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백설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관중이 놀라는 건 당연하고, 연예인 판정단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실은, 연예인 판정단은 대본을 이미 보았기에 백설하가 왜 ‘니케’의 가면을 썼는지 알았다.
[사실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는 이전 회차에 나오셨던 ‘승리의 여신 니케’, 글로브 세라 씨의 친구로…….]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렸다.
친구를 위한 복수전임이 사방으로 선포됐다.
‘더 언노운’ 결정전이란 것만으로도 흥분하기 충분했지만, 감칠맛을 더해줄 스토리까지 추가됐다.
관중이 더욱 열광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백설하는 관중석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주 짧은 시간 어둠만이 주변을 휘감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무것도 없었다.
백설하는 무(無)의 공간에 서 있었다.
‘나만의 방.’
어릴 적 이인성이 해주었던 조언은 아직도 백설하에게 유효했다.
데뷔 무대. HPT 뮤직 어워드. 뉴아사 경연. 일본 데뷔 쇼케이스.
이런 떨리는 무대에서도 백설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순간만은 동요하지 않았었다.
사방을 감싼 벽은 모든 변수를 지운다.
‘오직 노래하기 위한.’
나만의 방.
이 방 안에서 백설하는 오직 노래 부르기 위해 태어난 생명체로 변모한다.
모든 신진대사와 신체 작용은 노래라는 단 하나의 행위만을 갈구한다.
몸이 울리는 게 느껴진다.
‘노래해!’
발끝에서부터 퍼져 오르는 강렬한 욕망이 혈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혈관을 질주하는 욕망은 가슴에 이르러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성도를 빠져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단 기대로, 욕망은 간신히 제자리를 지키며 인내한다.
[‘노래도 잘하는 귀여움 천재’의 결선곡은……!]
팝스타 켈리 클락슨의 ‘Stronger’.
백설하는 켈리 클락슨을 좋아했다. 어렸던 백설하에게 그녀는 마치 신데렐라와 같은 인물로 보였었다.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1의 우승자.
시골 출신으로 아르바이트하면서 연명했던 이가 갑자기 미국에서 주목받는 스타가 된 것이다.
하지만 탄탄대로가 펼쳐지진 않았었다.
너무 빠르게 얻은 유명세 때문일까, 비평가들은 켈리 클락슨을 물어뜯기 바빴다. 어떤 음악적 성과에도 헐뜯을 점을 찾아냈다.
게다가 그녀를 나쁘게 보는 이들은 그녀가 너무 못생겼으며, 살도 많이 쪘다며 인신공격을 멈추지 않았었다.
그래서일까, 켈리 클락슨의 가사엔 자전적인 내용이 많다.
자신의 아픔을 그대로 드러낸 가사는 백설하의 가슴에도 큰 울림을 주었었다.
‘너를 죽이지 못하는 건 너를 더 강하게(Stronger) 만들어.’
백설하는 ‘Stronger’의 가사를 곱씹었다.
후일 한구인에게 듣길, 아마 니체의 말을 차용한 듯하다고 했었다.
‘나의 우상…….’
어릴 적의 백설하는 켈리 클락슨과 같이 신데렐라가 되길 바랐었다.
하지만 커서는, 그녀가 신데렐라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켈리 클락슨은 화려했다.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듯하다. 찬란하게 빛나는 팝스타였다.
하지만 훗날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 찬란한 시절이 가장 죽고 싶은 순간이었다고 말했었다.
백설하가 바랐던 신데렐라와는 거리가 멀었다.
‘살을 계속 빼고, 외모를 가꾸고, 노래를 연습하면서, 자신을 상처입히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옛날에 그 인터뷰를 읽었을 땐 막연히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 이르러 곱씹으니, 느끼는 바가 전혀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빛을 품은 것만 같은 팝스타도, 죽을 만큼 노력해서야 빛날 수 있는 거야.’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두 쥐어 짜내야 겨우 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난 켈리보다 훨씬 못해.’
더 희미한 재능을 타고난 주제에, 가진 걸 제한하면서 싸울 수는 없다.
