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왜, 왜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백설하는 필사적으로 물었다.
남들 다 가는 휴가를 못 가게 됐다는 것보다, 자신이 그런 처벌을 받아야 할 만큼 큰 잘못을 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박 이사님이 내 휴가까지 취소할 만한 잘못?’
뭔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보통 일이 아니다.
단순히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끝날 일은 아닐 것이다. 혼신을 다하여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뭘 했지……?’
성필의 답이 돌아오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 백설하는 과거로 빠르게 침전했다.
성필에게 잘못한 거…….
‘…….’
없는데……?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부끄럽지만, 백설하는 자신만큼 예의 바른 20대 중반을 본 적이 없다.
예의 콘테스트가 있다면 입상할 자신도 있다. 특히 성필을 대할 때는 더 심혈을 기울여 예의를 지켜왔다. 성필이 먼저 장난을 걸었을 때만 빼고.
‘뭐, 뭐지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어째서 이런 일이…….’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백설하는 성필이 무슨 답을 하는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에리카 씨가 그러시던데, 설하 요즘 노래 부르는 게 재미없다면서?]
“……네?”
[재밌어서 부른다기보다 삶의 양식처럼 됐다고. 옛날만큼 설레진 않는다고 들었어. 이제 노래는 부를 만큼 불렀단 거야?]
“네, 네?”
폰 너머로 성필의 옅은 웃음이 들려왔다.
[요즘은 보컬 트레이닝도 옛날보다 적게 하지? 노래를 사랑하지 않는 아이한테 벌이야.]
또 장난이었다.
[하하, 휴가 자른다니까 많이 놀랐…….]
“에리카한테 들으셨다고요? 에리카랑 연락하세요? 왜요?”
[아, 그거. 그야 토모(친구)니까.]
“…….”
됐다.
백설하는 이제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옛날에야 성필이 케이어스를 좋아한다는 게, 케이어스 멤버들과 친하다는 게 속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막을 수 없는 자연현상처럼 여겨진다.
백설하는 무의식적으로 에리카에 관한 생각을 치워버리고, 성필이 자신에게 장난쳤다는 것에만 집중했다.
“난 또…… 장난이셨구나…….”
정말 휴가가 잘리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
[휴가 없다는 건 진짜인데?]
“대체 왜요?!”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음. 설하 너한텐 정말 미안한데, 방송 하나 나가볼래?]
백설하는 씩씩 분을 삭였다. 그리고 간신히 가라앉힌 목소리로 퉁명스레 답했다.
“어떤 건데요.”
[더 언노운 싱어.]
“나갈래요 나갈래요 나가게 해주세요!”
[역시 뮤지션이네.]
더 언노운 싱어.
노래 부르는 사람의 얼굴을 가림으로써 오직 노래로만 진검승부를 펼치는 프로그램이다.
가끔 직업 가수가 아닌 사람이 나와서 인지도 벌이를 하긴 해도, 나오는 대부분은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가수로서 피가 끓지?]
성필은 백설하가 ‘더 언노운 싱어’에 특히 긍정적일 거라고 예상했었다.
백설하는 타고난 신체적 특징 때문에 어느 강박이 생겼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게, 노력해서 이루어낸 실력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신체적 특징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소녀연맹 내에서 누구보다 인정에 목말라 있을 수도 있다.
“지, 지금 ‘더 언노운’이 주성 선배님이시죠?”
[모르는 척 좀 해드려라. ‘흥미만발 재미만발 딴따라’가 더 언노운이야.]
더 언노운 싱어는 출연자에게 가면을 씌우지만, 보통 가면을 벗기 전에 정체가 탄로 나는 경우가 꽤 있다.
개성이 강한 가수라면 노래를 듣고 누구인지 맞추기 어렵지 않으니까.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뭐야, 결승까지 가는 게 기본 전제야?]
“제 대결 상대가 강한가요……?”
[아직 모르지.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모를 거고. 그래도 방송국에 미팅 가면 우연히 마주칠 수는 있을지도 몰라.]
“무조건 이긴다는 건 아니지만요…….”
백설하는 겸손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거의 무조건 결승까지 가요.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에 성필은 호쾌한 웃음을 돌려주었다.
