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02화 (402/760)

402화

리카는 한구인이 보았다면 바로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엉망인 경례를 해보였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 던진 뒤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전에 박 이사님이 아타시(저)를 간호해주셨을 때를 참고해서 여러 가지 들고왔……!”

리카는 안방으로 들어선 순간 숨을 헛쉬었다.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벽에 걸린 커다란 성필의 바디 프로필이었다.

“저거, 저거, 저거, 콘나(이런)……!”

“아!”

성필은 당황하면서 바디 프로필이 담긴 액자로 다가갔다. 그것을 어떻게든 내리려고 했지만, 무게가 있는 데다가 크기가 커서 혼자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

“미안 보기 좀 그렇지. 바로 치울…….”

“도케(비켜)!”

리카가 성필을 밀어내고 액자 앞에 섰다.

액자 안에 담긴 사진은 명실상부 성필이었다.

전신 탈의한 성필이 허리에 수건 한 장 둘러멘 게 전부였다. 그의 몸은 방금 샤워한 것처럼 물방울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리카는 어찌나 충격받았는지 입술까지 바들바들 떨었다.

“이, 이거 정말 이사님?!”

“방금 날 ‘이거’라고 불렀냐?”

“두꺼운 코트 안에 이런 걸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 것보다 바디 프로필 촬영에 부른다면서 왜 안 부르셨나요!”

“부른단 말 한 적 없어.”

성필은 창피한 터라 괜히 어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리카는 바디 프로필과 성필의 실물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곧 성필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녀가 허공에 대고 손을 주물거리는 시늉을 했다.

“너 임마 그거 진짜 성희롱이야!”

“그, 그 후리스 안에 수박을 숨기고 있는 건가요!”

“진짜 내가 웬만하면 천박하단 생각은 안 하는데, 수박은 너무 천박하잖아…….”

“이 정도면 아라쨩보다 바스트가 커요! 확실해요!”

이럴 수가.

성필은 리카의 언어 사용 행태를 듣고 충격받았다.

‘내가 권강철 트레이너님 흉부를 볼 때마다 한 생각을, 리카는 나를 보고 하고 있잖아?’

자신이 그만큼 운동을 열심히 한 걸까.

“만져보면 단언할 수도 있어요!”

“너 나 간호해주러 왔다면서. 이제 그만하자.”

“간호하려면 역시 얇은 옷을 입으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 어바이비 1층에서 산 것 같은 30,000원대 후리스는 벗어버리세요!”

“리카, 너 방금 선에 발끝 살짝 걸쳤어.”

“에에.”

리카는 실망한 티를 냈지만, 금세 기력을 되찾았다.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백팩을 풀곤, 안에서 죽이나 과일 같은 것들을 꺼냈다.

“오늘 이사님의 원기를 되찾아드릴게요!”

“근데 나 거의 다 나았어.”

“손나(그런)!”

“한두 시간 놀다가 가.”

“그럼 저를 왜 부르신 건가요!”

“네가 왔잖아.”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놀죠!”

리카가 백팩의 가장 아래에서 보드게임 박스를 꺼냈다.

“이사님이 좋아하실 만한 걸 가져왔어요!”

라고 말한 리카는, 뒤로 흘끔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성필의 바디 프로필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성필은 피식 웃었다.

“나도 볼 때마다 신기하긴 해. 리카, 사장님이랑 한 이사님 사진도 볼래?”

“볼래요 볼래요 볼래요!”

성필은 책상 서랍을 뒤져 포토 앨범을 꺼냈다.

“헤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계시네요!”

“그날 찍은 사진은 대부분 현상했거든.”

“사장님이 궁금해요! 1년 365일 정장으로 몸을 가리고 다니시는 사장님의 맨몸은 어떨지 항상 궁금했어요! 그래서일까요, 사장님의 목덜미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아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리카는 홍규헌의 목덜미에 관심이 많았다.

홍규헌에게 ‘목덜미가 예쁘시네요!’라고 하거나, 목덜미를 만지게 해달라거나, 그런 기이한 언행을 보이곤 했었다.

“뭐, 사장님 목덜미 많이 봐.”

“기대되……!”

하이힐, 정장 바지, 그리고 검은 브래지어를 찬 홍규헌이 하드보일드한 포즈로 한 손에는 정장 재킷을 흘리듯이 들고 있었다.

“엣찌(음란)! 아니, 바디 프로필도 정장인가요!”

“무슨 게임에 나오는 보스 캐릭터 같지 않아?”

