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07화 (407/760)

407화

“정지음은 백설하가 택한 곡에 부정적인 입장이란 거지.”

“예.”

홍규헌은 정지음이 미는 ‘우파루파’와 백설하가 미는 가곡을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첫 번째 회의 이후 시간이 꽤 흘러 ‘우파루파’는 곡으로서 거의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거기에 정지음의 보컬 라인 가이드도 들어가 있었다. 당연히 그의 보컬 실력은 형편없어서, 단순히 음정을 표시하는 기능 외엔 하지 못했다.

성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음이가 따로 가이드 보컬을 써서 가이드를 붙일 거라고 합니다.”

“백설하한테 안 맡기고? 여태까지 가이드는 백설하한테 맡겼잖아.”

“아마…… 설하한테 숨기고 싶은 것 같아요.”

A&R팀의 곡 선정 회의는 이렇게 진행된다.

일단 A&R팀이 1년 넘게 가로 엔터가 모아두었던 곡 전부를 재검토한다. 지루하고도 힘든 작업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곡을 10개 이하로 추려서 어느 정도 완성된 형태까지 다듬는다.

그리고 소녀연맹 멤버들과 각 팀장들이 참석한 최종 회의에서 표결을 붙인다.

결과는 임원 회의로 올라온다.

“중간에 저희 회사 직원 전체 투표도 할 거잖아요. 그전까지 숨겨서…….”

“정지음이가 우파루파에 엄청 꽂혔나 보네. 진검승부라도 벌일 기세야.”

“진검승부, 그러게요. 그런 느낌이네요.”

어쩌면 정지음은 백설하에게 반감마저 가진 게 아닌가 싶었다.

‘지음이 마음도 이해가 가.’

본인이 직접 만들고 자신 있게 선보인 곡을 백설하가 극구 거부하니, 호승심이 일어날 만도 하다.

어떻게든 백설하의 입에서 ‘좋네요’란 말이 나오게 만들 기세였다.

게다가 백설하의 태도는 정지음의 반감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설하는 우파루파를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니까.’

가볍다고 할까, 장난스럽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장난스러운 곡이 소녀연맹에게, 자신에게 어울릴 리 없다면서 아주 학을 떼고 있으니.

“그런데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는 백설하한테 프로듀싱 과정을 총괄하게 하잖아. 백설하는 명분이 있어. 걔가 계속 거부하면 정지음도 수가 없을 텐데.”

“아뇨, 이번 경우는 좀 달라요.”

“달라? 박 이사가 프로듀싱 했을 때랑은 다르단 뜻인가?”

“네. 설하가 처음으로 잡은 목표, 그러니까 프로듀싱의 시작점으로 잡은 건…….”

바로 곡을 찾는 것이었다.

좋은 곡 말이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지만, ‘롱 포’와 ‘아라베스크’까지 이르는 기간 동안 변화가 있었잖아요.”

“소녀연맹 세계관이구나.”

“예.”

일단은 곡이 좋아야 한다.

하지만 소녀연맹의 컴백들을 준비하면서 성필이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세계관이다.

소녀연맹이 만들어온 색깔 말이다.

곡이 좋더라도 소녀연맹의 색깔에 맞아야만 한다. 그게 성필이 제시해온 방향이기에, 방향과 맞지 않는 곡이 나타났을 때 쉽게 쳐내는 게 가능했다.

“설하는 컨셉을 여름으로 잡은 순간부터 사실상 백지상태에 놓이게 됐어요.”

그 가운데 곡을 먼저 찾는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즉, 그녀는 좋은 곡이 나타난다면 본인의 비전이 어떻든 결심을 접어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름 컨셉에 맞으면서 히트할 곡이 나온다면, 그에 반대할 거리가 무엇이 있을까.

컨셉이 ‘여름’이 된 순간부터 소녀연맹이 쌓아둔 세계관, 색깔과 결별을 선언했으니.

“게다가 설하도 흔들릴 거예요. 직원 투표에서 표차가 상당하기라도 하면…….”

“박 이사도 ‘우파루파’를 마음속에 넣고 있는 거야?”

“지금은요. 그런데 애초에 설하가 고른 곡은 완성도 아니고, 아직 살펴봐야 할 다른 곡들도 많아요.”