[그래, 믿는다 리더.]
“네, 꼭 결승까지 갈게요. 그리고 우승해서…….”
더 언노운 싱어의 역사 중 한 손에 꼽는, 아이돌 출신 더 언노운이 될 것이다.
“우승해서, 소녀연맹을 더 알릴게요.”
[응.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설하야.]
“네.”
[이번 주 휴일 하루만 시간 뺄 수 있어?]
“어…… 미팅 가나요?”
[음, 미팅이지.]
“주말에 미팅이 잡히네요. 방송국이 참…….”
[나랑 미팅(Meeting).]
“……네?”
성필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들려왔다.
[소녀연맹 리더 대 프로듀서로 얘기 좀 하자. 심각하진 않고, 조금 진지한 정도? 휴일에 시간 빼준 만큼 선물도 줄게.]
“…….”
백설하는 문득 가로 엔터로 들어오기 전이 떠올랐다. 성필의 ‘커피 마시자’는 약속을 데이트 신청으로 받아들였던 부끄러운 과거…….
백설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는 옛날보다 성장했어.’
장하다, 백설하.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지 않다니.
“네, 좋아요. 리더 대 프로듀서죠?”
[또, 설하야. 오늘 너를 프로젝트 첫 타자로 정한 건 네가 만만해서 그랬던 게 아니야.]
“아니었어요……?”
영락없이 성필이 ‘설하는 시켜도 반항 못 하겠지?’라고 생각해서 자신을 뽑은 줄 알았다.
그래서 백설하는 억울했었다.
정말로 성필에게 반항하지 못하는 자신이 보여서, 더 억울했었다.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저한테…….”
[옛날부터 쭉, 처음은 네가 좋겠다고 생각해왔어.]
“어, 으어?”
[처음은 너밖에 없다고.]
“아, 어, 네, 에…….”
[뭐 벌레라도 나타났어? 목소리가 왜 그렇게 굳었어?]
“아뇨, 아녜요, 네에…….”
[응. 그럼 쉬어. 퇴근 후에 연락해서 미안해.]
“바, 박 이사님도 푹 쉬세요.”
전화가 끝났다.
백설하는 폰을 내리고 길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옆을 보니, 장하양이 지근거리에서 귀를 내밀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장하양도 슬쩍 떨어졌다.
“언니 ‘더 언노운 싱어’ 나가세요?”
“아, 응.”
“상대는요?”
“아직 몰라.”
“주말에 박 이사님이랑 만나서 무슨 얘기할 거 같으세요?”
“으음, 아마 ‘우리들의 프로듀싱’ 관련해서?”
“혹시 리더 교체 가능할까요?”
“뭘 노리는 거야?!”
백설하는 찬탈자의 씨앗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아하하, 농담!”
역사가 증명하듯, 찬탈자는 반역의 순간까지 왕의 최측근인 경우가 많았다.
* * *
휴일.
성필은 소녀연맹의 숙소 앞까지 차를 몰고 갔다. 이미 백설하는 숙소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치마 입었네?’
성필은 치마를 입은 소녀연맹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연습을 위해 회사에선 바지 차림이며, 소녀연맹 무대 의상 중에는 치마가 드물디드물었으니까.
오죽하면 팬들이 ‘소녀연맹 치마 모멘트 모음’ 영상까지 만들겠는가.
성필은 픽 웃었다.
‘입고 싶었겠지.’
성필은 개인적으로 여자들의 치마를 입고 싶은 열망이, 남자의 정장 차림에 대한 열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패션계에선 남자는 입을수록 멋지고 여자는 드러낼수록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성필도 내심 한구인 같은 클래식 정장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백설하가 치마를 입은 것도, 성필과 비슷한 열망에서일 것이다. 모처럼의 휴일이니 한껏 꾸미고 싶었겠지.
“설하야.”
창문을 내리고 부르니 백설하가 쪼르르 걸어왔다. 그녀는 조수석에 타자마자 환히 웃으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내밀었다.
성필이 그녀의 손 위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그녀를 보았다. 백설하는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왜?”
“선물 주세요.”
“음?”
