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41화 (341/760)

341화

리카만 VCR 영상 촬영을 위해 외국으로 가는 건 아니었다. 신아름을 제외한 멤버 전원이 한 번씩 해외를 돌기로 되어 있다.

‘아니’ 뮤직비디오 촬영과 거의 같은 스케줄과 배경을 사용해서 말이다.

조정훈의 촬영팀은 영국에서 독일로, 그리고 프랑스로 향한다.

그 일정에 맞춰 소녀연맹 멤버들이 차례로 현지에 도착하는 방식이다. 촬영 중엔 성필이 프로듀서로서 모든 현장에 동행하기로 했다.

리카는 영국, 조아라는 독일, 그리고 장하양은 프랑스에서 백설하와 교대하여 촬영에 임할 것이다.

“좋은 일 있나요?”

장하양은 걸레로 문틀을 닦으면서 연신 콧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누가 보아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리카가 묻자 장하양이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외국에 가잖아.”

“여행이 아니라구요!”

라고 말한 리카는, 어제 밤새 에든버러 관광지를 검색했었다.

물론 촬영은 에든버러를 벗어난 북쪽에서 이뤄지지만, 몇 시간 정도는 에든버러를 관광할 시간이 주어지리라고 성필이 말했었다.

“업무 현장에 여행 기분으로 가는 건 프로페셔널하지 않아요!”

“알지만, 기쁜 걸 어떡해. 프랑스는 뭐가 유명하지?”

“혁명이요!”

“아하하, 혁명을 구경할 순 없잖아.”

리카는 장하양이 들뜬 걸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소녀연맹은 콘서트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앞두고 맹연습을 이어가고 있다.

한 명당 10곡 이상의 퍼포먼스를 연습하며 익히는 게 쉬울 리 없다. 그 강도는 데뷔, 컴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차라리 연습만 하면 좋을 텐데, 멤버들은 퍼포먼스 아이디어도 내야 했다.

‘내가 생각했기에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거.’

연습생 시절부터 성필에게 들어왔던 아티스트의 신조다.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멤버들은 더 나은 무대를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당연히 부담감이 매우 크다.

하지만, 비록 일이더라도 해외로 간단 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언니가 기뻐할 일이 있어서 다행이야.’

리카는 배실배실 웃으면서 장하양과 함께 창문을 닦았.

“처음 리카만 영국 간다고 했을 땐 아니꼬워서 죽을 뻔했는데…….”

“제가 즐거운 게 싫은가요?! 그리고 영국도 맞지만 스코틀랜드가 더 정확해요!”

“박 이사님이랑 네가 싱글벙글 관광할 거 상상하니 속 터지고 배알이 꼴려서 도저히…….”

“제 걱정 돌려줘요!”

리카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장하양은 따스함이 서린 미소와 함께 리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장하양의 표정에선 리카를 향한 애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그에 리카의 울상도 즉각 사라졌다.

“나도 리카가 행복하면 좋지.”

“에헤헤 저도…….”

“그런데 이왕이면 같이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한 명만 더 행복한 것보다, 다 같이 불행한 게 더 낫지 않아?”

“소셜리스트(사회주의자)!”

“함께 진창에서 뒹구는 거야…….”

리카는 장하양의 끈적한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했다.

“아직도 안 끝났어요?”

양동이와 걸레 여럿을 든 조아라가 안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대청소를 위해 헤지고 헐렁한 옷을 입은 채였다.

먼지를 많이 마셨기 때문인지, 그녀는 연신 코를 훌쩍이며 핀잔을 주었다.

“곧 조 감독님이랑 아저씨 온다고요. 빨리해요.”

장하양과 리카가 멈췄던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청소에 열을 올렸다.

오늘은 콘서트에서 보여줄 소녀연맹 일상편 VCR을 촬영하는 날이다.

팬들이 궁금해할 멤버들의 방이나 평소 생활을 찍는단 모양이다.

성필이 말했었다.

‘방과 집은 사람의 인격을 보여준다잖아. 그리고 팬들은 세상 누구보다, 가족 제외하고, 너희를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야. 애정하는 아이돌의 일상…… 누가 안 보고 싶을까?’

‘아저씨 케이어스 애들 방 보고 싶어요?’

성필은 조아라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었지만, 아무튼 팬들이 좋아할 거라고 주장했었다.

원래 조정훈은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5분 이내의 짧은 예능을 구상했었다.

