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어…… 제가 일하는 중이긴 한데요.”
[그렇슴미까. 방해해서 죄송함미다.]
“아녜요. 잠깐은 통화할 수 있고…….”
[폐 끼치고 싶지 않슴미다.]
성필은 이 기특한 아이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진저는 핸드폰을 받으면 가장 먼저 성필에게 연락하기로 했었다. 그런 사소한 약속, 세상 어떤 사람이 제대로 지키겠는가.
하지만 진저는 지켰다.
KS 엔터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진저는 진정으로 성필과의 관계를 이어가고픈 듯했다.
‘미국에서 고작 몇 마디 해줬다고…….’
가정교육을 잘 받은 게 틀림없다. 진저의 부모님은 분명 훌륭한 분들이겠지.
“사실 저도 방금 진저 씨한테 연락하려고 했거든요. 좀 비즈니스적인데, 용무가 있어서요.”
[비즈니스? 서, 설마 가로 엔터로 영입 제의임미까! 절대 안 됨미다! 저한테 걸린 위약금이 얼마인진 아심미까! KS 엔터가 저 하나한테만 돈을 십억 단위를 쏟아부었슴미다! 그, 그런데 성형은 안 했슴미다! 시술만 받은 검미다! 아무튼 그걸 2배로 보상해야 하는 검미다!]
거절하는 이유가 돈이구나.
회사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게 아니라…….
‘중국인들은 돈에 민감하다고 했던가.’
리카가 들었다면 ‘인종차별이야!’라고 외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성필은 그녀의 추측을 부정했다.
“저희 회사에서 아이튜브에 올릴 영상을 하나 제작하거든요. 내용은…….”
성필이 가로 엔터 채용 홍보 기획을 설명하자 진저는 곤란한 티를 냈다.
[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님미다. 팀장님한테 여쭤보겠슴미다.]
당연한 일이다.
회사에 소속된 아이돌은 매니지먼트 관리권자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영리 활동에 종사할 수 없도록 계약에 묶인다.
예를 들어, 상하차 같은 것도 매니지먼트 관리권자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가로 엔터로 따진다면 민경섭이나 성필이 관리권자이다.
아이돌이 상하차 같은 걸 할 리는 없지만.
“감사합니다.”
[아님미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겠슴미다.]
“그리고 진저 씨가 안 되면 다른 케이어스 멤버분도 괜찮아요.”
[……꼭 저일 필요는 없는 검미까?]
“당연히 진저 씨가 나오시면 더할 나위가 없죠!”
[……알겠슴미다. 그리고 저, 아라 씨는 잘 지내심미까. 요즘 연락을 통 못 해서.]
성필은 입 모양만으로 ‘받겠냐’고 물으며 조아라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러자 조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라는 요즘 트레이닝하느라 바빠요.”
[컴백한 지 3개월도 안 지났잖슴미까. 벌써 컴백하는 검미까?]
“비밀이에요.”
[저도 알고 싶슴미다. 남들한테 안 말하겠슴미다.]
“음, 그래도 안 돼요.”
[너무함미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
진저의 발언을 듣고 성필은 한 가지 고민을 가지게 됐다. 리카도 그렇고, 왜 자꾸 어린애들이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일까.
‘설마, 나한테 연하에게 통하는 친근한 아우라 같은 게 있는 걸까?’
종종 회사 사람들에게 ‘애 같다’는 말을 듣곤 하지만, 성필은 자신이 근엄한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전생에서, 그리고 현생에서 석세스 엔터에 소속됐을 때 쌓은 이미지는 아직도 그의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어, 으, 아라 씨한테 건강히 지내라고 전해주기 바람미다.]
성필이 오랫동안 답이 없자, 진저는 자신이 말실수했나 싶어 다급히 대화를 끝내려 했다.
[짧은 간격으로 컴백하는 건 힘들지 않슴미까.]
