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62화 (362/760)

362화

“흐아…….”

진소유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그러자 들떠서 이리저리 떠들던 진저가 조용해졌다.

“언니 피곤하심미까?”

“어.”

“…….”

원래 오늘은 쉬는 날이다.

바쁘디바쁜 케이어스의 앨범 활동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

진소유는 콘서트 시작 시간에 딱 맞춰서 올 생각이었으나, 진저는 아니었다.

‘빨리 가서 굿즈 사야 함미다!’

그러면서 케이어스 멤버들에게 빨리 콘서트장에 가야 한다며 피력했었다.

입장 시각은 6시지만, 콘서트장에서만 판매하는 굿즈들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살 수 있다.

안 그래도 아침 일찍 나오는 건 힘든 일인데, 케이어스란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변장까지 하려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진저는 전혀 귀찮아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데이트라도 나가는 듯 산뜻한 설렘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외출 준비 내내 조아라의 솔로곡인 ‘댄스 위드 미’를 흥얼거렸었다.

“흐아암.”

진소유가 다시 하품하자 진저의 어깨가 아래로 축 떨어졌다.

“죄송함미다 언니…….”

20살인 자신이 이러는 건 부끄럽지만, 진저는 홀로 어딘가에 가는 게 무서웠다.

한국은 그녀에게 외국이기도 한 데다가, 회사에서 교육받을 적엔 웬만해선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란 말을 듣기도 했었다.

그런 세월이 쌓여, 진저는 혼자 외출하는 것도 겁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함께 와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이 바로 진소유였다.

“응, 죄송해야지. 피로는 피부의 적인데. 네가 내 아이돌 생활 며칠은 단축시켰어.”

진저가 울상이 되자, 진소유는 그제야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자립심을 길러. 알겠지? 언제까지 언니들 손 붙잡고 다니려고?”

진소유의 입장에선 위로였지만, 진저가 듣기엔 비꼬는 것이었다.

진저는 진소유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두려움에 떨면서 받아들였다.

“어, 언니.”

진저가 화제를 바꾸려 했다.

“티켓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임미다.”

케이어스 멤버들은 첫째 날 티켓팅에 실패하고 1팀장을 KS 엔터 사옥 입구에 매달 기세였었다.

하지만 다행히 1팀장은 목숨을 구했다.

가로 엔터가 익일 공연을 잡은 것이었다.

1팀장과 매니저팀은 혼신을 다하여 케이어스 멤버들의 자리를 따주었었다.

“재밌을 검미다.”

“그렇겠지.”

진소유는 장하양의 얼굴만 몇 시간 들여다봐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장하양이 나오는 공연을 본다? 재미없을 리가 없다.

물론 장하양이 나오지 않는 무대는 조금 지루하겠지만…… 맛있는 것을 아껴 먹는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 많기도 하네.”

진소유는 새삼스럽게 굿즈를 사기 위해 늘어선 인민이들의 행렬을 보았다.

그 중앙에 섞인 진소유는, 행복한 표정으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인민이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근데 그거 진짜야? 공연에서 하양이가 날았다는 거? 어떻게 날아?”

“몰라요.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요?”

“음, 하양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긴 하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진소유가 귀를 쫑긋 세웠다.

장하양이 난다고?

비유적인 표현일까?

“너는 자석 포토북 안 사게?”

“어. 포토북만 3만 원 넘잖아. 자석 포토 카드값까지 다 합하면 너무 비싸…….”

“모처럼 앞에 줄 섰잖아.”

“그치. 어제 굿즈 엄청 빠르게 다 나갔다던데. 내 차례 때 남아 있으면 살까?”

“사. 안 사면 후회해. 이거 지금 사서 몇 년 뒤에 리셀하면 진짜 수십만 원이야.”

“리셀할 생각으로 굿즈를 사?!”

이번엔 뒤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신경이 집중됐다.

자석 포토북은 뭐지?

따로 모을 수 있는 포토 카드가 있나?

