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어, 어째선가요!”
“나이 차이가 제일 안 나니까.”
“나이는 같다고 치기로 했잖아요!”
“뭐어,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질문부터 틀려먹었어. 그런 질문을 하려면 대상을 잘 정했어야지.”
“에?”
“‘결혼’이 들어간 것부터가 그래. 어디 내놓기도 불안한 게 너희들인데, 그런 미래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저를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신용카드도 없는 게 까불어.”
“한국으로 가자마자 만들 거예요!”
리카가 시선을 놀리면서 고민하다가, 아까보다 아주 조금 내려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연…….”
“역으로 물어보자.”
성필이 그녀의 질문을 막았다.
“우리끼리도 항상 신랑감에 대해 얘기하곤 하거든. 30대 남자들끼리…….”
“씁쓸하네요…….”
“솔직히 가로 엔터 남직원들 중에 제일 신랑감으로 적합한 사람은?”
리카는 성필처럼 고민 없이 답했다.
“한 이사님이죠!”
“왜?”
“이유야 수없이 많아요!”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침묵이 생겨났다.
둘은 그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5초, 혹은 1분.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짜기라도 한 듯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설하 쌤은 착하고 예쁘니까요! 이해가 돼요!”
“한 이사님 대단하고 멋지신 분이지.”
두 사람은 그로부터 약 30분을 백설하와 한구인에 대한 칭찬으로 보냈다.
그건 마치 의도치 않게 열었던 상자를 다시 싸매는 과정 같았다. 둘은 취기에 머리를 싸매면서도 어떻게든 상자를 닫으려고 했다.
30분이 지나고, 둘은 다시금 별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마치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들도 전부 농담으로 만들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 허황된 이야기로만 대화를 꾸몄다.
의미는 없지만, 친구와의 대화가 으레 그렇듯 재미있었다.
* * *
리카는 에든버러 관광을 그다지 즐길 수 없었다. 어제 마신 위스키가 목 끝까지 올라와서 집중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여, 역시 축제와 고성의 도시이이…….”
“힘들면 쉬지 꼭 관광을 나와야 해?”
“그냥 돌아가는 건 인생의 손해예, 으에에…….”
결국 도중 리카는 숙소로 돌아와야만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보람도 없이, 그녀는 귀국 비행기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소파에서 골골댔다.
성필은 누운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나 음료를 만들어주거나, 대부분은 말동무가 됨으로써 말이다.
“이거 봐라. 케이어스 컴백 트레일러 티저 떴어.”
“그 말 10번은 들었어요…….”
“아니 티저 이미지가 진짜 감성이 미쳤다니까? 그림이 막 움직여. 팝아트 같아. 특히 에리카 이거 봐. 숲속에 서 있는데, 계속 자세히 보면 치맛자락이 조금씩 흔들린다?”
“에리쨩 예쁜 건 알겠으니까 그만해주세요!”
“진짜 KS 엔터 비주얼 팀 직원 훔쳐 오고 싶다. 나도 아트 디자인 배워볼까?”
“…….”
리카가 너무나 갑작스레 말이 없어졌다.
성필은 자신이 도를 넘었나 걱정했다. 정말 리카를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심심하니까 아무 말이나 해보래서 한 거였는데…….’
성필은 살아있는 팟캐스트가 되어 열심히 관심사를 설명했는데, 이렇게 싸늘한 반응이 돌아오다니.
“리카, 삐쳤어? 알았어. 이제 케이어스 얘긴 안 할게.”
“그게 아니라…….”
리카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풍경이 아니라 과거를 보는 듯했다.
“저랑 에리쨩이랑 연습생 때 친했었거든요.”
“응, 자주 얘기했었잖아.”
리카와 에리카는 일본인이란 공통점 때문인지 빠르게 가까워졌다고 한다.
특히 에리카가 리카를 잘 챙겼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리카는 에리카를 마치 친언니처럼 따랐고.
“그런데 회사를 나오고선 연락이 뚝 끊겼어요. 제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진 톡도 안 보내고요.”
“아이돌 활동 때문에 바쁘시겠지.”
“그게…… 설하 쌤이랑은 자주 연락해서요…….”
