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47화 (347/760)

347화

장하양의 VCR 영상 촬영은 프랑스 파리의 길거리에서 이뤄진다.

“파리는 도시 모든 곳이 영화 세트장이라고 불립니다. 영화의 배경이 파리가 아니라도, 파리를 배경으로 찍는 영화가 많죠.”

한구인의 설명대로, 파리는 환상적인 도시였다. 평범한 거리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조정훈의 촬영팀은 세트장이 아닌 평범한 거리를 배경으로 촬영을 하려니 진땀을 뻘뻘 빼는 중이다.

어디에 어떻게 장비를 두고, 어느 쪽을 비워야 행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지 시 관계자와 의논하면서 고생 중이다.

“왠지 모르게 행인분들한테 미안하네요.”

거리 촬영을 본 성필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멀쩡히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 촬영팀이 잔뜩 몰려와 공간을 점유하는 건, 영상 업계 쪽 사람이 아닌 성필로선 미안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시에 허락받았지 않습니까?”

“뭐, 조 감독님이 어련히 잘하셨겠지만요.”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한구인은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프랑스는 자국을 배경으로 한 영상 촬영에 혜택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을 기점으로 더 쉽게 장소를 빌리고, 일정 규모 이상의 촬영이 이뤄지면 촬영비를 환급해주기도 합니다.”

“왜요?”

“프랑스라는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함입니다.”

한국에서도 사람들은 파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낭만을 떠올린다.

그건 파리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로맨틱한 사랑과 가슴 뛰고 드라마틱한 도시의 삶. 미디어가 그런 파리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끼치고 있다.

“유적지도 촬영지로 쓸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다고 하더군요.”

“대단하네요.”

이른바 국가 단위의 광고이다. 그리고 그 광고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파리를 꿈의 도시, 프랑스를 낭만의 나라로 선망하고 있으니.

“그런 정책을 국가적으로 펴는 만큼, 프랑스 시민들도 이런 일에 관대합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불편하다기보다 자부심이 있겠어요.”

그런데, 한구인이 프랑스를 꽤 좋게 묘사하는 것 같다. 성필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한구인은 성필의 의중을 파악하여 답해주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장점을 보려는 노력이, 세상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필요하죠. 이해했어요.”

“도시는 인류가 만든 가장 거대하고 멋진 발명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역사야 어찌 됐든, 이렇게 보고 있으면 경외감이 들 수밖에 없군요.”

하나의 씬 촬영이 끝났다.

장하양은 조정훈과 작업물을 확인한 후, 성필과 한구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하양아 고생했어. 안 그래도 시차 때문에 힘들 텐데, 잘 버텨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비행기에서 잘 자서 괜찮아요.”

장하양은 싱긋 웃곤 준비된 간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휴식이라지만 온전히 쉬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근처 플라스틱 테이블에 두었던 종이를 가져와 읽었다.

콘서트 세트리스트와 대본이었다.

성필은 그것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첫 촬영지에서도 그렇고, 콘서트 관련해서만 계속 보네.’

현대 배경을 묘사할 지하 주차장에서의 촬영.

그곳에서 장하양은 쉴 때마다 종이를 들고 찬찬히 읽었었다.

영상 대본이라고 생각했었다.

장하양은 한국에서도 영상 대본을 외우고 연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었다.

그런데 촬영장에서마저 대본을 놓지 않으니, 성필은 그녀의 노력에 뿌듯했었다.

‘정작 확인하니 콘서트 종류였지만.’

성필은 조정훈 쪽을 보았다.

팀원과 대화하면서, 그의 시선이 장하양을 흘끗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아까보다 더 활기차져선 팀원과 회의를 이어갔다.

‘조 감독님은 하양이가 영상 대본을 계속 공부하는 줄 아시는구나.’

그야 기쁘겠지.

배우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촬영장에 도착해서까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고작 몇 분의 촬영에 엄청난 프로 의식을 보여준다면서, 조정훈은 감독으로서 만족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곧 촬영 시작하네.’

성필은 장하양에게 대본 내용을 리마인딩시키기 위해 질문을 준비했다.

촬영에 임하기 전에 대본을 간단하게나마 상기하는 건 연기에도 도움이 되니까.

“하양아. 다음 씬이 뭐였더라?”

