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더 퀸’의 편곡과 퍼포먼스 디자인이 끝난 건 경연까지 12일 남았을 때였다.
그때부턴 오로지 연습밖에 없었다.
연습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연습이 이어질수록, 소녀연맹은 원래 기획했던 춤이나 보컬 기교를 하나둘씩 빼야만 했다.
“이건 너무 힘들긴 하지?”
백민정은 미련 없이 안무 하나를 삭제했다.
멤버들이 일렬로 서서 발을 V자로만 움직여, 그러니까 자동차의 와이퍼와 같은 발놀림만으로 옆으로 이동하는 안무였다.
“종아리랑 허벅지에 무리가 너무 많이 가.”
삭제의 이유는 합당했다.
이 동작을 연속해서 연습하던 백설하가 종아리에 쥐가 나서 드러누워 육지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날뛰었을 때, 그 사실이 더욱 명확해졌을 뿐이었다.
“하양아 괜찮아?”
또 다른 안무.
1절이 끝난 뒤 장하양의 단독 퍼포먼스에서였다. 조아라가 생각했던, 장하양이 재킷을 풀어헤치고 고난도의 자세와 댄스를 과시하는 부분.
“하아, 조금만 쉬면, 하아, 괜찮아요.”
“음.”
장하양은 백민정의 입에서 사형선고라도 나올 것처럼 눈동자에 두려움을 띄웠다.
“그러네. 하양이한테 무리가 많이 가는구나.”
“저는, 저 할 수 있어요.”
“응. 할 수 있지.”
그런데, 아무래도 너무 힘들어 보인다.
애초에 한 다리로만 투명의자를 취한 채로 십수 초를 있는데, 피로가 쌓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 퍼포먼스는 문제가 없어. 나도 꼭 넣었으면 좋겠고. 그런데 이후가 문제야.”
이후, 2절의 시작과 함께 펼쳐지는 5인 군무.
“거기서 하양이를 뒤로 빼자.”
“연습하면……!”
“연습으로 며칠 만에 근지구력까지 늘리게? 쉬어야 다음 댄스랑 보컬도 할 수 있어.”
“…….”
“포기하자.”
장하양은 분한 듯하기도 하고 허탈한 듯하기도 했다. 아마 둘 다겠지.
백민정은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성필을 곁눈질했다. 지켜보던 성필도 OK 사인을 내렸다.
마지막 발악처럼 장하양이 그를 불렀다.
“이, 이사님 저는…….”
“하양아.”
“네, 네.”
“일단 하다가 나머지 부분이 익숙해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
“…….”
멤버들은 이토록 단시간 안에 퍼포먼스를 준비한 경험이 없었다.
물론 주간, 월간 평가를 매주 매달 겪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평가들을 준비할 때는 전문가의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들어오지 않았었다.
무엇보다 그땐 실패가 허용됐었다.
게다가 경연이란 압박감에 비교할 만한 건 데뷔나 컴백무대가 전부였다.
컴백무대는 얼마만큼 어렵더라도, 대부분은 몇 달간 연습하면 익숙해지고 결국엔 완성되기 마련이다.
“이제 며칠 안 남았어.”
“……네.”
이제 고작 며칠.
멤버들은 시간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성필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이번 기회로 그녀들이 성장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추후에 진행할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에서도, 애들이 터무니없는 목표를 설정하는 경향은 줄여줄 거야.’
삶은 타협이다.
얼마나 지고한 이상이 있더라도 현실과의 타협 없이는 다가갈 수 없다.
프로듀싱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가능성과 이상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한다. 가능성에만 치중하면 실망하게 되고, 이상에만 치중하면 절망하게 된다.
‘애들은 이번 기회에 배우는 거야.’
본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기량이 부족할 때 어찌해야 할 것인지.
원래 교훈은 성공보다 실패와 포기에서 얻는 게 더 크다.
“이사님, 죄송합니다.”
쉬는 시간, 장하양이 성필에게 다가와 죄라도 지은 듯이 사과를 읊었다.