진저는 철석같이 소녀연맹이 수개월 내에 컴백하리라 믿는 듯했다. 그리고 말투에서 느끼건대, 어지간히 조아라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케이어스인 진저 씨는 소녀연맹 스케줄이 살인적으로 보이겠지.’
케이어스는 앨범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보다, 싱글로 활동을 이어가는 히트 가수로서 전략의 방향을 잡았다. 그렇기에 다음 컴백까지의 기간이 상당하다.
그건 정호환이 구상한, 케이어스의 이미지를 고급화하고 곡의 퀄리티를 무결점에 가깝게 하려는 프로듀싱 전략이었다.
진저에게 컴백이란 아주 오랜 기간을 거쳐 담금질되는 강철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소녀연맹은 작게는 4개월에서 8개월 사이에 계속 컴백하니, 조아라의 건강이 걱정될 만도 하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아라는 건강해요.”
[다행임미다. 오래 붙잡고 있어서 죄송함미다.]
“아녜요, 무리한 부탁드린 제가 더 죄송하죠.”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에서 통화가 끝났다. 그리고 즉시 조아라가 비난을 날렸다.
“아주 그냥 KS 엔터에도 리카 한 명 뒀네. 나중에 이직 제안 와도 바로 받아들이시겠어. 뭐, 그쪽에서 스톡옵션 줄 테니까 오라고 안 했어요?”
“아라야, 난 너뿐이야. 내가 어떻게 널 놔두고 가겠어.”
“그거 알아요? 난 진짜 나쁜 남자 잘 골라낼 자신 있어요. 아저씨 같은 사람만 피하면 돼. 매일 여자랑 통화하면서 ‘친구라니까 친구’라고 하는 인간들.”
“……그래.”
갑자기 무언가 쓰는 소리가 들려 테이블 쪽을 보니, 양상헌이 메모장에 적힌 표시를 수정하는 중이었다.
케이어스에 쳐진 체크 표시를 동그라미에 가까운 세모로 바꾸었다.
“상헌 씨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케이어스잖아요.”
“그렇긴 한데, 방금 통화를 들으니까…….”
오늘 또 가로 엔터에 성필의 전설이 늘어날 수도 있겠다. 아마, 양상헌은 점심시간에 이 소식을 전 직원에게 전달할 것이다.
성필이 진저와 친구라고.
‘그래도, 케이어스 섭외가 마음대로 될 리는 없지.’
소녀연맹의 아이튜브 예능은 조회 수가 높다. 하지만 굳이 케이어스가 출연해야 할 메리트는 없다.
케이어스는 방송가에서 오는 수많은 러브콜도 대부분 거절한다. 그런 정도인데, 왜 소녀연맹의 영상에 얼굴을 비추겠는가?
* * *
“팀장님.”
진저가 아주 오랜만에 매니지먼트 1팀 사무실로 왔다. 1팀의 보배이자 KS 엔터의 보물이 등장하자, 모든 매니저들이 그녀에게 환영의 인사를 전했다.
“진저 씨 사탕 드실래요?”
“잠시 앉아 계세요. 제가 중국 출장 가서 직접 사 온 사천 지방 차가 있거든요. 타드릴게요.”
“이거 봐요. 저 이번에 이탈리아 가서 사 온 기념품이에요. 드림캐처란 부적인데 진저 씨 드릴게요.”
“다들 일하러 돌아가!”
1팀장의 일갈에 직원들이 사자 무리의 등장을 목도한 가젤 떼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 진저. 무슨 일이야?”
“나가고 싶은 웹예능이 있슴미다.”
진저가 가로 엔터가 기획한 예능에 대해 설명하자 1팀장은 난색을 표했다.
‘저번에 세쿠시(섹시) 챌린지도 그렇고. 진저는 마이너한 감성에 끌리나?’
홍보 효과가 훨씬 큰 공중파 예능들도 다 거절을 놨는데, 굳이 소녀연맹의 예능으로 들어간다고?
심지어 그 내용은 가로 엔터 채용 홍보? 기획을 듣자 하니, 딱히 진저가 주목받을 것 같지도 않다.