백설하는 행복하길 바란다.
그녀의 행복이란, 그녀가 자신 있어 하는 노래를 모든 사람이 관심 가져주는 것이었다.
노래가 삶이기에,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사람들이 보아주길 바랐다.
‘켈리도 그랬겠지. 사람들이 외모나 얼굴을 지적하기보단, 노래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을 거야.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외모를 가꾸면서도, 사람들을 원망했을 거야. 나는 가수인데 왜 노래에 집중해주지 않느냐며…….’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세라 말이 맞아.’
노래만 잘 부르는 이들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 다른 부분도 뛰어나야 스타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백설하는.
‘나는 아이돌을 동경해서 아이돌이 됐잖아.’
돌이켜보면, 백설하가 어릴 적에 아이돌을 좋아했던 이유는 노래만 잘 부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이돌이 빛나기 때문이었다.
아이돌의 모든 건 마치 잘 꾸며진 어항의 안처럼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해서, 어렸던 백설하가 동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백설하가 결연히 다짐했다.
‘된다.’
존재 자체가 찬란하기 그지없는 별.
모든 것이 완벽하여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우상.
백설하는 그것을 동경하여.
‘아이돌이 된다.’
이 무대는 24년 인생의 결산.
별이 되기 위해 태어난 백설하가, 마침내 별이 될 자격을 얻었는지 확인받는 자리.
‘선생님, 봐주세요.’
나의 아이돌리즘.
* * *
이인성이 ‘더 언노운’ 싱어에 출연했단 것을 인지하고, 백설하는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아이돌이 못 됐다면,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할까?’
물론 백설하는 소녀연맹 이전에도 아이돌로 활동했었다. 그땐 정말 세상을 모두 가진 것만 같았다.
나이가 차서 회사를 나가는 언니들을 많이도 보았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어린 백설하의 가슴에는 검은 찌꺼기가 쌓여갔다.
10대 중반의 백설하는 나이 듦이 두려웠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을 나이, 하지만 그녀에게 웃음이란 없었다. 웃을 수가 없었다. 회사를 나가며 언니들이 남긴 눈물이 입꼬리에 걸려서 무거웠기에.
그런데.
‘데뷔조로 뽑혔어! 엄마 나 아이돌 돼!’
정말이지, 그렇게 기쁜 날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백설하는 선생인 이인성을 보게 되면 전할 감사를 수십 페이지 분량 쓰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백설하는 다시금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필이 그녀에게 연습생이 되길 권해왔었다.
만약 그때 거절했다면.
‘죄송합니다.’
그 말과 함께 단칼에 성필의 제안을 거절했었다면, 백설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텔레비전에 나온 스승을 보면서…….
‘후회했겠지.’
이인성을 볼 낯짝 따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백설하는 계속 보컬 트레이너로 일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한 푼 두 푼 모아 인디 앨범이라도 발매하겠답시고 아르바이트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이돌을 덕질하는 것으로 대리만족할 가능성도 있다.
그 무엇이든, 백설하는 영원히 어둠 안에서 살았을 것이다.
‘이사님, 감사합니다.’
이 순간 무대에 올라 주저함 없이 스승과 대면할 수 있는 건 모두 성필 덕분이다.
그가 권해줬기에 아이돌이 됐다.
꿈에도 그리던 아이돌이 됐으니, 아이돌로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노래 부른다.
[너를 죽이지 못하는 건 너를 더 강하게 해.]
‘Stronger’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
백설하가 세운 벽을 향해 관객의 감탄이 파도처럼 쳐들어왔다.
그럼에도 벽은, 백설하는 흔들리지 않았다. 우직하게 서서 노래 부른다. 오직 노래만을 위해 이곳에 서 있기에.
‘첫 번째 하이라이트는 좋았어.’
숙련된 가수는 첫 음을 내뱉자마자 노래의 성패를 알 수 있다.
백설하는 처음부터 성공이라고 느꼈었다.
‘하지만, 부족해.’
부족하다.
백설하는 더 높은 곳을 갈구한다.
‘부르기에 음정이 높은 노래는 아니야.’