“제가 더 잘했으면 원래 계획대로 했을 텐데.”
앞으로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실망하지 말아주세요.
장하양은 그리 자기 할 말만 하고 대뜸 자리를 떴다. 성필에게 대답을 듣는 게 무서운 듯했다.
‘하양아.’
성필은 장하양에게 돌려주지 못한 답을 속으로 되새겼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는 건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야. 잘했어. 장하다.’
장하양도, 멤버들도, 성장하고 있다.
* * *
경연 4일 전.
신아름과 백설하는 밤새 함께 연습을 이어갔다. 그녀들의 얼굴은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단순히 경연이 다가와서는 아니었다.
“하아.”
신아름은 ‘더 킹’의 악보를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뱉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보니 더 기가 막힌다.
“이게 말이 되냐고. 오선보를 벗어났잖아…….”
악보에 새겨진 음표는 본인이 새라고 주장할 생각인 듯, 오선보를 넘어서 위를 훨훨 날아다니던 중이었다.
신아름은 1옥타브 ‘도’부터 손가락으로 오선보를 짚어가면서 음계를 셌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3옥타브 ‘도’.
아무리 세봐도 달라지지 않는다.
“쌔앰…… 남자가 3옥타브 진성(眞聲)으로 내는 거 진짜 드문 일이라면서요. 근데 다키스트는 멤버들은 전부 다 하는데요?”
“……그러게.”
백설하는 신아름과 보컬트레이닝을 진행할 적, 남자 보컬의 성종과 한계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서구권에서 남자 고음역대 노래로 흔히 꼽히는 노래가 있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예수 역이 부르는 ‘Gethesemane’란 곡이다.
최고음은 2옥타브 ‘솔’. 그 음역대로 노래를 부르면서 연기까지 제대로 한다면, 이 배역으로 몇 년 동안 인기를 구가할 수 있다.
대체재가 없으니까.
그만큼 높은 음역대를 구사하는 동시에 연기까지 하는 인물이 드물다.
“근데 얘들은 노래 부르면서 춤까지 춘…….”
“아름아, 얘들이 아니라 선배님들.”
“……하아. 이 선배님들은 춤까지 춘다고요.”
결과부터 말하자면, 신아름은 아직도 공중 도약 후 깔끔하게 고음을 내는 게 불가능했다.
항상 밴딩(음정을 한 번에 맞추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면서 맞추는 것)이 뒤따른다.
“쌤은 뭐…….”
신아름은 2옥타브 후반과 3옥타브 ‘도’의 음표에 날개를 그려주면서 물었다.
“좀 나아졌어요?”
“……아니.”
‘더 킹’ 최후의 하이라이트에선 케이팝의 전설이 된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5인 멤버 전원의 3옥타브 진성 고음 릴레이다.
그런데 소녀연맹은 그럴 수 없으니, 세 명이 나눠서 맡기로 했다.
첫 번째 신아름. 두 번째 리카.
셋, 넷, 다섯 번째 백설하.
그리고 백설하는 총합 20초에 달하는 고음을 홀로 재현해낼 수가 없었다.
‘춤을 안 추면 가능해.’
그런데 춤을 안 출 수는 없잖은가.
백설하는 도저히 3분간 격렬히 춤을 춘 뒤의 체력으로, 또 춤을 추면서 고난도의 묘기를 부릴 재간이 없었다.
확신하건대 이건 에리카도 못한다.
“최고의 아이돌…….”
신아름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응?”
“아…… 아니에요.”
삐비빅.
핸드폰 알람이 울리자 둘의 한숨이 더욱 진해진 채 뿜어졌다.
다시 연습의 시간이다.
“쌤.”
하지만 신아름은 휴식을 더 이어나가고 싶은지 백설하를 조심스레 불렀다.
“최고의 아이돌은, 걸그룹 중 최고는 이거 할 수 있겠죠? 익스 이블 언니들은요.”
“그분들 해체했어.”
“네?!”