하지만 가로 엔터의 요구로 일상 영상으로 기획을 선회했다.

그리고 조정훈도 나중에 말하기로, 콘서트의 컨셉을 고려하면 일상이 더 낫다는 모양이다.

“진짜 지친다…….”

신아름 또한 현관과 복도 청소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풀썩 엎드려 앓는 소리를 냈다.

“야 신아름, 다 끝냈음?”

“어.”

“방금 나 라임 잘 맞추지 않았냐? 신아름 끝냈음?”

“뭐래. 하양 언니, 조아라가 메인 래퍼 자리 탐내는데요?”

“아하하, 가져도 돼.”

장하양이 본인의 찬란한 얼굴을 신아름 쪽으로 돌리며 본인의 미를 가감 없이 방출했다.

“나는 메인 비주얼 자리가 있으…….”

“아라쨩이 메인 래퍼면 아타시(저)는 메인 비주얼 자리에 입후보할래요!”

“그럼 나한텐 뭐가 남아……?”

“언니라고 봐주지 않아요!”

리카가 물이 담긴 양동이에 걸레를 빨면서 결연히 선언했다.

무도회장에 반드시 가겠다며 다짐하는 신데렐라 같았다.

“저도 메인 포지션이 필요하다구요! 언제까지고 리드 보컬, 리드 댄서, 리드 래퍼, 리드 비주얼에만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에요!”

“……허어.”

장하양이 짙은 미소를 보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리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나랑 붙어보겠다고?”

리카도 지지 않고 일어나 장하양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이마를 맞대고 섰다.

“이제 언니의 외모 강점기는 끝났어요!”

강점기란 단어에 신아름이 움찔했지만, 리카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튼 리카의 호기로운 선언에 장하양은 재밌단 듯 그녀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이 순간부터 여기가 나의 전장, 이곳이 나의 런웨이.”

장하양이 보그 표지 모델과 같은 포즈를 취했다. 갑자기 그녀의 뒤로부터 후광이 비쳐오는 듯했다.

“이게 나의 아이돌리…….”

“청소 빨리해야 한다고요!”

신아름의 일갈에 장하양과 리카가 장난을 마치고 다시 창문 닦기에 열중했다.

아쉽지만 장하양의 메인 비주얼 포지션 방어전은 나중으로 미뤄지게 됐다.

“저러니까 아직도 청소를 못 끝냈지…….”

신아름은 삭신이 쑤신단 듯 목을 우득 우득 꺾으면서 소파에 풀썩 엎드렸다.

“이제 진짜 끝!”

조아라가 청소 도구를 정리한 뒤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다. 그녀는 소파에 누운 신아름을 보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쪽으로 몸을 던졌다.

안 그래도 좁은 소파에 조아라까지 눕자 신아름이 질색했다.

“아 쫌 떨어져라.”

“떨어지면 소파에서 떨어지는데?”

“떨어져!”

신아름이 조아라를 밀어냈지만, 조아라는 필사적으로 매달려 비키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자석처럼 꼭 들러붙어 소파를 차지하게 됐다.

신아름도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지쳐서 말할 기운도 없었으니까.

“에에, 나도 아라쨩이랑 붙고 싶어.”

“끔찍한 소리 하네. 창문이나 다 닦…….”

“리카, 남은 건 내가 정리할 테니까 먼저 쉬어.”

장하양의 배려에 리카가 난색을 표했다.

언니가 계속 일하는데 혼자만 쉬는 건 동생으로서 할 일이 아닌 듯했다.

“아니에요! 같이 하면 빨리 끝나잖아요!”

“그럼 가위바위보 할까?”

대강 10분 정도면 정리까지 마칠 수 있을 듯했다.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다.

‘쟝켄(가위바위보)이면 공평할지도?’

게다가 리카는 자신이 걸리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언니가 먼저 쉴 수 있으니, 걸리면 뭐 어떤가.

“좋아요!”

“그럼 가위바위…….”

보!

너무나 간단하게 리카가 승리했다.

“에…….”

“아, 져버렸네.”

장하양이 리카의 손에 들린 걸레를 뺏어갔다. 그리고 어서 가란 듯이 청소에 몰두했다.

리카는 우물쭈물하다가, 언니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받아들인 즉시 소파를 향해 달려가 다이빙했다.

“아 쫌 제발 꺼져어어!”

가장 안쪽에 깔린 신아름이 비명을 질렀다.