“진저, 케이어스는 어디서든 항상 주인공이어야 해. 그리고 벌써부터 그룹에서 찢어져서 얼굴을 비출 필요는 없잖아. 아니, 그러면 안 되지.”
“민주 언니는 ‘죽고 못 사는 친구’랑 ‘너희 친구니’에 나갔지 않슴미까.”
“그건 KS 엔터 자체 예능이랑 공중파 예능이었잖아. 가로 엔터 거기 나가도 넌 총합 1분도 출연 못 할걸?”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케이어스의 이미지에도 흠이 될 수 있고 말이다.
“그렇슴미까…….”
진저는 어깨가 축 늘어져선 사무실을 나갔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매니저들의 비난 속, 1팀장은 죄책감이 들었다.
‘진저가 스스로 뭘 하겠단 경우가 거의 없는데…….’
들어줄 걸 그랬나?
아니!
‘나는 매니저다. 머리는 차갑게 있어야 해. 모든 건 케이어스를 위해서…….’
진저가 정호환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다.
“……?!”
1팀장은 물론 다른 직원들도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짜 맞춘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정호환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여기저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1팀장 앞으로 와서 나긋이 물었다.
“진저가 소녀연맹 예능에 나가고 싶다고 하던데. 1팀장이 안 된다고 했다면서?”
“저, 정 이사님. 그 내용이…….”
“나도 아네. 난 괜찮을 거 같거든. 어떻게 안 될까?”
“원하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케이어스의 프로듀서가 괜찮다는데 1팀장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의 비전이 곧 케이어스가 나아가야 할 길과 다름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는구나, 진저. 잘됐지?”
“감사함미다 이사님!”
정호환과 진저가 아버지와 딸처럼 화기애애하게 웃음을 나누었다.
* * *
“안녕하세요, 웨이퍼센트입니다!”
웨이퍼센트의 막내, 유빈이 홀로 그룹 인사를 외쳤다. 그 직후 성필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하하, 네…….”
유빈은 옛날에 성필이 로드매니저 대타로 왔을 때가 떠올랐는지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성필이 밴을 끌고 오자마자 ‘이번엔 얼마나 버틸지’라며 비꼬았었던 것이다.
성필이 바로 대타임을 밝혀서 어색한 상황을 면했지만, 그의 인성을 드러내긴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뭐, 어리니까. 성필은 유빈을 너그러이 보고 있었다.
‘자꾸 로드들이 도망치니까 반발심 같은 것도 있었겠지.’
유빈과 간단한 안부 인사를 마치고 성필은 친구인 유하음과 악수했다.
“이야, 너 좋은 곳 다니네.”
유하음은 가로 엔터에 들어오자마자 동물원에라도 온 듯 이리저리 눈길을 주었다.
“석세스 엔터보다 여기가 낫다 야.”
“석세스 엔터 사옥 이전 안 했나?”
“몰라. 가봐야 알지.”
성필이 기억하기론 이때 즈음에 신사옥으로 갔던 것 같은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건물 외양이라도 보고 와야겠다.
“암튼 우리 유빈이 불러줘서 고맙다.”
“그래, 고마움이 느껴지네. 얼마나 고마우면 실장급을 같이 보냈을까.”
“네가 유빈이 악편해서 이미지 창내면 어떡해. 내가 곁에서 감시해야지.”
“말하는 본새 하고는.”
성필은 김수희 매니저를 시켜 유빈을 촬영 장소로 안내했다. 그러곤 유하음을 휴게실로 데려가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웨이퍼센트 연애 금지 풀렸지? 어때?”
“어떻긴. 나 요즘 죽겠어. 내가 매니저인지 연애 조작단인지 모르겠다.”
“힘들어?”
“그냥, 애들 연애까지 우리가 신경 써주니까 현타 온다고 해야 하나.”
아이돌이 탄생하고 오랜 시간을 거쳐, 기획사들은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사랑이란, 사람의 마음이란 계약으로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그래서 기획사는 하나의 방도를 생각해냈다. 바로, 회사 차원에서 아이돌의 연애를 관리하는 것이다.