“휴일에 저 불러내셔서 미안하다고 하셨잖아요. 선물 주신다구요.”
“미안하다곤 안 했는데.”
“아무튼 주세요.”
“설하, 많이 뻔뻔해졌네. 그래, 줄게.”
잠시 후, 성필은 프랜차이즈 카페의 드라이브 스루에서 커피를 한 잔 샀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백설하에게 내밀었다.
“자, 선물. 맛있게 먹으렴.”
“…….”
백설하가 실망해서 눈썹을 늘어뜨렸다.
“쓰읍! 어른이 주면 ‘고맙습니다’하고 받을 것이지. 어디서 눈을 추욱 내리뜨고 있어. 나 때는 말이야, 어른이 주면 홍삼 캔디 받고서도 허리가 90도로 굽혀졌다 이 말이야. 알겠어 모르겠어?”
“금스흡느드…….”
백설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커피를 쪽쪽 빨았다.
그것을 보며, 성필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을 때의 전 여자친구를 떠올렸다. 그녀도 성필이 무언가 잘못을 하면 저런 태도를 취했었다.
성필은 이럴 때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쓰읍!”
“또 왜요.”
“어디서 어른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
“오늘 무슨 컨셉이세요……?”
백설하가 툴툴대며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성필은 글로브 박스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의 허벅지 위에 두었다.
“안 추워? 히터 더 올릴까?”
“괜찮아요.”
“안 춥긴. 너 스타킹 30데니어쯤 돼 보이는구만. 왜 그런 거 신고 왔어.”
백설하의 입에서 커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설하야 너 내 담요?!”
성필이 허겁지겁 티슈를 꺼내어 그녀의 허벅지 위로 마구마구 던졌다. 백설하도 마찬가지로 당황하여 커피를 닦았다.
계속 신경 써주고 싶지만, 신호가 바뀐 터라 성필은 운전에 집중했다.
커피를 다 닦은 백설하가 아연하게 말했다.
“이, 이사님이 데니어를 어떻게 아세요……? 30데니어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스, 스타킹 신으시는 거예요?!”
“아니…… 여자친구 사귀면 보통 알게 되지.”
“아…….”
“소품으로 써서 직접 사보기도 했고.”
“소품?!”
“아무튼, 왜 이렇게 얇은 거 입고 왔어.”
“그으, 스타킹은 잘 안 신어서 몇 개 안 가지고 있는데요. 데니어가 높은 것들은 다 울이 나갔더라구요…….”
“그래, 이왕 꾸미고 나왔으니까 세계만방에 설하의 각선미를 보여주자.”
“어디서요?”
“몰라. 백화점 중앙에서 춤이라도 출까?”
“안 춰요!”
“그리고 설하는 좀 두툼한 스타킹이 어울려. 다리가 얇잖아. 부하게 보일 걱정 안 하고 맘껏 신어.”
“두툼한 건 울이 다 나갔다고 했잖아요?!”
백설하는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요 아래로 손을 넣어 허벅지와 종아리를 만지작거렸다.
‘얇나? 음, 얇지. 계속 다이어트식 유지하고 있으니까. 근데 역시 실제로 볼 때는 지금보다 살이 있는 편이 낫구나…….’
백설하는 다이어트 관련 아이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아이돌 같은 몸 만드는 법’ 같은 제목을 많이 보았었다.
진짜 아이돌인 그녀는 그런 제목을 볼 때마다 ‘아이돌 몸은 별로 안 예뻐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상태에서 5kg 정도만 더 찌웠으면 좋겠다. 아, 근데 그러면 카메라에 찍힐 때는 너무 부하게 보일 텐데.’
“설하야.”
“네?”
백설하가 화들짝 놀라서 답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계속 불렀는데.”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담요 안으로 손을 왜 자꾸 꼼지락대. 뭐 만지고 있는 거야.”
백설하는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성필의 말대로, 수상하게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허벅지 만진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어, 그래.”
“이상한 거 아니라구요!”
“응, 알겠어. 아무튼 뭐, 선물 뭐 받고 싶어?”
“네?”
“선물 주기로 했잖아. 평소에 진짜 가지고 싶었던 거 있어?”
“진짜 사주시게요……?”