“에에…….”

“뭐야, 정장 벗은 사장님 보고 싶었던 거 아니야?”

“기대했던 건 맞지만, 뭐랄까요…….”

리카는 홍규헌의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솔직히, 대단하단 생각밖에 안 드네요.”

검은 브래지어만 걸치고 상체를 드러낸 모습은 그야 파격적이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흥분은 없었다.

“사장님도 열심히 노력하셨네요! 아타시(저)도 운동 오래 해봐서 알아요! 이렇게 갈라진 근육을 만드는 건 정말, 정말로 어려운데…….”

“대단하시지 정말.”

“사장님을 더 존경하게 될 거 같아요! 속옷 차림을 봐도 엣찌(음란)한 생각이 하나도 안 들어요!”

“그래?”

성필이 다음 장으로 넘겼다.

검은 속옷만 입은 홍규헌이 뒤돌아 서 있었다. 한쪽 둔부에 손을 올리고.

“이건 진짜 엣찌(음란)한데요?! 이, 이 팬티는 뭔가요!”

하이레그라는 것으로, 팬티의 끈이 골반 위까지 올라오는 물건이다.

“사장님이 이런 걸 자진해서 입으셨다구요?! 정말 말도 안……!”

경악하던 리카는, 성필의 바디 프로필을 다시 보더니 안정을 되찾았다.

“허리에 수건만 두른 박 이사님도 계시니까요!”

“뭘 혼자 납득하고 있어.”

“이사님은 자기애가 대단하세요!”

“사실 우리 바디 프로필 컨셉은 스스로 정한 게 아니야.”

“에?”

“서로 다른 사람이 정해주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사장님 복장은 나랑 한 이사님이 정해드린 거야.”

“…….”

“뭐.”

“…….”

“뭘 봐.”

“…….”

“내가 허리에 수건만 두른 건 안 이상하냐?!”

“사장님에 대한 존경이 사라질 거 같아요……. 부하한테 저런 복장을 입히다니…….”

리카는 다시금 성필의 바디 프로필을 보면서 전율했다.

“이게 사장님의 판타지!”

“한 이사님은 왜 빼.”

“한 이사님이 추천한 건가요?!”

“참 짓궂으신 분이지.”

“그렇게 따뜻하게 웃지 마세요! 장르를 착각해버릴 거 같아요!”

리카는 홍규헌의 사진을 차례로 넘겨보았다. 항상 정장으로 몸을 한 군데도 남김없이 가리고 다니는 이의 맨살을 보아서 그럴까, 리카는 배덕감마저 느꼈다.

“이제 사장님 사진은 그만 보고 싶어요!”

“한 이사님으로 넘어갈까?”

“하이(네)!”

과연 한구인은 어떤 컨셉일까.

‘박 이사님이 수건으로 허리에 두르셨으니까, 한 이사님도 그거랑 비슷할까?’

홍규헌의 예를 보자면, 드로즈만 입고 있을 수도 있겠다. 속옷만 입는 것도 바디 프로필의 흔한 컨셉 중 하나니까.

리카는 기대감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겼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승마용 장화를 신은 팬티 차림의 한구인이 보였다.

그는 마찬가지로 카우보이가 쓸 법한 권총용 홀스터만 허리에 덩그러니 메고 있었는데, 고간 근처에 손을 느슨하게 올린 모습이…….

“이건 진짜 포르노그래피잖아요?!”

“으하하하핰!”

성필은 리카의 반응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성 잡지 코너에 가면 베스트셀러 1위로 있을 법하잖아요! 한 이사님이 아무런 저항도 안 하셨나요?!”

“가장 마지막 차례셨거든. 사장님이랑 나한테 한 짓이 있으시니까 당연히 저항하면 안 되지.”

“불쌍한 한 이사님…….”

그런데 이건 진짜…….

“한 이사님, 배우 하시면 부자되실 텐데…….”

“너도 그렇게 생각해?”

“박 이사님도?”

“한 번 배우 매니지먼트도 시작해봐?”

“새로운 가로 엔터의 기둥이네요!”

“기둥이란 단어는 너무 희롱적인 의미가 강하지 않아?”

“정말 창의력 대장이시네요! 한 이사님도 혀를 내두르셨을 거예요!”

이후 한구인의 복장은 정상적으로 변했다.

군복 바지만 입고 상의 탈의 상태라던가, 무난하게 속옷만 입고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이라던가.

“제가 이런 걸 봐도 되는 걸까요.”