백설하는 이제 천천히 곡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정지음은 ‘우파루파’를 거의 완성했음은 물론이고, 비주얼 팀과 함께 다음 작업까지 고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하는 아직 싱글로 갈지 미니 앨범으로 갈지도 결정 못 했어. 만약 설하가 싱글을 택한다면, 소녀연맹이 고를 수 있는 곡은 단 하나.’

정지음은 ‘우파루파’를 거의 완성한 현재는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백설하가 미니 앨범으로, 즉 여러 곡을 발표할 거라고 결정하자마자 정지음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지음이 얘도 어지간히 확신이 있는 모양이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합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정지음은 보고 자란 프로듀서가 성필이었다.

성필이 그를 직접적으로 가르치진 않았지만, 정지음은 성필이 해왔던 모든 프로듀싱 과정을 달달 외우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더해 성필의 추진력마저 배워버렸다.

“박 이사 생각은 어때?”

“어떤 거요?”

“싱글인지, 미니 앨범인지.”

“그건 설하가…….”

“애들한테 아티스트로서 자율권을 주려는 생각은 훌륭하지만.”

홍규헌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시작되고 며칠간 느껴왔던 답답함을 조심스레 표현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지점이 있어. 박 이사도 알지?”

“…….”

“방향을 유도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역시 사장님도…….”

“미니 앨범으로 가야지. 백설하가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드러낼 전기(轉機)이긴 해. 아마 백설하는 지금 정신이 없겠지. 하나에 집중하고 싶을 마음이 들 만도 하고. 곡 하나에 매달려서 결국 싱글이 될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연맹이 여름에 컴백한다고 하면, 저희 애들의 공백기가 1년 6개월에 이르러요.”

소녀연맹의 마지막 앨범은 거의 1년 2개월 전에 나온 마당이다.

일본에서 발매했던 앨범은 사실상 리패키지 앨범이나 다름없다.

콘서트니 뭐니 바빴지만, 소녀연맹은 사실상 1년 넘는 공백을 유지하는 중인 것이다.

회사의 재정 상황은 획기적으로 성장했지만, 그것도 소녀연맹의 지속적인 활동이 보장되어야 유지될 것이다.

“싱글 하나 내는 건 인민이들한테도 못 할 짓이죠.”

“그래, 최소한 미니 앨범으로 가야 해. 박 이사, 올해 프로듀싱 프로젝트는 백설하가 맡는 게 전부가 아니야.”

성필은 여전히 메인 프로듀서이며, 그에 관련된 일을 진행 중이다.

“일본 컴백. 하반기의 한국 재컴백. 콘서트 공연으로 전환할 팬미팅 이벤트. 그리고 두 번의 한국 컴백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면 다시 콘서트.”

백설하가 프로듀싱하는 앨범은, 올해 가로 엔터의 일정 중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백설하를 직접 관리하고 보듬어주는 박 이사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

“미니 앨범으로 해야겠죠.”

“그래, 그러니까.”

홍규헌이 단호하게 말했다.

“백설하가 곡 하나만 붙잡고 있는 걸 언제까지나 지켜볼 수만은 없어. 백설하의 곡에 팀 전원이 붙어 있는 건 낭비야.”

성필은 가로 엔터의 규모가 커진 이유를 되새겼다. 직원을 수십 명 가까이 뽑은 건 모두 이런 날을 위해서였다.

동시에 여러 앨범과 이벤트를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성필 또한 며칠 사이의 고민을 접었다.

“A&R팀을 두 개로 나누겠습니다. 곡 선정 회의까지요.”

백설하의 프로듀싱을 보조할 1팀.

그리고 곡 수급, 제작, 선정에 박차를 가할 2팀.

“2팀장은 정지음인가?”

“아니요. 지음이는 뮤직 프로듀서로서 두 팀 모두에 기여해야죠. 뭐, 그렇더라도 제가 1팀에 집중적으로 붙일 테니까 지음이는 2팀에 더 쏠리겠지만요.”

“그럼 2팀장은 누구 보고 있는 사람 있어?”

“이재호 씨요.”

“이재호면…….”

케이팝 학과 졸업.

가로 엔터 입사 이제 곧 2년.

“손 이사만 보면 꼬리 흔드는 걔?”

“아,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네요…….”

손혜빈의 충실한 심복.

A&R팀 직원 이재호.

그가 A&R 2팀의 임시 팀장이다.

* * *

가로 엔터 A&R팀 이재호의 하루는 음악으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의 스피커에 블루투스로 핸드폰을 연결하여 워터 멜론 차트를 재생한다.

