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웨벡스 사무소 소속 걸그룹 에스타스.
그 리더인 유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거리의 활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좌우로 늘어선 건물의 사이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고, 그 중심이 자신인 듯했다.
유미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보았다.
카메라와 촬영 스태프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히무라가 기획한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 촬영 때문이었다. 오늘은 유미의 하루를 기록할 예정이었다.
“아사쿠사에 오셨네요.”
제작진이 묻자 유미는 그동안 갉고 닦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아사쿠사로 놀러 오는 거 좋아해요.”
괜히 이상한 컨셉을 잡는 게 아니었다.
유미는 정말 아사쿠사로 자주 놀러 오곤 했었다.
할아버지가 기모노 장인이셔서, 어릴 적부터 전통 옷과 친한 유미였다.
아사쿠사는 특유의 전통적인 분위기 탓인지 외국인 관광객이 자주 들렀다. 기모노 입기나 일본 전통 화장 체험장이 많아서, 유미는 그런 곳에서 기분전환을 하곤 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기억을 나름대로 즐겁게 기리는 방법이었다.
“어때요?”
유미가 가게에서 기모노를 입고 나타났다. 제작진들은 그녀의 활기찬 분위기에 자연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이후로도 기념품 가게에서 이상한 조각이나 인형을 둘러보거나, 외국인과 사진을 찍거나, 충동적으로 쥘부채를 사기도 했다.
어느새 노을이 졌다.
지하철에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유미에게, 제작진이 말했다.
“에스타스가 된 지 시간이 오래 지났어요. 아직도 아이돌이 되고 싶으신가요?”
“네.”
유미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그리고 살짝 틀리셨어요.”
“네?”
“아이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계속 아이돌로 살고 싶어요. 저는 지금도 아이돌인걸요.”
“아, 죄송합니다.”
질문한 제작진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유미는 괜찮단 뜻으로, 그녀 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보였다.
“기회가 있길 바라요. 꿈이니까요.”
“왜 아이돌이 되고 싶으셨어요?”
“‘센트’ 선배님들 때문에요.”
걸그룹 ‘센트’는 유미가 태어나던 해에 결성됐다. 그리고 아직도 활동하고 있으며, 수년 동안 걸그룹 브랜드 랭킹 1위를 차지하는 정점이다.
멤버 전원이 중학교 1학년, 2학년에 데뷔하여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저한테는 정말 아이돌이에요. 우상. 제가 어릴 적에 ‘센트’ 선배님들 콘서트 간 적 있어요. 반짝이는 옷을 입으시고, 과장이 아니라 정말 LED로 반짝였어요! 그런 옷을 입고 춤을 추시는 게 정말 멋져서…… 저도 꼭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장기간 방치된 상황이지만 말이다.
일반적인 기획사였으면 버려졌다고 생각해서 제 발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유미가 소속된 곳은 웨벡스였다.
일본 굴지의 대형 기획사다.
제 발로 나가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히무라가 약속해주지 않았던가. 반드시 컴백시켜 주겠다고 말이다.
“저, 꼭 선배님들처럼 빛날 거예요.”
여느 아이돌이나 가지고 있는 이야기다.
어떤 선배님을 동경하여 아이돌이 됐다는, 흔하디흔한 이야기.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동한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청춘. 그녀들의 꿈이 시작됐을 때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니까.
중간에 제작진과 찢어지고 유미는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는 트잇터에 ‘에스타스’를 검색했다.
‘죄다 옛날 트잇뿐…….’
활동도 하지 않으니 당연했다.
유미는 새삼스레 실망하지 않았다.
‘이젠 아닐 거야.’
에스타스는 컴백한다.
히무라가 드디어 약속을 지킬 의향을 내비쳤다. 오늘의 촬영도 그 연장선이다.
‘반드시 빛나는 아이돌이 될 거야.’
우상인 ‘센트’처럼, 유미 또한 영원토록 정상에 서서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될 것이다.
다음 날.
유미는 오랜만에 멤버들과 회사에서 만났다. 오랜만이라 해도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얘들아, 오늘이야. 마지막으로 맞춰보자.”
멤버들의 눈에도 유미와 같은 열정이 일렁였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병아리들이다. 그런 멤버들을 보며, 유미는 책임감을 느꼈다.