‘나도 하양이 굿즈는 좀 살까.’

진소유가 패딩 주머니를 뒤적였다. 안에 든 것을 꺼내 보니 손거울과 핸드폰이 전부였다.

패딩 안감 주머니도 뒤져보았다.

콘서트 티켓밖에 없었다.

“메이.”

“네.”

“돈 빌려줘.”

“네?”

“그 표정 뭐야. 내가 떼먹을까 봐? 나를 도둑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아, 아님미다. 아니, 저, 저 딱 예산에 맞춰서 가져와서어…….”

진저는 골목길에서 불량배에게 불림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오들오들 몸을 말았다.

진소유는 눈매를 가늘게 만들더니,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이런 데 외모 쓰시면 안 됨미다!”

진저가 말린 덕분에, 진소유의 외모에 홀려 돈을 상납할 남자가 한 명 줄어들었다.

‘그건 그렇고.’

진소유는 다시 인민이들의 행렬을 보았다.

그들은 행복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다. 얼굴에서 기쁨이 떠나가지 않는다.

이런 아침 일찍 추운 거리에 수십 분을, 몇 시간이나 서 있는데 그렇게나 행복할까.

‘이게 팬의 얼굴이구나.’

팬이란 이런 거구나.

진소유에게 팬이란 큰 의미가 없는 이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이돌이 되기 전에도 팬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많이 보았으니까.

그녀의 얼굴과 몸은 신전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우상으로 삼아 신을 대하듯 찬양과 공물을 바쳤었다.

그런 삶을 살아왔다.

팬이란 그런 이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뭔가, 다르네.’

이토록 가까이에서 관찰하니, 단순히 진소유의 외모를 찬양하던 이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언니 이제 저희 차례임미다!”

진저가 흥분에 떨면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마자 총알처럼 튀어 나가 카운터 앞에 섰다.

직원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진저가 손가락으로 ‘이거 저거 요거’라면서 상품을 캐치해 냈다.

“언니 일찍 온 보람이 있슴미다!”

“누구는 돈 없어서 보고만 있는데 참 신났다. 나 놀리니?”

“어, 마, 만 원 정도는 드릴 수 있슴미다…….”

진저는 눈물을 머금고 조아라의 자석 포토 카드 세트를 손에서 놓았다.

그래, 자석 포토 카드가 별거냐.

그냥 자석 포토북에 붙는 포토 카드지…….

“됐어.”

진소유는 진저의 목덜미를 쓸어주며 굿즈샵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견물생심이라고, 계속 보고 있으면 불쌍한 진저의 돈을 정말로 빌리게 될 듯해서였다.

대신 진소유는 소녀연맹의 팬들에게 집중했다.

이미 물건을 산 이들은 느릿느릿 자신이 산 굿즈를 확인하면서 행복하게 떠나가고 있었다.

‘내 팬들도 저럴까?’

자신이 프린트된 물건을 샀단 이유만으로 저렇게나 행복한 표정을 지어줄까.

굿즈 쇼핑이 끝나고, 진소유와 진저는 공연장 근처에서 시간을 때웠다.

약속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오니, 3시가 겨우 넘은 시간임에도 겨울은 벌써 해를 감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유, 진저.”

에리카가 둘을 부르며 멀리서 다가왔다.

그 뒤엔 필사적으로 기대감을 감춘 얼굴의 김민주가 따라오고 있었다.

“언니들!”

진저는 서커스단에서 탈출하는 코끼리처럼 자유를 갈망하면서 둘에게로 달려갔다.

에리카가 활짝 웃으면서 팔을 펼쳤다.

진저가 에리카를 넘어 김민주에게 달려가 안겼다.

에리카가 뻘쭘하게 팔을 원위치시키려다가, 진소유를 보곤 팔을 또 활짝 펼쳤다.

진소유가 나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 안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포옹해줄게.”

에리카가 미련없이 팔을 내렸다.

두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매한 반가움을 표하는 사이, 김민주에게 안긴 진저는 그녀의 가슴께에 얼굴을 비볐다.