옛날부터 죽어라 불러왔던 노래다.
입에 익을 대로 익어 있다.
그러나 숙련했음이 곧 완벽하단 뜻은 아니다.
‘중요한 건 댐핑이야.’
댐핑, 가수로서 목소리에 담는 힘을 뜻한다.
그건 성량이나 음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노래에 담기는 가수의 에너지이자 파워. 가수로서의 격을 나타내는 힘 자체이다.
‘켈리의 댐핑을 발끝이라도 따라가려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호흡(呼吸).
백설하의 흉곽이 팽창했다.
어릴 적부터 흉복식 호흡을 연습해왔던 백설하는 최적의 양만큼만 공기를 빨아들였다.
내뱉는 숨결에 목소리를, 에너지를 담는다.
그리고 내지른다.
‘됐다.’
노래하기도 전에 백설하는 성공을 예감했다.
아니, 예지(豫知)했다.
목에 피가 맺히도록 거듭한 노력.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쌓아간 경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왔던 연습.
이 모든 건 백설하에게 완전무결한 자기 확신을 부여한다. 미래 예지에 버금가는 확신을.
‘보인다.’
백설하는 몇 초 앞을 바로 눈앞에 잡힐 듯이 느낄 수 있었다.
투명한 벽 넘어서 입 벌리며 경악하는 관중의 파도가 보인다.
‘아니, 들려.’
여기저기서 내지 못해 안달인 감탄이 연달아 귀를 파고든다.
그것은 밤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은하수였다. 백설하를 향해 추락하는 동경의 물결이다.
백설하는 폐가 갈라지도록 노력을 거듭했던 자신을 믿는다. 그랬기에 몇 초 후 자신이 어떻게 노래 부를지,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안다.
두려움 없이 확신할 수 있다.
사람들은.
[너를 죽이지 못하는 건 너를 더 강하게 해!]
열광한다.
백설하의 노래를 계명처럼 받아들이며 더 없을 지복을 느낀다.
그녀의 노래는 사람들의 귀로 파고들어 혈관의 가장 구석까지 파고들어 전율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백설하도 들었다.
자신이 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던 노래를.
역사에 이름을 새긴 팝스타에 근접했던 자신의 댐핑을.
그녀의 등골에도 번개가 내달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순간에 닿기 위해 노래를 불렀구나.’
이 경지를…….
‘아니.’
백설하는 부정했다.
‘아직 더 나아갈 수 있어.’
더 높은 곳을 바란다.
겨우 이 정도로는 스승을 이길 수 없다.
팝스타에 근접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곡은 브릿지에 들어서고, 파이널 하이라이트로 다가간다.
마지막 기회다. 모두의 귀에 아로새길 최고의 노래를 할 마지막 기회.
백설하는 직감했다.
지금 자신으로선 스승에게 이를 수 없다.
그러니, 이 순간 성장해야 한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던 걸…….’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인성의 가르침을 바로 이 순간 전부 체득해야만 한다.
브릿지 파트가 끝나는 20초 이내에.
* * *
성악이란 인간의 성대를 악기처럼 다루는 기술이다.
성대는 선천적으로 노래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다. 그렇기에 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악기인데요?”
“응?”
“어떤 악기로 바꿔요?”
“이야,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거네. 굳이 따지자면 파이프 오르간이 비슷하겠다.”
“파이프 오르간?”
“파이프 오르간에는 윈드체스트라는 게 있거든. 바람이 든 상자야. 우리 몸 중 뭐랑 비슷하지?”
“사랑이요! 엄마가 사랑은 바람 같대요!”
“아…… 그래, 사랑 중요하지. 우리 몸의 장기 중에 뭐랑 비슷하지?”
“음, 폐요!”
“맞아. 그 윈드체스트에 관을 박아서 바람을 부우우 나오게 하면 소리가 나와. 그 관은 우리 목이랑 비슷해. 어때, 파이프 오르간?”
“비슷해요!”
“윈드체스트란 건 기계가 계속 바람을 넣어줘서, 얼마든지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게 하거든.”