좁은 소파.

바로 옆엔 조아라가, 위엔 리카가 얹어졌다. 샌드위치로 비유하면 신아름은 가장 안쪽에 든 햄처럼 되어버렸다.

“얘들아 다 끝났어?”

개인 방 청소를 마친 백설하가 거실로 왔다.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장하양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청소 중인데, 동생 라인은 소파에 누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

“하, 하양 언니가 가위바위보에서 졌어요!”

리카가 즉각적으로 변명했다.

백설하가 장하양을 보자, 그녀는 사실이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위바위보는 어쩔 수 없지.

“근데 쌤, 굳이 대청소 해야 됐어요?”

리카와 조아라에게 덮인 나머지 목소리도 작게 나오는 신아름이 물었다.

“응, 이왕 시간이 났잖아. 우리 신년 대청소도 못 했고…….”

소녀연맹은 신년을 여유롭게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 시기에 컴백을 했었으며, 온갖 음악 시상식에 불려 다녔으니까.

대청소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름까지 와버린 것이다.

“모처럼 기회가 왔으니까 하면 좋지.”

“쌤 이거 봐요!”

리카가 신아름과 조아라를 침대 매트처럼 쓰며, 그 위에서 수영하는 시늉을 했다.

“인간 침대예요!”

“5분만 기다려라. 5분 쉬고 기력 회복되면 너 가만 안 둬.”

“쌤도 써보세요!”

신아름의 협박은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음…….”

백설하는 리카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에 섬찟한 미래를 상상한 신아름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쌤, 아니죠……?”

* * *

성필과 조정훈의 촬영팀이 숙소를 찾았다.

웬 남자들이 우르르 건물 입구로 올라가려 하자, 1층의 국밥집 사장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거 누구십니까?”

“사장님, 저예요.”

무리 가운데서 성필이 나오자 사장의 얼굴이 펴졌다.

“이사님이시네요.”

“네, 저희 애들 숙소에서 영상 촬영이 있어서 온 거예요.”

“저는 또 뭐라고. 깜짝 놀랐습니다.”

국밥집 사장은 홍규헌의 건물에 세 들어 장사하는 입장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기름기를 뺀 돼지고기를 준다거나 명절에 선물을 주는 등 소녀연맹 멤버들을 챙겨주곤 했다.

그래서 소녀연맹은 국밥집 사장과 오며 가며 친해질 수 있었다.

“다들 덩치가 크네요. 보니까 많이 드실 것들 같은데 생각 있으시면 저녁은 우리 집에서 해결하세요. 많이 드릴 테니까.”

“하하, 그때까지 있진 않을 거예요.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오겠습니다. 지음이는 요즘도 자주 오나요?”

“주에 한두 번씩은 꼭 옵니다.”

성필이 정지음에게 이곳을 소개해준 후, 그는 이곳의 단골이 됐다. 배곯았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던가.

“그럼 가보겠습니다.”

성필과 촬영팀은 계단을 올라 숙소 앞에 도착했다. 성필이 노크를 하자, 얼마 안 되어 장하양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응, 하양아 안녕. 지금 들어가도 되지?”

“네.”

일단 성필과 조정훈이 먼저 진입하고 촬영팀이 뒤따라왔다.

그들은 장비를 세팅하고 점검하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넓네요.”

“예. 덕분에 애들이 사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하네요.”

“제 가족들이 살아도 되겠어요.”

낡은 티가 나긴 하지만, 서울에서 이만한 크기의 집을 구하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만약 홍규헌이 이곳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멤버들은 훨씬 열악한 곳에서 숙소 생활을 시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옛날 아이돌 다큐멘터리 같은 데 나왔던 것처럼, 좁은 방 하나에 다섯 명이서 같이 자고…….’

불편하고 좁은 주거 환경은 인간의 정신에 심대한 피해를 끼치는 법이다.

높은 천장과 탁 트인 전망, 넓은 집에서 지내는 이들이 창의성이 훨씬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은가.

“하양아 방금까지 청소하고 있었어?”

장하양의 운동복 앞섬에는 물 자국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척 봐도 청소를 하고 있었단 티가 났다.

“네. 방금 끝냈어요.”

장하양은 바지춤 부근에 손의 물기를 간단히 닦았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후.

“박 이사님이랑 감독님 팀 오셨어요.”

열었다.

“어?!”