“으음, 제가 꽃을 들고 군인분들한테 천천히 걸어가는 거예요. 거기서 웃으면서 꽃을 내밀고…….”

그쯤에서 장하양은 성필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녀가 안심시키려는 미소를 띠었다.

“VCR 영상 대본은 다 외웠어요.”

“뭐라는 건 아니었어. 콘서트 대본 엄청 열심히 외우네. 이미 다 외운 거 아니었어?”

“완성본이 아니니까요. 나중에 바뀐 걸 쉽게 습득하려면 원본을 머릿속에 체계화해야 해요. 그리고…… 몇 번을 외워도 부족하죠.”

콘서트에선 사소한 실수도 보이지 않겠다. 그런 의지가 느껴졌다.

성필은 그녀의 말투에서 강박감마저 느꼈다.

‘하양이가 옛날부터 노력을 많이 하긴 했지만.’

공항에 내려서 봤던 모습도 그렇고, 오늘의 장하양은 뭔가 달랐다.

성필이 이유를 물어봤으나 그럴듯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대답은 필요 없나.’

아마 케이어스에게 자극받은 게 아닐까.

“시작하겠습니다!”

조정훈의 외침에 배우들이 움직였다.

장하양도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금 이유이에게 체크를 부탁했다.

“하양아, 그거 대본 나 줘.”

“네.”

장하양은 성필에게 대본을 맡기고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박 이사님.”

한구인이 화사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네, 한 이사님.”

“혹시…… 차를 사려고 거액의 대출을 받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충동구매예요 그거. 절대 하지 마세요.”

“……예.”

한구인은 촬영장에서 소품으로 빌렸던 슈퍼카에 아주 정신을 전부 빼앗긴 모양이다.

지금도 그의 눈동자는 어딘가 공허한 면이 있었다. 저 공허 속에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 슈퍼카가 자리하고 있겠지.

그때 배우와 촬영팀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티 테이블 위로 진동이 퍼졌다. 얇은 플라스틱 재질이었던 터라 소리가 크게도 울렸다.

성필이 황급히 그것을 손으로 잡았다.

‘하양이 핸드폰이네. 얘는 진짜…… 맡길 거면 나한테 맡기지 테이블에 두면 어떡해.’

대본은 잘 맡기면서 핸드폰은 이렇게 아무 곳에나 두다니.

‘……핸드폰보다 대본이 소중하단 건가?’

그건 장하양을 프로듀싱하는 입장에서 기쁜 마음가짐이지만, 아무튼 부주의하다.

연예인 중에서도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가 내부 파일이 유출되고 곤혹을 당한 사람들이 있다.

장하양의 폰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훔쳐 가기라도 하면 큰일일 것이다.

‘어디 보자, 누군한테 왔…….’

[화내지말고심호흡부터해]

“…….”

1분이 조금 지나고 진동이 멎었다.

성필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누구기에 장하양은 상대의 이름을 ‘화내지말고심호흡부터해’로 설정한 걸까?

당장 떠오르는 인물은 장하양의 부모였다.

‘그런데, 전화가 올 리 없지. 하양이는 번호까지 바꿨으니까.’

부모가 장하양과 접촉할 방법은 직접 가로 엔터로 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법원의 접근 금지 명령 때문에 쓸 수가 없다.

성필은 장하양의 부모를 제외하곤, 그녀가 이런 이름을 지정할 사람을 떠올리는 게 불가능했다.

그때 또 장하양의 전화가 울려 성필의 손을 떨리게 했다.

[화내지말고심호흡부터해]

성필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장하양의 사생활을 존중하자는 뜻에서였다.

‘하양이 관련 업무 연락은 우리 회사 매니지먼트 팀이랑 나한테 다 오도록 했으니까.’

이건 사적인 전화니, 함부로 받아선 안 된다.

그렇게 두 번째 전화도 지나갔다.

성필은 핸드폰을 꼭 쥐고 촬영 현장에 집중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또 진동이 울렸다.

‘이건 진짜 급한 일이다.’

이토록 짧은 간격으로 여러 번 전화할 정도라면 매우 시급한 용무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장하양 본인은 아니지만, 성필의 그녀의 매니저 자격으로 용무라도 들어두기로 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하양이 대신 전화받은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입니다.”

[아, 박성필 이사님.]

아는 목소리다.

“소유 씨?”