“그럼 폐랑 다른데요?”
“응?”
“폐는 계속 바람이 원하는 만큼 들어오지 않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폐를 윈드체스트처럼 만들어야지.”
“에이, 사람은 기계가 아니에요.”
이인성은 싱긋 웃고는 바로 섰다.
“백설, 잘 들어. 지금부터 하나하나 설명할게.”
자세(姿勢).
“공기가 들어오는 통로를 열어.”
호흡(呼吸).
“공기를 들여보내.”
발음(發音).
“소리의 문을 열어.”
발성(發聲).
“소리를 올려.”
공명(共鳴).
“소리를 담고.”
흉부공명.
비강공명.
두성공명.
“그리고.”
전신공명(全身共鳴).
이인성의 몸은 기계가 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는 정교한 기계로, 그의 몸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작용했다.
끝도 없이 이어질 듯한 우렁찬 음성은 강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백설하는 그 목소리에 흘려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마침내 찾아온다.
스모르찬도(꺼져가듯이).
백설하는 침묵이 찾아오고 나서야 이인성의 입이 닫힌 것을 깨달았다.
“와, 와아…….”
백설하가 이인성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성추행이얏!”
“이렇게 작은데, 공기가 어떻게 그렇게 많이 들어가요? 폐 대신 윈드체스트가 든 거예요?”
“굉장한 칭찬이네. 고마워. 음, 요컨대…….”
이인성은 좋은 말이 떠올랐다는 듯 빙긋 웃었다.
“태양을 삼켜라! 그리고.”
* * *
빛을 노래하라.
백설하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녀의 폐는 파이프 오르간의 바람 상자처럼 공기로 가득 찼다.
엔진이 상자에 공기를 불어 넣는 것처럼, 백설하의 폐 또한 기계처럼 공기를 들이켰다.
원래 이래선 안 된다. 인간의 폐란 이렇게 작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상태를 마주하고, 뇌는 명령을 내린다.
그만해라.
‘아니.’
생존을 위한 뇌의 명령을 무시할 수 있을 것.
자신의 신체를 온전히 통제할 것.
그렇게 노래할 것.
세상은 이 기술을 이렇게 부른다.
성악(聲樂).
백설하의 가슴엔 태양이 있다.
그래서 무한정으로 빛을 쏘아낼 수 있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형형색색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소리의 빛깔.
[Stronger―!]
생존에 불필요한 기술.
하지만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실전(失傳)된 적이 없는 기술.
백설하의 위로 수만 명의 천재가 노래라는 기술을 이어오고 발전시켜왔다.
그녀는 노래란 기술의 첨단이자 총아였다.
진화의 끝 가지에 이른 그녀의 노래는 세상을 밝히고 인간의 머리에 불을 지른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모든 가수들이 닿길 바랐던 경지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아아…….’
가면 안의 백설하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곁에 누군가 서 있다.
스승이다.
항상 그의 등만을 보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백설하의 바로 옆에 있다. 그렇기에 백설하는 스승이 보는 광경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거네요…….’
이게 바로, 이인성이 보아왔던 풍경이다.
‘이런 세계에 살았으니, 선생님은 그렇게나 노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거네요…….’
마침내 스승의 곁에 서서, 스승이 바라보았던 풍경을 보게 된 백설하는.
‘그런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가 끝이 아니야.’
옆에 서 있던 스승의 모습이 사라진다.
그리고 백설하가 마주한 건 투명한 벽이었다. 무대에서 그녀를 무(無)의 공간으로 데려다주었던 벽.
이 벽을 상상할 수 있기에, 백설하는 불안하여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무대들도 버텨냈었다.
‘안 돼.’
나가야 한다.
백설하는 벽을 부수고 더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자 자신의 노래만으로 가득했던 세계가 부서진다. 그녀는 태어나기 위해 아늑했던 하나의 세계를 부쉈다.
벽을 넘자 백설하를 덮친 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소음과, 피부를 따갑게 찌르는 수백 명의 시선이었다.
‘설하야, 노래는 언어야.’
성필이 말해주었다.