“왜?”

“회사에서 높으신 분들이 까고 계신 모습이잖아요!”

“그럼 그만 볼래?”

“더 볼래요! 하이라이트가 남았잖아요!”

다음 챕터는 드디어 성필의 것이었다.

리카는 눈빛에 기대감을 한껏 담아 페이지를 넘겼다. 해병대 정복 바지에, 그 위엔 상의를 탈의하고 정복 재킷만 걸친 성필이 있었다.

“오오, 세쿠시(섹시).”

“무적 해병 박성필, 여기 강림.”

“그런데 손이 좀 애매하게 노는 거 같아요! 차라리 주머니에 넣었으면 더 멋졌을 거예요!”

“차마 주머니에 입수(入手)는 못 하겠더라.”

“도시테(어째서)?”

“군인은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면 안 돼. 솔져 스피릿이라고 할까.”

“이상한 규칙이네요!”

“군인이 껄렁해 보이면 안 되니까.”

“바디 프로필이니까 괜찮을 텐데요! 헤에.”

리카는 감탄하면서 성필의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성필 실물을 보았다.

“헤에.”

“너 눈빛이 음흉해.”

“실례네요! 순수한 감탄이라구요! 박 이사님이 저희 무대 의상을 보고 감탄하는 거랑 같아요!”

“너 내 가슴만 보고 있잖아.”

“흉근이에요!”

“은근히 나쁜 기분이 아니네. 정말 트로트 아이돌이라도 해볼까.”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 그럼 아타시(제)가 프로듀싱할게요!”

“오, 기대되는데. 컨셉은?”

“짐승돌!”

“먹힐까?”

“타깃은 30대에서 40대분들이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트로트계의 별이 되는 거예요! 보컬 트레이닝보다는 근육 트레이닝이에요!”

“타깃층이 아주 확실하네. 프로듀서로서 재능이 있어.”

성필은 앨범을 덮었다.

“이제 그만 보자.”

“사진 몇 장 주시면 안 되나요!”

“부끄러워서 안 돼.”

“많으니까 한두 장 정도는 괜찮잖아요!”

“안 돼. 내 추억들이야. 보고 싶으면…….”

성필이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리카가 웃으면서 그의 말을 이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이사님 집에 찾아오면 되나요!”

“……아니, 그래. 한 장 정도씩은 줄게.”

성필은 홍규헌, 한구인, 자신의 사진을 한 장씩 꼽아서 리카에게 주었다.

“소중하게 여겨줘.”

“맡겨두세요!”

리카는 말 그대로, 성필에게 받은 사진들을 아주 소중하게 보드게임 박스 안에 넣었다.

시간이 꽤 지났기에 두 사람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제가 해드릴게요! 간호하러 온 거니까요!”

“아냐. 내가 할게. 손님한테 요리시키는 건 미안하잖아.”

“그러고 보니 박 이사님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해주세요!”

잠시 후, 주방에서 고기 굽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리카는 냄새만 맡고도 침이 고일 정도였다.

“자, 맛있게 먹어.”

메뉴는 구운 돼지고기와 샐러드, 밥이었다.

김치도 쌈장도 없었지만, 리카는 고기를 보곤 눈이 돌아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잘 먹겠습니다!”

리카가 해맑게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 바로 뱉었다.

“맛없어어…….”

“뱉으면 어떡해?!”

“이, 이게 무슨 고기인가요 대체? 어떻게 돼지고기가 이렇게 맛없을 수 있나요? 돼지고기가 아니라 닭 머리나 쥐꼬리 고기인가요……?”

“돼지 뒷다리살이야. 좀 퍽퍽하긴 한데, 먹다 보면 먹을 만해.”

“헬스 식단이었나요! 친구한테 이런 걸 먹이는 건 대접이 너무 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먹기 싫으면 내가 먹고.”

“으우…….”

휴가가 시작되고 입이 고급스럽게 변한 리카는 간이 전혀 되지 않은 식단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필이 해준 것이니 군말하지 않고 전부 먹었다. 괴로운 식사를 마친 리카는 소처럼 드러누워 방 안을 눈으로 살폈다.

그러던 도중, 책장 가장 아래에 있던 체스판이 눈에 띄었다.

“박 이사님 체스도 두시나요!”

“뭐라고?”

설거지하던 성필은 리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니에요!”

리카는 성필이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미리 체스판을 꺼내서 말들을 배열했다.

성필이 설거지를 끝내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체스판 앞에 앉은 리카의 모습을 보았다.