리카가 생각하기론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매일 직접 얼굴을 맞대며 친분을 쌓았던 자신에겐 그 흔한 톡 한번 없다.
그런데 백설하에겐 친분을 과시하듯 자주 근황을 알려온다.
“제가 잘못이라도 한 걸까요…….”
“설마. 연습실에서 볼에 뽀뽀도 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더만.”
“……흐음.”
리카는 슬픔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성필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너 때문은 아니고, 뭔가 이유가 있을…….”
뚝, 하고 말이 끊겼다.
프랑스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에리카의 흡연 사실을 포착한 성필은 그녀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
‘설하랑 친하게 지내달라는 부탁…….’
그리고 에리카는 성필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었다.
‘잠깐만. 에리카 씨는 나한테도 가끔 연락이 오시는데.’
에리카는 명절이나 기념일마다 성필에게 짤막한 문자를 보낸다.
당장 올해 추석만 해도…….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캡처한 라인 프렌즈 이모티콘)]
[친구 치고는 연락이 뜸하네요 ^^….]
[← 정호환 이사님 문체 따라 해봤는데 어떤가요 ᄒᄒ…?]
[답장이 바로 없다니]
[혹시 비즈니스 토모?]
[히도이 ㅜㅜ….]
그에 성필이 명절 선물로 3만 원어치 편의점 기프티콘을 보내주었었다.
사촌 동생 용돈 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몇 번 톡을 주고받다가 다시 끊겼다. 그리고 다른 기념일이나 명절에 귀신같이 또 연락이 오겠지.
‘나한테도 이런데 리카한텐 톡 한 번이 없다고?’
게다가 백설하와는 자주 연락하고?
‘아니, 감사하긴 한데…….’
옛날의 백설하는 가로 엔터에 사로잡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전부 가로 엔터라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그룹 내의 일이 세상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성필은 백설하가 가로 엔터 외부와의 연결점, 즉 외부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길 바랐다.
상대가 케이어스의 에리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
‘그래, 감사한 거야. 에리카 씨가 내 부탁을 아주 성실하게 들어주고 계신 거잖아.’
아니, 부탁을 들어준다기보다 정말 친구가 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에리카가 너무 계산적인 인간 같잖은가.
‘그리고 나는 에리카 씨와의 거래에 비협조적으로 대응하는 거고…….’
이 모든 게 교환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한다면, 에리카가 리카에게 굳이 연락하지 않는 건…….
‘교환할 게 없어서?’
“이사님 라디오가 멈췄어요!”
“……아.”
성필은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상을 때려치웠다.
에리카가 리카와 더는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게 교환할 게 없어서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딨는가.
그냥 평범한 인간관계다.
가까이 있어서 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리 있어도 친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인간에게는 저마다 맞는 사람이란 게 있으니까.
‘리카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에리카 씨는 설하랑 잘 맞는 성격이었던 거지. 리카랑은…… 학생 때 반 친구 같은 느낌이었고.’
리카는 아직 에리카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지만, 원래 인간관계가 가까웠다가 멀어졌다가 하는 것이니.
“어디 보자, 또 무슨 얘기 해줄까? 아, 케이어스…….”
“이제 케이어스는 됐어요!”
“그럼 1세대 아이돌 선배님들 얘기해줄까? 그땐 정말 센세이셔널했지.”
“그럭저럭 괜찮네요!”
곧 떠나야 할 시간이 되자 성필은 리카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재촉하듯 문 너머로 말했다.
“리카, 30분 안에 나와야 해!”
“걱정하지 마세요!”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성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찝찝함을 느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에리카에게 먼저 연락했다.
백설하와 친구로 지내겠다.
대신 친구가 되어달라.
만약 에리카가 그걸 철저한 교환으로 인식했다면…….
[컴백 티저 사진 잘 봤어요! 너무 예쁘…….]
형식적인 말을 쓰던 중, 성필의 코로 과거를 자극하는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진짜 냄새는 아니었다.
성필의 추억이 멋대로 만들고 있을 뿐.
공기까지 낭만적인 프랑스의 밤과, 그 옆 에리카의 입에서 나오던 회색 연기가 성필의 감각을 지배했다.
‘토모다치(친구).’
주먹을 내밀던 에리카…….