“다 큰 애가 징그럽게 왜 이래.”

진저는 키가 컸다.

김민주와 에리카보다도 크고, 진소유와는 거의 차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애가 무릎을 굽히면서까지 어린애처럼 몸을 부대껴오니, 김민주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었슴미다!”

“오늘따라 진짜 왜 이러…….”

김민주는 진저의 어깨 너머에 있는 진소유에게로 눈이 갔다. 진소유가 살포시 웃었다.

‘왜 이러는지 알겠네.’

진소유와 6시간이나 같이 있었어?

울면서 도망가지 않곤 못 배긴다.

“빨리 줄 서자.”

에리카가 멤버들을 재촉하며 줄로 이끌었다. 그녀는 곧 소녀연맹의 콘서트가 다가옴에도 그다지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언제 끝날까.’

딱히 소녀연맹의 콘서트를 보고픈 마음은 없었다. 진저와 김민주, 진소유에게 어울려줄 뿐이었다.

반면 다른 세 사람은 저마다 소녀연맹의 콘서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는 시간을 알차게 사용했다.

물론, 진저를 제외하곤 기대한단 티를 거의 내지 않았다.

김민주는 자신의 품을 더듬어 티켓의 감촉을 느꼈다.

‘그렇게나 내가 봐줬으면 좋겠다니, 어쩔 수 없이 온 거지.’

두 개의 티켓이 만져졌다.

하나는 신아름이 보내준 셋째 날 콘서트 티켓, 다른 하나는 김민주가 직접 산 둘째 날 콘서트 티켓.

‘신아름, 오늘 공연 별로기만 해봐라. 내일 건 절대 안 보러 가.’

진소유는 멍하니 서서 장하양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하양의 미소와 달콤한 꿀을 뿜어내듯 윤기 있게 벌린 입술, 별을 담은 눈동자와 매끄럽게 갈린 칼처럼 아찔하게 바깥으로 뻗은 쌍꺼풀, 별을 비추는 밤의 커튼처럼 요염하게 내려온 속눈썹과 꿈과 같이 아른거리는 매끈한 눈꼬리…….

“언니 거기 뭐 있슴미까?”

“자동차가 많이 다녀서 보고 있었어.”

“아, 그렇슴미까.”

진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진소유에게서 신경 끄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갤러리에 저장된 조아라의 사진들을 하나씩 소중한 보물처럼 살폈다.

‘아라 씨 춤을 보는 건 오랜만이야.’

기대된다.

그리고 또 기대되는 건.

‘박 이사님이 프로듀서로서 제작한 콘서트.’

성필 같은 사람이 창조해낸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진저는 너무나 궁금했다.

기대된다.

아니, 설렌다.

오늘 진저는 성필이 지닌 인격의 단면을 보게 될 것이었다.

“선주야.”

케이어스보다 살짝 앞줄에서, 유용태가 말했다. 그의 옆에서 트잇터를 보고 있던 이선주가 대강 답했다.

“왜요 오빠?”

“저기 뒤에 선 사람들 케이어스 같지 않냐?”

“음?”

이선주가 뒤로 흘끗 돌아보고 코웃음쳤다.

“뭐래요. 전혀 안 닮았구만.”

“아니, 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선글라스나 마스크 썼잖아. 연예인 아니야? 인원수도 케이어스랑 같…….”

“오빠 나 유스거든요? 케이어스가 특수분장하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거든요?”

“…….”

그래, 유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유용태는 케이어스처럼 보이는 이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소녀연맹의 콘서트에만 집중했다.

‘아름아, 장하다.’

데뷔부터 응원한 보람이 있다.

이렇게나 빨리 콘서트를 열다니.

유용태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지니고 공연장을 바라보았다.

* * *

셋째 날 공연.

정호환은 리카가 보내온 티켓을 들고 올림픽홀을 찾았다.

“허허.”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절로 힘이 빠졌다.