“방 잡고, 사람 없는 데이트 코스 조사하고, 차에 선팅지 붙여주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그것도 매니지먼트지 뭐.”
외국에선 에이전트의 직원들이 스타의 일상까지 적극적으로 보호해주기도 한다. 조직적인 대응으로 스캔들이나 폭로를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한국도 그런 노하우를 습득하여, 최근엔 아이돌이나 연예인의 열애설이 나오는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상대도 아이돌이면 진짜 골 때리거든. 상대 회사랑 조율하면서 연애를 관리해야 하는데…… 애들은 언제 상대를 만날 수 있냐, 만나게 해주려는 생각 없는 거 아니냐, 그냥 내가 자기들 시다바리인 줄 알고…….”
유하음도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불평하는 것에 비해 일 자체는 성심성의껏 하는 듯했다.
“야, 네 불평 들어주다가 시간 다 지났네. 빨리 올라가자. 촬영 시작하겠어.”
성필과 유하음은 촬영이 이뤄지는 가로 엔터의 회의실로 향했다.
방 가장 안쪽에는 촬영 스태프들이 장비와 함께 좁은 공간을 꾸덕꾸덕 메우고 있었다.
큰 규모의 소녀연맹 예능에 항상 도움을 주는 스태프 팀이었다.
“회의실 넓다…….”
“항상 휑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좋게 쓸 때도 오네.”
회의실 한편에는 면접관 역할을 맡은 소녀연맹 멤버 몇 명과 사장인 홍규헌, 손혜빈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대편엔 면접자 역할인 웨이퍼센트 유빈, 과거 포유 소속이었던 우효민, 그리고 진저가 있었다.
진저는 성필과 눈이 맞자 작게 손을 흔들었다. 성필도 그녀에게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아직 소녀연맹 다 안 왔네. 이 인원으로만 찍나?”
“아라는 학원에서 오는 중이고, 설하는 작사 강의받고 오는 중.”
“오, 열심이네. 근데 시에이스도 온다고 안 했어? 없네.”
“그러게.”
시에이스의 매니저에게 물어보니, 잠시 화장실에 갔다는 듯하다.
* * *
끼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김수희가 운전하던 차가 멈춰 섰다. 그 즉시 조아라는 버릇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20분이 남았다.
“저 먼저 갈게요!”
“네 전 주차할게요.”
조아라는 뛰쳐나가듯 차에서 내려 가로 엔터 입구로 달려갔다. 비밀번호를 절반 눌렀을 때,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듣지 않았으면 몰랐을, 아주 작은 목소리다.
‘뭐지? 건물 뒤편인데.’
그 순간, 조아라는 인터넷에서 전설처럼 돌아다니는 이야기인 아이돌 사생에 대해 떠올렸다. 기어코 회사까지 찾아와서 난리를 부리는 이들.
혹시 이 목소리의 주인도?
조아라는 비밀번호 입력을 초기화한 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벽을 따라 걸었다. 첫 번째 모퉁이를 돌아 가로 엔터 건물의 측면으로 오니, 아무도 없었다.
‘착각인가?’
아니다.
아직도 목소리는 들려온다.
조아라는 더욱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상대는 건물 후면에 있다.
후면으로 이어지는 모퉁이까지 온 조아라는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자기야, 그런 거 진짜 진짜 진짜 아니라니까. 내가 왜 일부러 연락을 안 받아. 아니, 내가 오늘 스케줄 없다고 하긴 했는데…… 갑자기 잡혔…….”
그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그는 싸한 느낌을 받고 뒤로 천천히 돌아보았다.
소녀연맹 조아라가 있었다.
“규영, 선배?”
“……아라 씨?”
그 순간, 규영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통화 종료를 눌렀다. 제발 조아라가 자신의 통화를 듣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아, 벌써 촬영인가? 데리러 왔어요? 죄송합…….”
“연애해요?”
“제발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세요 제발요!”
