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장하양은 성필이 케이어스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을 빛내던 것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뇌리에 박아놓고 있었다.
케이어스는 라이벌이지만, 동시에 동경의 대상과 같았다. 성필이 그토록 인정하는 아이돌이라면 무엇이라도 배울 점이 있을 테니.
‘그런데 박 이사님이 케이어스 앞에서…….’
케이어스 멤버인 진소유를 눈앞에 두고 장하양을 칭찬했다.
더 낫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성필이 ‘케이어스보다 소녀연맹이 더 낫다’고 인정한 적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억지로 요구했던 상황들이었어.’
신아름이나 리카는 성필이 그 말을 할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곤 했었다.
그래, 성필은 소녀연맹이 우위에 있음을 수없이 많이 인정했었다. 비록 그게 고슴도치 사랑일지라도.
하지만, 감히 케이어스 앞에서 그게 가능하리라곤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 그래요?”
진소유가 아무렇지 않단 듯 여유롭게 답했다. 그녀는 성필의 말을 안 믿는 것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장하양이 나타나, 자식의 기를 살려주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 테니까.
심지어 장하양마저 성필이 진심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니, 들으셨어요?”
장하양이 위풍당당하게 성필의 곁으로 다가와 진소유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제가 더 낫다고 하시는데요?”
“음…… 무례하게 굴려는 건 아닌데.”
진소유는 장난스럽게, 또는 기분이 살짝 상한 티를 내면서 흐릿하게 웃었다.
“하양이는 저 말을 믿어?”
“네, 믿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해도, 장하양은 성필만 인정해주면 상관없다.
“아니, 믿는 게 아니라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박 이사님이 인정해주셨으니까요. 그럼 그게 맞아요.”
진소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곤 어찌 돼도 상관없단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렴 어때.”
“소유 씨.”
아까부터 한국말로 이어지는 대화에 은근 소외감을 느끼던 아토무가 말했다.
“다시…….”
“알겠어요.”
그렇게 진소유와 아토무의 팀은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성필은.
‘…….’
생각이 없었다.
아예 사고 자체가 멈추었다.
팬인 케이어스의 앞에서 ‘당신네들보다 우리네 애들이 더 나아요!’라고 해버렸다.
우연히 만난 아이돌에게 ‘그쪽보다는 아이돌 누구누구가 더 낫네요’라 말했다고 생각해보자.
굉장한 실례가 아니겠는가?
‘……아니야.’
성필이 간신히 정신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많이 겪었잖아.’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에 과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여러 번 좌절을 겪었었다.
그건 어느 정도 성필의 탓이었다.
적이어야 할 타 그룹을 팬심으로 떠받드니, 담당 아이돌인 소녀연맹이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난 옳은 길을 택했어.’
장하양이 혹시나 진소유와 자신을 비교하여 움츠러들길 바라진 않는다.
그럴 바엔 진소유에게 미움받는 편이…….
미, 미움받는 편이…….
“박 이사님, 저기 소유 언니한테 들리게 저 칭찬 한 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장하양이 아예 뽕을 뽑아먹으려고 했다.
멍한 정신과 반대로, 성필은 그녀의 요청을 듣자마자 이행했다.
“하양이가 최고야!”
허.
이미 진소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벌어졌지만, 착각일까. 그녀의 비웃음이 들린 듯한 건…….
“어, 이사님 왜 인상 찌푸리고 계세요? 제가 거짓말이라도 시켰나요?”
“아니야…….”
장하양은 아까와 전혀 달랐다.
성필이 진소유를 칭찬한 것을 듣고는 안절부절못했지만, 지금은 승천하는 천사처럼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다.
“크흠.”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타츠야가 팀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방금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를…….
“닭살 돋는 멘트 끝냈으면 이후 스케줄 잡지.”
분위기만으로 알아챘나 보다.
성필은 옅은 붉은색으로 뺨을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만남은 사흘 후.
그때 타츠야는 장하양과 성필에게 의상 프로토타입을 보여주게 됐다.
장하양이 직접 입고 다시 디자인을 검토하거나 액세서리 등을 추가해야 한다.
타츠야는 태블릿에 일정을 추가한 뒤, 비서에게 1시간 쉬겠다고 말했다.
“후우.”
