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그만해.”
백설하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불꽃을 꺼뜨렸다. 하지만 신아름은 잔불을 뒤적이려는 듯 또 입을 열었다.
“아니 조아라가…….”
“그만하라고.”
“…….”
백설하는 신아름과 조아라가 손을 맞잡게 했다. 두 사람 다 손에 힘을 주지 않자, 백설하가 억지로 악수하게 만들었다.
아주 옛날, 소녀연맹 멤버들이 숙소로 들어갈 적 성필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화해 의자에 앉아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것.
“말싸움하려면 이 상태로 해. 해봐.”
신아름과 조아라, 두 사람에게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조아라가 필요 이상으로 날 선 말투를 쓴 것. 신아름이 그에 짜증을 내며 과도하게 대응한 것.
둘 다 잘못했다.
“안 해?”
신아름과 조아라는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리며, 동시에 입밖으로 사과를 뱉었다.
“미안.”
사과가 겹치자 둘 다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사과하기로 마음먹은 참이다.
백설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최대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야만 했다.
약하게 마주 잡은 손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하아.”
백설하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경연이 2주가량 남은 상황에서 멤버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는 게 달가울 순 없다.
하지만 백설하는 정말 언짢아하진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이 정말 싸우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너희들.”
백설하는 전에 속했던 그룹의 리더에게서 배웠던 방법을 그대로 써먹었다.
바로, 자신이 대항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백설하 자신이 신아름과 조아라를 혼내고 좋게 보지 않으면, 두 사람은 자연스레 뭉치게 된다.
“나도 있고 하양이도 있잖아. 그런데 뭐? ‘닥쳐’라고? 아니, 우리들 앞이 아니라도 욕은 쓰면 안 되는 거잖아. 너희들 뭐야?”
백설하는 둘을 더 나무라려다가 그냥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입술을 꾹 닫았다.
잘못한 순간 비난하는 리더보다 침묵하는 리더가 더 무섭다.
인간은 두려운 상황일 때보다, 두려운 상황을 상상할 때 더 괴로운 법이니까.
“30분 휴식이야. 다들 머리 식혀.”
신아름과 조아라는 쭈뼛대다가 떨어졌다.
그 즉시 리카는 조아라에게 붙었고, 장하양은 신아름에게 접근했다.
“아라쨩 아타시(내)가 혀로 팔꿈치 핥는 거 보여줄까? 사장님도 신기하다고 하셨어!”
“…….”
신아름은 남아 있는 대신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그것을 장하양이 따라가자 신아름이 차갑게 쏘아댔다.
“저 쉬러 가요.”
“응, 나도.”
“혼자 쉬고 싶어요.”
“언니가 음료수 사줄까?”
“나도 돈 있어요.”
백설하는 제 역할을 잘 수행해주는 리카와 장하양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잘 풀리면 좋을 텐데.’
조아라와 신아름도 경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승부에 임하는 인간은 신경이 날카로운 게 당연하다.
그리고, 조직에 속한 사람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 또한 리더로서 당연하다.
‘아직 기획 단계라서 그럴 거야. 명확한 목표가, 퍼포먼스가 완성되면 연습하느라 싸울 기력도 없을걸.’
퍼포먼스가 완성되면…….
‘그 퍼포먼스는 경연에서 우승할 수 있는 퍼포먼스일까?’
소녀연맹이 그런 퍼포먼스를 창조할 수 있을까. 백설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신아름의 말마따나 자신들을 뛰어넘는 전문가가 나타나서.
‘박 이사님이…….’
전부 정해주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뭐라는 거야.’
성필이 줄곧 강조해왔으며, 백설하가 동의했던 아티스트십마저 부정하는 생각을 하다니.
‘나도 피곤한가 보다.’
만약 다시 경연에 나갈 기회가 온다면, 백설하는 학을 떼면서 물리치리라고 다짐했다.
* * *
성필은 정지음과 따로 만나 부탁을 하나 했다.
“2절 후렴구 끝난 브리지부터 원곡을 붙인단 거죠?”
‘더 킹’은 1절 벌스 - 후렴구 - 2절 벌스 - 후렴구 - 브리지 - 하이라이트 구성을 따르고 있다.
그것을 편곡한 ‘더 퀸’도 마찬가지다.
“응, 맞아. 그렇게 해줘.”
성필의 부탁은 브리지부터 ‘더 퀸’이 아니라 ‘더 킹’을 붙여달란 것이었다.