성필이 익스 이블을 최고의 걸그룹이라고 소개하던 때. 호들갑을 떨며 성필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게 어제 같은데, 익스 이블이 해체했다고?
“왜요?”
“멤버 한 분이 임신하셔서, 그냥 깔끔하게 해체하기로 했대.”
“임신? 아니, 활동하면서요?”
“그렇대. SNS 보니까 아기 사진도 올리시던데…….”
“미국은 어메이징하네요 진짜. 사람들은 뭐래요?”
“댓글에 아기가 귀엽다거나 출산 축하한다는 내용밖에 없었어. 그분 때문에 해체했다면서 욕하는 댓글도 있긴 하던데, 별로 많진 않구.”
걸그룹이 활동 중 임신이라…….
‘상상이 안 되네. 신문 1면도 장식하겠다.’
한국이라면 아마 평생 먹을 욕은 다 먹을 것이다. 팬들에게서만이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신아름은 갑자기 장하양이 ‘얘들아 나 임신했어’라고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아마 그 직후에 ‘농담!’이라면서 분위기를 곱창 내겠지.
꽤 재밌는 농담을 생각해낸 신아름은 실실 웃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언니, 우리 사인 정할까요?”
“사인?”
“네.”
퍼포먼스 변경의 가장 큰 피해자, 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가장 좌절하고 있는 건 둘이었다.
“저 사흘간 보컬 완성 못 하면, 도약하고 고음 내는 거 금지잖아요.”
“그렇지.”
“언니도 3연속 고음에서 두 번째 고음은 저한테 양보하고요.”
“……응.”
“그런데 정말, 만에 하나 기적이 일어나서.”
당일 퍼포먼스를 완성한다면.
“사인 보내요.”
“어떻게?”
백설하가 흥미로운 기색으로 귀를 세웠다.
신아름은 고민하더니, 백설하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등줄기를 훑었다.
“힉?!”
“이거 어때요? 무대 위에 올라가서도 할 수 있는데.”
“노, 놀랐잖아. 그러지 마아…….”
“왜요, 괜찮은데. 무대 위에 서서 해도 관객들한테 안 보이고, 바로 전달할 수도 있고.”
“그럴 거면 귓속말도 있잖아.”
“그건 보이잖아요.”
둘은 이내 서로를 보면서 웃었다.
행복한 고민이다.
어째서 행복하냐면.
“근데 그럴 일 없겠죠.”
이뤄질 수 없는 고민이기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생길 리 없는 완벽한 남자친구를 상상 속에서나마 떠올리는 것처럼.
“내일 인터뷰죠?”
“응. 빨리 자야 하는데…….”
내일 다크 서클 생기겠다.
그리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배시시 웃을 예정이었던 백설하는, 곧 넋 나간 소리를 뱉어야만 했다.
“어?”
신아름이 울먹이듯 어깨를 떨었기 때문이다.
“아, 아름아 왜? 왜, 울어?”
“안 울어요.”
다만 울 것 같은 기분일 뿐이다.
“쌤.”
신아름은 분해 죽을 지경인 사람처럼 눈가가 젖어갔다.
“저는요, 팀장님한테 약속했거든요.”
아주 옛날에, 신아름은 성필에게 약속했다. 그의 꿈을 이뤄주기로 말이다.
최고의 아이돌을 프로듀싱하겠단 꿈을.
“근데, 겨우 이것도 못 하면…….”
다키스트의 ‘더 킹’ 전체를 하란 것도 아니고, 후반부 하이라이트만 하란 것이다.
그런데 이거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다.
“못 되는 거 아니에…….”
백설하는 신아름을 있는 힘껏 안았다. 그리고 신아름이 눈물을 닦을 수 있게 그녀의 머리를 어깨에 묻도록 했다.
“아름아. 아직 시간은 많아. 이번만이 기회가 아니야.”
“그치만…….”
“못하더라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시간이 부족했던 것뿐이야.”
백설하는 자신의 잘못도 크다고 여겼다.