[네, 저예요. 하양이 지금 없나요? 화장실에 갔나요?]

“지금 하양이 일하는 중이에요.”

[일이요.]

“왜 연락하셨어요? 연달아 계속하시던데.”

그저 안부 연락이라면 한 번으로 그쳤을 것이다. 반드시 시급한 일이 있을…….

[제가 톡을 보냈는데도 답장이 없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하양이 비행기에서 내린 지 몇 시간밖에 안 됐거든요.”

[어쩐지. 다행이네요.]

“네?”

[톡이랑 문자를 합쳐서 300번 넘게 보냈는데도 답이 없어서, 저 차단한 줄 알았어요. 전화는 하양이가 안 좋아할까 봐 참다 참다 한 거였는데.]

톡이랑 문자를 300번 넘게 보내는 걸 훨씬 안 좋아할 텐데.

[제 팬이셔서 아시겠지만…….]

진소유는 ‘케이어스 팬’이 아니라 ‘제 팬’이라는 말을 썼다.

팬이 되라고 강요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진저 씨가 나한테 준 선물 중에 멤버별 편지도 있었지.’

그 편지에서도 진소유는 자신의 팬이 됐으면 좋겠다고 적었었다.

역시, 그룹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케이어스 팬’이란 말보단 ‘소유 팬’이란 말을 듣는 게 더 좋은 걸까.

[저희가 정규 앨범으로 컴백하거든요.]

“축하드려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양이한테 앨범을 보내주려고 하거든요. 숙소 주소 좀 알려주실래요?]

“숙소 주소요?”

[네, 숙소 주소요. 택배 기사가 안 헷갈리도록 신주소로 보내주세요.]

“……제가요?”

[네.]

왜 장하양이 진소유에게 답이 없었는지 알겠다. 숙소 주소를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 계속 알려달라고 한 것이다.

더 소름이 돋는 점은, 진소유 또한 장하양이 숙소 주소를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단 것을 안단 사실이었다.

‘소유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셨어.’

장하양 대신 더 쉬운 타깃인 성필을 노리겠단 것이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성필도 진소유의 물음에 담긴 짙은 어둠을 느끼지 못할 뻔했다.

“소유 씨, 선물은 회사로만 받거든요. 회사 주소로 하양이한테 보내주시면 저희가 잘 전달할게요.”

[아이돌한테 보내는 선물은 회사 직원이 전부 까서 확인하잖아요. 저는 그런 건 바라지 않아요.]

“소유 씨 선물은 하양이한테 그대로 전달할게요.”

아이돌 업계에서 선물 사전 확인은 필수다.

과거 화학적 테러 물질이나 날카로운 날붙이까지 아이돌에게 보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팬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회사 직원들도 가슴이 아프지만, 극히 적은 확률이라고 대비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저랑 하양이는 친구잖아요.]

진소유가 설득의 논조를 바꾸었다.

‘……하양이가 소유 씨 싫어한다는 게 진짜인가 보네.’

정말 진소유와 장하양이 친구라면, 적어도 조금은 친밀한 사이였다면 숙소 주소 정도는 쉽게 얻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장하양과 어떻게든 가까워지려는 진소유가 이상해 보인다.

[선물 보내고, 놀러 가고, 파자마 파티도 하고, 옥상에서 고기 구워 먹고, 와인도 나누려면 숙소…….]

“박 이사님.”

씬 촬영이 끝났는지 장하양이 성필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성필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핸드폰을 넘겼다.

“언니, 저예요.”

약 10초 후.

“숙소 주소 안 가르쳐드려요. 꼭 직접 주고 싶으시면 제가 KS 엔터로 찾아갈게요. 네? 아뇨, 저희는 안 그래요. 숙소에 친구 초대할 수 있는 건 KS 엔터 쪽 규칙이고요, 가로 엔터는 안 그렇다니까요. 네? 제가 케이어스 숙소에요? 아니, 그냥 KS 엔터 사옥으로 가서 받을게요. 네, 네, 죄송합니다. 모처럼 마음 써주셨는데…… 아뇨 그렇더라도 주소 안 가르쳐드려요. 알겠습니다.”

장하양은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처럼 피곤한 티를 냈다.

“네, 그럼…… 네?”

장하양이 놀란 눈으로 핸드폰을 성필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성필 또한 살짝 당황해서 전화를 받았다.