오케스트레이션된 곡의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면서 전자 악기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마침내 완전한 ‘더 킹’이 흘러나온다.
이게 성필의 구상이었다.
“이건 진짜 먹혀. 케이팝 덕질 경력, 조금 느슨하게 봐서 15년 차 박성필의 직감이야. ‘더 킹’ 원곡으로 바뀌자마자 다 환호성 지를걸?”
과장을 보태서, 일본에 다키스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돔 투어로 100만 관객을 동원했던 게 겨우 몇 년 전이다. 아직도 다키스트란 이름은 일본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다키스트의 최고 히트곡인 ‘더 킹’도 그러할 것이다.
“네, 뭐. 제가 편곡한 것보다야 원곡이 더 낫겠죠. 사람들이 환호하겠죠…….”
“아니 지음이 네가 모자라단 게 아냐!”
“어쩔 수 없잖아요.”
정지음은 ‘더 킹’의 인스트루멘탈(곡에서 보컬을 제외한 버전) 버전을 ‘더 퀸’의 후반부에 잘라 붙였다.
그리고 두 곡을 부드럽게 잇기 위해 몇 가지 조정을 가했다.
“리메이크는 얼마나 잘하든 원곡을 못 이긴대요. 잘해봤자 복각에 불과하고요. 그게 ‘더 킹’이면 더하겠죠.”
“지음아…….”
“형이 죽고 못 사는 정호환 이사님이 디렉팅한 곡이고요.”
“죽고 못 사는 정도는 아닌데.”
“나도 인정해요.”
정지음은 엔터키를 누르면서, 언뜻 존경이 내비치는 어조로 말했다.
사실 ‘더 킹’의 프로듀싱에 참여한 주요 프로듀서는 정호환 외에 한 명 더 있었다.
성필의 철천지원수인 윤상열이다.
하지만 정지음은 그와 성필의 관계를 알기에, 굳이 입 밖으로 그 이름을 꺼내진 않았다.
“정호환 같은 장인이 만든 곡을, 내가 더 좋게 만든단 건 말도 안 되죠. ‘더 킹’은 케이팝의 고전에 오른 곡이니까요.”
성필은 정지음을 칭찬하여 그의 체면을 지켜주지 않았다.
클래식 작곡가가 ‘너도 베토벤에 뒤지지 않아’란 말을 들으면 기뻐하겠는가? 비꼬는 것인 줄 알고 화나 안 내면 다행이지.
‘지음이도 고민이 많았구나.’
‘더 킹’은 전생에 편곡의 천재라 불렸던 정지음이 케이팝의 고전이라고까지 부른 곡이다.
그것을 편곡하는 정지음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성필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나한테 다키스트 프로듀싱 권한이 생긴 거랑 비슷한 마음이겠지.’
누구나 최고를 꿈꾸지만, 정작 그 최고란 자리가 바로 앞에 다가오면 쩔쩔매는 법이다.
“재생할게요.”
둘은 유심히 바뀐 버전을 들었다.
그저 원래 있던 곡을 가져다가 뒤에 붙인 것뿐이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와.”
정지음이 소름이 돋은 듯 자신의 어깨를 쓸었다.
“이거 진짜 멋지겠다. ‘더 킹’으로 바뀌는 거 좋네요. 케이팝 덕질 15년 차 인정.”
“그, 그렇지?”
편곡의 천재에게 인정받자 성필의 안색도 태양처럼 환해졌다.
“근데 이러면 이 부분 안무도 새로 만들어야 할 텐데. 시간 괜찮아요?”
밝아졌던 성필의 표정이 굳었다.
“아…… 새로 만들어…….”
정지음은 소녀연맹이 ‘더 킹’의 원곡 안무조차 하리란 생각은 못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소녀연맹이 다키스트의 안무를 재현할 수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춤으로 임팩트만 주면 진짜 나쁘지 않은데. 지금 애들한테 말해봐요?”
“아냐. 걍 갑자기 떠올라서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네? 아니 이거 극적 효과는 보장됐다니까요. 시간 걸려서라도 새로 안무 붙이는 쪽이 안 나아요? 아님 민정 쌤한테 내가 따로 말해봐요?”
“아니야. 괜히 혼란 주기는 싫어.”
성필이 생각했던 건, 바뀌는 ‘더 킹’의 곡에 따라 소녀연맹도 ‘더 킹’의 안무를 펼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시작부터 부정 받았다.
