”
“……한방 샴푸 향기 나.”
“그걸 향기라고 하나요?”
“50대 이상에게는 열렬하게 어필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향기야.”
“정말 괜찮은 거죠?”
“응.”
“거짓말! 그러면 숨은 왜 참으셨나요!”
“갑자기 한약 냄새가 확 풍기길래…….”
“역시 싫어하는 거잖아요! 제 취향이 아니라 두피 관리하는 거예요!”
“알겠어.”
이후 변명 시간을 가지고, 성필은 리카의 곡 해석을 20분에 걸쳐서 들어야만 했다.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거라면 미리 가사를 붙이는 게 좋았을 텐데.
슬슬 빈 컵만 두고 카페에 앉아 있는 게 눈치가 보일 무렵, 성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카. 혹시 애들이랑 노는 데 돈이 신경 쓰이는 거면 내가 좀 줄까? 앞으로 언제 휴가가 있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회사에만 나오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아직도 신경 쓰고 있나요.”
리카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서, 웃음으로 휘어진 눈매를 드러냈다.
“이사님, 옛날에 아타시(저)는 아티스트란 건 잘 모르겠다고 했잖아요.”
리카가 무리한 트레이닝으로 탈이 났을 때, 성필이 숙소로 그녀를 간병하러 갔던 적의 이야기다.
“그런데 역시, 남들이 제 곡을 들어준다는 건 기쁘네요. 그러니까 그걸 위해 노력하는 시간은 하나도 지겹지 않아요! 오히려 재밌어요!”
“그럼 휴가받고 운 건 뭐야?”
“그땐 몰랐던 거예요!”
그야 아이돌 활동은 지치지만, 그 이상으로 즐겁다. 가로 엔터에서 보낸 3년은, 리카가 그때까지 쌓아왔던 인생의 밀도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친구랑 있으면 어디든 즐겁죠!”
“대견하네.”
“그런 말도 있잖아요. 못난 놈은 얼굴만 봐도 즐겁다!”
“내 얼굴이 못났다고?! 빨리 취소해!”
“맨입으로는 안 돼요! KS 엔터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리카랑 짝짜꿍하러 떠난 거 사과하세요!”
대체 언제까지 이런 일을 겪어야 할지.
이러다간 멤버들 앞에서 케이어스를 한 명씩 부정해줘야 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신아름 앞에서 김민주를, 조아라 앞에서 진저를 욕한다거나.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어서요!”
성필은 떨떠름하게 말을 고르다가, 꽤 그럴듯한 것을 떠올렸다.
“리카.”
“하이(네)!”
“나는 벚꽃이 핀 정원(桜庭)보다 돌이나 강(石川)이 자연 그대로 있는 들판이나 산이 더 좋아.”
“사과하라니까 왜 이상한 말을 하고 있나요!”
“못 알아듣네…….”
“……에?”
뒤늦게 의미를 해석한 리카가 뿌듯함으로 얼굴을 붉혔다.
“사쿠라바(桜庭)…… 보다 이시카와(石川)가 좋다…… 는 뜻이네요!”
“드디어 닿았나, 오레사마(이 몸)의 마음이…….”
“저도 정호환 이사님보다 박 이사님이 좋아요!”
“그건 당연하잖아.”
“안 당연해요! 이사님이 에리카보다 리카를 더 좋아한단 것만큼 안 당연하다구요!”
“이럴 수가…… 우리가 만들어왔던 유대감은 대체……? 내 경쟁 상대가 몇 번 만나 보지도 못한 정 이사님이야……?”
“앞으로도 경각심을 가지세요! 제가 가졌던 것처럼요!”
“좋은 소식 있었는데 안 알려줘야겠다.”
“엑?! 빨리 말해주세요!”
성필은 리카의 손길에 좌우로 흔들리길 반복하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듯 재빨리 말을 뱉었다.
“웨벡스가 뮤비 풀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준대.”
“네?”
“네가 보낸 곡 있잖아. 카와이 베이스인 곡. 뮤비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준다고 하더라. 그쪽이 더 먹힐 거라고.”
“…….”