정호환은 코트 자락을 여미면서 줄의 가장 뒤로 향했다. 줄은 삼 일차 공연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길게 늘어서, 늙은 정호환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길이었다.

‘올림픽홀 3일 연속 공연.’

그게 가능하다면, 1만 석 규모의 공연장 콘서트도 성공시켰을 것이다.

‘데뷔 2년 차, 중소기획사 아이돌이 이뤘다기엔 믿을 수 없는 성과다.’

소녀연맹은 기적이었다.

그녀들은 시대의 사랑을 받고 있는 듯하다.

여태껏 케이팝이 쌓아왔던 모든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그것을 화려하게도 피워내고 있다.

소녀연맹은 자신들이야말로 시대의 총아라며 세상을 향해 외친다.

정호환은 줄의 끝으로 가는 도중 숨이 거칠어졌다. 모자를 벗고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시대의 총아. 시대의 최전선. 시대의 대표자.’

그건 KS 엔터가 항상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아이돌에게는 세대가 갈린다.

1세대, 2세대, 3세대, 그리고 4세대.

KS 엔터는 각 세대마다 반드시 정점을 배출해왔다. 아니, 워낙 걸출한 그룹이 많았던 터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점은 없었다.

‘2세대의 다키스트를 제외하곤.’

이번에야말로 정호환은 시대의 정점을 만들고자 했다. 케이팝 걸그룹의 최고봉을.

‘그런데…… 참으로 얄궂군.’

정호환의 가장 거대한 적은 SMS 엔터에서도, YJS 엔터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대형기획사가 아니라 중소기획사에서 나왔다.

물론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의 적이지만, 경쟁자라고 불릴 수준은 아니다.

항상 케이어스는 소녀연맹을 압도적으로 이겨왔었으니까. 시간만 주어진다면, 앞으로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나의 승리가 계속될까?’

정호환은 올림픽홀을 두른 줄을 보면서 섬찟함을 느꼈다.

이 광경이 삼 일째 반복되고 있다고…….

“어차피 좌석 다 정해져 있는데 빨리 오고 안 오고가 뭔 상관이에요.”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호환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당황하지 않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후, 다시 모자를 쓰고 그쪽을 보았다.

두 남자가 정호환처럼 줄의 끝으로 향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멈추었다. 그러자 따라오던 남자도 멈추었다.

정호환이 싱긋 웃었다.

“윤상열 PD, 오랜만이군.”

윤상열의 얼굴에 짙은 당황이 서렸다. 그 옆의 남자, 김태훈은 정호환을 알아보고 즉각 저자세가 되었다.

“정호환 이사님 아니십니까? 석세스 엔터 김태훈 대표입니다.”

“반갑습니다.”

김태훈이 살갑게 다가왔다. 정호환은 사무적으로 응대한 후 다시 윤상열을 보았다.

윤상열은 여전히 당황하는 중이었다.

설마 여기서 정호환을 마주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윤 PD.”

정호환이 나긋이 입을 뗀 순간, 윤상열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성큼성큼 그를 지나쳤다.

“상열이 너……!”

김태훈은 멀어져가는 윤상열을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다가, 정호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급히 쫓아갔다.

“너 저분한테 너무 무례하게…….”

윤상열이 희번덕 눈을 치켜뜨고 김태훈을 쏘아 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하.”

두 사람의 줄의 끝에 와서 섰다.

김태훈은 윤상열의 심기가 안 좋자 여러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풀려 했다.

현재 윤상열의 모습이 어떻느냐.

‘애들 새벽에 깨워서 혼냈을 때랑 비슷하네.’

그날은 분명…… 소녀연맹 정규 앨범의 사전 예약 판매량이 최종적으로 집계된 날이었다.

윤상열의 기분은 그때와 비슷하면 비슷했지, 못하진 않은 듯했다.

“네가 우리 상장 미루자고 했었잖아. 그거 결과적으로는 좋은 판단 같아. 내가 사업적으로 벌여 놓은 것도 있는데, 더 판 벌여봤자 좋은 일 있을 거 같지도 않고 뭐.”