정지음은 소녀연맹이 다키스트의 안무를 따라 할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반응일 터다.
왜냐하면, 터무니없으니까.
‘남녀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표현력의 차이.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저 소녀연맹의 기량이 부족한 것이다.
2주 남짓한 시간의 연습으로는 따라잡기 힘든 벽일 것이다.
“형이 그렇게 말하면 뭐, 알겠어요.”
정지음은 의문을 지니면서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어쩐지 성필에게서 풍기는 기색이 평소와는 달랐으므로.
대화가 끝나갈 시점, 성필은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듯 작게 물었다.
“근데 지음아.”
“네?”
“‘더 킹’ 후반부 안무 그대로 하라고 하면, 애들이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을까?”
“어…… 제가 춤을 잘 모르긴 하는데요, 어렵지 않나? 아니면 잠도 안 자고 연습하거나…….”
정지음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형 이거 안무 그대로 애들한테 시킬 생각이에요? 그냥 ‘더 킹’을 후반부에 붙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퍼포먼스까지 재현…….”
“에이 아냐. 걍 물어봤어.”
확실히, 후반부뿐이더라도 ‘더 킹’을 완성하는 데는 시간이 촉박하다.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라니까.”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필은 그렇게 바꿀 생각을 접었다.
정지음이 ‘잠도 안 자고 연습하거나……’라고 했던가.
‘그렇겐 못 하지.’
성필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목표를 걸어두고 멤버들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상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법이지만, 달성하지 못했을 때 더 큰 좌절을 안긴다.
그리고 성필은 멤버들을 좌절로 이끈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다.
‘지음이 반응이 맞아. 보통은 못 한다고 생각하지.’
지금은 멤버들을 채찍질하여 불가능한 목표로 몰아세울 때가 아니다.
완성을 기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확정하고 그곳에 매달리게 해야 한다.
‘시간이 없어.’
그 말은 즉, 시간만 있었으면 했으리란 뜻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쉬움이 뒤따랐다.
* * *
성필은 웨벡스 내부의 편집실로 들어왔다.
웨벡스 소속 연예인의 아이튜브 영상을 편집할 때 쓰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블루레이 재생기도 구비되어 있었다.
성필은 편집실의 불을 끄고 슈이치에게서 받은 CD 중 하나를 재생기에 삽입했다.
‘5분만 보자.’
쉬는 시간 동안 영양가 없이 SNS만 보는 것보다야, 이런 식으로 시간을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성필은 편안히 앉아 화면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도 그거네. 쿄세라 돔 콘서트.’
처음 멤버들과 보았던 다키스트의 영상이다.
그것과 다른 점은, 카메라 앵글이 집요하게도 움직이지 않는단 것이다.
멤버들의 정면만을 비춘 앵글은 그들이 순간적으로 인상 쓰는 것이나, 턱에 맺힌 땀마저도 보게 만들어 주었다.
‘역시 나는 편집 영상보다 풀캠(Full Cam)이 더 좋네.’
역동성이나 영상미는 적지만, 퍼포먼스를 전체적인 시야에서 볼 수 있다.
성필은 이 귀한 영상에 푹 빠져서 다키스트의 무대를 감상했다.
‘멋지네.’
은퇴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보이그룹은 걸그룹과는 달리, 멤버들이 20대 후반이나 30대에 들어서고도 활동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성공한 그룹이라면 더욱 그렇다.
보이그룹 특유의 팬 응집력은 그들이 나이를 먹더라도 유지된다.
기획사들이 걸그룹을 프로듀싱하여 노하우를 축적했음에도 굳이 보이그룹 프로듀싱에 도전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보이그룹은 한 번 뜨면, 아니.
중박만 치더라도 지속적인 수입을 보장한다.
‘그에 비해 걸그룹은 나이가 중요하지.’
소녀연맹은 7년 계약이 끝나면 활동을 종료할 가능성이 컸다.
백설하는 계약이 끝나면 29살, 장하양은 28살이다. 아이돌 말고도 활동 영역을 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웬만해선 계속 보고 싶지만.’
언젠가 이날도 막을 내리는 때가 올까.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중요한 건 현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성필은 그녀들의 삶을 보람으로 꽉꽉 채워주고 싶었다.
훗날 기쁘게 그녀들을 떠나보내기 위해.