성필은 핸드폰으로 자신의 이마를 팍팍 때렸다.
‘아이돌이란 건, 직접 보게 되면 환상이 없어지는 거구나.’
아니다, 그냥 담배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성필은 에리카가 정말 친구였으면 어땠을지 상상하고,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
[컴백 언제 해요?]
[티저 이미지 올라왔던데 ㅋㅋㅋㅋ]
먼 관계였으면 절대로 보내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대외비를 알려달란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성필은 에리카를 친구로 인식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IT업계에 속한 친구에게 해당 기업의 신제품 소식을 묻는 감각으로 톡을 보냈다.
3분 정도 후 답장이 왔다.
[오랜만인데 싸늘해요 ㅜㅜㅜㅜㅜ]
[알고 싶으세요?]
[그건…….]
그로부터 또 3분이 지났다.
[읽씹 실화?]
[안 궁금하세요?]
[그건…….]
성필이 픽 웃으면서 답을 적어 넣었다.
[말해줄 거예요?]
잠시 후, 답이 돌아왔다.
[ないしょ]
나이쇼(비밀).
“……그럼 그렇지.”
대외비를 아무렇지 않게 공개할 리가 없다.
성필도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히도이 ㅜㅜ’를 치려던 성필의 손가락이 멈췄다.
‘음? 그런데 어법이 틀리지 않나?’
리카에게 배우기로 비밀이란 뜻을 가진 단어는 대표적으로 두 개가 있다.
‘히미츠’와 ‘나이쇼’다.
‘히미츠가 평범하게 비밀이란 뜻이고, 나이쇼는 두 사람 사이에…… 관계 사이의 비밀이란 뜻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리카가 나오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8일 후요.]
[ないしょ인 거 아시죠?]
마치 성필의 마음을 읽은 듯한 답이 돌아왔다.
성필은 한 대 얻어맞은 듯 그것을 보고 있다가, 마치 리카와 농담 따먹기를 할 때처럼 가벼이 웃었다.
‘진짜 친구 같네.’
성필이 바로 답했다.
[성필: 정호환 이사님한테 대외비 유출로 고발하겠습니다.]
[에리카: 손나(그런)!]
“손나(그런)! 살이 0.1kg이나 쪄버렸어요오오!”
문 너머로 리카의 비명이 들려오자마자 성필이 폐의 공기를 전부 뽑을 것처럼 웃었다.
“아앗! 남의 불행을 비웃는 건 나쁜 짓이에요!”
“손나(그런)래 손나으하하하핰!”
“너무 신나게 웃으시는 거 아닌가요?! 담당 아이돌이 살이 쪘다니까요!”
* * *
“박 이사님.”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
성필의 옆자리에 앉은 조정훈이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듯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섬세하게 깍지를 낀 모습이, 누가 보면 원자폭탄 개발을 목전에 둔 오펜하이머라고 착각할 만했다.
“네, 감독님.”
“아무리 생각해도, 영국에서 저희랑 술 안 드신 거 좀 너무하세요.”
“또 그 얘기예요?”
조정훈은 성필이 회식에 참가하지 않고 리카와만 술을 먹는 것에 꽤 상심한 듯했다.
“리카가 사비(성필의 카드, 정산받으면 갚을 예정) 털어서 술 사 왔는데 안 먹기 뭐했다니까요.”
“그건 아는데요……. 사실상 저희 팀이랑 가로 엔터가 일심동체 아닙니까? 리카랑 같이 나중에라도 합류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진짜 재밌었는데.”
“독일에선 꼭 참가할게요…….”
“저희 팀이 박 이사님을 너무 그리워해서, 박성필로 삼행시를 한 시간이나 지었다니까요.”
“남의 이름으로 뭐 한 거예요?!”
조정훈은 박성필 삼행시 대회 우승작을 소개해주었다. 성필이 깜짝 놀랄 만큼 창의적이었다.
참고로 우승자는 이유이였다.
리카와 쇼핑을 나갔다가 도중에 조정훈의 팀과 합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작업을 태블릿으로 하시네요?”
조정훈은 비행기에 탔을 때부터 쉬지 않았다. 태블릿으로 쉴 새 없이 영상을 편집했다.
성필도 케이어스의 팬 영상 제작으로 영상 제작 프로그램엔 일가견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숙련도다.’