먼저 들린 건 백설하의 놀란 목소리였다.

성필은 이미 들어가고 있었기에, 백설하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고 멈출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인 광경은, 장하양을 제외한 멤버들이 소파 위에서 샌드위치처럼 몸을 겹치고 있는 것이었다.

“…….”

성필과 백설하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에서 얽혔다.

“설하야, 뭐 해?”

“어, 어, 그게, 이게, 뭐냐면요…….”

“살려줘요 팀장님…….”

가장 밑에 깔린 신아름이 신음을 내뱉었다.

“카메라 켜. 이거 찍어야 해.”

“안 돼요!”

조정훈이 카메라맨에게 지시하자 백설하가 황급히 외쳤다.

* * *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동생 라인의 방이었다.

리카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의 방을 소개했다.

“짜잔! 여기가 아타시(저)의 보금자리랍니다!”

“거기 내 침대거든.”

“아니!”

리카가 검지를 저었다.

“‘우리’ 침대야!”

그 말대로, 리카는 본인의 침대를 쓰지 않았다. 매일 조아라의 침대로 파고 들어가 함께 잤다.

때문에 신아름이 아예 리카의 침대를 빼버리자고 회사에 건의할 정도였다. 어차피 쓰지 않는 공간이니까.

“여기서 아라쨩과 오순도순 지내고 있어요!”

“이건 직접 봐야 해요. 볼 때마다 진짜 눈꼴 시려서…….”

신아름의 핀잔에도 리카는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오히려 조아라에게 가까이 달라붙어 본인들의 사이를 과시했다.

“더우니까 떨어져.”

“아라쨩 차가워!”

“에이컨 바람 좀 돌고 붙던가.”

옛날의 조아라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발언이었다.

2, 3년 전만 해도 리카에 대한 가드가 높았던 조아라는, 리카가 붙어올 때마다 매몰차게 떨쳐내곤 했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이젠 가족이 멋대로 집에 들인 애완견이 달라붙어 오는 정도로 생각하는 듯, 조아라는 리카의 스킨십에 적응됐다.

“에에, 그럼 그때까진 아름이랑 있어야겠다.”

“내가 조아라 대체재야? 아니다, 맞구나. 조아라 없으면 나한테 붙으니까.”

“대, 대체재라니……. 그냥 아라쨩이 촉감이 더 좋아서…….”

“사람을 침구류처럼 말하고 있네.”

조아라가 푹 한숨을 쉬었다.

21살들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밝혀지자, 평균 연령 30살 이상인 촬영팀 사이에서 웃음이 번졌다.

젊음이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저건 뭐예요?”

조정훈이 묻자, 리카의 시선이 그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리카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제 취미 공간이에요!”

취미 공간. 책상과 침대 사이, 가로 길이 40cm는 될까 하는 매우 좁은 장소였다.

그곳엔 보드게임 박스가 사람의 키를 넘어갈 정도로 쌓여 있었다. 쌓인 모양새가 아슬아슬해서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였다.

“멤버들이랑 같이 해요! 아, 이거!”

리카가 가장 위에 있는 보드게임 박스를 하나 꺼내어 카메라로 들이밀었다.

“얼마 전에 산 거예요! 시크릿 히틀러! 엄청 엄청 재밌어요! 한 번밖에 못 했지만요…….”

“왜요?”

“에헤헤, 다섯 명 이상이 필요한데 다들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요!”

멤버들은 한두 명씩 리카의 취미에 어울려주지만, 한꺼번에 모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도 시크릿 히틀러를 하고 싶었던 리카는, 혼자 다섯 명을 연기하면서 게임을 한 적도 있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하이(네)! 고향에 있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자주 했어요!”

“그런데 상자 사이사이에 끼인 책…… 잡지인가요? 저건 뭔가요?”

“아앗!”

리카가 헐레벌떡 보드게임으로 만들어진 탑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탑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게 하려고 온몸을 다해 막았다.

“저거 ‘이코노미스트’예요.”

“아름이 배신자!”

“이코노미스트?”

조정훈이 의문을 표하자 신아름이 설명했다.

영국에서 발행하는 주간지이며, 당연히 모든 내용이 영어로 적혀 있다고.

“저희 회사에 한 이사님이란 분이 계시는데요.”

신아름은 카메라에 담긴 모습을 보는 게 일반 팬일 것을 염두하고 한구인의 존재부터 설명했다.