성필은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어느새 2절 후렴구도 끝나고 브리지에 접어들었다.
‘나온다.’
다키스트가 전대물의 주인공들처럼 포지션을 잡고 군무를 선보였다.
한 명이 중앙에 무릎을 꿇자, 그 뒤로 세 명의 멤버가 등을 돌리고 인간의 벽을 세웠다.
벽을 이룬 세 명 가운데 중앙의 멤버가 몸을 숙인 순간. 사람의 벽 안으로 사라졌었던 멤버가 날아올랐다.
‘완벽해.’
다키스트의 리더, 서유선.
그는 도움닫기를 통해 인간의 평균 신장보다 더 높게 날아올랐다.
그 순간 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멤버가 공중으로 왕관을 던졌다.
서유선은 왕관을 붙잡으며 바닥으로 우아하게 착지한 뒤, 그것을 머리에 쓰곤.
[츠타에테루데쇼(전해지고 있지)―?]
춤을 추면서 3옥타브 ‘도’의 고음을 내질렀다.
바닥에 착지하고 즉각적으로 일어나 고음을 내지른다. 진실로 인간을 뛰어넘은 퍼포먼스다.
과한 운동으로 몸의 근육이 긴장하고, 늑골 근육이 내장을 압박하며, 폐마저 제기능을 하기 힘들 텐데.
서유선은 그것을 해낸다.
심지어 춤까지 추면서.
‘역시 대단…….’
그 순간, 성필은 넋을 놓았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게 보인다.
앵글이 움직이지 않는 무편집 버전이라서 알 수 있었다.
‘초점이…….’
서유선의 눈에 초점이 없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동공에,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듯 흔들리는 어깨, 양옆으로 어지러이 내디디며 중심을 잡는 발.
이제까지 춤인 줄로만 알았던 서유선의 동작은, 실은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기운이 빠진 와중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균형 잡기였다.
그런 상태에서, 시야가 상하로 뒤집히는 극한 상황에서, 서유선은 보컬 후렴구를 내질렀다.
“아.”
다키스트는 완벽하다, 란 성필의 환상이 깨졌다. 그들은, 서유선은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젠 서유선의 춤이 춤으로 보이지 않았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으로만 보였다.
‘인간을 벗어난 퍼포먼스…….’
다키스트는 그리 불렸었다.
다들 다키스트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었다. 다신 등장하지 않을 케이팝 그룹이자, 최고의 아이돌이라면서.
성필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밝은 면만을 보았다.
아이돌이란 그렇게 ‘즐기는’ 것이니까.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성필은 이제야 다키스트가 겪었을 고통스러운 연습 과정을 직시할 수 있었다.
3옥타브.
남자는 신에게 선택받아야만 자유롭게 낼 수 있다고 평해지는 음역대다. 그것을 다키스트 전원이 구사할 수 있다.
천재들의 집합체, 다키스트.
그들이 모인 건 기적이다.
‘그런데, 그럴까?’
천재들이라고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있나.
남자가 3옥타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통 4번의 피치 브레이크를 넘겨야 한다.
피치 브레이크란, 그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음역대를 벗어났을 때 겪는 벽이다.
목소리가 갈라지거나.
가성으로 바뀌거나.
목 주변과 상체의 근육이 과도하게 긴장하여 피로를 누적한다.
제대로 된 음을 구사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다섯 명이 전부 3옥타브 음역을 소화한다는 게, 그냥 기적이라는 말로 설명이 될까?’
사람마다 특유의 성종(聲種)을 타고 태어난다.
남자의 가장 높은 성종인 ‘테너’가 처음 피치 브레이크를 겪는 건, 흉성(胸聲)에서 중성(中聲)으로 바뀌는 1옥타브 ‘미’에서 ‘솔’ 사이다.
남자가 1옥타브 ‘미’ 이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만 해도 숱한 연습이 필요하다.
거기가 퍼스트(1st) 피치 브레이크.
남자가 3옥타브를 내려면 앞으로도 세 번의 벽이 더 남아 있다.
당연히, 그 벽을 깨는 사람은 지구상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다키스트는 그 음역을 소화하면서 춤까지 추고, 묘기 같은 안무를 하고…….’
이젠 다키스트의 퍼포먼스가 다르게 보인다.
초점이 사라진 채 노래를 부르는 리더 서유선. 그의 춤이 성필에겐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살려주세요.’
그들은 분명 천재일 것이다.