‘너는 아티스트로서 노래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거야.’
성필이 알게 해주었다.
‘너만이 할 수 있는 말을.’
노래는 언어다.
소리를 매개로 마음을 전하고 또 받기도 한다.
성필이 알려주었고, 콘서트에서 이해하게 됐다.
언어를 전하기 위해선, 먼저 들어야 한다.
‘청중은 가만히 듣기만 하지 않아.’
그들의 시선과 무심코 내는 소리는 공기에 섞여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언어와 다르지 않다.
무대에 선 백설하는 처음으로 관객에게 노래를, 말을 건넬 뿐만 아니라 듣게 됐다.
느껴진다.
‘노래 잘 부른다.’
‘와, 이거 뭐야.’
‘누구지?’
‘벌써 끝나나?’
‘하이라이트 한 번 더 있으면 좋겠다.’
‘계속 가만히 서 있는 건가?’
‘가슴 크다.’
‘이쪽 봐줘.’
‘여기서 끝내는 건 아쉬운데.’
‘이 사람이 더 언노운 됐으면 좋겠어.’
‘가슴 크다.’
‘눈물 날 거 같아.’
사람들은 하고픈 말을 전부 하고 살지 못한다. 하지만 눈빛에 담긴 감정마저 숨길 수는 없다.
무대에 선 퍼포머는 관객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단순히 성악만으로는, 갈고 닦은 기술을 선보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나는 아이돌이니까.’
성악을 넘어 필요한 건.
‘퍼포먼스.’
벽을 넘은 백설하는 스승을 뒤로 두고 앞으로 나아간다. 스승에게 받은 것을 발판 삼아 앞으로, 더 앞으로.
* * *
위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백설하의 무대를 감상했다.
그녀는 노래만 부르지 않았다.
걸음 한번, 손짓 한번이 관중의 마음을 빼앗는다. 부자연스럽지 않은 제스처로 관중의 시선을 모은다.
무대 매너, 라는 것이다.
위세라는 그에 관해 윤상열에게 배운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서양 놈들은 이상한 거에 집착하는데, 유학하면서 수업 들을 때 이상한 강의가 있었지. 여학생 한 명에 남학생 세 명을 붙여놓는 거야. 그리고 남학생들에게 여학생을 유혹할 걸 지시했어. 차례로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그리고 여학생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가진 남학생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지. 후엔 남녀를 바꿔서 했고.’
‘윤 PD님은 A 받았나!’
‘……별 희한한 교수도 다 있다고 생각했지. 학기가 끝나곤 그 교수한테 분명 노래 수업인데, 그건 대체 뭘 위한 거냐고 따졌었지.’
‘A 못 받았나!’
‘……그랬더니 평가 항목을 보여주더군.’
평가했던 건 무대에서 보일 수 있는 아우라였다. 인간의 관심을 끄는 능력.
미국의 모든 실용 음악 학교에선 이러한 평가 항목이 존재한다.
항목의 이름은.
‘존재감(Presence).’
대중음악 퍼포머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
위세라는 백설하에게서 존재감을 느꼈다.
그 의미를 절절히 알게 됐다.
‘진짜 팝스타 같아…….’
팝스타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재연되지 않을까.
위세라는 멍하니 그리 생각했다.
백설하의 존재감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아니, 근데 나랑 같은 가면 쓰고 있는데 너무…….’
나랑 너무 비교되잖아…….
위세라는 백설하가 지닌 존재감의 일부를 보면서 은근한 패배감을 억눌렀다.
[Stronger―! Stronger―!]
* * *
에리카와 진저는 숙소 탁상에 마주 보고 앉아 함께 컬러링북을 연습했다.
며칠 후 케이어스 채널에 올라갈 브이로그를 위해 미리 해보는 것이었다.
“진저.”
에리카가 진저를 불렀다.
진저는 열중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컬러링북에 박듯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색연필로 열심히 색칠하면서 답했다.
“왜 그러심미까.”
“박 이사님이 네 노래 듣고 우셨을 때 있잖아.”
“또 그검미까…….”
