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소녀연맹에게만큼은 손혜빈의 대표곡이 ‘크라운’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멤버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냐면.
‘10년도 더 전이었지. 이 노래가 나온 거. 난 그때가 케이팝의 태동기라고 생각해. 그땐 정말 많은 기획사들이 난립했었어. 그런 만큼 고난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건 단순히 경쟁할 회사가 많아서가 아니었어. 기획사들은 케이팝이 뭔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으니까. 케이팝이란 어떤 장르가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새로움을 보여줄 건가, 어떻게 케이팝만의 고유함을 살릴 수 있는가. 미국의 팝과 제이팝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야만 하는 임무가 있었던 거야. 사람들은 뭘 좋아할까. 우리는 어떻게 알려져야 할까. 그런 고민의 끝에서 수많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어.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장르, 새로운 패션, 새로운 기술……. 그렇지, 당연히 결점들도 많았지. 문법에 맞지도 않는 이상한 영어 가사하며, 시대를 앞서갔는지 초월했는지 괴상한 복장들도 있었고, 퍼포먼스도 비슷한 꼴이었어. 가사도 비슷했고. 하지만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케이팝이 있다고 생각해. 누나의 ‘크라운’이란 곡도 지금 와서 들으면 그저 옛날의 이상한 노래가 가운데 하나지만. 난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거의 넋이 나갔어. 과장하는 거 아냐. 티비에서 뮤비가 나오는데, 정말 멍하니 그것만 봤어. 대단하더라고. 나중에 들었지만 누나가 미국 쪽 팝에 꽂혀서 사운드랑 뮤비 신경 썼다면서? 물론 지금 관점으론 이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때 한국 아티스트들의 고민과 노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곡이야. 누나의 ‘크라운’은 태동기에 맺혔던 꽃봉오리의 하나였어. 누나 덕에 현재 꽃이 만개할 수 있던 거나 다름없지. 그래서 이걸 들으면…… 그립네. 처음 누나 로드 매니저 됐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몰라. 그 후로는…….’
장하양이 연습생으로 막 영입되었던 시기, 손혜빈이 가로 엔터로 방문했었다.
그때 멤버들은 성필이 손혜빈의 ‘크라운’을 가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주접떠는 것을 직접 보았었다.
그날의 이야기는 어느 방면에서는 전설적이라, 나중에 가로 엔터로 들어온 신아름도 모를 수가 없었다.
‘박 이사님이 이렇게 말하셨었어!’
리카는 성필이 해주었던 이야기 중 가슴에 꽂히는 것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당연히 손혜빈과 만났던 날의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리카는 그것을 그대로 읽어주었다.
‘흐음, 그래?’
신아름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바로 손혜빈의 ‘크라운’ 뮤직비디오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성필이 말했던 것 같은 가슴 벅참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게 뭐야?’
신아름의 반응은 처음 ‘크라운’의 뮤비를 보았던 다른 멤버들과 비슷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신아름의 입장에선 도저히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대 차이에서 오는 취향의 괴리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콘서트 커버 무대를 손혜빈의 것으로 했다.
손혜빈 본인조차 부끄러워하는 곡으로 무대를 꾸민다. 심지어 원작자인 손혜빈보다 완벽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게 없다고요? 그래서 뭐요?’
성필의 앞에서 창피당했던 과거를, 신아름은 이 방식으로 갚을 것이다.
‘손 이사님, 잘 봐요.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거 없어도 빛날 수 있단 거요.’
손혜빈보다 더.
* * *
유용태는 코끝이 찡해졌다.
신아름의 크라운이 그렇게 만들었다. 평소였다면 최애인 신아름의 퍼포먼스 때문이었겠지만, 이번엔 ‘크라운’에 방점이 찍혔다.
이 곡은 유용태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했다.
‘이거 많이 들었었지.’
음악은 인간의 기억에 가장 깊이 관여한다.
유용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사이,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추억의 단면으로 빠져들었다.
친구에게 100원을 빌려 불량식품을 사 먹고.
준비물을 챙겼는지 확인하는 엄마의 잔소리에 질려 하고.
아침마다 텔레비전의 뮤직비디오 채널을 틀어두고 등교를 준비하던.
어렸을 시절의 단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추억이네. 옛날에 문방구에서 손혜빈 브로마이드도 팔고 그랬는데.’