층의 공용 화장실로 들어온 타츠야는 세면대를 짚고 피로에 찌든 한숨을 뱉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이전보다 훨씬 늙은 얼굴이 보였다.
‘패션쇼 시즌마다 사람 잡겠네.’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집무실로 가자마자 에너지 드링크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타츠야는 천천히 손을 씻었다.
“타츠야.”
그때 화장실로 장하양과 진소유의 촬영을 맡았던 포토그래퍼, 치하루가 들어왔다.
“아직 안 갔구나.”
“스튜디오에 앉아서 편집까지 끝냈어. 네 메일로 바로 보냈고.”
“대충한 건 아니지?”
“들켰네.”
치하루는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곤 알코올 티슈로 손을 닦았다.
그녀의 얼굴 또한 타츠야와 마찬가지로 짙은 피로가 서려 있었다.
“치하루, 일은 할 만해?”
“매일 전쟁이지. 5년 전에 제안 왔을 때 내셔널 지오그래피에 갔어야 했어. 그랬으면 지금쯤 사바나 어디에 뒹굴면서 동물 찍고 있었으려나.”
“도쿄보단 사바나가 낫지.”
진심이다.
도쿄, 이 콘크리트 숲은 거주자들의 기를 하루가 다르게 빨아먹는다.
숲의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은 바닥의 거주자들보다 훨씬 빨리 늙음이 틀림없다.
“근데.”
치하루가 속눈썹을 손질하면서 말했다.
“진짜 내가 한 10년 전으로 돌아갔나 했어. 저렇게 말을 못 알아듣는 모델 상대하는 것도 오랜만이야. 피곤하네.”
장하양을 말하는 것이리라.
타츠야는 손을 더욱 박박 문질렀다.
“직업 모델이 아니니까.”
“그렇다기엔, 소유란 아이돌은 엄청 잘하던데? 나 깜짝 놀랐어. 원래 모델이었다거나?”
“그건 아닐걸.”
“그래도 소유 덕에 후반 촬영은 금방 끝났으니 한숨 돌렸네.”
“하아양은 별로였어?”
“별로랄까, 그냥 그저 그런 모델들 상대하는 기분. 알지? 섹시한 포즈 취하라니까 골반 빼는 18번 포즈나 취하는 인간들……. 진이 다 빠졌어.”
“넌 초심을 찾을 필요가 있어.”
“너 은근히 하양이란 아이돌을 감싸네? 너도 초조하지?”
그럴 수밖에.
본인이 오프닝 행사 모델로 고른 사람보다 확연히 더 나은 모델이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 상대 모델이, 타츠야와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두고 다투는 아토무가 뽑은 사람이다.
“초조하긴.”
타츠야는 호스의 물을 잠갔다.
“오프닝 행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음, 그래?”
“주목받는 건 진짜 모델의 런웨이니까. 연예인이 자빠지든 얼어붙든, 디자이너랑은 그다지 상관없어.”
장하양에게 기대를 걸었던 건 맞지만 말이다. 그리고 장하양은 딱 타츠야의 기대에 맞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진소유란 인간이 예상외로 재능이 있던 것뿐이다.
갑자기 아까 있던 일이 떠올랐다.
집무실에서 했던 작업의 말미에, 장하양이 타츠야에게 이리 물었었다.
‘제가 앰배서더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는 장하양의 어투에는 초조함과 절박함이 묻어나서, 타츠야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위로해버리고 말았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해버렸다.
‘하아양이 그만한 재목이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실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우린 이미 소유가 있어. 넌 될 수 없어.’
* * *
소녀연맹은 얼마 안 있어 한국으로 돌아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날도 조금씩 여유를 갖추게 되어, 멤버들은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있다!”
오늘은 리카의 휴식일이다.
그녀는 냉동실 깊숙이 숨겨진 하겐다즈를 발견하곤, 누가 볼 새라 재빨리 꺼내어 포장을 뜯었다.
“휴가다 휴가.”
리카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한국에선 보지 못했던 일본의 예능을 보면서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여름.
에어컨.
텔레비전.
아이스크림.
사람들은 왜 굳이 행복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까? 이렇게나 행복이 가까이에 있는데…….
“헤에, 벌써 이런 시기구나.”