“응. 대신 말도 안 되게 비싼 건 안 돼.”
“얼마 정도요?”
“음, 3만 원? 아니, 5만 원? 아니다, 4만 원?”
“애매하네요. 무, 물론 그것만 해도 감사해요. 헤헤……. 저, 그런데 오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구…….”
“안 좋은 소리 나올까 봐 불안해?”
“…….”
“안 좋은 건 아니야. 당부 같은 거니까 마음 편히 있어. 그래서, 갖고 싶은 건 골랐어?”
“음…….”
* * *
성필과 백설하는 대형 마트의 홈 인테리어 코너로 왔다.
여러 가구와 인테리어 상품이 즐비한 곳, 그중에서도 침대나 이불 등이 비치된 장소.
백설하는 그곳에 1시간 동안이나 있었다.
“으음.”
백설하는 49,900원짜리 메모리폼 베개를 들고 이리저리 눌러보았다.
정수리 위에 올려두고 꾹꾹 내려보기도 했다. 그러고도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갸웃하고, 결국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설하야…….”
성필은 한 시간 만에 1년은 늙어 있었다.
“우리 밥부터 먹는 건 어때?”
“조금만요. 이젠 진짜 고를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말 10분 전에도 했어…….”
“으음.”
백설하는 다시 베개 음미 모드로 들어갔다.
그녀가 고른 선물은 베개였다.
자는 것을 인생 최고의 낙 중 하나로 생각하는 백설하다. 그런 만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로 베개를 꼽았다.
백설하가 현재 쓰고 있는 베개는 베개피가 너덜너덜한 정도였는데, 익숙한 편안함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기회가 왔으니, 백설하는 베개를 하나 새로 장만하기로 했다.
“설하야.”
성필은 그녀의 뒤로 다가와 한 베개를 가리켰다. 이 코너에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베개였다.
“이거 어때? 비싼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게 가장 좋지 않을까? 응? 응? 설하야 응?”
“방해하지 마요.”
“어, 미안…….”
멤버들은 자는 것을 방해당한 백설하가 무섭다고 말했었다. 성필은 ‘설하가 무서우면 얼마나 무서울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지금이랑 조금은 비슷하겠지…….’
백설하는 베개에 진심이었다. 그녀의 서슬 퍼런 기운은 프로듀서인 성필마저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백설하의 아우라를 뚫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코너 직원이었다.
성필이 ‘저희끼리 둘러볼게요’라고 말해서 1시간 동안 둘을 지켜보기만 했던 직원이, 드디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직원이 방긋방긋 웃으면서 백설하와 성필을 번갈아 보았다.
“혼수 찾으세요?”
백설하가 손에 들고 있던 베개를 툭 떨어뜨렸다. 직원이 기겁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들어 올리고 먼지를 털었다.
“어, 으에, 그, 그렇게 보이나…… 요……?”
“혼수 아니에요. 감사하지만 저희끼리 볼게요. 베개 떨어뜨려서 죄송합니다.”
성필은 직원을 보내고, 혹여나 직원이 백설하의 정체를 간파한 기색은 없는지 관찰했다.
“설하야, 너무 오래 있었어. 잠시만 다른 데 갔다가…….”
“이걸로 할래요.”
성필이 눈을 크게 떴다.
“정한 거야? 드디어?”
“네.”
방금까지 백설하가 들고 있었으며, ‘혼수 찾으세요?’라는 말에 바닥으로 떨어뜨린 베개.
장미 무늬가 인상적인 49,900원의 베개를 선택했다.
“이거 선물로 받을게요.”
* * *
“개 같이 얻어낸 휴일을 개 같이 쓴다!”
글로브 멤버 ‘노아’가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마찬가지로 글로브의 멤버인 위세라는 활기찬 노아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둘은 오랜만에 얻어낸 휴일을 이용해 쇼핑하러 왔다.
마트에.
“왜 하필 마트야? 다른 좋은 데도 많잖아.”
“저 고향에서 쉬는 날에 마트 자주 갔어. 엄마 아빠랑 같이 가서 재밌게 놀았다! 시식 코너가 가장 신나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여긴 조금만 둘러보고 우리 동대문…….”