옛날에 그녀는 소녀연맹의 휴식기에 신아름의 보컬을 뜯어고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백설하의 판단으로, 신아름은 불안정한 호흡법과 발성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몇 달에 걸쳐서 훈련해야 하는 거라서 계속 미뤄왔었는데.’
활동 기간에 훈련 중인 호흡법과 발성으로 노래하려면, 이전보다 보컬 실력이 훨씬 떨어진 상태가 될 것이니까.
환자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고 몸이 약해진 상태와 비슷하다.
하지만 조금 무리가 있더라도, 일본에 오기 전에 신아름을 지도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름이가 제대로 된 보컬을 배웠으면 이 퍼포먼스도 원활하게 했을 거야.’
지금처럼, 백설하에게 주먹구구식으로 보컬법을 전수받아 억지로 소화하려는 게 아니라.
완성된 방법으로 다키스트의 퍼포먼스를 소화했을 것이었다.
“시간이 부족했던 거야, 시간이…….”
백설하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듯 그 말을 반복했다. 반복해서 믿음을 다지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죄책감을 덜어내야만 했다.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신아름과 비슷한 꼴이 될 것 같았기에.
“박 이사님은 틀린 적이 없으셔. 우린 최고의 아이돌이 될 거야. 이번 경연에서도 이길 거구. 우리가 케이어스를 이겼던 것처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아름아.”
백설하는 신아름을 떼어내고 눈을 맞추었다.
“그건 아름이가 제일 잘 알잖아. 박 이사님을 가장 오래 봤으니까. 이사님 믿지?”
신아름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설하가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성필이 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래, 그러면 돼. 우린 이길 거야.”
위로 다음엔 부끄러움을 견디는 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신아름은 어색하게 머리칼을 정돈하더니, 별일 아니란 투로 툭 뱉었다.
“미안해요.”
“뭐가?”
“언니들이랑 조아라, 리카가 막 아이디어 회의할 때 가만히 있던 거요. 근데 그거 정말 생각이 안 나서 그런 거거든요.”
어쩌면, 신아름 자신은 성필의 이상에 맞지 않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나라서, 내가 생각해서,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거. 아티스트십. 아마 그건 제가 평생 가도 못 얻을지도 몰라요.”
앞으로도 신아름은 소녀연맹의 색깔에 무임승차하게 될 것이다.
다른 네 사람이 그려낸 소녀연맹이란 총천연색 작품에 바람처럼 투명이 묻어나겠지.
“아름아, 넌 그런 거 필요 없어.”
신아름은 백설하가 또 위로해주려나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고, 그녀가 진심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너는 너라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필요 없잖아. 아름이 넌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뭐든 이 세상 누구보다 잘하게 될 수 있어.”
박 이사님이 그러셨잖아.
“아름이는 천재라고.”
감명받았는지 빤히 백설하를 응시하기만 하던 신아름은, 갑자기 픽 웃었다.
“왜, 왜 웃어……?”
나름 상황에 맞는 말을 했다고 여겼는데, 그냥 오글거리는 위로로 들렸을까?
백설하의 뱃속에서부터 부끄러움이 서서히 올라오려던 찰나, 신아름이 팝콘이 터지듯 귀엽게 웃었다.
“그럼 쌤은 세상에서 제일 귀엽겠네요.”
“으, 응?”
“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쌤은 귀여움 천재라고.”
아, 무슨 말인가 했더니.
백설하도 신아름과 마찬가지로 웃었다. 아까의 우울함은 전부 씻어버린 채로.
“그래,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됐어?”
“오오, 귀여움 천재. 아예 일본에서 카와이계 아이돌 해보는 건 어때요?”
“그, 그건 좀……. 나 20대 중반이구…….”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좀 열받네요.”
* * *
방송 3일 전, ‘뉴아사’ 출연자 최종 인터뷰.
제작진은 소녀연맹의 트레이닝 장면과 인터뷰를 따기 위해 직접 웨벡스로 찾아왔다.