규영은 무대에서 보여주던 카리스마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비굴하게 말했다.
“안 말해요. 난 뭐 도둑이라도 있는 줄 알고 와봤네. 여기 아무도 안 오거든요.”
“아, 네, 어, 음.”
“…….”
“……갈까요?”
“회사에서 연애 금지 풀어줬어요?”
조아라는 규영을 가만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항상 아이돌이 암암리에 연애한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진짜 연애하는 아이돌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생활이 궁금하다.
규영은 후배의 당돌한 질문에 당황하다가, 곧 자기가 을의 입장이란 것을 깨닫곤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풀린지는 1년 넘었어요.”
“근데 비밀연애예요?”
“……네.”
“왜요?”
“회사가, 좋게 안 보니까, 요…….”
안 그래도 규영은 그룹 내에서 대우가 박했다. 메인 댄서이지만, 마땅히 사람들에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심지어 팬덤 내에서도 그러하다. 그의 팬들은 악개(악성 개인팬)로 유명하다. 가장 인기가 없기 때문인지 그들끼리 잘 뭉친 것이다.
현재도 규영은 회사의 차별 대우를 느끼는데, 연애 사실이 알려지면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사정을 들은 조아라는 남 일이 아닌 것처럼 동정심이 들었다.
“근데 연애가 죄는 아니잖아요. 팬들도 연애 금지 풀린 거 알지 않나? 이해 안 해줘요?”
“이해요?”
규영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단 표정이었다.
“팬들은 이해 안 해주죠, 당연히.”
“네?”
“열애설 터지면 팬들이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이면서 욕하는데요. 그냥, 우리가 연애하는 걸 싫어하는 거예요. 우린 팬한테 연인이어야 하니까요. 그게 다예요.”
“……제가 듣기론요.”
성필이 말하길, 아이돌이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면 팬들도 연애에 관대해진다고들 한다.
조아라가 생각하기에 규영의 댄스 퍼포먼스는 아이돌 중에서도 상위권에 이르렀다.
그룹 내에선 당연 최상위권이고, 그와 기교적으로 비빌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아이돌계에선 얼마 없다.
“아…… 그 얘기 나도 알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었어요. 만약 밝혀지더라도 팬들한테 ‘연애 때문에 일에 소홀했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요. 팬들을 실망시키기 싫어서…….”
“춤을 열심히 했던 게 그런 이유라고요? 얼마나 오래 사귀었길래요?”
“당연히 연애 금지 풀리고 사귀었죠. 그 뒤로 더 열심히 연습했고…….”
“그럼 그냥 밝혀도 되는 거 아니에요? ‘나 이렇게 열심히 했다’라면서요. 적어도 회사한테는요.”
규영은 힘없이 웃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표정으로 말하는 듯했다.
“밝혀지면 헤어져야 할걸요.”
즉, 최악의 사태가 오면 애인보다 팬을 택하겠단 뜻이었다.
돈 때문에?
“그래도, 애인보단 팬이 더 소중해요. 계속 무대에 서고 싶어요. 좀 쓰레기 같나?”
“네.”
“…….”
“시간 됐어요. 이제 들어가요.”
“다, 다른 사람한테 안 말할 거죠?”
“내가 왜 말해요.”
그와 함께 회사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아라는 방금 나눈 대화를 되짚었다.
‘팬들은 그냥 연애하는 걸 싫어해?’
그럼, 성필이 강조했던 아티스트십을 얻어봤자 연애 같은 건 꿈이 아닌가?
‘어차피 누구랑 사귀고 싶지도 않지만.’
솔직히 조아라는 규영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계속 연애를 이어가는 걸까? 심지어 들키면 커다란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한데도.
하지만 조아라가 건진 것도 있었다.
‘계속 무대에 서고 싶으니까, 열애설이 들키면 바로 헤어지겠다고 했지.’