“카트 안 끌면 손해이다!”
노아는 힘차게 카트를 뽑고 슝슝 운전하면서 다녔다. 위세라는 그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가, 어이없단 듯 웃으면서 뒤를 따랐다.
“온니.”
“응?”
“‘더 언노운 싱어’ 준비 잘하고 있나.”
“준비랄 것도 없는걸.”
“미팅 갔잖아요.”
“내 예명이랑 가면 디자인만 논의했어.”
“‘오키나와 태양녀’가 된 거네요.”
“그러니까, 그런 걸론 안 한다니까.”
“미래의 스타 배우의 의견을 받지 않는 거, 후회할 거다. 음!”
노아는 식료품 코너 전체에 퍼지는 향기로운 내음에 신음을 흘렸다.
“나의 시간입니다!”
10분 후.
“아, 고향이 그립다. 한국의 마트는 생각보다 볼 게 없어요. 시식 떡볶이 양이 너무 적네.”
“떡볶이 먹고 싶으면 내가 사줄게.”
“뭘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시식을 하고 싶어요! 공짜니까!”
“그래……?”
“이해하나요 온니!”
“으, 음, 음?”
“한다는 건가 못한다는 건가. 한국어 뉘앙스는 아직도 나한테 벽이다. 아니, 벽입니다.”
위세라는 노아에게 대답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믿지 못할 광경이 잡혔기에, 이상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박 팀장님?’
놀랍게도 성필이 보였다.
그 옆에는 한겨울인데도 30데니어 이하의 스타킹을 신은, 그야말로 패션에 미친 듯한 여자가 붙어 있었다.
이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에 저런 차림이라니, 존경스러워질 정도다. 얼마나 남자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한겨울에 저런 꼴로 돌아다닐까.
‘여자친구…… 구나…….’
위세라는 양소민에게 성필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아니, 위세라뿐 아니라 글로브의 모든 멤버들이 성필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성필은 ‘석세스 엔터로 안 가’라며, 너무나도 확고하게 의지를 표했다고 한다.
‘응, 당연하지.’
소녀연맹의 프로듀서가 무엇이 아쉽다고 다시 석세스 엔터로 돌아오겠는가.
……아쉬움이,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위세라는 성필에게 인사라도 할까 고민하다, 그냥 마음을 접기로 했다.
‘이젠 남남이야. 완전히, 영원히 남이야…….’
위세라는 눈을 질끈 감고 뒤로 돌았.
“어, 팀장님이다!”
노아가 카트를 꽉 붙잡고 땅을 박찼다. 그리고 카트 발 받침에 올라타선, 그대로 카트의 가속력을 느끼며 휘잉 미끄러져 갔다.
“어이 박 팀장!”
끼이익, 성필의 옆에서 노아가 카트를 급정지시켰다.
“오랜마…….”
갑자기 옆에서 카트가 훅 나타나자, 백설하가 깜짝 놀라면서 휘청였다. 성필이 그녀의 등을 팔로 받아냈다.
그 충격으로 백설하가 쓴 모자와 선글라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노아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설하…… 선배 아니, 언니, 아니 설하, 어?”
노아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금단의 관계!”
노아가 손발을 저으면서 자신의 충격을 온몸으로 표했다. 그녀는 뒤로 돌아 위세라에게도 자신의 충격을 보여주려고 했다.
“온니, 박 팀장님이……!”
위세라는 이미 충격받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이, 이래서 안 돌아오신 거야?’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겨울철에도 패션을 포기하지 않는 여자 때문에?!
‘……잠깐.’
위세라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폰을 찾는 것이었다.
‘이, 이걸 사진으로 찍으면 협박할 수 있어.’
위세라는 폰을 꺼내어 사진 어플을 켜려 했다. 손가락이 떨려서 액정을 정확하게 누르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 사진만 있으면 팀장님한테 내가 원하는 거 다 시킬 수 있, 아니!’
위세라가 도리질 쳤다.
‘내가 원하는 걸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 우리 사랑하는 글로브 멤버들을 위해서!’
그녀의 카메라 렌즈가 성필과 백설하에게로 향했다.
‘혀, 협박, 협박할 수 있어…….’
위세라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