인터뷰에는 경연 상대를 향한 간단한 멘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멤버들은 부족한 연습 시간을 쪼개어 익숙하지 않은 일본의 아이돌이나 가수들의 프로필을 외워야만 했다.
“‘유지’ 선배님의 노래는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멤버들은 카메라를 앞두고 돌아가며 경연 상대를 평했다.
고작 곡 몇 개 들어본 것으로 그들의 기량을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방송이니 없는 말이라도 짜내어야 했다.
제작진은 무미건조한 소녀연맹의 응답들에 약간은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대놓고 떡밥을 달란 말은 못 했다.
“네, 음, 잘 들었습니다.”
MC역의 예능인은 PD에게 ‘도발적인 멘트를 뽑아라!’라는 특명을 받았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를 못 내겠다.
제작진의 구석에 섞여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히무라 때문이었다.
‘저분한테 밉보이면 일이 다 끊길지도 모르잖아.’
만약 소녀연맹이 히무라와 엮이지 않았다면, MC는 능글맞은 태도와 언뜻 무례하게 비칠 수 있는 질문 공세를 퍼부었을 것이다.
“자아, 그럼 마지막 질문인데요. 아라 씨가 답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소녀연맹의 메인 댄서께 드리고픈 질문이라서요.”
MC는 인터뷰에서도 조아라를 집중 공략했었다.
소녀연맹에서 가장 주목받는 멤버는 조아라였으니까.
이유는 자명했는데, 그녀의 말투 때문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조아라는 리카에게 속아 양아치 말투를 배워버렸다.
말투를 수정할 새도 없이 일본으로 왔기 때문에, 계속 그 말투를 사용했다.
그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정보였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조아라는 평범한 말투를 썼다. 완전히 평범하진 않고, 양아치 말투와 오락가락하는 것이었다.
‘아라가 잘하고 있네.’
성필은 그 광경을 보면서 감탄까지 할 지경이었다.
조아라는 ‘인터뷰 때문에 겨우겨우 배운 평범한, 그렇기에 어색한 어투’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 모습이 제작진에게 잘 먹혀들어 갔다. 자꾸만 퍼지는 옅은 웃음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한 이사님. 대체 얼마나 아라를 잘 가르친 겁니까?’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한구인에게 성필이 마음으로나마 존경을 표했다.
“소녀연맹은 걸그룹치곤 굉장히 격렬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편이죠? 보이그룹에도 지지 않고요! 정말 대단한 점인데요, 역시 오랜 연습이 비결이겠죠?”
MC의 질문은 논란거리를 뽑아내겠단 의도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 질문 자체에 조아라의 역린이 들어 있었다.
“걸그룹치곤……?”
멤버들의 표정이 굳었다.
조아라는 이런 말에 민감히 반응한단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성필마저도 불안한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조아라는 평온하게 대꾸했다.
다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알아요.”
그런데 혹시나가 역시나, 조아라는 ‘감사합니다’로 끝내지 않았다.
“칭찬이시잖아요. 칭찬인 거 알아요.”
“예……?”
조아라의 반응이 이상하자 MC가 당황했다. 그로선 조아라의 분위기가 달라진 이유가 감도 잡히지 않았기에 당연했다.
“그런데 걸그룹‘치고’란 말씀은 좀……. 저희가 앨범을 내거나 무대에 설 때 ‘보이그룹보다 잘하자’거나 ‘보이그룹에 지지 말자’, ‘보통 걸그룹과는 다르게’, 이렇게 생각하면서 연습하진 않으니까요. 그냥…….”
조아라는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고 팔을 휘적이다가 그저 한숨을 뱉었다.
“그냥, 비교보다는 소녀연맹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봐주시면 좋겠어요. 이런 걸그룹은 드물다. 보이그룹 같다. 남자도 하기 힘든 퍼포먼스다. 칭찬이란 거 알아요. 아는데, 저희를 볼 땐 소녀연맹 그 자체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상외로 조아라는 공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의견에는 아티스트적인 고민의 흔적이 묻어났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이고 싶다’는 아티스트의 고민이.