“에스타스 파이팅!”
그렇게 연습이 시작됐다.
오늘 그녀들은 본격적인 방송 촬영을 시작한다. 방송의 이름은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이다.
그녀들이 컴백까지 이르는 과정을 매주 방영할 것이란 모양이다.
오늘은 그 시작이다.
‘소녀연맹의 프로듀서, 파쿠, 파쿠, 파, 파쿠…… 프아, 박 이사님이 오신다지.’
옛날의 유미는 소녀연맹을 증오했다. 그녀들이 에스타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마음 따위 없다.
히무라는 에스타스의 컴백이란 약속을 지킬 테니까.
‘실장님이 우릴 버린 게 아니었어.’
거짓말이라고 여겼던 때도 있었다.
‘우린 버림받지 않았어.’
그러나 이제 유미는 히무라를 전적으로 신뢰할 것이다.
‘나는, 버림받지 않을 거야…….’
유미는 성인이다.
곧 있으면 만 20살이다.
요즘 시대 일본의 아이돌은 20살이 넘으면 은퇴를 고려한다. 누가 뭐래도 일본 아이돌계에서 최고의 스펙은 젊음이니까.
물론 20대 전반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예외도 있지만, 예외일 뿐이다.
아무리 큰 팬덤을 쌓았더라도, 나이와 함께 스러지는 게 순리다.
유미는 그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공할 거야.’
소녀연맹처럼, 유미와 에스타스는 성공할 것이다.
저녁.
유미는 멤버들을 이끌고 연습실로 들어섰다. 연습실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와 촬영 스태프, 그리고 성필과 리카가 있었다.
리카는 유미와 에스타스를 보자마자 격렬하게 손을 흔들었다. 유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만 꾸벅 숙였다.
‘선배님…… 은 아니지. 우리가 먼저 데뷔했잖아. 우리보다 훨씬 훨씬 유명하긴 하지만…….’
소녀연맹이 일본에 활동할 때, 유미는 가끔 그녀들과 마주치곤 했었다.
그럴 때면 유미는 귀신이라도 본 듯 뒤로 돌아 모른 척 도망갔었다.
부끄러웠으니까.
소녀연맹을 볼 때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것처럼 심장이 쪼그라든다.
그 소녀연맹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인다.
‘아니, 신경 써야 할 건 저쪽.’
파쿠, 파쿠, 프아, 파쿠, 프, 바, 박 이사.
‘박 이사님.’
아무것도 없던 중소 기획사에서 소녀연맹이란 전설을 만들어낸 프로듀서.
그가 기획했던 소녀연맹의 3부작 앨범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 소녀연맹을 케이팝씬의 명실상부한 별로 만들었다.
소녀연맹은 3세대 선배들의 뒤를 이어 케이팝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 전설을 저분이 만드셨어.’
그런 성필이 자신들을 평가한다.
히무라가 말했었다.
에스타스의 목표는 케이팝 그룹과 같은 무결성이라고 말이다.
회사의 사정으로 기량이 갖춰지기 전에 데뷔하게 되고, 성적이 좋지 않아 거의 묻히게 되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에스타스에겐 기회가 있다.
가로 엔터와의 협업이 그 증거다.
“에스타스입니다.”
유미와 멤버들이 성필과 리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성필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겠습니다.”
유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네!”
지금 이 순간, 에스타스의 전설이 시작된다.
* * *
“정말 아이돌이 되고 싶으신 거 맞습니까?”
유미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바닥으로 점이 툭툭 박히는 게 보였다. 그 점이 계속해서 늘어난다.
곧, 유미는 자신이 흐느끼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물론 알겠습니다. 여러분이 전하고픈 에너지, 힘, 젊음. 저는 아이돌이 팬에게 전달해야 하는 건 그런 긍정적인 힘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그에 관해 고민하고 있단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 멈추었다.
유미에겐 무슨 일인지 보려 고개 들 용기가 없었다.
아마 한숨이라도 쉬었던 것이겠지.
지금도 충분히 비참하다.
성필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서 더 비참해질 생각 따윈 없었다.
“아이돌의 최소 조건조차 없다고 판단됩니다. 춤과 노래요. 아이돌은 이름이 아이돌이지, 댄스 가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저는, 여러분의 퍼포먼스에서 프로다운 면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방과 후 동아리 수준이에요.”