동시에 지옥과 같은 환경, KS 엔터에서 자신을 끝없이 갈고 닦았으리라.
몇천 대 1의 오디션을 뚫고 발굴된 보석, 마침내 KS 엔터에서 꽃 피우다.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다.
‘노력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트레이닝…….’
그래, 학대.
학대와 같은 환경에서 죽도록 노력해야만 겨우 성취할 수 있는 경지다.
‘이게 최고의 아이돌.’
성필은 화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옥에서 성장한 꽃을 향해서.
이 기적 같은 퍼포먼스 뒤에 숨은 추악함을 알지만, 그래도 성필은 갈망한다.
최고의 아이돌. 역사가 새겨주는 그 이름을.
“아.”
성필은 황홀함과 전율 사이를 뛰어다니며 눈물을 흘렸다.
스탕달 신드롬.
예술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심리적, 신체적 혼란.
성필은 스탕달 신드롬을 겪으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화면에서 펼쳐지는 다키스트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얘들아…….”
그곳에 소녀연맹을 겹쳤다.
최고의 아이돌에, 소녀연맹을 덧씌웠다.
상상만으로 행복했지만, 소녀연맹이 이 정도의 수준에 다다를 날이 오진 않을 것이다.
학대라 불릴 트레이닝을 수년간 이어가야만 닿을 수 있는 경지다.
‘난 이럴 수 없어.’
성필은 소녀연맹에게 불합리한 단련을 강요할 수 없다.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그녀들이 행복하길 바라기에, 즐겁게 아이돌로 살길 바라기에.
어쩌면 영원히, 성필은 다키스트의 빛을 소녀연맹에게서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른 종류의 빛을 바라왔다.
‘애들을 이렇게 만들진 않을 거야.’
다른 방법으로 소녀연맹을 최고의 아이돌로 만들 것이다.
‘아티스트로.’
다키스트는 KS 엔터가 만들어낸 걸작, 만들어진 아이돌이었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스스로가 아티스트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누군가 만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아티스트의 계단을 올라간다.
영상이 끝났다.
성필은 영상을 되감고, 본인이 성취할 수 없는 빛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종류는 다르지만, 언젠가 소녀연맹이 품게 될 빛을.
추악하단 것을 알아도 성필은 이 빛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 *
신아름은 성필을 찾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톡을 보내도 답이 없다.
‘팀장님 어디 가셨지.’
조아라와 화해하는 척만 하고 나서, 신아름은 가슴에 쌓이는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성필과 대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보이질 않으니 가슴이 더 무거워진다.
결국 휴게실에서 백민정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슈이치에게까지 찾아와서 성필의 행적을 물었다.
“박 이사님이요? 연습실에 안 가셨습니까?”
슈이치는 이상하단 듯 턱을 쓸었다.
“편집실에 10분 정도만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편집실에는 왜요?”
“제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다키스트의 콘서트 영상을 드렸습니다. 그걸 보러 가신 게 아닐까 합니다.”
성필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팀장님 또 아이돌 영상 보면서 정신 못 차리고 있겠네.’
그나마 그 대상이 케이어스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그래도 감히 소녀연맹을 두고 다른 아이돌의 영상에 빠지다니.
신아름의 입가가 호선으로 휘었다.
‘만나면 따끔하게 말해줘야겠다.’
그럼 성필이 미안해하면서 신아름을 달래줄 것이다. 그녀는 기대를 안고 편집실을 찾았다.
문을 살짝 열어 어둠 속에 성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문을 쾅 열어젖혔다.
“팀장님 또 바람 펴요?!”
신아름이 짐짓 분노를 가장했다. 그러나 성필은 반응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볼 뿐, 뒤로 돌아볼 생각조차 없었다.
“팀장님?”
신아름은 조심스럽게 성필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뒤에서 어깨를 잡고 장난스레 흔들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결국 그녀는 성필의 옆으로 가서 그의 얼굴을 보아야만 했다.
“팀장님……?”
성필은 무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길을 내었다.
그 길을 따라, 물은 쉴새 없이 내달렸다.
“티, 팀장님?”
“……아.”
여러 번 부르고 나서야 성필이 반응했다. 그는 신아름을 보곤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어, 아름아. 왔어?”
그는 부끄럽다는 듯 눈가를 닦았다.
“팀장님 안 좋은 일 있어요? 누가 괴롭혔어요? 내가 복수해줄까요? 세이코 그년이에요?!”