먹먹한 노스텔지아가 공연장을 사로잡았다.
20대 중반이 넘어가는 이들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신아름의 무대를 감상했다. 추억의 마력이 그들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빠 이 노래 알아요?”
이선주는 커버 무대엔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녀와 나이대가 비슷하거나 어린 이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응, 알아. 음방도 생방으로 봤었어.”
“음방이요? 오빠 젊었을 때도 덕질했어요?”
“난 지금도 젊거든? 덕질은 안 했지. 그땐 뭐, 다들 음방 봤으니까.”
현세대를 살아가는 이선주는 그 시절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텔레비전의 예능이나 음악 방송을 보지 않으면 친구들과 제대로 된 대화도 할 수 없던 시절이다.
최신 음악을 접하는 통로는 음원 차트나 인터넷 커뮤니티가 아니라, 텔레비전의 뮤직비디오 채널과 음악 방송이었다.
누구든 음악 방송에 나오면 전 국민이 알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그 가운데서 손혜빈이 ‘크라운’으로 데뷔했었다.
“노래 좋지 않아?”
“음…….”
이선주는 애매한 얼굴로 무대를 보았다.
신아름을 보는 건 좋아도, 곡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일단 기본적인 멜로디와 후렴구는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지만.
“뭐, 괜찮네요.”
요즘 노래처럼 확 귀에 들어오진 않는다.
유용태의 앞이라 솔직히 표현하진 못했지만, 너무 올드한 느낌이 든다.
‘안무도 안 화려하고. 동작도 좀 정적이고.’
유용태는 그런 이선주의 생각을 곧바로 알아챘지만 무어라 하지 않았다. 대신 아련한 미소를 지으면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것도 이제 올드해졌구나.’
하지만 유용태에겐 언제까지나 최신 음악과 같은 지위에 있을 것이었다.
신아름의 퍼포먼스에 홀린 듯 집중하는 건 유용태와 비슷한 이들뿐이었다.
‘크라운’을 그저 옛날 곡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케이팝이 현재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왔던 하나의 계단으로 인식하는 이들 말이다.
‘어쩔 수 없나.’
유용태는 이선주와 추억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최애인 신아름이 유용태의 추억을 눈앞에서 재현해주고 있으니까.
‘멋지다, 아름아.’
공연장의 반응은 절반으로 갈렸다. 유용태와 같은 자들과 아닌 자들로.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관객이 있었다.
손혜빈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기준으로 나뉜 게 아니라, 손혜빈의 퍼포먼스를 분석할 줄 아는 이들.
바로, 아이돌이었다.
* * *
‘뭐야 저게.’
김민주는 앉음새를 바로 하고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원래도 신아름의 무대라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주변의 자극이 전부 차단될 만큼이나 온 신경을 무대로 쏟았다.
‘저거 원곡 퍼포먼스인가?’
그런 모양이다.
현시대에 만들어졌다기엔 풍기는 분위기나 테크닉에서 옛날 느낌이 확연하다.
“어렵네.”
김민주의 마음을 대변하듯 에리카가 말했다.
“어렵다니?”
김민주가 묻자, 에리카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가볍게 답했다.
“퍼포먼스 자체가 어렵다고. 곡을 이해하기 어렵단 뜻인 줄 알았어?”
“아니…… 너도 어렵다고 느껴?”
“응.”
춤과 보컬을 배우지 못한 이들은 ‘크라운’ 퍼포먼스를 보고 투박하다는 감상만 가질 것이다.
옛 시대의 유물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엔 감탄하지만, 만듦새엔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박물관의 감상자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보컬리스트, 댄서, 댄스가수가 보는 ‘크라운’은 달랐다.
“저걸 솔로로…….”
들고나온 인간이 있었다고?
현재처럼 실용 음악, 댄스 트레이닝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문화 인프라가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낙후되었던 시대였다.
김민주가 느끼기에, 손혜빈의 ‘크라운’은 동네 헬스장에서 탄생한 세계 보디빌딩 대회 입선자 같은 모습이었다.
‘진짜 막무가네네…….’
저런 퍼포먼스를 아티스트에게 권유한 기획사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시켰더니 돼서 그냥 무대에 내보낸 건가?
“저거 손혜빈 선배님 데뷔곡이래.”
진소유가 핸드폰을 보면서 말했다. 그에 김민주가 더 놀랐다.