조정훈의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영상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괜히 프로가 아니었다.
“아, 이거 작업이 아니라 대강 밑그림만 그리는 거예요. 머리로는 잘 안 돼서요.”
“밑그림……? 퀄리티가 너무 높은데요?”
“뭐, 패드론 결과물을 내기 좀 힘들죠. 전용 모니터랑 기기 두고 제대로 만져야 하니까요.”
성필은 영상 편집 팁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의 작업을 계속 구경했다.
그런데 구경해도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나는 손 벌벌 떨면서 힘겹게 마우스로 작업하니까. 그것만 해도 힘들어.’
조정훈은 태블릿과 일체가 된 것 같았다. 아니, 아예 마법사였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마법이 발생한다.
“저도 애플 사볼까요.”
“네? 왜요?”
“그냥 뭐, 멋지니까?”
“보통 사람은 별로 메리트 없어요. 예술 쪽 사람이나 유용하다고 느끼지. 저도 집엔 윈도우 따로 두거든요. 음…….”
조정훈이 태블릿에 집중했다.
“유이 씨가 조언을 준 게 확실히 더 나은 느낌이 드네요.”
“아, 그러세요?”
이유이는 소녀연맹의 비주얼 파트를 맡고 있다.
그런 그녀는 VCR 영상의 비주얼을 감독하기 위해 이번 여정에 따라오게 됐고, 시작부터 큰 역할을 했다.
“처음에 딴지 거실…… 아니, 딴지가 아니지. 디렉팅 주셨을 땐 좀 심술 나기도 했거든요.”
이유이가 정해진 대본에서 확 방향을 틀어버렸으니까.
촬영 시간이 길어진 건 이유이 때문이었다.
가로 엔터와 조정훈이 기획했던 VCR 영상의 리카는 비장미가 흘러넘쳤었다.
명예혁명을 앞둔 귀족의 고뇌와 열정, 혁명을 향한 열기를 가득 담았던 것이다.
그것을 본 이유이는 결과물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었다.
‘너무 과한 거 같아서…….’
과하단 건 성필과 조정훈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돌 콘서트 VCR 영상은 조금 오글거리는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했었다.
팬을 위한 것이니 감성 과잉도 과잉이 아닌 게 된다. 오히려 볼거리를 늘리고 감정을 깊이 잡아주는 쪽이 낫다.
많은 아이돌이 그러했었다.
“근데 다시 보니까 담담한 쪽이 훨씬 낫긴 해요.”
조정훈이 편집한 영상을 쭉 재생했다.
원탁에 귀족들과 앉은 리카의 뒷모습이 롱샷에서 점점 더 가까워진다.
앵글이 다가오는 동안 병사들에게 짓밟히는 밀밭이나 행군하는 적병들, 왕의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잡힌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 처음보다 확연히 가까워진 앵글에서 리카는 벌떡 일어나 검을 집어 들고 카메라를 향해 돈다.
마침내 리카의 불타는 눈동자가 클로즈업되고, 그녀는 혁명을 위해 나아간다.
“박 이사님은 어떠세요?”
“그, 확신할 수는 없는데요. 유이 씨가 디렉팅한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제 체면 생각하지 마시고요.”
“……원래 대본보다 나은 거 같아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야 편하죠.”
조정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면서 태블릿을 껐다.
“나중에 최종본 두 개 만들고, 결국 내 거 안 뽑혔네 하면서 한숨 쉬는 건 정말 피하고 싶어요. 괜히 기대하게 되잖아요.”
성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몇 날 며칠이 걸려 쓴 스토리보드. 그것을 막상 찍고 나니, 새파랗게 어린 이유이가 별로라고 한다.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 찍었더니 더 좋은 결과물이 나와버렸다.
아마 조정훈은 상심이 크지 않을까.
“콘서트 VCR을 닥치는 대로 찾아본 게 오히려 독이 된 거 같아요.”
“네?”
“뭔가 주류에 따르고 싶은 기분 있잖아요. 뭐, 제 대본은 박 이사님이 허락해주신 거긴 하지만요.”
조정훈이 악동처럼 웃었다.
“역시, 저희처럼 머리 굳은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이 낫죠?”