씻으면서도 그 선율을 귓가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나면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선다.

“아들.”

신발을 다 신었을 때,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왜.”

“회사는 어때?”

“잘 다니지.”

“……그래.”

어머니는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자랑스러운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

‘잘 다니고 있다…….’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재호는 처음 취업에 성공하고는 이리저리 들떠 있었다. 극심한 취업난이라는데, 이재호는 전공을 살려서 간단히 취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재호가, 아들이 달라졌다.

장난끼가 많고 친구들과 술 마시러 다니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던 사람이었는데, 취업하고 나선 그 흔한 술자리조차 한번 가질 않았다.

‘일이 너무 힘든 걸까?’

간단히 말해서, 이재호는 이전보다 훨씬 무겁고 진지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어머니는 잘은 몰라도, 아들이 퇴근하고 나서도 업무와 관련된 무언가를 한단 사실만은 알았다.

그의 방에서는 어느 때곤 음악이 멈추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걱정과 함께 오늘도 아들을 배웅했다.

‘어디 보자.’

이재호는 출근하며, 해외에서 강세인 음원 스트리밍 어플인 ‘스포티파잉’에 접속했다.

그리고 팝송 차트와 최신 히트곡 플레이리스트를 쭉 훑었다. 그중 눈에 가는 건 한 번씩 들어보기도 했다.

‘요즘은 컨트리 장르가 흥하네.’

컨트리는 백인적인 음악이다. 정확하게는 미국 백인종의 음악이다.

미국은 음악 장르가 인종적으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 힙합은 흑인의 음악이며, 록은 백인의 음악이다. 이처럼 청취층이 인종에 따라 확연히 갈리는 게 미국의 특징이다.

그 사이에 위치한 게 연령대와 인종, 나이에 구분받지 않는 팝이란 장르다.

‘팝스타들도 컨트리를 시험해보는 느낌이고.’

이재호는 운 좋게 지하철에 자리를 얻었다. 그 덕에 음악을 더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었다.

‘잠깐, 이 레이블의 프로듀서로 있는 사람이…….’

가로 엔터에 입사한 후, 손혜빈에게 받은 특훈의 성과 덕에 이재호는 음악을 그저 듣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유명 가수들의 생애와 커리어, 음반사의 역사와 특징, 그에 관련된 프로듀서마저도 죄다 머릿속에 입력해두었다.

그가 음악을 듣는 행위는 대중의 시선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그야말로 A&R 중의 A&R이라 할 만했다.

이재호는 매 순간 굳은 표정으로 출근길을 걸었다.

차를 타고 출근하면 이렇게 핸드폰을 보면서 정보를 얻을 수 없기에, 굳이 출근 지옥을 감내하고 있기도 하다.

굳은 표정일 수밖에 없고,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재호는 사무실 앞에 서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저기서 인사가 돌아왔다.

이재호는 본인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A&R팀 파티션 내에 출근한 인원들을 확인했다.

A&R팀 중에선 이재호의 출근이 가장 빨랐다. 그는 습관이 된 만족을 느끼곤 커피를 타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안녕하세요.”

신인개발팀 신준성이 인사해왔다. 이재호도 마주 인사하곤 그의 옆에서 커피를 탔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네?”

이재호는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안 좋은 일이 있냐니.

“표정이 안 좋으시길래요.”

“제가요? 아뇨, 안 좋은 일은 없는데요…….”

그저 소녀연맹의 다음 컴백에 걸맞은 곡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가로 엔터가 여태껏 축적해왔던 곡 중, 백설하가 제시했던 ‘여름’과 ‘사랑’에 맞는 곡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었다.

어제는 샘플까지 합쳐서 30개 정도를 들어봤었다. 각각 수십 번씩 말이다.

“재호 씨는…….”

신중성이 능글맞게 웃었다.

“아침에 약하신가 봐요.”

“저요? 아침이 피곤하긴 하죠.”

“그 정도가 아니라요. 가끔 막 복도에서 혼자 웃으면서 뛰어다니고, 막 펄쩍펄쩍 뛰고 그러시잖아요. 아침에만 팍! 굳어 계신 거 아녜요?”

웃으면서 뛰어다니고, 펄쩍펄쩍 뛰고?

‘아, 손 이사님한테 칭찬받았을 땐가?’