송곳이 거듭해서 유미의 심장을 찔렀다.
더는 떨어질 곳도 없겠다 싶었다.
“연습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더 떨어질 곳이 있었다.
유미는 직감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성필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도 ‘소녀연맹 비긴즈’를 보았다. 소녀연맹이 뼈를 깎는 트레이닝을 거쳐 데뷔했단 것을 안다.
그런 노력에 익숙해진 인간이, 오랜 공백기로 느슨해졌던 에스타스의 트레이닝에 만족할 리 없지 않은가.
“됐습니다. 그만하죠. 리카.”
성필이 리카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엔 유미도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아이돌이 어떤 평가를 내릴 지 궁금했다.
그때 유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이, 이거 냉탕 온탕 작전 같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성필의 평가는 너무 냉혹했다.
에스타스가 그 정도로 못 했을 리 없다.
‘그, 그래. 그럴 거야.’
굿 캅 배드 캅 작전이다.
그렇다면 리카는 에스타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에에…… 솔직히 평가라고 할 게…… 평가할 만한 게…….”
유미는 충격받았다.
리카의 표정 때문이었다.
리카는 정말, 거짓 한 점 없이 어이없어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말에는 과장이 없었다.
“평가할 만한 게 없는…… 그렇습니다.”
리카가 마이크를 놓았다.
그와 동시에, 유미의 심장도 바닥 끝까지 떨어졌다.
“추후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실 거라고 믿어요.”
그로써 끝이었다.
* * *
히무라는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성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말…….”
히무라의 머릿속엔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에스타스가 아른거렸다. 그것을 볼 땐 정말 위장이 반대로 뒤틀리는 듯했다.
히무라마저도 눈물이 찔끔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숨을 몰아쉬고, 평정을 되찾았다.
“정말, 상상 이상으로 잘해주셨습니다.”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의 목적은 팬들이 에스타스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중은 언더독의 반란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연출하기 위해선, 에스타스는 처음부터 나락으로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최종편에서 에스타스는 다시 여러분 앞에서 평가받게 될 겁니다. 장소는 연습실이 아니라 콘서트장이겠지만요.”
마치 대형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에스타스는 수백 명의 관중이 운집한 공연장에서 다시금 성필과 리카에게 평가받을 예정이었다.
그건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의 최종장을 화려하게 장식함과 동시에, 에스타스의 컴백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었다.
“처음엔 무시했던 상대가 나중에 인정하는 전개는 불타오르죠!”
리카는 히무라가 짠 판에 긍정적으로 반응해주었다.
히무라는 이 소녀가 아까 전 그토록 냉정하게 ‘평가할 게 없다’고 했던 이와 동일 인물이란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저, 그런데요.”
성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같은 게 심사 역으로 나섰어도 됐을지 모르겠네요.”
“……?”
히무라가 당황하면서 물었다.
“박 이사님 같은 분…… 무슨 뜻인지?”
“일본에서도 유명 프로듀서분들이 있으시잖아요. 음악계에서 입지가 있으신 분들이라거나요.”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면 자격이 차고도 넘칩니다.”
“그으, 그럴까요?”
“박 이사님 자신감을 가지세요! 박 이사님은 소녀연맹의 프로듀서예요! 자, 제 아이돌리시함을 보면서 다시 머리에 새기세요!”
리카는 성필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자신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봐 달라는 사인 같았다.
성필은 그녀의 얼굴을 옆으로 치우고 다시 히무라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지만요. 그리고 또, 에스타스분들은 괜찮으신가요?”
성필은 심사 이후 촬영까지는 보지 못했다.
히무라는 힘없이 웃었다.
“많이 울었습니다.”
애초에 그 장면을 찍으려 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들은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했었는데, 모두가 도전과 복수의 열의에 불타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직설적인 평가는 처음이라, 마음이 꺾일 듯한 아이도 있는 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아이돌이란 타이틀에만 만족했던 멤버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필의 비판을 융단폭격처럼 받으니, 이제 아이돌 하기 싫다며 소리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큰일이잖아요!”
“진심이겠습니까.”
“진심일 수도…….”