“아니야. 이거 보고, 그냥 감정이 복받쳐서.”
신아름은 영상에 뜬 이들을 알아보았다.
다키스트였다.
그가 아이돌 무대를 보고 눈물 흘리는 일은 꽤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결이 조금 다른 듯했다.
신아름은 성필을 오래 보아 왔기에,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거 우리랑 봤던 거잖아요. 그땐 안 울었으면서.”
“하하, 혼자 봐서 그런가? 좀 그런 게 있네.”
“진짜 옛날부터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아이돌 무대를 보고 울어요? 무슨 감동적인 게 있다고.”
“뭐긴.”
성필이 화면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화면을 핥는 듯하였다.
“최고의 아이돌이잖아.”
정말 성필도 한결같다.
그가 아이돌을 좋아한단 건 알지만, 소녀연맹을 맡고 있는데 다른 그룹에 한눈팔진 말아줬으면 좋겠다.
거기에 더해서 현재의 성필은.
‘그런 눈으로.’
자신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은하수가 비처럼 떨어지는 눈빛을 하고 있다.
다른 그룹을 향해 동경을 내비치는 것 따위 보고 싶지 않다.
“팀장님 이럴 거면 그냥 원곡 퍼포먼스대로 하라고 하지, 귀찮게 편곡은 왜 했어요?”
신아름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성필은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빠르게 캐치하고, 달래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너희한테 안 어울리니까 그렇지.”
안 어울린다…….
신아름은 성필이 보던 화면을 흘끗했다. 그의 눈에서 별빛을 끄집어낸 영상을.
그가 바라는 것을, 신아름은 해줄 수가 없다.
신아름은 그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안 어울릴지 어떻게 알아요. 이게 더 나을 거 같으면, 그냥 시키면 됐잖아요. 내가 못 할 거 같아서 시키지도 않은 거죠?”
“아름…….”
“그냥.”
하아, 그냥.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시키라고요. 프로듀서잖아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요.”
정말, 말만 하면 해낼 텐데.
다 해줄 텐데.
신아름은 원수라도 되는 듯 화면에 떠오른 다키스트를 흘겼다.
저런 영상 쪼가리에 질투를 느끼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만큼 화가 난다.
하필 조아라랑 싸워서 기분도 안 좋을 때라서, 더욱 마음이 어지럽다.
“저깟 게 뭐라고.”
신아름은 이곳에 온 목적도 잊어버리고, 거친 걸음을 내디디며 편집실을 나가버렸다. 뒤에서 성필이 다급히 부르는 것도 무시하고서.
분노에 차서 복도를 걷던 중, 자괴감이 몰려왔다.
‘난 뭐 하는 년이야 진짜.’
질투할 게 없어서 이젠 은퇴한 아이돌을 질투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긴 한데.
‘팀장님도 너무하잖아.’
성필의 저런 눈은 처음 본다.
케이어스의 무대를 보고 울 때와도 달랐다.
방금 전의 성필은 꿈을 좇는 아이의 눈빛이었다. 현재의 신아름이 절대로 그에게 줄 수 없을, 그런 행복을 담고 있었다.
‘나한테는.’
신아름이 모르는 표정.
성필은 신아름에게 햇볕처럼 따스한 표정은 보여줄지언정, 저토록 홀린 것처럼 황홀한 얼굴은 보인 적이 없다.
괜히 분하고 질투가 나서, 신아름은 서러움이 담긴 울먹임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어야만 했다.
그 속에는 원망도 있었다.
‘내 퍼포먼스 보고는 저런 적 한 번도 없으면서.’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던 성필을 떠올리니 또 열불이 끓어오른…….
“어?”
화면 속의 다키스트를 응시하는 성필을 떠올리던 그 순간, 신아름은 직감했다.
그것은 깨달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감각이었다.
‘팀장님은 단 한 번도…….’
소녀연맹의 무대로 100퍼센트 만족한 적이 없다.
그의 비교 대상은 언제나 최고의 아이돌이기에.
‘팀장님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100퍼센트를 기대한 적이 없어……?’
고작해야 80퍼센트?
‘그래서 나는 팀장님의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거야.’
성필은 신아름에게 100퍼센트를 요구한 적이 없었으니까.
‘설마, 애초에 나는…….’
신아름은, 한 번도 성필의 이상(理想)에 도달했던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