“그분이 가끔 회사에 타임지(TIME紙)를 가져와서 보시거든요. 리카가 그거 보고 멋지다면서, 영어 공부하겠답시고 구독했어요.”

“그만해애……!”

리카는 자신의 흑역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신아름에게 매달려 호소했다.

하지만 신아름의 얼굴엔 기쁨만이 나타날 뿐, 리카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한 이사님이 리카를 분명히 말렸거든요? 이코노미스트는 어느 정도 식자층을 대상으로 쓰인 거라서 어렵다고요. 근데 얘가 공부하려는 거니까 상관없다고…….”

“아름아 그만해 부탁이야!”

“1년짜리 구독을 60만 원이나 주고 바로 질렀다니까요. 우리한테 돈까지 빌리면서요.”

“아아아아악!”

리카가 창피함을 참지 못하고 방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성필은 그녀를 어이없단 듯이 보았다.

별다른 고민도 없이 60만 원을 썼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고, 멤버들에게 돈까지 빌려서 구독했다는 건 더 어이가 없었다.

“그럼 리카 씨는 저거 안 읽으시는 거예요?”

“네. 저거 처음 오자마자 웃으면서 펼치더니, 한두 페이지 해석하는 데 1시간이나 걸렸어요. 사전 계속 찾아보면서요. 그래서…….”

신아름이 보드게임 박스와 이코노미스트로 이루어진 탑을 향해 고갯짓했다.

“저렇게 됐죠.”

“이, 이제 브리핑은 읽고 있어!”

“잡지 맨 처음에 나오는 거? 그거 제일 짧은 파트잖아. 진짜 내가 다 아깝다.”

“에스프레소도 읽어!”

이코노미스트에서 매일 제공하는 짧은 뉴스다.

“그건 한 달에 5천 원만 내도 볼 수 있다면서?”

“…….”

“60만 원 어디?”

“아름이 나빠!”

리카가 신아름 대신 조아라에게 매달리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리카.”

“응 아라쨩……. 나 위로해줘…….”

“그냥 저거 다 버리면 안 되냐? 배달 올 때마다 걍 쓰레기통에 넣자. 안 그래도 숙소 좁은데 공간만 차지하잖아.”

“아라쨩이 제일 나빠!”

촬영팀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프로페셔널한 무대 위 아이돌의 뒤엔, 이렇게나 해맑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있다.

모두가 선망하는 아이돌이지만, 그녀들도 제 나이대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리카처럼 때로 허세에 빠지기도 하고, 본격적인 영어 공부를 결심하기도 하고, 보드게임과 같은 취미도 있고.

‘정말 아직 어린애구나.’

조정훈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 리카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녀가 무대 위에 서 있을 때와 도저히 겹치지 않았다.

과연, 왜 성필이 멤버들의 숙소를 찍자고 한 줄 알겠다.

‘콘서트의 컨셉이랑 메시지에 딱 어울리는 내용이네.’

* * *

백설하의 CD 컬렉션 소개를 마지막으로 촬영도 막을 내렸다.

너무나 찍을 게 많았던 터라, 촬영은 예상외로 저녁을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마음 같아선 계속 찍고 싶었어요.”

“그러게요.”

성필은 조정훈이 어떤 의미로 계속 찍고 싶어 했는지 충분히 이해됐다.

소녀연맹의 숙소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보고였다. 그녀들이 3년 동안 쌓아온 추억이 전부 담겨 있었으니까.

그녀들의 물건이 많고, 이야기가 많고, 그래서 찍을 것도 많았다.

“나중에 숙소 소개하는 자체 예능 시리즈 만들어도 되겠어요.”

“오, 진짜 괜찮은데요? 콘텐츠 팀에 건의해볼까요?”

“박 이사님 그럼 저한테 개런티 좀 나옵니까? 제가 제안한 건데…….”

“하하.”

“대답이 없으시네.”

성필과 조정훈의 팀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숙소 1층의 국밥집을 찾았다.

저녁이 지나 한가했던 국밥집에 활기가 찾아왔다. 사장이 아까 ‘많이 주겠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던 듯, 뚝배기에는 고기가 한가득 쌓였다.

“박 이사님.”

뚝배기를 반쯤 비우고 허기를 어느 정도 달랬을 무렵. 조정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거란 뜻이었다.

“네, 감독님.”

“이번 콘서트 VCR 있잖아요. 제 입장에선 퀄리티 있게 만드는 게 좋긴 한데요. 돈이 꽤 들지 않나요?”