부끄럽다.

이재호는 사람 좋게 웃기만 했다. 그러곤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질문했다.

“연습생들은 어때요?”

“흐음.”

신준성은 곧바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참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다양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희가 연습생 받은 것도 시간이 꽤 지났죠?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역시 연습생마다 주는 애정이 다르네요.”

“하하, 편애라도 하세요?”

“저 학생 때 선생님들 마음을 알겠다니까요. 잘하는 애한테 신경을 더 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할까요. 아니, 잘하는 애가 아니다.”

신준성은 자꾸만 ‘으음, 으음’ 소리를 내면서 알맞은 표현을 찾았다.

“아, 그게 보여요.”

“어떤 거요?”

“필사적…… 인 거? ‘난 진짜 아이돌 아니면 뒤가 없다’고 생각하는 애들은, 그게 보인다니까요.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눈에 불꽃이 있어요.”

“불꽃요…….”

“제가 트레이닝을 시키는 입장이긴 한데요. 애들이 하는 스케줄? 저한테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해요.”

신준성이 크게 웃었다.

“그게 보여서 또…….”

갑자기 신준성의 웃음이 뚝 멎었다.

“슬프죠. 언젠가는 몇 명 빼고 전부 보내야 하니까요. 그 안에는 ‘난 진짜 아이돌 아니면 뒤가 없다’고 생각하는 애들도 있을 테고. 애들이 성장할 때마다 보람차지만, 그게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니네요.”

“그런가요.”

이재호는 신준성이 참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 아닐까.

‘이런 사람을 씹인싸라고 하나?’

이런 성격이니, 연습생들과의 인간적인 교류가 중요한 신인개발팀에 있을 수 있는 거겠지.

두 사람은 함께 휴게실을 나왔다.

신준성은 이재호가 커피를 다 탈 때까지 기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2층으로 올라와 두 사람은 찢어졌다. 신준성은 남자 연습생 구역인 3층으로 올라가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파이팅!”

“네, 힘내세요.”

이재호는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면서 아까 신준성이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불꽃이 보인다고…….’

필사적인 사람의 눈에서는 불꽃이 보인다고 한다. 이재호도 그 불꽃을 알고 있다.

A&R팀 회의와 업무마다 눈에 불꽃을 달고 있는 사람, 바로 성필이었다.

성필은 메인 프로듀서이자, 이사이자, A&R팀의 수뇌였다. 야근의 아이콘이라고도 불린다. 그런 그는 항상 눈에 불꽃이 가득하다.

“오셨네.”

이재호는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움찔했다.

눈에 불꽃을 품은 남자, 성필이 바로 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A&R팀원들을 한데 불러 모아 놓고, 연설이라도 하려는 듯 그 앞에 서 있었다.

이재호는 시계를 보았다.

늦은 건 아니었지만, 성필과 팀원들이 자신을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절로 생겼다.

“죄송합니다…….”

낮게 사과하고 팀원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으로 가려던 순간.

“재호 씨 자리는 여기.”

성필이 이재호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옆에 세웠다. 이재호는 어리둥절하여 성필을 보았다. 그러자 성필도 이재호를 보았다.

이재호는 성필의 눈동자에 서린 불꽃을 마주했다.

“여러분, 오늘부터 A&R팀을 두 파트로 나눕니다.”

그에 이재호가 눈을 부릅떴다.

‘A&R을 두 파트로? 이런 경우는 보통…….’

하나였던 A&R팀이 두 개로 나뉘는 경우는 언제일까. 담당하는 아티스트가 여럿일 때다.

‘서, 설마 벌써 차기 그룹을 준비하는 건가!’

이재호는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난 아직 소녀연맹을 맡고 싶은데!’

혹시나 차기 그룹을 준비하는 팀으로 발령 난다면 며칠간 굉장히 우울할 것이다.

이재호는 소녀연맹의 노력과 성장을 곁에서 지켜봐 왔으니, 당연히 그녀들에게 갖은 애정도 남달랐다.

“다음 소녀연맹의 컴백은 미니 앨범입니다. 다들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알고 있을 테니 설명 생략하고. 설하가 메인으로 앉아 중점적으로 과정을 총괄하게 될 1팀. 그리고 그사이 설하와는 별개로 미니 앨범 곡을 구성할 2팀. 이렇게 나뉩니다.”

그 설명을 들은 이재호가 안도했다.