“소유 씨?”

[박성필 이사님, 제 팬 되셨어요?]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놀랍게도, 성필에게 주었던 편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저야 언제든 소유 씨 팬이죠.”

[그 애매한 발언, 언젠가는 고쳐야 할 거예요. 지금은 거기서 만족하지만요.]

진소유는 쾌활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성필이 개운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장하양에게 돌려주.

“……‘저야 언제든 소유 씨 팬이죠’?”

장하양이 미간에 잔뜩 반항기를 넣어 찌푸렸다.

“아…… 예의야. 예의상 한 말.”

“뉘에 뉘에 알겠슘미다. 그르시게쬬오.”

장하양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처럼 다시 불량해졌다.

* * *

건물 안이 아니고서야, 밤과 낮은 영상 제작자의 적이다. 정확하게는 시간의 변화가 조정훈의 적이었다.

“하아…….”

조정훈은 근심을 토했다.

장하양이 촬영에 잘 따라와 줬음에도 불구하고 제시간에 끝내지 못했다.

원하는 장면은 전부 따냈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같은 씬을 찍고 찍고 또 찍다 보니, 조정훈 자신도 뭐가 좋은지 모를 상황이 왔다.

‘참, 가로 엔터한테 미안하네.’

콘서트를 위해 일분일초를 귀중하게 써도 모자랄 판에, VCR 영상 때문에 장하양의 시간을 더 빼앗게 됐다.

조정훈은 창밖에 드리운 밤을 야속하게 흘겼다.

“왜 혼자 궁상맞게 술 드시고 계세요.”

성필이 조정훈의 소파 옆자리를 차지했다.

조정훈은 한 손에 느슨하게 들고 있던 맥주병을 꼭 쥐었다.

“촬영 제시간에 못 끝낸 게 죄송해서요.”

“열정적으로 해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조정훈은 성필의 위로를 듣고서도 죄책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영상 촬영이란 게 어떤 것인가. 시간을 들일수록 비용이 올라가는 작업이다.

그 때문에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도, 시간을 다 쓰면 끝내야만 한다.

‘그냥 지금이라도 끝내자고 할까? 아니, 하양이 잡아뒀는데 이제 와서 끝내자고 하면 내가 뭐가 돼…….’

조정훈은 맥주를 벌컥였다.

“하양이도 괜찮다고 했어요. 너무 신경 쓰…….”

위층 천장을 뚫고 장하양의 노랫소리가 전해졌다. 방해될 만큼 크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크기였다.

조정훈이 웃었다.

“하양이가 참 대단해요. 종일 촬영해놓고도 연습할 기력이 있네.”

저러니 더 미안해진다.

미안해지고, 또 아쉬움이 있다.

조정훈은 오늘 촬영을 마무리할 즈음 장하양에게 내용물 검토를 요청했다.

‘주인공이 보기엔 어때? 뭐 더 추가하고 싶다거나,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잡았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거 있을까?’

‘잘된 거 같아요. 이대로 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장하양은 그리 답했었다.

너무도 쉽게 말이다.

‘한 번에 배우가 만족할 작업물이 찍혔단 게 기쁘긴 한데…….’

조정훈은 살짝 섭섭했었다.

그는 전권을 행사하는 감독이 아니다. 장하양의 매력을 살리는 일을 맡은 스태프에 불과하다.

그리고 가로 엔터의 방침에 따라, 그 매력이란 장하양 본인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

‘표현하자면, 나는 내용물을 맡은 작가고 하양이는 문체를 맡은 작가지.’

감독과 배우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한다. 작가로 치면 공동집필이다.

그러니, 감독은 배우 또한 작업물에 욕심을 보여주길 바란다.

쉽게 쉽게 ‘좋네요’라고 말하기보다는…….

어쩌면 조정훈이 작업물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장하양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돌 진짜 아무나 하는 거 아닌가 봐요.”

“다들 열심히 노력하지만, 하양이가 특히 노력파거든요.”

“대단해요 정말. 음, 박 이사님은 오늘 영상 보고 어떠셨어요? 어디 부족한 부분이 있거나 했어요? 고쳐야 할 점이라든가.”

성필은 딱히 돌려줄 답이 없었다.

조정훈은 본인이 그어둔 만족의 선에 닿지 못해 고민하는 것이었으니까.