“나한텐 중요한 일이야. 그때 박 이사님 어떠셨어?”
“어떠셨냐니, 무슨 뜻임미까.”
“상태라거나.”
에리카는 끝끝내 성필을 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문제의 원인을 성필의 상태에서 찾기로 했다.
“으음.”
진저는 색연필 끝을 입에 물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곤 말했다.
“박 이사님이 우실 때, 그 표정은 뭐랄까…….”
진저는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계속 보고 싶은, 그런 표정이었슴미다.”
“성인 남자가 우는 걸 보고 싶어? 아…… 미래의 애인에게 용인받기 힘들 취향을 가졌구나. 뭐, 잘 찾아보면 있을지도.”
“그런 뜻이 아님미다!”
진저는 허둥지둥 부정하더니, 언어를 살짝 더 다듬었다.
“울면서 웃고 계셨는데. 으웅…… 그으으, 누군가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할 수 있으면, 나도 노래를 헛으로 연습한 건 아니었구나…… 나도 조금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슴미다. 그래서, 계속 그 표정을 짓게 만들어주고 싶은…….”
에리카는 진저의 횡설수설을 듣다가, 그냥 이해하길 포기했다.
애초에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꼭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재잘거리니 말이다.
빛이 들어오는 발코니 창을 바라보던 에리카는, 문득 컬러링북에 적었다.
[케이어스 내 울리고 싶은 남자 순위 1위, 박성필]
그것을 본 에리카가 피식 웃었다.
‘그래, 더 오기가 생기네.’
계속 짓게 만들어주고 싶을 만큼 대단한 표정이란 거지?
* * *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선 백설하는 가면을 벗었다. 머리카락은 물론 얼굴 전체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면을 옆구리에 끼고 터덜터덜 대기실로 향하는 도중, 그녀의 시야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래를 보고 걷던 그녀는 앞을 가로막은 그림자 때문에 안 그래도 피곤한 고개를 위로 들어야 했다.
백설하는 깜짝 놀랐다.
“박 이사님……?”
성필이 울고 있었다.
아니, 계속 눈가를 닦으면서 그치려고 노력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듯했다.
그의 미소에 별 같은 눈물이 자꾸만 걸렸다.
“설하야.”
“네, 넵!”
백설하는 자기도 모르게 똑바로 섰다.
성필이 말했다.
“너, 노래 정말 잘 부르더라.”
“아, 네…….”
“아이돌이 되어줘서 고마워.”
성필은 전생의 백설하를 기억한다.
그녀는 오랜 암흑기를 마치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당당하게 가수로 데뷔한다. 백설하가 좋아하는 팝스타인 켈리 클락슨처럼.
눈물을 흘리며 준우승을 달성했던 그녀는, 이후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간다.
가요계의 신성이 되었을 백설하다.
“정말, 아이돌이 되어줘서 고마…….”
백설하가 성필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성필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백설하가 웃었다.
“이사님한테 감사 들을 이유 없어요. 제 꿈인데, 아이돌이 돼줘서 고맙다뇨. 제 꿈을 이룬 걸로 다른 사람한테 감사받는 건 이상해요.”
백설하는 성필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것보다, 저 어땠어요?”
성필은 입술을 떨다가, 도저히 지금의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소만 보였다.
눈물이 함께 걸린 미소였다.
그것을 본 백설하도 마주 미소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성필의 표정은 그늘이 드리울 구석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기에, 같은 미소 외엔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사님의 이런 표정을 볼 수 있을까.’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의 성필을 눈에 잘 담아둬야겠다.
‘내가 꿈을 이뤘다는 증표로.’
영원히 백설하의 가슴에 남을 것이었다.
둘이 선 대기실 밖엔 녹화 무대에서 들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더 언노운 싱어’의 트레이드 마크인, 연예인 판정단의 호들갑 섞인 무대 평가였다. 하지만, 평소보다 판정단이 흥분해 있는 건 확실했다.
귀가 붉어질 정도로 칭찬 일색인 판정단의 코멘트를 배경으로, 두 명의 남녀는 오래도록 서로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