“이사님, 체스도 두시나요!”

“…….”

“의외예요! 이사님 집에도 보드게임이 있었네요! 저 초등학생 때는 반에서 체스를 가장 잘하는 애였다구요! 에헤헤, 체스를 둘 줄 아는 애가 저밖에 없긴 했…… 이사님?”

리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성필은 무표정이었다. 리카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리카는 그런 성필의 모습이 익숙지 않아 당황스러웠고, 또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고,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멋대로 꺼내면 안 됐는데. 바, 바로 치울게요!”

리카가 허겁지겁 말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치우다 보니, 리카의 손등에 튕겨 말 한 마리가 성필의 발 앞으로 날아갔다.

백의 퀸이었다.

리카가 화들짝 놀라면서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전에, 성필이 퀸을 주웠다.

“체스 둘까?”

“하, 하이(네)?”

“리카, 체스 둘래?”

“…….”

리카는 성필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와 다르게 따스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리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필이 권한 것이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을 바닥에 마주 보고 앉아 체스를 두기 시작했다. 리카는 양보하겠다면서 성필에게 백을 맡겼다.

백이 선이었다.

제한 시간도 없는 경기인데다가, 리카는 오랜만에 체스를 두어 장고(長考)하는 일이 잦았다.

성필은 머리를 쥐어 짜내는 리카를 향해 툭하고 말을 던졌다.

“리카, 고마워.”

“뭐가 말인가요?”

“나 아프단 말 듣고 이렇게 찾아와준 거. 친한 친구라도 하기 힘든 일인데.”

방금까지 성필의 심중을 살필 수 없어 주눅 들어 있던 리카. 그녀의 표정에 다시 생기가 흘렀다.

“별거 아니라구요! 친구잖아요!”

“친구…… 고맙네. 나처럼 늙고 병든 사람한테도 마음을 열어주고 말야.”

“늙은 건 맞지만 병들지는 않았어요!”

성필은 픽 웃었다.

“늙은 건 맞아?”

“에에, 나이가 조금 들었다?”

“아무튼 고마워. 내가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이사님!”

리카는 성필의 폰을 나이트로 잡아내면서, 그를 크게 불렀다.

“이사님은 항상 저한테 해준 것들이 별거 아니라고 하시지만요! 저는 정말 이사님한테 많은 걸 감사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평생 이사님이 외롭고 심심하고 늙고 병들어가는 것에 회한이 몰려올 때마다, 얼마든지!”

리카는 강조하려고 일부러 말을 쉬고, 이어진 말에 강세를 주었다.

“얼마든지 놀아드리러 올 수 있어요!”

“놀아‘드리러’ 올 수 있어?”

“……놀러 올 수 있어요!”

“고마우니까?”

“하이(네)!”

언제나 보던 리카의 모습이다.

성필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주며 항상 친근하게 대해주는 아이.

‘이제 5년 남았나.’

소녀연맹, 데뷔 3년 차.

그녀들이 아이돌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간은 이제 5년도 채 남지 않았다.

성필은 그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도 즐겁다.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랄 정도로, 행복해서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끝은 찾아오는 법이다.

성필이 꾸는 꿈도 막이 내리는 날이 오겠지.

“고마워.”

“그럼 또 언제 놀러 올까요!”

“마음은 고맙지만, 앞으로 네가 고마워할 사람이야 먼지처럼 많이 나타날 거야. 리카는 별이잖아.”

별은 큰 중력을 가지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살면서 온갖 호의와 사랑에 익숙해질 것이다. 익숙해져야 한다.

“나랑만 놀아주면 어쩌려고.”

이건 성필 나름의 거리두기였다.

리카의 중력권에 익숙해져서, 언젠가 그녀를 떠나보낼 때가 오면 외로울까 봐.

그녀를 삶의 커다란 부분으로 여기며 살다가 떨어지게 된다면, 괴로울까 봐.

어린애 같게도, 성필은 장난스럽게 다가오는 그녀를 살짝 밀어낸다.

“넌…….”

“그러니까 지금 잡아야죠!”

“응?”

성필이 슬쩍 밀어내자, 리카는 그의 손을 쳐내고 당당하게 더 다가왔다.

“지금뿐이에요! 제가 박 이사님처럼 엄청 엄청 엄청 고마워할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 전!”

리카의 나이트가 성필의 진형 안으로 들어왔다.

“지…….”

리카는 목이 말랐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뿐이라구요!”

“…….”