“다른 그룹이나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예요. 누구보다 더 빛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만의 색으로 빛나는 거잖아요. 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아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필은 그에 감동까지 한 마당이다.
별다른 기대 없이 져진 질문에 돌아온 답변은 상상 이상으로 수준이 높았다.
“그래도 역시.”
그런데 MC는 인터뷰를 감동으로 끝내지 않았다.
“부담감은 있으시죠? 보이그룹의 탑이었던 다키스트를 커버하시는 거니까요. 뭐랄까, 남자 아이돌의 퍼포먼스가 더 힘든 건 사실이니까요. 신경 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아, 이건 역시 힘들구나 싶은 부분이 있었을까요?”
흔하디흔한 미끼다.
조아라는 옅은 짜증을 억누르면서 적당히 대꾸해주려 했다.
그런데 그때 조아라의 눈에 대사 지시 카드가 들어왔다.
‘뉴아사’의 PD 중 한 명이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어 MC에게 보여주었다.
[남녀 퍼포먼스의 난이도 차이에 대해]
차이에 대해…… 물어보라는 거겠지.
방금 아티스트는 저마다의 색으로 빛난다, 고 말한 직후다.
그런데 PD란 사람이 뽑아낸 질문이 저것이라니.
‘왜 이렇게 비교를 못 해 안달이야.’
됐다.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적당히 넘어가면 될 뿐이다.
아까 MC가 소녀연맹의 메인 댄서에게 하는 질문이라고 했던가.
댄서라면, 아티스트라면 굳이 방송국이 좋아할 만한 흥밋거리를 던져줄 필요는 없다.
‘말을 아끼는 게 낫지.’
특히 경연에 관련된 코멘트라면 더 그렇다.
작품으로 말을 대신하면 되니까.
‘그런데 아이돌은…….’
아이돌은 아티스트이면서 동시에 엔터테이너.
‘아이돌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잖아.’
적어도 조아라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돌에겐 쇼맨십이 필요하다.
성필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네, 비교하고 싶으면 무대에서 마음껏 해봐요.”
조아라의 말투가 양아치 쪽으로 기울었다.
“비교라면…… 누구를? 특별히 신경 쓰는 상대가 있으신가요? 세이코 씨라던가?”
MC의 얼굴에 흥분이 만연했다.
그를 향해 조아라가 짙은 미소를 보였다.
“가수 세이코가 아니라, ‘다키스트’랑요.”
* * *
‘뉴아사’ 촬영 하루 전, 텔레비전 예고편.
[당당히 선전포고한 케이팝 아이돌, 소녀연맹!]
화면은 조아라에게로 넘어갔다.
[“비교하고 싶으면 무대에서 마음껏 해봐요. ‘다키스트’랑요.”]
그것을 본 조아라가 머리를 벽에 쾅쾅 박았다.
“아, 아저씨. 나 머리 한 번 세게 때려줘요. 한 일주일 정도 기절하게.”
“너 기절하면 무대에는 누가 서…….”
“몰라요. 진저나 다키스트 멤버 데려오던가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연습이나 계속하자. 이거 인터넷에서 반응 좋아. 욕하는 사람 거의 없어.”
“다 손녀 재롱 보듯이 말하는 거뿐이잖아요!”
“야 그럼 다행이지!”
조아라의 양아치 말투 덕분에 살았다.
다들 그녀의 선언이 장난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감히 다키스트랑 비교해보라고 발언한 주제에 욕 안 얻어먹는 것만 해도 다행이잖아! 너 다키스트 전성기에 그 말 했으면 오체분시 됐을걸?!”
“됐고 빨리 기절시켜달라고요.”
“하아, 아라야. 네 생각만큼 사태가 나쁘진 않아. 그냥 네 짤이 일본 인터넷에서 밈으로 돌아다니는 거뿐이잖아.”
조아라가 미소 지으면서 자막으로 ‘비교해보세요’가 뜬 짤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주로 개구리가 뱀에게 덤비는 상황일 때 쓰인단 모양이다.