영상 촬영이나 편집에 문외한(아이돌 팬 영상 제외)인 성필이, 이 분야의 전문가인 조정훈에게 줄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제가 볼 때는 전반적으로 괜찮았던 거 같았어요. 작업물도 대본대로 나왔고, 배우분들 연기도 준수했고요.”

“그렇죠…….”

“저희 회사가 컨펌한 그대로였던 거 같아요. 그래도 감독님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면, 아직 더 높이 갈 수 있단 거겠죠. 저는 모르겠지만요.”

더 높이 갈 수 있다.

조정훈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더 높이 갈 수 있고, 가야 한다.

‘소녀연맹을 위한 일이야.’

조정훈이 본격적으로 이 업계에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가 바로 소녀연맹이다. 그녀들과 가로 엔터엔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어떻게든 최고의 결과물을 뽑고 싶다.

‘남들이 모르는 디테일한 부분, 나만 아는 부분이라도, 내가 만족할 수준까지 올리고 싶어.’

그 만족의 수준을 모른단 게 문제지만.

조정훈은 맥주를 마시려다가 그냥 공기만 마셨다. 그는 힘없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는 스토리보드 한 번 더 정리해야겠어요.”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조정훈이 비척거리면서 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교대하듯 장하양이 나타났다. 그녀는 3층에서 2층으로 중앙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1층으로 가려던 그녀는 성필을 발견하자마자 다가왔다.

“이사님 뭐 하세요? 아, 제가 맞춰볼게요. 케이어스 SNS 염탐?”

“하양이 비꼬는 실력이 많이 늘었네.”

“아하하.”

해맑게 웃던 그녀는 갑자기 심술을 잔뜩 담아서 말했다.

“소유 언니랑도 일본에서 친해지셨어요? 진저 씨처럼요?”

“친해지긴. 밥만 한 번 먹었는데.”

“저도 가로 엔터의 소유가 되는 거예요?”

“가로 엔터의 소유는 뭐야?”

장하양은 ‘가로 엔터의 진저’ 이야기를 해주었다. 성필은 어이가 없어서 픽픽 웃음을 내뱉었다.

“너희들 나 놀리는 기술이 점점 발전하네. 나 없어지면 심심해서 어떡하냐. 오늘 공항에 도착해서 심술궂었던 건 케이어스 때문이야?”

장하양은 케이어스 얘기가 나오면 말투나 분위기가 이상해지곤 했었다.

“네.”

“예판량 봤구나.”

하긴, 못 볼 수가 없지.

성필은 장하양의 기색이 어떤지 살피려 시선을 올렸다. 그녀는 성필의 앞에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

“…….”

“하양아?”

“고민하고 있어요.”

“뭘?”

“‘최애 그룹 케이어스가 역대급 성적 달성해서 좋으시겠습니다 네네’라고 말할지, 아니면 ‘이사님 저는 이제 어떡하면 좋죠? 저 너무 불안해요…… 온기랑 따스한 위로가 필요해요……’라고 할지요.”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가 낫네.”

“왜요?”

“네가 불안한 건 보기 싫어.”

장하양은 짙게 웃으면서 그의 옆에 앉았다.

“불안해?”

“아니요. 옛날이었으면 ‘어쩌지? 이런 식이면 우린 다음에 얼마나 팔아야 하지?’라면서 전전긍긍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지금은 그럭저럭?”

“그럭저럭은 뭐야.”

장하양이 손에 꼭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보였다. 성필이 살펴보니, 콘서트 대본과 장하양이 맡은 곡의 악보들이었다.

“제가 옛날에 봤던 책에서 ‘걱정은 소비이고 노력은 생산이다’라고 하더라고요. 똑같은 미래를 두고도, 인간은 소비와 생산 중에 고를 수 있어요.”

“넌 생산을 고른 거야?”

“네, 완벽해질 거예요. 이사님.”

장하양이 결연하게 성필을 불렀다.

원래는 성필이 그녀를 위로하거나 격려할 생각이었는데, 이젠 장하양이 성필을 격려하는 듯했다.

“제가 비행기 타기 전에 케이어스 예판량을 봤어요. 거의 200,000장 찍겠더라구요.”

소녀연맹의 정규 앨범은 한 달 사전 예약 기간을 두어 12만 장이었다.