팬이 주는 사랑도 사랑이다. 연인처럼 바로 옆에서 온기를 얻을 수는 없겠지만, 그 양만큼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이건 무대에 서서 수천, 수만 명의 환호를 받아봐야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조아라는 아직 연애 경험이 없지만, 아이돌로서 받는 사랑과 여자로서 받는 사랑 중 선택하라면 당연히 아이돌의 자리를 고를 것이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황홀경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니까.
“늦어서 죄송해요.”
회의실 안에 모인 인원들에게 꼬박꼬박 인사를 한 뒤, 조아라는 멤버들이 모인 면접관석으로 가서 앉았다.
“아라야.”
장하양은 화사한 미소를 띠면서 은근히 물었다.
“찐사랑 규영 선배님이랑 같이 들어왔네. 둘이 얘기하다가 왔어?”
“진짜 이럴 줄 알았다.”
백설하는 로맨스 소설 탐독자이다. 게다가 아이튜브에서도 연애 관련 채널을 다수 구독하기로 유명하다. 연애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장하양은 백설하와 다른 의미로 연애에 관심을 보인다. 바로, 멤버들과 다른 사람들을 엮는 것이다.
“찐사랑은 뭔……. 언니 거의 1년 전 일로 언제까지 놀리려고요. 하지 마요.”
“미안, 기분 나빴어……?”
조아라가 살짝 강경하게 대처하자, 장하양은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듯 즉시 사과했다.
“괜찮아요. 다음부턴 안 하면 되죠.”
“미안.”
“아 진짜 괜찮다니까요.”
장하양이 이렇게까지 풀이 죽으니, 조아라가 도리어 미안할 정도이다.
‘좀 너무 칼처럼 대답했나? 미안하게…….’
그런데 어쩌는가.
정말 기분이 나쁜데.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말로라도 엮이고 싶지 않다.
“타시카니(확실히) 요즘 아라쨩 규영 선배 댄스 영상도 안 보 왜 아타시(나)는 바로 때리는 거야아아앗?!”
“하지 말라고 했지.”
“우으, 아라쨩이랑 장난치고 싶었을 뿐인데에…….”
어깨를 맞은 리카가 울상을 지었다.
* * *
소녀연맹 채용 홍보 영상은, 소녀연맹 멤버들과 가로 엔터의 중역들이 면접관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아이돌 면접자들이 가로 엔터 입사를 목표로 하는 상황을 코믹하게 그려낸다.
예능. 그렇기에 웃겨야 한다!
‘첫 면접자는 나야.’
진저는 면접자용 의자에 앉고선 앞을 보았다. 소녀연맹 멤버들과 가로 엔터 사장 홍규헌, 그리고 손혜빈과 성필이 있었다.
‘다른 아이돌에게 뒤질 순 없어. 무조건 좋은 장면을 뽑아서 아라 씨와 소녀연맹을 도와야 해!’
케이어스는 예능에서도 완벽해야 한다.
“진저임미다. 신인개발팀 지원임미다! 다년간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연습생들을 훌륭하게 지도하겠슴미다!”
“음, 실력 보여주실 수 있어요?”
실력? 쉽게 생각하자면 케이어스의 곡을 하면 된다. 곡 홍보도 될 것이고.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이건 예능이니까.
“제 고향 전통 노래를 해보겠슴미다!”
진저는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애절하고 감미로운 보컬은 합격점이었지만, 중국어라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손혜빈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쓰읍, 조금 부족한…… 성필이 너 울어?!”
성필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기립 박수 갈채 오열하고 있었다.
“메인 프로듀서인 박 이사님을 감동시켰으면 더는 볼 필요도 없어요! 사장님, 바로 가죠!”
리카의 말에 홍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카가 진저의 앞에 계약서를 내밀었다.
“여기 인장 찍으세요!”
“아, 신인개발팀으로 가는 검미까?”
“아뇨!”
리카가 지장을 받은 계약서를 흔들었다.
“가로 엔터 2호 아티스트입니다!”
“……?!”
“가로 엔터를 위해 열심히 일해주세요!”
가로 엔터, 솔로 아티스트 영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