게다가 석세스 엔터에 소속되어 있던 가수, 배우들이 한둘씩 재계약하지 않겠단 의사를 표해오고 있었다.

김태훈은 그것을 석세스 엔터가 더 성장하는 중에 겪는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번듯한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직원을 늘리고, 사업 파트를 쇄신하고.

그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한 아티스트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겠지.

“상장해서 지금 상황까지 왔으면 주가 꽤 떨어졌겠지? 괜히 이래저래 간섭이나 받을 뻔했지 뭐냐.”

김태훈은 윤상열의 의견을, 물론 옛날에는 의견이라기보다 고집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의견을 칭찬했다.

윤상열은 집요하게도 석세스 엔터의 상장과 사업 분야의 폭발적 확장에 반대해왔던 것이다.

기획사는 근본을 잃으면 안 된다던가, 음악에 집중하는 게 옳다던가, 그런 논지를 펼쳤었다.

‘이럴 때는 또 성필이는 어떻게 말했을지 궁금하고 그러기도 하네.’

윤상열은 김태훈의 칭찬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딱히 김태훈을 무시하거나 그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윤상열의 머릿속엔 격류가 흘렀다.

‘정호환이 콘서트를 보러 와?’

정호환은 업계의 일인자다.

프로듀서로서 가장 뛰어난 인간임을 역사가 증명한다.

윤상열은 그가 늙은 퇴물에다가, 역사적으로 보아도 별거 아닌 성과가 잔뜩 부풀려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세간이 정호환을 평가하는 시선을 무시하진 않는다.

‘그 정호환이?’

업계 일인자가 굳이 다른 작업장을 보러 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정호환이 소녀연맹의 팬이라서?

그럴 리가 없다.

그만큼 업계에서 구른 인간이니 이미 업계를 향한 사랑 따위는 옛적에 없어졌을 것이다.

정호환에게 아이돌은 삶의 양식이다. 놓으면 떨어지는 절벽의 단면처럼, 어쩔 수 없이 잡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 그가 볼 장 다 본 아이돌 콘서트에 올 이유라면…….

‘봐야 하니까.’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래서 온 것이다.

그 사실이, 윤상열은 참기 힘들었다.

‘네가 경계해야 할 건 소녀연맹인지 지랄인지가 아니야.’

박성필, 그 못 배워 처먹은 고졸 새끼가 있는 지혜 없는 지혜 다 뽑아내서 만든 그딴 오합지졸 그룹이 아니다.

케이어스를 만든 인간이 소녀연맹에 관심을 가질 필요 따위 없다.

없을 텐데.

‘왜 온 거냐?’

어느새 윤상열은 공연장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2층의 자리에 앉아 희미한 불빛만이 비추는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중앙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고, 영상 속 소녀연맹 멤버들이 공연 에티켓을 설명했다.

‘나는 왜 온 거지?’

정호환이 이곳에 왔단 불합리한 상황만을 떠올리던 윤상열은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나는 왜?’

답은 곧장 나왔다.

‘비웃으려고.’

시답잖은 기싸움이나 하다가 석세스 엔터를 뛰쳐나간 성필을 비웃기 위해서.

그렇다, 그래, 그러기 위해서 왔다.

‘봐주마.’

갑자기 윤상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시끄러어…….”

공연 시작 전의 대기 시간, 스크린에서는 소녀연맹의 ‘아라베스크’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수천 명의 팬이 떼창한다.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노래를 따라부른다. 그게 마치 주어진 의무라도 되는 양, 너무나 큰소리로 따라부르고 있다.

수천 명의 노랫소리는 우레가 되어 윤상열의 귀에 꽂혔다.

“시끄러워 죽겠다고…….”

눈을 감았기에 이 정신 사나운 광경을 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청각까지 차단할 수는 없었다.