그런데 케이어스는 일주일 중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도 20만 장을 찍게 생겼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계속 생각했어요.”

장하양은 ‘대체 어떻게 저런 그룹을 이기지?’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방법을 고민해도 앨범 판매량으론 승산이 없을 듯했다.

그래서 괜히 세상에게 시니컬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답이 나왔어요. 저희는…….”

1등이 될 수 없다.

그 답에 성필이 화들짝 놀랐다.

“포, 포기한 거야? 하양이 배신자! 내 꿈을 네 꿈으로 삼기로 했잖아! 같이 최고의 아이돌을 목표로 하기로 했……!”

장하양이 성필의 입술 앞 3cm에서 검지를 멈추었다.

조용하고 들으라는 표시였다.

성필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빼서 그녀의 검지와 멀어졌다.

“1등이 될 수 없으면요, 1등을 꺾어야 해요.”

“……응?”

“세상이 우릴 1등으로 만들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1등과 싸워서 이길 거예요.”

장하양의 말은 이러했다.

시상대 위에서 트로피를 흔드는 1위를 그라운드로 끌고 내려와 흠씬 두들겨 패겠단 것이다.

이른바, 다른 영역에서 싸우겠단 선언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대형 기획사 상대로 앨범을 더 팔거나 음원 차트, 음방에서 더 많이 높은 순위로 오르는 건 힘들어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요.”

장하양은 비즈니스 컨설턴트라 된 듯이 양손으로 깍지를 끼곤 그것으로 턱을 괴었다.

왠지 모르게 신뢰감이 솟는 자세였다.

“다른 우위에서 겨뤄야 해요.”

“어떤 거?”

“실력이요. 소녀연맹이 퍼포먼스만큼은 진국이더라. 퍼포먼스는 아이돌 중 최고더라. 이런 평판만큼은 상업성과 별개로 저희가 달성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장하양이 씩 웃었다.

“물론 지금은…… 부족할 수 있죠. 저만 해도 소유 언니보다…… 네. 그러니까…….”

장하양이 다시 대본과 악보를 들어 보였다.

“연습하는 거예요. 콘서트에서 저희의 저력을 보여주려구요.”

“필드를 바꾼 거네.”

“네. 제가 고른 첫 번째 필드는 콘서트예요. 콘서트가 저희가 거둘 승리의 첫 페이지구요. 할 수 있을까요?”

장하양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말을 꽤 잘한 듯했다. 부족한 자신을 바꾸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읽어왔던 게 도움이 됐던 것일까.

성필이 칭찬해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담아 성필을 보았다.

“하양아, 오늘 촬영 어땠어?”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돌아왔다.

“촬영이요? 어, 음, 대본대로 잘한…… 그런대로 만족할 수준인 거 같아요.”

장하양이 불안하게 성필을 흘끔거렸다.

“잘…… 못했나요?”

“잘못했다고 생각한 부분은 있었어?”

“…….”

“그럼 잘했다고 생각한 부분은?”

“…….”

“아, 내가 이 장면은 정말 잘 연기한 거 같다. 그런 씬이 있었어?”

장하양이 손에 쥔 대본이 점점 구겨졌다.

성필의 질문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오늘 촬영하면서도 계속 콘서트 대본만 봤었지.”

“죄, 죄송합…….”

“나쁘단 게 아니야.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옛날에 ‘아니’ 뮤비 찍었을 때 떠올라서 그래.”

그때의 장하양은 대본 가득 본인의 해석과 주석을 붙여두었었다. 그리고 촬영 중에도 틈틈이 그것을 보면서 외웠었다.

퍼포먼스를 빈틈없이 확인하는 건 당연했다.

“하양이 네가 촬영이 몸에 익어서, 옛날보다 능숙해진 거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기계적으로 촬영에 들어갔던 거구나.”

그 마음은 이해가 간다.

장하양에겐 현재 콘서트 퍼포먼스가 무엇보다 중요한 지상과제이다. 그래서 짧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퍼포먼스를 머릿속에서 복기한다.

당연히 영상 촬영을 위해 할당된 메모리가 적을 수밖에 없다.

물론 콘서트 퍼포먼스에 열중하는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렇지만…….

“하양아.”

성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네가 퍼포먼스에 계속 매달리는 이유는 알겠어. 1등을 꺾기 위해서지? 대견해. 그런 마음가짐 아주 좋아.”