리카는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입에 물고 웅얼거렸다.
텔레비전에서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마츠리(축제)에 관한 소식을 들려주고 있었다.
“나츠마츠리(여름 축제)…….”
그 순간 리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이잖아!”
오늘, 리카의 고향인 가와사키(본인은 도쿄라고 주장)에서 여름 축제가 열린다.
일본에 살았을 적에는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어떡해, 고향에 있으면서 축제를 거르면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게 돼버렷!’
참고로, 리카는 고향인 가와사키가 아니라 도쿄에 있었다.
아무튼 그녀는 재빨리 인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첫 번째 타깃은 마찬가지로 숙소에서 휴식 중인 백설하였다.
리카는 백설하가 쉬고 있는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백설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쌤 큰일이에요 큰……!”
“나가.”
“아, 아니, 쌤 오늘 축…….”
“닫아.”
“하이(네)…….”
백설하는 잠자는 공주가 되었다.
리카는 터덜터덜 방 밖으로 나가서 두 번째 타깃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아라였다.
“아라쨩 오늘 시간 있어?”
[아니.]
“우소츠키(거짓말쟁이)! 오늘 스케줄 없는 거 다 안다구! 그래서 말인데, 오늘 아타시(나)랑 축제 갈래? 아라쨩이 모르는 거 잔뜩 가르쳐줄게!”
[싫은데.]
“손나(그런)! 또 춤추고 있는 거야? 춤이 그렇게 좋아?!”
[어.]
조아라는 일본에서 사귄 댄서 친구들과 시간 날 때마다 춤추는 중이다. 공원, 부둣가, 쇼핑몰 광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조아라에게 매니저로 동행했던 슈이치의 말로는, 정말 미친 듯이 춤만 춘다는 모양이다.
아이돌 댄스와 달리 형식에 제약받지 않고 춤추는 게 또 다른 재미가 있다던가.
“이러다가 소녀연맹 탈퇴하고 그 댄스 크루에 들어가는 거 아니야?”
[리카, 외로운 건 알겠는데 축제는 다른 사람이랑 가라.]
간곡한 부탁이 먹히지 않자, 리카는 성필을 상대로 57%의 승률을 달성했던 방법을 쓰기로 결심했다.
떼쓰기다.
“아라쨩한테는 춤이 남자고 유흥이고 클럽이고 이하생략인 건 알지만 너무해! 하나뿐인 친구가 이렇게 비는……!”
[잠깐. 다른 크루 애들이 배틀 걸어왔어.]
“왜 아라쨩만 출연하는 장르가 달라?!”
[아아, 서울의 전설 아라 더 댄스 머신의 등장이다…….]
쓸데없이 비장하고 오글거리는 대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리카는 황망히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면서 남은 인원을 점검했다.
‘맞아. 멤버들은 열심히 일했으니까. 휴일에 저마다 하고 싶은 게 있을 거야. 내가 이해해줘야지.’
리카는 안전빵으로 동생인 유우토에게 연락했다. 이 시각이면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유우쨩은 착하니까 누나의 부탁은 거절 못 할 거야!’
몇 번의 통화음이 있고 나서 유우토가 전화를 받았다.
리카는 오랜만에 동생과 축제에 갈 생각에 잔뜩 들떠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분명 재밌을 거야!”
[미안 누나.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여자친구?! 유우쨩 언제 그렇게 큰 거야!”
[여, 여자친구 아니야……. 애초에 없고…….]
“여자야?”
[…….]
“인정 못 해! 여자랑 가려면 누나한테 허락 맡고 가야……!”
전화가 끊겼다.
리카는 세상에 혼자 남은 것만 같은 고독을 맛보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남은 사람들을 세어 보았다.
‘아름이는 일 있고. 하양 언니는 회사에 무슨 연습이 있댔는데…….’
그럼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리카는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다이얼을 눌렀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발신음이 세 번 넘기 전에 연락이 됐다.
“박 이사님! 오늘 제 고향에서 축제해요! 같이 가서 놀아요!”
[축제면 사람 많잖아. 내 다리로 거길 가라고?]
“어차피 백수인 이사님은 할 것도 없잖아요!”
[나 백수 아니거든?!]
일이 없는 건 맞다만, 성필은 자신이 백수란 사실을 극렬히 부정했다.