성필은 리카에게서 체스판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깊이 들어온 리카의 나이트를 룩으로 잡아냈다.

“미들 게임 시작됐네.”

“미들 게임이 뭔가요?”

“뭔데. 체스 용어 몰라?”

“그런 걸 공부하고 하는 사람이 어딨나요! 다 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잘한다고? 실은 리카 엄청 똑똑한 거 아니야?”

“똑똑하다구요! 한 이사님의 수제자니까요! 그래서…….”

리카가 공세를 이어갔다.

자신의 병력을 몰살시킬 생각인가 싶을 정도로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잡으실 건가요!”

지금뿐.

잡을 수 있는 건 지금뿐.

아까 리카가 했던 말을 곱씹으면서, 성필은 여유운 태도를 보이며 대응했다.

“이미 잡았는데.”

성필의 퀸이 훌쩍 뛰어 리카의 진형으로 들어갔다.

“메이트.”

그에 리카의 손이 멈추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수에 얽힌 속셈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도 힘들었다.

리카가 조심스레 말했다.

“실버타운?”

침묵 속에 몇 수가 오가고.

“체크, 메이트.”

“……아앗!”

“아까 했던 말 취소. 리카 초보 맞네. 기보도 본 적 없지?”

“그런 걸 보는 쪽이 이상해요!”

“그 정도는 하니까 집에 체스판이 있겠지.”

“재미없어요! 제가 가져온 보드게임으로 해요!”

“그래.”

리카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서도 성필과 보드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그녀가 돌아간 건 3시가 넘어서였다.

장장 6시간을 성필의 집에 있던 것이다.

성필은 리카가 돌아가자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한동안 정처없이 방을 빙글빙글 돌다가, 창문 쪽으로 다가가 아래를 보았다.

리카가 쪼그려 앉아 신발끈을 묶는 게 보였다.

다시 일어난 그녀는 갑자기 위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성필을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시선에 성필이 움찔했다.

리카가 폴짝폴짝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잘 쉬셔야 해요! 허리는 큰일이니까요!”

“응. 너도 휴가 동안 다치면 안 된다.”

“아타시(저)는 어린애가 아니라구요!”

리카가 떠나갔다.

성필은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성필은 트레이닝 용품이 든 메신저 백을 집어 들었다.

나가기 전 그는 자신의 바디 프로필 앞에 섰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성필은 운동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 * *

성필은 차를 주차장에 대고 나오자마자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각은 6시 45분이다.

‘하양이가 올 때까지 15분 남았다. 다행이네, 시간 맞춰서.’

안도한 것도 잠시, 성필은 건물 문 앞의 형체를 보곤 흠칫 놀랐다.

“하양아?”

“박 이사님.”

얼마나 기다렸는지, 추위 때문에 코가 발갛게 변한 장하양이 보였다.

“오래 기다린 거야? 여기서? 연락하지.”

“아하하, 시간이 안 됐으니까요.”

“아니, 그래도…….”

장하양은 양손으로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쇼핑백의 손잡이 끈을 쥔 그녀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그녀의 태도를 보자, 성필은 그녀가 왜 굳이 집 앞까지 와서 연락 하나 없이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내가 엄청 화났다고 생각한 건가?’

그래서, 보기 무서워서 시각이 정확하게 될 때까지 기다린 건가?

아니, 기다린 게 아니라 만남을 미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춥지?”

성필은 최대한 말투를 다정하게 했다. 그러자 장하양은 움찔하더니, 털모자 아래의 어두운 얼굴을 끄덕거렸다.

“들어가자. 따뜻한 차 타 줄…… 아니다. 카페로 갈까? 맞네…….”

집으로 부를 게 아니라, 애초에 다른 장소를 찾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장하양과 통화하던 순간 갑자기 리카가 찾아와서, 성필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방문을 수락해버렸었다.

“아뇨. 이왕 왔고, 이사님 편하시게 이사님 집으로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으, 그럴래?”

결국 성필은 장하양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불을 켠 성필은 외투를 벗으면서 말했다.

“하양아, 일단 안쪽에 편히 앉아 있…….”

“리카 왔었어요?”

“어?”

성필은 귀신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그가 천천히 뒤로 돌아보았다.

장하양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리카……?”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성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카의 흔적을 느낄 법한 건 아무것도 없다.

바닥을 훑던 성필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다시 장하양을 쳐다보았다.

장하양이 코를 잠시 찡그리곤 말했다.

“리카 향수 냄새가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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