‘데뷔곡? 데뷔에 저걸?’
그때 갑자기 진저가 빽 소리쳤다.
“핸드폰 전원 끄라는 안내 안 받으셨슴미까?! 핸드폰 켠 거 걸리면 퇴장 조치 될 수도 있슴미다!”
“다 쓰는데 뭐 어때서.”
진소유의 말마따나 핸드폰을 꺼낸 이들은 상당히 많았다.
통로에서 핸드폰 사용을 제지하던 스태프들도 이제는 지쳤는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데뷔곡이란 것도 대단한데.”
에리카가 결론 내리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솔로로 저걸 한다는 것도 대단해.”
“뭐, 신아름이 대단하…….”
“아름이 말구. 손혜빈 선배님 말야.”
에리카가 실실 웃자 김민주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 * *
아이돌은 퍼포먼스에서 강약을 주는 것에 익숙하다.
언제가 쉬는 타이밍이며, 언제가 가진 기운을 다 쏟아부어야 하는 타이밍인지 재는 기술을 익혀야만 하니까.
‘아이돌 곡엔 3옥타브대 고음역이 있다고 해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그걸 맡는 건 메인 보컬 포지션의 멤버이며, 3옥타브 파트에 들어서기 전까지 여유로운 퍼포먼스를 수행하여 체력을 비축해두었을 테니까.
딱 몇 초만 제대로 내지르면 그만이다.
‘아크로바틱한 댄스 퍼포먼스를 수행한대도, 그렇게 신기하진 않지.’
마찬가지로 메인 댄서는 다른 멤버들이 정면에서 시선을 모아주는 동안 구석에서 적당히 쉴 수 있다.
십수 초 혼신을 다해서 춤추면 그만이다.
하지만 솔로 댄스가수가 그것들을 수행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솔로는 틈 없이 퍼포먼스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쉴 시간 따위 없다. 곡이 이어지는 매분 매초, 관객들의 시선이 솔로에게로만 향하고 있으니까.
‘진짜 말도 안 되네.’
연습 때도 느꼈지만, 힘겹기 그지없다.
신아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문에 호흡이 흐트러져 도중에 음정을 맞추지 못할 뻔했다.
신아름은 다시 집중을 유지했다.
‘왜 솔로 댄스가수가 한국에서 없어졌는지 알겠다.’
가성비가 맞지 않는다.
3분이 넘는 시간 동안 쭉 노래 부르고 춤도 추며, 표정 연기에 무대 장악까지 해야 한다.
그런 인간을 한 명 양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들어갈까? 최소한 아이돌 멤버 한 명보다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냐. 외모 수명을 생각하면, 양성 기간만 고려해선 안 되지.’
빛나는 재능이 필요하다.
누가 보아도 ‘빛난다’고 확언할 만한 재능을 가진 인간만이 솔로로 설 수 있다.
‘손 이사님은 이걸 가지고 나랑 비슷한 나이에 데뷔했단 거지.’
1분 12초.
1절이 끝나고 2절에 들어갈 타이밍.
신아름은 유유자적 스텝을 밟으면서 백댄서들과의 동선을 정비했다.
2초가 될까 말까 한 아주 짧은 시간.
그게 ‘크라운’에 주어진 휴식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대단해.’
신아름은 손혜빈을 향한 존경을 담아 그리 생각하곤 다시 퍼포먼스에 들어갔다.
연습할 때마다 느꼈으며 되새겼던 말이지만, 신아름은 다시금 생각했다.
‘대단해, 정말.’
손혜빈이 활동하던 시기에 ‘MR 제거’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많은 가수와 아이돌이 곤욕을 치르고 심기일전하게 됐다.
AR이 만연하여 립싱크가 당연했던 분위기가, MR 라이브의 분위기로 넘어가게 됐다.
가요계를 덮친 그 파도에도 손혜빈은 멀쩡했었다. 그녀는 옛날부터 AR을 뚫고 울려 퍼지는 라이브 노래로 유명했었다.
‘쟤 AR 아니야?’라며 의심 어린 시선이 팽배했던 시대에도, 손혜빈만은 당연하단 듯이 의심을 피해 갔었다.
‘정말 대단하고…….’
아쉽다.
신아름은 그 생각을 도저히 접을 수 없었다.
만약 손혜빈이 옛날이 아니라 지금 데뷔했으면 어땠을까.