빛이 없어 검은 시야로 글로브 멤버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녀연맹의 앨범 판매량, 음원 차트 순위를 확인한 날. 글로브 멤버들이 윤상열을 바라보는 눈길은 명백히 평소와 달랐었다.

여전히 두려움을 지니고 자신들의 창조주를 대하지만, 그 안엔 불손함이 배어 있다.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불손함이.

윤상열은 그게 짜증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들 의무도 다하지 못하는 년들이.’

윤상열은 공연을 보는 게 변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이게 너희들이 나를 무시하는 이유다. 봐라. 이 조잡한 공연을.’

이딴 공연을 보고도, 감히 자신을 성필 따위의 인간과 비교할 수 있을까?

윤상열은 흠집을 찾아내려 혈안이 되었다.

‘이딴 결과를 만든 인간이 그리워서 나를 그딴 눈빛으로 바라봐?’

윤상열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소녀연맹의 콘서트는 형편없을 것이다. 적어도 앨범 판매량이 십수만 장에 달할 정도의 아우라를 갖추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소녀연맹의 성공은 순전히 운이 연쇄적으로 폭발한 데 지나지 않아. 어쩌다 때려 맞춘 거야.’

이 공연의 이름, ‘도미노’처럼.

소녀연맹의 도미노는 곧 끊길 것이다.

윤상열은 성필의 실패가 시작될 순간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정호환 당신이 신경 쓸 만큼, 글로브 네년들이 부러워할 만큼, 소녀연맹은 대단치 않…….’

윤상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공연장의 불빛이 전부 꺼졌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건.

와아아아아―!

함성과, 소녀연맹의 전설적인 데뷔곡.

[아니]

지금 들어도 시대를 앞서간 그 사운드는, 윤상열에게 어떠한 소음보다도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 * *

콘서트 첫째 날.

소녀연맹 멤버들은 백스테이지에서 동그랗게 모여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한동안 있었다.

“얘들아.”

백설하가 말했다.

“우린 지름길로 왔어. 지름길로 와서, 세상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성공했어. 기적이야.”

[30초!]

“그런데 이건 내 감이지만, 아직 진짜 기적은 시작도 안 한 거 같아.”

[20초!]

“시작을 보러 가자. 그리고 시작이니까, 첫걸음을 잘 내딛자.”

[15초!]

백설하가 어깨동무를 더욱 강하게 했다.

멤버들도 그러했다.

서로의 온기에 의지하며 불안감을 이겨내려던 순간.

“소녀!”

리카가 힘차게 외쳤다.

“여, 연맹!”

백설하가 반사적으로 이었다.

“투쟁.”

조아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해방.”

장하양은 긴장감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5초!]

신아름이 어깨동무를 풀고 모두를 스테이지 방향으로 밀었다. 그녀들은 허겁지겁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 스테이지를 향해 나아갔다.

빛을 타고 올라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신아름이 선명하게 선언했다.

“승리.”

* * *

“나온다.”

성필이 응원봉을 부서질 듯 쥐었다.

그에 호응하듯 횃불을 형상화한 응원봉이 새빨간 불꽃이 되어 주변을 밝혔다.

이윽고, 관객석은 산불이 번지듯이 붉게 물들어 마침내 공연장 전부가 불에 잠겼다.

철컥.

조명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무대 중앙에 빛을 쏘았다. 그곳에서 멤버들이 나타났다.

스크린에 불타는 붉은 깃발이 새겨졌다.

[인민이들!]

백설하가 불끈 쥔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관객석의 불길이 백설하에게 답하듯 화려하게 흔들린다.

[준비됐나요!]

돌아오는 건 귀가 얼얼해지는 함성.

백설하가 뻗었던 주먹을 가슴으로 가져와 품었다. 심호흡으로 그녀의 가슴이 부풀고, 이내 그녀는 타오르는 눈빛과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첫 번째 곡은!]

성필이 멍하니 답했다.

“‘아니’.”

소녀연맹의 데뷔곡.

도미노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뒤엎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붉은 파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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