어느 팀이든 소녀연맹과 떨어지지는 않을 것…….

“2팀 팀장은 재호 씨입니다.”

…….

“……네헤?”

“다들 박수!”

A&R팀원들의 박수가 사무실을 울렸다.

그 안에서, 이재호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어, 예, 에? 저요?”

이재호.

가로 엔터 입사 거의 2년.

팀장을 달다.

* * *

“이사님 안녕하세요!”

“어, 설하야 안녕.”

성필은 백설하와의 미팅을 위해 정지음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가 자연스레 백설하의 옆에 앉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그으,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나? 아…….”

거의 울먹이면서 ‘저같이 부족한 촌부가 어찌 이런 중책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는 이재호를 달래주다 보니, 성필의 얼굴엔 피로가 묻어 있었다.

성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서 피로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굳은 표정 대신 방긋방긋한 웃음이 자리했다.

“재호 씨가 팀장 달았더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그렇구나. 대단하시네요, 20대 후반에 팀장이라뇨.”

“임시지만.”

가로 엔터의 A&R팀 중에는 전문적으로 작곡이나 뮤직 비즈니스를 배운 이들도 있다.

만약 A&R팀을 분할해서 팀장을 정해야 한다면, 그런 전문 지식을 가진 이를 팀장으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이재호는 케이팝학과란 곳을 졸업했지만, 그 학과 코스는 어느 한 곳에 전문화된 게 아니었다. 심지어 이재호는 대학에서 케이팝 댄스나 보컬도 배웠었다.

‘하지만 재호 씨는 누나의 조교…… 가 아니라, 특훈을 거쳐서 탁월한 안목을 가지게 되셨어.’

다른 팀원들과 큰 차이는 아니지만, 연차도 가장 높고 말이다.

만약 외부 전문 인사를 영입하지 않는 이상, 후일 A&R팀 분할에서 진짜배기 팀장 자리를 차지하는 건 이재호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에 재호 씨가 능력을 증명하기만 하신다면 말이지.’

이건 성필이 주는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형 일찍 오셨네요.”

정지음이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작업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익숙하게 본인의 자리에 앉았다.

“바로 볼까요?”

백설하가 고른 곡, 가제(假題) ‘애플 크러쉬’에 대한 작곡 회의가 시작됐다.

어째서 제목이 ‘애플 크러쉬’가 되었느냐 하면, 장하양이 내었던 아이디어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제목으로 붙었기 때문이다.

다들 백설하의 곡이라고 하면 ‘사과즙’부터 생각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사과를 ‘너’로 지칭하고 껍질을 벗기고 싶다느니, 즙을 짜고 싶다느니…….

‘에피타프랑 도미노를 작사한 하양이답다고 해야 하나. 사랑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라.’

정지음은 일단 여러 톱 라이너(멜로디를 만드는 작곡가)에게 의뢰했던 멜로디 라인들을 보여주었다.

오늘 아침 A&R팀이 수합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중에선 옛날에 가로 엔터가 사들인 멜로디 샘플들도 있었다.

정지음이 말했다.

“‘애플 크러쉬’는 같은 구조가 계속 반복되잖아. 이미 전에도 결론이 났지만, 같은 선율만 끌고 가는 건 확실히 독이야.”

백설하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리듬과 코드는 두고 보컬 라인에 변화를 주는 쪽으로 정했는데, 이렇게나 많아.”

정지음이 노트북을 백설하와 성필 쪽으로 돌렸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만든 멜로디 라인이 수십 개나 있었다.

이제 이 멜로디들을 알맞은 부위에 오려 붙이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도입부 A에는 이것, 중간부 B에는 이것, 중간부 D에는 이것저것, 이런 식이다.

이렇게 되면 한 곡에만 작곡가가 몇 명씩, 많으면 십수 명도 될 수 있다. 자본의 결정체라고 할 만한 작곡 방식이었다.

“설하야, 해보자.”

“네.”

여러 작곡가들의 멜로디를 받았지만, 합치는 작업은 소수가 해야만 한다.

곡의 감정을 꾸준하고 끈질기게 한 방향으로 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여럿이서 할 수 없으며, 백설하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는 지점이다.

백설하는 기타를 들고 각 파트에 맞는 보컬 라인들을 찾아 불러보았다.

“여기서는 레가토(음을 끊지 않고 이어서 연주하거나 부르는 것)로 해볼게요.”