“확실히 다리가 불편하면 힘드시겠네요…….”
[뭐, 리카가 정 부탁하면 어쩔 수 없지.]
“에, 정말인가요!”
[그래. 개백수인 이사님은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단다. 오히려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리카. 너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까. 죽을 때까지 함께야…….]
“배, 백수라고 한 거 사과드릴게요…….”
[내가 차 가지고 숙소까지 갈까?]
“아니에요! 아타시(제)가 회사에 갈게요! 그러니까 그동안 박 이사님한테 특별 임무를 드릴 거예요!”
[특별 임무?]
“하양 언니를 설득해주세요!”
장하양은 딱히 스케줄은 없지만 웨벡스에 있다. 패션쇼 때문에 워킹과 포징을 연습한다던데, 그 정도가 심하다.
“하루는 놀아도 된다구요!”
[……그렇지.]
성필 또한 장하양의 과도한 연습을 신경 쓰고 있었다.
장하양의 모델 강사인 하루키의 말로는, 더는 가르칠 게 없다고 한다. 고작 며칠로는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장하양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몇 시간이고 하이힐을 신으면서 워킹을 반복했다.
[알겠어. 설득하고 있을게.]
만약 장하양이 준비하는 게 아이돌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공연 무대라면 이해한다.
하지만 장하양이 오르는 곳은 패션쇼 캣워크다. 그녀와 같은 오프닝 행사의 연예인들은 별다른 연습 없이 오르는 게 기본이라고 한다.
연예인들이 보여줄 건 모델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유명세로 만들어진 아우라니까.
그냥 그대로의 모습만으로 괜찮다.
[하양이도 일본에 왔으니까 추억은 하나 가져가야지.]
“믿고 있을게요!”
그렇게 리카는 단장을 마치고 설레는 기분으로 웨벡스에 도착했다.
리카는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필을 향해 도도도 달려갔다. 발랄하게 그의 앞에 선 리카는 군인처럼 각을 잡고 말했다.
“박 이사님, 제가 준 임무는 어떻게 됐나요!”
“실패했어.”
“에엑?! 하, 하양 언니가 이사님의 권유를 뿌리친 건가요!”
“아니, 원래는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피곤하다면서 안 간다더라고.”
“피곤…….”
리카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성필의 손목을 잡고 연습실로 향했다.
“원래 세 번은 권유하는 거예요!”
“리카 끌지 마…….”
“앗!”
성필은 리카에게 끌려가자 깁스를 들고 한 발로만 엉거주춤 섰다.
리카는 자주 성필에게 깁스가 있단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었다.
성필의 화려한 목발 컨트롤은, 그의 다리가 멀쩡했을 때와 마찬가지인 퍼포먼스를 유지시켜줬기 때문이다.
“박 이사님이 고장 난 걸 깜빡했네요!”
“고장이라니…….”
리카가 팔을 내밀었다.
“특별히 오늘만 하루 종일 팔짱 끼는 걸 용서해드릴게요! 자, 슈퍼 아이돌의 팔이에요!”
“괜찮아. 난 리카가 있으니까.”
“……하이(네)?”
성필이 사랑스럽다는 듯 목발을 쓰다듬었다.
리카가 경악했다.
“목발에 제 이름을 붙이신 건가요?!”
“너도 영국에 뮤비 촬영 갔을 때 말한테 내 이름 붙였잖아. 난 안 돼?”
“영국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예요!”
리카가 눈에 불꽃을 담아 성필의 손에 들린 목발을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정말 매직으로 ‘リカ(리카)’라고 적혀 있었다.
리카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이게 대체 뭔가요?! 소름 돋아서 이사님을 밀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성필이 크게 웃었다.
그에 리카도 피식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성필은 도저히 30대 중반이라고 믿지 못할 만큼 장난을 좋아한다.
“아, 재밌네.”
성필이 목발에 적힌 ‘리카’를 손바닥으로 지우려 하자, 진짜 리카가 그의 손목을 잡아서 막았다.
“왜 지우시나요!”
“어? 하양이한테도 같은 장난 치려고.”
이미 성필의 반대쪽 손에는 수성 매직이 들려 있었다. 리카는 그것을 간단히 압수했다.