케이팝의 정체성이 확실하지도 않았으며 기술적으로 완성되지 못했던 시기가 아니라, 케이팝이 모든 기술적 성숙을 마친 현재에 데뷔했다면…….
‘이런 퍼포먼스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10년이나 더 전에 활동하셔서…….’
신아름은 단언했다.
과거의 손혜빈이 현재로 돌아오면, 아이돌계에서 그녀와 실력으로 비빌 만한 인간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라고.
손혜빈은 성숙하지 못한 시대에 태어났던, 누구보다 성숙했던 퍼포머다.
그녀는 프란츠 리스트 이전에 태어난 예브게니 키신이다.
그녀는 젤리 롤 모턴 이전에 태어난 아트 테이텀이다.
그녀는 비르투오소(초절기교의 음악가)다.
시대가 빛내줄 수 없는 기량을 가지고 태어난 천재.
‘이렇게 투박한 춤으로.’
현재와 비교하면 무식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손짓과 스텝. 하지만 과도한 강약 조절 때문에 퍼포머에겐 극도의 피로를 요구하는 춤.
신아름이 그런 춤을 추었다.
‘이렇게 투박한 노래로.’
신기술이라며 아무렇게나 도입한 오토튠 때문에, 퍼포머 본래의 강점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원시적인 고음.
신아름이 그런 노래를 불렀다.
‘기량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시대에서, 손 이사님은 아이돌로 산 거야.’
그리고 그럼에도.
‘그렇게나 빛나셨어.’
손혜빈.
2세대를 대표하는 여자 솔로 댄스가수.
데뷔곡 ‘크라운’.
신아름이 그 퍼포먼스를 마쳤다.
한 발로 서서 측면을 보이고 허벅지가 도드라지게 한쪽 다리를 굽힌 자세. 어이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섹시 포즈다.
그것이 엔딩 포즈다.
엔딩 포즈마저도 무식하게 힘겹다.
‘하아, 씨…….’
신아름이 패배감을 느끼면서 쓰게 웃었다.
‘내가 졌네.’
신아름이 한쪽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자 턱에 맺힌 땀이 바닥으로 톡, 톡, 톡 떨어졌다.
‘손 이사님은 이 자세에서 조금도 안 흔들렸던데.’
콘서트의 실연에서도, 신아름은 과거의 손혜빈에게 져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단 생각도 든다.
‘정점이었으니까.’
신아름은 손혜빈에게 사과를 전했다.
손혜빈이 무어라 했을 때, 신아름은 ‘당신이 뭔데 그래’란 생각을 가졌었다. 지금 떠올리면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든 없든, 무슨 말을 듣든, 내가 뭐라고 짜증 낼 분이 아니었네…….’
신아름은 상쾌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했다고 그냥저냥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신아름은 상대가 누구이든, 그게 설령 현재로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인물일지라도 지고 싶지 않다.
‘다르게 했다면.’
신아름의 가슴 속에서 자그마한 새싹이 텄다.
‘퍼포먼스를 다르게 바꾸었으면…….’
옛날에 일본에서 다키스트 ‘더 킹’의 원본을 재현하려 할 때, 성필이 해준 조언이 있다.
‘세상에 더 킹을 춰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팬의 커버 댄스 영상이나 아이돌의 이벤트성 퍼포먼스 커버 같은 거 전부 합쳐서. 그래, 아주 많겠지? 그럼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당연히 ‘다키스트’다.
‘아름아, 네가 속한 영역이 팝인 이상 절대 원본의 아우라를 넘는 건 불가능해. 수백 년 뒤의 미래에도 더 킹을 가장 탁월하게 소화했던 건 다키스트뿐일 거야.’
그러니 원본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선 리메이크가 필요하다. 실연자의 개성과 강점에 맞춰진 리메이크가.
그 말을 들은 신아름은 화를 냈었다. 자신을 못 믿는 거냐고 말이다.
성필은 그저 설핏 웃으면서.
‘당연히 아름이를 믿지.’
그렇게 말했었다.
그땐 성필의 이상향에 닿겠다는 마음뿐이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까지 신아름의 마음은 서리로 덮여 있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재능이 만든 오만함.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서리를 내렸다.
신아름의 마음은 단단하고도 싸늘하며, 무엇보다 삭막했었다. 그리고 지금에야 겨우 서리를 뚫고 새싹이 하나 자라났다.