“아하하, 네, 네에…….”

“그런데 이런 생각 해봤는지 모르겠는데. 콘서트 VCR 영상은 너 대신 무대에 오르는 거야.”

“……저 대신 무대에요?”

“응. 비유하자면, 과거의 네가 현재의 너 대신 무대에 오르는 거지. 현재의 네가 다음 무대를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려고.”

그제야 장하양은 깨달음을 얻었는지 눈이 달처럼 커졌다.

“관객들은 네가 들어가면 아쉬워할 거야. 그 아쉬운 시간을 과거의 네가 달래주는 거고. 그러니까 VCR 영상 촬영은, 콘서트 무대에 오를 연습보다 절대 덜 중요하지 않아.”

그렇다. 성필의 말이 맞다.

장하양은 콘서트의 ‘무대’에만 집중한 나머지, 영상의 측면을 간과해버렸다. 실시간 퍼포먼스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버렸다.

얼마나 바보 같은…….

“하양아.”

장하양이 자기 비하로 빠지려던 때, 성필이 갑작스럽게 가까이 다가왔다.

장하양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빠지려.

‘아니, 내가 왜 빠져?’

안 빠졌다.

그래서 둘은 가까이서 서로를 보게 됐다.

“…….”

장난이 예상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자, 성필이 시무룩해져서 뒤로 빠졌다

“1등이 될 수 없긴 왜 없어. 하양이 정신상태가 불량하네.”

“불량? 이사님은 200,000장이란 숫자를 보고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네?”

“진짜 사춘기인가…….”

한구인의 진단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양아, 나랑 약속 하나 하자.”

“약속하면 뭐 해주실 거예요?”

“너희들 점점 나를 무슨 보상 자판기로 생각하는 거 같은데…….”

정보: 맞다.

“설하는 일본 돔 투어로 100만 관객 동원하기로 약속했거든? 못 이루면 현재 조건 그대로 7년 재계약이고.”

“지옥이 왜 안 보이나 했더니 가로 엔터가 지옥이었네요.”

“하양이 너는…… 골든 레코드 인증받기로 하자.”

“……골든 레코드가 뭔데요?”

성필이 손바닥을 쫙 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별처럼 뻗었다.

“500,000장 판매된 앨범에 붙는 인증.”

성필이 씨익 웃었다.

“상대의 필드에서 싸워 이겨야 진짜 승리거든.”

* * *

조정훈은 숙소 방 책상 앞에서 골머리를 썩였다. 그는 스토리보드와 대본을 점검하며, 무엇이 영상의 완성도를 잡아먹는지 점검했다.

너무 집중한 까닭에, 들어올 때 방문을 닫지 못한 것도 몰랐다.

“곤란한 일이 있…….”

“아 씨팔 깜짝야!”

조정훈이 뒤를 보니 아연실색하는 장하양이 보였다.

“어, 어? 하양이야? 뭐, 뭐야. 어떻게 열었어?”

“……열려 있었어요.”

“아…… 내가 깜빡했나 보네. 어, 왜?”

장하양은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어 조정훈을 바라보았다.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보죠?”

“뭔데.”

“사람들은 우리를 이렇게 부르죠. The Solver(해결사)라고요.”

“진짜 뭔데.”

“저희가 도와드리죠. 준비됐어 장?” “물론이지 하양.”

“뭐냐고 진짜로…….”

“아하하.”

장하양은 어색하게 손바닥을 비비면서 웃었다. 그리고 겸연쩍은 기색으로 겨우 입을 뗐다.

“오늘 영상 찍는 거 있잖아요? 제가 좀…… 다시 결과물을 확인하고 싶어서요. 내일까지 다 확인하고 고칠 점이라든가 보고 싶네요. 괜찮을까요?”

“…….”

조정훈은 감동한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가, 곧 짐짓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The Solver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아하하.”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신뢰를 보냈다.

“최고로 만들자, 더 솔버.”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 디렉터 조.”

“익스큐티브 오피서 박도 있다구!”

“그럼 일단 씬 한 번씩 쭉 볼까?”

“네. 씬마다 후보로 몇 개씩 올리셨어요? 그거 전부 확인하면 시간 너무 오래 걸릴까요?”

“무시당했네.”

슬슬 리카의 마음이 이해되는 성필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