“제가 다 따로 깊이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그런가요.”
성필은 히무라가 알아서 잘 해결했으리라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몇 년간 붙들고 있던 아이돌이란 꿈을 면식도 거의 없는 남의 비판에 포기할 리 없지 않은가.
아이돌 하기 싫다고 소리쳤던 멤버는 아마 투정을 부렸던 것이리라.
유미를 제외하곤 전부 미성년자라고 하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후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필은 히무라의 인사를 받으며 웨벡스를 나섰다. 그의 말대로, 에스타스의 컴백이 가시권에 들어오면 가로 엔터와의 협업은 박차를 가할 것이다.
‘어쩌면 소녀연맹의 일본 컴백이랑 시기가 겹칠 수도 있겠네.’
가로 엔터가 덩치를 불린 건 웨벡스와의 협업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웨벡스가 소녀연맹의 일본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며 1억 엔의 비용을 내는 대가로, 그들은 소녀연맹의 뮤직 프로듀서와 협업을 요구해왔으니까.
‘지음이가 더 바빠지겠네.’
그때 리카가 성필의 옷 소매를 잡아당겼다.
“리카, 이런 식으로 나 부르지 마. 나랑 키도 비슷한데 굳이 소매를 당길 건 뭐야.”
“그럼 이런 건 어떤가요!”
리카의 가는 손가락이 성필의 고개를 리카 쪽으로 휙 돌리게 했다.
성필이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냥 이름 불러!”
“성필?”
성필은 그녀가 자신의 턱을 만졌을 때보다 더 놀랐다.
“뭐?”
“이름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이름 불렀어요!”
“이시카와.”
“에엑?!”
“예의를 지키지 않는 아이는 나와 친구가 될 자격이 없다.”
“손나(그런)!”
“이시카와, 가자.”
“그만하세요!”
“이시카와, 빨리 와.”
“그만하라구요!”
“이시카와, 바쁘니까 어서. 한국 가야지.”
“그만해요오오오!”
리카를 놀리며 싱글벙글 앞서가던 성필은, 그녀의 울분에 찬 외침에 화들짝 놀랐다.
돌아보니, 리카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씩씩대면서 성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성큼성큼 성필에게 다가왔다.
“이시카와라고 부르지 마세요!”
“어, 어어…….”
성필은 그녀가 왜 이렇게 화내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래도 리카가 화내는 것을 보니, 자신이 뭐라도 잘못을 했겠지 싶어서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
“……흥!”
리카가 고개를 홱 돌리며 삐친 티를 냈다.
“에이, 리카 왜 그래애. 내가 미안하다니까아.”
성필이 손을 비비면서 그녀에게 굽실거렸다.
“흥!”
그러자 리카는 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구, 아!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파인트로 시켜서 배 터질 때까지 먹자!”
“안 돼요!”
아이스크림을 거절해?
이시카와라고 부른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곧 컴백이니까요! 체중 관리해야 해요!”
“아, 맞네.”
“프로듀서면서 그런 것도 모르시나요! 기분 풀어주겠답시고 아무거나 들어주면 안 돼요!”
왠지 모르겠지만, 성필은 리카에게 또 혼나고 있었다.
이상하다.
보통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하면 다들 좋아하던데. 세상에 아이스크림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니.
“아라쨩이 디저트나 밥 사달라면서 조른다고 들어주시면 안 돼요!”
“응…….”
“하양 언니가 블루레이 재생기가 고장 났다면서 박 이사님 집에 가겠다고 해도 거절하셔야 해요!”
“응…… 응……?”
“아름이가 업어달라고 아무 데서나 업어주면 안 돼요! 업는 게 아니라 특히 앞으로 안아주는 건 정말 하면 안 돼요!”
“으음……?”
“쌤이 가사가 잘 안 떠오른다면서 응접실로 끌고 들어가도 가면 안 돼요!”
“그건 가야지.”
“마지막으로!”
유치원생 혼내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던 리카는 어느새 표정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저를 이시카와라고 부르시면 안 돼요! 박 이사님은 아타시(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리카라고 부르셨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거 실례였지?”
“마아(뭐어), 한국에선 다들 리카라고 불렀으니까요! 일본에서나 실례죠!”