소녀연맹의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들은 다시금 해외로 가서 영상을 촬영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비용이 지출된다.

‘아니’ 뮤직비디오만큼은 아니지만, 콘서트 VCR에 쓰기엔 과도할 정도의 비용이 생겨버렸다.

“제가 기획을 제출하고서도 이런 말 하는 게 우스운 건 알지만요.”

“음.”

성필은 수저를 내려놓고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약간 헤프단 싶을 정도로 가볍게 웃었다.

“그…… 저희 사장님이랑 다른 이사분들도 똑같이 말씀하셨거든요.”

“아, 역시 그렇죠?”

“콘서트 VCR에 원래 이렇게 돈을 많이 들이는 게 맞냐고요. 뭐, 그래서 저는 원론적으로 답했죠. 한 번만 쓸 것도 아니고, 10번 넘게 세계를 돌면서 계속 쓸 거다. 그러니까 공을 들이고 돈을 많이 쓰는 게 맞다. 이런 식으로요.”

“큰돈에 붙인 이유론 충분하진 않네요.”

여러 번 쓰려니까 공을 들인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VCR 영상에 들어갈 예상외의 비용을 고려하면, 성필의 이야기는 궁색하기까지 하다.

비용을 줄여서도 충분히 좋은 영상을 만들도록 노력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팬분들이 콘서트에 뭘 보러 올까…… 생각해보셨어요?”

“소녀연맹이잖아요.”

“맞아요. 우리 애들을 보러 오죠. 그런데, 우리 애들을 보러 온 콘서트인데 애들이 나오지 않는다. 그 시간은 팬들에게 굉장히 무료해요.”

“확실히 그렇네요.”

콘서트엔 멤버들이 의상을 바꾸거나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무대에서 빠져야 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 공백을 채우는 게 VCR 영상이다.

“그러니까 소녀연맹이 직접 나오지 않는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팬들이 지겹게 느끼지 않도록요.”

“그러니 돈을 아끼면 안 된다?”

“맞아요. 그리고…….”

성필은 자신의 논리가 충분치 않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목소리엔 힘이 살짝 빠져 있었다.

“콘서트는 연극으로 따지면 피날레니까요. 영화라면 시리즈 최종편이고요. 데뷔, 컴백 뮤비보다 힘을 뺀 걸 팬들에게 보여줄 순 없죠. 오히려 마무리니까 더 힘을 줘서…… 하하. 네, 결국엔 프로듀서인 제 욕심이죠.”

“닿을 겁니다.”

“네?”

“박 이사님의 마음이요.”

콘서트 VCR은 오직 콘서트에서만 볼 수 있다. 혹은 DVD나 블루레이로 따로 사서 봐야 한다.

명백히 아이튜브에 공개될 뮤직비디오보다 적은 사람들이 보게 된다.

상식적으로, 힘을 뮤비보단 더 빼도 된다.

하지만 성필의 가치 기준은 효율성에 있지 않다. 그는 소녀연맹이란 브랜드의 완성도를 원한다.

소녀연맹이 1년간 만들어 온 세계관을 화려하게, 더없이 완벽히 마무리 짓길 바라는 것이다.

“박 이사님의 마음은 반드시 콘서트장의 팬들에게 닿을 거예요. 절대 잊지 못할 만큼요.”

“……그럴까요. 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제가 진짜 기가 막히게 뽑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동업자로서 은은한 웃음을 교환했다.

* * *

“리카, 다 챙겼지?”

백설하가 묻자 리카는 한 손에 쥔 캐리어를 더듬거렸다. 마치 안쪽의 물건이 만져지기라도 하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으음, 네! 다 챙겼어요!”

“잘 다녀와.”

백설하가 리카를 꼭 안아주었다.

그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리카가 놓아주질 않았다.

“……리카?”

“계속 쌤한테 안겨 있고 싶어요! 따뜻해요!”

“계속 있으면 안 되지…….”

리카는 웃으면서 백설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선 멤버들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그럼!”

리카가 경례했다.

“먼저 가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리카는 뒤로 돌아 위풍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그 앞에선 성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리카를 향해 활짝 웃었다.

“컨디션은?”

“절호조(絶好調)예요!”

“좋아. 가자.”

“하이(네)!”

영국으……!

“스코틀랜드예요!”

그래, 스코틀랜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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