‘손 이사님을 위한 크라운이 아니라, 나를 위한 크라운이었으면…….’
비록 상쾌하고 깔끔했을지라도, 패배를 인정할 일 따위 없었을 텐데.
새싹은 금방 눈보라에 휩쓸려 흐릿해졌다.
지금은 그런 것에 집중할 때는 아니었다.
“후우.”
신아름이 엔딩 포즈를 풀었다.
거칠어진 호흡을 한 번 다듬고 마이크를 들었다. 조진만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얻어낸 짧은 토크 타임이었다.
“네, 여러분. 잘 보셨나요?”
유난히 남자들의 함성이 많이 들려왔다. 아마 손혜빈을 추억하는 이들일 것이었다.
신아름이 씨익 웃었다.
“저희 회사에 손혜빈 이사님 계신 건 아시죠?”
네에―!
여전히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크라운’을 준비했는데요, 딱히 손 이사님이 강요하신 건 아니에요.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자기 데뷔곡인데 흑역사라고요. 지금 자기가 봐도 창피하다고요.”
장내에 웃음이 퍼졌다.
신아름은 방금 무대를 마쳐 어지러운 터라 손혜빈이 어딨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사실 제가 ‘크라운’을 고른 건요, 손 이사님 부끄럽게 만들려고 그런 거예요. 옛날에 손 이사님이 저한테 조언? 같은 걸 주셨는데. 그때의 저는 달갑게 받아들이진 않았거든요. 반항 기질 같은 게 심했어서. ‘그래요? 손 이사님은 뭐 얼마나 대단한 퍼포먼스 하셨길래 그러는지 봅시다’하는 심정으로 했는데…….”
신아름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직접 해보니까, 제가 감히 입을 열어도 될 분이 아니었네요. 후우!”
신아름은 아직도 정돈되지 않은 숨을 뱉었다.
아이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호흡의 퍼포먼스인데다 난이도도 높아서, 평소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제가 듣기론, ‘크라운’은 손 이사님이 특별히 사운드에 신경을 쓰셨대요. 그때 팝에 꽂히셔서요.”
물론 동시대 미국의 팝과 비교할 만한 완성도는 아니었다.
신아름도 알았다. 그녀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손을 공손하게 배 위에 모았다.
“이 자리를 빌려, 손 이사님과 모든 선배님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저희가 이 자리에서 ‘아니’나 ‘아라베스크’ 같은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건, 선배님들의 결과물이 있어서였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신아름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한두 명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를 치는 사람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 모두가 허리 숙인 신아름을 향해 존경을 표했다.
그 존경은 신아름의 선배들에게로 향했다.
* * *
“누나, 울어?”
손혜빈은 모자를 거의 입술까지 끌어다 내려쓰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물고 있는 게, 눈물은 어쩔 수 없이 흘려버렸지만 울음만은 흘리지 않겠단 의지를 돋보이게 했다.
성필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누나는 흑역사라고 해도, 누나 노래 좋아하는 사람 많았어. 그리고 아름이도 저렇게 말하잖아. 혹시 몰라. 누나가 없었으면 소녀연맹도 없었을지.”
어쩌면 많은 아이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엔 손혜빈을 보고 매니저나 프로듀서가 되기로 결심했던 인간이 반드시 있을 테니까. 그런 인간 중 한 명이, 과거의 우상을 위로했다.
“야이 씨 임마…….”
손혜빈이 울음 섞인 웃음을 뱉었다.
“저런 말 들어도오…… 흑역사란 건 안 바뀌어어…….”
손혜빈은 울었다.
기뻐서 울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요계에 바쳤던 수년이 의미 없이 사라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대중 가수란 대중이 잊는 순간 의미를 잃으니까.
자신은 고작 몇 개월간을 유행할 곡을 위해서 그토록 노력했나 싶어서, 가수를 그만둔 이후에도 너무나 괴로웠다.
옛날 명성 가지고 예능에나 얼굴 비추려고 가수가 된 게 아닌데…….
“흑역사라도 역사잖아. 나도 그렇고, 다들 누나 기억하고 있어. 절대 못 잊지.”
손혜빈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과거의 영광은 흙이 되어 공터에 흩뿌려졌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 흙은 다음 시대를 위한 주춧돌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래…….’