“오히려 이시카와라고 부르면 예의 차리는 거 같아서 좋지 않아?”
“아니요!”
리카가 선언했다.
“아타시(저)는 리카예요! 앞으로도 리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그래서 왜 화냈던 거야?”
“그것도 모르고 사과하신 건가요! 가벼워요! 델리케시가 없어요!”
“그러니까 알려줘.”
“숙제예요!”
성필은 고민해보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 이사님한테 여쭤봐야겠다.’
“자, 이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죠!”
“안 먹는다면서.”
“폼 잡으려고 한 말이었어요! 박 이사님만 잊어주시면 없던 일이 돼요! 아, 그래도 파인트는 너무 많으니까 싱글콘으로 사주세요!”
“내가 사?”
“벌이에요!”
그래.
아직도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카가 화를 냈으니 자신이 잘못한 거겠지.
“리카가 화 풀어주면 뭐든 사주지.”
“특별히 풀어드릴게요! 가죠!”
둘은 나란히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박 이사님! 이번에 어떤 아이돌 선배님 뷔라이브를 봤는데, 회사 대표님이랑 말을 놓으시더라구요! 나이 차이도 10살 넘게 나는데요! 친구 같았어요!”
“아, 그 대표님 나도 알아. 근데 이해가 가는 게, 그 아이돌분이 그 회사 뿌리부터 기둥까지 다 세웠거든. 동고동락하면서 세월을 초월한 친구가 된 거지.”
“어이 성필!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하지만 우린 아직 아니다.”
“손나!”
어? 뭔가 허전한데…….
아!
“손나(그런)!”
“왜 두 번 말해?”
“그럼 언제 말 놓고 성필이라고 부를 수 있나요!”
“가로 엔터 신사옥 지어주면.”
“맡겨두세요! 3년 이내에 번쩍이는 빌딩으로 다 함께 이사하게 해드릴 테니까요!”
“……리카.”
“하이(네)?”
“아까 했던 반말 다시 해줄 수 있어?”
“에에, 그런 취향이셨나요. 못 해드릴 것도 없죠! 어이 성필!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성필이 큭큭 웃었다.
리카는 신나서 계속 반말을 썼다.
“어이 성필! 밥 줘! 집 줘! 출근할 때 배웅해줘! 아침엔 된장국이 좋아!”
성필은 거리가 다 울리도록 큰 웃음을 터뜨렸다. 리카도 싱글벙글 좋아했다.
안타깝게도, 성필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노아 생각나네.’
글로브 멤버 노아.
그녀의 말투가 지금의 리카와 비슷했었다.
‘어이 박 팀장! 물 어딨나다!’
물론 리카보다 훨씬 어눌했지만 말이다.
‘언젠가…….’
같은 회사의 식구로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
아니, 꼭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 * *
“박 이사님, 제가 가사 쓰는 데 막혀서. 잠시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당연하지.”
성필은 흔쾌히 백설하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녀와 함께 응접실로 가려는데, 근처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보니 생수병을 들고 연습실로 향하던 리카가 있었다. 그녀가 성필을 지긋이 보고 있었다.
“리카?”
“말이 씨가 된다더니, 사실이었네요.”
리카는 과장되게 한숨을 쉬면서 연습실로 향했다. 왜 저러나 했더니, 이전에 일본에 갔었을 때 했던 말 때문인 듯했다.
자신을 이시카와라 부르지 말라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행동으로 멤버들을 예시로 들었었지.
그중에는 ‘백설하가 가사 쓰는 데 도움을 달라며 응접실로 가자고 해도 따라가지 말 것’도 있었다.
성필은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는 그의 시선을 받자 큰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리고 시선이 이어지자 수줍게 웃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왜, 왜 그러세요……?”
“아니야. 가자. 어디가 막히는데?”
“그게요, 제가 앨범 컨셉으로 정한 게 사랑의 기…….”
“형!”
그때 민경섭이 헐레벌떡 성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전력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 이거 기사 봤어요?”
“뭔데 그래. 네이버나 야자수가 KS 엔터 인수하기라도 한…….”
성필의 눈동자에 경악이 비쳤다.
[석세스 엔터테인먼트 적신호? 잇따른 소속 아티스트, 배우의 계약 연장 거부. 이유는 매니지먼트 부실?]