성필은 뒷자리에서 안대를 쓰고 잠들어 있는 이유이를 보았다.
술을 거하게 마신 밤에도 하루 루틴이라면서 의상 스케치를 하는 인간이다.
결국엔 정해진 분량의 스케치를 하느라 새벽에 잤던 모양인 듯, 꿈나라에서 헤어 나올 생각이 없었다.
“머리가 굳다뇨.”
성필은 이유이에 대한 신뢰와 뿌듯함을 숨겼다. 그리고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사회인이 30대 초반이면 엄청 젊은 거죠. 벌써부터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박 이사님 중반이신데?”
“…….”
“저는 후반이고요. 거 내가 살아보니 나이는 속이는 게 아니덥니다. 슬슬 받아들이세요.”
“이미 받아들였어요.”
33살 박성필.
‘벌써 30대 중반이구나.’
나름 꽃다운 나이라면 꽃다운 나이건만.
성필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나는 꽃처럼 살고 있나?’
대답은.
‘당연.’
성필은 화사하게 피어났다.
여태 살아온 어느 순간보다 생기 있다.
소녀연맹이 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더더욱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 소녀연맹과 함께 갈 길이 멀다.
* * *
독일에 도착했다.
조정훈의 팀은 숙소를 잡고 촬영지를 둘러볼 겸 먼저 목적지로 향했다.
성필은 공항에 남아 조아라가 오길 기다렸다.
‘이번엔 절대 안 놓친다.’
미국에서의 쓰라린 실패를 아직도 기억하는 성필이었다.
미아가 된 조아라는 뒤늦게 날아온 성필을 울면서 껴안았었다.
평소에 차가운 태도가 시그니처였던 아이가 그럴 정도였으니,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한 이사님이 함께이긴 하지만.’
독일은 한구인의 홈그라운드다.
그는 장하양과 미국에 다녀온 후 바로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그에겐 미안함밖에 없었다.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이긴 해도, 계속해서 나라를 바꾸어 다니는 건 어지간한 중노동보다 힘드니까.
‘이제 들어온다.’
성필은 입국을 기다리는 이들의 행렬에 끼어서 조아라와 한구인이 보이길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긴 듯, 승객들이 내리는 게 느렸다.
성필의 집중력도 점점 떨어져 갔다. 그는 잠시 시간을 때울 겸 핸드폰을 들었다.
‘에리카 씨가 컴백이 8일 뒤라고 했었고 오늘이…….’
딱 6일이 남은 시점이다.
케이어스 앨범의 사전 예약은 컴백 일주일을 남긴 어제부터 시작됐었다.
참고로 성필은 정규 앨범이란 소식에 눈을 반짝이면서 네 장을 구매한 참이었다.
‘사전 판매량 기사로 내줬을까? 많이 팔렸으면 KS 엔터가 정보 뿌려줄 만도 하…….’
성필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아저씨!”
충격과 동시에 조아라의 부름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조아라가 활기차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 뒤 저 멀리선 한구인이 ‘뛰면 위험합니다!’라며 아버지 같은 걱정을 내비쳤다.
당연히 조아라는 어린애가 아니라 한구인의 말은 듣지 않았다.
어린애라서 듣지 않았을 수도 있고.
“나 지금 파이팅 넘쳐요.”
“어?”
조아라가 대결에 나서는 무투가처럼 자신의 손바닥과 주먹을 맞부딪쳤다.
“영상 기막히게 찍어서 팬들 놀라게 해줄 거예요. 진짜 완벽하게요.”
케이어스도 올 테니까, 적당한 결과물은 있을 수 없다.
성필은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콘서트에 초대하기로 한 계획을 들었었다. 조아라가 투쟁심을 불태우는 건 케이어스 때문일 것이다.
“빨리 안내해요.”
조아라가 상쾌하기 그지없는 멋진 미소를 보였다. 안타깝게도, 성필은 그녀의 표정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자신의 핸드폰 액정으로 향했다.
[케이어스 정규 1집, 사전 예약 첫날부터 10만 장 이상…….]
‘……어떻게.’
5만 원 이상의 앨범이 사전 예약 첫날부터 10만 이상 팔리지?
‘전생보다 성장세가 훨씬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