손혜빈은 코를 훌쩍였다.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리고 나한테 감사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손혜빈이 젖은 시야를 위로 올렸다.
신아름은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걸로 의미가 있던 거지.’
고마워, 아름아.
* * *
콘서트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모두 아이돌리시하게 리폼 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롱 포’로 데뷔했을 때처럼.
[3분 전.]
소녀연맹 멤버들은 저마다 개인 악기를 들고 가볍게 연주해보았다.
백설하는 앰프가 연결되지 않은 일렉 기타의 현을 뜯었다. 힘없는 금속의 울림이 백설하의 귀로 흐물흐물 들어왔다.
그 상태로 기타 솔로를 연주해보았다.
일렉 기타 본연의 사운드가 나지 않아 텅 빈 느낌이었으나, 빠르게 연주하고 있단 것만은 근처의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피크를 쥔 백설하의 손끝에 땀이 잡힐 때쯤.
“악기 받으러 왔습니다!”
밴드 ‘데비’의 멤버들이 황급히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그들은 각자의 포지션에 따라 각각 멤버들 앞으로 향했다.
권동하는 장하양의 베이스를 받았다.
보컬리스트는 신아름의 기타를 받았다.
드러머는 조아라의 드럼채를 받았다.
리카는 그냥 나가서 피아노를 치면 된다.
그리고, 기타리스트가 백설하의 일렉 기타를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설하 씨?”
백설하는 일렉 기타를 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지판을 꾹 잡더니, 천천히 기타리스트에게 악기를 내밀었다.
기타리스트는 백설하의 기타를 받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또한 악기를 남에게 맡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다시 확인할게요.”
‘데비’의 리더 권동하가 다시금 멤버들에게 개인 악기를 두는 위치를 설명했다.
‘롱 포’의 1절에서 소녀연맹이 댄스 퍼포먼스를 마치고 밴드 세션석으로 온다. 그리고 자신의 악기를 들고 연주할 것이었다.
소녀연맹이 ‘데비’ 멤버들의 악기를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멤버들의 악기는 저마다의 자리에 놓인다.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데비’는 VCR이 끝나기 전에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조용히 다음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영상이 끝나자, 백설하가 워커의 발굽을 땅에 쿵쿵 찍었다.
멤버들이 나가자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다 함께 스테이지로 이어지는 철제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백설하만이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언니?”
장하양이 걱정스레 물었다.
백설하가 살짝 멍한 투로 말했다.
“우리…… 왜 밴드 퍼포먼스 같은 걸 하기로 했더라?”
“갑자기 그게 뭔 소리예요.”
“아라야, 그으, 그냥. 여기 서니까 궁금하네. 누가 먼저 하자고 했었지?”
“아타시(저)요!”
리카가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제일 처음 아이디어 낸 건 저였을 거예요! 브레멘 음악대의 저력을 보여줄 때예요! 연습한 게 아깝잖아요!”
“마음에 안 들어.”
“에엑?!”
“‘연습한 게 아깝다’는 이유는 마음에 안 들어.”
백설하가 쥔 주먹이 떨려왔다. 긴장하고 있단 게 느껴진다.
그녀는 막상 밴드 무대가 다가오니 모든 게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왜 익숙하지도 않은 밴드 악기 같은 걸 연주해야 할까. 그냥 팬들이 기대하는 댄스와 보컬 퍼포먼스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멋지잖아요.”
백설하가 흠칫했다.
조아라가 다시 말했다.
“멋지잖아요. 그래서 하기로 한 거 아녜요?”
“…….”
백설하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 이유가 제일 마음에 드네.”
백설하가 계단을 올랐다.
“제대로 멋져 보자.”
특별 무대.
‘롱 포’ 밴드 퍼포먼스.
* * *
백설하의 기타가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토해냈다.
근처에 있던 멤버들은 물론 관객들마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수천 쌍의 시선에 휩싸인 채, 아래를 향해 숙인 백설하의 턱을 따라 땀이 타고 흘렀다.
백설하의 땀, 좌절이 기타로 떨어져 스며들었다.
백설하는 지판을 부서질 듯이 꽉 쥐었다. 마찰된 현이 다시금 끼기긱 섬뜩한 소음을 뱉었다.
‘더는 못 해…….’
백설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가에 맺혀 있던 땀이 눈물처럼 뺨을 가로질렀다.
‘더는…….’
퍼포먼스 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