리카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서 얼굴을 감추었다.
“헤헤, 아, 죄송, 이제 됐어요!”
감정을 갈무리한 리카는 다시 성필을 바라보았지만, 어김없이 얼굴이 감동으로 일그러졌다.
“어떡해요 이사님…… 안 울고 싶은데 자꾸 눈물이 나와요……! 너무 기뻐요……!”
“나도 기뻐.”
리카가 포옹해달라는 듯 팔을 활짝 펼쳤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짓거리 하지 마라.”
“지금 감동적인 상황 아니었나요?!”
성필은 리카의 선글라스를 바로 씌우고 패딩 모자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수다로 어수선한 카페를 한 번 둘러보더니, 격려의 의미로 리카와 가볍게 포옹했다.
그러고도 리카는 감정을 수습하길 어려워했다. 어쩌면 성필과 포옹해서인지 더욱 감정이 격해졌다.
“어떡하나요, 기쁨이 주체가 안 돼요. 아타시(저), 정말 돼버릴지도 몰라요!”
“그래, 리카 넌 언젠가 될 수 있어.”
카와이 베이스의 신이!
“제 자작곡은 앞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닐 거예요! 언젠가 지음 오빠도 넘어설지도 몰라요!”
“리카.”
“에?”
갑자기 성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서, 리카는 자신이 무언가 말실수라도 한 것이 걱정될 정도였다.
“자작곡이란 말 쓰지 마.”
하지만 이후 이어진 성필의 말은.
“세상 어떤 작곡가가 자기 곡에 자작곡이란 말을 써.”
리카의 가슴을 그 어느 때보다도 따스하게 울려주었다.
“……그렇네요.”
아이돌의 데뷔나 컴백 프로모션 기사에 ‘자작곡’이란 말이 쓰이는 건, 실은 그 단어 자체로 아이돌을 깔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작곡가들은 자작곡이란 말 차체를 쓰지 않으니까.
작곡가들은 ‘내 곡’이라거나 ‘작품’이란 말을 더 많이 쓴다. 애초에 곡을 스스로 만드는 게 당연한 일이니, 자작곡이란 단어가 필요 없다.
“저는 작곡가니까요! 곡을 만들 수 있는 게 당연하니까요!”
“맞아, 리카. 넌 당당한 아티스트야.”
“아뇨, 아타시(저)는 아티스트가 아니에요.”
“어?”
“저는 아이돌이에요.”
성필은 리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아티스트라는 칭찬을 해주었는데, 어째서 본인의 상태를 다시 아이돌로 되돌리는 것일까?
“저를 기점으로 아이돌의 기준이 바뀔 거예요. 아니, 제가 바꿉니다!”
그 대답에 성필은 충격을 받았다.
항상 아이돌을 아티스트라고 말해왔던 주제에, 성필 자신도 무의식적으로는 두 가지를 나누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리카가 곡 작업을 끝내고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데에 대한 칭찬으로 아티스트란 호칭을 붙인 것이다.
하지만 리카는 그 인식에서 더 나아갔다. 그녀는 아이돌을 아티스트 언저리의 무언가가 아니라, 아이돌 자체로 자랑스러운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언젠가 사람들이 아이돌이란 단어를 보면 저를 떠올릴 때가 올 거예요. 아이돌은 아이돌이지만, The 아이돌은 제가 될 거니까요!”
언뜻 오만하게 들리는 선언 후, 리카는 성필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에리카를 따라하는가 싶어서 성필은 주먹을 마주 내밀어주었다.
그러자 리카가 손을 활짝 폈다.
‘하이파이브인가?’
성필은 그녀와 손바닥을 맞추었다. 그 순간, 리카의 손가락이 그의 손바닥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허공에서 깍지가 끼인 채 얽힌 두 손. 그 너머로 리카가 웃는 표정이 보였다.
“그때까지 함께 해주실 거죠? 실버타운 메이트.”
“……당연하지.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네.”
성필은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잡고 악수라도 하듯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양로원까지 우린…….”
“함께니까요!”
그러니, 당연하게도 리카가 최고의 아이돌이 될 때도 함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