“이런 장난은 저한테만 치셔야 해요! 하양 언니나 다른 멤버들한테 치면 경멸당하는 걸로는 안 끝나요!”
“오히려 좋아.”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가야 한 회사의 임원이 되는 거네요!”
“너 점점 나한테 말이 심해진다?”
둘은 장하양이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분명 피곤하다면서 성필의 제안을 거절했던 장하양은, 거울 앞에 서서 한 포즈를 유지 중이었다.
힘들지도 않은지 부동자세로 거울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마와 목, 팔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게 보였다.
“뭔가, 방해하기 미안할 정도의 아우라네요. 그런데 언니가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
성필은 리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장하양이 깜짝 놀라 포즈를 풀었다.
“박 이사님?”
“하양아, 놀러 가자.”
“네? 아, 저는…….”
“연습 많이 했잖아. 내가 보기에 하양이는 이미 충분해.”
아이돌의 퍼포먼스 연습이라고 한다면, 그것에는 명백한 끝이 존재한다.
완성도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하양의 연습에는 끝이 없다. 그녀는 명확한 지향점도 없이 워킹과 포징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성필이 보기에, 그건 불합리한 집착과 같았다.
‘소유 씨 때문이겠지.’
케이어스에 대한 라이벌 의식은, 아이돌과 관련이 없는 분야에조차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라이벌 의식은 이제 집착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장하양은 연습하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한 단계까지 와버린 것이다.
얼마나 연습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로 연습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반복하는 워킹과 포징.
‘그런 건 하나도 도움이 안 돼.’
장하양의 모델 강사인 하루키도 말했었다.
모델에겐 테크닉보다 타고난 룩(Look)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만약 테크닉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싶다면, 그건 장하양에게 주어진 고작 며칠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 이상 노력하는 건 사실상 쓸모없는 짓이라고 했었다.
“놀러 가자.”
성필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장하양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애매하게 미소 지으면서 손을 거두었다.
“이사님 그게, 저…….”
장하양은 성필 대신 리카를 보았다. 장하양이 배꼽 아래를 손으로 가볍게 만지면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리카가 퍼뜩 이해하곤, 성필의 팔을 붙잡고 뒤로 끌었다.
“리카?!”
성필은 깁스를 들고 한쪽 다리로 엉거주춤 리카에게 끌려갔다.
“하양 언니 피곤하다고 하잖아요! 거절을 튕기는 거로 착각하는 남자는 최악이에요!”
“아깐 3번은 권유하라면서!”
“하양 언니는 피곤해요!”
“아니 좀 천천히……!”
쿵.
연습실 문이 닫혔다.
억지로 끌려 나온 꼴이 된 성필은 왜 그랬냐는 듯 리카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하양 언니한테 사정이 있어요!”
“뭐 너희만 알 수 있는 사인이라도 있어? 나도 가르쳐주라.”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축제는 성필과 리카만 가게 되었다.
가와사키까지는 차를 타고 금방이었다. 그런데 리카는 축제 장소가 아니라 일단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리카는 차에 성필만 남겨두고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다시 나타난 리카는 가히 충격적인 차림새였다.
“짜잔! 유카타예요!”
흰색 바탕에 붉은 꽃이 여기저기 수 놓인 유카타였다. 그 이국적인 풍모에 홀린 것도 잠시, 성필이 소리쳤다.
“너무 작잖아!”
“어쩔 수 없잖아요! 이거 아타시(제)가 중학생 때 입던 거라구요!”
“그런 꼴로 돌아다니려고?”
“‘그런 꼴’이 뭔가요! 예쁘다곤 한마디도 안 하고 갑자기 욕하는 게 어딨나요!”
“아니…….”
현재 리카의 모습이 어떻느냐.
옷이 몸을 조여드는 듯하여 굴곡이 다 드러난다. 일부러 섹슈얼하게 리폼한 옷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솔직히, 남성향 잡지에 화보로 실으려고 만든 옷 같다…….
“부모님이 그걸 괜찮다고 하셨어?”
“부모님은 축제 데이트하러 가셨어요!”
“금슬이 좋으시네. 다시 들어가서 갈아입고 와.”
“에엑?! 축제에 유타카를 안 입으면 그해 절반은 손해 보는 거라구요!”