“레가토? 노래로?”

정지음이 의아하단 듯 반문했다.

“이상한가요?”

백설하는 고슴도치가 몸을 웅크리듯이, 평소보다 더 날 선 어투로 답했다.

정지음은 ‘음……’ 대답을 미루면서 미간을 좁혔다.

“아니,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서. 한번 불러줄 수 있어?”

“네.”

백설하는 브릿지에 한 멜로디를 두고 레가토로 불러보았다.

짧은 음을 계단처럼 가파르고 빠르게 오르내리는 그녀의 창법을 듣자 정지음이 눈을 크게 떴다.

‘와, 설마 이런 식으로…….’

확실히 기량의 범위가 넓은 보컬리스트는 곡을 보는 게 다르다. 정지음은 새삼스레 백설하에게 감탄했다.

작업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백설하는 정지음과 성필의 도움을 받아서, 트랙으로 이루어진 백지를 멜로디로 채워갔다.

어느 정도 결과물이 나왔을 땐 3시간이 훌쩍 지나간 뒤였다.

백설하는 완성된 것을 쭉 허밍으로 불러보았다. 시연이 끝나자 성필이 박수 쳤다.

“와, 이거 진짜 좋은데? 설하 최고다.”

“헤헤, 자본의 힘이죠 뭐…….”

온갖 작곡가들이 혼신을 기울여 만든 멜로디들을 가져다 붙였다. 하나하나가 보석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이었으니, 안 좋을 수가 없다.

물론 아무렇게나 만들면 누더기가 되는 게 당연하다.

이토록 곡이 미려한 형태를 띤 건 두말할 나위 없이 백설하와 정지음의 실력 덕이었다.

“이제 점심시간이네. 애들 기다리겠다, 빨리 가봐.”

“아…….”

백설하는 살짝 아쉬운 티를 냈다. 작업을 더 이어 나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기타를 내려두곤 두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고 작업실을 떠났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정지음이 입을 열었다.

“형, 이거 좋은데요. 좋긴 한데…….”

“너도 느꼈구나.”

“느꼈…… 느낀 건 설하가 멜로디 처음 골랐을 때부터 그랬어요.”

“네가 설하한테 요구한 게 이거였잖아.”

정지음은 ‘우파루파’를 밀고 있긴 하지만,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를 무시한 건 아니다.

그는 백설하에게 협조적이다. 그렇기에 백설하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애플 크러쉬’를 진지하게 민다면, 반드시 이 조건을 지키라고 말이다.

“전 파트의 하이라이트화(化).”

곡의 모든 파트가 하이라이트처럼 강렬하게, 그리고 지루한 부분이 없을 것.

그게 정지음이 내건 조건이었다.

아이돌의 곡은 기본적으로 댄스곡이다. ‘애플 크러쉬’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AAA구조의 곡을 댄스곡으로, 여름을 형상화한 청량하고 신나는 곡으로 만들기 위해선, 모든 파트가 하이라이트처럼 강렬해야 하는 게 필수조건이다.

이건 일반적의 구조의 곡보다 만들기 더 까다롭다.

‘모든 파트가 하이라이트와 같은 강렬함을 가진다는 건, 역으로 생각해서 모든 부분이 크게 눈에 띄기 힘들다는 뜻이니까.’

곡의 하이라이트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인 대비(對比)를 사용하는 게 불가능하다시피 하다.

장점이 있지만 까다로운 방식이다.

“제가 요구한 거긴 한데요, 설하가 곡 디자인한 것 좀 보세요.”

성필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거 설하가 부르니까 되는 기교들 아니에요? 아니, 애들도 되긴 되겠는데…… 그냥 설하 열화판이잖아요. 차라리 설하 솔로곡인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지음은 성필의 눈치를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돌이 쓸 수 있는 장점, 개성적인 파트 배분이 나타날 수 없어요. 이건 그냥…… 설하 노래예요.”

“그렇게 생각해?”

“……무슨, 네?”

“지음아.”

성필은 작곡 프로그램에 떠오른 ‘애플 크러쉬’의 노트들을 보았다. 그리고 만지면 음악을 느낄 수 있다는 것처럼 화면을 쓸었다.

“설하가 애들한테 어떻게 불리는지 알잖아.”

“‘쌤’이요?”

“맞아. 설하는 애들의 보컬 트레이너야. 너보다 훨씬 더 애들의 음역대와 노래하는 습관, 강점을 더 잘 알고 있어.”