심지어 일본 트잇터 실시간 트렌드에도 올랐다.
어제 일본의 약소 야구팀과 전통의 강팀이 붙었는데, 약소팀의 감독이 ‘이번엔 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발언했었다. 7연패 중인데도 말이다.
그 감독의 얼굴과 조아라의 발언을 합성한 짤도 실시간 트렌드에 올라서, 이젠 야구팬들에게도 조아라가 알려지게 됐다.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
“네가 아이돌은 아티스트면서 엔터테이너라면서. 쇼맨십이었다면서.”
인터뷰가 끝나고 조아라에게 황망히 달려온 성필을 향해, 조아라는 자신만의 아이돌론을 펼쳤었다.
“엔터테이너가 됐잖아.”
“이건 엔터테이너가 아니라 놀림거리가 된 거잖아요.”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아저씨가 기절 안 시켜주려면 여기 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거예요.”
“그럼 죽는데?!”
“그러니까 빨리 기절시켜달라고요.”
“무대 끝나면 실신시켜줄 테니까 일단 연습부터 하자.”
“그럼 의미 없잖아요!”
“귀찮아 죽겠네…….”
“뭐요? 프로듀싱하는 아이돌이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데 ‘귀찮아 죽겠네’? 우리 사이 이것밖에 안 돼요? 이거밖에 안 되냐고요! 빨리 내 심적 고통을 위로해줘요!”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되는 거에 감사해라.’
전생이었으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기절시켰을 것이다.
* * *
‘뉴아사’ 촬영 하루 전.
조아라가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것과는 반대로, 소녀연맹의 퍼포먼스는 진일보했다.
“어?”
또 해봐도.
“돼, 됐다.”
다시 해도.
“됐어!”
수십 번을 반복해도.
“티, 팀장님 저 이제 돼요!”
신아름이 ‘더 킹’의 퍼포먼스를 완성했다.
도약하고 착지한 즉시 3옥타브 ‘도’의 고음을 8초간 유지하는 것.
오랜 연습으로 지친 상태인데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 소화했다.
“팀장님 저 된다구요!”
“아름이 컴온!”
성필은 기쁨에 겨워 신아름을 꽉 안고는 여러 번 돌았다.
신아름도 성필의 품에서 마음껏 기뻐했다.
‘됐어!’
성필은 신아름 못지않게 기뻤다.
아니, 행복했다.
이렇게나 행복했던 적이 올해 들어 있었던가?
신아름은 다키스트의 퍼포먼스를 완성해낸 것이다.
최고의 아이돌, 다키스트의 리더, 서유선의 퍼포먼스를!
“팀장님 제가 말했죠! 제가 말했었죠! 최고의 아이돌 되겠다고! 저한텐 다키스트도 껌이라구요!”
신아름이 과도하게 흥분해서 다키스트와 자신을 비교했다.
심지어 다키스트를 껌이라고 표현했다.
평소 같았으면 ‘다키스트를 모욕하지 마!’라고 했을 성필이지만.
“그래, 아름이 네가 최고야!”
신아름은 그 말을 듣곤 찡하니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코알라처럼 성필에게 달라붙어 울먹였다.
당연히 슬퍼서는 아니었다.
“당연하죠! 누가 데려왔는데!”
내일 소녀연맹이 펼칠 무대는 완벽할 것이다.
아니, 100퍼센트는 아니라도 90퍼센트는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90퍼센트냐면.
“축하해, 아름아.”
빠진 10퍼센트, 백설하가 다른 멤버들과 함께 진심을 담은 축하를 전했다.
그녀는 마지막 날까지 3연속 고음 퍼포먼스를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별건가.
어차피 퍼포먼스의 구멍을 메울 방법은 있는데.
그저, 백설하가 3연속 고음 도중 잠시 물러나면 될 뿐이다.
‘내가 두 번째 고음에서 물러나고, 리드 보컬인 아름이가 한 파트 더 맡아줄 거야.’
그러면 된다.
그걸로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