“한국에 4년 살면서 계속 손해 봤으니까 올해도 손해 좀 보자.”
“……별론가요? 안 어울리나요?”
성필은 더는 리카를 바라보기 힘들어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미간을 문지르며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어울려. 어울리는데, 사이즈가 너무 작아. 동생 옷 훔쳐 입은 애처럼 보일 거야.”
“별로 안 달라진 거 같은데요…….”
잠시 우울해졌던 리카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하긴, 아타시(저)도 많이 컸으니까요!”
“그래.”
“많이 컸으니까요!”
“빨리 갈아입고 와.”
“컸으니까요!”
“뭐 어쩌라고?!”
리카는 다시 평상복이 되어 차로 돌아왔다.
“자, 그럼.”
“이쿠(간다)!”
성필과 리카는 가와사키의 마츠리 현장으로 향했다. 중간에 사람들이 부쩍 느는 구간이 있어서, 어디쯤 차를 세워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둘은 축제 거리 입구까지 신나게 걸어갔다.
“가면 사격해서 상품 따주세요! 이사님은 군대도 갔다 오셨으니까 백발백중이에요!”
“귀신을 잡아 죽이는 해병, 박성필의 전설이 시작될 때인가. 그런데 그거, 사격용 총은 잘 못 쏴.”
“에에, 군대에서 PX만 가셨나요. 실망이에요.”
“진짜 총이랑 구조가 다르니까. 정조준해도 총알이 똑바로 안 날아가. 클리크 조정도 안 되어 있…… 애초에 클리크가 없던가. 아무튼, 그런 총으로 쏘려면 경험적으로 탄도의 휘어짐을 보고 계산해야 해. 여러 번 쏴야 정확한 궤도를…….”
“한국 남자는 군대 얘기하면 말이 많아진다더니, 진짜네요.”
“…….”
리카는 주눅 든 성필을 보고 헤헤 웃더니 장난스레 어깨를 붙였다.
“하지만 아타시(저)는 이해해요! 한 이사님이 그러셨어요! 2년간의 추억이 서린 이야기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게 당연하다구요! 저희의 연습생 시절 이야기 같은 거…….”
“추억 아닌데?”
“부정?!”
“거긴 지옥이었지…….”
“지옥?!”
“뭐, 됐어. 개백수 이사님의 군시절 이야기 따위는 지겨울 뿐이니까 이제 안 할게. 좀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자.”
“저, 저는 듣고 싶어요! 정말 괜찮아요!”
화기애애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축제 거리의 입구에 도착했다.
화려한 간판 안쪽으로는 수많은 노점이 보였다. 성필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을 직접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성필이 신나서 말했다.
“리카 리카! 나 그거 해보고 싶어! 손에 들고 하는 불꽃놀이!”
“아, 선향불꽃 말씀하시는 거네요! 죄송한데 그거 도심에서 맘대로 하면 불법이에요!”
“……그럼 내가 드라마에서 본 건 뭐야?”
“마아(뭐어), 낭만이랄까요.”
현실의 낭만은 죽었다.
“일단 한 바퀴 쭉 돌아볼까?”
“좋아요! 지갑, 준비됐죠?”
“방금 날 지갑이라고 불렀어?”
리카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사님은 자신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시네요. 제가 언제 이사님을 지갑으로 본 적이 있나요? 피해망상이에요!”
“그래서, 그 지갑 안엔 얼마가 들었지?”
“에에 또…… 540엔이네요!”
“나한테 얻어먹을 생각밖에 없잖아!”
“정산받으면 갚을 테니까 빨리 돈 줘요!”
도박중독자처럼 말하는 리카.
성필은 눈물을 삼키며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둘은 축제를 즐길 새도 없이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리카.”
“하이(네).”
“저거, 혹시.”
“맞는 거 같은데요.”
유우토와 손혜빈이 노점의 안쪽, 근린공원의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손혜빈이 왜 아직 일본에 있는가는 둘째치고, 왜 둘이 함께 축제에 와 있을까.
리카가 팔을 걷어붙이고 눈에 불을 켰다.
“13살 이상은 범죄야아아앗!”
“차, 참아! 일단 상황을 보자!”
성필이 간신히 그녀를 뒤에서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