그건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지음은 순간 욱했다.

뮤직 프로듀서인 정지음은 소녀연맹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성필이 예시로 들었던 음역대, 습관, 강점, 거기에 더해 약점까지도 모두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백설하가 정지음 자신보다 그걸 더 잘 알고 있다고…….

“정확히는, 네가 보진 못하는 부분을 볼 수 있어.”

“그래도 방금 설하가 찍은 ‘애플 크러쉬’가 애들이 소화 못 할 수준이란 건 맞잖아요? 형, 지금 우리가 준비하는 게 여름 컴백 앨범만이 아니잖아요.”

일본 컴백.

팬미팅 콘서트.

하반기 컴백.

그에 이은 콘서트 투어까지.

“형은 애들 기량 향상을 고려하는 거 같은데, 저희가 만족하는 퀄리티까지 도달할 시간이…….”

“너 애들이 지금 어떻게 연습하는지 본 적 없지?”

“…….”

그 순간, 정지음의 머릿속에는 신인개발팀 신준성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옛날에 마주쳤을 당시 그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가끔은 연습생 애들 평가도 보러 와주세요. 미래에 PD님이 프로듀싱하실 애들이잖아요. 애들도 동기부여가 더 될 거예요.’

정지음은 당시에는 ‘예’라고 답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정지음이 뮤직 프로듀서로서 바라는 건, 연습생이 완전히 성장한 후의 모습이었다.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디폴트값만을 원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소녀연맹처럼…….

“보러 가자.”

“지, 지금요?”

“응.”

성필이 정지음을 이끌었다.

정지음의 작업실인 지하로부터 1층으로, 그 위로 올라갔다.

어두운 작업실을 나가자 정지음이 눈살을 찌푸렸다. 식사 외의 다른 일로 작업실을 나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정지음은 성필과 함께 2층으로 올라왔다. 그 순간 복도 멀리서 조아라가 달려왔다.

“아저씨!”

조아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성필에게 달라붙었다. 성필이 기겁하면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너 뭘 원하는 거야! 나한테 왜 이래!”

“나 디저트 사줘요. 커피. 카페에. 안 돼요?”

“너 나보다 부자잖아. 그런데 내가 왜 사줘.”

“아이잉, 그러지 말구우.”

정지음이 황망하게 성필을 쳐다보았다. 비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필은 정지음보다 어이가 없으면 없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때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조아라는 안색이 안 좋아져선 성필에게 더 격렬히 치근덕댔다.

성필이 기절할 것처럼 학을 뗐다.

“너 야 네가 나한테 몸 부빈다고 내가 넘어가거나 좋아할 거 같……!”

어? 진짜 어? 좋아할 거 같? 어? 파악 씨! 어? 반응이나 할 거 같? 어? 확 씨! 어?!

“내가 살게요! 내가 사면 갈래요? 아저씨 먹고 싶은 거 내가 다 사줄게요!”

“형…… 나 진짜 형 존경했는데…….”

“아니야 임마! 우리 아라 진짜 왜 이래!”

“우리 아라……?”

“아, 아니 아라! 지음아 아라 얘가 왜 이러는지 나도 진짜 모르겠다!”

성필이 조아라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냈다. 그러고도 안 떨어지려고 해서, 성필은 그녀의 얼굴도 밀어내야 했다.

“아저씨 제발 나 좀 가져요!”

“뭐?!”

“아니, 가지고 나가……!”

“아라야.”

모퉁이에서 을씨년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아라가 흠칫 어깨를 떨며 뒤를 보았다.

미소 짓는 백설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가긴 어딜 가? 빨리 와.”

“어, 으어…….”

“연습해야지?”

조아라가 성필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쌔, 쌤이 우리한테 뭐 시키는 줄 알아요? 뭔 우리가 절대음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춤추면서 음 말하면 그 음을 낼 수 있을 때까지 퇴근 안 시키겠……!”

어느새 다가온 백설하가 조아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건 인권유린이야아아아아아앗!”

백설하는 성필과 정지음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조아라를 구속하여 저 멀리 사라졌다.

정지음은 넋이 나가 조아라가 사라진 자리만 바라보았다.

“지음아, 봤지?”

“…….”

정지음은 답하지 않았다.

조아라의 비명만이 복도에 남아 처량함을 배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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